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갑자기 뛰어 든 무리들에 의하여
곳곳마다 반동을 느끼는 2008년 이었습니다.
가난과 복잡한 사색을 싫어하는 국민성이 불러들인 무리들입니다.
저들이 먼지내며 소용돌이 치고 가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요.
정치나 교회나 매 한가지 입니다.
한 해를 정리하려 책상에 앉았습니다.
교회에 의하여 축제화되고,
장사군들에 의하여 상업화된 성탄절에 시달리다가
문득 새해 첫 날을 내다 봅니다.
이해인 시인처럼 내 마음에 감추어져 있는
"희망"을 불러 냅니다.
가톨릭적 영성이 묻어있는 그녀의 시는
나에게 간혹 일상의 영성과 만나는 길을 찾게 해 줍니다.
새해 첫날의 소망
- 이해인
가만히 귀기울이면
첫눈 내리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하얀 새 달력 위에
그리고 내 마음 위에
바다 내음 풍겨오는
푸른 잉크를 찍어
희망이라고 씁니다
창문을 열고
오래 정들었던 겨울 나무를 향해
'한결같은 참을성과 고요함을 지닐 것'
이라고 푸른 목소리로 다짐합니다
세월은 부지런히
앞으로 가는데
나는 게으르게
뒤처지는 어리석음을
후회하고 후회하며
올려다본 하늘에는
둥근 해님이 환한 얼굴로
웃으라고 웃으라고
나를 재촉합니다
너무도 눈부신 햇살에
나는 눈을 못 뜨고
해님이 지어주는
기쁨의 새옷 한 벌
우울하고 초조해서 떨고 있는
불쌍한 나에게 입혀줍니다
노여움을 오래 품지 않는 온유함과
용서에 더디지 않은 겸손과
감사의 인사를 미루지 않는 슬기를 청하며
촛불을 켜는 새해 아침
나의 첫마음 또한
촛불만큼 뜨겁습니다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어디서나 평화의 종을 치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모든 이와 골고루 평화를 이루려면
좀더 낮아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겸허히 두 손 모으는
나의 기도 또한 뜨겁습니다
진정 사랑하면
삶이 곧 빛이 되고 노래가 되는 것을
나날이 새롭게 배웁니다
욕심 없이 사랑하면
지식이 부족해도
지혜는 늘어나 삶에 힘이 생김을
체험으로 압니다
우리가 아직도 함께 살아서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주고받는
평범하지만 뜻 깊은 새해 인사가
이렇듯 새롭고 소중한 것이군요
서로에게 더없이 다정하고
아름다운 선물이군요
이 땅의 모든 이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오늘은
더욱 순결한 기도의 강으로
흐르게 해요, 우리
부디 올 한 해도
건강하게 웃으며
복을 짓고 복을 받는 새해 되라고
가족에게 이웃에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노래처럼 즐겁게 이야기해요, 우리
Wednesday, December 24, 2008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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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December 7, 2008
불안
불안의 출처는 무엇일까? 하이덱거는 기투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 했다. 우리 존재가 의무와 인식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인 까닭이다. 블로흐는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우리 존재는 항상 열려있어 불안하다고 했다. 희망의 정서가 위협을 받을 때 우리는 불안하다. 그런데 알랑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존재의 불안이 아니라 관계의 불안이라는 것이다.
"엄청난 축복을 누리며 살아도 전혀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보다 약간 더 나을뿐인데도 끔찍한 괴로움에 시달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인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지위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불안을 불러 온다는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단순한 삶의 범주에 제한된 시야와 이해의 협소한 공간안에 포로가 되어 있는 우리 감정의 체계는 사실 오래된 습관의 결과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기보다는 시기와 질투와 경쟁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는 습관을 가진 까닭이다. 불안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길은 이러한 불안한 관계로부터 자기를 해방시키는 길이다. 보통은 철학과 예술, 정치와 종교, 그리고 방랑의 길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철학과 예술과 종교는 얼마나 다양하고 상대적이며 따라서 불안한가? 그것들은 우리를 새로운 열등감으로 불러들이는 통로들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를 왜곡함으로써 우리를 불안에서 해방시키던지, 관계로부터 이탈시킴으로써 불안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 처럼 우리가 사는 동안 불안을 벗어나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다. 종교를 비롯한 그 무엇도 우리의 불안한 삶을 안정되게 정박시키는 평화의 닷이 될 수 없다.
다만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과 상대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존중의 눈으로 가까운 이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사는 길만 남아 있다. 나와 너를 극단적으로 분리시켜온 주체의 불안을 벗어나는 길은 나의 주체 속에 너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고도의 밀도 높은 감정을 가질 때 가능한 사랑이 아닐까? 이것은 부버의 thou라거나, 타자의 얼굴에서 소외를 이겨내는 레비나스의 이해이기도 하고, 헤셀의 행함의 경이로움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길에서 장애가 되는 것은 너를 버리고, 나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고, 나의 성공을 나만의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너에 대하여 오만해지는 것이다. 우리 삶의 무수한 비극은 여기서 온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처절한 경쟁과 배제의 싸움에서 피투성이가 된 자신만 남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밤새 고투한 노인이 건져올린 거대한 고기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앙상한 고기의 뼈대만이었다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삶의 종국이 이러한 장면으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경쟁과 성공의 논리에서 벗어난 거리 만큼 우리는 덜 불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벗어나려 노력하다가 다시 그 논리로 돌아갈 때의 비참함은 우리를 더욱 초라하게 할 것이므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안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와 철학, 일시적 방랑과 유희를 택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기존의 자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기가 있는 셈이다. 아니면 자기를 바꾸어 놓고 싶은 자기가 있는 것이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남과 비교함으로써 우월함의 근거를 가지고 자긍한다. 그 근거가 박약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든지 혹은 아프리카 사람이 아닌 한국인이라든지 혹은 병든 친구와 같지 않은 자기, 남보다 조금 나은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자긍하기 때문이다. 남보다 조금 혹은 훨씬 낫다는 생각때문에 평화를 느낀다면 우리는 얼마나 가학적이며 폭력적인가?
오늘 아침 AFN에서 로벗 슐러의 설교를 들으면서 "proud of yourself!"를 외치는 장면을 보았다. 적극적 사고방식이 겸손과 오만을 어떻게 교활하게 연계시키는지를 느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거대한 힘을 가진 제국의 구성원들에게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목사가 설교한다면, 그들이 범한 무수한 죄악을 회개할 필요도 없고 또한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런 종교에서 불안이 극복될 수 있을까? 더 큰 제국의 폭력을 부추기는 소리로 들려 내 마음이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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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November 19, 2008
섬짓한 감사와 아름다운 감사
섬짓한 감사와 아름다운 감사
감사한다는 말은 매우 가벼운 말이기도 하고, 매우 무거운 말이기도 하다. 고마워 한다는 뜻은 자기 존재를 향하여 넘치게 주어진 은총과 사랑과 관심에 대한 응답적 표현일 경우에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다른 이들의 고난과 고통을 앞에 두고 자신만의 감사를 생각할 때에는 이기적이고 천박한 감사가 되기도 한다.
어느 영화에서 본 장면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성탄절을 맞은 나치장교들이 성탄절 찬송을 부르며 구세주의 강림을 묵상하며 감격해하는 장면은 내게 경이로운 공포를 불러오기도 했다.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이들의 입에서 찬양과 감사가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아프리카 연안에서 백인들에 의하여 사냥되어 잡혀온 흑인들을 시장에 팔아온 백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노예상선 이름을 크라이스트 라고 지어 붙이기도 했다. 그들은 항해하면서 기도를 했고, 노예 장사가 잘되기를 기원했을 뿐 아니라 노예 장사를 통해서 번 돈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리는 충실한 기독교인들이었다. 천인 공로할 범죄자들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셈이다.
어느 분의 설교에서 들은 예화다. 어느 주일날 아침 예배 시간 갑자기 동네 공터에서 날아온 야구공이 성전의 유리창을 깨고 날아 들어와 어느 장로님 곁에 앉았던 권사의 이마를 때렸다. 그 순간 놀란 장로님은 자신도 모르게 “주여 감사합니다”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날아 들어온 공이 자기 이마에 맞지 않고 곁에 앉았던 권사의 이마를 때린 까닭이다. 그 장로는 자기 곁에 앉았던 권사의 불행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다. 장로라서 하나님이 지켜주셨다고 생각한 것일까? 다른 이의 불행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이들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사례다.
한 신학생이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한 설교 파우어 포인트 파일을 내게 보내면서 코멘트를 부탁해 왔다. 그는 추수감사절을 맞아 감사의 조건들을 나열하면서 아이들에게 감사해야 할 이유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는 이 아이들보다 행복하고 좋은 환경에서 살고 있으니 감사하자. 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이 숨을 헐떡이는 장면을 보여주며 우리의 건강에 대해 감사하자는 식의 내용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런 류의 감사는 매우 비인도적이며 냉혹한 이들의 감사라고 평가했다. 다른 이의 불행을 보며 그들의 불행에 연대하고 가슴아파하며 그 고통을 적게 하려는 뜻과 의지와 행동보다 앞선 자기보호본능에 예민한 까닭이다. 다른 이의 불행을 보고 자기의 행복을 느끼는 이들은 가학적인 감사자들이다.
기독교의 오랜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의 삶과 그의 가르침에서 떠난 흔적이 역력하게 들어나는 순간이 있다. 어거스틴이 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와 손을 잡고 로마제국을 기독교화하면서 로마제국의 정치권력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수간부터 기독교는 패배나 고난을 모르는 승리와 정복과 성공의 종교가 되었다. 로마 제국주의의 확대과정을 따라 기독교 선교가 가능했고,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보다 로마 제국의 정치권력의 보호를 받았다. 그리하여 기독교는 정당한 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로마제국의 모든 전쟁행위를 거룩한 전쟁 혹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인정해 주었다.
전쟁을 쉬지 않았던 로마 제국의 손아귀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수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교회의 역사가들은 로마제국 치하에서 기독교는 번성하고, 성공했으며, 전 유럽을 기독교화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소위 기독교 세계(Chritendom)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평화를 로마의 평화라고 한다. 이 로마의 평화는 약소국 국민들에게는 피로 물들여진 평화였다. 11세기의 우르반 II세가 벌린 십자군 전쟁이 바로 그런 역사적 사실을 입증한다. 십자군들은 이슬람 문화권을 하나님의 적이라고 간주하고, 아말렉을 진멸하듯이 토착민들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잡아 죽였다. 그들이 승리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피로 물들인 전쟁을 미화하는 역사는 그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피에 젖은 감사가 진정한 감사일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삶에서 살아남고, 건강하며, 성공하고, 승리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와 동시에 우리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이들을 망각하고, 건강하지 못하여 고통을 겪는 이들을 잊으며, 실패한 낙오자들을 버리고 온 우리의 삶, 나의 승리를 얻기 위하여 내가 패배를 안겨준 이들을 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을 건강과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이들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는다. 어거스틴이 했던 일과 동일한 일을 하는 셈이다.
예수의 비폭력 평화주의적 가르침을 버리고 제국주의적 국가 폭력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화했던 어거스틴처럼, 우리도 그의 뒤를 이어 승리의 하나님, 정복자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성공과 부귀영화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찬양하며 감사하고 감격해 한다. 그러나 단연코 말한다면 이런 하나님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서의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의 단을 쌓는 행위는 결국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의 마음가짐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우리가 드리는 감사의 많은 부분이 죄에 깊이 오염된 감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러므로 “누가” “누구에게” 감사를 드리는가를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마틴 부버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수한 만남을 가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우리의 만남이 그릇될 경우 우리는 만남의 대상을 물화시켜서 영성적 관계로부터 단절된 사물의 세계로 전락 시킨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나와 그것(I -It)의 관계가 형성될 뿐이다. 이런 관계는 마치 손이 닿은 것마다 황금으로 만들어 버리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모든 것을 산술적인 계산을 통해 환산해 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하는 이도, 교회도, 하나님도, 벗들도 모두 만지기만 하면 그 순간 나의 의지와 생각과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 ”그것”으로 바뀐다.
그 순간 생명이 살아있는, 영성이 살아있는, 사랑이 살아있는 관계의 죽음이 찾아온다. 이런 죽음으로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제아무리 풍요를 노래하고 감사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감사일 것인가? 이미 죽음이 아닌가? 우리의 만남들이 죽음을 불러오는 만남들이 될 때 부버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한다. 그런 삶에서는 하나님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 산술적 이성, 쾌락지향적인 가치, 그리고 성공과 번영에 눈이 먼 삶에는 이런 죽음의 문화가 깃들이게 된다. 거기에는 살아있는 것들이 존재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죽은 자들의 감사가 아닌, 산자들의 감사가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부버는 나와 그것의 관계를 넘어서서 나와 당신(I-Thou)의 관계가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시딤적 전통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바 있는 부버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그대“를 만나려면 경이로움의 인식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소유와 성공에 앞서서 이미 우리 존재가 살아있음이 충만한 경이로움인 까닭이다. 거기에는 감격이 있다.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고통하거나 즐겁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라는 얄팍한 계산을 넘어서 이미 우리 존재에 마주해 있는 당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은 부유함과 성공과 힘과 권능을 자랑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나그네 된 자들 곁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일상에서 만나고, 그와 동행하는 삶에서 나오는 감격과 감사가 있는 삶,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했던 하나님이다. 그들을 포악에서 건지셨으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악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용서하심을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용서하며 살아야 할 의무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니, 우리의 주변에 있는 이들이 우리에 의하여 용서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포악을 행해서는 안될 대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생명 그 자체에서 우리가 경건과 경이를 느끼기 때문이다. 영성적 삶의 감사는 이렇듯 모든 관계를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닌 나와 그대/당신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나와 그것의 관계 속에 함몰되어 있으면서 드리는 감사란 무의미한 것이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인간이 삶에 깊이 배어든 보호본능은 하나님을 향한 영성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으로 벽을 쌓고 자기를 지키는 사람, 정치나 국가권력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 강한 군대를 조직하고 군대가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삶의 근거를 상실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헤셀은 깊은 영성이란 정의로운 것이라고 믿는다. 정의로움이 없는 영성은 그에게 있어서 거짓된 영성이다. 거짓된 영성에 사로잡히면 우리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들인 경이로움의 체험을 천박한 교리나 신조로 만들어 암송하게 함으로써 영성과 정의를 대치한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종교는 참된 종교가 아니다. 정의 없는 영성이 반복하는 제의는 하나님에게는 구토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참된 영성의 길을 가려는 이들은 정의를 행하라는 명령에 복종해야만 한다. 정의를 행할 때 우리는 행함의 경이로움(wonder of doing)을 깨닫게 된다. 사랑을 하면 사랑의 경이를 깨닫게 되고, 자유를 살면 자유의 깊음을 알게 된다. 깊은 동정의 삶을 행하면, 그 행함을 통하여 우리는 더 깊은 영성적 동정(compassion)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영성적인 삶이 되려면 성서가 명하는 바 사랑과 정의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 사랑과 정의에 의하여 동기화되지 않은 삶은 결국 이기와 불의가 가져오는 혜택의 유혹을 떨칠 수 없다고 한다. 이기와 불의를 통해 얻은 것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은 가인의 제단처럼 비극을 초래한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거절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부버와 헤셀이 일러주는 “나“는 영성적 존재다. 물질에 의하여 좌우되고, 산술적 계산에 의하여 풍요와 빈곤이 헤아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종교와 제의와 교리와 신조를 옷입은 존재도 아니다. 살아있는 영성적 존재, 늘 살아있음과 존재하는 것들 속에서 경이로움을 깨닫는 영적 감수성이 주어진 존재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성이란 우리가 무엇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영성은 우리에게 참된 세계를 ”보게”하는 힘이고, 경이로움을 “깨닫게”하는 능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부버와 헤셀은 동일하게 영적 자각능력을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영성이 살아있는 이들의 감사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감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루터나 칼빈의 교리주의적인 감사, 즉 나를 십자가에 달려 구원하였으니 감사하다는 감사의 윤리는 이론적 형식으로 전락할 수 있다. 영성적 자각이 없는 존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바로 만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내가“ 누구인가라고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상에서 성공, 승리, 개발, 확장, 팽창, 정복의 이정표를 가리키면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은 우리들을 식민지배자로, 제국주의적인 정복자들로 만들고, 우리의 이웃을 정복해야 할 대상이나 식민지화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거기에는 평화가 없고 전쟁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 나치들이나, 기독교도인 노예상인들이 생겨났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진정한 영성은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형제자매로 만나게 한다. 참된 영성은 진정한 평등과 정의와 연대를 이루어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섬짓한 감사가 아니라 아름다운 감사를 드리려면 어떤 하나님에게 드리는 감사인가라고 한번쯤을 스스로 물어야 한다. 승리와 정복의 노획물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신가? 성공과 번영을 즐기시는 하나님이신가? 성서의 하나님은 계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을 지키는 것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성서적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백성답기를 요구하신다. 그 하나님 백성다움은 “인자함, 깊은 동정을 가지는 데” 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시는 하나님 가난한자와 나그네된 자를 돌보라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를 업신여기는 승리주의자를 기뻐하실 리가 없다. 가난한 이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성공한 기업가를 즐거워하실 리가 없다. 원자폭탄을 만들어 두고 언제라도 상대를 초토화시키겠다는 이들을 바라보며 웃으실 하나님이 아니다. 막강한 군대를 만들어 두고 평화를 외치는 이들을 비웃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사를 드려야 할 하나님은 “지극히 적은 자”에 대한 배려와 경외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즐거워하시는 하나님이다. 아름다운 감사는 그러므로 물질적인 드림이 아니라 지극히 적은 자를 돌보는 행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다. 영성이 살아있는 이들만이 행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욕심을 덕지덕지 붙이고, 세상의 속물들이 다 되어 온갖 명패와 명예를 다 걸머쥐고, 무수한 사람들의 인권과 희망을 짓밟으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이런 감사는 헛된 감사다. 나치들처럼 동료인간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추방하며, 집단으로 괴롭히는 이들이 드리는 감사도 있다. 이런 감사는 섬짓한 감사다. 영성이 결여된 이들의 영혼이 없는 감사인 까닭이다. 이런 감사는 종교라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하나님을 기만하는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자기 시위의 행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 번 물어야 한다. 나의 영혼은 깨어 있는가? 나의 삶이 과연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경이로움에 노출되어 있는가? 경이로움이 나의 영혼을 타고 내 가슴에 전해져 오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의 생명에서 경이로움과 고귀함을 깨닫고 있는가? 영성이 무디어지고, 깨어지거나 증발한 가슴에는 온갖 탐욕과 오만들이 깃들어 우리의 영성의 통로를 차단한다. 아름다운 감사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과의 원초적인 약속의 지평을 잃지 않는 데에서 나오는 감사다. 가난한자, 지극히 적은 자, 사회적 약자, 나그네 된 자들을 돌볼 수 있는 따스한 가슴을 가진 이들이 드리는 감사가 아름다운 감사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고 감사하는 이들인 까닭이다.
성서에 보면 하나님과의 근원적인 약속을 잊은 이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어 메시지를 전달하신다. 이 메시지에는 경고가 들어 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섬기지 말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 이외의 것에서 안전을 찾지 말라는 경고다. 그러나 오늘의 종교는 권력과 물질과 쾌락과의 연대를 통하여 폭력을 생산하고 있다. 하나님보다 권력을 더 사랑하는 정복주의적 종교,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번영의 종교,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성공신화를 만들어 내는 종교, 하나님보다 국가와 군대의 힘을 더 믿게 만드는 종교는 예언자들을 잡아 죽이고 추방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오늘도 거짓된 종교는 예언자들을 못살게 하고, 추방하며, 그들을 옥에 가둔다.
이렇게 폭력화된 종교 안에서 드리는 감사는 나치들이 드리는 감사예배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섬짓한 감사다. 그러므로 정의와 사랑을 명하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이들의 회개를 담은 감사가 아름다운 감사다. 고난을 겪는 이웃의 불행을 못 본 척 지나쳐 버리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종교가 드리는 감사는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강도만난 이웃을 들쳐 업고 그의 생명을 지키고 돌볼 수 있음을 기뻐하며 드리는 어느 사마리아인의 감사가 정말 아름다운 감사다. 다른 이의 불행을 보고 나의 우월함을 기뻐하여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고난 받는 이웃들과 함께하는 삶을 기뻐하는 감사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참된 감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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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November 6, 2008
A Prayer and Pledge for Real ChangeWednesday
November 5, 2008 10:45 AM
From: "Jim Wallis, Sojourners"
Click here to watch a special message from Jim Wallis to President-elect Obama
Yesterday’s election represents a watershed moment in the life and history of our country. Regardless of how you voted, our entire nation can celebrate the milestone of our first African-American president. We can all embrace this profound opportunity for deeper racial reconciliation and social justice.
But this is also a moment that demands prophetic leadership and the power of a faith-inspired movement. From the abolition of slavery, to women's suffrage, to civil rights, history shows us that political change happens when social movements push on open doors of political leadership. And the best movements have spiritual foundations.
Please join me in telling President-elect Obama that we will pray for his presidency while also holding him accountable to the promises of a new kind of politics.
This election represents a new and open door for change. However, we know that President Obama will face tremendous pressure and obstacles in pursuing an agenda that addresses the moral imperatives to overcome poverty, develop renewable energy, responsibly withdraw from Iraq, and dramatically reduce the number of abortions.
That is why your commitment is needed now more than ever. We must ensure that the campaign slogan of “change” becomes a new movement for change.
Send a personal pledge to the new president, telling him that you will be part of that movement.
We will deliver your pledge to President-elect Obama and his team, with the message that the faith community will be mobilizing both in support of him and to hold him accountable. Sojourners will start with President Obama’s own pledge to mobilize our nation to cut poverty in half in America over ten years and provide the leadership necessary to achieve the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to cut extreme global poverty in half by 2015.
Join us in ensuring that these campaign promises become a reality.
In recent times, religion has been both too narrow and too divisive. The faith community can now play a new role—bringing people together on the biggest moral issues of our time—even across old political divisions.
This election has shown that the era of single-issue voting is over and a broader moral agenda that seeks common ground on moral issues has begun. Members of Black churches, Catholics, evangelicals, Latinos, and mainline Protestants are acting on a broad set of biblical values. I look forward to the day when both poverty reduction and abortion reduction become nonpartisan issues and bipartisan causes.
Please join me in offering President-elect Obama our prayers and our actions as he assumes the responsibility of leading our nation in a very challenging time.
Sincerely,
Jim Wallis
President, Sojour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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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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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November 2, 2008
혁명적 용서: 세계화 시대의 종교, 포악 그리고 치유
Revolutionary Forgiveness
Religion, Atrocity and Healing in an Age of Globalization
Marc H. Ellis
혁명적 용서
세계화 시대 속에서의 종교, 포악 그리고 치유
마크 앨리스 Marc H. Ellis
세계화에 대한 논의들은 많고도 다양하다. 그 논의들은 전형적으로 세계화의 범위와 그 구체적인 효과와 관련되어 있다. 이 논의들은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세계화의 논의의 확장은 전통의 주체들과 지적 생산활동에 맞닿아 있다. 세계화의 언어인 영어 조차 비판과 조롱을 불러오고 있다. 물론 세계화와 관계된 수많은 주제들처럼, 언어는 적어도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먼저 보호받아 온 영토의 침입자, 그리고 이미 언어학적 장벽에 의해 분리된 사람들을 연계시켜주는 것으로 나뉜다.
세계화에 관련된 모든 주제들 중에서, 가장 적게 논의되는 것이 종교다. 세 가지 유일신론적인 종교들인 유대주의, 기독교, 이슬람은 세계 종교로 불리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 왔다. 그리고 그 어떤 이들도 세계 전반에 퍼져 있는 불교, 유교, 힌두교의 중요성에 대하여 의심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계화의 상황 속에서 이러한 종교들의 중요성도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종교가 논의될 때에, 이러한 종교들에 대한 논의가 허용된다 할지라도 정치적인 영역에서 보는 권력이나 영향력에 관한 관심 없이는 그 전제가 다소 부적절하다. 또한 종교들은 “퇴보”하면서 사회에 대하여 역행하는 그것의 영향력 때문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여 지기도 한다. 종교에 대한 후자의 비판은 많은 사회 과학자들의 선입관을 반영하기도 하고 세계의 여러 곳에서 세계화와 근대화의 과정에 적합하지 않은 종교가 그 사회를 규정하는 한 요소가 되고 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여기 종교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종교의 역할은 긍정적이거나 파괴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와 고난과 빈곤을 직면하고 있는 공동체에서 종교는 긍정적이다. 물질적인 부요함보다 더 고차원적인 진리가 요청되기도 하고, 반면 초월적인 원리들 안에 뿌리박고 있는 사회와 문화 가치 체계를 파괴할 때에는 풍요로움이 거절되기도 한다. 종교성의 파괴적인 측면은 세계화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사회 안에서 여실히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럽과 미국의 경우, 부와 권력의 불공평한 분배에 대한 비판에서 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찾기 위한 종교적 원리들이 요구되고 있다. 이러한 (기존 질서를 바꾸는) 전복적 종교성은 모든 사회와 종교들이 지닌 존엄함과 모든 이들의 평등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국경과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세계화가 평화와 정의의 세계 질서를 증진시키는 한 어떤 사람도, 어떤 국가도, 그리고 어떤 공동체도 우위에 있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세계를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나누는 한 세계화는 거부되고 있다.
비록 복잡한 세계화와 종교의 현실이 논쟁의 표면 아래에 있었을지라도, 이러한 논의 안에서 종교의 두 측면은 자주 논쟁적인 용어와 권력에 관련되었다; 파괴자로서 그리고 방어벽으로서의 종교는 세계화를 경험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종종 함께 병립해 있게 된다. 여기서 이슬람과 기독교는 흥미로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한편에서 이슬람은 유럽과 미국의 힘에 대항하는 방어벽으로 보여지지만, 유럽과 미국은 기독교 정서와 많은 부분에서 동일시 된다. 서구 세계 안에서 일련의 기독교인은 이러한 동일화에 반대하고, 실제로는 기독교와 동일시되는 서구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거부하고 있다. 세계화의 동력을 지닌 유대적 일체감 속에서 훨씬 더 복잡한 상황이 발견되기도 하고, 일부 유대인들이 비서구적 세계에 맞서는 유대교-기독교의 연합이라는 사고에 대해 반대를 제기하는 것도 볼 수 있다.
문명 충돌은 종교의 충돌로 재해석 될 수 있다. 이제 문명처럼, 종교들은 다양하기도 하고 그들 안에서 대립(충돌)하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 종교와 종교성의 긴장이 고조되어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시점에서, 9/11 사태로 인한 혼란, 중동의 매우 악화된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때엔 세계화와 종교를 구별하기가 어려워 지는 데 이는 그 복잡함과 해소 책이 점점 많아 지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적 종교성
어떤 종교를 하나의 세계 종교라고 단언한다는 것은 본래 흥미로운 일이다. 많거나 적든 간에 엄격한 의미에서 사실 세계종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숫자를 따진다면, 유대교는 “세계적이다”라는 말을 거의 할 수 없다. 근 70억에 이르는 세계 인구 중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을 추종하는 이들이 각각 10억 명 이상 된다. 세계 종교의 위치에 있어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주장하는 것은 - 또는 아마도 불교까지도 - 각각의 종교 안에서의 다양성에 의해 더욱 복잡해진다. 비록 예배의식이 유사하고 심지어는 교리조차도 그저 적은 차이를 지니고 있을지라도, 비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차이는 거의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이렇게 세계 종교들이 문화적으로 구체화된 모습들은 결국 그것들이 지역적이며 시대에 한정된 바 국지적인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교들의 내용과 상황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변한다는 것이다. 17세기와 18세기에 대해 언급하는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처럼, 기독교도들과 무슬림들에 의해 요구되는 연속성도 있지만, 매우 동일한 공동체와 신앙구조에 속해 있는 오늘날의 신자들이 가진 신앙의 형태와 속성에 관한 사회적인 연구는 그들의 연속성만큼 더 많은 불연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와 모하메드가 오늘날 초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그렇게 존재했었다는 개념은 종교 사회학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이론적인 확장이다. 그러나 기독교나 이슬람전통 안에 있는 신앙인들조차도 초기 예언자들의 모습이 역사적인 논쟁에 싸여져 있다는 사실과 그들의 모습들이 서로 다른 시대 속에서 해석되고, 또 다시 재해석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는 있다.
세계 종교로서의 종교를 구체화 과정 속에서 여러 다른 질문들이 무시되어지기도 한다. 유대주의와 기독교와 이슬람은 중동지역의 토착적 지역 종교로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들의 예언자들과 그들의 초기 추종자들이 사용하고 구체화 했던 행동과 언어와 사고의 형태를 본다면 그들은 더욱 더 지역적인 영역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기원은 단순히 지역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종교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이야기와 문화 속에서 나타났으며,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와 문화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어머니로서의 유대교는 지역적인 이야기와 문화 속에서 태어났고, 토착적인 유대주의로 진화하면서 생겨났던 세례주기나 삶을 변화시키는 요소들과 얽혀있는 그 지역의 이야기와 문화 속에서 태어났다. 논의를 더 뒤로 밀고 들어가 보면,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여겨진 사람들은 - 모세, 예수, 모하메드 - 의도적으로 종교를 설립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응답하는 사람들을 위한 메시지를 가지고 역사 속에서의 어떤 시점에 나타난, 지역적인 인물이었고, 자신의 생각을 구두로 전했던 예언자들이었다.
이러한 예언자들과 초기에 그들을 추종했던 이들의 생존했던 기간이 지난 후 일어난 것이 바로 이러한 종교들의 탄생과 성장이었고, 또 하나의 이야기로서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이 일반적인 어휘인 세계종교가 된다는 것은, 그리고 유대적인 이야기가 이러한 종교들의 원천이 된다는 것은 바로 메시지의 힘이며, 그 메시지가 종교적인 증언, 제국적이며 식민지적인 권력을 통하여 퍼져나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증언은 그 자체가 복잡하다. 두 종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전통으로부터 생겨나게 되었고, 그 성장에 자양분을 제공한 문화적인 요소들을 통합해 온 것이다. 종교적인 증언이 식민지적이고 제국적인 힘을 통하여 퍼져나갔기 때문에, 증인들을 외국 영토와 문화로 실어 나르는 제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침내 기독교와 이슬람은 오늘날 잘 알려진 종교가 되었고, 제국이라는 맥락 안에서 강력한 종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사는 복잡하다. 그들의 역사는 종교적 성장과 식민지주의와 제국주의에 야합하려는 경향을 회피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던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에 있어서, 콘스탄틴 제국은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한 도구였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콘스탄틴적 종합으로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가 태어난 것이다. 콘스탄틴 기독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진실과 다른 이들을 위한 유산을 남기고 있다. 이런 역사가 오래 지난 후, 신약성서 속에서 확증된 기독교로부터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20억명의 이상의 사람들에 의하여 실천되고 추종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구별해 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제 콘스탄틴적 기독교는 국가와 근본적인 야합을 가진 종교가 되었기에 거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제국의 종교가 된다는 것은 그 보상으로 국가의 권력과 정책에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항상 확장되는 세계 종교에 맞추어 그 지역 예언자들의 증인들을 변형시켜야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여기서 콘스탄티니즘은 다양한 양태들을 취하고, 또한 모든 종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권력과 국가에 동화 종속되었다는 의미에서, 콘스탄틴 종교와 종교성은 일종의 종교적 규범이 된 것처럼 보인다.
일면 콘스탄틴주의는 본디 겉모양으로는 다른 종교에 속해있는 사람들에게 유사한 길을 제시하는 종교일는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의 콘스탄틴적 이슬람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 유대교 역사에서 최초로 생겨난 콘스탄틴 유대교는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콘스탄틴 종교성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사회적 질서와 문명의 진보에 본질적인 것으로서 주요 독점적인 종교들을 바라보는 많은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 콘스탄틴 종교는 실질적으로 시민종교이거나, 아니면 시민종교에 커다란 기여를 했거나, 다양성을 함께 묶는데 기여를 했거나, 공통의 목적을 명확히 표명하거나, 개인과 사회와 정치적인 분열의 경향을 억제시키기도 한다. 전혀 종교가 없는 것보다는 권력의 자리 근처에서 야합하는 종교를 가지는 것이 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와 국가를 두 개의 경쟁하는 종교적인 구조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고, 시민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위해 경쟁하는 두 개의 체제 종교와 국가를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비록 타협되어 국가의 승인과 권력이 필요한 가치들이 오래 된 본문과 제의적인 아름다움과 깊이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둘로 갈라진 충성의 대상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콘스탄틴 기독교와 이슬람은 예언을 선포하고, 예언이 중요하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예언을 봉인해 버린다. 국가와 야합한 종교에게서 예언이 자유롭게 된다거나, 그것이 예언과 직면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예언은 고대에 있었던 것일 뿐, 모하메드와 예수는 지나갔고, 이제 그들은 종교적인 권력구조에 의해 해석될 뿐이다. 권력구조는 계급구조 자체와 국가 권력과의 관계성을 의문시하는 예언이 가진 힘에 거슬러, 예언을 감독할 책임을 지닌다. 이점이 바로 종교가 가지는 계급구조와의 야합에 대하여 예언이 자주 경고한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도 잘 단장한 비밀스러운 제의와 해석학적인 책략들이 콘스탄틴 종교성에 넘쳐나는 것이다.
믿음과 투쟁에 대한 예언과 광범위한 전통
적어도 사회학적으로는, 콘스탄틴적 종교성이란 문화적이고 지질학적인 경계선들을 교차하는 것으로 예측 가능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다른 종교들도 그런 행위의 유사한 형태들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 종교들은 다른 상징 구조를 지니고 있는 그것과 동일한 종교로 받아들여진다. 만일 그러한 분석이 너무 광범위하다면, 콘스탄틴 기독교와 콘스탄틴 이슬람의 차이점은 자주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들은 국가를 위하여 동일하게 타협해온 가치들과 부패로 얼룩진 충성을 바치고 있다.
예언이 콘스탄틴 종교 안에서 선언되었기 때문에, 그 예언은 쓸만한 가치가 있고, 모든 시대를 걸쳐서 그 종교 추종자들 중 소수가 그 유용성을 취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시대에 예언은 선언될 뿐 아니라, 최소한 소수에 의해 살아남고, 종종 그 소수는 종교 권력의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게 된다. 콘스탄틴적 종합은 이러한 박해를 필요로 하고, 언제나 국가는 예언자들을 종교적으로 훈련시켜 길러내거나, 그들의 견해와 행동에 있어서 그 사회에서 변절자로 간주되는 이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너무나 흔히, 종교 영역 안에서 예언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하는 증언자를 허용하고, 그를 함정에 빠뜨리는 특정한 자리가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예언은 영적인 것으로 바뀌고; 예언적 증언은 칭송을 받기도 하고, 제한 받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예언은 그 핵심에 있어서 여러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정의가 선포되고 평등 공동체가 선포된다; 다른 한편에서는 예언된 것을 지키기를 거절하는 행위를 강하게 징벌하는 하나님의 승인권을 행사한다. 예언적 영감은 예언자적 징벌과 균형을 잡게 된다. 그러나 콘스탄틴적 종교성은 영감을 선포하며 영감을 봉인한다. 그 종교성은 신적인 징벌 위협을 수단 삼아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삶을 지배한다. 이것이 바로 국가에 의한 사회적인 명령이 종교적인 사명으로 간주되는 이유고, 종교가 그 사명을 돕는 까닭이 된다. 콘스탄틴적 종교성 안에서 예언의 훈련 그리고 국가는 기이하고 강력한 협력작용을 불러오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를 깬다는 것이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종교 자체의 기적은, 적어도 그 다양성에 있어서 예언이 종교와 국가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하도록 유지하는 데에 존재한다. 역사 속에서 일부 양심적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이 지속적으로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후대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으로 생성된 것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근원적 증언에서 얻을 수 있는 예언적 영감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흔히 이렇듯 양심적인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와 국가에 의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다.
만일 서로 다른 상징 체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이러한 콘스탄틴적 종교들의 예언자들이 동일한 종교와 종교적인 의식을 실천한다면 사람들은 의혹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들은 사상과 행위에 있어서, 그들이 서로 상호 협력하는 종교인이 되는 것을 넘어, 아마도 그들의 운명에 있어서 조차 서로에게 더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경계와 담을 넘어서 믿음에 충실하기 위한 싸움을 더욱 깊게 하는 전통, 곧 신앙의 유산과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도와 행동 속에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시각으로부터 양심적인 유대교인과 기독교인과 무슬림을 바라본다면 이들은 세계 종교들로서 집합적으로 알려진 콘스탄틴 종교성 안에서, 그리고 이를 넘어서는 투쟁과 믿음의 더욱 광범위한 전통 안에 존재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양심적 실천 안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유사성을 인식하면서 일어나는 색다른 류의 세계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연대성과 정의를 종교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이러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권력에 의하여 그리고 권력을 가진 이들에 의하여 지배당하는 종교, 정치적 세계를 향하여 과연 진리를 증언할 수 있을까? 양심적인 종교인들은 전 지구적 경제, 정치 그리고 종교적 제도에 대하여 주장하는 자리와 같은 양심의 영역을 벗어나 어떤 논리적 근거를 주장할 수 있을까?
하나의 책략은 이러한 양심적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인들을 더 커다란 콘스탄틴적인 체계 안에서 바라보는 것인데, 거기에는 이중적 감수성이 존재한다. 서로에게서 힘을 얻고 서로에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그 속에서 살아가고 형성된 더 커다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이렇게 붙어있는 이중 담론은 콘스탄틴적 책략에 반해서 일종의 파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더 광범위한 믿음과 투쟁의 전통은 그것이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콘스탄틴주의와 갈등하게 되고, 문화와 정치, 경제적인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투쟁으로부터 얻은 자원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보다 넓은 신앙과 투쟁의 전통 안에서 계속 수행된 예언은, 독점과 통일성을 요구하면서도 편협하게 구조화되어 둔중하게 된 종교 제도들과 부딪히게 된다. 종교 제도 안에서 예언자적인 목소리는 유대적인 것인 동시에 무언가 그와 다른 것으로서 기독교, 그리고 뭔가 다른 것을서 무슬렘, 그리고 뭔가 더 다른 무슬렘으로 존재한다. 물론 어떤 종교 제도도 그 자체로 존재할 수는 없다; 정통주의적인 것이라고 인식하지만 사실 자주 임의로 변조된 그 본래의 자원들을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요구된 다양한 자원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존재하는 대부분의 제도들은 권력을 가지고 그 종교를 돕는 바, 그 종교제도가 선포하고 봉인하는 예언적 음성에 더욱 충실한 사람들을 유독 관련시킨다.
양심적 종교인들이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예언자적인 증언을 양육시키는 바로 그 차이를 흔히 잘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콘스탄틴 종교의 지도자들이 혐오스러운 용법을 이용하는 수사법에만 의지하고 있는 양심에 대하여 옳다고 주장할 때, 대다수의 양심적 종교인들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차원에서 종교계 안에 있는 세계화에 대해 연구해 왔다. 정의와 훈계라는 예언의 이중적 본질은 그들만의 기반에서 논의되었다. 과연 이러한 기반이 양자 중에서 더욱 약한 편을 위한 가능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믿을 근거가 있겠는가?
콘스탄틴 종교 담론은 중요하지만 제한적이다. 하나의 전략으로서 그것은 이해가능하기도 하지만 역시 점점 정직하지 않은 것이 된다. 양심적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스스로가 달라진 종교로 행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처음에는 그들이 그들의 종교의 예언의 연원에 더욱 가까워 보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연원과 공동체의 현재적 실천에서 점점 더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까닭이다.
더욱 광범위한 믿음과 투쟁의 전통은 항상 발전하는 예언자들의 공동체 속에서 시원적 예언자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전통은 예언의 결정적인 것으로서 어느 예언자에게도 매여있지 않고, 실제에 있어 어느 예언자도 최후의 예언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더욱 광범위한 믿음과 투쟁 속에 있는 사람들은 경전의 한계들과 시원적인 예언자들의 결점들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진다. 이와 유사하게 유대, 기독교, 이슬람 공동체의 설립에 있어서 폭력의 역할과 계급구조에 대한 인식은 이렇게 새롭고 다양한 공동체의 중심에 콘스탄틴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를 두는 것이다.
콘스탄틴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는 현대적인 개념 속에서 비평 전통의 연속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그저 근대-후기의 해석으로서만 규정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콘스탄틴 종교는 일반적으로는 종교의 유산을, 특수하게는 믿음의 가능성을 단단히 거머쥐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양심적 유대인과 기독교인과 무슬림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그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새로운 범주와 지형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계약의 궤 속에 있는 무장 헬리콥터
이러한 범주와 지형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세계 속에서 새롭고도 효과적인 방식으 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콘스탄틴주의를 넘어서서 우리들을 거만한 엘리트들로 나누어 놓는가? 결국 그러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제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엘리트들이다. 여기서 제1세계/ 제3세계라는 명칭은 거의 완전히 붕괴된다.
사실상 제삼세계에서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에서 같은 견해를 가진 제1세계 출신 사람들보다 더욱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사회와 종교의 규범을 깨는 견해를 지닌 것이 엘리트주의자인가? 이런 견해를 고통 당하는 사람들 편에서 표명하는 이들이 엘리트인가?
확실한 믿음과 투쟁의 방법으로 더욱 광범위한 전통이 가지고 있는 유용성은 폭로와 교육의 기능이라 할 수 있지만 과연 이러한 연계 가능성을 우리는 엘리트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찬가지로 주변부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지닌 너그러움과 관대함 속에서도 찾아질 수 있는 것인가? 콘스탄틴 종교성은 권력과 국가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에 믿음과 투쟁의 더욱 광범위한 전통을 잇는 다리로서 작용하는가? 이것은 196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형성된 해방신학을 담고 있는 비옥한 토양과 같다. 그 토양은 종교를 포함하여서 모든 차원에서 일어난 폭력과 고통에 의하여 예비된 것이었다. 해방신학자들이 발견한 기독교는 토착적 삶과 신앙의 파괴자였고, 새로운 투쟁과 가능성의 시작이었다. 요약하자면 문제는 기독교적인 것이기보다는 식민지주의와 복음화의 상황 속에서 정의의 지평에 관한 것이었다.
정의의 지평은 하나님의 지평이다. 두 가지는 가능성으로서, 투쟁할만한 가치로서 “이후에, 사후에, 미래에로” 어렴풋이 함께 드러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실현 되어야만 하는 것과는 달리, 종종 최소한 단기간에 걸쳐 실패할 운명에 처해져 있다. 정의의 꿈들이 결핍되고, 바로 그런 종교들이 그들의 중심에서 정의가 버림을 받을 때, 여기서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고통이 드러난다. 예언은 모든 결점과 한계를 지닌, 그리고 그 두 그룹들의 모든 위선을 지니고 있는 엘리뜨들과 비엘리뜨들 속에 살아남는다. 믿음의 구조에서 그들의 외양의 차이가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그들 자신의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다른 권력을 향한 그들의 적대성이 무엇이든 간에, 종교와 국가의 힘은 예언에 대립하여 정렬하고 있다.
만일 예언이 우리 시대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리고 동일한 종교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버림을 받을 운명에 처하여 언제나 초월적인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예언이 정의와 억압으로 나누어진 쌍방향을 향하는 길이라면, 우리는 왜 예언을 모두 폐기해 버리지 않는 것일까? 폭력과 포악의 순환을 불러오면서도, 아무런 폭력과 포악의 포기에 대한 약속도 없는, 그런 종교 범주들을 우리는 왜 버리지 않는 것일까?
이런 질문은 스스로를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들 모두에게 주어진다. 이 질문은 답변 될 수 없는 것으로, 단지 그렇게 살아가야만 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전략을 넘어서서 그리고 전략 안에서, 모든 알려진 종교를 넘어서서 그리고 그 종교들 안에서, 그들이 배척하는 것조차 진리임을 주장하는 교리와 원리를 초월해서,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본질적인 통찰이다. 예언의 생존, 세계 속에서 구현된 예언, 시간을 지나고 경계를 넘어서서 “현재”는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예언을 세상에 전달하는 바로 그 사람들, 유대인들인 우리 민족은 기독교와 이슬람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언을 남겨준다. 이제 우리가 주장하는 예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억압 속에서 오늘날 소모되고 있다. 이 점은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정의의 지평과 하나님의 지평이 계약 안에서 발견된 이유로 계약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지만, 유대 백성들은 그것으로부터 도망쳐 버린 것이다. 전 세계의 회당 안에 있는 계약 법궤에서 우리는 토라, 히브리 성경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속에 찬양과 예배의 대상이 되는 무장 헬리콥터를 담고 있다는 표현이 과연 더욱 적절한 것이 아닌가? 계약은 불의와 영원히 일치하지 않는다. 불의는 불의를 저주하면서 참다운 말씀과 음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불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난다. 콘스탄틴 유대주의가 벌리는 불의에 대한 축복은 단순히 그 자매 종교의 행태를 따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어디에서든지 높지만, 여기서는 더욱 높다. 왜냐하면 만일 최초의 계약의 수행자들이 진실한 세계 종교의 지위에 대한 현실을 혼란스럽게 하고, 쇠퇴하도록 용인해 왔다면, 최소한 숫자로 보아 유대주의는 여전히 콘스탄틴주의에 굴복해 왔고, 완전한 예언과 계약적인 깨달음은 손상을 받아온 것이다. 많은 방식에서 예언의 담지자들이 정복자의 수준에 굴복해왔을 때에는 되돌아 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유대 공동체 안에서 내전이 일어난다.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유대국가를 재건하는 중심에서 포악과 폭력을 행하면서도 자신들의 무죄성에 대해 예언적인 주장을 펼칠 때에, 그 폭력에 대항하는 다른 무엇이 기대될 수 있겠는가? 저주스러운 형상들이 강해지고 이러한 형상들에 대항하는 방어 역시 똑같이 강해진다. 고로 유대 이견자들은 조롱으로 위협받고, 반역의 책임이 물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배를 강요 받는 것이다. 유배가 내려질 때, 유대 공동체는 폭력과 침묵에 머물게 되고; 일치라는 말은 유대인들에 대하여 감히 다른 말을 하려는 사람들을 적대하는 표어가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를 증오하는 유대인들 그리고 반유대주의적인 비유대인들에 반해서 물어지는 책임이 거의 유대적 정체성의 총체가 된다. 마치 한때 우리를 가해했던 것처럼 우리가 다른 이들을 가해하는 경향에서 면책을 받은 것처럼, 유대인들의 희생만은 영원하고, 마치 예언이 한때 우리들을 박해했던 콘스탄틴적 체제와 같은 류의 사고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여길 때,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 국가정책과 미국 유대인들의 체제에 의한 이스라엘 정책 지지에 반대하는 비판을 재갈물리는 장벽으로 이용된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이 종종 주장했던 바, 마치 그들이 다른 종교에 대해 비판을 했던 한계와 실수조차 피할 수 있듯이 꾸며진 우월감처럼 순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1500년 이상 유럽에서의 고통의 여정을 통하여 주장되었던 유대적 우월성에 대한 주장의 몰락과 더불어, 바른 신앙과 행위에 관한 여타 종교들의 모든 주장들은 결국 정지되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정지”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특별한 요구를 가지고 시작하는 모든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경고이다. 이것은 주장들이 논박 받는 자리에서만 진리를 주장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한편이 확신을 가지기 어려운 것을 동일한 어려움을 직면한 다른 편이 받아줌으로써, 새로운 연대를 통하여 비판을 굴절시키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에큐메니칼한 거래(에큐메니칼 대화에서 일어나는 상호 편안함을 취하기 위한 적당주의적 타협: 역자 주)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새로운 연대감을 통하여 교묘히 비판을 피해가기를 추구한다. 서구에서는 적어도, 이런 일이 다른 사람의 종교성에 대한 개방을 선언하는 그릇된 겸비함을 가지고 행해진다. 결국에는 이런 거래에 의하여 시종일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과 포악에 대한 역사적이고 동시대적인 해석을 찾으려는 내 외적인 비판을 징벌하는 것이다.
오직 유대교만이 그 증언의 중심에서 폭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을 다른 종교에 투사하는 것일 수 있다.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지 않는 상태를 허용하는 것은 사실 순진함으로 퇴각하는 것이다. 세계화는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폭력의 한 형태이며, 종교는 그것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폭력적 세계화의 산물이다. 세계화에 관한 비판적 대화는 종교자체가 그 복잡성 속에서 공모자라는 것을 이해할 때에 비로서 진전될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콘스탄틴 유대교, 기독교와 이슬람 안에서 내적인 대화가 가능해 질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믿음과 투쟁의 더욱 넓은 전통 안에서 내적인 대화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화는 연대성과 공감의 운동 안에서 나타난다. 진실한 대화는 오직 그런 운동 안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세계에 대하여 말하고 그 속에 있는 우리의 위치에 대하여 말하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실제적인 것들이 될 때, 이런 움직임 안에서 비로소 진실한 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대화는 더욱 공정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추구하려는 책무를 수행할 때에, 그리고 수행한 이후에 이루어 진다. 이러한 운동은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비록 논의의 주제들이 위협적인 것들; 즉 종교적이거나 문화적인 우월성, 타자에 대하여 무죄하다고 보는 구속사적인 길, 궁극적인 계시로서의 계시, 이 모든 것들은 검증을 받아야 할 이상들이다.
계약 법궤 안에 이제는 무장헬리콥터가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고리 안에는 동등한 상징적인 표지들이 있다. 이스라엘 안에서 모든 종교적인 예식들은 중지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한 공격이고, 억압의 표지이며, 범죄를 가려주는 무죄주장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 예식과 절기들인, 성만찬과 라마단은 역사와 현시대적인 삶을 담고 있는 우리의 평가가 진실하게 때까지 과연 유보되어야만 할 것인가?
이러한 종교적이고 예전적인 사건들 중 어느 것이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위선에서 살아남는 것인지 우리는 궁금하다. 믿음과 투쟁의 더 광범위한 전통 속에서 그것들이 살아남게 될지, 혹 더 차고 넘칠지 누가 알겠는가? 만일 그것들이 살아남게 된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들은 개혁될 것이다. 믿음과 투쟁의 더 광범위한 전통은 대부분 드러나지 않았거나 유배 상태에 있다. 이러한 전통을 정체성으로 삼는 사람들 역시 유배 상태에 있다. 그들은 과연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형성할 수 있을까? 유배자들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모이는 곳은 어디인가? 각 전통의 파편들이 가치와 희망으로 새로운 종합을 일으킬 곳은 어디인가?
기독교와 이슬람 안에서도 동일한 구출 작전들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지나갔듯이 무장헬리콥터로부터 계약의 법궤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 구출이 없다는 것,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종교 안에서 심판을 받도록 운명 지어 졌다는 것, 예언자들이 귀을 막고 있는 이들에 의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몰락하고, 예언자들의 이름으로 또 한 판 벌려진 폭력 속에서 그들의 희생이 이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쯤 알게 될 것인가?
불운한 예언자는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리이지만, 한때 지역적이고 이제는 세계적인 종교가 된 고대 종교들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아이러니는 세계 종교의 참다운 승리 그 자체가 바로 그들의 실패의 일부라는 것이다. 저항의 아성(牙城)들이 모든 종교 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 저항의 소리들은 진면목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을 실천하기 위한 주장을 통하여, 사실상, 아직 드러나지 않는 색 다른 길, 새로운 디아스포라 안에서 유배를 시작하게 된다.
유배가 일어나는 동안 자유로운 예언과 한정될 수 없으며 누군가에 의해 소유될 수도 없는 계약이 존재한다. 자유로운 예언의 실천에 관한 특성 그리고 우리 시대에 신실하기 위한 투쟁을 가능하게 만드는 적절한 영성은 있다. 더 넓은 공적, 지구적 토론을 이어받을 수 없는, 자유로운 예언에 대한 비판은 의심할 여지없이 옳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문제가 제기된다: 다른 개입의 형태들이 과연 성공한 적이 있는가?
전략은 세계 안에서 그 자리를 가진다. 그리고 살아남은 콘스탄틴 종교와 국가는 전략을 요구한다. 그러나 마침내 권세들이 압도하면, 양심적인 이들을 위하여 단지 타협적인 항복이 가능할 뿐이다. 이런 항복에는 수치감이 없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하여 그리고 압제자의 변화에 대한 기대 조차 열려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지평, 정의의 지평이 하나님의 지평이 되는 경우에만, 그 항복 속에서 혁명적인 용서가 나온다.
비록 더 커지고 더욱 힘을 가지게 될지라도 세계 종교들에게 있어서 종말은 멀지 않다. 남아 있는 것이란, 지금 이순간에도 그리고 언제나, 종말이 올 때까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문제다.
유배와 새로운 디아스포라
유대적인 폭력이 다른 종교들에 의하여 용납된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논쟁거리이기도 하고 또 당연히 논쟁을 불러와야 한다. 무죄한 체하는 것도 여실히 동일하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거래에 의하여 추가되고 부추겨지는 이런 폭력에 대해 특이한 침묵이 있을지라도, 모든 종교적인 사상가와 행동가를 향한 교훈은 동일하다: 비록 세계 종교가 정의와 불의, 평화 운동과 폭력에 대한 승인을 담고 있을지라도, 분명 이러한 주제들을 넘어서서 그들 안에서의 내전, 그리고 언제나 가장 오래된 것과 순수한 것을 되찾으려는 시도는, 종교와 연계된 자유든지, 아니면 사회학적이며 비판적인 종교 이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유산에 대하여 새로운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상, 다원주의적인 공동체는 정확하게 말해 같은 생각을 가진 개인들의 공동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린 전통들을 어떤 하나의 특별성이 지배할 수 없는, 근본적으로 전통이 그 자체를 변화시키는 방법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서로 다른 전통들로 형성되는 자리로 가져간다. 이것은 21세기에 특별히 옳은 이해가 될 것이다. 전체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서 종교적인 전통의 회복을 향한 운동은 부분적으로 종교다원주의자들에 의해서만 저지될 수 있다. 이것이 진실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종교의 배타적인 이해와 정치권력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또한 세계종교가 다원주의에 대해 심각하게 불만할 수 있는 경우도 된다. 대부분의 경우에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은, 그러나 힌두교와 불교와 같은 다른 종교에서도 또한 진리일 수 있는 사실로서, 사회에서 소수자의 위치를 가질 때, 그리고 그들이 정치적이고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권력에 의하여 주변부로 밀려나갈 때 다원주의와 손을 잡는다.
이런 사례들은 많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유럽에서 사회를 형성할 자신의 능력을 단순하게 양보하지 않았고, 부과 군사력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콘스탄틴 기독교는 그런 권력을 위해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싸웠고, 여러 방식에서 개신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통제와 권력을 다시 회복시켰다. 폭력과 포악의 순환은 지난 수 천년 동안 유럽 기독교 안에서 행해졌고 세계 전체에 걸쳐서 널리 퍼졌다. 기독교를 세계종교라는 지위에 올려 놓은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의 지나간 흔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중앙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지난 수 십 년에 걸친 투쟁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제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이것들이 지난 투쟁들이나 새로운 범위의 시작인가? 이슬람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다른가? 이슬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세계적인 투쟁이 그 목적인가? 아니면 이슬람의 부흥인가? 이러한 부흥을 수반하는 내적 투쟁이 지금 시작되고 있는가?
유대인과 유대주의는 이러한 관계에서 논의할 가치가 있다. 모순들은 놀랄만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한편에서 본다면 미국의 유대인은 다원주의를 환영하기도 하고, 실제로는 주요한 언론의 논평자들이거나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들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은 군복무와 땅을 사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가능한 방식에서 유대인 됨을 규정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소수자들은 관용되고 있지만 땅도 국가도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계 도처의 유대인들은 복귀할 수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가 전세계 유대인들의 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바에 따라 금방 이스라엘 시민이 될 수 있기도 하다. 완전한 평등을 논하는 그리고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배경에 대하여 차별이 없는 시민의 권리를 논하는 미국 유대인들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모순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유대 국가를 지지하는 논쟁을 벌인다. 그들은 또한 다원주의적 노선을 따라가며 논하는 다른 이들을 향해, 유대인들과 비유대인에게, 신조나 종교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시민권에 의해 보호받는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가르치려 든다.
오늘날의 논쟁거리인 이런 점은 또한 고대의 논쟁거리였다. 갱신이란 운동을 보다 더 진척시킬 수 없지만, 최소한 한동안은 고대종교들 안에 있는 배타적 이해들을 부드럽게 만들거나 부드럽게 되도록 노력한다.
다원주의자들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이러한 전통의 측면들에 대하여 배타성을 취하는 이들처럼 주장한다. 확실히 양편 모두 위선을 지니고 있다. 배타적인 것으로서 이러한 전통 안에서 믿는 사람들이 자극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위하여 종교를 사용하려고 하는지를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원주의자들이 종교를 단순하게 논의하는지, 아니면 오늘날 넘쳐나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전쟁에 대해 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이러한 의도들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양편에 대해서 모두 복잡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반면, 종교적인 전통의 주류와 권력에 대한 그 순응은 다원주의자의 승리가 그럴듯하지 않게 만든다. 가장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란 후속적인 세대들 속에서 협상을 이루어낸 일련의 타협안들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투쟁은 종교와 문화와 정치적인 전선에서 싸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어느 편의 승리이든지 그것은 미래를 위하여 위대한 결과가 된다. 그러나 만일 다원주의자가 종교적인 성향이 배타적인 사람들에게 더 큰 권력을 부여한다면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 대하여 갱신을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실제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 권한을 부여하는 것일까?
대안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종교와 종교성의 중심을 향한 투쟁은 중요하다. 여기에 여전히 영적인 질문이 남아있다. 이러한 투쟁이 다른 편의 영성을 깊게 하는가? 신앙심에 대한 질문들이 소홀히 여겨지고 있는가? 전통의 전반에 대해 믿는 척할 수 있을까? 부숴진 파편들만 남아있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언제야 깨닫게 될 것인가?
진리 안에서 종교적 다원주의는 유배의 가장자리에 있거나 아니면 이미 거기에 있다. 다원주의자들의 공동체는 그들이 존경할만한 전통 속에서 다른 유배상태에 있으며 또한 다른 전통으로부터도 유배상태에 있다. 유배의 중심은 영성을 수립하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관심의 포괄적인 성격과 예언자적인 소명의 대한 강조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본성과 예언자적인 소명을 포괄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 다른 전통들로부터 빌려온 것들이 있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다원주의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새로운 전통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다원주의자들은 그들 자신을 기독교인, 유대인, 무슬림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미 그들은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어디엔가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그 이름이 온전히 인식된다면 계속해서 미래 속에 자리를 잡는다. 새로운 디아스포라 안에서 유배의 공동체를 개혁하는 것이란 바로 이 이름 짓기에 다름이 아니다. 바로 거기서 흩어진 전통들의 파편들이 모아져서 하나의 새로운 현실 속에서 융합될 것이다.
유배와 디아스포라는 종교의 역사에 있어서 지속적인 주제이다. 그것은 20세기의 예언자적인 공동체의 재탄생을 위한 재료이다: 만일 21세기 안에 동일한 포괄적인 종교가 있게 된다면 유배와 디아스포라의 궤도가 이름 지어질 필요가 있다. 유배와 디아스포라 안에서 약속되었던 복귀는 그 길을 열어왔지만; 21세기에는 복귀란 없을 것 같아 보인다.
종교자체는 그 자신의 기원을 숨기는 경향이 있다. 사실상 모든 종교는 위기와 유배의 상황 속에서 출현했다; 그것들은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형성된 산물이다. 확립되고 규명된 전통들과 더불어 종교의 성향은 옛 것 안에서 새로운 형성체들을 보게 된다. 이는 마치 종교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언제나 진화하는 광대한 조망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수세기 동안 이런 경우가 존재해 왔고 적어도 그럴 것이라 여겨져 왔다. 그러나 갱신에 대한, 갱신의 변화를 위한 전통의 능력을 고갈시켰을 때에 일어난 것은, 혹은 변화라는 것이 실제에 있어 하나의 위장수단이었을 때, 다른 시대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책략이었을 때에 일어난 것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런 종교적)게임이 끝났을 때, 종교적 변화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들이 전통 사이에 존재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바깥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의식했을까? 참여자들이 제안한 변화를 초래하기 위하여 전통의 능력을 넘어서서 움직이고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제안한 참다운 변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지만, 사실상 불의와 폭력을 은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가지는 에큐메니칼한 대화의 요지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 다원주의자와 그들이 참여하는 일치 운동이 깊이가 없다는 것은 그들의 나쁜 의도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들의 의도는 고상하다. 그러나 깊이의 결핍은 무능력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이 아니라면 종교적인 상황 자체를 직면하려는 의지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다; 최고의 추론을 위하여 돌아갈 길은 없다; 그러나 영적인 길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다; 전통의 배타성이 오해되었거나 아니면 그 전통적인 요구가 오도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회의실에서의 책략은 거짓된 것은 아니다.
여기 교육적인 하나의 실례가 있다: 유대교에서, 신에게 선택되었다는 주장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땅처럼 전통의 내부에 깊숙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주장과 약속 사이에 위대한 미학이 있고;
또한 폭력과 포악이 있다. 약속의 땅에 대한 의무는 명료하고 예언자들은 애매함이 없다.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은 정의와 공감의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속히 분노하시며 징벌하시는 질투의 하나님이다. 물론 이러한 분노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일어난다. 어떤 경우에는 바깥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향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 내부를 향하기도 한다.
이것이 유대적 다원주의자들과 에큐메니칼 대화에서 볼 수 있는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일까? 에큐메니칼 대화에 참여한 유대인들이 언제 하나님의 약속과 책망을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들의 상황에 관련시켜 왔는가? 언제 유대인 참여자들이 팔레스타인을 멸망 받아야 할 아말렉으로 분류하거나 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함부로 다룬 것으로 인하여 유배를 당할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던가? 언제 기독교 참가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그들의 유대인 동료들에게 제기했었는가? 혹은 마치 유대교의 하나님이 선택과 의무에 있어 중립적인 분으로 오해되는 것처럼 유대 전통에 관한 이런 핵심적인 논의의 주제들이 “극단주의자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까?
예수에 대한 해석은 마찬가지로 이런 관점에서 흥미롭다. 대부분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예수의 생애와 그의 자기 인식이 우리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예수의 삶의 의미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소명에 대한 숙고를 위하여 색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는 과연 무엇이 되었는가?
복잡성들과 연관된 것은 예수의 유대성, 예수의 초기 추종자들의 신앙, 신약성서가 되는 본문의 포괄성과 배타성이다. 기독교가 천년왕국을 연기해 왔다는, 예수가 메시야 라는 신앙과 그 신앙 저편에 구원이 있다는 근원적인 주장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다. 신학적인 전략이 초래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기독교 공동체만을 위한, 그리고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 중요하지도 않을지 모르지만, 기독교 공동체 밖에 있는 타자들을 고려하는, 구원자를 개념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동안 이루어지는 전통의 확장은 신학적인 논쟁 속에서 유지되기 어렵고 제도적으로 유지하기에는 더더욱 어렵다. 주류 개신교가 미국에서 쇠퇴하는 것은 이점에서 사례가 된다. 진보 신학들은 신학적 자산과 그 기독교적 이해에 있어서 서로 무척 다른 하나의 기독교로부터 얻은 제도적 유산에 기생해 살아 왔다. 이제 이런 신학들은 그들 자신의 자원과 충성심을 발생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직면하고 있다.
교회 협의회(NCC)의 운명은 캐나다 연합교회의 운명처럼 교훈적이다. 양자 모두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에큐메니칼한)이해를 통해 기독교를 하나의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해석해 주는 데 실패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은 교회 제도, 종교의 힘, 그리고 성직자를 가진 하나의 종교인 기독교를 버리고 떠난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는 평신도들은 진보적인 신학과 평신도들보다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공적인 영역에서 더욱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혹은 이러한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기독교의 종말을 보고 있거나, 그들의 믿음에 대한 또 다른 해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와는 다른 경우다. 지난 200년 남짓 유대인들이 뚜렷한 확신을 가지고 그들의 종교적인 의무를 외면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환영 받았지만, 그러나 그 정황에서 잊혀진 것은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로 유대인 권위자들에 의한 내적인 통제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유대적인 종교적 실천을 위하여 유대주의 안과 밖에서 종교 다원주의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유대주의를 종교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요구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종교로부터, 특히 배타적이건 다원주의적이건 간에 전통적인 종교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종교적인 강요와 위선을 참아내지 못하는 유대인의 능력은 그 근원을 토라에 두고 있었는 데, 계몽주의와 근대 국가 안에서 시민의 권리에 대한 이해를 통해 걸러졌을 때 그 결과는 명백해 졌다: 회당에 적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수가 오늘날처럼 더 낮아진 때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어렵고, 만일 회당에 적을 두는 일을 엄격한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수는 하찮은 것이 될 것이다. 이런 논리는 물론 에큐메니칼 거래에서도 반영된다. 기독교인 참여자들은 종교적인 기독교인이 되지만, 그들의 유대인 대화 파트너의 종교적 입장이 종종 문제가 되거나, 최소한 유대인들의 종교성이 다른 용어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는 에큐메니칼한 거래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여기 에큐메니칼한 만남 속에 또 다른 만남의 자리가 있다. 폭력과 포악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를 통하여 일해온 종교적인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종교적인 존재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독교 제도 세계에 한 발을 딛고 있는 동시에, 유배상태에도 한 발을 딛고 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은 콘스탄틴 기독교를 피해 달아나고; 그들은 오늘 날 콘스탄틴 유대교로부터 도망친다. 바로 이런 사실은 자신의 역사에 대하여 비판적이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과,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종교적 경건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이어주는 것이다. 이런 만남에서 우리는 배타/포용 유형을 넘어서서 하나의 미래를 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미래는 유배 속에서 진화한다; 새로운 디아스포라가 성장하는 곳에 이런 진화의 기초가 세워진다. 두 세계에 발을 딛는다 함은 에너지를 약화시키고, 요구되는 명확성과 21세기의 정의와 종교성의 현실을 규명하는 일을 가로막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모든 진실함을 가지고 이런 가능성을 직접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이렇게 유리한 자리에서 다원주의와 그 입장을 지켜온 전통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을 인지하는 것은 일종의 후방위 투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투쟁은 전략과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즉 전통 내부와 타종교의 지도자들과의 토론에서 지배적으로 드러나는 구시대적인, 온전히 믿어지지 않는 종교적 이미지의 사용이 의미하는 바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실제에 있어 자기 전통에 반하여 이견을 지닌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는 타종교 지도자들을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하며 그런 입장으로 인해 대가를 치러온 이들이 어떻게 불의와 포악에 참여하는 종교 지도력과 타협하고 받아들이는 이들과 연대를 나눌 수 있겠는가?
새 디아스포라는 오직 진리 문제가 공공의 세계에 증언될 때 형성되고 규명된다. 실제적으로 그 계산을 늦추는 다원주의자는 반대자들을 주변으로 밀어내고, 그들에 대해 모든 신앙 공동체들의 에큐메니컬한 거래자들의 분노를 사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문제에서 드러나는 유대 이견자들의 운명이 아닐까? 기독교 다원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유대 반대주의자들과 같은 견해를 가지지만, 유대인들을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지도력과의
관계가 깨지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그들 자신의 기획의 일부를 상실할 것을 두려워해 왔다.
이제 남아 있는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굴종이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적 관심을 여하간의 더 깊은 방법에서 촉진해 왔는가의 문제이다. 평화는 정의보다 더욱 선호되어 왔다. 동시에 기독교 공동체 내부의 이견자들은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너무나 급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반역자들로 간주되어 왔다. 이런 거래는 각 각의 전통 속에서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좌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외부의 존재로 소외 시키거나 혹은 박해 받게 하는 두 길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이슬람과 무슬림의 세계와 함께 나누어온 지속적인 대화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유대인과 기독교 다원주의자들이 동의와 타협의 공간을 이루어 낸 것처럼, 이슬람과의 만남은 이미 언급한 실책들이 남긴 어려움들을 더욱 어렵게 할 것 같다.
유대인과 기독교 다원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인을 위한 존재라는 것에 대하여 동의해 왔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나 메시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제 그러한 합의는 수년간의 대화와 비판적 학문과 분노에 찬 역사적 고발을 통해 이루어졌다. 무수한 기독교인들에게 받아들여진 유대공동체는 예수의 구원적인 본성에 관한 기독교적 신앙을 훈련 받았다. 이런 일이 이제 이슬람 전통 속에서 모하메드의 자리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도 모하메드를 궁극적인 계시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이 이제 무슬림들의 신앙으로, 그리고 에큐메니칼 한 대화의 비타협적 측면에서 수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신앙으로부터 이탈한 무슬림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들은 곁으로 밀려나 자신의 공동체와 에큐메나칼한 대화에 참여한 다른 참여자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무슬림은 종교적 다원주의자들의 해석처럼 아브라함 전통의 한 부분으로서 환영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 이슬람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경악해 하며, 그것은 극단주의의 한 형태라고 여겨 당장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콘스탄틴적 이슬람과 일종의 종교다원주의적 이슬람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지점을 일러주는 그런 무슬렘들은 배척될 것이다.
예언과 종교 다원주의
종교 다원주의의 중요성에 대한 질문만큼 중요한 질문은 없다. 종교 다원주의는 차이에 대한 관용과 인식을 향한 필수불가결한 단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 안에서 책임과 자유를 규정하면서 민주주의와 시민권의 역할을 지향한 현대적인 운동을 보완하고 있다. 다원주의는 정확히 그 근원을 고대 전통에 두고 있다. 그 전통은 종교적이며 관용적이라는 주장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일러준다. 다원주의는 무수한 신앙인들이 그들의 믿음과 다른 이들의 믿음을 수용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존재해 왔고 존재할 것이다.
모든 종교는 그 전통이 가지고 있는 감수성과 영역권을 확장하듯이, 분명 그것의 기원에, 그리고 그것의 내부에 다원주의를 지니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부분적으로 다원주의를 허용하고, 실제로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적 역사다. 어떻게 다른 종교들이 정복되고, 종교성과 그들에 의하여 재구성된 상징들의 유형들로 동화될 수 있었을까?
다른 종교와의 접촉조차도 대부분 제국 안에서 그리고 제국으로 인해 이루어 진 것이다. 시대를 넘어 대립해왔고, 패배해 온 것은 다른 시대 속에서 다시 타협을 받아 들였다. 기독교와 유대주의의 역사는 그러한 만남으로 가득하다. 현재의 에큐메니칼 대화는 그러한 역사의 산물이며 에큐메니칼 거래는 일종의 계속되는 타협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이슬람은 기독교와 유대교와의 만남처럼 그 자신의 확장의 내적인 역동성, 분리, 폭력과의 지속적인 만남의 일부다. 일종의 오래된 그리고 동시대적인 만남의 자리로서 아브라함 전통에 대한 집중된 관심은 신화에 근거해 있다. 누군가가 심각하게 이러한 종교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발생되었다거나, 아니면 그 종교들의 공통적인 근원인 아브라함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을까?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거의 일종의 기본적이며 명확한 구조를 거부하는 것과 같이 매우 복잡한 역사들을 내 던져 버리는 것이다.
역사의 증언은 우리에게 종교적 다원주의는 중요하지만 제한적인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것은 일종의 다른 영역으로 가는 정거장이다. 이런 종교들이 그렇게 세워져 강력해 졌다는 사실은 폭력과 포악에 물들기 쉬운 그런 전통의 부분들을 대면해야 하는 종교적 책임성이 무한히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대면의 투쟁이 더 깊은 영성을 대체할 수도 있고; 종교다원자가 일러주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수용하려는 미래의 영성을 지체시키는 일을 돕기도 한다. 아무튼지 다음 세대는 현 세대의 열광주의와 싸우려는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기대되지는 않는다. 한 세대의 반역은 다음 세대 자신이 다루어야 할 문제들을 안고 있는 이미 수용된 규범이 되기도 한다.
다원주의자들의 후예들은 그 반역을 수용 가능한 현실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영성은 다른 신앙을 가진 다원주의자들 속에서 이루어진 이 새로운 환경에서 형성될 것이다. 만일 종교적 배타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항하여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더불어 싸운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투쟁처럼 단순하게 규정될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공적인 영역에서 해명된 그들의 종교성은 침묵을 강요당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의 최전선에서 그들은 어딘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영성의 미래는 이미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 비제도적이고, 절충주의적이며, 다소 뉴 에이지적인 것으로서의 그 영성은 영성적이며 정의지향적인 사람들로 구성된 조그만 공동체 안에서 찾아질 수 있다. 전통의 파편들은 여기저기서 모아지고 때로는 골라 내어지고, 맥락이 드러나고, 대부분 우리가 그리도 많이 논의해 온 종교들에게는 낯선 감수성과 태도들의 덩어리 속에서 재결합되는 것이다.
이렇게 파편들을 절충적으로 모으는 데에는 아무런 죄가 없다. 이런 공동체들 중에서 미래를 가진 공동체는 거의 없으며 그들의 이상 중에 어떤 것은 이미 유대교와 기독교 안에 모아져 있다. 적어도 종교의 자유, 민주주의와 시민권이 당대의 요구가 되는 한에서 이런 일은 이슬람과 다른 종교에게서도 시대를 걸쳐 일어날 것이다.
서구에서는 적어도 모든 종교들은 전도를 위한 것이 된다. 모든 종교들은 그들의 평화를 군사주의와 근대성의 다양한 형태 속에서 나타나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와 더불어 만들어 낼 것이다. 오늘날 하나의 진정한 세계종교는 근대성이기 때문에, 종교성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근대성 안에서 발견된다. 혹자는 종교적 다원주의가 근대성 안에서 의미를 가질 것이며, 다원주의는 이러한 새로운 제국 안에서 자리를 잡으려 한다고 말할 것이다.
여기서 예언이 다가온다. 예언은 종교 이전이다; 적어도 예언은 유일신론적인 믿음을 위하여 그 주변에 종교 그 자체가 세워지는 핵심이다. 일단 종교가 세워지면, 예언은 폐해진다. 규정되고 다시 규정되어서 예언이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될 때까지 제의와 종교의 힘에 사로잡히고 성직자와 학자들에 의하여 해석되는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는 예언에서 멀어져 가는 이러한 궤도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정확히 돌파가 가능하다. 세계종교는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를 통하여 확장된 지역종교를 크게 이용한 것이다. 세계종교들은 그들의 세계적 감각 안에서 이제는 거의 인식할 수 없게 된 토착종교들이다. 이 기원에서조차 자주 묻혀지고 숨겨지는 것을 통해 요령 있게 남게 된다. 정의와 자비에 대하여 그들이 지니고 있는 관심의 가장 큰 의미를 본다면 그 종교들은 명백하게 예언적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의 편에서 본다면 이런 종교는 토라와 탈무드를 가지지 않은 하나의 예언적 현실이다. 기독교의 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신약성서, 교회 그리고 성직제도 이전에 있었던 예수 주변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러한 예언적인 토대들의 견고함은 의문의 여지없이 근대성의 종교와 일치하기 어렵다. 그리고 고대의 여정을 근대의 것으로 만드는 상황신학의 요구는 불합리하다. 하지만 다원주의자/근대성 패러다임의 취약성은 종교적 배타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간의 끝없는 투쟁과 마찬가지로 예언의 날카로움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예언을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미성숙한 판단에 대하여 경고를 보낸다
실제로 근대성 안에서 예언을 심사 숙고한다는 것은 우리가 배운 것들 중에 많은 것들, 특히 종교적인 가르침들을 내어 버리는 것이다. 그 배움은 우리들을 예언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더러운 배타주의자들과, 덜 배운 형제와 자매들에 대한 승리감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실수란 우리가 그렇게도 우리의 적들 한 가운데에서 비난했던 바로 그 동일한 전략적 제휴 안으로 우리도 빠져드는 데 있다.
세계종교에 대항하면서 예언서를 읽는다는 것은 겸비에 대한 교훈이다. 예언은 우리 자신들의 궤변으로 만들어진 안전한 항구를 포함하여 우리의 은신처를 버리고 떠날 것을 강요한다. 우리의 특수성은 더 날카롭게 되고 불편해 진다. 그러나 바로 그 거리 때문에 우리의 공동 인간성을 더 깊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예언은 우리들을 진보의 환상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궤변적인 전통으로부터, 우리 자신들의 논쟁으로부터 그리고 끝없어 보이는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전쟁으로부터 우리를 놓아준다. 만일 종국에 우리가 위의 것 모두에 참여한다면 - 우리가 우리의 유산, 교육과 독특성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 우리는 적어도 더 깊은 차원에서의 묵상과 영성은 그저 피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무관심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언이 없다면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무슨 중요함이 있겠는가? 예언 없이 종교적인 대화에 무슨 중요한 점이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우리는 예언적인 소명에 유의하는 데 실패했고, 진실에 있어서 예언의 내용을 따라 살기 원치 않고, 예언을 고의적으로 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배타주의자들과 합의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더욱 정직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가는 세계 종교들과의 대화 위에 그리고 그 주변에서 자란 전문가들의 희생을 포괄하는, 다양한 전선에서 엄청난 양이 될 것이다.
종교적 대화를 제도화하는 것 자체는 위험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종교들과 문화들을 이해하고 평화롭게 순응시키기 위한 대화에 대한 긴박한 요구는 역사적으로나 문헌적으로 넘쳐난다. 그것은 유사한 교회 - 혹은 회당이나 모스크 – 일종의 자기발생적이며 자축적인 것으로서 다원주의 공동체가 비판하는 구조들인 대안적 권력구조가 될 수 있다.
거듭 말하자면 자기교정이란, 종교가 되어버린 이러한 고대의 운동들을 담고 있는 지역성과 예언이라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문제를 피할 수 없다: 우리가 과연 예언이나 종교를 구체화하고 있는가?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의 분별력의 지속성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우리가 화가 나서 우리의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그런 훼방을 용납하고 있는가?
우리시대의 갈등을 초월하는 자리가 있는 데 역설적으로 그 곳은 문제의 한 가운데 우리를 정위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감수성들은 각기 다르고 거래가 되어버린 에큐메니칼 대화는 종교 다원주의 문제가 버려지는 것처럼 외면 받게 된다.
그 안에 존재하는 우리 자신들이란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 즉 일종의 새로운 디아스포라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유배중에 있는 공동체인 것이다. 예언과 현대 세계와의 대화 속에서 우리 전통의 파편들은 일종의 색다른 역동성으로 돌입한다. 우리가 그것에 이름을 지어줄 용기가 있다면, 이 역동성은 언젠가 이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름과 상관없이 기실 그것은 이미 여기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와 혁명적 용서
이미 여기에 현존한다는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감각은 우리에게 영성의 진정한 소명을 기억나게 하고, 예언은 상처를 치유하며 새로운 상처가 나지 않도록 막아준다. 이러한 상처들은 다양하다; 유약성은 그 자체로서 인간의 여정을 드러낸다. 본성과 질병을 직면하고 있는 인간의 유약성과 인간에 의해 야기하는 폭력에서의 유약성 사이에 있는 차이는, 완전히 분리되었을 때 더욱 더 그릇된 차이가 된다. 우리의 지구에서 일어나는 포악은 더욱 더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인간과 자연은 오늘날 운명적인 결속을 가지고 있다. 교란하고 파괴하며 경제정책을 뒤흔드는 이들은 바로 군사적 정복정책을 손아귀에 쥔 이들이다. 제국 안과 밖에서 제국을 추구하는 이들은 서로 야합한다. 그러므로 제국에 의하여 행해지는 포악은 역사적인 것을 포함해서 다양한 수준들과 연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다양한 시각에 의해 규명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 포악이 지역적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상 지구적이다. 대량학살이 이곳 저곳에서 일어난다; 식량 공급이 끊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 강제 이주를 당하고 난민촌으로 보내지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폭력의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폭력은 범법자들에 의한 폭력이다. 침해 받은 이들을 보호하는 이들에 의해 일어나는 폭력도 있다. 이렇게 폭력과 포악의 순환은 전 역사를 거쳐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다. 20세기에는 강제수용소(구소련), 홀로코스트, 캄보디아와 르완다에서; 21세기에는 다포지역, 이라크와 레바논에서 이미 그 포악이 증언되고 있다. 세계화가 포악의 형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핵에 의한 대학살에만 견줄 수 있는 크기의 포악들이다. 아마도 핵에 의한 대학살과 세계화의 현실 양자는 기술적이며 사회적인 조직과 관료체제에서 일어나는 동일한 진보를 통하여 가능해지는 것일 것이다. 버섯구름과 지구온난화는 동전의 양면이다.
포악 이후에 과연 치유가 있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이제 이 질문은 여전히 더 어려워진다. 포악 이후에 포악은 여전히 지속되고 지평선위에 더 많은 포악이, 정확히 동일한 장소가 아니라도 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후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일어나는 포악과 더불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 요약하여 묻는다면,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일종의 포악의 세계가 있는데, 만일 모든 것이 규명되고 종료된다면, 우리의 미래를 규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서, 거기 하나의 미래가 있을 것인가?
과연 포악이 없는 미래가 있을까? 인간성의 근원에 기여하는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열성가의 위대한 희망, 바로 이 희망 역시 사회적, 경제적인 불의를 근절하기 위하여, 세계에 자유를 주기 위하여, 비문명화된 이들을 문명화시키기 위하여, 진실한 종교를 설파하기 위하여, 포악을 종식시키겠다는 투쟁 속에서 수 백만 명을 죽음에 넘겨줄 수 있다 - 이 모든 것들은 역사학도 들이나 현 시대의 사건들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있어 익숙한 십자군 전쟁들이다.
이것이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 속으로 세계를 끌어들이는 바, 다양하게 규정된, 더 나은 세계를 위한다는 바로 그 욕망이란 말인가? 아니면 보다 나은 세계를 바라는 것이란 그저 단순히 상처 입기 쉬운 세계에 자신들의 제국적인 구조를 부당하게 끼어 넣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기 바라는 모든 이들이 이용하는 기만의 술책인가?
우리의 능력 안에 가지고 있는 선택이란 다름 아니라 비록 그 수단의 복잡함이 있지만 그저 단순히 바라 보는 것이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 한 가운 데이거나 혹은 집단적인 노력 속에서 우리는 제국, 아니면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 양자(제국이나 공동체를 추구하는 노력)의 성취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제국 아니면 공동체를 지향하거나 멀리하는 방향만은 그 안에서 구별해 내는 것이 가능하다. 바로 이 제국이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방향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사회적이고 그리고 종교적인 것이다. 그 선택은 우리 시대에 일어난 사건, 역사적인 사건 이후나 그 기간과 그 전에 우리의 선택 영역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충격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어느 한 시대에, 그리고 모든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간섭주의적 입장으로서, 마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취한 바른 행동을 안내하는, 최선의 의도들을 가지고 행동을 교정하도록 안내하는, 분별력과 같다. 이러한 간섭은 우리들의 개인적인 통제 안에 있다 - 우리는 모든 시대에 이것을 할 수 있는 데,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에서 연합하여 논의할 수 있어 응용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국과 공동체에 대한 문제에는 개인적이며 제도적이고 측면이 있는 것이다. 제국과 공동체를 선택하는 데에 있는 일종의 항구적인 측면은 우리가 언제나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것들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라 해도 포악 이후에 용서 한다는 것은 어렵다. 만일 정의를 추구하려는 책임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용서라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포악 이후에도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죽은 자들을 되살려 낼 방도는 없다. 포악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육체적인 처벌조차도 죽은 사람들을 되살릴 처벌이 되지 못하는 것이고, 설령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고작 범죄 그 자체에 가장 가깝게 있었거나, 그 최 측근에 그칠 뿐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나 그 범죄를 실천에 옮기도록 한 사람들은 흔히 멀리 숨어있고, 권력과 종교에 의하여 보호받으며, 역사적인 힘에 의하여 투사된다 – 그들 모두는 징벌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범죄의 현장 뒤에 있던 이들은 그들의 유쾌한 삶의 방식을 지속하며, 무죄한 척하고, 법을 만들어 다른 이들이 복종하게 하고, 그 법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하려 하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에 적용되지 않는 법이란 그저 출생권과 같은 것뿐이다.
특히 그들의 권력이 포기되거나 공유되어짐 없이 힘있는 자가 용서를 받는 자리에서 용서가 경건이 될 때, 항상 일깨워지고 이해되는 방식에서의 용서란 여기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러한 용서는 죄책의 양심에 의하여 제한되지 않는 방식으로 권력이 움직이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한 용서는 폭력과 포악의 순환이 지속되도록 그 길에 용기를 불어 넣는다; 그리함으로 동시에 이 고리에 상처 입기 쉬운 사람들을 더욱 상처 입을 사람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정의 없는 용서는 폭력과 포악의 순환을 조장하는 사람들을 독려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노를 씻어내는 것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길로서 용서를 말하는 종교에서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분노는 이해할 만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또한 포악의 결과를 치유할 수 있는 운동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비록 용서라는 것이 제국의 유능한 행위자로서 허락되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 정의에 대한 책임이 없는 용서 – 분노는 비판의 방법으로서 그리고 포악이 없는 세계를 향한 가능성의 확증으로 사용될 수 있는 데, 그 세계는 곧 제국으로부터 이탈하여 공동체를 지향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포악의 결과에서 나오는 혁명적인 부분, 전혀 다르게 살아갈 책무, 폭력이 삶의 방식이 된 세계를 거절하는 것, 그리고 구체적인 삶을 통하여 어느 날 우리들의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을 규정하는 하나의 요소로서, 일종의 평화로운 여행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세계를 이룰 가능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혁명적인 용서란 폭력 세상을 만드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는 제국과 싸우면서, 배제하기 보다는 포괄하는 개입과 투쟁적인 대안적 삶을 살아가며, 폭력과 포악의 순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며, 주변에 머무르는 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에서, 우리가 주변부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공동체 안에서 제국에 대한 우리의 반대와 제안은 개방되는 것이다; 혁명적 용서가 정의와 고상함을 일상의 삶으로 제안하는 한 그것은 혁명적인 것이다. 이 일상의 것이란 모든 시대에서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종교적 제도 안에서 예외 없이 기려져야 할 것이다. 바로 이 “예외없음”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모든 제도와 세계 이해를 존엄성과 인격에 구속된, 그리고 이 존엄성에 충격을 주는 한에서만 이데올로기와 종교 안에서 초월을 허용하는 감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혁명적인 것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용서는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태를 초월하려 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이념과 종교를 심판한다. 용서는 어떤 사상 체계나 제도일지라도 가장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제도들이 모든 수준에서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데 뿌리를 내리는 동안 과연 세워지고 유지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분명히 인간의 존엄성에 이렇게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구호를 외치기 보다는 실천할 때 비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종교 조직의 모든 특수성에 도전을 제기한다. 유대교, 기독교과 이슬람은 모든 특수한 것에 근거를 두고 있어서 일단 보편화되면 포용하고 배제하며, 정의와 불의 ㅡ 평등과 불평등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모든 것을 고정시키고, 그들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에 의하여 후원을 받는다. 혹은 우리를 알시고 이 땅에서 총애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책임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인 용서 개념을 내세우면서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은 과연, 요구되어지기도 하고 주어지기도 하는 우리들의 충성심을 풍요롭게 하는 것인가?
혁명적인 용서를 위한 연구는 새로운 디아스포라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 분명 이 용서야말로 우리가 상속받은 공동체로부터 유배를 당하는 원인이다. 혁명적인 용서는 우리가 머무는 곳이나 모든 곳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향하는 마음과 정신과 육신을 담은 심오한 운동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아의 가장 깊숙한 부분에로의 복귀이다. 여기서 타자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니다. 저 밖에 있는 타자와 이 안에 있는 타자는 새로운 형상을 향하여 움직여 나간다. 우리의 삶의 외부는 도전 받고; 또한 우리 삶의 내부 역시 도전을 받는 것이다.
안팎으로 움직이며 새로운 역동성이 일어나고 수용된다. 이러한 역동성은 지속적이고, 안과 밖으로 넘나들면서 우리 내부에 있는 권력과 외부에 존재하는 권력에 도전하며 언제나 움직이고 있다. 폭력에 대한 유약성은 남아있다; 아마도 혁명적 용서의 역동성이 정지되면 그 유약성은 더욱 약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약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죽는 방식까지 선택하도록 움직이고 있다. 역사는 빠르게 지속된다. 우리의 지속적인 간섭은 우리의 통제를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것과는 다른 현재와 미래를 향한 육체와 정신과 마음의 자리를 초월하는 세력에 대한 우리의 해설이다. 혁명적인 용서는 역사를 멈추거나 그 과정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불의한 권력에 의하여 유포된 조각들을 모아 맞추는 것처럼, 버림을 받은 이들에게, 힘있는 자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처럼 소리 높여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 또 다른 방식이 있다.
그러므로 치유란 유능하게 만드는 것이거나 혁명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용어다. 누군가에게 적대적으로 또 하나의 과정을 허용하는 제국 안에서의 치유란, 마치 그리스도인과 서구의 유대인처럼 서로를 향하여 화해를 하기로 동의한 후, 힘을 모아서, 타자에게 적대적으로 그 힘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에큐메니즘과 종교간의 협력은 종종 이러한 제국과의 거래로서 역사적 적대성과 유혈학살을 관심에서 제외시킴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벌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화해란 정의가 없는 용서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몇몇 사람들간에서만 이루어진 정의는 현재 속에서 갱신된 무죄성과 더불어 불의가 일어나게 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화해는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종교적인 신뢰성과 권력관계를 묻어버리는 용서; 그때나 지금이나, 비판적인 대화자 없이 정치권력의 축복과 종교적 감수성을 버려두자는 합의; 현재의 기독교 희생자와 현재의 유대교 희생자를 협상하는 회의 자리에 버려두는 것이다.
누군가의 구원이 다른 이들의 고통을 불러올 때에는 구원이 될 수 없다. 누군가의 치유나 다른 편의 치유로 인해, 그 때 다른 이가 고통을 당한다면 과연 치유일 수 있겠는가? 타자의 고난을 불러오는 치유라는 것은 정의 없는 용서처럼 하나의 덮개고, 비록 언어는 달라질지라도 제국의 감수성을 전략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하나의 경건이 아닌가? .
제국인가 공동체인가라는 가장 탁월한 종교적인 질문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종교를 지속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질문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결정적인 것처럼 지속된다. 우리가 제도에게 바치는 충성이라는 의미는, 유대인 예수, 혹은 모하메드가 타자를 위한 길이 되어 우리 자신의 길을 인도하는 핵심적인 종교적 감수성과 인물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적인 관계로부터 분리 혹은 충성심은 다른 것들의 발단이 되고, 심지어 더욱 어려운 도전이기도 해서; “진정한” 유대적인, 기독교적인, 무슬렘의 길을 되찾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여정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종교 안에서 본래성을 향한 탐구는 끝이 없고, 얽혀있으며, 필요하고 제한적이다. 확실히 끝도 없다. 만일 우리가 외부의 타자들을 위하는 동시에, 안에서는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려 한다면, 사회에서의 일상적인 삶과 개인적인 행로를 자유롭게 놓아두면서, 일치보다는 다양성을 표어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다양성이란 여기서 다양한 것을 하나로 묵는 것이나, 다양성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일치를 예찬하는 방식으로서 여겨질 수 없는 것이다. 다양성과 일치라는 두 가지 이해는 혁명적인 용서를 향한 여정의 첫걸음이다; 그것들은 전반적인 것에 걸쳐 해명하는 신학적 구조 없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다양성과 일치에 대한 인식을 일러주는 지표들일 뿐이다.
우리가 힘겹게 걸어온 종교적인 경로는 우리의 출처, 그리고 정돈되지 않는 세계를 정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타자들도 이런 경로들, 해체와 교차의 단면들에 나타나 자신의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거나 공표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경로들과 다른 길들 역시 우리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경로에서 우리측이나 타방의 측면에서 찾아질 수 밖에 없는 경로들은 사실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른 길의 바깥과 안에서, 그리고 앞을 향하여 방황하면서 찾는다. 이는 우리의 길은 단일하거나 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우리의 모든 길들은 절충적인 것이고, 모아진 이미지들이며, 의식적이며 무의식적인 잡다한 것들이 모인 것이고, 간혹 우리 안이나 밖에서 권위자들에 의하여 통제를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유롭고,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어 내는 치유의 일부가, 우리 삶, 그리고 이런 자유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용서를 지향한 운동에 스며드는 폭력에 대한 분노를 포함하여, 모든 수준에서 자유로운 연합을 지향하는 운동일 수 있을까? 자유로운 연합, 이미지와 에너지의 노출은 그 자체로 시금석이며, 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질서다. 이것이야 말로 공동체의 길, 특히 모든 문화와 종교에서 만들어지는 유배들을 위하여,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지니고 있는 이러한 파편들, 우리의 유산의 파편들을, 다시 한 번 안과 밖에서 방황하도록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부서진 것을 온전케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온전한 것을 깨진 것으로 만드는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기 위하여 깨어진 것을 사용하면서 깨어 진 것과 더불어 움직인다는 것은 화해와 용서의 근거가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최소한 화해와 용서의 가능성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 삶에 파고들어 새로운 결정체를 만드는 폭력과 포악을 행한다는 것은, “여기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과 행위로 구성된 바, 색 다른 도표 속에 존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리듬을 찾으라는 폭력에 대한 기억을 허용하는 것이다.
폭력의 기억, 실로 고통의 기억은 정의의 운동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폭력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폭력의 반복성에 반대하는 경고로서, 그리고 누구도 폭력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책무로서 항상 어디에든지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형상 속에서 연이어 다가오는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폭력에서, 가해자를 배제시키는 정의에 대한 책임 속에서, 가해자에 의하여 해가 입혀지는 그 악순환을 배제하는 기억이 된다. 그러므로 압제자와 억압자라는 전자의 관계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면서, 양측을 보호하기 위하여, 양자가 불의에 대한 기억을 이용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희망이란,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혁명적 용서가 지닌 역동적인 것이다: 폭력에 의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정황, 그러나 폭력을 이용하며 자신과 타자들을 위하여 폭력을 넘어서는 자리로 나아가는 정황을 마련하는 것이다. 포악자는 그리하여 제국에서 나와 공동체로 회심할 여지를 가진다; 제국에서 공동체로의 회귀함으로써 폭력과 포악의 순환은 그 안에서 도전을 받게 된다. 이런 도전이 전지구적 의미에서 폭력의 순환을 종식시키기에 충분한지 아닌지의 문제는, 이에 관여된 개인이나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질문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은 그러한 종국의 가능성에 대한 증언이고, 그 종국은 여기서 지금 경험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과연 이러한 증언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을 후세에게 남겨줄 수 있겠는가?
종교는 이러한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 화법으로 말해 이런 치유에 반대하게 될 것인가? 더 넓은 신앙과 투쟁의 전통이 과연 혁명적 용서를 위한 투쟁을 향해 그 자신을 개방할 수 있겠는가?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로부터 나오는 종교적 전통의 실패 때문에, 그리고 그들 자신이 이런 폭력의 순환을 불러오기 때문에, 더 넓은 신앙과 투쟁의 전통은 다양한 방법으로 존재해 왔다. 세계화의 세계 속에서 그리고 그 세계화를 돕는 종교와 더불어 더 넓은 믿음과 투쟁의 전통이 세계화의 충격을 둔화시키고 전복시키는 과제에 과연 이르고 있는가? 유배와 새로운 디아스포라는 폭력과 포악의 순환고리의 산물이다. 그것들이 과연 이러한 세계화를 되돌릴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증언이란 고작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하나의 희망 없는 희망, 하나의 공백일 뿐인가?
우리는 미래를 향한 질문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뒤돌아 보며 심판할 우리를 위한 질문들도 있다. 우리의 과제는 개인적이며 집합적인 삶을 위한 토대로서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토대와 같은 공동체가 없다면, 적어도 이 세계의 미래 제국에 도전하고, 지속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의 생존요소들을 위한 구조물을 마련하는 것이다. 혁명적 용서는 인간의 존엄성의 가치에 힘을 불어넣고 권력을 가로막는 치유를 향하여 퇴로와 진로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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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October 30, 2008
Talking about God in an era of anxiety and atrocity
<마크 엘리스 교수 초청 강연>
불안과 위기의 시대와 하나님에 대한 물음
일시: 2008년 11월 11일 오후 2시-6시
장소: 감리교신학대학교 웨슬리 채플
기독교 사상 초청 / 감리교신학대학교 후원
박 충구(감신대 교수)
마크 엘리스 교수
마크 엘리스 교수는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제자인 루벤슈타인 문하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뉴욕 메리놀 대학에서 12년간 교수했고, 현재는 미국 텍사스 베일러 대학의 유태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는 미국 대학들이 당대의 특출한 사상가를 초청하여 대학의 교수(University Professor) 지위를 부여하고, 강의보다는 전 세계적인 강연자로서 활동하도록 하는 특권을 베일러 대학으로부터 부여 받았다. 그는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남아프리카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학술 강연의 연사로 초청을 받고 있다. 이렇게 그가 초청을 받고 있는 까닭중의 하나는 그가 현대 유대 사상사들 중에서 매우 독특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데 크게 기인한다.
엘리스 교수는 현대 유대 지식인들을 정통주의 유대인, 진보적 유대인 그리고 양심적 유대인으로 대별하고, 유대인 대학살 사건 홀로코스트와 1948년 이스라엘의 재건에 대하여 그의 독특하고도 예리한 비판적 통찰을 보이고 있다. 유대학(Jewish Studies)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그는 현대 세계에 커다란 지적 영향을 끼진 유대인 지식인들의 사상에 대하여 심도깊은 연구를 통하여 마르틴 부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한나 아렌트, 엘리 위젤과 엠마누엘 레비나스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견해와 평가를 담은 강연을 해왔다. 이번에 기독교 사상 지령 600호 기념 강연회에 그가 초청된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강연을 기독교 사상 독자들과 그 외의 관심있는 이들이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엘리스 교수는 특히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 대한 특출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 그의 입장은 정통유대주의자들이나 시온주의자들, 그리고 진보적 유대 지식인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것으로서 팔레스타인 인들의 영토에 대한 주권과 생존권 및 인권을 옹호하는 데 깊은 관심을 표명해 왔다. 그의 관점은 오늘의 이스라엘의 대외 정책은 유대주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소외자들을 배려하라는 명령을 담고 있는 성서의 계약사상이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보다 높은 정의의 수준을 요구해 온 예언자들의 정신을 훼손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평가에 잘 담겨있다.
그는 유대해방신학(A Theology of Jewish Liberation Theology)로 일약 유명해 졌으며,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에서 일어나는 포악(atrocity)을 고발하는 현대의 예언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엘리스 교수는 이번에 광주 가톨릭 신학대학의 초청으로 내한하게 되었고, 한국을 방문하는 중 <기독교 사상> 초청으로 11월 11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불안과 위기의 시대, 하나님에 대한 물음들” 이라는 주제 하에 세 차례 연속 강연을 할 계획이다. 장소는 서대문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 신학대학교 웨슬리 채플이다.
강연초
이번 강연에서는 앞서 말한 현대 정신 세계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유대 사상가들, 즉 부버, 헤셀, 아렌트, 위젤과 레비나스의 사상을 섭렵하면서 엘리스 교수는 이 불안과 위기의 시대에 종교의 본질과 하나님 신앙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그의 견해를 밝힐 것이다. 엘리스 교수는 특히 히틀러 나치 정권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 사건을 구약의 번제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에서 만들어진 “홀로코스트“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부른 홀로 코스트 신학자 리챠드 루벤슈타인의 사상적 계보를 따라 다섯 명의 위대한 유대 사상가들이 유태인 대학살 사건 전후, 그리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 표명한 신학적, 철학적, 정치적 견해들을 분석하면서 본유의 유대 사상의 관점에서 그들을 새롭게 평가한다.
이번 강연회에서 다룰 주제들은 <타고난 예언자적 인물 마르틴 부버>, <근대성 이후와의 만남: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의견이 다른 유태인과의 만남: 한나 아렌트>, <홀로코스트와의 조우: 엘리 위젤>, 그리고 <유대인들의 미래를 만나기: 엠마누엘 레비나스>이다.
마틴 부버는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을 떠나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사회철학 교수로 살았는 데 그는 그의 유명한 책 <나와 너: Ich und Du>로 잘 알려져 있고, 사회운동의 측면에서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공존 가능성을 매우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사상가였다. 그는 “조직화된 종교는 본래적인 요소를 잊거나 우리를 세상에 순응시키는 실천적인 요소들을 통해 진정으로 본유의 것들을 가려 버린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만남이란 모든 교육의 핵심이다. 만남에서 “세대 간의 간극을 뛰어넘는 불꽃이 인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르침은 이론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런 만남을 가로막고 파괴하는 것이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다. 인격성을 상실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그것이란 하나님도 될 수 있고, 종교도, 이웃도 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그것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가공되지 않은 관점이고, 여과되지 않은 원초적인 감수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이란 우리의 비전과 길을 가로막는 대상들의 축적이다. 이런 나와 너의 관계는 유대 신비주의에 깊은 연원을 두고 있는 데, 오늘날 이 관계는 생명과 생태지향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우리가 그것의 세상에서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것의 세계 안에 있는 너, 즉 주체를 외면하게 된다. 그것의 세계는 이용과 남용의 세계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너의 세계는 관계의 세계다. 우리는 너를 객체화시키기 보다는 생명으로 만난다. 객체화된 그것의 세계는 분열과 분리의 세계다. 그것의 세계의 극단은 폭력이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우리가 생존할 수 없기에 그것은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것의 세계에서만 산다면 우리는 사물을 사용하되 나까지도 사물이 되는 지경에 처하게 되어 폭력과 포악이라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결국 가해와 피해라는 악순환의 일부로 전락한다.
부버는 그의 초기 인격주의를 지나 점차 회심과 대화라는 주제를 그의 사유 안에 받아들였다. 이런 변화는 엘리스 교수에 의하면 “부버가 무아적이고 피안적인 신비적 종교성으로부터 나와 다른 이들과의 만남과 공동체 세우기에 초점을 맞추는 현세적 영성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바로 이런 전환을 일러 부버는 회심이라고 불렀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이후 부버는 회심에 대한 논의에 대화를 추가했다. 그가 대화의 신학을 전개한 것은 홀로코스트 이후 화해와 평화를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진실한 대화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버는 자신의 동족 600만을 살해한 독일인들을 향하여 악과 타협하고, 악 앞에서 불안해하며 순응했던 이들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반인간적인 행위에 맞서는 길은 인간적인 행위일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헤셀에게서 우리는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겪은 또 한사람의 유럽 출신 유대인을 만나게 된다. 부버와 가깝게 지냈던 헤셀은 하시디즘 전통의 후예로서 믿고 느끼는 바를 진실하게 실천으로 옮기는 사상가였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1972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뉴욕에 있는 유대인 신학교에서 윤리학과 신비주의 교수로서 활동했다. 헤셀은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홀로코스트 이전의 신앙과 전통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루벤슈타인에 의하여 과거지향적 종교적 감성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헤셀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와 같은 절망의 그림자가 내리어져도 한 인간이 하나님과 친해지고, 하나님에게 가 닿은 체험이 일어난다는 믿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안식일에 대한 묵상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화폭위에 신비하고 장엄한 창조의 절정을 그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 우리도 그리 해야 한다.” 고 했고, 안식일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어지므로 자기만 알거나 사물로 뒤바뀐 하나님만을 알거나,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분리시키는심연만 아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홀로코스트는 하나님 없는 인간의 영적인 재난으로 인해 초래된 것이었다고 믿었다. 이와 유사하게 현재의 종교들을 향하여 “우리는 거룩함을 팔아 편리함을 샀으며, 충성 대신에 성공을, 사랑 대신에 권력을, 지혜 대신에 졸업장을, 기도 대신에 설교를, 지혜 대산에 정보를, 그리고 전통 대신에 유행을 산다”고 비판 했다.
헤셀은 죽음을 맞기 직전에 행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회정의를 자신의 마음 속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보며, 또한 유대교의 영성의 핵심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는 성서에서 보이고 있는 가장 큰 관심은 동료 인간에 대한 불의, 피흘림이라고 보았다. 유일하게 예언자들만이 전쟁이 사라지고 평화가 올 것이라고 꿈을 꾸었듯이 그는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다양한 사회참여 활동에 나섰다. 비록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마틴 루터 킹과도 연대했으며,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시위에 나서며 ”하나님은 영적인 문제에만 관심하시고 사회정의나 불의에 대하여 무관심한 분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정의란 그 분의 명령일 뿐 아니라, 그 분의 방식이라는 생각, 다른 사람들이 불의를 저지를 때 그것이 단순히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적대적이 된다는 것, 인권이란 단지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이익이라는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 태생 유대인이었지만 비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는 2차 대전 직후 뉴요커(New Yorkers) 잡지사의 부탁을 받고 전범 루돌프 아이히만 재판 과정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는 데 이 보고서
결국 위젤은 아이히만과 나치가 감정적 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았고, 아렌트는 그들이 논리의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본 것이다. 아렌트의 관점에 의하면 그런 범죄는 유태인들의 협력 없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당시 유태인 평의회는 나치를 도와 유태인들을 위한 게토를 만드는 일을 담당했고, 이러한 그들의 협력은 마침내 유태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데까지 내 몰아 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아렌트의 글을 읽은 유대인 공동체는 아렌트에게 분노하며 그녀를 그들 공동체에서 추방하다시피 했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그들에게 있어서 냉철한 이해를 제시한 아렌트보다 위젤의 분노와 이스라엘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담고 있는 보고서가 마음에 들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사회철학자로서 아렌트는 오직 정치적인 것만이 인간의 권리를 보호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세속적 정치적 감수성이 인간의 자유와 생존을 확보하는 데 꼭 필요한 보호를 제공하고 공공사회와 종교에 대한 충성심을 제한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렌트는 전체성을 향한 운동은 설사 최선의 의도를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중성(multiplicity)을 잘라버리는 것이며, 최초의 발의, 경이, 그리고 재생을 막아 버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불의를 중단시키며 대안의 길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도록 공적인 말과 행동에 다중성을 꼭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체성이 다스리는 곳에서는 개인의 권리는 필연코 중단되고 만다.
엘리 위젤은 항가리 출신 유대인으로서 1944년 그의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그것에서 어머니와 누이를 잃은 후 아버지도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나보내는 고통을 겪었다. 그는 그의 수용소의 경험에 근거하여 쓴 소설 <흑야, 1956>로 일약 유명해 졌고,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워싱톤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국가 이스라엘의 재건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그는 이스라엘 유대주의에 대한 호혜적 태도가 공정성을 잃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추방하고 그곳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건설하는 사업이 지닌 불의를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위젤의 기억은 언제나 홀로코스트에 정위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홀로코스트는 그이 주제이며, 목표이고, 가장 큰 관심이다.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억이 그를 지배한다. 따라서 위젤을 따라가면 그 학살의 현장과 기억이 드러나고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상처가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위젤과는 달리 루벤슈타인은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의 고통만이 아니라, 근대성의 폭력의 산물로 이해된다. 따라서 루벤슈타인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대량학살이 근대성의 한 결과, 즉 오늘날의 관료주의, 사회적 조직과 기술문명의 발전에 힘입은 악이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진보는 결국 대량 학살을 불러오게 되는 까닭이다. 그에게는 홀로코스트란 유대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류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위젤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는 농축된 유대인들의 고난이다.
위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동행하겠다고 약속했던 하나님은 계약에서 보증되었었다. 하지만, 위젤은 “이 계약은 더 이상 인간과 하나님 사이 혹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계약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과 그 고통과 죽음의 기억들 사이, 하나님과 의미 사이의 계약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된 이들을 망각하는 것은, 혹은 다른 잔혹한 피해자와 견주는 것은, 혹은 그들에 대한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은 위젤에게 있어서 세계 안에서 유대인들의 결정적인 위치와 사명을 내버리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위젤은 유대인의 보편성보다는 특수성을 더욱 중시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바로 이 입장에서 위젤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이름하여 순교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엘리스 교수는 이런 입장을 비판하기를 홀로코스트를 넘어서지 못하는, 과거에 매인 이스라엘이 힘을 부여받게 되니까 과거의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가해하는 동력으로 홀로코스트를 낭만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부버나 아렌트와 같이 레비나스도 유럽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각자들이 세상을 떠난 자리에 우둑 서 있는 20세기 유태 사상가로서 다양한 기여를 해 왔다. 그의 타자(Others)에 대한 철학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사상구조에서 엘리스 교수는 결정적인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한다. 그의 타자의 철학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서구중심주의와, 그의 서구 중심주의안에서 볼 수 있는 유대중심주의적 관점이다. 그는 국가의 형성과 존립을 위하여 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 폭력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의 폭력성을 배제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그의 입장은 폭력의 한계를 규명하지 않을 경우 그는 이스라엘이 행하는 팔레스타인을 향한 국가폭력을 비판하기에 애매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의 1957년의 글에서 레비나스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유태인의 행동, 언어, 그리고 사상은 여러 세계들을 파괴하거나 부흥시킬 수 있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다. 그리하여 유태인의 정체성은 조용한 자기 보존의 의미를 가지기보다 책임감과 이에 따르는 인내, 혹은 그 무게로 인해 지치기도 하고 무감각해지기도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마치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굳은 의지와 같다. 이 같은 근원적인 경험은 비록 그 과정에서 정치와 국가주의로 변질되기는 하지만 시오니즘을 통하여 보다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된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보편적인 민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하며, 선택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그는 시오니즘이 팔레스타인에서 어떻게 상생의 길을 파괴하고 팔라세트안인들을 제물로 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철학 안에서 너무나 중요한 개념인 “이웃”은 자아가 의무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명령의 소리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고 있다고 엘리스 교수는 비판한다. 서구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무심코 범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사고가 레비나스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에게서 극복되지 않았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서구 문명에 세례를 받은 현대의 지식인들조차, 종족살해를 경험한 유태 지식인조차 깊이 배어있는 인종차별적 서구우월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심지어 아프리카나 아시아인들을 향한 비하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이런 입장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이스라엘을 영웅화하기에 급급해하거나, 그것의 종교 및 정치적 담론에 매료되는 경향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진보적 지식인들이 가진 한계들은 철학과 신학의 진보성이 아니라 평화와 평등의 실천을 중시하는 양심적 유대인들의 사유가 더욱 믿을 수 있고, 그들의 사유와 실천 속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찾아가는 것이 더욱 현명할 것이라고 보는 엘리스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나가는 말
기독교, 이슬람 그리고 유대교를 낳은 위대한 전통 속에서 깊은 종교적 영향을 받아 온 유대민족은 국가 없이 지낸 2000년의 역사 속에 살아남았지만, 무려 1500년간 기독교 서구인들에 의하여 미움과 추방과 베제의 역사를 겪었다. 마침내 기독교에 의한 이러한 미움의 역사는 전대미문의 고통스러운 악, 홀로코스트를 초래했다. 홀로코스트로 인해 죽어간 유대인들은 유럽 유대인들의 2/3이다. 유럽 유대인들은 셋 중에 둘이 나치의 캐스실에서 이슬로 사라져갔다. 이런 무서운 국가 폭력을 경험한 유대인들은 2차 대전 직후 자구책을 찾아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요단강까지 이르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화를 깨고 그들의 삶을 자리를 빼앗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 졌다.
그들은 그들의 거리에서 쫒겨 났고, 홀로코스트를 겪었던 유대인들에 의하여 게토화 되었으며, 다윗의 별을 달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이스라엘 헬기의 공격을 받았다. 대대로 살아오던 땅에서 그들의 집은 이스라엘 블도저에 의해 산산히 부셔지고 그 자리에는 이스라엘민들의 정착촌이 건설되어 왔다. 과거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고 있는 이 현실에 대하여 정통 유대인들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조차 침묵해 왔고, 미국과 유럽의 유대인 세력은 암암리에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평화를 거부하는 이슬람 회교도들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그리하여 오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 인들에 의한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겪고 있다. 사실상 이스라엘의 건국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있어 재난이 된 셈이다.
엘리스 교수는 구약 토라의 근본정신인 성서의 계약법 정신에 근거하여 이러한 이스라엘의 대외 정책을 종교, 사회, 정치적으로 분석하며 비판하고 있다. 유대학 교수로서, 그리고 한 양심적 지성인으로서의 유대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밝히면서 그는 유대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경험하며 이 시대에 예언자들의 정신을 지키려면 추방과 유배를 면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그 유배의 길에서 엘리스는 계약의 하나님, 예언자들의 하나님을 만나 동행하는 길이 열린다고 고백한다. 종교와 정치가 야합하여 포악을 벌리는 이 시대에 마크 엘리스 교수의 이번 강연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유대 지식인들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이 불안하고 어두운 시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인지를 밝혀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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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October 13, 2008
Lord, let me weep while I am alive...
오늘 아침 북산 최완택 목사의 설교문을 읽었습니다. 목하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는 한국 교회와 대학들의 어지러운 현실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마음이 역력했습니다. 실망에 멈추지 않고 분노를 불러올 지경이 되어 눈에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했습니다.
내 눈에도 눈물이 말랐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의 고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나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치 못하여 일어나는 분노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가난과 절망의 그늘에 서있는 생명들이 버림을 받고 있는 까닭이었습니다. 아, 가난과 억압에 눌려 사는 생명이 내는 여린 비명소리에 나는 가끔 한 밤에도 일어나 숨을 몰아쉽니다.
따스하고 진실한 사랑에 대한 목마름으로 지쳐있었던 나에게 아시아의 고난이 다가왔을 때 나는 왜 그리도 많은 이들이 버림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피안에 대한 신앙과 헌신을 왜곡된 종교의 요구라고 보았던 나도 이제는 더 깊은 그리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블로흐가 일찍이 말했던 바와 같이 죽음과 고통의 이중주는 우리 삶의 깊은 영성의 계곡에서 울려오는 소리가 되어 오직 영혼의 귀를 가진 이들에게만 들려 올 것입니다.
우리를 비인간화 시키는 이 무정함과 비정함의 세계, 눈물이 없는 삶의 자리에 서서 가슴의 눈물을 흘립니다. 새벽 여명이 밝아 오는 시간 나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던 예수를 기억하며 존재와 의식이 분리되어 있는 나의 삶을 보았습니다. 날이 어둡기 전에 나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야모도 겐지의 시를 가슴에 담고 살던 나의 젊은 시절의 순수가 그리웠습니다. 나의 삶에 파고드는 끝도 없는 욕망과 욕심의 반대편에 가난한 이웃들이 서성인다는 사실을 다시 마음에 담고 현미 세 홉이 있으면 비에도 지지 않고 길을 가겠다는 청렴한 의지를 다시 불러들입니다.
북산의 설교 마지막에서 나는 “주여 나로 하여금 평생 울며 살게 하소서 -”라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눈물이 메마른 가슴에도 사랑은 남아 있을 것이지만, 눈물이 메마른 가슴은 생명력의 부재증명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그것은 차가움이고 비정함입니다. 이런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주여 우리를 울게 하소서”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눈물은 우리의 차가움과 비정함을 녹여 내고 사랑으로 이끌어 가는 힘이 있는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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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16, 2008
I am not guilty....
촛불집회의 배후라고 구속된 한상렬 목사의 모두진술서
2008.09.10. 서울중앙지법 519호 재판장에서
지금 여기 모두진술을 허락하신 재판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법정에 시간과 정성을 다하여 함께 하시는 한 분 한 분 모든 분들과의 인연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심장으로 존경과 사랑과 평화의 인사를 올립니다.
재판장님 저는 지금 총체적으로 저의 심정과 소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재판에 있어서 그 사건의 사실여부와 함께 그 사람의 사연과 삶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싶어 다소 포괄적으로 길게 말씀드리는 점을 널리 양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님 먼저 제가 경찰과 검찰에서 진술을 거부했던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침묵하면 오히려 불리할 수 도 있으니 사실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게 좋으리라는 얘기도 있었으나 유불리를 떠나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저항의 작은 몸짓이었습니다.
먼저 체포과정입니다. 8월 14일 전격적으로 체포당하면서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8월 10일 주일예배를 전주고백교회당에서 드리고 그 다음 다음날인가 서울에 와서야 전해 들었습니다. 진보연대 사무실로 8월 9일자로 제3차 소환장이 왔는데 바로 그 다음날인 8월 10일 주일날 출두하라고 했기에 실무일꾼이 종로경찰서에 팩스를 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주에 계신 목사님과 상의하여 다시 적절한 날에 출두하면 좋겠다는 사연을 담아서 말입니다.
저는 8.15 이후로 생각했습니다. 진보연대의 상임대표 중에 통일 분야에 관련해서는 주로 제가 주관하여 왔기 때문에 8.15 광복 63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를 끝마치고 출두할까 했던 것입니다. 저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요 공인으로서 떳떳하게 도주할 염려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갑자기 강제로 체포하는 것은 공권력의 횡포로 여겨져 참으로 유감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의 아픔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진술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 나라 이 민족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민주화는 독재화로, 통일화는 분단화로, 자주화는 예속화로 치닫고 있는 이 역행 역리 역천의 행태를 어찌할 것인가? 이미 진정성을 상실한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던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무개념이고 비열하고 엉망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17년 만에 다시 돌아오는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저는 치 떨리는 아픔으로 쓰라리고 쓰라렸습니다. 17년 전 1991년 그때 당시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음을 당했는데 지금에 와서 또 다시 백골단이 등장하는 등 그 당시 때보다 더 극심한 공안탄압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막무가내로 불법으로 언론을 자획하는 경악적인 행태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어려운 말도 안 되는 독재의 망령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재판장님 저는 체포된 그 다음날인 8월 15일 하루 종일 단식기도를 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더 통한의 8.15를 맞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통일이야말로 진정한 해방과 광복일진데 길고 긴 분단의 세월 그 얼마나 우리 민족은 피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쳐 왔습니까? 그 한 많은 고난의 세월과 함께 드디어 새시대 새상황이 열렸습니다. 6.15가 그랬고 그걸 이어서 10.4선언이 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적 성과들을 이 정부는 무위로 돌리고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소위 비핵개방 3000은 대북적대정책의 일환이요 흡수통일론적 발상입니다. 남북기본합의서 제1조 제1항 ‘쌍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내용에도 정면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 정부가 그토록 말하는 경제운운, 실용논의도 전혀 믿을 수 없습니다. 이념적인 잣대보다 경제적인 잣대로 생각한다해도 통일이 실용이요 통일이 경제입니다.
그런데도 냉정체제의 잔재에 매달려 실속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미친 짓 입니다. 향후 5년간이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둘러싼 4강국, 이 가운데 신냉전체제 질서 속에서 또 새로운 비극이 재현될 수 있는 위기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위기를 막는 길은 한미일동맹 대 이북이라는 왜곡되고 거꾸로 된 역사를 청산하고남북 간에 분열, 파괴, 전쟁 지향적인 모든 정책을 폐기하고 6.15와 10.4선언을 실천해 나가는데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우리민족 대 중국, 우리민족 대 일본, 우리민족 대 미국으로 역사구조를 바꿔가는 것이 한반도 평화 뿐 아니라 동북아와 세계평화의 참된 길입니다. 한미일동맹을 넘어 통일지향적 평화체제의 기틀을 마련해야하는 이 엄중한 시기에 한국의 이 대통령이 영국의 블레어를 대신하여 미국 부시의 푸들노릇을 하고 있다는 외신보도는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지금 대한민국의 각 분야는 뿌리 채 흔들리고 있습니다. 무슨 말을 더하겠습니까? 이 고통하는 역사의 현장에 아픔을 안고 특히 60일 넘게 단식하고 있던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의미에서라도 8.15 단 하루일망정 물도 안 먹는 단식을 하면서 침묵하였던 것입니다. 주님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 빌라도 앞에서 침묵하신 그 이유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분의 심정을 이해할 듯싶었습니다.
저는 이 법정에서도 묵비할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다시 사법부의 양심에 희망을 걸며 촛불의 진실을 증언하는 뜻에서 이렇게 모두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판장님 체포 구속된 지 오늘로 27일째입니다. 그동안 저는 저의 지나온 삶의 과정과 운동의 원칙들을 다시 한 번 깊이 성찰하며 정리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역사의 눈 뜬것은 5.18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전주에 있었으나 체포당하여 보안대로 헌병대로 광주 상무대로 끌려 다니며 군사재판을 받았습니다. 치솟는 용기가 솟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를 맞고 고문당하고 특히 빨갱이로 몰릴 때는 한없이 비겁해졌습니다. 용기와 비겁의 갈등에서 죽고만 싶기도 하였습니다. 제 인격이 바스라지며 터져나온 질문은 ‘왜, 왜 이런일이 일어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결국 통일과 민주와 자주야 말로 우리민족의 시대적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5.18 항쟁을 통해 비로소 역사의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 후 지금까지 저는 분단병에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새 세상을 만나는 길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왔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여전히 역사에 빚진 죄인으로 남아있습니다. 산자는 죽은 자 앞에서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민중 앞에서 또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불타는 온몸으로 절규하신 전태일님을 비롯한 모든 열사들 앞에서 다만 부끄러울 뿐입니다.
참 역사운동에 동참하면서 저 나름대로 다섯 가지 질문을 운동의 자세로 삼아 왔습니다.
첫째 진실한가? 하나님 앞에, 역사 앞에, 열사 앞에 진실한가?
둘째 책임지는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맡겨진 역할과 임무에 정성을 다하는가?
셋째 평화기조인가? 평화야말로 운동의 처음이요, 과정이요,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대동단결인가? 마침내 하나되고자 하는가?
다섯째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 기도, 오직 기도할 뿐입니다.
재판장님 제가 이렇게 저의 살아온 삶의 일단과 운동의 태도를 이야기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촛불의 총 배후이거나 최고 지휘부가 결코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책임 있는 주체로서 책임을 전가하거나 회피할 의도가 없음을 제가 살아온 삶과 운동의 자세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지난날 두 번의 구속과정에서도 그랬습니다. 5.18때 저는 제가 한 일을 숨기지 않아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91년 때에도 전민련 공동의장으로 전국연합 소집책으로 공안탄압 분쇄와 강경대 열사 대책위 총 대표자로 책임질 일은 당당하게 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엔 아닙니다.
공안에서 저를 촛불의 총 배후로 추대해주시니 영광으로 알고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진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촛불에 동참하는 모든 분들을 모독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촛불의 총 배후 이야기가 6월 초부터 나왔습니다. 몇몇의 수구언론이 사설을 동원하면서까지 구체적으로 배후로 제 이름을 찍어 떠들어댔습니다. 뒤를 이어서 한나라당 원내대표라는 자가 공식석상에서 또 제 이름을 찍어 지목했습니다. 드디어 6월 30일 진보연대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는 분명 수구언론, 한나라당, 공안이 총 동원된 기획· 조작· 표적 수사인 것입니다.
수구공안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렇게 흉악한 촛불의 최고 지휘부라면서 배후 말이 나온 지 한참이나 지난 이제서야 왜 체포하는 것입니까? 그림이 잘 안 그려져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잠깐 직무유기를 했던 것입니까?
재판장님 이제 촛불에 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촛불운동이 시작되기 직전의 저의 상황과 심정의 흐름을 밝히고 싶습니다. 대선 직후 저는 너무 마음이 아파 삼 일간 꼬박 교회당 십자가 앞에서 철야기도를 한 바 있습니다. 장차 이 나라와 이 민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라와 민족을 보기 전에, 우리 운동의 대오각성을 말하기 전에 ‘너 한상열이는 과연 어떤가’가 문제였습니다. 저 자신이야 말로 관성주의, 패배주의, 물질주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뿌리 깊은 분열주의에 물들어 있지 않았는가?
민중의 삶과는 너무나 유리된 생활을 해왔지 않았는가? 고통과 통곡가운데 회개하는 심정으로 40일 기도를 작정하게 되었습니다. 자기변혁이 없이 역사변혁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올 봄에 저는 주로 전주에 있는 고백교회당에서 40일 기도를 하며 역사와 자기 신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 5월초부터 위대한 촛불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촛불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간에 운동방식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운동의 주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 알다시피 특히 촛불소녀, 소년들이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광우병 소고기 먹기 싫다. 건강주권 찾고 싶다’는 그 청소년들의 순수와 단순성이 감동감화로 역사를 움직이며 촛불운동을 일으키는 불씨가 된 것입니다. 또한 그동안에는 살림을 도맡아 왔던 생활주부 여성들이 대거 촛불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소위 비 운동권 학생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광장은 역사의 현장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의 장이면서도 즐겁게 나들이하는 가족들과 연인들의 만남의 장이었습니다. 각계각층,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촛불주체가 되어 나섰던 것입니다. 87년 6월 항쟁의 주체는 재야, 단체, 학생, 직장인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 주권의식을 가진 자발적인 참여대중입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노래처럼 모든 촛불은 국민의 힘으로부터 직접 나왔습니다. 그야말로 지휘부와 배후가 없는 촛불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공안당국이 촛불의 배후를 찾고 싶다면 제가 한 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바로 일산에 사는 박모씨입니다. 중국 출장 중인 그는 인터넷을 통해 소고기 문제를 알았다고 합니다. 국민의 주권을 찾고자 밝힌 촛불이 그 숫자를 더해 갈 때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더 없이 자랑스럽고 고마웠던 그분은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에게 6월 10일 시청 앞 촛불집회에 가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 가족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자면서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설명했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약속이 되어 버렸습니다. 13살배기 초등학교 6학년인 딸 주미가 물놀이 사고로 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옳고 그름을 잘 가려 행동하는 믿음스런 딸인 이 주미의 장례식을 6월 10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대신에 치러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떠나보내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딸이 오랫동안 모아온 저금통장을 발견했습니다. 아빠는 중요한 마지막 약속 그 촛불집회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아이가 모아온 소중한 이 돈으로 함께 촛불을 만들고 싶다며 딸이 생전에 저축한 629,000원을 국민대책위 후원계좌에 입금하였습니다. 주미 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보람될 것 같다며 남편의 뜻에 동의했던 것입니다. 아이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아이가 모아온 소중한 정성을 보내니 부디 희망을 만드는데 사용해 주시길 바란다고 편지를 보내왔다는 신문기사를 보며 저는 가슴이............
재판장님 바로 이런 분들이 촛불의 희망이 아니겠습니까? 가슴을 움직이는 엄마와 아빠들이 배후라면 참 배후요 주체가 아니겠습니까? 주체가 그러하니 집회방식도 엄청나게 달라져 버렸습니다. 과거처럼 엄숙한 시위, 누군가가 앞장서 주도하는 시위가 아니요 진정한 문화축제가 되었습니다. 연대, 지혜, 토론, 소통의 방식으로 확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자유발언대 등 그저 각자 생각하는 대로 하면 되는 식의 축제한마당이었습니다. 국민 다수와 함께 한다는 자신감 때문에 여유와 유머, 낙천성과 자발성과 생명력이 넘쳐났습니다. 차가운 물대포를 맞으면서도 ‘온수, 세탁비’ 라고 웃으며 외쳤다지요. 대치와 긴장을 평화와 웃음으로 바꿔 경찰의 능력을 무력화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축제와 평화는 한몸입니다. 촛불을 불법폭력으로 매도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6.10일 밤 명박산성 앞에서 일어난 일이 촛불의 정통이요 진수라고 생각합니다. 10일 밤 10시부터 11시 11일 새벽 5시까지 7여 시간 명박산성이라 불리는 광화문 사거리에 설치된 컨테이너 장벽 앞에서는 그야말로 대단한 토론이 열렸다고 합니다.
해 뜰 무렵에야 겨우 끝났다고 합니다. 토론 참석자 규모는 연인원 일만에서 최저 삼천여명, 주제는 저 눈 앞에 보이는 컨데이너를 넘을 것인가 넘지 않고 광화문 사거리에 남을 것인가, 즉 투쟁의 수위를 높히자는 쪽과 계속 평화시위를 하자는 쪽의 대결이었습니다.
결론은, 깃발만 컨테이너 위로 올리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와 ‘애국가’가 울려 퍼졌습니다. 저 자신은 직접 현장에 없었으나 보도를 접하면서 그 현장의 감동이 전달되어 왔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수개월간 세계 운동사상 유례가 없는 연속촛불을 밝히면서도 끝내 평화축제를 유지하고자 촛불대중은 노력했습니다.
촛불자체가 평화의 상징이요 비폭력의 꽃입니다. 그동안 일어난 불상사도 따지고 보면 공권력의 횡포로 야기된 측면이 많습니다. ‘비폭력, 비폭력! 삼보후퇴!’를 외치는 평화애호시민들을 때리고 잡아갔습니다. 폭력시위감시단을 짓밟았습니다. 인권침해 감시단의 변호사마저 폭행을 당했습니다.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하기는 커녕 아예 무시하고 변명과 핑계와 임시방편의 속임수를 일삼으며 구조적인 폭력과 무자비한 진압폭력으로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이 정권이야말로 불법폭력정권입니다. 촛불의 본질은 비단 광우병쇠고기문제만이 아니라 무한경쟁교육, 의료·수도·물 민영화, 한반도대운하, 방송장악 등 국민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려는 이 정부의 성장지상주의,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저항입니다. 이러한 막가파정책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현정부로 인해 삶의 근간이 뿌리채 흔들리게 될 국민들의 불안과 저항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느 스님의 말씀대로 촛불은 과연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라 한없이 초라해지는 개인의 실존적 피해를 위로하는 인간존엄의 멧세지였습니다. 소통의 단절, 신뢰의 결핍이라는 불안한 정치토대가 키운 시대의 어둠을 촛불이 밝혔던 것입니다. 촛불의 광장은 오만과 독선과 무능력한 대의적 민주주의, 제도적 민주주의, 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직접참여민주주의 사이버전자민주주실현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생활주권수호항쟁을 통해 운동이 삶과 분리가 되지 않는 생활정치의 도래와 탈중심적, 탈위계적 성격의 신변혁공동체의 맹아를 보았습니다. 엄청난 국민대중이 촛불을 들었으나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촛불의 숫자에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시민이 개인으로 고립되지 않고 진정으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의견공동체를 구축하며 진실에 접근해가고 있는 것,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야말로 시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진정한 대표자들이요 진정한 주동자들입니다.
기존의 운동은 대오각성해야 한다고 하면서 새로운 운동이 출현하기를 대망하고 있었던 저는 경이로운 촛불을 바라보며 저로서는 한없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진행과정에서 저 자신 별로 할 일이 없어서 솔직히 허망한 심정이 잠깐 스치기도 했습니다. 못된 생각이지요.
저는 주객관적인 상황을 성찰하면서 일찌감치 세 가지 정도로 제 입장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일체 촛불의 진행과 운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둘째, 기자회견 등 참여기회가 있더라도 이를 최소화한다.
셋째, 문화제에 참여하는 경우라도 행진이나 시위는 하지 않는다.
8월 15일로 100차 촛불문화제라고 하는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참여했는지 돌이켜보면 참으로 대중 앞에 죄송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물론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횟수가 손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때로는 이런 저런 일들을 보며 분노가 치솟아 전면에 나서서 주동하고 싶었으나 많이 참았습니다. 딱 한번 자유발언대에 서 본 적이 있습니다.
이병렬열사의 장례식이 있었던 6월14일입니다. 5월 25일 전주에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일을 보고 있는데 백화점 앞에서 어떤 분이 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는 예수병원 응급실에서 신음하고 있는 그에게 ‘한목사 왔다고 내 소리 들리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습니다. ‘제발 살아야 한다고, 이제부터는 살려고 작정하라’고 절규하니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죽어야겠다는 뜻 같았습니다.
그의 유서를 보니 이미 5.18광주망월동묘역에 다녀오면서 분신을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5.18정신과 모든 열사들의 뜻을 이어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했기에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던졌습니다. 그 분의 아픔을 안고 발언대에 나선 것입니다. 아마 공안당국에서 녹취해놓은 모양입니다.
재판장님께서 수고스럽지만 그 발언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잘 들어보시면 촛불에 대한 저의 견해를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판관님 이제 공소장에 관한 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촛불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몇 가지를 덧붙여서 기소했더군요.
첫째, 2007년 8.15민족통일대회는 저의 주관아래 이루어진 것이 확실합니다.
둘째, 민주노총이 2007년 8월 17일 이랜드 비정규직해결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청와대에 전달하고자 하면서 격려발언을 요청하기에 ‘누가 이 거룩한 길을 막고 있는가, 경찰은 즉시 이 길을 터라, 우리 모두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대우받는 그 날이 올 때까지 투쟁하자‘고 연설한 것도 사실입니다.
셋째, 2007년 11월11일 범국민행동의 날 집회에 잠깐 참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인정하되 교통방해 부분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넷째, 기자회견에 관련해서도 집시법 위반죄를 적용하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제 촛불에 관해서 말씀드립니다. 공소장 내용 그 자체가 제가 배후가 아님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재판과정에서 밝혀지리라고 봅니다. 단 몇 가지 우선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공소장을 보면 제가 광우병위험 미쇠고기 투쟁과 관련한 주요사업계획을 승인하고 지시하는 역할을 했다고 했습니다. 사실상 총지도부인양 기소했는데 그 객관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5월9일부터 7월5일까지 촛불문화제를 거의 날마다 하루 한건씩 공모주최했다고 하는데 전혀 관여한 바가 없고 참석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제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특히 5월 25일, 6월 22일, 6월29일은 주일이었습니다. 전주에서 예배드린 그 날에도 그렇습니까?
특히 6월15일-16일에는 금강산에서 열린 6.15공동선언 8주년기념 민족통일대축전에 참여했습니다. 그런데도 서울에서 일어난 촛불문화제를 제가 공모주체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대책회의 이름으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일이 있다면 옥중에 있는 제가 총 배후, 조종자입니까? 공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대책회의에서 아무 직책도 없었고 역할도 없었습니다. 진정 위대한 촛불의 총지도부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청하거나 자임해서 될 일이 아니요,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신성하고 거룩한 촛불대중을 더 이상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 9월 4일자 신문을 보니 촛불관계로 32명 구속, 1336명 불구속, 56명 즉심 총 1534명이 사후처리되었다고 하더군요. 그 것의 대부분이 너무 부당한 일이요, 일부 소수마저도 정상참작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촛불은 죄가 없습니다. 한 번이라도 촛불을 든 국민과 또한 마음속에라도 지지했던 모든 분은 다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촛불이 누운 풀처럼 잦아드는 것처럼 보이나 국민의 가슴마다 횃불이 되어 타고 있고 결국 활화산이 되어 이 어둔 역사를 심판할 것입니다.
촛불혁명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갑오농민혁명 3·1만세운동, 4.19, 5.18, 6월항쟁의 맥을 따라 촛불은 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물은 연대성, 유연성, 지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누가 그 무엇으로 이 촛불의 대역사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재판장님
저는 무죄입니다.
제가 이 법정에 설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사법부의 심판을 받을 자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진짜 촛불의 배후인 행정부의 이명박대통령입니다. 이미 그의 죄가 과중합니다. 민주적 선거가 민주정부의 구성에 필요조건이긴 하나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그에 합당한 정치적 행위를 해야 하는데 법치주의 운운하면서 불법, 무법 해당위적인 발상으로 폭력에 의존하면서 독재와 예속과 분단고착을 심화시키며 수구부유층 기생세력을 대변하며 양극화로 몰아가는 반민중, 반역사의 죄가 있습니다. 자칭 대한민국 주식회사 사장이라면서 도시검역주권, 국민건강권을 미국에게 조공을 바쳐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도 ‘도시 근로자들이 질 좋은 쇠고기를 싸게 사먹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을 믿어야지 안 사먹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말하면서 미국산쇠고기 판매과장인양 처신한, 대통령직무위기와 매국의 죄가 있습니다. 7·4·7 운운하며 거짓말로 거품을 일으키더니 한국경제를 망쳐가고 있는 경제쪽박의 죄가 있습니다. ‘그 많은 촛불은 누가 샀어, 조사하라’ 등 그는 배후괴담색깔론을 늘어놓다가 촛불의 힘에 놀라서 5월22일 ‘정부가 충분한 이해를 구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노력이 부족했고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데 소홀했다는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국민여러분에게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 정부는 더 낮은 자세로 더 가까이 국민에게 다가가겠다. 지금까지 부국정초기의 부족한 점은 모두 제 탓으로, 이번 일을 계기로 심기일전하여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드는데 더욱 매진하겠다‘고 해놓고 국민다수의 뜻인 전면재협상을 끝까지 거부한 국민기만죄가 있습니다.
6월19일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끝없이 이어지는 촛불을 바라보면서 뼈저린 반성을 했다며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겠다고 다시 사죄를 해놓고는 -전면 재협상이 아니라 별 의미가 없기도 하지만- 정부의 추가협상에 힘을 실어 미국의 양보를 조금이나마 얻어내는 데 공로가 있는 촛불입니다. 한국국민을 쉽게 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경각심을 심어주어 민족의 자존과 대의를 세운 촛불을 불법시위로 몰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있는 배은망덕한 죄가 있습니다.
국민신뢰가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설 수 없습니다. 서울 사대문 인의예지 문 가운데 보신각, 무엇보다도 믿음, 신의 가 중심인데 상습적으로 거짓말하며 삼진치로 가득한 저 심보 때문에-이로 인해 자기도 명박, 대통령의 명이 박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이 나라 이 민족을 불치의 병, 죽음의 낭떠러지로 몰아가는 미친운전의 죄가 있습니다.
불법언론장악죄 등 죄가 많은 이 사람을 긴급체포하여 법정에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판장님
저는 무죄입니다. 이미 역사가 저를 무죄로 한 경험이 있습니다. 5.18로 구속되어 폭도라고 칭해졌던 저는 지금 국가유공자입니다. 91년 민자당과 공안탄압분쇄로 구속되었던 저는 지금 공식적으로 인정된 민주화유공자입니다.
세 번째에 구속된 저는 재판부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저를 무죄라고 선언해주십시오. 촛불의 진실과 참역사를 위해서 촛불의 진실과 신성하고 정의로운 법정을 위해서라도 제가 무죄임을 확인해주십시오. 과연 일체유심조입니다.
일체은혜자족감사입니다. 저는 구치소를 국립기도원으로 삼고 깊이깊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변혁을 위한, 이명박대통령의 진정한 회개를 위한. 이 나라 이 민중 민족과 세계 인류의 참역사, 사랑·자유·정의·평화와, 통일 자주 민주 세상을 위하여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삽니다. 사람, 사랑, 삶이 하나일진대 진실로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 한몸 평화 한몸이니 한몸으로 한몸되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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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13, 2008
The Personhood in One's Moral Judgment
판단과 사람됨.
삶은 참으로 복잡다단하므로 너무나 다양한 이해와 판단을 요구한다. 사람의 판단능력을 평가하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범주가 있다. 그 첫째는 사람됨이다. 그의 판단이 사람다운 따듯한 판단인지 아닌지를 느끼게 해 주는 요소다. 판단에는 그의 인품과 성품이 배어 있어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판단 형식을 통하여 자기를 밖으로 보여주게 된다. 아무리 그 판단이 정확하고 진실하다 할지라도 그 판단의 동기가 자신의 성품을 통하여 걸러지지 않았을 경우 간혹 우리의 판단은 시기와 질투, 증오와 원망, 고의적인 악감정이나 특정한 목적에 의하여 동기화되기 쉽다. 정의를 주장하면서도 그 정의가 맹목적으로 적용될 경우 우리는 그 판단이 정직하고 진실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데 그 까닭은 그의 주장이 이미 악의나 고의성을 가진 공격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 사람의 성품이나 인격이 왜곡되었을 경우, 그는 끊임없이 유사한 사건을 늘 벌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성품을 통하여 여과되지 못한 의도들이 공론과 정의를 주장하는 과정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의 판단형식을 볼 때마다 감동한다. 예수의 행위는 결코 악의에 의하여 동기화되지 않는다. 악마에 이끌려 시험을 받을 때 그는 자신의 판단을 유도하는 악마의 숨은 동기에 쉽게 유혹받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판단형식에 배어있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그것은 사실을 진실하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의도가 앞선 판단은 특정한 사실에 대하여 판단을 내림에 있어서 그 행위의 오류를 과도하게 정죄하거나, 외삽법적으로 뜬금없이 천상의 가치를 대입하는 경우를 본다. 타인의 오류를 지적함에 있어서 의도가 앞설 경우 자신도 모르게 객관적 판단기준이 흔들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공정하지 못한 도덕주의적인 판단을 생산한다. 이 문제는 현대 윤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분석 대상이 되고 있다. 도덕적 판단이란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인식론적 능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은 자연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 중에는 옳고 그름에 대한 본능적 판단기준을 믿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판단형식은 우리의 지난 경험에서 산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판단은 그 사람이 사실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질, 혹은 능력을 함축하게 된다. 판단자의 인식능력이 협소할 때 우리는 그의 판단에 동의를 보내기 어렵고, 판단자의 판단이 지극히 한 부분만을 확대할 경우 역시 동의를 보내기 어렵다. 진실한 판단은 사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된 판단이어야 한다. 간음한 여인을 앞세운 무리들이 다가 왔을 때 예수는, 그 상황 전반, 그 여인을 정죄하여 손에 돌을 든 자의 가슴 속까지 헤아린다. 그리함으로 그는 한 두 가지 사실만을 미루어 한 가련한 여인의 전존재를 싸잡아 부정하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의 또 다른 성격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판단할 경우 그것에 대하여 신중하며 책임적이어야 한다. 사람의 판단이 공공의 세계에 밝혀질 때 거기에는 매우 선명하게 “판단하는 자”와 “판단 받는 자”가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판단이 어떤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게 된다. 공공의 세계에 드러난 판단은 자칫 잘못하면 부차적인 명분싸움으로 전락하기 쉽다. 상대를 그릇되었다고 공공의 세계에 고발한 이는 “상대의 그릇됨”을 필연화하지 않으면 자신의 판단이 오류라고 증명되기 때문에 자신의 명분을 위하여 상대의 오류를 더욱 집요하게 들추어내려 든다. 또한 공적인 세계에서 비난을 받은 이는 그 비난을 통하여 자기 전존재가 너무나 단순하게 요약된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벌리는 공적인 다툼들이 간혹 본의보다 더 커다란 사건으로 비약되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악의에 의하여 동기화된 공격자들은 언제나 문제를 확대하고, 과장하며, 상대의 인격과 존재를 부정한다. 예수의 투명하고 맑은 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의 죄와 허물이 보였을 것인가? 나는 이런 모습을 예수에게서 찾지 못한다. 예수는 진리의 이름으로 자유를 주려하는 분이었지, 진리의 이름으로 진리에서 벗어난 이들을 정죄하려 드는 심판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교회의 역사는 그를 최후의 심판자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판단이 결과하는 세 가지 현상이 있다. 정의논쟁, 지위논쟁, 자격논쟁, 그리고 권력투쟁이 한창인 요즈음 많은 이들이 침묵하고 있다. 침묵은 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마틴 루터 킹은 “적들의 침묵”보다 “벗들의 침묵”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에 대하여 글을 쓴 적도 있다. 우리는 말해야 할 때도 분명 있다. 그러나 만일 침묵을 깨려면 우리는 우리의 성품을 다하여, 우리의 인식능력을 동원하여 신중하게, 그리고 공공의 세계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진실한 예측을 가늠하는 판단을 해야 한다. 우리가 민주사회의 구성원이라면 우리는 민주적 절차와 원칙을 지켜야 한다. 비록 우리 논쟁의 적대자라 할지라도 그의 전존재를 부정하는 행위나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토론 과정에서 가해지는 도덕적 판단은 제아무리 사실적 판단에 근거한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 성격은 아직 추정적 판단일 수밖에 없다. 객관성이 결여된 까닭이다. 교회와 교단, 혹은 대학사회에서 공공의 유익을 위한 민주적 토론과 비판 원칙을 지키려면 우리는 불평과 비난과 비판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불평이란 부당한 사실에 대한 무책임한 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인가 옳지 못한 것에 대하여 불평하는 이들은 그 그릇됨을 시정하려는 노력에는 가담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우리 주변에서 불평을 토로하여 다른 이들을 움직이게 해놓고서, 자신은 전면에서 슬그머니 숨어버리는 이들도 있다. 비난은 옳음을 선택하기 위하여 상대를 비하하거나 그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비난을 할 경우 우리는 상대의 인격과 삶의 귀중함을 송두리째 몰수하기 쉽다. 이 경우는 공공의 이익보다, 그리고 지금 논쟁하고 있는 근본 원인, 즉 그릇됨을 시정하려는 공동의 책임의 자세가 아니라 상대를 몰락시키려는 악의에 더욱 크게 지배를 받는 경우다.
우리는 합리적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보다 나은 삶을 구성하기 위한 우리의 논쟁이 불평이나 비난이 아닌 비판적 견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민주시민이라면 대부분 합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가 보장하는 양심과 표현의 자유, 혹은 결사의 자유는 이렇듯 민주적 합리성과 인격성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매도와 악의에 찬 비난, 그리고 지나치게 무례한 공격적인 언사는 상대의 인격과 명예를 극단적으로 훼손하는 악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사실이 아닌 주장을 유포하는 경우, 매우 악의적인 거짓이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허위진술을 담을 경우 그 책임의 정도는 더욱 커진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판단을 넘어서서 자의적 가치판단을 섞는 행위는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상대에게 굴욕을 안겨주고,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민주사회는 무한정의 자유를 누리는 세계가 아니라 합리성에 근거한 비판이성에 의하여 통제를 받아야 한다. 만일 일방적인 해석과 공격적인 행위들이 빈번할 경우 그 집단은 도덕적으로 저급한 집단이 되기를 자초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민주적 질서와 합리성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세계에서는 합리성을 가장한 공격적 행위의 폭력성이 지나칠 경우도 많고, 그 반대로 권위를 가진 이들이 그 권위를 오용하거나 남용하여 폭력화되는 경우도 많다. 이럴 경우 우리는 합리성을 상실한 집단이 되어 좌충우돌 비약과 무책임 사이를 오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 공동체를 전제하고 있는 우리들의 삶은 성서적 규범과 민주사회의 최소규범을 지켜야 한다. 성서적 규범은 우리가 복음의 의하여 자유를 얻었으므로, 그 자유를 가지고 이웃 사랑의 길에 나서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민주사회의 최소규범은 법정적 판단이 내리기 전에 아무리 미워도 상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권리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복음에 의하여 모든 죄에서 자유함을 받은 이들이라면, 그것이 진실한 우리의 고백이라면 우리의 최대 관심은 “나”나 “우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 신앙 공동체에 있어야 하며, 조금 더 확장한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공동적 삶의 자리” 즉 우리 한국 사회를 섬기는 데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죄로부터 자유한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이다. 사리사욕이나 개인적 감정, 혹은 집단이나 파벌의 이익에 사로잡히거나 그것들에 의하여 동기화되는 행위는 제아무리 기독교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기독교적 행위를 유발할 수는 없다. 나는 이런 행위를 기독교적인 행위라고 조장하는 예수를 상상할 수조차 없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생명과도 같이 여기는 그들의 선민의식과 혈연관계를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라는 삶의 공동성을 확장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협소한 민족주의나 국가안보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반민주적 악법 철폐를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사소한 이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걸고 이전 투구하는 것이 예수 앞에서 어찌 옳겠는가? 정의를 주장하고, 정직함을 주장하기 위하여 폭력을 동원하는 일도 옳지 않다. 간음한 여인을 앞에 두고 보여주신 예수의 모습에서 나는 선명한 메시지, 즉 인간이 먼저이지 정의가 먼저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큰 정의이고, 무엇을 위하여 우리가 싸워야 하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되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앙과 민주사회의 이념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 침해받을 때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과 권리가 무시되거나 침해를 받는 현장에 우리가 서 있을 경우, 우리가 복음을 증언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인간 생명의 존귀함과 그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의 존엄함이 그 어떤 이유에서든지 부정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인간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하여 민주세계가 합의한 인간의 권리들이 누군가에 의하여, 혹은 어떤 이기적인 집단에 의하여, 혹은 정치권력에 의하여 침해되는 현장이라면 양심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침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영성과 명상적 삶을 살아가면서 침묵을 깨뜨려야 할 경우가 있다면 나는 이런 원칙에서 시작된 사랑과 자유의 해방운동의 지평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적은 자를 돌보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우리가 성서에서 지워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강자보다, 약자를 돌보며 살라는 구약성서의 계약법전의 정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오래 동안 정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전쟁조차 벌릴 수 있다고 가르쳐 왔지만, 나는 그런 윤리는 예수의 사상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주구가 되어 온 사상의 전형이다. 그러므로 집단의 존속과 유지를 위하여 한 인간의 생명의 존엄함을 외면하면서 희생 제물로 바치는 입다의 제의는 불의한 것이다. 이런 기독교의 전력을 새삼 들추지 않더라도, 역사 속에서 상대적인 정의가 이기는 순간, 그간 불의한 행위에 가담한 이들이 약자로 전락할 때라도, 그들조차 기독교적인 이웃사랑의 대상에서 제외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신앙인으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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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September 10, 2008
문규현 신부님의 오체투지
-오체투지, 순례 길을 떠나며
다시 순례길을 떠납니다. 다리 불편한 스님과 늙은 사제입니다. 이 둘이 오체투지, 온 몸을 땅에 내리고 보듬으며 갑니다. 가늠도 안되게 고되고 하염없이 느린 길을 기꺼이 갑니다. 허나 우리의 고행이 도리어 생명의 길, 희망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이 순례가위로의 길, 용기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이 여정이 민족의 길, 화해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각자의 마음과 삶, 공동체와 사회에 존엄과 존중심이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사랑과 자비, 공존과 평화, 정의를 행하고 이루려는선한 마음들이 더욱 힘내길 기도합니다. 낙심과 냉소, 쉽게 얻고 누리려는 마음은 내려놓고, 애쓰고 헌신하며 서로 돌보고 격려하는가운데 기쁨과 충만함을 누리길 기도합니다. 양심과 인간애, 진실과 진리에 목말라하는 자세를 굳건히 지켜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체투지, 이 여정은 특히 손에 가슴에 생활 속에 촛불을 피어올린 청소년들과 수많은 국민들에게 드리는 사랑과 존경의 표현입니다.수난과 상처, 모욕과 폭력, 수배와 구속에도 굴하지 않고 이 순간에도 묵묵히 진리의 길을 가는 그 모든 고결한 정신에 드리는감사의 표현입니다. 촛불이 밝히는 것은 생명의 귀함과 꿈이 있는 미래입니다. 자존과 품위이고, 신뢰와 진정성입니다. 주권과민주주의입니다.
그 아름다운 불빛들에게 무엇으로 응답해야 할지, 더불어 무엇을 해야 할지 수없이고뇌하고 기도했습니다. 하여 이제 아주 단순하고 응집된 표현으로 이 길을 갑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을 향해절합니다. 여러분의 따뜻하고 진정한 마음들, 그 착하고 여린 마음들을 품고 기억하며 이 길을 갑니다. 여러분과 더불어 민주주의를지키고 생명력 있고 희망이 있는 사회를 위해 끝까지 가겠노라고 맹세의 길을 갑니다. '생즉사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이라했습니다. 여러분은 제 용기의 원천입니다.
저는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이념과 정치행태에 오체투지로 항의하고 저항합니다. 저들이 숭배하는 경쟁과 실용으로 보자면 극단적으로 바보스럽고 누추합니다. 그러나 오로지 돈과 일등놀이에 몰두하는 사회에는 결코 희망이 없음을, 성공지상주의와 이기심이 뒤덮은 사회는 죽은 공동체임을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몸짓으로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천지간에 불통이고 사방이 '명박산성'입니다. 정권 스스로 무법탈법이요 공권력을앞세우지 않고선 그 무슨 일도 행하질 못하는 지경입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20년 전 30년 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이 더 추해지고 초라해질 자멸의 길을 그만가길 기도합니다. 정녕 종교인이라면 전정한 참회와 속죄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소수 기득권층만을 위한 정치, 신독재와 신공안정국, 신냉전주의, 신종교전쟁으로 이룰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기부양을 앞세워대운하를 재론하고 부동산투기판을 재연합니다. 핵발전소 증설을 '저탄소 녹색성장'이라 위장합니다. 21세기를 살며 22세기를준비하는 국민을 우습게 여기며, 고작 20세기에 잡아두려는 천박한 발상입니다. 나라의 조화와 균형, 지속가능한 발전을 파괴하는행태에 반드시 냉정한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민심은 천심입니다. 촛불은 조용히 불씨요 홀씨가 되어 번지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들불이 되고 횃불이 될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지만 바람 속에서도 풀은 다시 일어섭니다.
남과 북 사이조차 단절과 분단심리가 견고해지는 오늘의 현실이 가슴 아프고 우려스럽습니다. 현 정권은 아예 민족통일이나 평화 문제엔관심 없는 듯합니다. '국지전 가능성' 같은 용어조차 쉽게 올리며 적대감과 긴장을 격화시킬 뿐입니다. 애절한 아우성은 남에도있고 북에도 있습니다. 남과 북은 공존과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서로 협력하고 함께 살길을 찾아야 합니다. 산맥과 강길에는 단절이 없고 벽이 없습니다. 시간과 역사를 초월하여 온 민족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온 산하를 따라가며 남북 사이에 소통과화해의 길이 열리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참된 변화와 희망의 바람은 우리 자신에게서 불어옵니다. 우리현실을 짓누르고 힘들게 하는 것들은 우리 자신의 태만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왜곡된 형상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내면과 생활을 바꿔갈때만이 건강하고 행복한 세상을 맛볼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 감사와 돌봄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서로에게 빛이 되고 거친 바람 막는 병품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수행입니다. 믿음과 희망을 절대 놓지 마십시오. 인내와 끈기로영혼을 단련시키십시오. 각자의 자리와 모양새는 다르나 영혼을 나누고 마음으로 연대하며, 더불어 즐겁게 진리를 구하는 순례의 길을함께 갑시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제 몸과 마음은 1976년 사제서품을 받던 그 순간으로 돌아갑니다. 바닥에온몸을 엎드리곤 가장 겸손한 태도로, 모든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처럼 이웃과 세상을 섬기겠노라 다짐하던 그 때입니다.이제 사제수품 33년을 훌쩍 넘어 황혼 길에 든 이 시간, 다시금 더 비우고 더 버리고 더 낮춥니다. 첫 마음에 저를 세웁니다.
2008년 9월 2일 천주교 전주교구 평화동 성당 문규현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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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September 8, 2008
두 가지 슬픈 소식
두 달 전 나는 문규현 신부를 만나 함께 망월동 묘역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이틀을 함께 지내면서 나는 그 분이 얼마나 어린아기 같은 마음으로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마음 깊이 느꼈다. 그런데 오늘 그가 지리산 노고산 언덕에서 한반도의 생명과 평화와 민주주의를 기원하는 험한 고행의 길을 시작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신대 강의 시간에 한번 오시기를 청하며 다시 한번 만나뵙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의 반생명, 반민주, 반평화적인 행태에 저항하는 길을 수경스님과 더불어 가기 시작하셨구나! 오체투지, 자갈밭에 온 몸을 부딪히며 민족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메이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과 존경과 사랑의 감정에 내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솟는다. 노고산 언덕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 분의 기도문이 담긴 인터넷 주소를 여기 적는다. http://www.mncast.com/player/index.asp?mnum=5648424&prevmnum=5648288
오늘 나는 우리 감신대의 누군가가 신임총장을 공개비난하기 위하여 그동안 학내에서 일었던 표절시비를 연장하여 모든 신문사에 제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 또한 가슴이 아프고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을 불러온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내몰아야 되는 것인가? 어느 분들은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며 생명, 평화, 그리고 민주의 길을 열어가는 데, 감신대의 사람들은 교회와 제자들 앞에서 염치도 없이 권력싸움에 날새는 줄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그들과 동시대의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들과 다름없이 죄인이 된 심정이다. 오래전 카나다에서 만난 장성환 목사님이 자신의 목회 40년을 돌아보며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내가 보낸 목회의 여정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명제를 경험으로 이해하는 기간이었다." 생명과 평화와 민주를 위하여 사는 길에 죄인이 되는 이와 권력다툼에 날을 새는 죄인을 생각해 본다. 한 편은 맑고 희망적인 슬픔을 가져오지만 다른 한 편은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는 수치스러운 슬픔을 가져온다. 감신인 모두의 수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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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27, 2008
Who is Jesus?
한 십년 전 나는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에 출강을 했던 적이 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한신대 교정에 들어 섰을 때 내 눈에 띠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예수는 누구인가?" // 아마도 진지하고 양심적인 신학자나 신앙인들은 우리의 예수인식에는 늘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와 동일한 물음을 가슴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 한 잘나가는 부흥사가 뉴욕 순복음 교회에서 부처는 불교를 만들면 안되는 일이었다고 설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분이 어떤 분이기에 불교, 기독교, 예수에 대하여 다 파악한 하나님처럼 말하는 것일까. 부흥회 다니느라고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텐데 어느 틈에 그 모든 것을 다 헤아려 보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소리는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여기 저기서 많이 듣던 소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평생 해 온 학문, 신분, 자랑거리를 예수를 만난 이후 값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고백을 좋아한다. 자신의 자랑스러웠던 것들을 그리스도 앞에서 배설물로 여겼다는 바울의 고백은 결국 그가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들이 진짜 배설물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담긴 고백이리라. 만일 황금을 돌처럼 여겼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황금이 돌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말귀를 잘 못알아 듣는 사람이거나 조금 바보일 것이다. 사람의 주장에는 그의 자전적 고백이 담겨있다. 주관적 생각은 그의 사람됨을 나타낼 뿐 객관적인 사실을 바꾸어 놓는 마술이 아니다.
나의 주일학교 시절에는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예배실은 마룻 바닥이었다. 당시 나는 회기동 근처에 있었던 동안교회에 다니고 있었는 데 교회에 가서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의무인줄 알았다. 그 시절 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라고 일러준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천금같이 믿고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지낸 적이 있다.
그 선생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분의 말씀은 아직도 나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주고 있다. 이 가르침은 나로하여금 무엇인가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삶의 태도를 주기도 했지만, 인간다움의 욕구라든지 타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도 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지기도 했고, 가족에 대한 호혜적 사랑도 하나님 앞에서 죄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더구나 이런 시각은 나로 하여금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종교나 신을 믿는 것을 우상숭배하는 것이라 판단하게 만들었다. 해서 나는 소시적에 사찰 경내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화계사로 소풍을 갔을때 부처상을 목격하고 고개를 돌린적도 있었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하면서 몇 안 되는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영웅적 신앙의 표상으로 인식하게 만든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목숨을 걸고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행위가 정말 기독교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예수외에는 구원을 얻을 이름이 없다"는 성서적 주장과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가톨릭 교회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다른 종교가 동등하게 혹은 평등하게 공존할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믿음이 좋은 목사들은 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이의 인권과 생존권을 박탈하는 죄도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이런 목사 밑에서 신앙을 교도받은 이들, 특히 모태신앙이나 혹은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은 타종교인은 받지 못할 구원을 받은 특별히 선택된 자들로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주문에 걸려있는 셈이다. 죄로 인하여 저주와 심판을 면치 못할 죄인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심판의 대상에서 왕중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으니 그야말로 영적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더구나 현세에도 축복을 받고 내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독교의 교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원칙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자기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기독교인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최상의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 장경동 목사의 발언이 오히려 속시원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교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종교를 비하하고, 따져보지도 않고서 다른 종교를 무가치한 것으로 매도하며, 누군가로부터 전수받고 배운 대로 다른 종교를 거짓 종교라고 을러대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한 종교재판관들은 신앙의 이름으로는 오만도, 살인도, 전쟁도, 심지어는 저주를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기독교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것처럼, 장경동 목사처럼,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가지고 그리했다. 그들만의 종교가 아닌 종교는 모두 헛된 것이라고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기 사람들이 어찌 불교를 알고,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알았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라는 헛된 교만과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타방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최근 물의를 빗고 있는 장경동 목사의 발언은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습성처럼 가지고 있는 천박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영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불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저 성직자들이 가르쳐 준 대로 믿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는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하고, 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될 계시의 총체라고 생각한다. 오직 기독교내에 계시로 인정하는 것 외의 다른 모든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부정한다. 이런 까닭에 예수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던 유대인들은 성서시대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기독교는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그들을 향한 증오와 저주의 문화를 유발시켰다. 이런 역사는 유럽 기독교안에 깊이 내재되어 세계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에 기독교가 가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중세기를 지나면서 예수가 아닌 마호멧을 믿는 이슬람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증오는 결국 십자군 전쟁을 유발시겼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논리에서 장경동 목사의 불교폄하 발언이 나온 것이다.
기독교는 사실 그 초기에 모진 박해를 받기도 했던 종교다. 예수조차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으니 기독교는 따지고 보면 승리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의 종교다. 그 당시에는 최고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난을 수납하면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이들의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로마 제국주의와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세력을 향유하기 시작한 기독교는 거대한 제국의 영적 옹호자가 되고 만다. 제국주의와 교잡하여 제국의 종교로 변신한 콘스탄틴 기독교는 십자가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는 거대한 힘을 과시함으로서 공간, 시장, 정치, 종교속에 동일한 지배 논리를 심어 놓았다. 제국주의자들은 지배와 종속, 점령과 확장, 탐욕과 착취의 주체가 되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러므로 승리주의자들이다. 다른 이들은 지배와 점령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신학이 아퀴나스-> 루터 -> 칼빈 -> 웨슬리 전통이다. 이들 속에 점증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 오고 있었지만 이들의 권력에 대한 이해는 철저하게 종교 제국주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15세기 중엽 거대 로마의 지배가 종식되고 로마 제국주의에 의하여 해방된 유럽 각 나라의 정치 세력들은 제국주의적인 침략 전쟁을 반복해 왔을 뿐 아니라, 광활한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식민지화하려 했다. 아니러니하게도 이들은 한결같이 가톨릭 혹은 개신교 신앙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국가들이었다. 공교육이 오늘날처럼 확산되지 않은 시대에 이들을 교도한 이들은 당연히 기독교 성직자들이었다. 이렇듯 전쟁과 지배문화를 조장해 온 기독교의 역사는 깊은 악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점이 요도가 시종일관 번번히 지적해 온 문제다.
지배논리는 평등보다는 차별을, 포용보다는 배타를 조장함으로써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상대에게는 피지배 상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주체성의 혼란을 불러오게함으로써 지배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다. 힘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이들을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접착된 교리적 예수는 이렇게 이용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문명은 우월하고, 비기독교 문명은 야만적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건전한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당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병든 정서다.
백인은 유색인들을 지배해야 하고, 백인은 유색인보다 우월함으로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주장에서 나온 것이 노예제도였고, 백인들의 세계에서도 정치 경제적 힘을 가진 남성들이 남성우월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한 전통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가 없는 사실로 남아있다. 기독교인들인데도 그리했다. 이런 논리는 오늘의 모든 사회 제도 이면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심리적 바탕에서 작용하고 있다. "내가 (장)경동교를 만들지 않은 것 처럼 부처도 불교를 만들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말은 불교는 붙다의 실수요, 탄생해서는 안될 종교였다는 뜻이다. 장목사의 예수는 장목사를 오만하게 만들고, 그에게 시대착오적 인식이 작동하게 만드는 예수인 것이 틀림없다. 중세기에 모든 이들의 사상의 자유를 박탈하고 오직 기독교 신앙만 강요하면서 그들의 교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면 종교재판을 걸어 화형에 처하던 시대와 방불한 전근대적 역사인식이 엿보이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평신도였던 칼빈조차 당대에 존경받던 인문학자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아시아 36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니다. 아시아 전역에서 천주교 기독교인들을 모두 모아도 3%에 지나지 않는다. 97%는 비기독교인들이다. 나는 장목사의 주장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근거없는 "오만과 자기 의"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가 주장하는 예수가 팔레스타인 어느 우물가에서 삶에 지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에게 구원을 약속했던 예수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십가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한 강도의 고백을 받아들여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그의 영혼을 보살펴 준 대자대비한 예수의 모습을 그가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에게서는 다른 종교를 향한 배타와 저주와 심판은 없다. 오히려 거짓과 탐욕에 물든, 배타와 자기의에 가득한 거짓 선지자들과 오만한 성직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 돈계산하는 이들을 향하여 채찍을 들고, 일곱번 저주를 선언하였을 뿐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를 방문한다면 5월이 가장 제일 좋은 계절이다. 영국식 대학의 교정에는 어디나 정원이 있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드러낸다. 5월에 케임브리지에 간다면 분명 푸르른 조그만 들꽃과 여기 저기 수선화들이 무리지어 피어있고, 이름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온 도시 어느 곳에 가나 피어있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이렇게 다양성과 다수성을 가진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을 향한 영성의 샘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기독교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나 모든 꽃들을 꽃들이 아니라고 선언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부정하는 배은망덕한 오만한 행위로서 그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는가?
팔레스타인에서 참새 한마리도, 머리터럭 한 올이라도 다 헤아리시는 그 하나님께서 아시아에서 피어난 무수한 종교들도 꽃피우게 하신 것은 아닐까?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는 아시아 대륙의 36억의 가난한 이들 곁을 지키고 계시는 그리스도, 그 가난한 이들의 고통앞에서 아파하는 하나님의 고통도 헤아리지도 못하는 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와 승리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반공주의와 교잡된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닐것이다. 아시아인의 영성의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 그들의 삶속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예수의 눈이 아니라 교리가 만든 인공의 각질이 우리 눈을 어둡게 한 까닭이리다. 장경동 목사의 호언장담속에 갇힌 예수를 넘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예수 과연 그 분은 누구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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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ugust 26, 2008
Speech by Richard von Weizsacker, the former president of Germany
<종전 40주년 기념일 연설>
Speech by Richard von Weizsacker, President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in the Bundestag during the Ceremony Commemorating the 4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the War in Europe and of National Socialist Tyranny,
May 8, 1985
I
Many nations are today commemorating the date on which World War II ended in Europe. Every nation is doing so with different feelings, depending on its fate. Be it victory or defeat, liberation from injustice and alien rule or transition to new dependence, division, new alliances, vast shifts of power–May 8, 1945, is a date of decisive historical importance for Europe.
We Germans are commemorating that date amongst ourselves, as is indeed necessary. We must find our own standards. We are not assisted in this task if we or others spare our feelings. We need and we have the strength to look truth straight in the eye–without embellishment and without distortion.
For us, the 8th of May is above all a date to remember what people had to suffer. It is also a date to reflect on the course taken by our history. The greater honesty we show in commemorating this day, the freer we are to face the consequences with due responsibility. For us Germans, May 8 is not a day of celebration. Those who actually witnessed that day in 1945 think back on highly personal and hence highly different experiences. Some returned home, others lost their homes. Some were liberated, while for others it was the start of captivity. Many were simply grateful that the bombing at night and fear had passed and that they had survived. Others felt first and foremost grief at the complete defeat suffered by their country. Some Germans felt bitterness about their shattered illusions, while others were grateful for the gift of a new start.
It was difficult to find one's bearings straightaway. Uncertainty prevailed throughout the country. The military capitulation was unconditional, placing our destiny in the hands of our enemies. The past had been terrible, especially for many of those enemies, too. Would they not make us pay many times over for what we had done to them? Most Germans had believed that they were fighting and suffering for the good of their country. And now it turned out that their efforts were not only in vain and futile, but had served the inhuman goals of a criminal regime. The feelings of most people were those of exhaustion, despair and new anxiety. Had one's next of kin survived? Did a new start from those ruins make sense at all? Looking back, they saw the dark abyss of the past and, looking forward, they saw an uncertain, dark future.
Yet with every day something became clearer, and this must be stated on behalf of all of us today: The 8th of May was a day of liberation. It liberated all of us from the inhumanity and tyranny of the National Socialist regime.
Nobody will, because of that liberation, forget the grave suffering that only started for many people on May 8. But we must not regard the end of the war as the cause of flight, expulsion and deprivation of freedom. The cause goes back to the start of the tyranny that brought about war. We must not separate May 8, 1945, from January 30, 1933.
There is truly no reason for us today to participate in victory celebrations. But there is every reason for us to perceive May 8, 1945, as the end of an aberration in German history, an end bearing seeds of hope for a better future.
II
May 8 is a day of remembrance. Remembering means recalling an occurrence honestly and undistortedly so that it becomes a part of our very beings. This places high demands on our truthfulness.
Today we mourn all the dead of the war and the tyranny. In particular we commemorate the six million Jews who were murdered in German concentration camps. We commemorate all nations who suffered in the war, especially the countless citizens of the Soviet Union and Poland who lost their lives. As Germans, we mourn our own compatriots who perished as soldiers, during air raids at home, in captivity or during expulsion. We commemorate the Sinti and Romany Gypsies, the homosexuals and the mentally ill who were killed, as well as the people who had to die for their religious or political beliefs. We commemorate the hostages who were executed. We recall the victims of the resistance movements in all the countries occupied by us. As Germans, we pay homage to the victims of the German resistance–among the public, the military, the churches, the workers and trade unions, and the Communists. We commemorate those who did not actively resist, but preferred to die instead of violating their consciences.
Alongside the endless army of the dead, mountains of human suffering arise–grief over the dead, suffering from injury or crippling or barbarous compulsory sterilization, suffering during the air raids, during flight and expulsion, suffering because of rape and pillage, forced labor, injustice and torture, hunger and hardship, suffering because of fear of arrest and death, grief at the loss of everything which one had wrongly believed in and worked for. Today we sorrowfully recall all this human suffering.
Perhaps the greatest burden was borne by the women of all nations. Their suffering, renunciation and silent strength are all too easily forgotten by history. Filled with fear, they worked, bore human life and protected it. They mourned their fallen fathers and sons, husbands, brothers and friends. In the years of darkness, they ensured that the light of humanity was not extinguished. After the war, with no prospect of a secure future, women everywhere were the first to set about building homes again, the "rubble women" in Berlin and elsewhere. When the men who had survived returned, women had to take a back seat again. Because of the war, many women were left alone and spent their lives in solitude. Yet it is first and foremost thanks to the women that nations did not disintegrate spiritually on account of the destruction, devastation, atrocities and inhumanity and that they gradually regained their foothold after the war.
III
At the root of the tyranny was Hitler's immeasurable hatred against our Jewish compatriots. Hitler had never concealed this hatred from the public, but made the entire nation a tool of it. Only a day before his death, on April 30, 1945, he concluded his so-called will with the words: "Above all, I call upon the leaders of the nation and their followers to observe painstakingly the race laws and to oppose ruthlessly the poisoners of all nations: international Jewry." Hardly any country has in its history always remained free from blame for war or violence. The genocide of the Jews is, however, unparalleled in history.
The perpetration of this crime was in the hands of a few people. It was concealed from the eyes of the public, but every German was able to experience what his Jewish compatriots had to suffer, ranging from plain apathy and hidden intolerance to outright hatred. Who could remain unsuspecting after the burning of the synagogues, the plundering, the stigmatization with the Star of David, the deprivation of rights, the ceaseless violation of human dignity? Whoever opened his eyes and ears and sought information could not fail to notice that Jews were being deported. The nature and scope of the destruction may have exceeded human imagination, but in reality there was, apart from the crime itself, the attempt by too many people, including those of my generation, who were young and were not involved in planning the events and carrying them out, not to take note of what was happening. There were many ways of not burdening one's conscience, of shunning responsibility, looking away, keeping mum. When the unspeakable truth of the holocaust then became known at the end of the war, all too many of us claimed that they had not known anything about it or even suspected anything.
There is no such thing as the guilt or innocence of an entire nation. Guilt is, like innocence, not collective, but personal. There is discovered or concealed individual guilt. There is guilt which people acknowledge or deny. Everyone who directly experienced that era should today quietly ask himself about his involvement then.
The vast majority of today's population were either children then or had not been born. They cannot profess a guilt of their own for crimes that they did not commit. No discerning person can expect them to wear a penitential robe simply because they are Germans. But their forefathers have left them a grave legacy. All of us, whether guilty or not, whether old or young, must accept the past. We are all affected by its consequences and liable for it. The young and old generations must and can help each other to understand why it is vital to keep alive the memories. It is not a case of coming to terms with the past. That is not possible. It cannot be subsequently modified or made not to have happened. However, anyone who closes his eyes to the past is blind to the present. Whoever refuses to remember the inhumanity is prone to new risks of infection.
The Jewish nation remembers and will always remember. We seek reconciliation. Precisely for this reason we must understand that there can be no reconciliation without remembrance. The experience of millionfold death is part of the very being of every Jew in the world, not only because people cannot forget such atrocities, but also because remembrance is part of the Jewish faith.
"Seeking to forget makes exile all the longer. The secret of redemption lies in remembrance." This oft-quoted Jewish adage surely expresses the idea that faith in God is faith in the work of God in history. Remembrance is experience of the work of God in history. It is the source of faith in redemption. This experience creates hope, creates faith in redemption, in reunification of the divided, in reconciliation. Whoever forgets this experience loses his faith.
If we for our part sought to forget what has occurred, instead of remembering it, this would not only he inhuman. We would also impinge upon the faith of the Jews who survived and destroy the basis of reconciliation. We must erect a memorial to thoughts and feelings in our own hearts.
IV
The 8th of May marks a deep cut not only in German history but in the history of Europe as a whole. The European civil war had come to an end, the old world of Europe lay in ruins. "Europe had fought itself to a standstill" (M. Sturmer). The meeting of American and Soviet Russian soldiers on the Elbe became a symbol for the temporary end of a European era.
True, all this was deeply rooted in history. For a century Europe had suffered under the clash of extreme nationalistic aspirations. At the end of the First World War peace treaties were signed but they lacked the power to foster peace. Once more nationalistic passions flared up and were fanned by the distress of the people at that time.
Along the road to disaster Hitler became the driving force. He whipped up and exploited mass hysteria. A weak democracy was incapable of stopping him. And even the powers of Western Europe–in Churchill's judgment unsuspecting but not without guilt–contributed through their weakness to this fateful trend. After the First World War America had withdrawn and in the thirties had no influence on Europe.
Hitler wanted to dominate Europe and to do so through war. Re looked for and found an excuse in Poland. On May 23, 1939, he told the German generals: "No further successes can be gained without bloodshed.... Danzig is not the objective. Our aim is to extend our Lebensraum in the East and safeguard food supplies... so there is no question of sparing Poland. And there remains the decision to attack Poland at the first suitable opportunity... the object is to deliver the enemy a blow, or the annihilating blow, at the start. In this, law, injustice or treaties do not matter."
On August 23, 1939,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signed a non-aggression pact. The secret supplementary protocol made provision for the impending partition of Poland. That pact was made to give Hitler an opportunity to invade Poland. The Soviet leaders at the time were fully aware of this. And all who saw realized that the implications of the German-Soviet pact were invasion of Poland and hence the Second World War.
That does not mitigate Germany's responsibility for the start of the Second World War. The Soviet Union was prepared for other nations to fight one another so that it could have a share of the spoils. The initiative for the war, however, came from Germany, not from the Soviet Union. It was Hitler who resorted to the use of force.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rld War remains linked with the name of Germany.
In the course of that war the Nazi regime tormented and defiled many nations. At the end of it all only one nation remained to be tormented, enslaved and defiled: the German nation. Time and again Hitler had declared that if the German nation was not capable of winning the war it should be left to perish. The other nations first became victims of a war started by Germany before we became the victims of our own war.
The division of Germany into zones began on May 8. In the meantime the Soviet Union had taken control in all countries of Eastern and South Eastern Europe that had been occupied by Germany during the war. All of them, with the exception of Greece, became socialist states. The division of Europe into two different political systems took its course. True, it was the postwar developments which cemented that division, but without the war started by Hitler it would not have happened at all. That is what first comes to the minds of the nations concerned when they recall the war unleashed by the German leaders. And we think of that too when we ponder the division of our own country and the loss of huge sections of German territory. In a sermon in East Berlin commemorating the 8th of May, Cardinal Meissner said: "the pathetic result of sin is always division."
V
The arbitrariness of destruction continued to be felt in the arbitrary distribution of burdens. There were innocent people who were persecuted and guilty ones who got away. Some were lucky to be able to begin life all over again at home in familiar surroundings. Others were expelled from the lands of their fathers. We in what was to become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were given the priceless opportunity to live in freedom. Many millions of our countrymen have been denied that opportunity to this day.
Learning to accept mentally this arbitrary allocation of fate was the first task, alongside the material task of rebuilding the country. That had to be the test of the human strength to recognize the burdens of others, to help bear them over time, not to forget them. It had to be the test of our ability to work for peace, of our willingness to foster the spirit of reconciliation both at home and in our external relations, an ability and a readiness which not only others expected of us but which we most of all demanded of ourselves.
We cannot commemorate the 8th of May without being conscious of the great effort required on the part of our former enemies to set out on the road of reconciliation with us. Can we really place ourselves in the position of relatives of the victims of the Warsaw Ghetto or of the Lidice massacre? And how hard must it have been for the citizens of Rotterdam or London to support the rebuilding of our country from where the bombs came which not long before had been dropped on their cities? To be able to do so they had gradually to gain the assurance that the Germans would not again try to make good their defeat by use of force.
In our country the biggest sacrifice was demanded of those who had been driven out of their homeland. They were to experience suffering and injustice long after the 8th of May. Those of us who were born here often do not have the imagination or the open heart with which to grasp the real meaning of their harsh fate.
But soon there were great signs of readiness to help. Many millions of refugees and expellees were taken in who over the years were able to strike new roots. Their children and grandchildren have in many different ways formed a loving attachment to the culture and the homeland of their ancestors. That is a great treasure in their lives. But they themselves have found a new home where they are growing up and integrating with the local people of the same age, sharing their dialect and their customs. Their young life is proof of their ability to be at peace with themselves. Their grandparents or parents were once driven out. They themselves, however, are now at home.
Very soon and in exemplary fashion the expellees identified themselves with the renunciation of force. That was no passing declaration in the early stages of helplessness but a commitment which has retained its validity. Renouncing the use of force means allowing trust to grow on all sides. It means that a Germany that has regained its strength remains bound by it. The expellees' own homeland has meanwhile become a homeland for others. In many of the old cemeteries in Eastern Europe you will today find more Polish than German graves. The compulsory migration of millions of Germans to the West was followed by the migration of millions of Poles and, in their wake, millions of Russians. These are all people who were not asked, people who suffered injustice, people who became defenseless objects of political events and to whom no compensation for those injustices and no offsetting of claims can make up for what has been done to them.
Renouncing force today means giving them lasting security, unchallenged on political grounds, for their future in the place where fate drove them after the 8th of May and where they have been living in the decades since. It means placing the dictate of understanding above conflicting legal claims. That is the true, the human contribution to a peaceful order in Europe which we can provide.
The new beginning in Europe after 1945 has brought both victory and defeat for the notion of freedom and self-determination. Our aim is to seize the opportunity to draw a line under a long period of European history in which to every country peace seemed conceivable and safe only as a result of its own supremacy, and in which peace meant a period of preparation for the next war.
The peoples of Europe love their homelands. The Germans are no different. Who could trust in a people's love of peace if it were capable of forgetting its homeland? No, love of peace manifests itself precisely in the fact that one does not forget one's homeland and is for that very reason resolved to do everything in one's power to live together with others in lasting peace. An expellee's love for his homeland is in no way revanchism.
VI
The last war has aroused a stronger desire for peace in the hearts of men than in times past. The work of the churches in promoting reconciliation met with a tremendous response. The "Aktion Sühnezeichen," a campaign in which young people carry out atonement activity in Poland and Israel, is one example of such practical efforts to promote understanding. Recently, the town of Kleve on the Lower Rhine received loaves of bread from Polish towns as a token of reconciliation and fellowship. The town council sent one of those loaves to a teacher in England because he had discarded his anonymity and written to say that as a member of a bomber crew during the war he had destroyed the church and houses in Kleve and wanted to take part in some gesture of reconciliation. In seeking peace it is a tremendous help if, instead of waiting for the other to come to us, we go towards him, as this man did.
In the wake of the war, old enemies were brought closer together. As early as 1946, the American Secretary of State, James F. Byrnes, called in his memorable Stuttgart address for understanding in Europe and for assistance to the German nation on its way to a free and peaceable future. Innumerable Americans assisted us Germans, who had lost the war, with their own private means so as to heal the wounds of war. Thanks to the vision of the Frenchmen Jean Monnet and Robert Schuman and their cooperation with Konrad Adenauer, the traditional enmity between the French and Germans was buried forever.
A new will and energy to reconstruct Germany surged through the country. Many an old trench was filled in, religious differences and social strains were defused. People set to work in a spirit of partnership.
There was no "zero hour," but we had the opportunity to make a fresh start. We have used this opportunity as well as we could.
We have put democratic freedom in the place of oppression. Four years after the end of the war, on this May 8, in 1949, the Parliamentary Council adopted our Basic Law. Transcending party differences, the democrats on the council gave their answer to war and tyranny in Article 1 of our constitution: "The German people acknowledge inviolable and inalienable human rights as the basis of any community, of peace and of justice in the world." This further significance of May 8 should also be remembered today.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has become an internationally respected state. It is one of the most highly developed industrial countries in the world. It knows that its economic strength commits it to share responsibility for the struggle against hunger and need in the world and for social adjustment between nations. For 40 years we have been living in peace and freedom, to which we, through our policy in union with the free nations of the Atlantic alliance and the European Community, have ourselves rendered a major contribution. The freedom of the individual has never received better protection in Germany than it does today. A comprehensive system of social welfare that can stand comparison with any other ensures the subsistence of the population. Whereas at the end of the war many Germans tried to hide their passports or to exchange them for another one, German nationality today is highly valued.
We certainly have no reason to be arrogant and self-righteous. But we may look back with gratitude on our development over these 40 years, if we use the memory of our own history as a guideline for our future behavior.
* If we remember that mentally disturbed persons were put to death in the Third Reich, we will see care of people with psychiatric disorders as our own responsibility.
* If we remember how people persecuted on grounds of race, religion and politics and threatened with certain death often stood before the closed borders with other countries, we shall not close the door today on those who are genuinely persecuted and seek protection with us.
* If we reflect on the penalties for free thinking under the dictatorship, we will protect the freedom of every idea and every criticism, however much it may be directed against ourselves.
* Whoever criticizes the situation in the Middle East should think of the fate to which Germans condemned their Jewish fellow human beings, a fate that l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state of Israel under conditions which continue to burden people in that region even today.
* If we think of what our Eastern neighbors had to suffer during the war, we will find it easier to understand that accommodation and peaceful neighborly relations with these countries remain central tasks of German foreign policy. It is important that both sides remember and that both sides respect each other.
Mikhail Gorbachev, General Secretary of the Soviet Communist Party, declared that it was not the intention of the Soviet leaders at the 4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the war to stir up anti-German feelings. The Soviet Union, he said, was committed to friendship between nations. Particularly if we have doubts about Soviet contributions to understanding between East and West and about respect for human rights in all parts of Europe, we must not ignore this signal from Moscow. We seek friendship with the peoples of the Soviet Union.
VIII
Forty years after the end of the war, the German nation remains divided.
At a commemorative service in the Church of the Holy Cross in Dresden held in February of this year, Bishop Hempel said: "It is a burden and a scourge that two German states have emerged with their harsh border. The very multitude of borders is a burden and a scourge. Weapons are a burden."
Recently in Baltimore in the United States, an exhibition on "Jews in Germany" was opened. The ambassadors of both German states accepted the invitation to attend. The host, the President of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welcomed them together. He stated that all Germans share the same historical development. Their joint past is a bond that links them. Such a bond, he said, could be a blessing or a problem, but was always a source of hope.
We Germans are one people and one nation. We feel that we belong together because have lived through the same past. We also experienced the 8th of May 1945 as part of the common fate of our nation, which unites us. We feel bound together in our desire for peace. Peace and good neighborly relations with all countries should radiate from the German soil in both states. And no other states should let that soil become a source of danger to peace, either. The people of Germany are united in desiring a peace that encompasses justice and human rights for all peoples, including our own. Reconciliation that transcends boundaries cannot be provided by a walled Europe but only by a continent that removes the divisive elements from its borders. That is the exhortation given us by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We are confident that the 8th of May is not the last date in the common history of all Germans.
IX
Many young people have in recent months asked themselves and us why such animated discussions about the past have arisen 40 years after the end of the war. Why are they more animated than after 25 or 30 years? What is the inherent necessity of this development?
It is not easy to answer such questions. But we should not seek the reasons primarily in external influences. In the life span of men and in the destiny of nations, 40 years play a great role. Permit me at this point to return again to the Old Testament, which contains deep insights for every person, irrespective of his own faith. There, 40 years frequently play a vital part. The Israelites were to remain in the desert for 40 years before a new stage in their history began with their arrival in the Promised Land. 40 years were required for a complete transfer of responsibility from the generation of the fathers.
Elsewhere, too (in the Book of Judges), it is described how often the memory of experienced assistance and rescue lasted only for 40 years. When their memory faded, tranquillity was at an end. Forty years invariably constitute a significant time span. Man perceives them as the end of a dark age bringing hope for a new and prosperous future, or as the onset of danger that the past might be forgotten and a warning of the consequences. It is worth reflecting on both of these perceptions.
In our country, a new generation has grown up to assume political responsibility. Our young people are not responsible for what happened over 40 years ago. But they are responsible for the historical consequences.
We in the older generation owe to young people not the fulfillment of dreams but honesty. We must help younger people to understand why it is vital to keep memories alive. We want to help them to accept historical truth soberly, not one-sidedly, without taking refuge in utopian doctrines, but also without moral arrogance. From our own history we learn what man is capable of. For that reason we must not imagine that we are quite different and have become better. There is no ultimately achievable moral perfection. We have learned as human beings, and as human beings we remain in danger. But we have the strength to overcome such danger again and again.
Hitler's constant approach was to stir up prejudices, enmity and hatred. What is asked of young people today is this: do not let yourselves be forced into enmity and hatred of other people, of Russians or Americans, Jews or Turks, of alternatives or conservatives, blacks or whites.
Let us honor freedom.
Let us work for peace.
Let us respect the rule of law.
Let us be true to our own conception of justice.
On this 8th of May, let us face up as well as we can to the truth.
from Geoffrey Hartman, ed., Bitburg in Moral and Political Perspectiv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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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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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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