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선교 12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교회는 한 편으로 놀라운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사회 일반으로부터 신뢰를 잃어가고 있어 급기야 혼동과 갈등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런 정황을 생각하며 쓴 책이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은 『예수의 윤리』, 부제는 “혼동과 갈등의 시대에 생명과 평화의 길 찾기”이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은 한국교회의 도덕적 실패를 기독교 윤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의 도덕적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예수의 윤리를 버린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나데”에서 보고 있다. 예수는 권력욕과 물질에 대한 탐욕, 자기중심의 쾌락의 원리에서 돌아설 것을 가르쳤으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권력과 지배욕에 사로잡히고 물질적 번영과 성공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해석하며, 인간의 고귀함을 지키기 보다는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풍토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는 기독교의 도덕적 실패의 뿌리를 어거스틴 이후 교회가 예수의 사랑과 평화의 윤리를 외면하고 로마제국의 군사주의적 가치들을 수용해 들인 데에서 보고 있다. 기독교회가 예수의 사랑과 평화의 윤리 대신 로마의 군사적 폭력을 앞세운 평화를 더욱 선호해온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는 예수의 사랑의 윤리에 기반한 평화윤리적 전통을 져버리고 호전적인 선교, 정복주의적인 승리주의, 물질과 물량주의를 통하여 교회를 강화시키고 화려하게 치장하며 성장시켰지만, 결국 중세기를 지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교회가 되는 자기모순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교회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개신교 전통은 이런 교회의 자기모순에서 스스로를 개혁하려는 정신에 이끌려진 것이지만 신학적 뿌리가 깊지 못한 한국의 교회는 교회사적으로 이미 오류로 판명난 그릇된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연 “예수를 잃어버린 교회, 예수의 가르침을 버린 교회, 예수를 부담스러워 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 교회를 아직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러야 할지”(14) 근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의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이해관계를 위하여 오독되는 자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묻게되는 근본적인 질문은 “어떻게 비폭력 평화주의를 가르친 성서의 예수가 폭력적 평화를 주도하는 예수로 해석되고, 소유와 탐욕의 문화를 비판하고 무소유와 청빈의 삶을 가르친 예수가 사람들의 탐욕을 부추기고 성공과 출세의 열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예수로 바뀔 수 있는지, 어떻게 애욕에 매인 삶이 아니라 순결하고 고결한 눈과 마음을 가지고 살라하신 예수가 욕망과 충동을 조장하는 예수로 바뀔 수 있는지”(15)를 의문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를 왜곡시켜온 전통위에 세워진 교회는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무너질 교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와 양심을 지키기 보다는 교회를 중심으로 권력화된 기독교를 지키고, 성장, 확장하는 데 온 힘을 다하는 “제도적 기독교인”들이 그 첫째인데 이들은 한국교회 안에 범람하고 있는 일부 부유한 성직자를 옹호하고, 교회의 성장과 부유함을 추구하며, 성직사고 팔기를 눈감고, 인친척에게 성직 물려주기를 방관하며, 이권쫒기에 민감하고, 미신적 신앙을 부추기며, 성직자의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다. 그 다음으로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있는 데 이들은 겉으로는 보수적 신앙을 비판하면서 개혁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행태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지배력을 얻기 위하여 정치와 종교의 야합을 조장하고 제도적 기독교인들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다. 바로 이들이 기독교의 갱신과 변혁을 기다리는 이들을 무수히 실망시켜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이 예수의 비폭력 평화윤리를 지키고 실천하는 무명의 “양심적 기독교인”들인데 이들은 인간의 유약함과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 기생하는 죄와 악에 대한 성찰과 비판에 게으르지 않고, 종교와 정치의 야합이 불러오는 포악을 경계하는 이들이다. 나는 예수의 삶과 사상,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에게서 저자는 바로 이러한 양심적 기독교인들의 원형(21)을 보고 있다.
이 책에는 서론을 제외하고 다섯 편의 글이 담겨있는 데 각 편의 글은 오늘의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담고 있다. 제 1 장, 기독교의 도덕적 실패와 그 구조, 제 2장, 한국 교회의 윤리적 위기와 그 원인, 제 3장, 기독교 선교의 사회윤리적 성격, 제 4장 제국주의와 기독교: 저항과 해방의 비판학으로서의 기독교 윤리, 그리고 마지막 5장은 한국교회의 평화 윤리적 과제라는 주제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신앙과 이성,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예수의 윤리를 명료하게 선포하기보다는 모호함과 개념 흐리기에 빠져 있다고 볼 때, 우리 한국 교회들이 보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하여 걸어가야 할 길은 성공과 성장을 위한 십자군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길이어야 한다는 점을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다.
Friday, March 25, 2011
새로 나온 책 <예수의 윤리>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at
2:01 PM
0
comments
Saturday, March 5, 2011
중동에 부는 바람과 종교 그리고 하나님...
중동 여러 나라가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중동이란 기름을 공급해 주는 지역이거나 기독교와는 다른 이슬람권이라는 점에서 다소 호감이 떨어지는 세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슬람을 정복하여 복음화 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이슬람포비아뿐 아니라 타종교포비아가 극심한 한국 보수기독교는 중동의 민주화 바람을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폭력 종교는 민주주의나 평등, 혹은 변혁을 싫어합니다. 그건 좌파들의 짓이라고 해 왔지요. 이슬람도 그 사상과 가르침에 숭고한 것이 있지만 이슬람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복고적인 특권을 보장하는 왕정구조의 정치세력과 야합하고 있는 이슬람을 생각하면 기독교보다 한참 지체된 해방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세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찌보면 중동의 민주화의 바람은 폭력종교와 정치의 야합을 무너뜨리고 미국이나 유럽의 제국주의적 세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방향을 지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성격은 이슬람적이지만, 탈종교적인 시민 민주주의의 길을 모색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참 멀고도 험한 길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민주화를 지원하기 보다는 군사독재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서방세계가 갑자기 민주화를 지지한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중동의 민주화보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지킬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제스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구 세계의 정치가 현실적세력을 가지지 못한 민주투사들을 억압하고, 포악한 억압자들을 오랬동안 지원했던 기억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중동의 민주화의 바람은 미국이나 유럽의 기호에 맞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 제국주의적 질서와 인간의 정신세계를 볼모잡고 있는 종교(이슬람)가 묵인하던 억압 질서에 대하여 시민들이 반발하고 거부하는 저 현상은 결국 중동의 탈제국, 탈종교화를 가속시킬 바람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결국 이슬람은 민주주의보다 권력과 금력을 나누어 주는 독재적 통치를 선호하다가 권력없는 이들에게 버림을 받는 형국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은 우리 과거 기독교에서도, 그리고 오늘의 보수적 기독교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종교는 억압정치를 모른 체 하며 종교 나름대로의 실익을 추구해 왔지만, 하나님은 그 종교를 버리고 종교없는 시민들과 민주화를 위하여 익명으로 거리에 나서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
그리고 억압에서의 해방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종교보다 자신들과 거리에서 투쟁하는 하나님을 더 신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 종교보다 종교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지키는 길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동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at
1:26 AM
0
comments
Thursday, March 3, 2011
새 책 "예수의 윤리" 출간준비를 마치고...
춥고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있습니다.
중동에서는 오랜 독재의 무거운 억압에서 헤어 나오려는 민중들의 몸부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국들은 이런 기회를 틈타 더욱 유리한 정치 경제적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눈치싸움이 한창입니다.
권력과 소유, 오만과 쾌락, 그리고 정복과 지배의 현대적 변형구조가 어느 곳에서나 그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출판하는 책은 예수의 윤리가 제국주의적 가치들 속에서 어떻게 구축당했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다섯 편의 논문들은 이런 관심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책 제목을 "예수와 제국주의"로 출간하려 했으나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 의미를 좁혀 "예수의 윤리: 혼란과 갈등의 시대에 생명과 평화의 길 찾기"로 고쳤습니다.
진지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구도자입니다. 그런데 간혹 종교인들이 구도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버리고 너무나 세속적인 가치와 주장, 행태를 벌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치며 고뇌하는 날이 많아 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놓은 업보에 몸이 감겨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책을 한권 한권 출간할 때마다 나의 글과 나의 실존 사이의 거리를 느낍니다. 언어와 행위, 의식과 삶, 그리고 아는 것과 행할 능력의 불일치가 일핏 얼핏 나의 의식속에 떠 오릅니다. 진리와 자유와 정의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의 세양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마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개념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며 참 좋은 교회라는 인정과 긍정의 느낌보다는 위기와 혼란을 먼저 느끼고 있는 오늘의 크리스쳔들에게 있어서 그 혼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길을 스스로 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지만 결국 길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산길을 걸으면서 젊은 날 가지고 있었던 삶의 순수가 불순함에 의하여 더렵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수와 불순이 구태여 나누어질 수 있는 차원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나의 실존이 희구하던 순수한 삶에 대한 갈구는 순수를 잃어버린 순간을 통하여 오염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그 오염된 삶이 바로 나의 삶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위기는 오염된 삶의 현실 속에서 삶을 사랑하지 않는 절망과 분노에서 오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절망과 분노는 오염된 삶을 정화하고 치유하기 보다는 유기하거나 외면함으로써 그것이 주는 고통도 더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여 나의 가슴 속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최고선과 같은 그 순수의 세계가 더욱 깊이 불순한 삶의 구조를 부단히 정죄하고 괴롭히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길을 우리에게 일러주면서 이런 죄스러운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사랑의 길을 가신 것이지요. 내 삶의 순수를 짓밟은 힘에 대하여 분노하며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은 이제 그쳐야 하겠습니다. 생명과 평화의 길을 말하면서도 내 안에 생명과 평화가 불러오는 근원적인 긍정의 힘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공허한 것이 되겠지요. 생명과 평화의 길은 최고선의 길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그리고 더 배반받고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기는 길과 만나는 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을 필요로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곤 합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최고선은 언제나 최고선에서 멀어진 나를 정죄할 뿐입니다. 그리고 최고선의 관념을 가지고 스스로와 다른 이를 괴롭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의 윤리는 우리를 오만한 정복자로 이끄는 힘이 아니라 관념적 선을 접어 놓고 겸비한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불러내는 적은 목소리와도 같습니다. 두려움없이 이 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를 따라 조용히 걷고 싶습니다.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at
3:40 PM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