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21, 2026

“우리는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독교사상 연재 초고령 사회와 노년 문제] 1 “우리는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구 고령화라는 당면 과제는 경제 대국이 나아가는 미래의 수평선 위에 거대한 빙 산처럼 버티고 있다. 수면 위에 드러난 것은 지난 수세기에 걸쳐 발생한 노인 인구의 전례없는 증가와 유년 인구의 전례없는 감소다. 넘실대는 파도 밑에 실체를 감추고 있지만 인구 통계학적인 변화에는 엄청난 경제,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 그 비용은 세 계 최강의 경제대국이라 해도 제때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파산에 이를 만큼 위협적이 다.“ - 피터 G. 피터슨 들어가는 말 대한민국은 2024년 12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20%를 넘었다. 초고령 사회(super-aging society))로 진입한 것이다. 이런 변화에 앞서서 한국 교회 안에서는 초고령 현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한국교회 안에서 60세 이상 인구는 2024년 기준 28.9%에 달했다. 노인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급변하는 사회 구조의 변화에 맞물려 개인의 생애주기, 가족관계, 노후대책, 의료복지에 대한 이해도 새롭게 업데이트 되고 있다. 기존의 이해 방식을 가지고 초고령 사회가 불러오는 새로운 변화에 대처할 수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초고령 사회의 현실을 노년의 관점에서 다각도로 조명해보려는 이번 연재에서 우리는 노년이 겪는 생물학적 변화와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다룬 후, 노년의 삶에 찾아오는 위기의 양상들이 어떠한 것들인지, 그리고 노년의 자유와 삶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필수 요소들에 대한 논의를 거쳐, 보다 누구나 성숙하고 아름다운 노년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조건들을 살펴보려 한다. ‘초고령 사회와 노년’이라는 주제를 중심하여 누구나 겪게 될 노인 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다. 이런 논의를 통해 우리는 노인 스스로의 자기 이해뿐만이 아니라, 미구에 노인이 될 젊은 세대가 노인 문제를 이해함으로써 세대간 상호 이해의 지평도 넓혀 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2050년 경이 되면 65세 이상의 고령인구가 인구 전체의 약 40%에 달할 것으로 전망이 되고 있다. 개신교 신앙 공동체 안에서 65세 이상의 고령자는 그보다 더 많은 약 43.9%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런 추세를 생각한다면 노령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변화를 이해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노력은 해가 갈수록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미시적으로 본다면 노년 문제는 생물학적 몸의 변화가 불러오는 노화로 인해 일어나는 개인의 신체적 변화의 결과로 개별적인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회 속에서는 노인 인구의 증가로 인한 다양한 사회적 변화를 결과한다. 2000년 대 이후 초고령화 사회가 불러오는 변화는 현대 사회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기 때문에, 신앙공동체들 역시 이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고 대응할 방안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인과 노년 일반적으로 노인을 이해하는 관점은 노인을 늙어가는 인간으로 바라보는 ”늙은 사람,“ 즉 대상화된 노인이라는 관점과 시간 속에서 여러 단계를 거치며 늙어온 인간이라는, 인생의 단계나 과정 속에 있는 상태로서의 노인을 바라보는 ”노년기 인간”이 있다. 늙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노인을 바라볼 때에는 주로 젊음을 상실하거나 삶의 기회가 이미 많이 소진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어 노인 개인의 개별성보다는 늙은이 일반으로 뭉뚱그려 이해하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는 노인을 사회에서 밀려난 약자로 여기고 복지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생산성 없는 인간, 한 물이 간 존재로 여기는 대상화가 쉽게 일어난다. 예컨대 청년과 노인을 비교할 경우 노인은 무엇인가 상실하고 결핍된 존재로 쉽게 간주되어 다양한 사회적 편견에 갇히게 된다. 그러므로 노인이라는 개념만으로 늙어가는 인간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표현하기 어렵다. 이에 비하여 노년이라는 개념은 여러 생애주기를 거쳐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인간의 상태를 드러낸다. 노인을 이해하기에는 보다 총체적이고 통전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노인이 신체적이며 생물학적으로 ‘낡은‘인간을 지칭한다면, 노년은 지난 삶의 과정을 통해 성숙한 단계에 이른 존재로서 그 단계에 적절하고 고유한 삶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노인세대를 지시한다. 따라서 늙어가는 인간을 타인들이 타자화하게 될 경우 노인이라는 개념이 주로 사용된다면, 늙어가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는 노년이라는 개념이 주로 사용된다. 물론 두 개념 모두 늙어가는 인간을 나타내는 표현이지만 노인은 과거와 단절된 상태로 파편화된 늙은 인간이라면, 노년은 삶의 여러 단계를 거쳐 마지막 단계에 이른 경험 많고 지혜로운 사람을 가리키는 뉴앙스를 담고 있다. 이 두 개념을 보다 전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인학(geriatrics)과 노년학(gerontology)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노인학은 어원적으로 노인을 지칭하는 “geras”라는 단어에 의사나 치료를 의미하는 “latros“를 조합한 전문용어다. 이미 노인학이라는 단어 속에는 노인 의학적 관점에서 노화를 질병이나 치료, 혹은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따라서 노인학은 노인 몸에서 일어나는 병리적 현상, 신체적 기능 저하를 막고 어떻게 더 건강하게 오래 살아갈 수 있도록 노인을 도울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반면 노년학은 노인을 지칭하는 ”geron“에 학문 이론을 뜻하는 ”logos“가 더해진 전문용어로 노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노화를 병리현상을 넘어서 일종의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을 담고 있다. 노인학이 늙어가는 인간을 의학 사회복지적 관점에서 어떻게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지킬 것이냐의 문제를 다룬다면, 노년학은 늙어가는 인간을 인문 사회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노인 문제를 다룰 때에는 이 두 가지 시각이 병행하거나 교차하게 된다. 늙고 병든 인간으로서의 노인을 바라볼 때는 노인학적인 관점이 앞서지만, 삶의 의미와 성숙, 그리고 존엄한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단계에 이른 사람을 생각할 때는 노년학적 시각이 요구된다. 노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두 전문 영역이 형성된 것은 인간이란 생물학적으로 조건지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그 생물학적 조건을 넘어서 정신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초고령 사회의 문제 노인들은 오래 살고, 젊은 세대는 아이를 낳지 않는다. 초고령 사회의 도래는 무엇보다 수명이 연장된 사회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고도로 발달한 의료기술과 공중보건 위생의 개선은 항생제, 백신, 수술 및 화학적 요법을 통해 영아 사망률을 급격히 낮추었고, 사람들의 기대수명을 비약적으로 높혔다. 현대사회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거치면서 자연주의적인 주거와 생활 환경에서 벗어나 인위적으로 구조화된 관계로 바꾸어 놓았다. 도시를 중심한 이동성, 일상 생활, 먹거리, 노동환경, 여가 생활 등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자원을 소모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가 되어 충분한 소득이 없을 경우 기초생활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는 젊은 세대들의 만혼과 비혼이 늘면서 전통적인 가족중심의 삶의 규범이 상당히 해체되었다. 비록 결혼을 했다 할지라도 주거 및 자녀 양육과 교육 비용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사람들은 자녀를 하나 이상 낳고 기르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그 결과 한 편에서는 고령 인구는 증가하는 데, 다른 편에서는 인구 감소가 일어나게 되었고, 이 문제는 곧 부양 대상 인구의 증가와 노동 인구의 감소로 인한 불균형을 초래하여 사회 경제적 문제를 대두시키고 있다.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2022년 이후 우리 사회에서도 고령 노인 인구의 의료비가 전 국민 의료비의 45%를 상회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사회학자 바우만(Zygmunt Bauman)이 현대사회를 설명하기 위하여 액체근대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결혼과 가족 관계를 지탱하던 전통적 규범이 해체되어 불안정한 관계에 그치고 만다는 주장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이수일 역(강, 2009). 은 이런 맥락을 잘 짚어낸 것이다. 자료: 국가통계포탈,“65세 이상 진료비 및 약품비 청구현황“(2023). 손지민, ”노인 건강보험 진료비 50조 첫 돌파... 고령화에 흔들리는 건보 재정“ 『한겨레』(2025-11-28). 가족관계의 다양성과 더불어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사회 진출 현상은 전통적으로 노후의 삶의 안정과 보호막 역할을 해오던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해체로도 이어졌다. 이런 변화를 일찍 예측한 사회에서는 국민의 노후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연금과 보험 제도 등 다양한 사회 안전망 확충을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아왔다. 이런 사회 변화는 세대 간 갈등으로도 이어진다. 고령의 노인들은 평생을 초고령사회 이전의 인생관을 가지고 앞세대 어른들을 돌보고,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며 살아왔지만, 후 세대 사람들은 부모조차 모실 여력이 없거나, 탈가족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삶의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세계가 마련해주는 좋은 주거 환경과 웰빙 식생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의 방식에 익숙하고, 이전에 비하여 높은 생활비와 자녀 양육및 교육 비용을 치를 수 있는 경제적 능력 여하에 따라 삶의 질이 좌지우지하는 세상에서 살아간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가족관계보다 개인의 행복과 자아실현을 더 중시하는 가치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경향도 보인다. 이렇듯 초고령 사회의 젊은 세대는 고령이 된 노년 세대와 인생관과 가치관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며 크고 작은 갈등을 겪게 된다. ”노인들은 오래 살고, 젊은 세대는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세상에서 젊은 세대가 노부모 세대를 배려하고 돌볼 수 있을지 의문시 되는 세상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비속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다분히 노년 혐오적 표현들이 전세계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현실을 살펴보면 이런 의문이 매우 타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노인들을 연금이나 축내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연금충“이라 불리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노인을 ”대형 쓰레기“(소다이 고미), 젖은 낙엽(누레 오치바) 취급하는 노혐(老嫌) 문화가 있으며, 영국에서는 침대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bed blocker”, 미국에서는 “오케이 부머”(OK, Boomer)라는 속어가 세대간 불평등과 부양부담을 안겨주는 노인 세대를 향해 대화를 차단하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호주에서는 노인을 고핀 다저(coffin dodger)라 하여 관속에 들어갈 때가 지났는 데도 요리조리 피하며 사는 존재라 비하하기도 한다. 노인 수가 많아지는 초고령 현상을 일러 백발 쓰나미(silver Tsunami)라 지칭하며 과장되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박은결, “‘연금충’, ‘할매미’ 노인혐오 바이러스” Daily Good News(2020.06.18). 노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평가는 노인의 사회적 생산력의 약화라는 문제만이 아니라 노인들의 추례한 행동양식에서 증폭되기도 한다. 노인 혐오나 폄하의 요인으로는 노인들 특유의 권위주의와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무례한 언행, 청결치 못한 몸과 옷에서 나는 노인 냄새에서부터 전근대적 가치관 옹호, 자신의 노후에 대한 무책임 등이 언급되고 있다. 노인 이해의 변화, 초고령 사회 이전과 이후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노인을 이해해온 방식은 초고령사회의 등장 이전과 이후로 크게 나뉜다. 세계적으로 초고령 사회의 선두주자로 공인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2006년 고령인구가 20%를 넘었고, 2025년 9월 현재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가 3,619만명에 달하여 전 국민의 29.3%를 상회하고 있다. 이현주, “일본 65세 이사 인구 비율 30% 육박 ”초고령사회 가속“ ...한국도 20.3%로 추격 양상” 『NS뉴스스페이스』(2026.03.05.). 이는 인구 3명 중 1명이 65세 이상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75세 이상의 노인이 전체 인구의 18%에 이르는 현실을 나타내는 지표다.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은 단순히 노인 인구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연령층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뀜으로써 과거의 패러다임으로 대처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새로운 사회의 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초고령 사회 이전의 노인 이해의 패러다임은 몇 가지 점에도 특화될 수 있다. 일단 무엇보다도 고령 노인은 소수였기 때문에 사회에서 특별하고 희귀한 존재였다. 극단적인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회가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회에서 희귀한 존재인 고령 노인은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각별한 존중과 공경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특히 유교문화권의 특수성을 가진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노인은 효(孝)사상을 가진 자녀손들로 구성된 가부장적인 대가족주의의 보호를 받았다. 노인이 나이가 들어 노동 일선에서 물러나도 자녀손들의 공경과 돌봄을 받으며 노후의 여생을 즐기는 것이 노년의 과업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사회구조의 정태적 성격으로 인해 노인이 오랜 동안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지혜는 새로운 세대에게도 여전히 유익한 것이 되어 노인들은 지혜로운 원로로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희귀한 존재로 살다가 가족 공동체에게 큰 사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으며 살다가 노쇠하여 기력이 약해지면 가족들의 돌봄속에서 짧은 노환기를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에서의 노인의 위상은 이전에 비해 매우 달라졌다. 수명이 연장된 세상에서 노인은 이제 희귀한 존재가 아니라 매우 흔한 존재가 되었다. 과거에는 공경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무수한 노인들의 일상을 사회가 책임지고 부담해야 할 존재로 여겨져 노인복지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가부장적 가족주의의 붕괴는 과거 노후의 삶을 지지해주던 전통적 기반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노인의 수명이 연장되어 누구나 평균 83년을 생존하게 됨으로 오래 살고, 오래 늙어가며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길어진 노후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적 요구도 당연히 높아졌다. 급변하는 사회 변화에 뒤쳐지지 않으려면 노년에도 부단히 새로운 정보를 얻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노년 후기, 노쇠기에 접어들면 삶의 자리에서 추방되듯 의료 시설로 옮겨져 약 83%의 노인들은 의료화된 죽음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상과 같이 간략히 살펴보기만 해도, 초고령 사회의 도래란 노인들에게는 세상이 개벽하는 것과 같은 다차원의 변화가 강요되는 현실이 다가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초고령 사회를 앞서서 겪어온 나라들의 사례를 전거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2026년 현재 전 세계에서 약 40개 국이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인류 최초로 초고령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초고령 사회에 대처하기 위하여 일부 민주화된 복지 선진국들은 오래 전부터 세심하게 국가의 사회, 경제, 의료 시스템을 준비해 왔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처럼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오지 못했다. 선진 사례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오늘의 세계 일각에서는 가족 중심의 노인 돌봄 구조의 붕괴를 일찍부터 파악하고, 국가 사회적 차원에서 노인 돌봄 사회로의 변혁적 이행 과정을 선택하고 실천해 왔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그들이 노인 친화 사회를 모범적으로 이루어 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누구나 노인이 될 것이며, 노후의 삶이 길어질 것이므로, 이에 공동적으로 대처할 방안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일찍부터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해 왔기 때문이다. 생명친화 사회를 향한 노력 노년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어떻게 구상되고 만들어질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일찍 가진 이들은 북유럽 기독교 국가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노인을 이해함에 있어서 노인을 타자화하거나, 소외시키지 않는 관점이 가장 인간다운 것이라는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가졌던 질문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정치가들은 ‘은퇴 후의 노인들을 방임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가 돌볼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북유럽 국가들(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은 사회 민주주의 유형의 복지 모델을 선택함으로써 사회내 부의 양극화를 줄이고, 보편적인 인권 가치를 노인 정책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정신적 가치는 다분히 기독교, 특히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이었다. Robert H. Nelson, Lutheranism and the Nordic Spirit of Social Democracy: A Different Protestant Ethic(Aarhus: Aarhus University Press, 2017). 루터의 두왕국설에 근거해 사람들은 국가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세우신 것으로 받아들이고, 정치가들을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구현시켜 나가기 위해 섬김(diakonia)의 소명과 책무를 가진 이들로 간주했다. 동시에 루터의 만인사제직 사상을 따라 모든 국민이 보편적 평등권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특히 1930년 대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알빈 한손(Albin Hanssen)총리가 제창한 “국민의 집(Folkhemmet)“개념은 국가를 하나의 거대한 가정으로 여기고, 모든 국민이 동등한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구상하게 만들었다. 넬슨(Robert H. Nelson)은 그의 저서에서 루터의 정치신학, 소명론, 만인 사제직, 그리고 시혜적 적선을 금하고 연대적 나눔의 실천을 강조했던 루터의 사회윤리 사상이 북유럽 복지국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논증한 바 있다. Pirjo Markkola, Ingela K. Naumann, “Lutheranism and the Nordic Welfare States in Comparison,” Journal of Church and State(Winter, 2014), 1-12. 북구의 복지국가 모델 형성에는 국민들이 평등성에 기반한 연대성의 윤리가 크게 기여했다. 정부에 대한 신뢰와 국민이 동질성을 나누는 연대성의 윤리가 높은 조세부담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북유럽 국가들은 높은 조세율에 바탕을 두고 생애주기에 가장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문제들을 공공 자원으로 해결하는 사회를 가꾸어 왔다. 교육, 의료, 그리고 노후 복지 문제가 개인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국가가 감당하는 사회제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북유럽 사람들은 자신의 저금 통장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국가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살아가는 국민이 된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북유럽 국가들은 노인 돌봄을 국가의 의무이자 노인의 권리로 정착시켜 왔다. 노인에게 비정한 한국사회 초고령 사회로 들어선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지표를 살펴볼 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노년 준비가 매우 부실하다. 우리 사회의 노인들이 처한 현실의 진면목은 북유럽이나 가까운 일본 사례와 비교해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노인 빈곤률이 2~5%에 가까운 북유럽 사회에 비해 우리나라 노인빈곤률은 40%에 가깝다는 사실, 그리고 OECD 38개국 중에서 우리나라 노인 자살률이 10여년 동안 1위라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출처: 국가통계연구원, “한국의 사회동향 2025.” 한국의 소득 기준 65세 이상 노인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인 39.7%로 나타났으며, 76세 이상의 노인 빈곤율은 52.0%로 2명 중 1명 이상이 빈곤층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높은 노인빈곤률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초고령사회의 도래를 예측하고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던 무능의 소산이다. 그 결과는 사회적 타살로서 고령 노인의 자살로 나타나고 있다. 2022년 통계청 사망원인 통계, 2022년 일본후생성 자살대책백서, 그리고 2022년 OECD 건강 지표에서 밝혀진 데이터에 의하면 80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한국이 60.6명, 일본이 21.6명, 스웨덴은 17.5명, 그리고 덴마크는 약 12.3명으로 나타났다. 참조: 통계청(KOSTAT), "2022년 사망원인통계 결과", 2023.09. 발표. OECD.Stat, "Suicide rates by age group and gender", 2023. 일본 후생노동성(MHLW), "令和4年版自殺対策白書 (2022 White Paper on Suicide Prevention)". 그런데 노인 자살의 [표 2] 4개국 80세 이상 노인 자살률 비교표 (단위: 명/10만 명) 국가 전체 남성 여성 남녀 격차 한국 60.6 118.7 26.6 4.5배 일본 21.6 32.5 14.8 2.2배 스웨덴 17.5 26.2 11.4 2.3배 덴마크 12.3 20.1 6.8 2.9배 주요 원인과 특징은 네 나라가 상당히 다르다. 가장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세 나라 모두 가족에게 주는 경제적인 부담이나 신체 질환으로 생존 조건이 열악해서 일어나는 자살이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 노인들에게는 최소한의 경제적 기반과 의료지원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고립형 자살이 주를 이루고, 스웨덴은 삶의 독립성 상실이 가장 큰 이유였으며, 덴마크 역시 삶의 질이 저하된 현실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직 우리나라 노인들만 빈곤, 신체질환, 그리고 가족에게 짐이 되어 가족 갈등의 원인제공자가 되는 것이 싫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우리 사회는 죽음의 그늘에서 노인들을 지켜주는 안전망이 매우 취약한 사회의 실제다. 이는 결국 우리나라 노인들은 국가 사회도 돌보지 않고, 가족들이 돌보기도 어려운 정황에서 극도의 곤경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80대 남성의 자살률은 118.7명에 달해 고령 남성 노인들이 압도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 교회는 과연 이런 현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수명이 길어진 세상에서 노년을 맞는 것이 어떤 나라에서는 인생의 성숙과 안식을 얻는 기회로 인식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장수가 축복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형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떤 노인들은 “어서 죽어야지..., 왜 이리 명이 긴가”라며 스스로 자책하며 탄식하는 경우도 흔하다. 우리사회는 여전히 노인에게 비정한 사회로 머물고 있다. 나오는 말 초고령사회로 들어선 대한민국의 노인들 중 절반 이상은 편안한 노후를 지내지 못하고 극빈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개인이 자신의 노후를 준비할 여력을 가지지 못해서일까? 개인의 책임은 부분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보다 큰 책임은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킬 책무가 있는 국가에게 있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치가들이 국민 수명이 길어져 빠르게 고령화되어가는 사회적 변화를 예측하고, 충분한 생명 안전망을 설계해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진 복지 국가들은 이미 1930년 대에 국민 연금 제도를 설치하고 지혜롭게 수정 보완해오면서 오늘의 안전한 사회를 이루어 낼 수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뒤늦은 1977년에서야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도입했고, 국민연금 제도는 그보다도 더 늦은 1988년부터 시행하기 시작했으니 북구의 나라들에 비하여 무려 50년 정도 뒤쳐져 있는 셈이다. 그 결과가 생명의 안전망이 부실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생명의 안전망이 부실한 사회에서 가장 곤경을 겪게 되는 이들은 은퇴 후 몸으로는 노화를 겪으며 다양한 만성질환에 노출되기 쉬운 노인들이다. 우리사회의 약자들, 노인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그리스도인이 품어야 할 평화에 대하여

<나들목일산교회 주일 특강 원고>20260621


                                  주제: “인류사회, 기독교, 그리고 전쟁과 평화“
                                                                                 박충구 목사(감신대 명예교수)

본문: 성경:마태복음 5장 9절, 요한복음 14장 27절, 에베소서 2장 14절

들어가는 말

대한민국은 분단국가입니다. 일제의 한반도를 향한 탐욕이 35년의 굴욕스러운 피정복민 역사를 남기고, 해방과 더불어 이념을 달리하는 강대국에 의해 1945년 8월 38선이 그어지고 북은 소련군이, 남은 미군이 군정을 시작하면서 남북으로 갈린 채 81년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상해 임시정부 적통을 표명하며 남한 단독으로 세워졌고, 북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무수한 국지전을 벌이다가 1950년 6월 6.25 남북 전쟁을 거치며 강고한 분단의 철벽을 쌓아왔습니다. 지난 80년동안 우리는 입으로 평화를 외쳐왔지만, 평화의 열매를 거둔 적이 없습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지요. 

한반도 전시작전통제권이 미국으로 이양된 것은 1950년 7월 14일 당시 친미 세력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전작권을 위임하고, 50년 7월 18일 맥아더 장군이 이를 수락하면서, 대한민국 전시작전통제권은 유엔군의 이름을 가진 미군에게 넘어갔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되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시 비상 상황이 된다면,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통령과 국회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유엔군사령부를 대표하고 있는 주한 미 사령관이 1945년 당시처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권

 국가의 국민으로서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오늘 이 시간에 인류 사회가 평화를 찾아온 여정을 간단히 살펴보면서 오늘의 한국 크리스쳔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해보려 합니다. 분단은 정치적 분단, 군사적 분단, 경제적 분단, 문화적 분단 – 다양한 차원의 분단을 불러와 증오와 미움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자신들이 반평화 상태로 깊은 만성병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 강연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평화에 대한 이해를 진단해 보시고, 수정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일단 그리스도 없는 세상이 가졌던 평화 이해를 살펴보고, 그 이후에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서 형성되어온 평화 사상을 살펴보겠습니다. 

1. 기독교 이전의 평화

1) 원시, 야만 사회의 평화 

고대사회와 기독교 이전의 역사 속에서 평화를 찾던 방식은 타집단을 죽임으로써 자기 집단의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자기 집단의 안전을 지켜주던 영웅을 숭상하던 시대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영웅은 남다른 충성심과 증오심을 가진 이였지요. 자기 집단을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다른 집단을 향해서는 목숨을 건 싸움을 벌였습니다. 영웅의 문화, 영웅들의 이야기는 잔혹한 승리를 거둔 서사가 뒤따릅니다. 동양에서 유통되던 삼국지 이야기는 영웅들의 시대, 전쟁을 통해 영웅을 낳는 시대를 담고 있습니다. 힘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고 복종을 받아내는 전쟁을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힘의 정치가 덕의 정치보다 우월하게 다루어진 시대입니다. 힘의 정치가 잔인한 전쟁을 지속시키는 원리였고, 그 전쟁은 화근의 씨를 말리는 보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쟁에 패배하면, 적의 진영에 속한 남자들은 어린 아기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래야 후환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 병사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은 아가멤돈 장군은 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추상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니다. 우리는 결코 그들 중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미의 태에 있는 어린 생명까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 종족 전체는 흔적도 없이 도말되어 어느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지 못할 것이다.” - 호메로스, 일리아드

“전쟁이 없으면 자식들이 아비를 묻는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아비들이 자식들을 장사지낸다.“ 
 - 헤로도토스

이들이 믿던 평화는 힘의 평화였고, 남다른 포악성을 가진 영웅들을 예찬하는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힘이 있어야 생존한다고 생각했던 시대였지요. 나는 이런 사고 유형을 원시적 평화라고 특정합니다. 원시적 평화는 어느 한 편만의 평화지요. 한 편만의 평화, 원시적 야만의 평화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1) 편견의 원칙입니다. 내 편은 선하고, 상대 편은 악하다는 편견은 내(內)집단안에서 유통됩니다. 그들만의 가치가 형성되어 강화되면 외(外)집단을 향한 폭력이 쉽게 유통됩니다. 

 (2) 차별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존엄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지만, 상대는 생명의 존엄성이 없다는 사유 유형입니다. 모든 차별의 원칙은 특정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합니다. 경쟁자를 차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포악의 원칙입니다. 이 포악의 원칙은 비(非)공존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가 죽어야 합니다. 멸공사상도 이런 류의 하나입니다. 몇 가지 사례만 보아도 이런 류의 평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평화인지 알 수 있습니다. 

a) 남미 안데스 산맥(페루)의 찬카족과 모체문화의 유골, 남성들의 두개골이 함몰되어 있었다. 찬카족은 ”증오와 전쟁, 잔혹한 제의“를 이상화하며 자기 집단의 결속을 강화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자들을 인신공양하고, 잔혹하게 두개골을 때려 처형했습니다. 적을 향한 증오와 잔혹한 처형 행위를 태양의 신전과 달의 신전에서 수행함으로써 종교적으로 미화되고, 신을 향한 제의로 발전했습니다. 역사 속에서 가장 잔인한 종족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의 후예들은 역사 속에서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b) 미국 애리조나 주에 있는 그랜드 캐년은 신비하고 장엄한 계속 아래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을 두 번 가 보았습니다. 그 신비한 계곡 속에서 오래전에 무든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거기에서도 인류학자들이 함몰된 유골들을 찾아냈습니다. 1100년 경 대기근이 있었고, 그 시기에 먹을 것이 없어 아사하게된 종족들은 생존을 위한 부족간의 처철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상대편이라면 남성, 여성, 아이들까지 모두 잡아 죽여 공동체 자체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살아있는 자는 먹어야 했고, 그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내가 잘 살기위해 남을 죽여야 했던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해한 평화는 피의 평화였습니다. 

야만의 시대는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남미에서도 유사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심지어 성경에도 이런 사상이 담겨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승리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몰락, 사무엘 시대에 블레셋 이방 땅의 정화사상, 짐승 우양의 새끼까지 다 잡아 죽여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2) 보편 가치의 인식과 협약적 평화

그리스 반도에서는 고대 미케네 문명이 파멸을 맞은 후 기원전 약 8세기 경부터 약 200개의 도시국가들이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살라미스 해전에서 승리한 아테네가 안보 동맹을 맺어 델로스 동맹의 맹주가 되었던 시기가 기원전 약 5세기 즈음입니다. 델로스 동맹과 다른 동맹체인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평화협약을 맺고 있었지만, 아테네의 일방적인 흥왕에 두려움을 느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급습하여 무려 27년에 걸친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평화협약 14년만에 평화협약을 약속을 깨고, 이 전쟁에 국력을 다 쏟아부은 스파르타는 비록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국력이 약해져서 마케도니아에게 주권을 넘기게 되고, 마침내 마케도니아는 신흥 로마제국에 귀속되면서 로마 제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그리스 반도가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것은 델로스 동맹과 펠레폰네소스 동맹간에기원전 446년에 맺었던 30년 평화조약을 깨트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에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평화(eirene)는 어원적으로 ‘찢어진 것을 다시 엮다‘라는 의미를 지닌 eiro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서로 엮어야 하는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동질의 생존가치‘를 가지는 사람들이라는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평화의 약속은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적대감과 증오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빈 약속이 되어 깨진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서 보다 진보한 평화 개념이 형성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협정 당사자 간에 서로 사람이고, 서로 살아야 하며, 생명의 위협 없는 상태가 필요하다는 자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서로 함께’ 평화를 누리기를 희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협약적 평화 사상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와 스파르트는 스스로 맺었던 평화조약을 깨고 전쟁을 벌인 결과 둘 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쟁의 여파로 번영의 시대는 끝나고, 기원전 146년 로마의 속국이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인류 역사에서 그리스라는 나라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무려 2000년이 지난 시점, 로마제국도 지나고, 비잔틴 제국도 지난 후, 오스만 터기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기운을 이어받아, 1821년에 독립전쟁을 벌인 후 다시 국권을 찾게 된 시점이었습니다. 평화를 깬 조상들의 오류가 그들의 후예에게 2000년 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주권없이 살아가는 속국인으로 전락시켰던 것이지요. 인류의 역사는 선조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후손들이 영욕을 겪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평화를 상실한 이들의 후예는 준노예처럼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3) 로마의 평화: Pax Romana, 

다시 힘의 평화로.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연합군을 대파한 후, 로마의 황제로 등극한 시기에 맞물려 기독교의 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국주의의 특징은 힘의 평화를 통해 차별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차별적 세계관은 특권적 지배 권력을 누리는 자기 집단과 그 특권에서 배제된 피지배 집단의 굴종을 강화하는 관점을 말합니다. 우월성과 열등함, 문명과 야만, 합리성과 비합리성으로 나누어 그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지요. 이런 지배방식을 통하여 제국은 자본을 독점하고 중앙으로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았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형성된 평화는 팍스 로마나. 로마의 평화였습니다. 다시 잔혹한 힘에 의한 평화로 돌아간 셈입니다. 문명의 옷은 입고 있으나, 그 내면 정신은 원시 야만사회에서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타집단에 대한 억압구조는 무차별 학살에서 로마법에 의한 잔혹한 형벌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전까지 이러한 평화관들이 세상을 지배했던 것이지요.

2. 하나님 신앙에 뿌리를 둔 기독교적 평화

저는 지난 2025년 봄, 신록이 눈부시던 4월 12일부터 5월 19일까지 38일 동안 스페인의 까미노 길을 걸었습니다. 프랑스 생장 피데포르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를 거쳐, 대서양이 시작되는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까지 이르는 긴 약 640Km의 긴 여정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오래된 교회들이 서 있고, 옛 수도원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산티아고 까미노란 말은 성 야고보의 길(까미노)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 끝까지 걸어 갔고, 거기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는 길입니다. 그 이후 신앙의 순례길을 걷는 이들은 야고보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걷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산티아고 길 주변에는 수백 년 된 수도원들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수도원들은 오늘날 대부분 텅 비어있고, 현대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해서 피레네 산맥을 걸어 넘고 침묵 속에서 끝없이 펼쳐진 메세타 평원을 가로지르며, 무수한 순례자들이 걸었을 그 신앙의 여정을 따라 걸으면서 저도 앞서서 이 길을 가던 많은 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 깊은 산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수도원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며, 저는 그랜드 캐년 계곡 막다른 자리에 세워진 돌탑을 마음에 떠올렸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허밋(Hermit)', 즉 '은둔자의 자리'였습니다. 순례자와 은둔자에게는 세상에서 떠난 외진곳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례자와 은둔자들은 모든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고, 참된 자기, 참된 하나님을 찾아 외진 자리를 찾아간 이들이었습니다. 서양에서 이 운동은 4세기 경부터 은둔형 수도원주의 운동으로 번져 나갔지요.

은둔자가 찾아든 수도원은 세상의 모든 다툼과 소란으로부터 완전히 물러난 자리, 세상과의 단절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안온하고 고요한 평정이 있는 자리였습니다. 세상에시 지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배반당하고, 상처입은 이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며 평화를 찾았던 것이지요. 저는 이런 수도사들의 삶에서 인간 본유의 평화에 대한 갈망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종 세속에서 벗어나,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자리에 머물고 싶어합니다. 치열한 경쟁에 지치고, 사람에게 치여 깊은 상처를 입은 영혼들이 오직 하나님과의 대면과 대화 속에서 치유를 받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세상과의 단절, 이 단절이 주는 평화는 우리의 영적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도 무수한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까미노 길을 걸을 것입니다. 홀로 걷는 고독하고 험란한 영성적 여정을 걸으면서 순례자들은 자신을 얽매고 있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자신의 무능, 자기 자랑, 자신의 실패와 성공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감격 속에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회심한 사도 바울의 여정을 살펴 보십시오. 이들에게도 분명 모든 것을 상대화하여 내려 놓고 오로지 하나님 앞에 비워진 자신을 드러내는 처절한 ‘영혼의 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홀로 머무셨고, 바울 역시 회심 직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이라는 긴 침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찾았던 광야와 사막은 단순한 은둔이나 도피를 위한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세상을 향해 뛰어들기 위한 '창조적 정거장'이었습니다. 세상의 악과 죄와 더불어 싸울 수 있는 영성적 에너지를 충전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은둔자의 평화, 영성적 순례, 은둔의 자리, 은혜의 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평화(Shalom)'를 모두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런 주장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신비주의자들의 오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신비한 영적 체험 그 자체를 신앙과 삶의 목적으로 여겼던 이들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중세 교회는 이런 신비주의에 많은 이들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영적 자기 만족에서 엑스타시를 느끼던 이들이었지요. 그러나 모든 이들이 전부 그런 영적 만족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오직 자신만의 내적 평안을 위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한 채 수도원 골방으로 숨어들어 신비한 체험을 기다리던 수도원주의자들을 향해 매우 혹독한 평가를 내렸습니다. 그들을 일러 자기만의 평화를 누리려는 "영적 이기주의자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들의 평화에는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이 결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용기와 비전을 가지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은둔과 순례는 정당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된다면, 그래서 세상을 향한 책임을 망각하는 것이라면, 그 길은 영성적 순례자의 길이 아니라, 종교 속으로 도망한 이의 막다른 골목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부분적인 평화일 수는 있겠으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평화, 온전한 평화는 아닙니다.14세기의 영적 거장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dt)는 우리의 영적 여정에 반드시 일어나야 할 위대한 도약을 일러 “영혼의 깊은 밤을 지나는 돌파(Breakthrough, Durchbruch)”라는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돌파’란 자신을 비워 아무 것도 없는 빈한한 실존, 응답없는 하나님 경험의 고뇌 속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신성을 체험함으로써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을 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체험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근거, 이 세상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부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현존과 사랑에 접촉되는 경험이라고 이해합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갔던 신비주의자들의 직관적 체험은 바로 순례자들의 물러섬, 은둔, 고난의 여정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평화의 원류, Origin은 바로 이런 체험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체득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존재에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지요. 예수는 이 평화를 일러, ”내가 너희에게 주는 (하나님의)평화는 세상(로마제국)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평화는 '내가 원하는 안온함'이라는 이기적인 자아의 울타리를 깨부수고 나아가는, 오히려 자신이 깨지는 '돌파'를 통해 체득됩니다. 내 상처와 욕망을 하나님 앞에 철저히 비워내고(Gelassenheit), 깍아냄(Entbildung)으로써,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상투적인 하나님 Gott이 아니라, 그 분의 깊은 신성, 즉 Gottheit)을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참 하나님을 만나고, 그 체험을 통해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고 에크하르트는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자아가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은 것(Gottesgeburt)이라고 하였지요.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닌 이 참 평화는 왜 주어지는 것일까요? 자기 만족이나 자랑을 위한 것일까요? 자기 희열을 누리기 위함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참된 영성가들은 자기 역사의 현장으로 U-Turn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적 평화의 자리로 부르시지만, 거기서 자족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를 세상에서 나누기 위함입니다. 평화의 속성은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교할 수 없이 좋은 것을 가진 이는, 그것을 홀로 누리기보다 함께 나누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내면의 돌파를 경험한 영혼은 영적 이기주의자가 되어 평화의 골방에 머물 수는 없습니다.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돌파를 이룬 이들은 다시 세상 한복판으로 걸어 나와 "매일의 일상 속에서 평화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신성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과 그리스도 수납, 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우리 자신을 채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를 일구고, 나누고, 세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이 돌파의 영성이 없으면 우리는 평화의 건설자이기보다, 평화의 훼방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아닌, 거짓 평화를 주장하며, 타집단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포악하게 사는 ”한 편의 평화“, 누군가를 차별하고 해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짖밟는 삶을 평화로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일어나는 이 돌파의 영성을 가지고, 성경과 기독교 역사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평화의 세 지평”을 열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습니다.

1) 비움의 영성과 내적인 평화

평화의 첫 번째 지평은 이미 말씀드린 '개인의 내적 평화'입니다. 이것은 내 안의 욕망의 폭풍을 잠재우고 하나님과 단독자로 마주하는 영혼의 상태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합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 약속합니다.이 내적 평화는 철저한 '비워냄'에서 시작됩니다. 세상의 염려, 두려움, 그리고 내 중심적인 집착을 기도로 비워낼 때,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의 통치권을 쥐게 됩니다. 

만약 우리 내면에 이 첫째 지평의 평화가 없다면, 우리는 세상의 작은 고난와 시련에도 쉽게 요동하며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불안한 존재로 머물 것입니다. 우리의 실존적 불안을 정화시키는 이 내적 평화는 두 번째 지평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입니다. 주님의 평강으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이들은, 이제 그 평화를 가지고 책임의 자리, 타자가 있는, 이웃이 있는, 우리 사회로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2) 관계 회복의 영성과 공동체의 평화

내적인 돌파를 이룬 이들이 도달하는 두 번째 지평은 '관계의 회복, 곧 공동체적 평화'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약의 '샬롬'은 결코 나 혼자 조용히 누리는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고 온전하게 연결된 상태를 뜻합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은 선포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화해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삶에서 나타나야 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막힌 담을 허물어야 합니다. 너와 나, 우리와 그들, 남과 북 사이에 쳐져있는 담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분리는 증오와 미움, 상대를 향한 적개심없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분리는 죄와 악의 증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슬픔과 증오로 가득 차 있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대한 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내적 평화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은 공동체 안에서 화평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예수님은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불화가 있는 곳에 화해를 가져오고, 반목이 있는 곳에 다리를 놓는 책임, 이것이 바로 영성적 여정을 마친 성도들이 마주해야 할 두 번째 평화의 지평입니다.

3) 전쟁없는 지구와 정의로운 평화 

 마지막 세 번째 지평은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구조적 평화, 곧 정의 위에 세워지는 평화'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은 평화가 단순히 어려운 시기에 '전쟁이 없는 상태'나 '갈등을 덮어두는 봉합'이 아님을 고백해 왔습니다. 참된 평화는 언제나 '정의(Justice)'라는 토양 위에서만 피어나는 열매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세번째 지평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했습니다. "공의(Justice)의 열매는 화평(peace)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사 32:17). 시편 기자는 이 상태를 일러, "은혜와 진리가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었다" (시 85:10, “Gnade und Treue beggnen einander, Gerechtigkeit und Friede Kuessen sich.“)고 노래합니다.

불의와 압제가 있는 곳에서 "조용히 하자, 시끄럽게 하지 말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평화가 아니라, 악과 타협하라는 거짓 평화의 요구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억눌린 자들이 자유를 얻고, 왜곡된 사회적 구조가 바로 잡히며,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를 때 비로소 도래합니다. 그래서 불의와 의로움이 비폭력적으로 부딪히고, 다투는 일이 일어납니다. 미가 선지자가 바라보았던 환상, 즉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세상"(미 4:3)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편만할 때, 불의를 밀어낸 후에, 비로소 완성되는 평화의 지평입니다. 교회가 이 역사의 지평을 외면하면,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집단 이기적 모임이거나, 신앙 생활이란 개인의 취향에 따른 취미나 교제 생활로 전락하고 맙니다.

폭력적 평화를 믿는 이들이 많으면 어디에서나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고 갈라지는 일이 벌어집니다. 전쟁과 폭력은 죽임의 수단입니다. 전문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북한에는 약 60기의 핵무기가 장착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습니다. 지난 날 한미일이 북한을 증오하며 위협해온 힘의 정치에 응대하기 위해 북한이 준비한 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다 폭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최소한 한반도 10개가 초토화될 정도입니다. 남한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들도 모두 죽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이 지구에서 사람보다 먼저 살아오던 모든 생명들도 죽임을 당합니다. 핵무기는 대량 죽음, 곧 나와 너, 우리와 우리 자식, 생태계, 모두의 공멸을 초래할 악의 수단입니다. 이미 역사 속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서 우리는 그 핵무기의 악마적 실효성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안에서 살의와 증오를 더 이상 가지면 안됩니다. 

지금 이 시대에서는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정의와 평화를 건설할 수는 없습니다. 폭력으로 일구는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거짓 평화입니다. 2차 세계 대전, 한반도 전쟁, 베트남 전쟁, 이란 전쟁, 어느 것 하나 전쟁으로 참 평화를 되찾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무수한 생명을 죽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주 명료하게 “No War, Never Again“을 외쳐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내면의 상처를 치유받는 내적인 평정을 구하십시오.그러나 그 안온함에 안주하는 영적 이기주의를 '돌파'하여, 내 곁의 이웃과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갈등의 담을 허무십시오. 우리는 남과 북의 증오와 위협으로 쎃아온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나아가 갈등과 불의로 신음하는 이 역사 한복판에서 사람과 생태계의 모든 생명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하나님의 공의를 찾고 행함으로 참된 안전과 평화를 일구어 내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십시오.저는 오늘의 기독교가 주장하고, 기독교가 세워야 할 평화는 개인의 내적 평화를 지나,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평화를 세우고, 나아가 사람과 자연, 생태계의 평화까지 확장되어야 한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서는 노아의 홍수라는 이야기를 통해 이 땅의 모든 생명이 다시는 해함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하나님께서 ”인류와 피조 세계를 향해 주신 영원한 평화와 보존의 약속“, 무지개의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태계 안의 모든 생명의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생태적 평화의 하나님이지요. 골방의 평화를 넘어, 공동체의 화평으로, 그리고 전쟁없는 지구,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이 보호받는 생태적 평화를 위해 기여하는 신앙의 여정을 걷는 순례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