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Hugh H. Mo (휴 H. 모우)
번역: 박지현 (New York University Law school 재학)
인준절차가 진행되면서 미국 대법원 후보자 소니아 소토마이어의 법경험과 법철학이 모든 관점에서 자세히 해부되며 분석될 것이다. 특히 그 동안 소토마이어 판사를 묘사하는데 사용된 말들 혹은 본인이 쓴 모든 언어가 자세히 분석될 전망이다.
대법원 후보자가 갖추어야 하는 요건으로 오바마 대통령이 지목한 “동정심”이라는 가치의 의미에 대해 정치적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과 소수인종이라는 사실이 소토마이어 판사의 자격요건, 법사상, 그리고 그녀의 헌법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란도 활발하다. 이런 가운데 나는 대법원판사 후보자로서 그녀의 자격을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녀가 범죄율이 상당히 높았던 뉴욕시의 검사로 활동했을 당시 그녀의 직무수행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약 30년 전에 맨해튼 지역 검찰청에서 소토마이어 판사와 함께 조검사로서 일을 했다. 소토마이어 판사와 우리의 동료들은 60년대 민권운동과 70년대 베트남전쟁대세대의 부산물이었다. 우리는 이상을 추구하며 세상을 더욱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페리메이슨,” “드렉넷,” 그리고 “네이킷시티”와 같은 텔레비젼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아 우리는 검사들이 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검사로 활동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당시 뉴욕에는 난폭한 범죄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전설적인 맨해튼 검찰장청이었던 로버드 모건다우에 의해 임명되어 범죄의 물결을 막을 직무를 맡았으며, 그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형사법체계 안에서 늘 공정심(성)과 정의를 지키도록 지시를 받았다.
나는 소토마이어 판사를 1980년도에 만났다. 당시 그녀는 신임검사로 임명을 받아 내 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녀의 동료들보다 뛰어났다. 소토마이어는 늘 열심히 일했고, 뛰어난 안목이 있었으며, 복잡한 사실관계들을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명료하게 정리하여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곤 했다.
맨해튼 검찰청에 있는 젊은 검사들은 경험부족 때문에 선배검사가 살인사건을 다루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배운 다음에야 살인사건을 맡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토마이어 판사는 벌써 다양하고 복잡한 형사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동 포르노그래피 사건과 검사측과 D’Alessio and Hyman 사건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살인사건을 아직 맡아보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녀의 첫 살인사건은 나와 함께 맡게 되어있었다. 사건 명은 ‘People v. Richard Maddicks’ 였는데, 사건명의 ‘매딕스’는 ‘타잔 강도’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1981년에서 1982년 사이에 할렘 한가운데서 3개월 동안 건물옥상에서 줄에 매달려 총을 쏘며 창문을 깨부수며 타인의 집에 침입하여 강도와 살인을 저질렀던 인물이었다.
매딕스의 일인 범죄 사건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었다. 세 명이 살해당했고, 심하게 부상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경찰이 12개월 동안 23건의 사건을 조사한 다음에야 비로소 매딕스가 구속되었다. 그 가운데 11개의 사건은 37건의 범죄가 적힌 기소장의 대상이었다. 그는 살인, 강도, 상해, 그리고 다른 범죄 혐의를 받아 재판에 회부 되었다.
타잔 사건은 사실 검사로서 가장 이상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다양한 범죄와 파편적인 증거들을 모아 피고인의 정체와 범죄행위를 증명 해야 하는 중요하면서도 도전이 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타잔 사건에 대해 뉴욕주 하위법원의 배심원 앞에서 재판이 열렸다. 4주 동안 시민, 경찰, 병리학자, 수의사, 탄도 전문가, 그리고 심지어 지도제작자를 포함하여 40명의 증인들을 세운 결과 리쳐드 매딕스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주 교도소에 62년6개월에서 종신형까지 갈 수 있는 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녀의 첫 번째 살인사건 재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토마이어 판사는 본인이 능력 있는 변호사이고 조사관이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수사관들과 함께 범죄현장을 방문하면서, 수사관들, 피해자들의 가족, 그리고 모든 증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검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의 이러한 활약은 매딕스의 형사재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이 복잡한 다수 살인 사건의 수 백개의 파일과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분석했으며, 인민1호라고 불려진 사건 다이아그램까지 만들었다. 이 다이어그램은 배심원을 위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실관계들을 분명하고 기억하기 쉬운 시각적인 자료로 요약한 것이었다.
그 당시 소토마이어 판사는 다른 검사들, 심지어 선배 검사들보다 법정에 설 수 있는 능력이 확연하게 뛰어났었다. 그녀의 법정능력과 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나는 40명의 증인 가운데 20명이나 그녀로 하여금 법정에 소개하고 심문하도록 했으며, 내가 사용한 모두 진술을 쓴 사람이 바로 소토마이어였다. 소토마이어가 살인피해자의 여동생을 심문했을 때 배심원 가운데 눈물을 흘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소토마이어 판사는 타잔사건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했으며, 법정에서 인상적이고 권위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능력있는 실무자로서 복잡다단한 사실관계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종합했으며, 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 절대로 잊지 않았다.
수많은 검사들처럼 소토마이어 판사는 검찰에서 직무를 수행한 다음 그곳을 떠나 법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계속해서 추구했다. 사실 나는 1991년에 그녀가 남뉴욕주 미국 연방법원의 연방판사로 임명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녀의 어려운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자수성가의 본보기로 볼 수 있는 그녀의 다분히 미국적인 이야기는 많은 면에서 중국계 미국인이 나의 이야기를 반영하기도 한다.
앞으로 소토마이어판사의 자격, 법철학, 인격, 인종 그리고 성(gender)은 면밀하게 분석될 것이다. 그러나 맨해튼 지역 검찰청에서 강인하고 능력 있는 검사로서 그녀가 쌓아 올린 경험이 오바마 대통령이 강조한 ‘삶의 현장’에서의 경험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를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비판의 대상이 되나,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이 땅 가장 높은 법원인 대법원에서 현재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Monday, August 10, 2009
삶의 현장에서 실력을 쌓은 후보자
Posted by
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at
11:1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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