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일산교회 주일 특강 원고>20260621
주제: “인류사회, 기독교, 그리고 전쟁과 평화“
박충구 목사(감신대 명예교수)
본문: 성경:마태복음 5장 9절, 요한복음 14장 27절, 에베소서 2장 14절
들어가는 말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입니다. 일제의 한반도를 향한 탐욕이 35년의 굴욕스러운 피정복민 역사를 남기고, 해방과 더불어 이념을 달리하는 강대국에 의해 1945년 8월 38선이 그어지고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군정을 시작하면서 남북으로 갈린 채 81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상해 임시정부 적통을 표명하며 남한 단독으로 세워졌고, 북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국지전을 벌이다가 1950년 6월 6.25 남북 전쟁을 거치며 강고한 분단의 철벽을 쌓아왔습니다. 지난 80년동안 우리는 입으로 평화를 외쳐왔지만, 평화의 열매를 거둔 적이 없습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반도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국으로 이양된 것은 1950년 7월 14일 당시 친미 세력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전작권을 위임하고, 50년 7월 18일 맥아더 장군이 이를 수락하면서, 대한민국 전시작전통제권은 유엔군의 이름을 가진 미군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되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시 비상 상황이 된다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통령과 국회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유엔군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주한 미 사령관이 1945년 당시처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오늘 이 시간에 인류 사회가 평화를 찾아온 여정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오늘의 한국 크리스쳔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해보려 합니다. 분단은 정치적 분단, 군사적 분단, 경제적 분단, 문화적 분단 – 다양한 차원의 분단을 불러와 증오와 미움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자신들이 반평화 상태로 깊은 만성병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강연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평화에 대한 이해를 진단해 보시고, 수정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일단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가졌던 평화 이해를 살펴보고, 그 이후에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어온 평화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독교 이전의 평화
1) 원시, 야만 사회의 평화
고대사회와 기독교 이전의 역사 속에서 평화를 찾던 방식은 타집단을 죽임으로써 자기 집단의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자기 집단의 안전을 지켜주던 영웅을 숭상하던 시대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영웅은 남다른 충성심과 증오심을 가진 이였지요. 자기 집단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다른 집단을 향해서는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습니다. 영웅의 문화, 영웅들의 이야기는 잔혹한 승리를 거둔 서사가 뒤따릅니다. 동양에서 유통되던 삼국지 이야기는 영웅들의 시대, 전쟁을 통해 영웅을 낳는 시대를 담고 있습니다. 힘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고 복종을 받아내는 전쟁을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힘의 정치가 덕의 정치보다 우월하게 다루어진 시대입니다. 힘의 정치가 잔인한 전쟁을 지속시키는 원리였고, 그 전쟁은 화근의 씨를 말리는 보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에 패배하면, 적의 진영에 속한 남자들은 어린 아기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야 후환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 병사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은 아가멤돈 장군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추상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니다. 우리는 결코 그들 중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미의 태에 있는 어린 생명까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 종족 전체는 흔적도 없이 도말되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지 못할 것이다.” - 호메로스, 일리아드
“전쟁이 없으면 자식들이 아비를 묻는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아비들이 자식들을 장사지낸다.“
- 헤로도토스
이들이 믿던 평화는 힘의 평화였고, 남다른 포악성을 가진 영웅들을 예찬하는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힘이 있어야 생존한다고 생각했던 시대였지요. 나는 이런 사고 유형을 원시적 평화라고 특정합니다. 원시적 평화는 어느 한 편만의 평화지요. 한 편만의 평화, 원시적 야만의 평화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1) 편견의 원칙입니다. 내 편은 선하고, 상대 편은 악하다는 편견은 내(內)집단안에서 유통됩니다. 그들만의 가치가 형성되어 강화되면 외(外)집단을 향한 폭력이 쉽게 유통됩니다.
(2) 차별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존엄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지만, 상대는 생명의 존엄성이 없다는 사유 유형입니다. 모든 차별의 원칙은 특정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합니다. 경쟁자를 차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포악의 원칙입니다. 이 포악의 원칙은 비(非)공존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가 죽어야 합니다. 멸공사상도 이런 류의 하나입니다. 몇 가지 사례만 보아도 이런 류의 평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평화인지 알 수 있습니다.
a) 남미 안데스 산맥(페루)의 찬카족과 모체문화의 유골, 남성들의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었다. 찬카족은 ”증오와 전쟁, 잔혹한 제의“를 이상화하며 자기 집단의 결속을 강화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자들을 인신공양하고, 잔혹하게 두개골을 때려 처형했습니다. 적을 향한 증오와 잔혹한 처형 행위를 태양의 신전과 달의 신전에서 수행함으로써 종교적으로 미화되고, 신을 향한 제의로 발전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잔인한 종족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후예들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b) 미국 애리조나 주에 있는 그랜드 캐년은 신비하고 장엄한 계속 아래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을 두 번 가 보았습니다. 그 신비한 계곡 속에서 오래전에 무든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거기에서도 인류학자들이 함몰된 유골들을 찾아냈습니다. 1100년 경 대기근이 있었고, 그 시기에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하게된 종족들은 생존을 위한 부족간의 처철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상대편이라면 남성, 여성, 아이들까지 모두 잡아 죽여 공동체 자체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살아있는 자는 먹어야 했고, 그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내가 잘 살기위해 남을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해한 평화는 피의 평화였습니다.
야만의 시대는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남미에서도 유사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성경에도 이런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승리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몰락,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 이방 땅의 정화사상, 짐승 우양의 새끼까지 다 잡아 죽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2) 보편 가치의 인식과 협약적 평화
그리스 반도에서는 고대 미케네 문명이 파멸을 맞은 후 기원전 약 8세기 경부터 약 200개의 도시국가들이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안보 동맹을 맺어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었던 시기가 기원전 약 5세기 즈음입니다. 델로스 동맹과 다른 동맹체인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평화협약을 맺고 있었지만, 아테네의 일방적인 흥왕에 두려움을 느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급습하여 무려 27년에 걸친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평화협약 14년만에 평화협약을 약속을 깨고, 이 전쟁에 국력을 다 쏟아부은 스파르타는 비록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국력이 약해져서 마케도니아에게 주권을 넘기게 되고, 마침내 마케도니아는 신흥 로마제국에 귀속되면서 로마 제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스 반도가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은 델로스 동맹과 펠레폰네소스 동맹간에기원전 446년에 맺었던 30년 평화조약을 깨트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평화(eirene)는 어원적으로 ‘찢어진 것을 다시 엮다‘라는 의미를 지닌 eir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서로 엮어야 하는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동질의 생존가치‘를 가지는 사람들이라는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의 약속은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적대감과 증오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빈 약속이 되어 깨진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보다 진보한 평화 개념이 형성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협정 당사자 간에 서로 사람이고, 서로 살아야 하며, 생명의 위협 없는 상태가 필요하다는 자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서로 함께’ 평화를 누리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협약적 평화 사상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와 스파르트는 스스로 맺었던 평화조약을 깨고 전쟁을 벌인 결과 둘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쟁의 여파로 번영의 시대는 끝나고, 기원전 146년 로마의 속국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인류 역사에서 그리스라는 나라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무려 2000년이 지난 시점, 로마제국도 지나고, 비잔틴 제국도 지난 후, 오스만 터기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아, 1821년에 독립전쟁을 벌인 후 다시 국권을 찾게 된 시점이었습니다. 평화를 깬 조상들의 오류가 그들의 후예에게 2000년 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주권없이 살아가는 속국인으로 전락시켰던 것이지요. 인류의 역사는 선조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후손들이 영욕을 겪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화를 상실한 이들의 후예는 준노예처럼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3) 로마의 평화: Pax Romana,
다시 힘의 평화로.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을 대파한 후, 로마의 황제로 등극한 시기에 맞물려 기독교의 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국주의의 특징은 힘의 평화를 통해 차별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차별적 세계관은 특권적 지배 권력을 누리는 자기 집단과 그 특권에서 배제된 피지배 집단의 굴종을 강화하는 관점을 말합니다. 우월성과 열등함, 문명과 야만, 합리성과 비합리성으로 나누어 그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지요. 이런 지배방식을 통하여 제국은 자본을 독점하고 중앙으로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았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형성된 평화는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였습니다. 다시 잔혹한 힘에 의한 평화로 돌아간 셈입니다. 문명의 옷은 입고 있으나, 그 내면 정신은 원시 야만사회에서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타집단에 대한 억압구조는 무차별 학살에서 로마법에 의한 잔혹한 형벌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전까지 이러한 평화관들이 세상을 지배했던 것이지요.
2. 하나님 신앙에 뿌리를 둔 기독교적 평화
저는 지난 2025년 봄, 신록이 눈부시던 4월 12일부터 5월 19일까지 38일 동안 스페인의 까미노 길을 걸었습니다. 프랑스 생장 피데포르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를 거쳐, 대서양이 시작되는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까지 이르는 긴 약 640Km의 긴 여정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오래된 교회들이 서 있고, 옛 수도원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산티아고 까미노란 말은 성 야고보의 길(까미노)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 끝까지 걸어 갔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는 길입니다. 그 이후 신앙의 순례길을 걷는 이들은 야고보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산티아고 길 주변에는 수백 년 된 수도원들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수도원들은 오늘날 대부분 텅 비어있고, 현대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서 피레네 산맥을 걸어 넘고 침묵 속에서 끝없이 펼쳐진 메세타 평원을 가로지르며, 무수한 순례자들이 걸었을 그 신앙의 여정을 따라 걸으면서 저도 앞서서 이 길을 가던 많은 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 깊은 산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수도원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저는 그랜드 캐년 계곡 막다른 자리에 세워진 돌탑을 마음에 떠올렸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허밋(Hermit)', 즉 '은둔자의 자리'였습니다. 순례자와 은둔자에게는 세상에서 떠난 외진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와 은둔자들은 모든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고, 참된 자기, 참된 하나님을 찾아 외진 자리를 찾아간 이들이었습니다. 서양에서 이 운동은 4세기 경부터 은둔형 수도원주의 운동으로 번져 나갔지요.
은둔자가 찾아든 수도원은 세상의 모든 다툼과 소란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난 자리,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안온하고 고요한 평정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세상에시 지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배반당하고, 상처입은 이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평화를 찾았던 것이지요. 저는 이런 수도사들의 삶에서 인간 본유의 평화에 대한 갈망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세속에서 벗어나,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자리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치열한 경쟁에 지치고, 사람에게 치여 깊은 상처를 입은 영혼들이 오직 하나님과의 대면과 대화 속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세상과의 단절, 이 단절이 주는 평화는 우리의 영적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도 무수한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걸을 것입니다. 홀로 걷는 고독하고 험란한 영성적 여정을 걸으면서 순례자들은 자신을 얽매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자신의 무능, 자기 자랑, 자신의 실패와 성공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감격 속에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회심한 사도 바울의 여정을 살펴 보십시오. 이들에게도 분명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내려 놓고 오로지 하나님 앞에 비워진 자신을 드러내는 처절한 ‘영혼의 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홀로 머무셨고, 바울 역시 회심 직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이라는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찾았던 광야와 사막은 단순한 은둔이나 도피를 위한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세상을 향해 뛰어들기 위한 '창조적 정거장'이었습니다. 세상의 악과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영성적 에너지를 충전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은둔자의 평화, 영성적 순례, 은둔의 자리, 은혜의 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평화(Shalom)'를 모두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런 주장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신비주의자들의 오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신비한 영적 체험 그 자체를 신앙과 삶의 목적으로 여겼던 이들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중세 교회는 이런 신비주의에 많은 이들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영적 자기 만족에서 엑스타시를 느끼던 이들이었지요. 그러나 모든 이들이 전부 그런 영적 만족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오직 자신만의 내적 평안을 위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한 채 수도원 골방으로 숨어들어 신비한 체험을 기다리던 수도원주의자들을 향해 매우 혹독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들을 일러 자기만의 평화를 누리려는 "영적 이기주의자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들의 평화에는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용기와 비전을 가지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은둔과 순례는 정당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된다면, 그래서 세상을 향한 책임을 망각하는 것이라면, 그 길은 영성적 순례자의 길이 아니라, 종교 속으로 도망한 이의 막다른 골목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부분적인 평화일 수는 있겠으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평화, 온전한 평화는 아닙니다.14세기의 영적 거장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dt)는 우리의 영적 여정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위대한 도약을 일러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나는 돌파(Breakthrough, Durchbruch)”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돌파’란 자신을 비워 아무 것도 없는 빈한한 실존, 응답없는 하나님 경험의 고뇌 속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신성을 체험함으로써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을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체험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근거, 이 세상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에 접촉되는 경험이라고 이해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갔던 신비주의자들의 직관적 체험은 바로 순례자들의 물러섬, 은둔, 고난의 여정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평화의 원류, Origin은 바로 이런 체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득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존재에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예수는 이 평화를 일러, ”내가 너희에게 주는 (하나님의)평화는 세상(로마제국)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평화는 '내가 원하는 안온함'이라는 이기적인 자아의 울타리를 깨부수고 나아가는, 오히려 자신이 깨지는 '돌파'를 통해 체득됩니다. 내 상처와 욕망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비워내고(Gelassenheit), 깍아냄(Entbildung)으로써,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상투적인 하나님 Gott이 아니라, 그 분의 깊은 신성, 즉 Gottheit)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참 하나님을 만나고, 그 체험을 통해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고 에크하르트는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아가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Gottesgeburt)이라고 하였지요.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닌 이 참 평화는 왜 주어지는 것일까요? 자기 만족이나 자랑을 위한 것일까요? 자기 희열을 누리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참된 영성가들은 자기 역사의 현장으로 U-Turn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적 평화의 자리로 부르시지만, 거기서 자족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를 세상에서 나누기 위함입니다. 평화의 속성은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을 가진 이는, 그것을 홀로 누리기보다 함께 나누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돌파를 경험한 영혼은 영적 이기주의자가 되어 평화의 골방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돌파를 이룬 이들은 다시 세상 한복판으로 걸어 나와 "매일의 일상 속에서 평화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신성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 수납,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우리 자신을 채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일구고, 나누고, 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이 돌파의 영성이 없으면 우리는 평화의 건설자이기보다, 평화의 훼방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아닌, 거짓 평화를 주장하며, 타집단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포악하게 사는 ”한 편의 평화“, 누군가를 차별하고 해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짖밟는 삶을 평화로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일어나는 이 돌파의 영성을 가지고,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평화의 세 지평”을 열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1) 비움의 영성과 내적인 평화
평화의 첫 번째 지평은 이미 말씀드린 '개인의 내적 평화'입니다. 이것은 내 안의 욕망의 폭풍을 잠재우고 하나님과 단독자로 마주하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 약속합니다.이 내적 평화는 철저한 '비워냄'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의 염려, 두려움, 그리고 내 중심적인 집착을 기도로 비워낼 때,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의 통치권을 쥐게 됩니다.
만약 우리 내면에 이 첫째 지평의 평화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의 작은 고난와 시련에도 쉽게 요동하며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불안한 존재로 머물 것입니다. 우리의 실존적 불안을 정화시키는 이 내적 평화는 두 번째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주님의 평강으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이들은, 이제 그 평화를 가지고 책임의 자리, 타자가 있는, 이웃이 있는, 우리 사회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2) 관계 회복의 영성과 공동체의 평화
내적인 돌파를 이룬 이들이 도달하는 두 번째 지평은 '관계의 회복, 곧 공동체적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약의 '샬롬'은 결코 나 혼자 조용히 누리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연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선포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화해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너와 나, 우리와 그들, 남과 북 사이에 쳐져있는 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분리는 증오와 미움, 상대를 향한 적개심없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분리는 죄와 악의 증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슬픔과 증오로 가득 차 있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대한 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내적 평화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공동체 안에서 화평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불화가 있는 곳에 화해를 가져오고, 반목이 있는 곳에 다리를 놓는 책임, 이것이 바로 영성적 여정을 마친 성도들이 마주해야 할 두 번째 평화의 지평입니다.
3) 전쟁없는 지구와 정의로운 평화
마지막 세 번째 지평은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구조적 평화, 곧 정의 위에 세워지는 평화'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평화가 단순히 어려운 시기에 '전쟁이 없는 상태'나 '갈등을 덮어두는 봉합'이 아님을 고백해 왔습니다. 참된 평화는 언제나 '정의(Justice)'라는 토양 위에서만 피어나는 열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세번째 지평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했습니다. "공의(Justice)의 열매는 화평(peace)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7). 시편 기자는 이 상태를 일러, "은혜와 진리가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다" (시 85:10, “Gnade und Treue beggnen einander, Gerechtigkeit und Friede Kuessen sich.“)고 노래합니다.
불의와 압제가 있는 곳에서 "조용히 하자, 시끄럽게 하지 말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평화가 아니라, 악과 타협하라는 거짓 평화의 요구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억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고, 왜곡된 사회적 구조가 바로 잡히며,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를 때 비로소 도래합니다. 그래서 불의와 의로움이 비폭력적으로 부딪히고, 다투는 일이 일어납니다. 미가 선지자가 바라보았던 환상, 즉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세상"(미 4:3)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편만할 때, 불의를 밀어낸 후에, 비로소 완성되는 평화의 지평입니다. 교회가 이 역사의 지평을 외면하면,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집단 이기적 모임이거나, 신앙 생활이란 개인의 취향에 따른 취미나 교제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폭력적 평화를 믿는 이들이 많으면 어디에서나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고 갈라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전쟁과 폭력은 죽임의 수단입니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북한에는 약 60기의 핵무기가 장착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습니다. 지난 날 한미일이 북한을 증오하며 위협해온 힘의 정치에 응대하기 위해 북한이 준비한 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폭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최소한 한반도 10개가 초토화될 정도입니다. 남한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들도 모두 죽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이 지구에서 사람보다 먼저 살아오던 모든 생명들도 죽임을 당합니다. 핵무기는 대량 죽음, 곧 나와 너, 우리와 우리 자식, 생태계, 모두의 공멸을 초래할 악의 수단입니다. 이미 역사 속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우리는 그 핵무기의 악마적 실효성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살의와 증오를 더 이상 가지면 안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는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정의와 평화를 건설할 수는 없습니다. 폭력으로 일구는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짓 평화입니다. 2차 세계 대전, 한반도 전쟁, 베트남 전쟁, 이란 전쟁, 어느 것 하나 전쟁으로 참 평화를 되찾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수한 생명을 죽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주 명료하게 “No War, Never Again“을 외쳐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내면의 상처를 치유받는 내적인 평정을 구하십시오.그러나 그 안온함에 안주하는 영적 이기주의를 '돌파'하여, 내 곁의 이웃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갈등의 담을 허무십시오. 우리는 남과 북의 증오와 위협으로 쎃아온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나아가 갈등과 불의로 신음하는 이 역사 한복판에서 사람과 생태계의 모든 생명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찾고 행함으로 참된 안전과 평화를 일구어 내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십시오.저는 오늘의 기독교가 주장하고, 기독교가 세워야 할 평화는 개인의 내적 평화를 지나,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평화를 세우고, 나아가 사람과 자연, 생태계의 평화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는 노아의 홍수라는 이야기를 통해 이 땅의 모든 생명이 다시는 해함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피조 세계를 향해 주신 영원한 평화와 보존의 약속“, 무지개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태계 안의 모든 생명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생태적 평화의 하나님이지요. 골방의 평화를 넘어, 공동체의 화평으로, 그리고 전쟁없는 지구,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이 보호받는 생태적 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신앙의 여정을 걷는 순례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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