Tuesday, November 13, 2007

Aristotle and Ethics of Character

ARISTOTLE의 윤리학

행위자의 도덕적 능력
진지하게 옳고 그름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야말로 윤리적인 존재입니다. 누군들 옳고 그름이라는 문제는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옳고 그름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얻은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전략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태도도 윤리학적으로는 일종의 윤리적인 행위입니다. 이 짧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편안하고, 즐거우며, 그리고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마 모든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구일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적인 윤리학적 논의를 살펴보면 한결 같이 행복론 (eudaemonianism)담고 있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과 행복한 삶은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의 가톨릭 윤리학자인 맥카비( Herbert McCabe)는 윤리학이란 “전적으로 네가 원하는 것을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결국 이 말은 윤리학이란 가장 자연스럽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가장 자연스러운 것, 내 적성에 맞고 내 본성에 맞아 편안한 것, 그래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행위를 찾아 하려는 것이 윤리학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여기에는 어떤 특정한 원칙이 이미 주어져 있으니 그것을 잘 찾아야 한다는 뜻이 동반됩니다. 가톨릭 신학자답게 자연적인 원리에 맞는 삶과 행위를 찾아 행하는 것이 윤리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이전에 살던 사람들, 그리고 동남 아시아의 비기독교적인 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매우 유사하지만 나름대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공자같은 사람은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은 바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매우 유사한 윤리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덕이 있고 품위 있는 인간“의 형성에 대한 교육적 관심을 깊이 가졌던 이들입니다. 윤리학적 전통에서 우리는 이들을 덕의 윤리 (ethics of virtue), 성품의 윤리 (ethics of character), 혹은 완전주의적 윤리학을 ( perfectionist ethics) 전개한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칸트가 인간이 가지는 도덕율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며 그것을 의무이론으로 밝혔던 것에 비하여 이들은 도덕적 주체인 인간 자신을 어떻게 윤리적인 존재로 교육할 것인가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교양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례한 사람이 있고, 희생적인 봉사도 마다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우 이기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평화적인 사람이 있는 데 반하여 폭력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편에는 남에게 폐가 되거나 해악을 끼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사려 깊게 헤아리는 사람이 있는 데 비하여 다른 이에게 해악을 끼치더라도 자기 욕망과 만족을 채우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칸트는 모든 인간이 합리적인 경우를 가정했지만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매우 비합리적인 이기적이며, 탐욕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도 만납니다. 따라서 “왜 이 사람은 덕스러운 데 저 사람은 사악한가?”라는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라인홀드 니버는 (Reinhold Niebuhr) 인간 개인은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덕스러운 존재일 수 있지만 사회집단은 덕스럽기 보다는 집단 이기성에 매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개인이라기보다는 무리지어 다니는 집단입니다. 개인의 사악함은 도덕적 설득을 통하여 극복될 수도 있지만. 집단의 이기성은 집단이 생산해 내는 이데올로기로 강화되어 도덕적 설득보다는 강제적 통제가 더 유효하다고 라인홀드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집단만이 아니라 개인도 사악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집단과 도덕성의 문제는 사회윤리학적인 관점에서 차후에 다루기로 하고 이 장에서는 왜 모든 인간은 각기 다른 도덕적 성품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행위자 중심의 윤리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자의 도덕성은 습관(habitus)에서 형성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어떤 행위를 반복하느냐에 따라서 습관이 형성됩니다. 합리적 사고와 판단도 중요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존중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더 선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인가에 대하여 감정이 상해 기분이 나쁘면 그것을 피하게 되고, 무엇인가 만족스럽고 좋으면 그것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인가 반복적으로 행하게 되는 삶의 원칙, 즉 반복의 원칙(repeat)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의 습관은 감정에 기초하지만 반복을 거쳐서 이성적으로 체계화 됩니다. 그러므로 이성의 능력에 의하여 길들여지고 습관화된 삶은 인간으로서 출중함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은 배부른 것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많이 먹어서 불편한 것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요즈음같이 웰빙(well being) 문화가 보편적인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이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식탐이라는 습관이 생길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이 먹어 불편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먹는 것을 이성적으로 조절함으로 자신의 식습관을 가지게 됩니다. 너무 먹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아닌, 즉 거식이나 과식을 피하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 현대인들의 자기 관리를 위한 중요한 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무수한 반복적인 행위를 통하여 무엇이 가장 적절한(appropriate) 행위인지를 체득하게 됩니다. 가장 적절한 행위양식을 일러 출중함, 혹은 덕이라 불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러한 적절한 행위를 중용지도(means)라고 여기고 그것을 일러 “덕”(arete)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덕이란 좋은 습관을 의미합니다.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좋은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따라서 이렇게 좋은 성품, 혹은 높은 교양과 고결함을 가진 사람은 어느 순간 문득 무엇인가 깨달아 변화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랜 삶의 행위와 사유의 습성을 통하여 형성된 인품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성품의 형성은 깨달음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진리의 현현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 일상의 삶의 궤도에서 오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좋은 성품의 형성은 바로 자신의 행위가 가장 적절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며, 이런 노력을 통하여 습관을 옷 입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좋은 습관, 곧 덕은 악덕과 구별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악덕은 부적절함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 부적절함은 절제되지 못한 습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 항상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걸핏하면 폭력적인 행위와 언사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폭력적인 절제된 행위를 습관화하기 보다는 폭력적인 감정과 행위에 더욱 습관화된 사람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습관은 어느 순간의 기지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오랜 기간 동안 무수한 반복을 통하여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국가 대표 급 선수가 강도만나 만난 한 시민을 도와 그 사람을 구하고 강도를 붙잡아 경찰에 넘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위험한 정황에서 자기가 해를 당할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도를 붙잡았으므로 그는 정의롭고 용감한 시민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바로 그 사람이 경찰에 체포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상습적으로 약자를 괴롭히며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특정한 행위를 들어 그를 덕스러운 사람으로 보는 관점은 이런 사례를 통해 본다면 그리 바람직 한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용감한 행위는 어느 순간의 행위가 아니라 늘 용감한 습관을 덕으로 형성한 이들에게서 찾아지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을 특정한 행위를 보고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의 습관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4대 덕목을 이런 관점에서 젊은이들에게 반복적으로 습관화하는 교육을 제창하였고, 이를 그 당시 귀족들의 교육이론으로 적용하였습니다. 여기서 귀족주의(aristocracy)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의 도덕적 의무를 이르는 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se)도 일면 이런 성품의 윤리의 중요성을 지시하는 말입니다. 돈과 권력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에 버금가는 높은 품위와 교양과 도덕성이 수반하지 않으면 사회적 존경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지요.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특권을 가진 귀족들에게 요구되는 높은 교양과 덕은 깨달음의 차원이 아니라 습성화된 성품의 차원에서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덕의 습관과 더불어 덕의 중요성을 깨닫는 일도 중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반복적 습관이란 인식론적 차원보다는 실천적 차원에서 얻어지는 덕을 의미합니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습관화된 덕은 모든 교육구조에 적용되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는 무수히 반복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정례화된 종교적 제의나 기도에도 적용되었습니다. 특히 카톨릭교회는 말씀에 의한 깨달음보다는 반복적 행위의 습관화된 신앙생활을 중시 하였는 데 이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이론을 받아들여 신자들의 삶에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여 개신교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주의적인 깨달음의 종교라는 측면이 강해 덕보다는 믿음을 더욱 강조해온 전통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덕과 성품을 쌓기 위한 노력에 소홀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갑자기 회심하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사람도 한참 지나가 보면 여전히 옛사람의 습성을 가지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행복 Eudaemonia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매우 출중(excellency)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 출중함이란 덕과 성품을 이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칼이 있다면 칼은 무엇인가 자르기 위해 있는 것이므로 그 칼이 그 존재 목적에 맞으려면 날이 날카로워 잘 들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고, 그 목적에 적합한 출중함을 덕이라 본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출중함을 그의 덕론에 따라 지혜, 절제, 용기, 정의라는 네 가지를 주덕 항목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혜나 용기, 정의 그리고 절제는 습관화된 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기능에 대하여 어떤 생명의 형태라고 말한다면, 생명의 형태를 합리적인 원리들과 연계된 영혼의 능력이나 활동들의 실행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바로 좋은 사람의 기능을 일러 이러한 활동들을 잘 그리고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어떤 기능이 그것에 적절한 출중함에 따라 수행되는 경우 가장 잘 수행된다면 -- 바로 이런 전제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란 출중함이나 덕에 따라, 혹은 인간의 출중함이나 덕이 여럿 있다면 그중에서 가장 최고의 완벽한 것에 따라 그의 영혼의 능력이 실행되는 사람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의 자기 목적에 가장 기능적으로 잘 맞는 사람이 출중한 사람이며 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출중함을 가진 사람은 인간의 존재 이유요 목적이라 할 수 있는 행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덕이란 인간의 자기목적에 충실한, 즉 행복에 가장 작합한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돈을 가진다면 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돈을 무엇인가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다른 매개적 수단과는 달리 행복이란 바로 그 자체가 인간의 목적입니다. 이 목적을 얻기 위한 수단, 기능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최상의 기능이거나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덕은 가장 출중한 행위능력을 뜻하는 것이지요. 돈이나 명예나 혹은 건강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궁극적인 목적 자체가 아니라 덕을 만나야만 궁극적인 최상의 목적인 행복(flurishing)을 위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
이런 그의 생각은 플라톤의 현실과 이데아(형상)가 나누어져 영원히 평행을 이루는 추상성을 배제하고, 형상을 현실적인 존재 안에서 잠재된 씨앗처럼 보아 그 성장과정을 통하여 현실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변화의 논리를 수용한 결과입니다. 플라톤에게서는 궁극적으로 덕이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고 현실과 분리된 추상적으로 다른 세계에서 별처럼 빛나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궁극적인 이데아, 곧 형상으로서의 덕은 철학하기인, 기억과 회상의 방법으로만 겨우 희미하게 이해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우 구체적으로 덕을 실현가능한 것으로 설명 했습니다.

“덕이란 행위와 감정을 결정하는 마음의 정해진 입장으로 우리에게 상대적인 중용의 원리에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고, 바로 원리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며, 이는 다름 아니라 덕스러운 사람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덕은 그의 시대 정신에 맞는 것으로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현대적 덕스러움과는 다소 상이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덕을 지적인 것 (intellectual virtues)과 도덕 적인 것으로 (moral virtues) 대별하했습니다.

도덕적 덕은 용기 (courage), 절제 (temperance or moderation), 돈거래에 있어서의 관대 (liberality), 부유함이나 권력 앞에서의 당당함 (magnificence), 당연한 권리와 몫을 요구하는 긍지 (pride), 분노에 대한 절제로서의 유순함 (gentleness), 기꺼이 옳음을 지지하는 동의 (agreeableness), 진실함 (truthfulness) 와 유모어 감각 (wit)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지도를 이르는 덕은 세 가지 요소로 설명될 수 있는 데 그 첫째가 균형(equilibrium)입니다. 균형이 잘 잡힌 상태를 이르는 이 말은 곧 양극단으로 쳐지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옳고 그름이란 다름 아닌 균형이 잘 잡힌 상태인가 아닌가에서 결정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그 덕은 상대적인 것(reletive)으로서 주어진 정황에 따라 그 규범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1에서 9까지의 중용은 5이지만, 1에서 25까지 에서는 중용지도의 덕은 13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25까지의 수에서 잘 균형이 잡힌 덕스러운 상태를 첫 번의 경우를 원칙으로 삼아 5라고 주장한다면 25라는 전체의 수 앞에서 그것은 모자람이거나 부족한 상태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는 동식물을 바라보면서 모든 존재들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모두 동일한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런 덕의 상대성은 개별 동물이나 식물마다 생명을 존속시키는 조건들이 각기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개체 상황에서 가장 출중한 판단은 상대적이지만 가장 균형이 이루어지는 데에서 덕이 형성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덕이란 양극단 을 의미 하는 악덕 사이에(inbetween)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지나침(excess)이나 결핍 (deficiency)은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어느 경우에도 덕이 될 수 없습니다.

자발적 행위와 덕의 구조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덕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덕을 삶의 목적으로 아는 것과 그 덕을 실천 할 능력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덕에 관하여 알고 있고 이해는 하지만 실천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하다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덕을 일종의 앎의 의무 혹은 정언적으로 이미 주어진 명령으로 이해하는 칸트와는 달리 그 것을 일종의 실천 능력으로 이해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위를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자발적인 것(voluntary), 비자발적인 것(involuntary), 그리고 무자발적인 행위(nonvoluntary)가 그것입니다. 덕과 관계된 행위는 이 중에서 자발적인 것뿐입니다. 따라서 자발적인 행위만이 도덕적인 것이며, 그 결과는 행위자의 책임을 불러오게 되어 비난이나 칭송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강요된 것이나, 혹은 무의식적인 행위, 혹은 의도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행위라면 도덕적인 행위라 할 수 없습니다. 비자발적인 행위는 사람이 충분한 인식이나 정보를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그릇된 행위를 한 것이 있을 경우, 만일 그가 그런 행위를 하고서 후회를 한다면 그 경우는 비자발적인 행위이고, 만일 후회조차 하지 못한다면 무자발적인 행위로 구별될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행위의 동기와 결과에 대한 인식능력도 덕의 조건이 되는 셈입니다. 다만 현대 윤리학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행위에 대한 “자유로운 의지“의 조건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쿠스 윤리학에서 한 부분을 할애하여 용기, 절제, 그리고 방탕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용기란 전장에서 죽음을 직면한 병사들이 가지는 죽음에 대한 확신이나 공포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명예를 지키는 자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고통이나 공포 사이에 중용을 지키는 것입니다. 죽음이 불러오는 두려움에 직면하는 자세에서, 비겁함이나 공포에 질리지 않고 경솔하거나 비겁함을 보이지 않는 것이 용기입니다. 절제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소극적으로 자기욕망에 빠지지 않는 상태로서 버릇없는 아이처럼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는, 방탕한 행태와 같은 전형적인 무절제를 벗어난 상태를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정의에 대해서는 니코마쿠스 윤리학 5장에서 한 장 전체를 할애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정의는 그의 사회윤리의 근간입니다. 그의 정의론은 일반적인 보편적 정의(general or universal justice) 개념, 그리고 특수 정의(particular justice) 개념으로 나누어지는 데 일반적인 정의는 법을 지키는 일이나 다른 덕과의 관계를 지시하고, 특수 정의는 덕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두 부류로 나누어 집니다. 특수 정의란 다른 덕의 정의롭지 못한 사실을 밝히는 데 적용될 수 있는 데, 예를 들자면, 전장에서 방패를 버리고 도망하는 병사의 비겁함은 정의롭지 못한 일로서 불의한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떤 행의의 결과로 인하여 부덕함이 결과될 경우 이는 정의의 훼손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동기나 행위에 의하여 얻는 불의한 이익을 구별해 내는 데에서도 특수 정의 개념이 적용됩니다. 적진에서 부상을 당한 동료를 버리고 오는 행위는 비겁한 일이지만, 비겁함보다는 자신의 편리함이나 안전을 먼저 생각했다면(overarching) 이 경우는 불의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능력이 있음에도 그 능력을 행하지 않는 것은 단지 부덕할 뿐 아니라 불의한 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의미에서 불의한 행위와 구별 되는 특수한 불의로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아리스토톨레스의 예를 들어 부연 설명한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돈을 벌기위해 하는 간음과 욕망충족을 위한 간음이 있다면, 돈을 벌기위한 간음은 절제치 못한 행위가 아닌 불의한 행위이지만, 욕망충족을 위한 간음은 무절제한 불의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일하게 불의한 행위라 할지라도 그 의도와 동기에 있어서 한 편은 절제치 못한 부덕의 결과라면, 한 편은 부도덕한 이익관계를 추구하는 행위로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특수정의는 공정치 못한 행위를 판단하는 가치라면, 일반 정의는 덕스러움을 갖추지 못한 행위를 드러내는 판단기준으로서의 정의를 지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르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너무 많거나 혹은 너무 적게 재화를 나누는 것이 불의한 것이고, 그 중간이 공정함(fairness)이라는 규범을 만들어 냅니다. 따라서 그는 많거나 적음이 없는 평등한 재화의 분배를 일러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분배적 정의와 더불어 교정적 정의(rectificatory justice)라는 개념도 제시했는 데 이는 예컨대 재판관이 가치판단을 통하여 손실이 난 것만큼 보상하도록 함으로서 균등한 평등관계를 회복하도록 하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조망에서 본다면 일반 정의나 특수 정의라는 개념은 정의라는 커다란 의미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의 개념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더 크거나 적은 정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 덕(intellectual justice)이라는 개념아래 다섯 가지 덕을 포함시켰습니다. 지식, 예술, 분별력, 직관, 그리고 지혜 (knowledge, art, prudence, intuition, and wisdom) 입니다. 오늘날 윤리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덕으로 간주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덕에 비하여 이 덕목들은 더욱 추상적인 중용지도를 지시하는 것으로서 결핍이나 지나침은 악덕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니코마쿠스윤리학 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직하지 않은 도덕적 성품을 세 가지 들고 있는 데, 그것은 악(vice), 무절제(inconvinience), 그리고 잔인함(brutality)입니다. 그의 시대에서도 그러한 것들이 가장 도덕적 삶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잔인함은 특히 동물적인 행위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무절제는 즉각적인 쾌락을 불러오는 욕망에 동기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절제의 덕은 이성적으로 판단되어 질서지어진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무절제는 방탕함으로 이어지고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비이성적인 행태로 이끌려질 수 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즐거움 혹은 쾌락(pleasure)을 이해함에 있어서 모든 즐거움은 나쁜 것이라고 보았던 플라톤의 조카 스페우시프스(Speusippus)나 모든 즐거움은 좋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유독수스(Eudoxus)와는 달리 다소 온화한 입장을 가졌습니다.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한 즐거움은 중독으로 이끌려지거나, 온전한 성품을 이루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즐거움은 행복과는 다른 것이라고 규정 하였습니다. 쾌락이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덕스러운 행위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즐거움이나 쾌락만이 좋은 것일 수 있지만, 덕스럽지 못한 행위의 결과로서 쾌락은 해악이라고 본 것입니다.

지나침과 결핍을 피하여 중용의 도를 유지하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덕이므로 정의와 절제, 혹은 용기와 지혜가 모두 덕목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침이나 결핍은 부덕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랜 습성화된 삶의 반복을 통하여 옷입은 덕, 그것이야 말로 실천적인 능력을 가진 덕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도원적 영성이나 가톨릭 적인 영성은 이번 실천적인 덕에 뒷받침된 신앙인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개신교는 보편적인 인간의 죄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죄인이 범하는 죄의 차별성에 대한 인식에 인색합니다. 즉 모든 인간은 크기에 차이가 있을 지라도 동일한 죄인이라는 원칙에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라인홀드 니버 같은 신학자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점에서 죄의 평등성(equality of sinfulness)와 더불어 개별적인 죄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는(inequality of sinfulness) 라는 개념을 통하여 비록 죄인이지만 선한 삶을 살아가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 간의 차이를 중시 했습니다. 그의 통찰은 우리가 죄인으로서 사회안에 어울려 살면서 선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셈입니다. 비록 우리가 모두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권원의 은총을 필요로 하는 존재들 이지만 우리들 사이에는 죄의 질적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역사에 적용한다면 타락한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타락의 정도를 가늠하기 위하여 인간의 도덕적 실천 능력도 공정하게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듭 짓는 말
인류의 역사 속에서 아리스토렐레스는 덕의 윤리학을 제창한 최초의 종합적인 사상가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동양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사한 윤리적 이해를 제시한 사람은 공자입니다. 공자 역시 올바른 마음가짐과 행위를 위하여 중용의 도를 가르쳤고, 이를 위한 수신(修身)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덕의 윤리학은 선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행위자의 관념적 이해나 산술적 계산에 앞서 행위자의 도덕적 능력을 성품의 형성에서 찾는 것을 중시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 성품이란 개체인이 가진 천재적 능력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조정 가능한 중용지도를 선택하는 행위의 향방을 결정하는 습성이기도 하고, 이성적으로 잘 제어된 감정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덕을 갖춘 사람이야 말로 사회 속에서 가장 출중한 사람이며, 그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덕스러운 삶이란 특정한 일회적인 행위나 개념 파악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실천적 습관에 더욱 의존하여 지나침이나 모자람의 양 극단을 피하고 균형잡힌 삶의 감각에서 더욱 꽃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 심리학자와 같은 일련의 학자들은 그러한 덕이란 사실 상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 변하는 기준을 덕의 특성이라고 지칭하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동일한 행위의 반복성과 다수성을 낳게 하는 능력을 함축하는 덕의 특징들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들도 있습니다. 일명 덕의 윤리학을 지지하는 이들은 가톨릭 도덕신학자들과 더불어, 소종파적인 전통을 가진 윤리학자들, 그리고 현대 사상가 중에는 맥킨티어 (Alasdair MacIntyre), 하우어와스(Stanley Howerwas), 그리고 길리건 (Carol Gillian)을 들 수 있습니다.

덕의 윤리학은 인간의 도덕성을 사회 전체 안에서 조망하면서 가장 행복한 삶의 원리를 행위자의 도덕 능력에서 찾았고, 이러한 능력을 키워내는 도덕 교육의 근간을 마련했지만 일면 언제나 사회적 정황에 적절한 행위를 유도함으로써 급격한 변화나 혁명적 요구를 담아 내지 못하는 보수성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동서를 통하여 덕의 윤리는 현존체제 유지적 기능을 담당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덕의 윤리는 행위자의 도덕적 질을 구별할 이론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고귀한 사람과 천박한 사람, 혹은 귀족이나 천민들을 구별하는 데 유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유교사회는 신분적 차별을 간과했고,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받아들인 아퀴나스의 사상 구조 안에서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시하고 신분적 차별을 정당화한 역사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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