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15, 2011

사랑에 대하여

„In der Liebe suchen die meisten ewige Heimat. Andere, sehr wenige aber, das ewige Reisen.“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에서 영원한 고향을 찾으려 하지만 아주 적은 소수의 사람들은 사랑에서 영원한 여정을 얻는다."
발터 벤자민


사랑에서 영원한 고향을 찾는 이들은 자신의 사랑이 결국 영원한 고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유약한 인간이 나누는 사랑은 인간성의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너무나 많다. 지난 기억을 망각하기도 하고, 스스로 변하기도 하며, 육체적 사랑의 기준이 바뀌기도 하고, 사랑의 환타지가 유지되지 않을 때에는 사랑했던 이를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며, 간혹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식어버린 사랑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는 이들도 있다.

벤자민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랑 안에서 영원한 여정을 찾는다고 하였다. 끝나지 않는 영원한 여정이 어디 있을까 생각되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하는 삶을 의미한다. 즉 사랑이란 삶의 동행자로서 삶을 함께 하는 데 있지 특정한 행복이라는 목적에 도달하는 데 있지 않다는 의미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영원한 여정을 함께 하는 길이 아니면 참된 사랑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쉼과 평화와 인정과 깊은 위로가 있는 고향과 같은 사랑,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으면서 무한히 풍요로운 사랑, 그것만으로 사랑을 말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란 인간다움이 유지되는 관계를 벗어날 때 참된 사랑의 의미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의 감정이 우리를 부드럽게 하고, 한없이 낮아지게도 하며, 끝없는 인내를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랑이 시험을 받는 최후의 자리는 우리의 인간성이다. 참된 인간됨이 결여된 사랑은 그만큼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인간다움이 결여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에게 고통을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에 성실한 것이 필요한 것은 사랑만이 아니다.

전설적 UCLA코치인 우든(Wooden)은 선수들에게 "남들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성공에 대하여 스스로 정의하기를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팀의 목표 혹은 승리를 예측하지 않았다. 운동 선수에게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 이상하지만 운동선수가 아닌 인간에게는 승리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합에 나가서 이기는 것을 목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그러나 시합을 하는 데에서 성실한 결과 승리를 한 것과 이기기 위하여 싸운 것과는 "그들의 인간다움"에 있어서 질적인 차이가 있다.

승자는 웃고, 패자는 우는 것이 아니라, 승자는 패자를 이해하고, 패자는 진심으로 승자를 축하해 주는 인간다움이 없는 그런 게임은 사실상 나는 하기 싫다. 그래서 악착같이 싸우자는 사람에게 져 준적도 많다. 이기기 위해 싸우는 이들은 이기지 못할 경우 이기지 못한 이유를 찾아 스스로를, 그리고 다른 구성원을 괴롭힌다. 우든은 성실한 삶의 원칙을 세가지 들었는 데, 늦지 않기, 동료를 비난하지 않기, 그리고 승리를 예측하지 않기라고 하였다. 아주 큰 의미를 담은 개념들은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가 얼마나 성실한 인간다움을 지닌 선생이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요즈음 일종의 두려운 마음이 든다. 목사들의 세계에서 진동하는 "사려깊지 못함과 비인간다움"의 냄새가 역겹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종교인들이 목사들의 정신세계보다 더 깊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고도로 경쟁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인간의 얼굴을 잃어간다면 결국 우리는 비인간의 세계로 몰락할 수 밖에 없다. 삶을 사는 방식도, 사랑도. 시합도, 싸움도 그래서 비인간적이 된다. 구원을 설파하는 종교는 이 비인간성에서 인간성을 구해 내는 데에서 영혼구원의 의미를 밝혀야 되지 않을까. 사랑과 영혼 구원을 전매한 사람처럼 노래하면서 비인간성을 부추기는 종교인만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Friday, July 1, 2011

세계화 시대의 기독교


세계화 시대의 기독교

요즘 들어서 세계화란 단어가 유행입니다. 세계를 하나 되게 하자는 논리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이 하나의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바벨탑 이후 언어가 서로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달라졌다는 기록은 문화의 다양성을 암시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세계를 하나 되게 한다는 것은 일치의 의미도 있지만 정치 경제적으로는 지배의 용이함, 상업구조의 신속성, 하나의 통 속에 서열에 따라 나열이 가능한 세계, 최고와 차등의 차이가 현격하게 드러나는 세계가 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나라와 민족을 가르던 언어, 문화, 국경, 심지어 종교까지 하나의 세계 문화권 속으로 밀려들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어느 영역보다 세계화를 반기는 자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경제 분야입니다. 상품의 이동 경로를 다 터놓아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우루과이 라운드도 있었고, 세계무역기구도 만들어 졌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세계의 모든 지역들이 자유무역 협약을 체결하자고 야단입니다. 자유시장이 생산과 소비를 합리화하고, 산업의 질을 높이며, 소비자에게 좋은 것을 안겨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정작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타나는 현상은 상품을 소비할 능력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세계화는 다른 나라 이야기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내부 깊이 파고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의식 무의식 속에서 모든 문화와 가치와 종교, 그리고 삶의 양태들이 노출되면서 비교문화 구조가 형성되고, 이어 상대적인 가난과 초라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행복했던 시절을 벗어나 우물 밖으로 밀려난 다음부터는 감싸주고 보해해 주며 주변의 충격을 줄여줄 벽들이 없어지고 모든 현실 앞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피곤이 있습니다. 고도의 경쟁구조 속에 등 밀려 나온 셈입니다. 그러므로 세계화의 시대에는 경쟁능력이 없는 이들은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개인에게 국한 되지 않습니다. 국가사회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됩니다. 비정한 경쟁의 현실 속에서 한눈팔면 국가사회가 다른 사회에 후위하게 되고, 국민들의 삶의 질이 급격히 저하될 수도 있습니다. IMF사태 같은 것이 하나의 실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닙니다. 종교적 제의, 진실성, 종교적 헌신, 종교적 가치들이 불가피하게 세계 전시장에 나열되면서 비합리적 운영방식, 전근대적인 가치, 성직자들의 권위에 대하여 민감한 평가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종교성의 저하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타문화와 타종교에 배타적 태도를 가지던 우물 안의 종교인들이 우물 밖으로 나와 다른 종교, 다른 문화의 존재양식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권위주의적인 정권들은 그 힘을 잃게 됩니다. 권위주의적인 권력과 진실하게 국민을 섬기는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이 권위주의적인 정권에 대하여 그 권위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나아가서는 그 정권을 버리고 다른 정권과 교체하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런 흐름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국가권력은 그러므로 좀 더 민주화되고, 인권이 좀 더 확대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차별받는 일이 없이, 그리고 특정한 이유를 들어 배타하는 일이 없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지향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를 훼손하던 헛된 권위의 종말이 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현실적인 폭력구조를 수단으로 삼아 그 지배력을 행사해 오던 정치권력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면 종교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지 궁금합니다. 사회가 보다 합리화되면 비합리적 영역들이 그 안정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사회가 불안하면 할수록 종교로부터 위안과 평화와 위로를 얻으려는 이들이 많아지지만, 사회가 안정되면 될수록 종교적 위안은 더욱 깊어지거나 아니면 현실적인 가치획득의 가치와 타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도의 경쟁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성공과 번영과 부유함을 약속하는 종교에서 위안과 희망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향은 비윤리적인 영성의 문제를 피할 수 없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약속되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민주화되고 개인의 권리가 확장되면 될수록 종교의 비민주성과 종교들이 누리고 있는 성차별적인 관계구조, 그리고 종교적 권위가 약화될 것입니다. 더구나 재래의 종교들이 주장해온 교리 속에 담겨 있는 합리성의 거부, 민주성의 거부, 과학적 사고의 거부, 그리고 전근대적 권위의 옹호로 인해 병들어 있는 종교가 오히려 치유와 회복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높은 가르침으로서의 종교(宗敎)가 낮은 가르침으로 인해 먼저 합리화되고, 민주화되며, 탈권위적인 민주적 사고에 의하여 수정내지는 교도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종교적 영성이 제아무리 깊다하여도 그에 못 미치는 윤리적 실천력으로 인하여 종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 신앙이 옷 입고 있었던 윤리적 체계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대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제국주의적인 윤리의식을 내장한 기독교입니다. 어거스틴이 로마 제국과 타협한 이후 로마 제국을 옹호하면서 로마 제국의 논리를 교리화한 기독교입니다. 이 기독교는 지난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교회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유형입니다. 세상 땅 끝까지 선교하여 제자를 삼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지상명령을 앞세우며 교회를 세우고 확장하는 일에 모든 힘을 기울여 온 유형입니다. 가나안 땅의 이방민족들을 제압하고, 지배하고 정복하며 다스리라는 논리와 유사합니다. 그 결과는 교회의 성장과 확장입니다. 성직주의가 가장 높은 영광을 누린 유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국주의적인 시대가 19세기 말로 종료가 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정치 영역에서 제국주의는 더 이상 설 곳이 없지만 종교 내부에는 이 습성이 아직도 여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대다수는 제국주의적인 사고 유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 제국주의의 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들에게 있어서 민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제국화된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세계 1, 2차 대전이 종료되면서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민족주의가 발흥하자 많은 기독교 지식인들이 제국주의에 반대하면서 민족주의를 옹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적인 의식을 나누는 종교들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도 무수한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했습니다. 민족주의를 표방하다가도 제국주의의 위대함에 압도되어 제국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의 문제도 있습니다. 이들은 민족의 독립과 번영과 발전을 위하여 장애가 되는 것들을 간과했다는 점입니다. 즉 민족에 대한 칭송과 우월성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데 지나쳐 자기 비판능력에 취약했습니다. 민족 내부의 도덕적 모순을 간과했습니다. 19세기 민족주의가 다양한 나라들 속에서 작용했지만 서구 국가 안에서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과 비인도적 처우를 당연시하는 나치즘도 불러왔습니다. 하지만 독일을 비난하고 비판하기에 앞서 우리 안에 있는 나치즘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민족주의를 조장한 신학적 사고의 배아들은 종교개혁 전통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국가권력을 교회권력의 파트너로 인정한 종교개혁 사상은 정치권력을 정당화 했고, 심지어 신성화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설은 일면 종교의 독립을 주장한 측면이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정치권력의 이성적 자율성을 종교가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1960년 대 이후의 해방신학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민족주의를 옹호했습니다. 민중신학도 민족, 민중, 민주를 옹호하면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주의적인 흐름 속에서는 제국주의의 밑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강력한 민족과 권력을 형성해야 민족의 독립과 자존이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힘을 가지면 그것은 제국주의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민족과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악의 뿌리는 한없이 깊습니다.

민족주의적인 윤리를 내장한 기독교는 종교개혁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에서 더욱 깊은 샘을 찾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생명평화의 윤리를 내장한 기독교일 것입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전통, 예수의 산상수훈의 전통,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평화주의 전통, 그리고 제국주의적 기독교와 민족주의적 기독교의 정치적 영향력 속에 가려졌던 소종파적 전통이 담고 있는 생명과 세계를 섬기는 데 가치를 두고 있는 윤리적 사고입니다. 이 윤리는 제국주의나 민족주의의 위대함의 집단적 유혹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즉 평화의 유산인 정치윤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지배와 정복의 수단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배와 정복은 배타와 차별의 논리를 선행시킵니다. 그러므로 생명평화의 전통은 배타외 차별의 논리를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위대함이나 민족주의의 독립과 번영에 기독교적 긍극적 승인을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국주의 시대도 지나고, 민족주의 시대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는 새로운 문화권 세계화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세계화는 비정한 경쟁의 가치를 담고 있기도 하고 민주와 해방의 논리도 부수합니다. 또한 지역적 가치들을 초토화시키는 문화의 태풍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세계화의 흐름이 경제제국주의와 손을 잡으면 부유한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지배하고 착취할 것입니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될 수 있습니다. 세계화의 흐름을 거부하며 민족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들이 우물 속으로 다시 들어가겠다는 미성숙한 전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물 속에서 일어나는 독재와 지배와 착취를 시정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한국의 기독교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생명평화의 전통에 더욱 충실하기를 기대합니다. 세계화의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는 자리에서 생명과 평화를 지킴으로써 기독교가 본래의 사명을 다 하고, 세계화 시대에서 가장 취약한 생명과 평화의 지킴이가 되는 것입니다. 자본을 앞세운 지배와 정복과 착취의 논리에 승복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지배와 정복과 착취의 악을 비판하면서 생명과 세계를 섬기는 교회를 세위 나가는 것 이것이 세계화 시대에 한국 기독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입니다. 독일교회는 최근 위대한 교회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섬기는 교회에서 이 시대의 참된 교회의 모습을 찾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일부 한국 교회들이 자본을 앞세워 제국주의적인 교회의 이미지를 형성하려고 야단입니다. 가장 큰 교회, 가장 부유한 교회, 가장 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법과 상식도 무시하고, 이웃교회들을 무너뜨립니다. 마치 거대한 자본을 가진 기업이 재래시장과 소규모의 상가들을 휩쓸어 버리는 것과 흡사합니다. 참된 교회의 이미지를 이런 교회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거대한 교회는 생명과 평화의 복음이 아니라 배타적 지배와 정복과 승리주의를 지향하는 세속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서구의 기독교 문명 속에서 지어진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이 제아무리 화려한 교회를 짓는다 하여도 생명과 평화의 윤리의 터 위에 지어지지 않는 교회에는 진실한 생명들이 찾아 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 착각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생명과 평화의 유산을 이어받은 교회들은 스스로를 낮추어 섬기는 자세를 잊지 않은 교회들이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Friday, March 25, 2011

새로 나온 책 <예수의 윤리>



기독교 선교 12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교회는 한 편으로 놀라운 양적인 성장을 이루었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사회 일반으로부터 신뢰를 잃어가고 있어 급기야 혼동과 갈등의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런 정황을 생각하며 쓴 책이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간되었다. 제목은 『예수의 윤리』, 부제는 “혼동과 갈등의 시대에 생명과 평화의 길 찾기”이다.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은 한국교회의 도덕적 실패를 기독교 윤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다.

나는 한국교회의 도덕적 실패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예수의 윤리를 버린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나데”에서 보고 있다. 예수는 권력욕과 물질에 대한 탐욕, 자기중심의 쾌락의 원리에서 돌아설 것을 가르쳤으나 오늘의 한국교회는 권력과 지배욕에 사로잡히고 물질적 번영과 성공을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해석하며, 인간의 고귀함을 지키기 보다는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풍토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는 기독교의 도덕적 실패의 뿌리를 어거스틴 이후 교회가 예수의 사랑과 평화의 윤리를 외면하고 로마제국의 군사주의적 가치들을 수용해 들인 데에서 보고 있다. 기독교회가 예수의 사랑과 평화의 윤리 대신 로마의 군사적 폭력을 앞세운 평화를 더욱 선호해온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는 예수의 사랑의 윤리에 기반한 평화윤리적 전통을 져버리고 호전적인 선교, 정복주의적인 승리주의, 물질과 물량주의를 통하여 교회를 강화시키고 화려하게 치장하며 성장시켰지만, 결국 중세기를 지나면서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교회가 되는 자기모순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교회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개신교 전통은 이런 교회의 자기모순에서 스스로를 개혁하려는 정신에 이끌려진 것이지만 신학적 뿌리가 깊지 못한 한국의 교회는 교회사적으로 이미 오류로 판명난 그릇된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연 “예수를 잃어버린 교회, 예수의 가르침을 버린 교회, 예수를 부담스러워 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 교회를 아직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러야 할지”(14) 근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사람의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이해관계를 위하여 오독되는 자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묻게되는 근본적인 질문은 “어떻게 비폭력 평화주의를 가르친 성서의 예수가 폭력적 평화를 주도하는 예수로 해석되고, 소유와 탐욕의 문화를 비판하고 무소유와 청빈의 삶을 가르친 예수가 사람들의 탐욕을 부추기고 성공과 출세의 열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예수로 바뀔 수 있는지, 어떻게 애욕에 매인 삶이 아니라 순결하고 고결한 눈과 마음을 가지고 살라하신 예수가 욕망과 충동을 조장하는 예수로 바뀔 수 있는지”(15)를 의문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를 왜곡시켜온 전통위에 세워진 교회는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무너질 교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리와 양심을 지키기 보다는 교회를 중심으로 권력화된 기독교를 지키고, 성장, 확장하는 데 온 힘을 다하는 “제도적 기독교인”들이 그 첫째인데 이들은 한국교회 안에 범람하고 있는 일부 부유한 성직자를 옹호하고, 교회의 성장과 부유함을 추구하며, 성직사고 팔기를 눈감고, 인친척에게 성직 물려주기를 방관하며, 이권쫒기에 민감하고, 미신적 신앙을 부추기며, 성직자의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다. 그 다음으로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있는 데 이들은 겉으로는 보수적 신앙을 비판하면서 개혁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행태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지배력을 얻기 위하여 정치와 종교의 야합을 조장하고 제도적 기독교인들과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이다. 바로 이들이 기독교의 갱신과 변혁을 기다리는 이들을 무수히 실망시켜왔다. 마지막으로 남은 이들이 예수의 비폭력 평화윤리를 지키고 실천하는 무명의 “양심적 기독교인”들인데 이들은 인간의 유약함과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받아들여 자기 안에 기생하는 죄와 악에 대한 성찰과 비판에 게으르지 않고, 종교와 정치의 야합이 불러오는 포악을 경계하는 이들이다. 나는 예수의 삶과 사상,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에게서 저자는 바로 이러한 양심적 기독교인들의 원형(21)을 보고 있다.

이 책에는 서론을 제외하고 다섯 편의 글이 담겨있는 데 각 편의 글은 오늘의 한국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담고 있다. 제 1 장, 기독교의 도덕적 실패와 그 구조, 제 2장, 한국 교회의 윤리적 위기와 그 원인, 제 3장, 기독교 선교의 사회윤리적 성격, 제 4장 제국주의와 기독교: 저항과 해방의 비판학으로서의 기독교 윤리, 그리고 마지막 5장은 한국교회의 평화 윤리적 과제라는 주제이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신앙과 이성,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예수의 윤리를 명료하게 선포하기보다는 모호함과 개념 흐리기에 빠져 있다고 볼 때, 우리 한국 교회들이 보다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하여 걸어가야 할 길은 성공과 성장을 위한 십자군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생명과 평화를 지키는 길이어야 한다는 점을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다.

Saturday, March 5, 2011

중동에 부는 바람과 종교 그리고 하나님...

중동 여러 나라가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중동이란 기름을 공급해 주는 지역이거나 기독교와는 다른 이슬람권이라는 점에서 다소 호감이 떨어지는 세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슬람을 정복하여 복음화 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이슬람포비아뿐 아니라 타종교포비아가 극심한 한국 보수기독교는 중동의 민주화 바람을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폭력 종교는 민주주의나 평등, 혹은 변혁을 싫어합니다. 그건 좌파들의 짓이라고 해 왔지요. 이슬람도 그 사상과 가르침에 숭고한 것이 있지만 이슬람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복고적인 특권을 보장하는 왕정구조의 정치세력과 야합하고 있는 이슬람을 생각하면 기독교보다 한참 지체된 해방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세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찌보면 중동의 민주화의 바람은 폭력종교와 정치의 야합을 무너뜨리고 미국이나 유럽의 제국주의적 세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방향을 지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성격은 이슬람적이지만, 탈종교적인 시민 민주주의의 길을 모색하려 할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참 멀고도 험한 길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민주화를 지원하기 보다는 군사독재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서방세계가 갑자기 민주화를 지지한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중동의 민주화보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지킬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제스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서구 세계의 정치가 현실적세력을 가지지 못한 민주투사들을 억압하고, 포악한 억압자들을 오랬동안 지원했던 기억을 우리가 할 수 있다면 중동의 민주화의 바람은 미국이나 유럽의 기호에 맞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대 제국주의적 질서와 인간의 정신세계를 볼모잡고 있는 종교(이슬람)가 묵인하던 억압 질서에 대하여 시민들이 반발하고 거부하는 저 현상은 결국 중동의 탈제국, 탈종교화를 가속시킬 바람인 것만은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결국 이슬람은 민주주의보다 권력과 금력을 나누어 주는 독재적 통치를 선호하다가 권력없는 이들에게 버림을 받는 형국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은 우리 과거 기독교에서도, 그리고 오늘의 보수적 기독교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종교는 억압정치를 모른 체 하며 종교 나름대로의 실익을 추구해 왔지만, 하나님은 그 종교를 버리고 종교없는 시민들과 민주화를 위하여 익명으로 거리에 나서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

그리고 억압에서의 해방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종교보다 자신들과 거리에서 투쟁하는 하나님을 더 신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위하여 일하지 않는 종교보다 종교의 이름은 가지고 있지 않아도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지키는 길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동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Thursday, March 3, 2011

새 책 "예수의 윤리" 출간준비를 마치고...

춥고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있습니다.
중동에서는 오랜 독재의 무거운 억압에서 헤어 나오려는 민중들의 몸부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국들은 이런 기회를 틈타 더욱 유리한 정치 경제적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눈치싸움이 한창입니다.
권력과 소유, 오만과 쾌락, 그리고 정복과 지배의 현대적 변형구조가 어느 곳에서나 그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출판하는 책은 예수의 윤리가 제국주의적 가치들 속에서 어떻게 구축당했고,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다섯 편의 논문들은 이런 관심에서 쓰여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책 제목을 "예수와 제국주의"로 출간하려 했으나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 의미를 좁혀 "예수의 윤리: 혼란과 갈등의 시대에 생명과 평화의 길 찾기"로 고쳤습니다.

진지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구도자입니다. 그런데 간혹 종교인들이 구도자로서의 삶의 자세를 버리고 너무나 세속적인 가치와 주장, 행태를 벌리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그들의 모습이 아니라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밤잠을 설치며 고뇌하는 날이 많아 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놓은 업보에 몸이 감겨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책을 한권 한권 출간할 때마다 나의 글과 나의 실존 사이의 거리를 느낍니다. 언어와 행위, 의식과 삶, 그리고 아는 것과 행할 능력의 불일치가 일핏 얼핏 나의 의식속에 떠 오릅니다. 진리와 자유와 정의가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존재의 세양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누어지지 않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마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개념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며 참 좋은 교회라는 인정과 긍정의 느낌보다는 위기와 혼란을 먼저 느끼고 있는 오늘의 크리스쳔들에게 있어서 그 혼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길을 스스로 찾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지만 결국 길은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겠지요.

오늘 산길을 걸으면서 젊은 날 가지고 있었던 삶의 순수가 불순함에 의하여 더렵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수와 불순이 구태여 나누어질 수 있는 차원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나의 실존이 희구하던 순수한 삶에 대한 갈구는 순수를 잃어버린 순간을 통하여 오염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슬프지만 그 오염된 삶이 바로 나의 삶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위기는 오염된 삶의 현실 속에서 삶을 사랑하지 않는 절망과 분노에서 오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절망과 분노는 오염된 삶을 정화하고 치유하기 보다는 유기하거나 외면함으로써 그것이 주는 고통도 더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여 나의 가슴 속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최고선과 같은 그 순수의 세계가 더욱 깊이 불순한 삶의 구조를 부단히 정죄하고 괴롭히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는 사랑과 용서의 길을 우리에게 일러주면서 이런 죄스러운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사랑의 길을 가신 것이지요. 내 삶의 순수를 짓밟은 힘에 대하여 분노하며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은 이제 그쳐야 하겠습니다. 생명과 평화의 길을 말하면서도 내 안에 생명과 평화가 불러오는 근원적인 긍정의 힘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공허한 것이 되겠지요. 생명과 평화의 길은 최고선의 길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 그리고 더 배반받고 상처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기는 길과 만나는 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을 필요로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곤 합니다.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최고선은 언제나 최고선에서 멀어진 나를 정죄할 뿐입니다. 그리고 최고선의 관념을 가지고 스스로와 다른 이를 괴롭히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의 윤리는 우리를 오만한 정복자로 이끄는 힘이 아니라 관념적 선을 접어 놓고 겸비한 사랑의 실천으로 우리를 불러내는 적은 목소리와도 같습니다. 두려움없이 이 소리에 귀기울이며 그를 따라 조용히 걷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