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4, 2009

내가 Barenboim을 좋아 하는 이유






나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비극이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염두에 둔 판단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적이고 진실하며 윤리적인 사유와 판단의 형식들은 현실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세력들에 의하여 추방된지 오래 되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나는 다소 비판적이며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정치도, 종교도, 심지어 교회의 강단도 목사들의 삶 깊숙히 이런 논리와 판단형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도덕적 파산자들을 무수히 목도한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도덕적 판단 능력이 없은 이들이 가진 규범과 척도에 우리의 도덕성이 너무나 쉽게 오염될 수 있다. 그 증거는 정의와 평화의 부재와 그 현실에 대한 방임으로 드러난다.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존재이유를 찾아야 하는 데 그런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다보니 개인주의적 영성과 천박한 교회이기주의를 관철시키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양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정의와 평화의 부재를 경험하면서도 긍정적인 사고가 살길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도 있다. 이들은 긍정적인 사고가 불의의 힘을 얼마나 가공한 폭력으로 바꾸는지는 간과하고 있다. 이들의 삶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진리를 향해 가져야 할 삶의 태도가 무엇인지 반추하게 한다. 정의와 평화가 부재한 자리에서 불의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이들을 칭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의 어리석음은 오늘의 종교가 얼마나 천박하고 헤푼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뻔뻔스러움의 극치다.

종교인으로서 진실한 의미에서 묵상과 명상, 사유의 깊이를 가진 이들이라면 오늘의 세계가 "성공과 승리"라는 표어를 앞세우면서 얼마나 인간 공동성을 해치고 있는지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인간성을 파괴해 온 참혹한 현장에서 범죄자들을 향하여 칭찬과 화해와 평화를 노래한다는 것은 정신이 나가 미친 종교인이거나 현실 판단 능력이 없는 백치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이들은 정의와 평화가 부재한 현실에게 종교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바치면서 아부해온 종교의 오래된 습성이 낳은 자식들이다. 천박한 종교는 이렇듯 너무나 쉽게 천박한 자식들을 낳는다.

나는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을 좋아한다.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그 배후에 서서 이스라엘 지지 성명을 내는 미국 정부 인사들의 부도덕성을 정확히 인식한다. 이들이 상실하고 있는 공동 인간성에 대한 비젼의 상실이 바로 인간성의 말살과 파괴의 힘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바렌보임은 알고 있다. 그는 며칠 전 오스트리아 빈 교향악단을 지휘하는 자리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이 결집되어 살아가고 있는 가자(Gaza)지역 폭격을 위해 이스라엘 공군이 750회나 출격한 사실을 목도하고서 그들의 군사폭력에 의하여 무엇이 파괴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하는 글을 썼다.종교인들의 천박한 언어들에 비한다면 그의 현실인식과 대안적 사고는 인간됨의 고귀함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치 지도자들의 망언에 이어 종교 지도자들의 망언들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실종, 정권에 의한 환경파괴, 천단한 실용성을 앞세운 경제논리의 허구성, 그리고 다원적 사고를 이해할 수 없는 사유의 무능함이 빗어내는 사건들이다. 역사적 경험을 망각한 지식은 천박할 수 밖에 없고, 진실한 현실인식에 근거하지 않은 도덕적 판단은 허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역사적 경험을 반추할 줄 모르고 현실 인식능력이 없는 이들이 완장을 차고 거리를 행보하던 나치의 경험은 1940년대만이 아니라 오늘의 세계에서도 누군가가 겪고 있는 경험이다. 도덕적 판산자들은 악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의 동일성을 매우 단순하게 수량적 차이를 들어 부정한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악의 배양과 증식을 돕기도 한다.

아렌트의 말대로 악이란 이렇듯 "비판적 의식의 결여"를 통해 치명적인 독을 품은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무서운 사실은 비판적 의식이 결여된 자들은 자신이 지금 치명적 독과 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잔혹한 국가주의는 나치의 국가주의로부터 배운 잔혹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속에 살아 남으려는 방법은 그들이 가진 서구적 문명의 우월성과 정치 세력이 낳은 오만을 승리주의다. 그것은 승리가 아니라 끝없는 증오와 분노를 불러 일으킴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입증하려는 이스라엘 강경파들의 전략일 뿐이다. 거기에는 더이상 humanity가 귀한 가치로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 고성능 전투기들을 동원하여 동류 인간을 대량 학살하는 자들이 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나치처럼 비인간화 시키고 있다. 이와 동일한 본질을 지닌 악을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방임하고 조장한다. 간혹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혹은 사소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너무나 쉽게 악을 허용함으로써 우리의 인간됨의 가치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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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렌보임이 신년을 맞으며 기고한 글을 소개한다. 이 글은 미국 택사스에 살고 있는 엄이재운님의 번역을 거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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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za and the New Year”
By Daniel Barenboim

31 December 2008

I have just three wishes for the coming year. The first is for the Israeli government to realize once and for all that the Middle Eastern conflict cannot be solved by military means. The second is for Hamas to realize that its interests are not served by violence, and that Israel is here to stay; and the third is for the world to acknowledge the fact that this conflict is unlike any other in history. It is uniquely intricate and sensitive; it is a human conflict between two peoples who are both deeply convinced of their right to live on the same very small piece of land. This is why neither diplomacy nor military action can resolve this conflict.

저는 다가오는 새해에 단 세가지의 소망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수라엘 정부가 단 한번만이라도 군사적 수단으로 중동의 갈등을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마스 진영이 그들의 관심사가 폭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과 이스라엘은 그곳에 존속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길 바랍니다. 세번째는 온세계가 이 갈등은 역사적으로 다른 갈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길 바랍니다. 이 문제는 유례없이 복잡하고 민감합니다. 하나의 아주 작은 땅에 살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깊이 확신하는 두 민족의 인간적 갈등입니다. 그래서 외교적이나 군사적 행위가 이 갈등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e developments of the past few days are extremely worrisome to me for several reasons of both humane and political natures. While it is self-evident that Israel has the right to defend itself, that it cannot and should not tolerate continuing missile attacks on its citizens, the Israeli army’s relentless and brutal bombardment of Gaza has raised a few important questions in my mind.

저는 지난 며칠간 일어난 일들로 인해 인도적 정치적인 여러가지 이유들로 극심한 우려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방어할 권리가 있고 자국민에 대한 연이은 미사일 공격을 참을 수도 참아서도 안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이스라엘 군의 가자지구에 대한 무자비하고 잔혹한 폭격은 제 맘속에 몇가지 중요한 질문들을 야기시킵니다.

The first question is whether the Israeli government has the right to make all Palestinians culpable for the actions of Hamas. Is the entire population of Gaza to be held responsible for the sins of a terrorist organization? We, the Jewish people, should know and feel even more acutely than other populations that the murder of innocent civilians is inhumane and unacceptable. The Israeli military has very weakly argued that the Gaza strip is so overpopulated that it is impossible to avoid civilian deaths during their operations.

첫번째 질문은 이스라엘 정부가 하마스의 활동에 대해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이 유죄라고 할 권리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자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한 테러러스트 조직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겁니까? 우리 유대인들은 선량한 시민들을 살인하는 것이 비인도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다른 민족들보다 더 민감하게 알아야하고 느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군당국은 가자 지구가 인구 과밀이라 자신들의 군사행동으로 야기되는 민간인들의 사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변명을 합니다.

The weakness of this argument leads me to my next set of questions: if civilian deaths are unavoidable, what is the purpose of the bombardment? What, if any, is the logic behind the violence, and what does Israel hope to achieve through it? If the aim of the operation is to destroy Hamas, then the most important question to ask is whether this is an attainable goal. If not, then the whole attack is not only cruel, barbaric, and reprehensible, it is also senseless.

이 변명은 저의 다음 질문으로 이끕니다. 만약 민간인 사상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폭격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논리가 설령 있다고 한다면 폭력의 배후 논리는 무엇이고 이스라엘이 그것을 통해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가요? 작전의 목표가 하마스를 괴멸하는 것이라면, 물어볼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게 실현 가능한 목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든 공격은 잔인하고 야만적이고 비난받아야할 뿐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If on the other hand it really is possible to destroy Hamas through military operations, how does Israel envision the reaction in Gaza once this has been accomplished? One and a half million Gaza residents will not suddenly go down on their knees in reverence of the power of the Israeli army. We must not forget that before Hamas was elected by the Palestinians, it was encouraged by Israel as a tactic to weaken [Yasser] Arafat. Israel’s recent history leads me to believe that if Hamas is bombarded out of existence, another group will most certainly take its place, a group that would be more radical, more violent, and more full of hatred toward Israel than Hamas.

반면에 군사작전을 통해 하마스를 괴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스라엘은 괴멸후의 가자에서의 반응은 어떠리라 보는겁니까? 150만명의 가자 주민들은 이스라엘 군대의 힘에 존경을 보내며 갑자기 무릅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마스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의해 선출되기 전에 아라파트를 약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하마스가 선출 되도록 하는 것이 [이스라엘에 의해] 권장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최근 역사를 볼 때 하마스가 폭격으로 괴멸된다면 또 다른 그룹이 그 자리를 차지 할 것이라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 그룹은 어쩌면 더 극단적이고 더 폭력적이며 하마스보다 훨씬 더 이스라엘을 증오할 지도 모릅니다.

Israel cannot afford a military defeat for fear of disappearing from the map, yet history has proven that every military victory has always left Israel in a weaker political position than before because of the emergence of radical groups. I do not underestimate the difficulty of the decisions the Israeli government must make every day, nor do I underestimate the importance of Israel’s security. Nevertheless, I stand behind my conviction that the only truly viable plan for long-term security in Israel is to gain the acceptance of all of our neighbors. I wish for a return in the year 2009 of the famous intelligence always ascribed to the Jews. I wish for a return of King Solomon’s wisdom to the decision-makers in Israel that they might use it to understand that Palestinians and Israelis have equal human rights.

이스라엘은 지도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두려움때문에 군사적 패배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군사적 승리를 거둘 때 마다 이전보다 정치적 입지가 더 약화되었는데 그 이유는 급진적인 그룹들의 출현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정부가 매일마다 해야 할 결정들의 어려움이나 이스라엘의 안보의 중요성에 대해 과소평가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장기적 안보에 대해 진정으로 유일하게 가능한 계획은 인접 국가들로부터 용인을 얻어내는 것이라는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2009년에는 유태인들이 물려받은 한 유명한 지혜의 귀환을 희망합니다. 이스라엘의 위정자들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동등한 인권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는데 소용이 있을지도 모를 솔로몬왕의 지혜의 귀환을 소망합니다.

Palestinian violence torments Israelis and does not serve the Palestinian cause; Israeli military retaliation is inhuman, immoral, and does not guarantee Israel’s security. As I have said before, the destinies of the two peoples are inextricably linked, obliging them to live side by side. They have to decide whether they want to make of this a blessing or a curse.

팔레스타인인들의 폭력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극심한 성처를 주고 또한 자신들을 정당화 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군의 복수는 비인도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자신들의 안보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제가 전에도 말했던 것과 같이 이 두 민족의 운명들은 나란히 옆에서 살아가도록 협조해야만 하도록 풀리지 않게 얽혀있습니다. 그들이 이것을 축복일지 저주로 만들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Vienna — 31 Decembe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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