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ugust 25, 2009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사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사 "사랑합니다..존경합니다"


- 문규현 신부 -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죄스럽습니다. 어둡고 안타까운 나라 걱정 속에 먼 길 떠나시게 해서 죄스럽습니다. 님께서 평생 동안 온 몸 온 정신을 다해 쌓아올리신 민주주의와 인권, 민족화해라는 그 장엄하고 숭고한 역사를 탄탄하게 발전시켜 더 좋아진 나라, 긍지와 희망 속에 님을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님께 빚진 역사, 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한없이 많은 저희가 이 무겁고 암담한 현실 앞에서 다시 님께 의지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통하게 보내드리고, 파괴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광장을 바라보며 저희 마음도 자근자근 부서지고 많이 아파서 다시 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님이 희망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오래 사시라, 조금만 더 저희와 함께 하며 이끌고 품어주시라 투정했습니다. 떠나실 시간이 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가지 마시라 붙잡았고,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일에도 어쩌면 좋겠냐고 님께 기댔습니다.

님께서는 결코 국민을 탓하고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변함없이 국민에 대한 신뢰,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하셨습니다. "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다시 보고 싶다, 답답하다, 슬프다'는 댓글을 볼 때 국민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고 일기에 적으셨습니다. 걷기조차 불편하고 힘든 몸, 목소리내기조차 어렵게 날로 쇠약해지면서도 마지막 시간까지 국민에 대한 충실함, 역사적 상황에 대한 통찰과 과제 풀기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몸은 늙고 병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헌신, 노력하겠다.’고 매일 정성을 다해 다짐하며 마지막 한 점 한 점의 기력조차 다 내놓고 바치신 님, 부족하고 미흡하기 짝이 없는 저희를 그래도 믿으며 “후배님들, 뒷일을 잘 부탁합니다.” 하고 큰소리로 웃으신 님,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저는 님께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시던 199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방북하였다가 돌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된 바 있습니다. 당시 방북은 1989년 8월 당시,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있던 임수경 학생과 동행하여 남으로 내려오도록 사제단이 저를 파견한지 10주년 됨을 기념한 것이었습니다. 정부당국이 사제단 방북을 동의해주어 참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서울로 귀환한 뒤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저는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보수세력을 의식하고 달래기 위한 처사였을 겁니다. 아픈 기억입니다.

그러나 그 쓰린 사건조차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민족의 역사를 위해 바쳐진 작은 희생제물이었습니다. 님께서 남북정상회담을 결단하시고 마침내 남과 북 정상이 평양에서 포옹하던 2000년 6월의 역사적 순간, 6.15 남북공동선언문이 발표되던 그날 그 때, 저는 제 상처와 아픔을 다 치유했습니다.

님께선 민주주의와 민족화해, 민족통일의 큰 지도자이셨으나, 속내를 보면 우리 모두에게 참된 인생의 안내자요 다정한 스승이셨습니다. 무엇보다 님께선 진정으로 참된 신앙인, 하느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산 참 제자이셨습니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등 수없는 박해 속에서도 역사와 국민을 믿고’자 했던 힘의 원천은, ‘앞으로도 생이 있는 한 길을 갈 것이다.’라며 신념과 생명력으로 가득할 수 있었던 그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 뜻에 대한 한결 같은 충직함이었습니다.

‘긴 인생이었다. 나는 일생을 예수님의 눌린 자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교훈을 받 들고 살아왔다.’-2009년 1월 15일 일기.

님께서는 이 시대 참 신앙인의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한 순교자의 길, 순교영성을 고스란히 온전한 제자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번듯한 말과 화려한 성당 안에 갇힌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억눌리고 고통받는 이들, 서민들, 눈물짓는 이들 현장에 머무신 예수님의 길을 끝까지 잊지 않고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님의 2009년 1월 6일자 일기를 읽습니다.
‘오늘은 나의 85회 생일이다. 돌아보면 파란만장의 일생이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투쟁한 일생이었고,
경제를 살리고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일생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납치, 사형 언도, 투옥, 감시, 도청, 가택연금, 망명..., 개인의 삶에서든, 어느 역사에서든 그 무엇 하나 용납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허나 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겪으셨으니 이 나라 역사에 그 모든 인장을 자기 삶에 점점이 다 새긴 사람이 님 말고 누가 있습니까. 그 험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도 한 점 후회 없이 이토록 담담하고 아름답게 생을 정리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지난 6월 11일, 63빌딩에서 진행된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연설에서 하신 말씀을 또한 기억하고 기억하겠습니다.
"우리나라 도처에서 이명박 정권에 대해서 민주주의를 역행시키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독재자가 나왔을 때 반드시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지금, 그토록 안타까워하시던 남북대결과 단절이라는 상황조차 님의 서거 속에 다시 조금씩 풀리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남북 간에 하늘 길, 땅 길, 마음 길이 다시 열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하신 용산참사 희생자 가족들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의연하게 진실을 찾기 위한 치열한 싸움의 길에 있습니다. 그들도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님께서 언제나 믿어온 국민의 힘은 바로 이런 것인가 봅니다.

떠나시는 마지막 순간조차 국민과 민족의 운명을 안쓰러워하며 나아가야할 방향을 안내하시는 님. 님과 함께 한 정의와 평화의 여정, 화해와 통일의 역사는 참으로 행복하고 위대한 시간이었습니다. 님과 같은 지도자를 만나 저 험한 세월을 이겨온 저희 인생도 아름다웠노라고, 발전하는 역사 속에 함께 했음도 크나큰 자부심이라고 고백합니다.

님께서 온몸으로 일구고 온몸으로 가르치신 인생, 역사, 사랑, 헌신, 이제 저희 몫입니다.
후세들은 님에게서 배웁니다. 일기에 적으신 것처럼,
인생은 얼마만큼 오래 살았느냐가 문제가 아님을.
얼마만큼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았느냐가 문제임을.
그것은 얼마만큼 이웃을 위해서, 그것도 고통 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느냐가 문제라는 것을. - 2009년 1월 14일.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님.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마지막까지 국민을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이제 한 가닥 연민과 눈물의 무게조차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십시오. 남은 역사적 과제들일랑 용기를 내어 예수님 뜻을 따르는 이들, 정의와 평화의 사도들에게 맡기고 주님 품안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드십시오.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하셨으니, 이제 민족의 혼, 민족의 정신이 되시어 남과 북 훨훨 자유롭게 다니시며 금수강산 온 산천 진달래랑 갖은 꽃 모두 누리십시오. 진달래 영산홍 지천일 때, 님을 보는 듯 활짝 반기겠습니다. 님의 영원한 반려자 이희호 여사의 연서를 빌어 저희도 님께 마지막 인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2009년 8월 22일 문규현 신부 드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다

창비주간논평. 8/12/2009 9:33:52 AM Comments (0)

조광희 / 영화제작자

신문을 읽다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프랑스어 표현을 주제로 한 칼럼들을 1년에 평균 3번 정도는 접하게 된다. 이 표현은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사회지도층에게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그 예로는 각종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여 숨진 귀족이나 고위층 자제들의 이야기가 단골 메뉴처럼 거론된다.

이 말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신입생 설명회 때였다. 어느 교수님이 칠판에 처음 보는 알파벳을 적으면서 "여러분들은 사회에서 선택된 사람들이니 사회에 대해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교수님이 전수해준 그 말은 이상에 가득 찬 어린 학생들에게 각별한 감정을 자아냈다. 나 또한 그것을 자긍심과 책임감이 뒤섞인 묘한 느낌으로 받아들였는데, 생각해보면 자극받은 선민의식 때문에 상기되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숭고함으로 포장된 그 감정에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어딘지 석연찮은 선민의식, 그 속에 숨은 욕망과 권력

그후 나름대로 세파를 겪으면서 그 표현에 내포된 불순한 점에 대하여 좀더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그 표현은 내게 대학입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생이 언론 인터뷰에서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법무부장관이 '불법시위나 파업을 엄단하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수사로 여겨진다.

물론 나는 이 표현의 의미를 진실하게 체현하고 있는 우리시대의 많은 고결한 인물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예외적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레토릭의 이면에는 집요하고 끈질긴 사회적 욕망과 권력관계가 은폐되어 있다. 이 표현의 수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과연 무엇일까.

일본의 비평가로서 사상가의 반열에 근접한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의 주장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근대국가를 '자본=국가=네이션'라는 삼위일체의 공식에 의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그의 논지는 자본, 국가, 네이션의 삼위일체가 완성됨으로써 근대국가가 형성되었고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네이션'은 특히 감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다. 월드컵 경기에서 자기 나라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놀라운 열기를 보라. 그 열정은 그들이 속해 있는 네이션, 즉 국민국가에 대한 공통의 소속감에 의하여 분출되고 있다. 깊이 성찰해보면 그러한 태도는 매우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집요하게 작동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으며 그것은 비논리적이라는 지적만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근대국가와 신분제 떠받치는 '교환의 양식'

한편 자본뿐만 아니라 국가나 네이션도 넓은 의미에서 경제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코오진은 이 세가지를 '교환의 양식'에 의하여 구별하고 있다. 즉 자본제가 '상품의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면 국가는 '일방적 취득과 재분배라는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지고 네이션은 '호수적(互酬的, 호혜적) 교환'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일상생활에서는 듣기 어려운 '호수적 교환'이라는 표현은 예를 들어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 부모가 아이를 댓가 없이 양육하는 것 등을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 세가지 교환양식은 근대국가에서 서로 보완적으로 작동된다. 가령, 각자가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한 결과가 경제적인 불평등과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된다면, 국민의 상호부조적인 감정에 의해 그것을 완화하고, 국가가 자본의 방종을 규제하며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근대국가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코오진이 말한 호수적 교환의 일면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신분제도가 유지되고 있는 사회에서 지배하는 자가 지배되는 자로부터 복종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하여 모범을 보이려는 동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는 갸륵한 일이지만 사회적으로 생각하면 결국 신분질서를 공고히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배자가 복종의 동의를 얻는 수단

어느 불평등한 사회든 지배하는 자가 힘으로만 씨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버겁다. 이때 소수의 지배하는 자가 다수의 지배되는 자를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법은 그 지배가 정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강자이기 때문에 지배할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안하다. 그것은 지배되는 자가 힘이 더 세지면 뒤집을 수도 있다는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보다 좋은 방법은 지배하는 자가 공동체를 위하여 헌신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다. 그것만큼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심리적 메커니즘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노예제 사회도 아니고 봉건제 사회도 아니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 민주공화국에서 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소환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사회가 사람들의 집단적 무의식 수준에서는 여전히 신분사회이며, 그 부당성과 불안정성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통해 보완되어야 제대로 작동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좋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반드시 물어보아야 한다. 혹시 고귀한 신분을 아예 포기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와 기꺼이 우리와 같아질 용의가 있느냐고.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존경받을 만하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우리를 위해 헌신할 수는 있지만, 우리와 같아질 생각은 없다면 그들이 말하고 행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차원의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과 기제가 수상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이끌어주는 이른바 '고귀한 신분'을 가지신 분들이 얼마나 자기희생을 하는지, 얼마나 높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시비를 거는 내 자신이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대통령께서 재산을 헌납했지만 천하를 얻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를 뒷마무리하는 것일 뿐이고, 어느 재벌의 사회공헌 약속은 형벌을 적게 받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은 더 큰 것을 얻기 위하여 작은 것을 내놓아 마침내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것의 최대치를 얻기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거나 임명될 뻔했던 사람들의 투기와 범법으로 점철된 삶의 궤적을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저잣거리의 평범한 이들보다 낫기는커녕 일신을 위하여 각종 편법을 실천한 결과일 뿐이다. 그들은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승리한 맹수이자 생존의 명수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들의 천국에 사는 그들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이 불평등한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려는 궁여지책일 뿐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여우의 지혜조차 없다.

그런데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배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천만다행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견고한 신분질서 속에서 그저 강자일 뿐인 그들을 존경까지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보다 끔찍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존경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반대로 이 사회가 결국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희망에 찬 전망으로 이어진다.

공화국 시민의 의무와 법이나 잘 지켜라

대한민국은 누가 무어라든 민주공화국이다. 만일 아직 아니라면 언젠가 반드시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별로 그럴 생각도 없는 그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간청하지 말자. 그들은 그런 수준이 못된다. 대신에 그들에게 누구나 지키는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의무나 제대로 하라고 말하자. 법이나 제대로 지키라고 요구하자. 살기 위해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방패로 내리찍지 말라고 외치자. 그리고 자원과 기회와 미디어를 독점하지 못하게 저항하자.

그러고 나서도 당신에게 마음의 여력이 있다면, 공화국 시민의 법과 의무도 준수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 저들을 차라리 불쌍하게 여기자.

2009.8.12 ⓒ 조광희

Friday, August 14, 2009

노무현 최후의 인터뷰


펌] (시사IN)김용주http://yucheol.byus.net/xe/261932009.08.14 12:19:22 (*.87.60.104) 80

“검찰 장악 시도했다면 나도 미래도 타살당했을 것”



노무현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인터뷰를 최초로 공개한다. 지난해 8월 진행된 이 인터뷰는 현재까지 알려진 생애 최후의 인터뷰이기도 하다. 한·미 FTA, 검찰과 언론, 남북 관계 등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100호] 2009년 08월 10일 (월) 13:50:34 정리·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지 난 5월 서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8년 2월 퇴임 이후 한 번도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친노 인터넷 사이트 ‘서프라이즈(www.seoprise.com)’는 지난해 8월27일 봉하마을 사저에서 노 전 대통령과 한 시간가량 단독 인터뷰를 했다. 당시는 ‘대통령 기록물’과 관련된 논란으로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진이 소환되는 등 전·현 정부 간의 갈등이 고조되던 때다.

서프라이즈는 당시 주간지 <시사 서프라이즈> 창간을 계획하고 있었고, 창간호 기획으로 노 전 대통령 인터뷰를 준비했다. 노 전 대통령은 서프라이즈에 대한 마음빚을 갚는 차원에서 인터뷰에 응했지만, 창간호 발간이 불발되면서 이 인터뷰는 공개되지 못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인터뷰에서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은 지배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사진은 봉하마을을 찾은 관광객들과 만나는 생전의 노 전 대통령.
<시사IN>은 서프라이즈로부터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인터뷰 전문을 입수해 최초로 공개한다. 노 전 대통령의 육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편집은 최소한으로 했고 원문 그대로 경어체로 정리했다. 인터뷰는 신상철 서프라이즈 대표가 진행했으며 이기명 서프라이즈 회장도 배석했다.

이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은 진보 진영과의 관계, 이라크 파병, 대연정, 한·미 FTA 등 굵직한 정치적 고비에 대한 소회, 검찰에 대한 생각 등을 담담하게 밝혔다. 임기 중 아쉬웠던 점을 묻는 질문에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고, 참여정부 인사 솎아내기와 남북 관계 경색 등 당시 현안을 두고 날 선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검찰에 대한 생각을 밝히면서, “검찰 장악을 시도했다면 나도 미래도 타살을 당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은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든다.


퇴임 후 6개월간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제 일 중점을 뒀던 게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인데, 그게 예정보다 반년이나 더 지체됐지만 어쨌든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봉하마을에 생태농업을 도입하는 일도 하고 있는데, 재임 중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가고 있고…. 그 외에는 주로 뜻밖의 상황이 이런저런 일들을 지체시키고 있는데, 손님이 생각보다 많이 오시는 것하고, 그 다음은 정부에서 좀 보자는 거 그런 거지요.

정부에서 보자는 것은 뭘 말하시는 건지?

(웃음) 기록물 얘기라든지 그런, 조금 생각지 않았던….

찾아오시는 분들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예 상하지 않았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차질이 생기는 게 사실이죠. 좀 놀고 싶었는데, 그것도 조금 차질이 생기고, 농사일에도 좀 타이트하게 참여했으면 싶었는데 어렵게 됐고, 민주주의 2.0도 초기에는 시스템 개발 과정을 주도하다가 지금은 나는 놓쳐버렸습니다.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워가지고 몸서리가 쳐져요.

지난해(2007년) 참여정부 평가포럼 강연에서 ‘시민민주주의’라는 화두를 꺼내셨습니다만, 사실 민주개혁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까 하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 내가 인제… 민주개혁 진영과 진보 진영이라는 구분을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런 구분을 들어도 기준이 뭔지 얼른 감이 오지 않고 그렇습니다. 그거는 내가 그쪽을 대체로 포괄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구별을 하지도 않고 또 얼른 감을 못 잡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보주의라는 것은 민주주의에 내재한 가치다”라는 말을 한 일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가장 획기적인 진보의 역사거든요. 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좁은 의미에서의 진보의 이념들도 본래 민주주의의 가치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대선 때나 참여정부 시절 진보 진영과의 관계를 보면 그렇게 포괄적으로 보기만도 어려운 것 아닙니까?

나 는 뭐 그 문제에 대해서 고심을 참 많이 했던 편인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오늘의 현상을 보면서 내린 결론이 “내버려둬라”입니다. 논의로써, 토론을 통해서, 대화를 통해서 통합되는 것이 아니란 거지요. 결국 정치에는 진보 노선과 보수 노선이 있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또 항상 점진주의와 급진주의가 존재하거든요. 어느 세력이 더 커지나 하는 것은 역사적인 조건, 그 시기의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정치 세력의 그 시기의 노선, 여기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데, 그 흐름을 결정하는 힘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의로 풀 문제가 아니라 각자 갈 길을 가다보면, 그 갈 길 중에는 협력도 있고 통합도 있고 분열도 있고 그런 것이 정치의 자연스러운 현실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론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검찰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위는 지난 4월30일 검찰에 소환되는 노 전 대통령(가운데).

임기 동안 흡족하게 생각하시는 부분과, 아쉬운 부분을 꼽는다면 어떤 점일까요?

흡족한 게 뭐가 있을까? 그게 참, 지금 뭐 완결된 것이 하나도 없는 거 같아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 정치 풍토에 국민의 선택을 교란하는 요인이 있거든요. 지역주의라는 것은 국민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교란하고 방해하는데, 그런 지역주의를 비롯해서… 아마 그런 것이… 그런 것이 완전히….

아쉬움으로 남으시는….

너무… 예, 완전히….

누구나 인정하는 것은 노 전 대통령께서 권위주의를 타파한 부분인데요. 하지만 지금 검찰의 모습을 본다면 너무 빨리, 속된 말로 풀어줘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습니다.

전 두환 대통령 이후로 검찰을 장악했던 정권은 없습니다. YS 정권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검찰을 많이 활용했죠. 활용했는데 결국 검찰권에 의해서 무너졌지 않습니까? 그 다음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도, 말하자면 정권을 도와주던 검찰이 있었겠죠. 하지만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정권을 흔들었던 검찰 또한 존재했습니다. 다 검찰 아닌가요? 그걸 인정해야 됩니다. 일사불란하게 검찰을 장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입니다. 언론을 때려잡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언론 권력과 검찰 권력이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언 론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검찰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자꾸만 옛날 생각 하고 나더러 왜 검찰을 장악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그걸 하려 했다면 일부 검찰과 결탁하는 결과를 낳았을 겁니다. 일부 정치검찰과 결탁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검찰을 장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걸 사람들이 참 몰라요. 장악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장악하고 일부 검찰과 결탁했을 때, 그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고, 결국은 정치에서도 민주주의에서도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나도 미래도 타살당하는 것이죠. 난 그렇게 상황을 봤기 때문에 검찰은 자기 갈 길 가도록 내버려두고, 검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도록 그렇게 관리를 한 것이죠.

(이기명 회장) 노무현이란 정치인은 아주 기막힌 직관력을 가졌다고 느낍니다.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뭐, 법대로 가는 거죠.

(이) 법대로요? 법대로 안 가면요?

뭐 내 얘긴, 무슨 큰 정치적 이변은 없을 겁니다. 국정 운영의 본질적인 문제로 어려움은 계속 있겠지만 정치적 상황을 관리하는 것은 점점 안정되어갈 거예요.

(이) 자꾸자꾸 정부를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다보면….

내 가 대통령 하고 있을 때, 열린우리당 사람들이 저만 찾아오면 한나라당 깨질 거라고 얘기했어요. 그 전제를 가지고 자기네들 할 일은 게을리 하고 있었어요. 내가 한 번도 응수를 안 했어요. 한나라당이 깨지긴 왜 깨져, 자기들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들인데. 쇠고기로 이명박 대통령이 퇴진할 거라는 생각은, 일반 시민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정치를 하거나 직업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무책임한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만날 낙관적이었다 깨지고, 상대방이 몰락할 거라고 그러는데.


“대통령이 되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더러 해야 됩니다. 이라크 파병이 그렇습니다.” 2004년 이라크 자이툰 부대를 방문한 노 전 대통령.

대연정 제안을 현 시점에서 평가하신다면?

그건 뭐 헛발질 한번 한 거지. 이론적으로나 전략적으로 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어쨌든 그 당시에 적절한 행보는 아니었다고 봐야지요.

어제 봉하마을을 찾은 손님들에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은 진보 성향이지만 아주 보수적인 정권이었다”라고 하셨는데요.

내 가 얘기했던 건, 정권이 할 수 있는 일이 유럽의 아주 보수 정당 수준만큼도 못 됐으니까 결과적으로 보수적 정권 아니겠느냐 하는 그런 역설이지요. 진보 정책 한다고 최선을 다했지만, 한나라당과 비교해서 명확히 차별적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만, 우리나라 정부의 성격상 유럽의 어떤 보수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뜻으로 얘기한 거거든요. 말하자면 그만큼 우리가 보수에 기울어 있다, 진보가 그만큼 미미하다 그런 뜻이죠.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같은 부분이 대표적인 예가 될까요?

이 라크는 그냥 그렇게…. 대통령이 되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더러 해야 된다, 이라크 파병이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하는 일에는 기분 좋아서 하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게 첫 번째고, 두 번째 한·미 FTA는 결국 개방이냐 쇄국이냐 이 논쟁은 의미 없는 것이고, 개방의 속도를 어떻게 할 거냐 이거 아닙니까? 난 속도가, 그만한 속도가 필요하다고 봤다는 것이죠. 나는 현재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이것은 약간 도전적인 선택으로 적절하다고 봅니다. 또 하나 불가피한 측면이 있습니다. 중국과 FTA를 한다고 하면 언제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까? 그걸 언제로 할지 전제를 해두고 구조조정을 해야 하거든요. 사람을 쫓아내는 것이 구조조정이 아니고 경제의 체질개선을 해야 하거든요. 아무 충격 없이 준비가 되냐? 충격 없으면 준비를 안 해요. 그러니까 그 앞에 그보다 충격이 작은 FTA들을 거치면서 국내의 구조조정을 강요해나가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한·미 FTA는) 중국과의 FTA를 생각하면 불가피한 것이었고, 우리 민족의 수준과 역량을 봐서는 다소 도전적인 선택으로 나는 뭐 적절하다, 그리 생각합니다.

미국보다는 중국이 더 큰 문제라고 보신 건가요? 일부 반대론자는 중국·일본과 먼저 한 다음에 미국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는데요.

그건 현실적인 조건을 전혀 도외시한 얘기입니다. 품목 하나하나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아는 것이죠. FTA라는 것은 그 분야와 품목을 하나하나 따져서 예측해나가야 하는 것이죠.

참여정부 초기에 여당 내에서….

FTA 한 가지 더 얘기할게요. 개방 반대론자들이 걱정했던 일은 여러 번 개방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IMF와 금융개방 사태는 상관관계가 있죠. 그러나 당시 거기에 대해 예견해서 반대한 목소리를 나는 기억을 못합니다. 한·칠레 FTA까지, 그렇게 떠들었던 사태는 다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 초기 여당 내에서 이른바 ‘개혁과 실용’ 논란이 있었습니다. 지금 민주당이 또다시 그 논쟁을 재연하는 분위기인데요?

개혁과 실용의 차이를 아직 모릅니다. 현실적인 조건을 존중한다는 것이 실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개혁론자 중에 현실에 맞지 않는 개혁을 하자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걸 구분하고 논쟁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죠.

“지켜줘야 할 사람이 안 지켜주고 사표를 내버리니까 엉뚱한 결과가….” 지난해 8월6일 해임 압력을 받던 정연주 당시 KBS 사장의 기자회견.

참여정부 초기에 당정 분리를 너무 일찍 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거는 내가 한 게 아니고, 이미 다 당정 분리가 되어 있었어요. 내가 당선될 시절에 당정 분리가 거의 국민적 합의 수준까지 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헌·당규에 당정 분리가 돼 있었고요. 물론 나도 동의야 했고, 존중해야지. 당정 분리를 안 하겠다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어요? 공천권 행사하겠다? 당직을 내가 임명하겠다? 당헌상 불가능해요. 그 다음에 정무수석 가지고 자꾸 그러는데, 총재가 당을 지휘할 때 승지 노릇을 하는 사람이 정무수석입니다. 옛날 승지 시절 정무수석이란 게, ‘대통령 의중이 이거요’ 하고 은밀히 말 전하러 다니던 사람이죠. 세상이 바뀌었는데 생각을 안 바꾸니까 자꾸만 정무수석 부활하라고 하는데, 그거 부활하면 당정 관계가 풀리나 어디? 본질의 문제가 따로 있는데 어떻게 당장 부활시키겠어요. 당정 협의는 장관들이 다 분야별로 하게 돼 있습니다. 그건 정무수석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곧 10·4 선언 1주년이 됩니다만, 정권이 바뀌자 남북 간 합의가 연속성을 갖지 못하는 듯합니다.

분 단 국가에게는 통합이 지상 명제지만, 현실 권력은 통합을 위해 자기 권력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통합이라는 대의는 정쟁의 수단이거든요. 지상 명제가 실제로는 수단이 되어 있는 이 모순관계를 뛰어넘게 하는 것은 국민적 압력이죠. 이런 모순관계를 이해한다면, 정치인들이 통합이라는 것을 두고 ‘무슨무슨 방안’ 하며 갖고 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국민과 역사 앞에 정직하게 서야 합니다. 이 국민의 요구는 ‘대화’인데 권력이 대결적 사고를 가지고 남북 관계를 하면 안 된다는 게 본질이거든요. 남북이 다 그렇지만, 적대관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외교의 일반 원칙조차도 지키지 못한단 말이에요. 기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국민의 피로도가 높습니다. 민주주의의 큰 틀마저 위협받는다고 걱정합니다.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을 뿐인데,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뭔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나는 국민의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수준이 2002년에는 높았는데 갑자기 낮아졌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하 지만 문제는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들의 수준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감사원장이 사표 내버렸지 않습니까? 지켜줘야 할 사람이 안 지켜주고 사표를 내버리니까 감사원에서 정연주씨를 두고 엉뚱한 감사 결과가 나오는 것이죠. 또 KBS 이사회 이사장이란 자리가 무슨 보통자립니까? 무책임하게 사표 내고 나와버리니까 이사회가 저렇게 굴러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민주주의라는 것이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직분에서 그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겠다는 결의를 가지고 일을 해줘야 하는 것인데, 이번에 보니 뭐 일괄사표 내라니까 줄줄이 내버리고 그러니까 자유를 지킬 수가 없는 것이죠. 권력기관에 있는 공무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국민이지 않습니까? 두려움에 떨고 눈치보고 꼬리 내리고 그게 지금 행동양식이지 않습니까?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은 지배하기가 어렵습니다. 너무 쉽게 무릎을 꿇으니까 그러는 것이지요.

퇴임 이후 어떤 매체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록물 문제라든가, 여러 모로 정치적 발언을 요구받는 분위기가 됐는데?

나 는 정치행위를 하는 게 없어요. 그냥 당사자로서 내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죠. 그 다음에 시민으로서 진보가 뭐냐 보수가 뭐냐 그런 거 설명하고, 필요할 때 그런 해설 글도 쓰고. 가끔 하는 얘기죠. 엊그제 찾아온 손님들에게 한 그런 거. 특별히 정치 현안에 대해서 내가 말하는 게 없어요. 정치행위가 아니라, 시민적 권리 행사죠. 내가 요즘 정치 얘기 한다고 해도 현실정치에 대해선 전혀 얘기 없이 ‘사고의 프레임’을 얘기하지 않습니까? 사고의 프레임을 제대로 잡아나가야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시민적 역량을 갖출 수 있거든요. 그러나 사고의 프레임이라는 것은 추상적이고 원리적이고 딱딱하거든요. 그것을 구체적인 사례를 가지고 설명해 나가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저는 저 스스로를 교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Tuesday, August 11, 2009

종교 공동체는 초법적 기관이 아니다

전과 있는 이는 차별의 대상일까?

비록 크고 작은 전과가 있는 이라 할지라도 한 국민으로서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법률로 보호된다. 즉 민주사회에서는 전과자라 하여 공개적으로 배타 차별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행위를 하는 사회 집단이 있다면 제아무리 종교라는 미명아래 스스로를 감춘다 하여도 반인권적인 집단의 속성을 버릴 수 없다. 법률이 보호하는 한 개인의(전과자의) 인권을 종교 집단이 거룩의 이름으로 차별하는 경우가 되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의 법은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법을 어긴 이에게 일정기간 범법행위의 정도에 따라 벌금, 강제노역, 구금, 징역형에 처할 수가 있고 특정한 경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제한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반드시 공정하고 투명성 있는 공개재판을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단 범한 죄에 대하여 형을 받고 나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그 죄를 근거로 다시 재판에 붙여 추가로 죄를 물을 수 없다. 더구나 이런 사유를 들어 공개적으로 낙인을 찍는 행위는 야만적 습성일 뿐 현대 민주사회에서는 그런 야만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런데 종교 공동체가 종교 공동체의 거룩함과 도덕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종교집단 구성원의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을 사회법에 의하여 저촉 받은 사실을 근거로 제한하려 한다면 이것이 거룩의 이름으로 정당하다 할 수 있을까? 비록 종교 공동체의 거룩함과 도덕성을 지키려는 충정에서 나온 합의라 할지라도 이는 근대 인권론과 민주사회의 기본권 이해에 미달하는 조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법은 전과가 있는 이들을 민주사회의 보루라 할 수 있는 인권법을 어기면서까지 차별 배제함으로써 종교집단 안에서 피선거권을 영구히 박탈하는 악법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크고 작은 전과 사실이 있는 이들은 감리교회 안에서 평등권을 누릴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결코 자랑 거리가 못된다. 이런 법의 지속을 요구하는 논리는 결국 교회법이라는 제도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원한이나 증오와 미움의 대상이 된 이를 민주사회 안에서 낙인찍고, 영구히 참정권을 박탈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가 감독회장이 되고 안 되고는 논자들이 결정할 것이 아니라 투표권을 합법적으로 행사할 총대들의 몫이 아닐까?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비난을 섞어 인신공적적인 언행을 일삼는 이들을 나는 설득할 생각이 없다. 이 문제는 인권에 대한 자신의 인식 정도의 문제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인식능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각 개인의 지성과 이성 그리고 감성을 따라 판단할 문제로 남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개인적인 차원에서 각기 나름대로 색다른 이해를 가지는 경우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민주사회에서 권위주의를 옹호하는 자도 있고, 내 편 제 편 갈라 싸우는 이도 있는 까닭이니 어찌 이 모든 일에 간섭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평소에 차별적 인식과 행동에 익숙한 이들은 쉽게 교정되지 않는 법이다. 이런 일이 쉽게 교정될 수 있었다면 어찌 보편적 인권선언문이 나치의 잔혹한 역사를 경험한 후에 나왔겠는가? 나는 평생을 목사요 교육자로 살아온 분이라 할지라도 인권감수성이 취약하면 공동체 내의 소수자의 인권과 생존권을 함부로 박탈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에 꺼리낌이 없는 얼굴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과연 전과자를 전과자라는 이유로 낙인을 찍고 차별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다. 교회는 거룩의 이름으로 전과자의 피선거권을 영구히 박탈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민주사회에서는 전과 사실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빌미로 인격과 존재를 차별하기 때문에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 그렇다면 전과 사실이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차이가 없는가? 이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신앙과 신념에 따라 답할 문제이지 교단법을 만들어 교단 구성원 모두가 담합적으로 차별해야 할 책무를 가지는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전과사실을 근거로 그에 대하여 선호의 판단을 개인적으로 내리는 것은 개인의 도덕성과 인격과 양심의 기준에 따라 다양할 수 있지만, 제도적으로, 집단적으로 그런 기준을 설정한다면 그것은 집단이 한 개인을 차별하기로 약속한 야만의 증표다. 이런 증표를 가지고 있는 집단은 그 논리가 양심과 종교공동체의 도덕성과 영성을 지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변명할지라도 야만의 증표를 가진 집단의 속성을 버릴 수 없다.

이런 주장을 하면 일각에서는 논리를 단순화시켜서 전과자를 그것도 고의로 다른 이를 해한 사람을 감독회장으로 뽑으라는 것이냐 하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단순한 논리를 들어 반론을 제기하는 이의 정당성에 대하여 진실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전과가 있는 분을 감리교회의 수장으로 뽑느냐 안뽑느냐는 논자들의 책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의 구조대로 한다면 총대들이 할 책무다. 총대들이 그런 분을 감독회장으로 뽑을까 두려워서 그런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면 이는 오히려 인권침해의 논리일 뿐 아니라 누군가에 대하여 비난 여론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감리교회의 총대들의 인격과 그들의 공정한 판단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의회적이며, 반민주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도대체 전과가 있는 분이 교회의 지도자를 뽑힐 것을 “두려워하여” 인권을 침해하는 규정을 만들어 놓는 교단이 어디에 있는가? 감리교회의 도덕성은 그런 방식의 반인권적인 통제, 배제, 차별의 원칙을 통해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감리교회는 감리교회의 신학적인 기반위에 세워진 교회다. 죄인들을 구속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거듭난 이들이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義認)을 받은 자가 되어 [의인(義人)이 아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감리교회다. 부디 누군가 무엇인가 주장을 하려면 개신교의 신학적인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내에서 주장하시기 바란다. 죄인을 구속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사회법을 근거로 “네 죄가 내 죄보다 크다 아니다“를 외치고 있는 이들은 사실상 복음에서 떠난 사람들이 아닐 수 없다.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돌을 든 자들이 예수의 권고를 거부하며, 집단의 의와 개인적 의를 지키기 위하여 돌로 치겠다는 율법주의자들의 형국과 무엇이 다른가? 도대체 무엇을 그리도 두려워 이런 주장들을 하시는가?

감리교회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 의회에서 대표자를 뽑는다. 게 중에는 이명박 대통령처럼 전과 사실이 있거나 이를 감추려 했던 이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전과가 없다 할지라도 교묘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생을 살거나 혹은 비겁하게 다른 이를 제물 삼으며 살아온 파렴치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감리교회 안에는 사회법이나 교회법에 저촉을 받지 않고 살아온 분들이 절대 대다수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감리교회는 유독 왜 피선거권자의 자격을 제한하기 위하여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차별조항까지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 이런 법이 없으면 살인죄라도 저지는 사람이 감독회장이 될까 두려웠던 것일까? 이런 논리를 수용한 태도에는 교회를 지키기 위한 떳떳함이 없다. 그런 분이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있는 현실이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만든 궁여지책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크고 작은 전과가 있는 이를 영원히 낙인찍으라는 법이 민주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그런 원칙을 따라 목회를 해 왔고, 그렇게 자식들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할까?

나는 우리 감리교회법에 담겨있는 차별조항은 복음의 정신이나 떳떳한 정신에 기반 해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파당성을 쫒아 온 이들이 상대 정치 파당이 영성과 도덕적 질문을 파기하고, 정치적으로 동기화되어 흠결이 있는 이를 대표로 뽑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법은 정치적인 술수를 계산한 법이지, 감리교회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법이 아니다. 왜 민주적 선거과정에서 전과가 없는 이들이 전과 사실이 있는 이에게 패할 것을 예견했을까? 이런 초라한 논리에 감리교회가 휘말려들어가도 좋은 것인가? 따라서 나는 이런 발상 자체에 대하여 합리적인 동의를 보낼 수 없다. 민주적 원칙도 없고, 진실함도 없으며, 나아가서 정정당당함이 없다. 이런 현실이 초래된 것은 우리 감리교회 안에 있는 정치적 파당성이 영성이나 도덕담론보다 우월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누군가 개인을 차별 배제함으로 화근을 막아야 한다는 발상에 앞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4년제 감독제가 도입된 이후 이런 노력을 과연 진지하게 해 왔는가? 그런 진지한 노력보다 전과기록이 없는 이들이 담합하여 전과기록이 있는 이의 신분과 자격을 제한하기 위한 담합을 벌린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전과사실이 없는 지도자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죄를 짓고, 교단에 해를 끼치고, 사람을 차별하며, 공적 예산을 낭비하고, 심지어 더욱 더 큰 불의한 일을 범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인간론이 밝혀주는 죄를 향한 경향성은 이런 논리가 틀린 것이라 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러한 속성을 애써 모른체 하면서 과연 누군가의 지난 흠을 들추어내어 모욕하는 일을 강단에서 복음이라고 외칠 수 있을까? 강단에서 외치는 사랑과 용서가 교회의 질서 속에서는 불통(不通)된다면 그야말로 강단의 신학과 교단 정치 신학은 달라야 하는 것인가? 정말 감리교회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렇게 스스로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란다: 왜 “우리는” 문제가 있는 사람을 감독회장으로 뽑을 수도 있는 총대들을 뽑아 총회장으로 보내는 것일까? 그런 총대들은 누가 키워 낸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두 가지일 수 있다. 비록 흠이 있어도 이 사람이 감독회장이 되어야 감리교회에 변화가 있겠다고 믿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거나; 둘째 우리 감리교회의 총대들이 민주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그 수준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선거는 이런 사실을 뚜렷하게 반영하지 않았는가?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무수한 전과 혐의가 있었지만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민주적 절차는 이 분의 통치방식에 대하여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비판을 제기할 수는 있을 지언정 그에게 위임된 권한을 부정하기보다는 그의 임기를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는 다른가?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달라야 하는 이유는 거룩함을 빙자하여 소수자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소수자를 옹호함으로 거룩해 지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정신이 아니었던가? 과연 우리 사회의 민주투사들이 민주적 절차와 질서를 무시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전과 사실을 트집잡아 얄팍한 도덕주의적 논리를 내세우며 연일연야 신문에 그의 전과를 반복적으로 나열하면 모욕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아니다. 왜 그런가? 세상이 속되어서 감리교 게시판에서처럼 교회의 거룩함을 지키겠다면서 온갖 비인격적인 언어들의 난투극을 벌리는 열사들이 없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진실한 결과는 - 국민이 그를 사소한 전과기록을 포함하여 십여건에 이르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뽑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전과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이 아니라, 다른 후보보다 그가 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소수자들이 전체 국민을 싸잡아 비난할 것인가? 아니다. 비록 소수자들의 눈에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국민의 민의를 존중하는 것이 더 민주적인 것이며 옳은 일이다. 진정으로 감리교회를 바꾸려면 우리는 비난과 모욕이 아니라, 교인들의 도덕적 판단 의식을 높이고, 참된 영적 기준을 정중하게 지켜온 분들을 진정한 지도자로 평가하는 원칙을 지키고 존중하도록 도울 일이다.

인권침해의 소지가 높은 법을 만들어 두고 민의를 재갈 먹이는 일은 도덕주의적일 수는 있으나 민주적인 것도 아니고 복음적인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입장을 야유와 비난을 일삼으며 감리교 홈피를 장악하고 있는 집단이 가진 신율법주의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감리교회 안에는 복음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신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이들이 난폭한 언어를 사용하며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면서 교회를 정화하겠다고 주장하며, 무수한 교회 구성원들의 정서를 파괴하고 있다. 파당성으로 인하여 교회법이 무능해지니 겨우 한다는 것이 사회법을 꼬뚜리 잡아 상대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헐뜯는 것이다. 교단을 개혁하겠다는 이들이 이런 식이라면 어떤 교단을 만들려는 것일까? 합리성도 없고, 인권의식도 없고, 정중함도 없는 그런 교단인가? 히틀러처럼 소수 유태인들의 역사적 전과를 나열하고 그것을 빌미삼아 그들을 차별하고 축출했던 논리를 모방 답습하려는 것인가?

감리교회의 도덕성은 지금 감리교 논객들이 점령하고 있는 교단 홈피에서도 여실히 초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제 서로를 모욕하는 그런 논쟁은 삼가하시는 것이 좋다. 피차의 인격과 인간다움을 지키기에 유익함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민주적 절차에 따라서 자신들이 지도자로 모시고 싶은 분을 자랑하고, 그 분이 정말 교단을 아름답게 가꾸고, 진정한 복음의 정신으로 개혁해 나갈 수 있는 분임을 설파해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누군가가 상대편을 모욕하고, 상대편의 인격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행위를 할 경우 오히려 총대들은 그런 비인격적인 행위를 하는 이들이 지지하는 이를 교단 대표로 뽑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위기감을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오늘의 감리교회 현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이들이 우중(愚衆)민주주의를 두려워하여 민의에 판단을 맡기지 않고 특정한 이에게 제한적으로 적용될 반민주적인 법을 옹호하는 논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전(前) 감독회장은 이런 논리에 뒤 밀려 임기 말 반민주적인 권위의 오용을 기함으로써 교단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오는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한다.

전과가 있는 이가 영원히 파렴치한 전과자로 보이면 그를 선택하지 않으면 될 것이고, 전과가 있더라도 그가 오히려 전과가 없는 이보다 더 나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어지면 그를 지지하여 그가 선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많은 이들이 감리교회의 민의를 담아낼 수 있는 의회적 기능을 맡고 있는 총대들을 젖혀두고 도덕주의적 잣대를 내세우며 절차에도 없는 심판을 내리고 공개 재판을 하며, 일종의 사형(private punishment)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나는 이런 이들은 감리교회의 총대들의 합리적이며 영적인, 도덕적인 판단을 신뢰하지 못하는 반민주적인 분들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이들은 반민주적인 도덕주의자들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존의 질서는 민주적인 것이냐? 이렇게 반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묻는다. 오늘날 감리교회의 총대들을 우중민주주의의 주도자들이 될 수 있는 우려를 가지게 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나는 어쩔 수 없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로 서 있는 목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우리들의 어리석음을 모아 한 개인에게 보복하고, 스스로 의로운 자 인양 주장하는 모습은 무수한 영혼을 돌보아야 할 목사들의 진면목은 정녕 아니다. 종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초법적인 행위를 주장할 수 없다. 초법이 아니라, 법보다 높은 인간애적인 가치를 옹호하는 데에서 그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한다.

진실로 감리교회를 바꾸려면 합리적이며 합법적인 방법을 찾아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모욕을 일삼는 비난과 근거와 논리가 결여된 불평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개혁이거나 혁명이다. 혁명적인 방법은 물리적인 폭력구조가 존재하는 정치사회에서는 가능하다. 헌법적 질서를 정지시킬만한 권력을 장악했을 때 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나 교회는 물리적인 폭력구조가 없으므로, 즉 경찰과 군대를 가지지 않으므로, 이런 발상 자체가 허구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개혁을 하려면 이전보다 더 졸렬한 방식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합리적이고 더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사회법에 호소하며 정치적 이해타산을 하는 방식도 아니고, 온갖 불평과 비난을 쏟아내며 상대를 모욕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성서적인 원칙을 따라서 보다 나은 감리교회를 위한 길을 지혜롭게 모색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은 서로가 진실하고 정직할 수 있을 때 가능하고, 서로를 원수나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협력자요 동역자로 받아들이는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동역자라는 점에서 감리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일원들이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는 한 우리는 파당성의 논리를 추종하는 난폭한 언어의 잔치를 벌릴 뿐, 진정 모두가 바라는 바 합리성과 합법성을 요구하는 교단의 변혁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Monday, August 10, 2009

삶의 현장에서 실력을 쌓은 후보자

글쓴이: Hugh H. Mo (휴 H. 모우)
번역: 박지현 (New York University Law school 재학)

인준절차가 진행되면서 미국 대법원 후보자 소니아 소토마이어의 법경험과 법철학이 모든 관점에서 자세히 해부되며 분석될 것이다. 특히 그 동안 소토마이어 판사를 묘사하는데 사용된 말들 혹은 본인이 쓴 모든 언어가 자세히 분석될 전망이다.

대법원 후보자가 갖추어야 하는 요건으로 오바마 대통령이 지목한 “동정심”이라는 가치의 의미에 대해 정치적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과 소수인종이라는 사실이 소토마이어 판사의 자격요건, 법사상, 그리고 그녀의 헌법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논란도 활발하다. 이런 가운데 나는 대법원판사 후보자로서 그녀의 자격을 가장 정확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그녀가 범죄율이 상당히 높았던 뉴욕시의 검사로 활동했을 당시 그녀의 직무수행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약 30년 전에 맨해튼 지역 검찰청에서 소토마이어 판사와 함께 조검사로서 일을 했다. 소토마이어 판사와 우리의 동료들은 60년대 민권운동과 70년대 베트남전쟁대세대의 부산물이었다. 우리는 이상을 추구하며 세상을 더욱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페리메이슨,” “드렉넷,” 그리고 “네이킷시티”와 같은 텔레비젼 프로그램의 영향을 받아 우리는 검사들이 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검사로 활동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다. 당시 뉴욕에는 난폭한 범죄자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전설적인 맨해튼 검찰장청이었던 로버드 모건다우에 의해 임명되어 범죄의 물결을 막을 직무를 맡았으며, 그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형사법체계 안에서 늘 공정심(성)과 정의를 지키도록 지시를 받았다.

나는 소토마이어 판사를 1980년도에 만났다. 당시 그녀는 신임검사로 임명을 받아 내 밑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녀의 동료들보다 뛰어났다. 소토마이어는 늘 열심히 일했고, 뛰어난 안목이 있었으며, 복잡한 사실관계들을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명료하게 정리하여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곤 했다.

맨해튼 검찰청에 있는 젊은 검사들은 경험부족 때문에 선배검사가 살인사건을 다루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배운 다음에야 살인사건을 맡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토마이어 판사는 벌써 다양하고 복잡한 형사사건을 맡은 경험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동 포르노그래피 사건과 검사측과 D’Alessio and Hyman 사건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살인사건을 아직 맡아보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녀의 첫 살인사건은 나와 함께 맡게 되어있었다. 사건 명은 ‘People v. Richard Maddicks’ 였는데, 사건명의 ‘매딕스’는 ‘타잔 강도’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1981년에서 1982년 사이에 할렘 한가운데서 3개월 동안 건물옥상에서 줄에 매달려 총을 쏘며 창문을 깨부수며 타인의 집에 침입하여 강도와 살인을 저질렀던 인물이었다.

매딕스의 일인 범죄 사건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었다. 세 명이 살해당했고, 심하게 부상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경찰이 12개월 동안 23건의 사건을 조사한 다음에야 비로소 매딕스가 구속되었다. 그 가운데 11개의 사건은 37건의 범죄가 적힌 기소장의 대상이었다. 그는 살인, 강도, 상해, 그리고 다른 범죄 혐의를 받아 재판에 회부 되었다.

타잔 사건은 사실 검사로서 가장 이상적인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다양한 범죄와 파편적인 증거들을 모아 피고인의 정체와 범죄행위를 증명 해야 하는 중요하면서도 도전이 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타잔 사건에 대해 뉴욕주 하위법원의 배심원 앞에서 재판이 열렸다. 4주 동안 시민, 경찰, 병리학자, 수의사, 탄도 전문가, 그리고 심지어 지도제작자를 포함하여 40명의 증인들을 세운 결과 리쳐드 매딕스는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주 교도소에 62년6개월에서 종신형까지 갈 수 있는 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녀의 첫 번째 살인사건 재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토마이어 판사는 본인이 능력 있는 변호사이고 조사관이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수사관들과 함께 범죄현장을 방문하면서, 수사관들, 피해자들의 가족, 그리고 모든 증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검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의 이러한 활약은 매딕스의 형사재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이 복잡한 다수 살인 사건의 수 백개의 파일과 사실관계를 정리하고 분석했으며, 인민1호라고 불려진 사건 다이아그램까지 만들었다. 이 다이어그램은 배심원을 위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사실관계들을 분명하고 기억하기 쉬운 시각적인 자료로 요약한 것이었다.

그 당시 소토마이어 판사는 다른 검사들, 심지어 선배 검사들보다 법정에 설 수 있는 능력이 확연하게 뛰어났었다. 그녀의 법정능력과 감각이 뛰어났기 때문에 나는 40명의 증인 가운데 20명이나 그녀로 하여금 법정에 소개하고 심문하도록 했으며, 내가 사용한 모두 진술을 쓴 사람이 바로 소토마이어였다. 소토마이어가 살인피해자의 여동생을 심문했을 때 배심원 가운데 눈물을 흘린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소토마이어 판사는 타잔사건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했으며, 법정에서 인상적이고 권위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능력있는 실무자로서 복잡다단한 사실관계들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종합했으며, 법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누구를 위해 싸우는지 절대로 잊지 않았다.

수많은 검사들처럼 소토마이어 판사는 검찰에서 직무를 수행한 다음 그곳을 떠나 법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계속해서 추구했다. 사실 나는 1991년에 그녀가 남뉴욕주 미국 연방법원의 연방판사로 임명되었을 때에 비로소 그녀의 어려운 어린 시절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자수성가의 본보기로 볼 수 있는 그녀의 다분히 미국적인 이야기는 많은 면에서 중국계 미국인이 나의 이야기를 반영하기도 한다.

앞으로 소토마이어판사의 자격, 법철학, 인격, 인종 그리고 성(gender)은 면밀하게 분석될 것이다. 그러나 맨해튼 지역 검찰청에서 강인하고 능력 있는 검사로서 그녀가 쌓아 올린 경험이 오바마 대통령이 강조한 ‘삶의 현장’에서의 경험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를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비판의 대상이 되나, 이러한 경험이야말로 이 땅 가장 높은 법원인 대법원에서 현재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