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November 18, 2007

Beyond monologues


독백을 넘어서서

인터넷 문화가 확산된 이래 사람마다 자기 독백의 집을 가지고 있다. 그 집은 항상 열려 있기도 하고, 일부 폐쇄되어 있기도 하지만 독백의 집이라는 점에서 여일하다. 독백을 넘어서 대화가 있는 집들도 있다. 썩은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독백들은 사방에 널려있다. 여가를 즐기는 부르죠아적 건전주의의 집에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몰리고, 진보적 생명평화의 집에는 삶을 나누려는 이들이 몰린다. 하지만 그 치열함의 정도는 생명평화의 집이 당연히 으뜸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표현방식은 양자 모두 여전히 독백이다. 독백에 공감하는 독백의 형식이다. 진보적 사상가들의 독백의 집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브르죠아적인 건전한 삶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 정신과 폭로 속에 담긴 그들의 “치열한 의식“이다. 손쉽게 안락함과 타협하는 정신들이 아니다. 거기에는 회의와 머뭇거림과 빈정거림보다 바른 의식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가진 계급의식이 요구하는 평균치적 수치이다.

그들의 기준은 억압과 소외와 착취와 차별을 딛고 세워진 브르죠아 컬춰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있다. 마치 교회주의자들의 안락한 길을 버리고 소외의 길을 걸었던 소종파주의자들의 외길과도 같다. 세상의 변화와 최후의 승리를 바라는 것도 없다. 다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까닭이다. 거기에는 안락과 사치와 허영의 유혹을 이기는 정련된 정신의 힘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나 소수일 수밖에 없다.

생명평화운동 - 이것을 대중의 호흡에 맞추려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이 운동이 언제 대중의 환호를 받았던가를 생각해 보면 답을 찾기 어렵다. 대중의 지지를 받고자 하는 이들은 생명평화운동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자기의 특수한 신분과 지위와 특권을 내려놓으라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평화를 외치면 결국 반폭력 반군사주의 반권위주의로 번역되는 까닭이다. 그들은 이것을 반미, 친북, 용공으로 알아 듣고 혐오한다.

생명을 살리자는 운동도 뒤집으면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전투적 의식 없이는 수행할 수 없는 과제이다. 죽이는 자가 있으면 가로막고 싸울 일이 된다. 이런 점에서 생명평화운동은 라디칼한 하나님 나라 운동과 같다. 도무지 지혜롭게 타협함으로써 명분과 실리를 취하려는 이 세상의 어느 정치 집단이나 혹은 다른 이념과 적당히 섞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수의 정신은 교회운동 이전에 본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교회가 적당히 타협함으로 명분과 실리를 얻고자 한다면 이 땅의 생명평화 운동가들보다도 가벼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되기 어렵다. 거룩함이란 인간의 속된 가치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너무나 많은 경우, 우리는 타협주의자들을 양산해 온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경쟁의 바다에 자식들을 밀어 넣고 성공의 푯대를 향해 고문하듯 죽기 살기로 헤엄을 치라고 한다. 자식과 부모사이에 잦아든 죽음의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수능이 끝난 후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일어나 뉴스를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스므살의 청년이 절망에 등 밀려 아파트 베란다에서 스스로를 버렸다. 그 아름다운 스므살인데....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울적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스므살 그에게 우리는 정말 미안해해야 한다. 이 경쟁의 바다에서 헤엄치려면 고독한 성공과 승리만이 아니라, 그러한 자신을 상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비판의식도 키워내야 한다.

나는 생존의 이기성을 인정한다. 자신의 생존의 이기성을 인정하는 것은 생명권을 보장하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르죠아 문화가 가르치는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남보다 더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차별과 경쟁의 심리에 사로잡힌 시기와 질투 문화를 옷 입는 것과 같다. 시기와 질투의 문화는 필연적으로 우월과 열등의 극단을 불러온다. 그리하여 우열을 나누는 일에 예민한 이들은 약자에게는 폭력적이고 강자에게는 아첨하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자신의 자식들이 약자가 될 때, 그는 자신을 향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식에게 조차 폭력적이다.

나는 이 세상이 순식간에 바뀌어 생명과 평화의 물결이 넘실대는 세상으로 변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경쟁의 문화를 자극하는 시기와 질투, 우열의 극단을 넘어서서 우리의 인간됨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시기와 질투, 그리고 이 세상의 경쟁의 바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당연시하기 보다는 이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기와 질투보다, 우열의 논리에 복속될 수 없는 존엄한 생명 가치를 품고 있는 자신의 소중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해를 가진 이들만이 남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수 있다. 나만의 독백을 넘어서 벗들과의 대화나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자세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만의 가치”가 아닌 “우리의 가치,” 우리의 가치를 초월하는 가치를 품은 고귀한 정신과 품위를 잃지 않는 삶의 태도, 이것이 오늘 이 고도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생명과 평화를 지키며 사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스스로에게 폭력적인 존재로 길러지고 있다. 자기에게 실망하여 자기를 버리기도 하고, 자기에게 매료되어 나르시시스트가 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고독하다. 우리는 이중의 고독을 오간다. 그 결과는 자기를 향하여 적대적이거나 폭력적이다. 잘난 자기만 소중하고, 싫은 자기는 너무나 쉽게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향해서도 우리는 그런 가치를 너무나 쉽게 가학적으로 적용한다. 인간다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이런 못난 자기도 소중히 품고 사는 것이다. 이를 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리라.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