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26, 2021

죽음 준비

 죽음준비


인간의 마지막 권리: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하기 위한 13가지 질문>, 이 책을 쓴 후 간간이 이곳 저곳에서 강연이나 죽음의 윤리에 대한 글을 요청받고 있다. 내일 오후엔 ‘높은 뜻 정의 교회’에서 ‘소중한 생명, 존엄한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할 예정이다.

사실, 개신교 목사이자 신학자인 나는 기독교적 죽음 이해를 가지고는 있지만, 기독교의 죽음 이해가 사람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죽음이라는 사건을 정직하게 직면하기보다 일종의 영지적 도세티즘(假現說)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와 유사하게 죽음에 대한 논의를 남긴 실존주의 철학자들, 하이덱거, 사르트르, 키에르케고어 등, 역시 몸의 사건인 죽음의 문제, 죽어감의 문제를 정신승리로 해결하려 함으로 미진함을 남겼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의 죽음 이해가 내겐 더 깊이 와 닿는다.

인간의 죽음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라든지, 추한 것이라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런 시각에는 건강한 산자의 욕망이 담겨 있고, 그 욕망은 죽어가는 이에게 잔인한 폭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죽음은 자동사로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타동사로 설명되어야 한다. 레비나스의 주장대로 우리는 그저 죽는 것이 아니라 노화와 질병으로 죽임을 겪기 때문이다. 심지어 레비나스는 “모든 죽음은 몸이 살해당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인간의 죽어감은 슬픔, 고통과 고난의 과정이다. 큐블러 로스의 다섯 단계 ‘죽음 수용론’ 역시 이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수명이 길어진 현대세계에서 우리는 죽어감의 과정을 소홀히 취급한다. 일상에서 추방하여 죽음을 외주주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가족이라는 관계의 그물망이 죽어가는 이의 고통과 외로움을 지켜주며,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동행했었다.

그러나 수명이 더 길어져 오래 살고 이전의 사람보다 더 노화되어 죽게 될 운명을 가진 우리는, 죽어감의 시간을 서로 지켜주지 못하고, 제도적으로 전문화된 시스템으로 넘긴다. 거기서 죽어감의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을 우리는 ‘쿠메의 무녀’처럼 근심하게 된 것이다.

평균수명 83세를 견주어 셈해보니 앞으로 12년, 평균 잡아 내가 살 날은 4,380일, 5,000일도 채 남지 않은 셈이다. 더 슬픈 이른 죽음과 늦은 죽음은 셈하지 않은 것이다. 이 남은 시간을 사소하게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랑하며 정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사랑을 자기중심의 애욕이라 믿는 이기적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사랑하는 이의 자유와 정의를 지켜주는 사랑이 제일 멋진 것이다. 불의와 거짓 자유는 사랑의 반대다. 그것들은 탐욕의 불손한 자식으로 자신과 타인의 소중한 삶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한 2018년 이후 100만 명 이상이 사전 의료지시서를 작성했다고 한다. 자기 죽음을 타인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겠다는 주체적 생명 이해를 담은 서약이다.

나는 이것과 더불어 하나 더 서약서를 작성하자고 권하고 싶다. 남은 삶을 최선을 다해 품위 있고, 정의롭게, 그리고 자유롭게 살기를 자신에게 하는 약속을 담은 서약서다.

(Docetism은 초기 기독교를 영육 이원론에 빠져 신앙생활의 본질에 대해 헷갈리게 만들었던 사조다. 영성만을 강조하며 육체성을 소홀하게 여겨 인간의 배고픔, 육체적 고통, 욕망을 왜곡 소외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어서 신학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나는 오늘날 신학과 종교사를 깊이 배우지 못한 사이비 종교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사설이라고 본다.)

Monday, November 22, 2021

 https://singingtotheplants.com/2012/06/thinking-about-death-ii-levinas/


Sunday, October 31, 2021

독일교회의 현실

 독일교회

한국교회의 현실이 하도 답답하여 종교개혁의 본산 독일 교회를 살펴보았다. 우리와 한 번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우리는 성서에도 없는 법과 의무를 만들어 신도들에게 부과시키고, 여전히 성직자 중심의 중세 교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평생 하나님의 교회를 섬긴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보다는 인위적 구조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2016년 통계를 통해 살펴 본 독일교회
1. 독일은 공히 기독교 국가라고 부를 만하다.
독일 인구 8,076만 명 중 개신교는 2,304만 명 (전 인구의 28.5%), 가톨릭은 2,417만 명 (전 인구의 30%), 여기에다 기타 기독교 교파를 합하면 4,974만 명, 전 인구의 61.6%가 구교 및 신교도를 포함한 기독교인이다
2. 독일교회, 지도부는 평신도 중심, 남녀 평등한 기회 균등을 이룬 교회다.
독일 교회의 최고 의회(EKD Council)는 독일 개신교의 최고 의사 결정기관인데 위원회 15명으로 구성된다. 현재 여성 7명 남성 8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평등의 원칙을 준용하여 의장을 제외하고 남성 7명 여성 7명으로 구성된다.
독일교회 총회 대표는 성직자 735명, 그 중에서 여성은 190명이다. 그리고 안수 받지 않은 평신도 1,362명, 그 중에서 여성이 537명으로 구성되어 평신도 대표가 65%이며 성직자 대표는 35%로 구성된다.
총회에서 구성한 의회는 성직자 45명, 평신도 81명으로 구성되고 이 중에서 여성이 57명으로 45%를 차지하고 있다.
3. 독일교회의 성장과 몰락의 징후는 어떤가?
- 독일교회는 2016년 현재 15,007개의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 안수받은 목사는 풀타임 파트타임 포함하여 총 18,576명이 일하고 있고, 그 중 여성은 32.1%인 5,970명이다.
독일교회가 2016년 한 해 유아세례를 주고 성인 세례를 주어 입교한 수는 183,159명, 성인 세례는 그 중 18,101명이었고, 장례는 287,667명을 치렀다. 한 해 동안 176,551명이 교회를 떠났다.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는 떠난 이의 약 10%가 조금 넘는 19,768 명, 다른 종파에서 이적해 온 사람들은 12,247명이었다.
총, 464,218명이 죽거나 교회를 떠났다. 반면, 교회로 새로 들어온 이들은 유아세례까지 합하여 215,194명이다. 한 해 249,024명의 교인이 줄었다. 이 속도라면 100년 후 독일교회는 사라진다. 하여 독일교회는 미래를 많이 염려한다. 이 속도를 줄이려고 독일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 중심으로 그 구조를 바꾸었다.
4. 독일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나?
주일 정규 예배 참석 인원은 약 80만 명이다. 이 수는 총 교인의 4%에 지나지 않는다. 교인 100명 중 4명만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것이다. 예배 절벽이다. 신도들이 가장 많이 예배에 참석하는 때는 성탄 절기다. 크리스마스 예배에는 총 교인의 약 36%인 약 850만명이 참석했다.
총 교인의 4%만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결국 독일 기독교인은 더 이상 교회의 예배 기능에서 신앙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가장 빈번한 활동은 기독교 전통을 미학화한 종교음악 활동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한 해 동안 65,789회가 열렸고 거기에 가장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그 다음이 신학 관련 강연 프로그램이다. 총 32, 093회가 열렸다. 이런 사실은 두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주고 있다. 독일 크리스쳔들은 종교음악의 전통에서 경건의 영성을 느끼고, 신학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성서연구보다 더 강해 문자주의적인 근본주의 성향에서 벗어나 보다 지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는 EKD가 2015년 한 해 가진 특별한 프로그램 통계다.
첫째, 음악관련 프로그램 – 65,789회
둘째, 신학 강연 프로그램 – 32,093회
셋째, 에큐메니칼 프로그램 – 18,458회
넷째, 사회적 이슈 프로그램 – 18,385회
5. 독일 기독교인은 헌금생활을 어떻게 하나?
독일 기독교인들은 교회 출석과 상관없이 종교세를 내고 있다. 가톨릭교도이든 개신교도이든 막론하고 소득세의 8%(바바리아와 바덴 뷰템부르크 주),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9%의 종교세를 내고 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환산하면 5000만원 연봉자일 경우 독일에서는 소득세가 약 20% 부과된다. 소득세가 약 1000만원이 되는 셈이다. 종교세는 이 소득세의 8-9%이므로 1년에 약 80만원 내지 90만원을 종교세로 내는 것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교인 1명이 내는 헌금이 1년 평균 266만 4,000원이다.)
이 종교세를 내는 것 외에 다른 헌금은 없다. 다만 개체 교회가 결정하여 내는 선교 헌금, 어려운 지역이나 특별한 프로젝트를 돕기 위한 특별 헌금 등이 있는 데, 이런 경우 보통 2유로에서 매우 드믈게 20유로 이내의 헌금을 한다. 결론적으로 자기 수입의 약 2%를 종교세로 내고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십일조 등 수십 가지에 이르는 각종 감사 헌금은 없다.
6. 독일 교회 1년 예산은 얼마나 될까?
2016년 독일 개신교회의 주 수입원인 종교세는 약 47억 7000만 유로다. 총 예산의 48% 정도를 종교세로 충당했다. 그 외 기타 수입이 51억 6,000만 유로다. 교회가 운영하는 모든 교육기관의 수입이 총 예산에 포함된다. 2016년 총 예산은 약 13조 1,321억원이었다.
(독일 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이나 학교, 양로원 등은 적당히 개인이 운영하다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7. 독일 교회 목사의 연봉은 얼마나 될까?
독일교회에서는 목사를 신학자와 분리시키지 않는다. 독일 교회의 목사가 되려면 신학 교육과정을 마치고, 국가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아무데에서나 안수를 주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되려면 교인 중에서 18세에서 25세의 나이에 도달한 건강한 사람이 그 뜻을 교회에 밝히고, 신학 교육을 받기 이전에 담임 목사, 부모 그리고 제 3자의 성품 평가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런 서류를 제출한 후 1년 동안 교회 생활에서 다섯 가지 성품을 평가 받게 된다. 자기부인, 성실성, 겸손함, 교육의 재능, 그리고 경건성이다. 이런 성품이 결여되어 있다고 평가가 날 경우 성직자가 되지 말기를 권고 받게 된다.<참조, The German Pastor>
목사들은 2017년 기준, 지역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약 35,000유로에서 37.000유로를 받는 지역과 62,000유로에서 68,000유로를 받는 지역이 있다. 단, 같은 지역의 목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연봉 격차는 연 몇천 유로 차이 정도이며 극심하지 않다. 전체 평균으로 약 43,000유로(한화 약 6,270만원)를 받고 있다.
독일 교회는 일개 목사가 한 교회에서 계속 목회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자기 교회는 없다. 심지어 목사가 평생 목회하다가 교회를 제 자식에게 물려주는 일은 “절대” 없다.
8. 독일 교회는 전형적인 Post Institutional Church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 제도적 교회 참석률은 말할 수 없이 저조하지만 대다수가 종교세를 내고 있고, 자신을 기독교 신앙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트뢸취가 오래 전 소종파의 구속력을 벗어나고, 교회유형의 형식적 신앙에서 벗어나 탈제도적인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유형을 "현대 신비주의"적 성향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 데, 그런 관점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 이 글은 독일교회(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 홈페이지에 등재된 "2016년 독일교회 현황자료(Facts and Figures)"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임을 밝힌다. 참조, https://www.ekd.de/en/Facts-an-Figures-203.htm

P.s.
대한민국은 인구 오천만에 교회 8만 5천, 성직자 10만이 넘는다. 독일은 인구 8천만에 교회 1만 5천 개, 성직자 1만 8천 명이 있다. 독일교회는 성직자 인권 침해없고, 생활, 교육, 건강, 노후 보장 다 되는 시스템을 가졌다. 한국교회는 성직자에게 해외 선교, 소명과 열정페이를 강요한다. 앞으로 극빈 성직자 수는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런데도 부모 세대 신앙 논리를 추종해야 하나?
- 끝 -

Wednesday, June 23, 2021

기독교 차별주의자

 기독교 차별주의자


1.

겹겹이 싸여있는 동성애 혐오 문화가 한국교회에 깊이 배어있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 깊이가 매우 깊다. 그들의 동성애에 대한 평가는 마치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가르는 기준처럼 이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보수 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동성애를 향한 편견과 증오를 조장한 결과일 것이라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들이 동성애자에게 던지는 평가를 살펴보자. 

- 동성애는 죄다.

- 동성애는 올바른 사랑이 아니다.

- 동성애자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

- 성경은 동성애를 부정하고 정죄한다. 

- 동성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동성애자는 “자신이 동성애를 택한 것이다“라는 의미이므로 선택한 행위로서 판단과 책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즉 비난 받을 짓이라는 의미다. 

- 동성애자는 소아 성애자와 같은 부류다. 이 말은 동성애자는 성범죄자인데 왜 안 잡아넣느냐라는 주장과 같다. 

- 동성애는 더럽고 난잡하다.

- 동성애는 에이즈 확산의 통로다.

- 동성애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이런 논리가 모두 옳다면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증오한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2.

나는 위에 나열한 모든 판단은 성윤리의 관점에서 근거가 박약한 편견을 담은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은 집단으로 이런 판단을 유통하면서 “우리는 동성애자를 차별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동성애자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을 회개시켜 구원을 받게 하려고 그러는 겁니다.”라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공공연히 주장한다.”우리는 동성애자를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해요“라며 차별적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는 이들은 보면 정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조목조목 차별하면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부정직함은 깊이가 매우 깊다. 이들은 도대체 왜 기독교 차별주의자들이 된 것일까? 

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 보수적인 신앙을 교사하는 교회를 다닌 이들은 합리성을 상당부분 상실하는 자아의 죽음을 일종의 순교적 행위로 일상화 한다. 이들은 합리성을 배반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자기가 자신의 자아를 죽이는 일종의 부분적 자살행위다. 이 정도면 이들에게는 차별을 일상화하면서도 순교라도 할 것 같은 우월적 신앙을 옷 입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보수 신앙의 우월성을 버리면 하나님 신앙이 파산상태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 신앙의 파산은 이들이 가진 종교적 공포다. 종교적 문헌 속에 담겨있는 종교적 상징 언어나 표현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동정녀 탄생설, 일회적 창조설, 성서무오설과 같은 비이성적 주장을 목숨을 걸고 지키려 든다.   이런 지경에 빠지면 지성인이 아니다. 독선을 부리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런 독선적 존재를 지키는 일을 이들은 신앙을 순교적으로 지키는 행위라고 서로 가르친다. 사교가 따로 없다. 이렇게 훈련받은 이들이 서로 배설물도 먹으라고 하고, 구타도 당하면서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비이성을 우월한 신앙의 증거인양 주장하고 유통하기 때문이다. 

- 이들이 가진 내면적 논리는 생각보다 간단하다.  그러므로 연구하거나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왜 그럴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늘날 해방적 인간론이 점증하는 세상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사회에서는 해방이라는 말만 사용해도 펄쩍 뛰는 인간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누렸듯이 해방이란 기쁜 일이다. 왜냐하면 해방이란 지난 날 우리를 부당하게 얽어매던 것들로부터 놓여나 자유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제를 그리워하고 일제에 감복하는 인간들이 적지 않는 것과 같이 지난 “과거의 질서”에 만족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는 이들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럼 무엇이 우리를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이끄는 요인인가?

- 가부장적 질서의 근원적 원인인 이성애다. 이성애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남성 우월주의로 구성하고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평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점에서 가톨릭교회나, 여성 안수를 거부하는 교회는 나쁜 교회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 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남성이 지배하는 문화를 존속시켜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가부장적 남성 중심의 교회로 계속 머무르는 것에 대하여 나는 반대한다.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중심주의를 받아들인 인간(여자 포함)들에 의하여 존속된다. 

- 가부장적 질서를 옹호하는 논리 역시 매우 단순하다.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 성기 숭배의 논리가 담겨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적 문화가 채색된 세계에서 드러나는 우월성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나는 별 것 아닌 남자가 그 남자라는 이유 하나로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멋있다고 여기며 사는 인간 역시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성성이 질서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성성 중심의 질서를 파괴하는 자, 그들은 가부장적 문화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화는 이성애를 규범화하고,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며, 여성 인간을 억압한다. 차별하지 않는다고? 여성을 가부장적 문화의 대리자, 곧 성직자에서 배제하면서도 이들은 뻔뻔스럽게도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참 한심하다.

- 그렇다면 가부장적 문화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얼개는 무엇인가? 그것은 양성질서를 혼인규범으로 삼는 것이다. 즉 우리 사회의 모든 안정성은 우리를 지금까지 지탱해준 성관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은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 인식되고, 동성애는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일시에 상대화되는 모욕이 되는 것이다. 이런 감정에서부터 이들은 증오와 혐오를 내뿜는다. 이들은 자유롭기를 원하는 여성의 요구를 부정하고 끊임없이 가부장적 질서에 부역하는 것을 미덕으로 가르치려 든다. 한동안 이들은 여성을 마녀로 몰았듯이 요즈음에는 동성애자를 마녀로 몰고 있다. 마녀로 몰린 여성들을 향해 성적 혐오감을 살인적 증오 수준으로 끌어올리던 당시 종교 재판관이나 동성애 혐오자의 얼굴은 동일하다. 이들은 거짓을 밥 먹듯이 주장한다. 심지어 소아 성애자와 동성애자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동성공포증”(homophobia)에 오염된 교회를 만든다.

-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은 대부분 동성 공포증 환자들이다. 이들은 불교 혐오증, 부처공포증 같은 병에도 쉽게 걸린다. 사찰에 숨어들어가서 불상을 훼손하는 반문화주의자들은 사실 가련한 부처 공포증, 이교 공포증에 걸린 환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환자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인분을 먹으면서 거룩한 훈련이라고 생각하도록 교사당한 사람들이 왜 나오겠는가? 일찍이 자기살해, 더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인용하며 자기 이성을 살해하도록 보수적인 선생에게 교사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보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아까운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이 사랑의 길이 아니라, 종교적 자아의 훈련을 위한 자기 부정을 왜곡하여 자기혐오, 자기 살해로 여기는 그 경박한 오류를 알아채는 이들이 거의 없다. 

- 왜 그럴까? 끼리끼리 모여 있기 때문이다. 클라우스 테벨라이트는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게 신체적 공포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선입견과 공포적 혐오가 오도된 것”이 호모포비아의 요인이라고 분석하였다. 동성애자가 문제라기보다 정신적으로 오도된, 그러니까 정신병적 질환을 가진 인간이 바로 호모포비아에 걸린 인간이라는 말이다. 초기의 정신질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다소 인식할 능력이 있지만 만성적 정신질환자는 문제 인식 능력이 상당부분 붕괴되어 있다. 동성애 공포증을 유발하는 목사들은 일면 이런 속성에서 멀지 않다고 나는 보고 있다. 이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동성애자를 향하여 마치 인류의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악평하고 다니면서 우스꽝스럽게도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여긴다.  

3.

- 이들은 왜 동성애를 증오할까? 그것은 그래야 그들의 불안한 영혼이 안식을 얻기 때문이다. 증오와 혐오를 품어야 자기가 옳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언어를 살펴보면 “틀렸다.”, “올바른 것이 아니다.” “죄악이다.” 라는 표현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고 곁들인다. 이들이 “우리 자녀들을 타락시키고, 가정을 파괴할 것이며, 나아가서 우리 교회를 파괴하고, 우리 사회를 파괴할 것이다. “ 이런 주장을 진리처럼 외치고 다니는 공포증 환자들이 내놓을 수 있는 입증자료는 불행하게도 없다. 

- “자료가 없다고? “ 내가 연구한 결과로는 그렇다.  기독교가 잘못 가르친 미몽의 역사를 해체한 두 가지 결론이 있다. 47년 전 세계 정신의학자들의 모임인 미국 정신의 학회(APA)는 동성공포증의 원인이라 여겨지던 동성애를 정신적 질환에서 제외시켰다. 이 말의 뜻는 인류사회가 , 특히 인간을 정신적으로 관찰해온 정신과 의사들이 동성애는 질병이라고 주장했던 성직자들의 허황된 주장을 부정했다는 의미다. 더 이상 성경을 들고 동성공포증을 조장하는 목사들에게 속지 않겠다는 의미다. 이들이 밝힌 이유 한 문단만 인용한다. 

“We will no longer insist on a label of sickness for individuals who insist that they are well and demonstrate no generalized impairment in social effectiveness.” 

- 무려 47년 전이다. 동성 공포증을 아직도 떠들고 다니는 목사와 신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대들을 불성실하거나 부정직하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1973년 이전까지 장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목사들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다음 두 가지다.

1) 비정상(abnormal) 그래서 병든 영혼이라고 여겨 치료하면 된다. 여기서 온갖 상상력이 가해져 동성애자를 증오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1968년만 해도 정신과 의사 중에는 동성애자를 사이코패스라 규정하기도 했으니……. 그 박해의 역사를 다 여기 적을 수 없다. 

2) 미성숙(Immaturity)한 인간이라서 그렇다. 그러니 얕잡아 보아도 되고, 천박하게 여겨도 된다. 우리가 잘 가르치면 된다. 이탈리아에서는 동성애자를 교회 지하에 묶어두고 미성숙한 인간이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매질을 하기도 했다.  가르쳐야 되니까. 

- 1973년은 동성애를 이해하는 기조를 바꾼 해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위의 두 가지 관점을 가치고 고쳐보려고 1973년까지 노력했지만, 사실 알고 보니 비정상이나 미성숙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세계 심리학회에서도 1975년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 때부터 동성애는 기존의 이성애와 다른 사랑의 감정이며, 인간의 한 속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다르다”는 마치 백인과 흑인이 다르듯이 다를 뿐이지, 다른 것을 이유로 열등하다든지, “덜된 인간”, “잠재적 범죄자”라고 여기는 차별적 사고를 야만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5.

시간이 없어 결론을 내려야 하겠다. 어떤 이는 나를 향하여 목사인데 왜 성경에 있는 말씀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따스한 비난을 하시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정치적 성향에는 동의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이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신다.  그 이유까지 애써 내가 감신 출신이라는 데에서 찾으신다. 이런 분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보수 신학을 먹고 자란 분들이다. 

사실 감리교 목사라고 하여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얼마 전엔 감리교에서는 동성애를 옹호하는 이를 정죄하겠다는 문서까지 나왔다. 연합감리교회는 이 문제로  교회가 거리를 두는 두 편으로 나뉠 지경에 처해있다. 나는 어느 출신 때문이 아니라 나의 학자적인 양심과 지성을 희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너무나 많은 문서들이 나와 있다. 그러니 연구를 하지 않으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되돌이표를 만나 매번 제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반복은 이제 그만 했으면 좋겠다. 


정말 그대의 신앙의 문제, 자식의 문제, 교회나 우리 사회의 위기를 불러오는 문제라면 정신적 나태에서 벗어나 그대가 이제부터 연구해 보시라.  왜 유럽 전역을 포함하여 미국, 호주 등등 소위 선진의 공적 영역에서 세계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왜 세계 정신의학계와 심리학계가 생각을 바꾸었는지 살펴보시면 된다. 다만 16세기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유치하거나 상투적인 주장을 반복하지 말고, 반드시 정직하게 살펴보시기 바란다. 세상은 진실에 문을 닫고 편견에 찌들어 점점 정신세계가 쪼그라드는 교회와는 다르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악성 기독교 차별주의자에서 스스로 해방되는 일이 일어나기 바란다. 나는 이런 일은 예수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는 신자, 목사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싶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 4: 19-19)

Sunday, February 21, 2021

주례사

 

제자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주례를 했다. 요즈음 주례를 하는 일이 마음에 쉽지 않다. 결혼에 대하여 결혼 생활에 대하여 안내를 하고 권고를 하기 전에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기 때문이다. 늘 착실하고 성실하여 내가 아끼는 오래된 제자가 오래 전에 부탁했었는데 그 마음을 한참이 지난 후에도 여전하여 주례를 하기로 했다. 목사로서 교수로서 주례자로서, 나보다 더 행복하기를 마음으로 주례사를 준비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상투적인 결혼의 약속을 나누기보다 두 사람이 신실하게 서로에게 언약할 내용을 써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고백과 다짐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그 글을 읽은 후 쓴 주례사다. 결혼 주례사 1. 오늘 신랑은 신부에게 ”그대의 미소가 곧 나의 행복“이라고 고백했고, 신부는 신랑에게 ”그대의 편에서 응원하고 같은 꿈을 꾸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따듯한 남편“이 되겠다는 약속, ”현명한 아내“가 되겠다는 약속 - 나는 오늘의 이 고백과 약속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인격적으로, 평생 지켜지기를 축복합니다. 2. 나는 오늘 한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을 바라보며 양가의 부모님과 어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너희 두 사람, 부디 행복하게 잘 살거라!”라고 비는 마음이 아닐까요? 주례자인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오늘은 신부와 신랑이 나와 너에서 “우리”가 되지만, 앞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자녀들이 더해져 더 큰 “우리”를 이룰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선에 선 두 사람에게 저는 주례자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의 세 가지 습관을 일러주고 싶습니다. 습관은 반복하면 아름다운 덕이 되어 우리 삶을 지지해주는 원칙이 됩니다. 첫째는 서로 귀하게 여겨 존중하는 습관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최고의 남편, 최상의 아내가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대를 respect, 존중하는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 소중하게 존중을 받는 여인은 언제나 평화의 미소를 잃지 않을 것이고, 아내로부터 귀하여 여겨 존중을 받는 남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남편이 될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평생 잃지 말라! 이것이 첫 원칙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관계는 부부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만이 아니라, 자식 앞에서도 모범이 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지는 처가와의 관계, 시댁과의 관계에서도 깊은 이해와 존중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개인이나, 집안도 상대편으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으면 오가는 마음이 고맙고, 따스해지는 법입니다. 둘째, 평화를 지키는 습관입니다. 사람이 평화를 느끼는 순간은 언제 일까요? 상대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을 때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궁궐 같은 집에 살아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이의 삶을 살펴보면 평화가 있어야할 자리에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을 신뢰하는 선원들은 바다가 아무리 요동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온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장을 향한 신뢰가 없으면 이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지요. 삶은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아서 부부가 서로 깊은 신뢰를 가질 때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뢰가 없는 이들은 서로 의심하고, 서로 상처를 냄으로써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불행을 불러들입니다. 지혜로운 부부는 서로 깊이 신뢰함으로써 자신의 평화와 상대의 평화를 지켜줍니다. 평화를 지키는 습관, 서로 신뢰하는 원칙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가 되는, 일치, unity의 습관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일치란 하나가 아니라 각기 살아가던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30년 넘게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세상을 보는 습성, 느낌, 이해, 감각, 논리, 사고방식이 다른데 어떻게 일치를 이루라는 말일까요? 서로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더 큰 하나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구요? 그 비결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면 마음이 넓어져서 그것이 가능해 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지만, 사랑이 머물면 둘을 언제나 하나로 묶어줍니다. 사랑하면 서로 다른 것도 용납할 수 있고, 상대의 허물도 가려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허물을 덮어주기보다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돌변하지요. 그러니 저는 두 사람, 아주 얄밉도록 서로 사랑하여 언제나 마음과 뜻이 하나 되는 일치의 습관을 가진 부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요즘은 한국인의 수명이 연장되어 평균 83세 이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혼 약속을 지켜야 하는 기간이 이전보다 많이 연장된 셈이지요. 오늘 결혼한 두 사람은 30대니 앞으로 50년 이상 오늘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서로 귀히 여기며 존중하는 습관, 서로 신뢰함으로써 평화를 지키는 습관,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 언제나 하나가 되는 습관, 이 세 가지야말로 두 사람이 부부로서 평생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의 원칙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021년 2월 20일 주례자

Monday, February 15, 2021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파친코를 읽고....


1. 

이 책은 일제하에서 한 가난한 식민지인 가족사를 다룬다. 일본 오사카를 주(主)무대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한 식민지인 가족이 일본 땅에서 4 세대에 걸쳐 기형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담아내고 있다. 이 이야기의 서두에 나오는 언청이 훈이의 모습은 이미 불리한 삶의 그늘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형화되어 남과 구별되고, 차별을 겪어야 하는 훈이의 불리한 처지가 비록 온전한 얼굴을 가졌지만 기형인과 유사하게 취급받는 재일 조선인의 처지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조선인의 삶은 일본인이 쳐 놓은 조선인을 향한 차별과 배제의 구조 속에서 철저히 하위하는 존재(subaltern)의 삶이었다. 그들의 삶의 주체성은 이미 탈각되었고, 그들은 어디서나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제한된, 이등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비운을 피할 수 없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후에도 이념적 갈등이 빗어내는 불안으로 인해 재일 한국인에게는 분단된 조국은 마음 편히 다가설 수 없는 곳이었다. 재일 조선인은 그들을 식민 지배했던 식민주의자들 속에서 차별과 배제의 벽에 갇혀 꾸역꾸역 살아간다. 


2.

언청이 훈이는 자기보다 더 가난한 집 딸 양진을 아내로 맞아 순자를 낳는다. 훈이의 딸 순자가 소녀티를 벗을 무렵 야쿠자 순지한 건달 한수를 만나 그의 아기를 가진다. 하지만 한수는 이미 일본에 아내와 세 딸을 두고 있는 기혼자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양진은 순자를 오사카로 목회하러 떠나는 이삭에게 맡긴다. 이삭은 순자를 아끼는 마음 반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반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아 형이 있는 오사카로 건너간다. 순자는 한수의 아들 노아를 낳고, 이삭의 아들 모자수를 낳는다. 그리고 모자수는 솔로몬을 낳는다.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이라는 장벽 속에 갇혀 4대에 걸쳐 이어간 이들의 삶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아닌 파친코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왜 이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파친코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3.

상상할수록 끔찍하게 느껴지는 식민주의자들의 차별적 시선 앞에서 재일 조선인 가족은 세 가지 형태의 비극적인 삶의 유형을 보여준다. 첫째는 자기 부정형이다. 순자의 첫 아들 노아와 같이 똑똑하고, 경쟁력이 있는 사람은 불평등을 감내해 내야하는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 노아는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조선인으로 태어났고, 한수와 순자의 잘못된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자기 존재를 제한하고 낙인찍는 현실 속에 몰아넣는 것도 힘겨운 일인데, 그에 더해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는 모든 관계를 떠나 가족들의 시선에서 차단된 곳에서 마치 일본인인 것처럼 살아간다. 자신의 신분을 세탁했지만 인친척이 없는 고독한 삶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일본인이 명예롭게 여기지 않는 파친코 관리인이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자발적으로 부정하고 지워버림으로써 일본인인 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노아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 그 정체성이 밝혀지는 시간이 다가오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오래 전 자기를 부정했으나, 그 부정된 자기 자신을 아주 지워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몸은 조선인, 삶은 일본인이라는 이중 모순을 가진 존재, 이 모순 앞에서 명예로운 생존의 길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모자수의 삶에 비치는 삶의 양태는 차별의 벽을 수용하고 차별적 세계의 유한한 한계 안에서 타협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모자수는 조선인을 향한 억압에 저항함으로써 학교생활을 중도에서 포기한 후 파친코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삶을 살아간다. 돈을 벌어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에 타협의 의미를 두었다. 노아가 일본인을 기준으로 삼아 자기 삶을 바라보았다면, 모자수는 조선인으로서 자기를 받아들이면서 일본인으로서의 삶의 질은 포기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기 아들 솔로몬만큼은 자신이 넘지 못한 그 벽을 넘어 일본인에게 뒤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는 솔로몬을 국제학교에 보내고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시킨다. 그 자신은 파친코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아들만큼은 차별의 벽을 넘어 일본인도 선망하는 미국적인 지평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자수는 자기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바, 일본인을 이겨내는 삶을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실현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모자수는 자신의 삶에서는 재일 조선인의 한계 지워진 삶을 수용하고 타협하면서도 아들 솔로몬을 통해 희망의 출로를 여전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셋째, 식민지 시대가 지나갔으나 여전히 배타적이며 차별적인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보다 더욱 우월한 실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솔로몬이 아버지의 소망대로 콜롬비아 대학을 나와 일본에 있는 영국계 은행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자기 상사였던 간교한 일본인에 의하여 부당해고를 당하는 벽에 다시 부딪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솔로몬은 아버지 모자수가 일구어낸 파칭고에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아버지 파친코를 찾는다. 이로서 모자수의 꿈은 좌절되고 솔로몬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현실적인 타협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조선인을 버리고 일본인처럼 살아가려던 노아의 자살, 그것은 아마도 오래 전에 일어난 자아 부정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차별받는 식민지인의 불리한 정황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초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자수의 꿈은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솔로몬의 귀환으로 인하여 그의 꿈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친코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향했던 솔로몬의 탈출 시도의 좌절과 파칭코로의 귀환은 어쩔 수 없는 이중성 속에서 끝없이 시도하는 이민자의 자기 부정의 양태를 보여준다. 재일 조선인의 삶은 결국 도처에서 차별과 배타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파칭고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세대가 될 솔로몬의 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이런 물음에 저자는 답하지 않지만, 독자는 독백하듯 묻게 된다. 


파친코를 찾는 사람은 비틀거리는 삶을 살아가다가 한 순간의 환희를 찾는 이들이다. 희망을 품고 슬롯 머신에 매어달려 있다가 이내 빈털터리가 되어 힘없이 지루한 삶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그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얄팍한 희망과 좌절을 겪는 이들이다. 이들을 파칭고에서 살아가게 만든 이들은 누구일까? 


4.

 식민 지배를 받은 이들의 삶이 기형으로 태어난 훈이의 모습에서 전조를 보였다면, 임신한 순자의 삶에 주어진 구원의 길은 사실 익숙한 세상에서 추방당한 삶을 의미하며, 이렇게 잘못 자리 잡은 삶의 자리에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은 저항이 불가능함으로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self-denial) 변종적 삶으로 이어진다.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된 세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치유할 수 있는 세상은 – 일본, 남한, 북한, 미국 -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불리한 정황에서 이미 그들의 삶은 시작되었으므로 하여튼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길을 가도 조선인이 파칭코로 돌아가게 만드는 나라 일본에 대하여 작가는 하루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 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2권, 220) 


5.

제한된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의 푸념이다. 이 푸념은 그들이 운명에 대한 푸념이고, 그 운명을 만든 것은 식민 지배자를 조선에 들인 우리의 허약한 역사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가 우리를 망쳤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은 그래도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과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저자는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하여 매우 단순하게 처리한다. 대부분 한 줄 이상 언급도 안 한다. 매우 냉정하다. 죽음의 의미보다 삶을 서술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세 개의 단어가 내 마음에 남아돈다. 내가 보아온 독일 이민자들, 미국 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의 삶보다 더욱 열악하게 느껴지는 재일 한국인의 삶 - 기형적 삶과 잘못 놓인 삶의 자리에 갇힌 하위존재의 삶(deformity, dislocation, subaltern), 아마 이런 요소들은 재일 한국인을 포함하여 제나라를 떠나 낯선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많은 부분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나, 겹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Monday, January 4, 2021

차별의 악 Vice of Discrimination

 차별의 악

“선한 상상력이 결핍되어 편견에 찌든 차별주의자는 있어도, 선한 차별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1.
차별은 왜 일어나는 것인가? 차별은 인간의 지적 오류인 편견의 결과다. 편견을 연구 주제로 삼은 고든 알포트(Gordon W. Allport)는 그의 명저 <The Nature of Prejudice>에서 편견은 두 가지 속성을 가진다고 했다. 편견은 어떤 특정 대상에 대하여 고정된 태도를 가지게 만드는 동시에 확신(Einstellung und Ueberzeugung)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편견은 간혹 칭찬과 격려와 연대, 그리고 높은 인간애와 사랑을 촉발하기도 하지만 보다 많은 경우, 정 반대로 중상 비방, 접촉 회피, 차별 감정, 신체적 폭력, 심지어 특정인을 향하여 그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고 존재 자체를 아예 제거해 버리려는 악의를 조장하기도 한다. 독일 제 3 공화국에서 나치 정권이 동성애자들을 박멸하려 했던 T4 프로그램이 하나의 사례이고, 이런 악습은 오늘날에도 경건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신앙의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든 형태의 차별은 교묘한 지성의 오류를 통해서 형성된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르너 베르그만(Werner Bergmann)의 정의에 따르면 편견은 우리의 일상에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판단을 하게 만들고, 특정 대상을 향하여 일종의 개인적 태도를 정당화하게 만든다. 이 정당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지적 오류는 “차이”를 “다른 것”이라 여기지 못하고, 그 “차이”를 쉽게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는 자기중심의 습성, 관습, 의식, 논리, 사고, 감정, 법제도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통하는 것이다. 열등한 것은 이 유통 과정에서 이내 도덕적으로는 부도덕적인 것으로 규정되기도 하고, 정치적 위협으로 해석되기도 하며, 집단의 이익을 저해하는 불순(不純)으로, 또는 경건에 반하는 불(不)경건, 자연을 거스르는 비(非)자연으로도 해석된다. 여기서 악의 제거, 위협으로부터의 방어, 그리고 불순의 제거라는 슬로건이 매우 당연한, 정의로운 실천이라는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렇게 정치화된 제거 프로그램은 차별의 악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하는 기만적인 기재(器材)다.
이렇듯 편견은 사회-정치 심리학적으로 기능하면서 개인이나 집단에게 특정 사안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만들고, 그 확신에 따른 개인적 혹은 집단적 태도를 유발시키는 것이다. 모든 차별 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이나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편견의 지배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개인이나 집단 속에서 형성된 편견은 개인과 개인 혹은 집단과 집단을 통해서 쉽게 전이되는 특징을 가진다. 편견이 낳은 차별의식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 정치적 이해관계와 만나면서 진화하고 교묘하게 변종을 일으키면서 일종의 정당한 도덕적, 정치-사회적, 종교적, 제의적 행위나 제도, 혹은 법으로 포장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차별을 일종의 정치적 현상, 즉 크고 작은 권력 관계에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어느 편이 일방적으로 재현하는(representing) 행위라고 여긴다.
차별 행위는 사실의 왜곡을 통해 일어난다. 차별은 정치적 약자에 의하여 주도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 강자가 약자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방식에서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습성, 생각, 사고, 의식, 감정, 이해관계를 통해 약자를 해석하는 재현하는 행위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 비틀려진 왜곡이다. 오직 강자만 왜곡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난 역사 속에서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고, 남성이 여성을 차별하고,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차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부정확하다. 모든 차별은 강자가 약자를 왜곡함으로써 차별하는 방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백인이 백인을 차별하고 흑인이 흑인을 차별하며, 여성이 여성을 차별하는 행위도 비일비재하다. 이렇게 강자가 약자를 차별하는 양태는 이내 상투적 행위와 언표 혹은 가치판단에서 일상화 된다.
2.
일상에서 일어나는 차별 행위는 사람이 다양한 만큼 각기 다양하다. 다양한 형태의 차별은 각기 특정한 현실에 대한 행위자의 사유와 판단의 형식을 통해서 상투적으로 표현된다. 서열적 사고, 우등한 것과 열등한 것을 나누는 판단, 선과 악에 대한 이해, 선호의 느낌, 그리고 지연, 혈연, 학연, 신분 등 출신에 따른 친소(親疎) 관계 등은 우리 안에 있는 차별적 사유를 아주 상투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이 차별적 사유가 집단 속에서 기능할 경우 그 결과는 매우 무섭다. 집단은 집단의 이익에 더욱 천작하는 구조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에 차별 행위를 매우 강력하게 유통시키는 힘을 행사한다. 남아공에서 오랜 기간 존치되고 있었던 인종 차별 법, 1960년대까지 지속된 미국의 인종 차별 법, 지금도 서슬 시퍼렇게 적용되고 있는 아프리카의 동성애자 사형 법 같은 것이 그 예다. 차별이 법과 제도를 옷 입을 경우, 차별 행위는 국가나 사회, 그리고 그 국가나 사회의 신성한 영역을 해석하던 종교의 권위에 의해서도 옹호, 조장된다.
차별이 보편화된 사회나 집단 안에서 차별을 거부하는 행위는 터부시되어 반사회적인 행위로 규정되고 처벌을 받게 된다. 한국 감리교회에서 동성애를 증오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동성애자를 향하여 축복을 빈 행위를 터부시하여 기피하지 않은 한 목사를 증오하는 무리가 종교 재판을 벌인 것도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사건은 부끄럽게도 그저 단순히 한국 감리교회의 집단 지성, 혹은 신학적 윤리학의 바탕이 지성의 저항을 파괴하고 저속하고 저질화된 상태에 이른 실상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인류사회는 사실 오랜 기간 이렇게 차별적 행위를 법과 질서, 사회 제도, 그리고 종교적 제의를 통하여 유통하며 존속시켜 왔다. 인류의 지적 실패의 사례들이 편견을 통하여 사회적으로 전승되고 법과 제도 속에 천작해 왔다는 사실은 오늘날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는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집단 학살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이미 세계 2차 대전 중에 나치에 의하여 저질러진 홀로코스트의 실상을 직면하고 경악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패싸움은 여전히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멀게는 르완다의 인종학살, 아프가니스탄의 학살, 아르메니안 학살, 가깝게는 전두환군부의 광주 학살 사건, 이승만 정권의 제주 4.3 학살 역시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편견에 지배를 받아 인간을 죽이는 차별 행위를 한 것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전개된 “홀로코스트 이후의 신학”은 홀로코스트 이전의 신학이 지닌 무능과 오만과 편견을 비판했고, 신학이 생산한 그릇된 질서 신학의 관계적 오류를 바로잡아 왔다. 현대 신학의 내적 논리를 이끈 신학적 윤리 담론은 정치신학, 해방신학을 거치면서 권력과 물욕에 빌붙어 기생해온 기생(妓生)신학을 청산하는 일에 매진해 왔다. 그런데. 이런 논리와 신학적 담론과는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이, 세계 지성사에서 상당 부분 극복해온 차별의 논리와 제의를 2000년대에 들어선지 한참이 지난 오늘날 한국 감리교회 안에서 버젓이 감리교회 주류의 논리로 재현되고 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부끄러운, 나태한 한국 감리교회의 실상이다.
차별의 연원을 연구한 학자들은 차별의식은 문화 내지는 문명의 틀 속에 내재되어 변이되고 전승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가 심원하게 영향을 받아온 문화 구조 속에서 차별적 의식과 가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익혀왔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차별을 하면서도 차별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나, 혹은 그런 행위를 하는 자기 자신이 “그릇 되었다“라고 깨닫지 못한다. 오히려 차별행위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남보다 더 단호한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믿거나, 사회 상규에 더 적합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인식의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차별받는 사람들은 차별의 악을 “직접” 경험한다. 차별 행위가 유발하는 배제, 소외, 불이익, 무시, 괴롭힘, 추방의 제의를 넘어서 차별자가 자신을 향하여 두려움이나 공포, 혹은 혐오, 증오까지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면 차별을 받는 이는 더욱 깊은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물리적 공포를 느끼게 된다. 실상이 이러한데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별의 악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주류 사회 구성원이 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직접” 차별을 받아 본 경험이 없어서이다. 설령 실제로 차별을 받아도 자신이 그 차별로 인하여 심각하게 고통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별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지극히 정상적이며 심지어 선량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는 집단 안에서 유통되는 왜곡된 인식을 정상으로 인식하는 지적 착각이 문화화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차별의 악이 광범위하게 지속되는 이유는 바로 이렇듯 “선량한 사람”의 실상이 차별주의자라는 데에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을 일러 다소 형용 모순의 표현이지만, 김지혜 교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라고 불렀다. 차별 행위를 하면서도 그 악을 인지하지 못하여 스스로를 선량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심지어 차별 반대를 가르치고 주장하는 이들 중에도 자신이 선명한 차별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차별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이런 이들이 적지 않다는 증거는 제도적 차별을 합법화해온 역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별 행위자가 선량한 사람일 수 있을까? 왜 우리 주변에는 사람을 차별하면서도 스스로를 선량하다 여기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본 모습은 사실 선량한 것이 아니라 무섭고 악한 것이다. 다만 그 스스로 우둔하여 악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알던 모르던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쉬나무르티는 사람을 일러 “편견 덩어리(a bunch of prejudices)”라고 지칭했다. 그에게 찾아와 대화를 청하는 이들을 향하여 크리쉬나무르티는 “그대가 나에게 무엇을 묻기 이전에, 내 앞에서 무슨 주장을 하기 전에, 자신이 편견 덩어리임을 먼저 인정하라”고 권했다. 자신이 산출하는 질문 자체가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실을 찾겠다고 논거 점을 잡는다면, 이 경우 이미 그 논거 점 자체가 비틀려 있어 진실한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편견 덩어리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편견에서 놓임을 받은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참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쉬나무르티의 지혜로운 권고는 사실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하다. 겉으로는 매우 신앙이 깊어 보이고, 교양이 있어 보이며, 지성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이도 그가 가지고 있는 생각, 주장, 존재 그 자체도 무수한 편견으로 얼룩져 있다. 심지어 우리에게 영향을 끼쳐온 부모, 교수, 목사,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벗, 모두가 살아온 사회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동일하게 어느 정도 편견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지하는 것은 차별의 악과 싸우려는 이들이 가져야 하나의 요건이다.
3.
인류의 역사가 매우 장구하지만, 차별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류 사회는 너무나 오랜 기간 차별을 정당한 것이라고 여기는 편견을 유통하며 차별 사회를 형성하고, 차별하거나 차별받는 것을 당연시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이들이 만들어온 기독교 세계에서도 오랜 동안 노예 제도를 하나님이 주신 질서라 여기며 정당하다고 여겨왔고, 유색 인종을 차별하는 일에서도 그 오류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성경과 전통을 근거로 삼아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아는 무리도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인식에서는 평등, 실천에서는 차별을 일상화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자들 대부분은 차별적인 세계 속에서 특혜를 누리면서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차별을 파악하지도 못했고, 문제 삼지도 않았다. 오히려 신실한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차별적 오류를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하거나 신학적으로 당연한 것이라 여겨 옹호하기도 했다.
차별의 악이 종교 안에서도 지속되어온 까닭은 차별 의식이 신학에 의하여 교묘하게 하나님의 질서로 포장되고, 합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간과된 것은 신앙 집단, 신학적 논리, 그리고 목회 지침에 의하여 누군가를 가해하고 소외시키며 피해자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신앙 집단은 가해자 집단이 되는 동시에 피해자를 향해서는 “더럽고, 추하고, 악하거나, 혹은 열등한 존재, 심지어 악마적인 존재”로 낙인을 찍음으로써 피해자를 향해 냉혹한 태도를 가지도록 부추겼다. 이런 가르침에 이끌려진 종교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판단이지만 대부분 차별의 온상이다. 종교가 차별의 온상으로 전락하게 된 하나의 이유는 종교인들이 타방의 악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지적, 비판하면서도 자기 집단 내부의 악이나 인식의 오류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왜곡된 전통을 고수하면서 이런 전통을 마치 신앙 공동체의 통일성, 열정, 뜨거움, 일치를 위한 것인 양 해석해온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교도들을 향하여 근거 없이 비하한 전통, 마르틴 루터가 터키인들을 향하여 개처럼 여긴 전통, 캘빈이 비(非)교리적 인간을 혐오한 전통, 기독교 세계가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증오해온 전통이 이어져 낙관적인 기독교 세계의 종말을 불러온 홀로코스트를 초래하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기이한 차별적 전통을 내장한 기독교 일부는 아직도 적반하장 차별 행위를 참된 신앙을 고수하는, 확신 있는 신자의 행위인양 영웅시하며 가르치고 있다. 차별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교회가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려 노력해 온 것은 사실 기독교 일부일 뿐이며, 그 기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모든 전쟁의 이면에서 기독교가 다양한 이유를 제시하며 포악을 지지하고 독려해온 역사를 생각하면 끔찍한 생각이 들 정도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세계 교회협의회가 핵전쟁의 위협을 직면하면서 오랜 동안 고수해오던 정당 전쟁론을 버리고 정의로운 평화론으로 그 입장을 바꾼 사실도 모르고 있다. 신실하면 할수록 한국 기독교인들은 핵으로 무장한 세계에서 전쟁이 아직도 정당한 행위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무책임하고 호전적인 신자로 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가르침이 전능하고 정의로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편들어 승리가 보장될 것이라고 허황되게 믿고 있다.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 과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가공할 전쟁 행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대량 학살할 수 있는 것도 신앙 안에서 수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인간을 과학무기를 동원하여 대량으로 학살할 수 있는 전쟁을 지지하는 그 논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 교묘하게 차별하는 행위 정도는 쉽게 관용하거나 간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큰 악이 보편적으로 융통되면 사소하거나 적은 악은 쉽게 인지되지 않거나 간과되는 법이다.
기독교 안에서 신앙을 가르치고 배우는 문화 구조를 통하여 폭력적 행위가 유통되고, 차별이 마치 거룩한 질서인 것처럼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그 근원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교사해온 집단이 성서를 해석하면서 자기 집단의 안전과 우월성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충족하면서, 자신들의 특정한 이해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편견을 조장하고 이를 하나님 신앙으로 포장해 왔기 때문이다. 노예제도를 옹호한 역사가 노예 주인의 관점에서 나온 성서 해석의 결과였다면, 성차별의 역사를 옹호한 무리들은 남성 중심적이며 가부장적인 집단의 구성원의 눈으로 성서를 해석한 것이고, 인종 차별을 옹호해온 역사는 자기 인종 집단의 우월성을 확보함으로써 사회, 경제, 정치적 이익을 공유해온 집단의 눈으로 상대를 본 것이다.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 행위를 죄스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마치 참된 신앙인양 가르치는 목사들이 우리 주변에 부지기수인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일러 하나님 신앙과 아무런 상관없이 기독교적 질서, 성 윤리의 해석자요 수호자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적 오류, 즉 편견과 편견이 낳은 차별적 사고를 보수(保守)하는 데에서 자신의 특출한 신앙이 입증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성소수자를 박해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는, 포악하고 열광적인 신앙인의 얼굴을 가지는 것이다.
이들은 도대체 언제부터 차별주의자로 살아가게 된 것일까? 차별을 합리화해온 주체는 대부분 사회에서 약자가 아니라 강자,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 즉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인간은 강한 권력을 가진 집단에 속할 때 더불어 차별주의자가 되기 쉽다. 기독교도 사회 안에서 세력을 가진 다수자가 되면서 차별을 심화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다수에 속하면 그 집단 속에서 보호와 안전의 강도가 더욱 강력해짐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타방을 비하, 규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불순하고 더러운” 존재로 간주하는 일이 매우 쉬워진다. 루터의 종교 개혁 성지 비텐베르크 마을 교회 외벽에 새겨진 한 부조(浮彫)물에서 우리가 보듯이 경건한 종교 개혁의 후예들은 유대인을 사람이 아닌 돼지(Schweine)라 여기는 편견을 유통했다.
이런 편견에 사로잡힌 다수자의 종교 집단 문화가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그 다수자는 자기 집단의 이기성을 노골적으로 옹호하려는 심리 상태를 가지게 됨으로써 다수자의 소수자를 향한 차별적 행위가 개인의 행위나 판단을 넘어서 제도나 종교적 제의로 굳어지고 강화되었던 셈이다. 따라서 차별적 행위는 지난 역사, 우리의 사회 구조, 우리 자신의 욕망까지 담겨진 사회 심리학적 배경도 가지고 있다. 차별 행위는 개인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종교, 사회, 정치적 현실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차별 행위를 하는 이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의 “왜곡된 의”를 충족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부당하게 희생양으로 삼는 제의에 참여한다. 동류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는 차별 행위자가 “선한” 차별주의자일 수 없는 이유다.
4.
인간 공동성은 인간을 품위 있고 정의롭게 성숙시키는 순기능도 있지만, 동시에 편견과 차별 의식을 배양하는 숙주가 되기도 하고, 이를 유통, 전승하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갓 태어난 인간은 언어와 관습, 가치와 도덕, 질서와 지배, 안정과 평화, 문화와 문명, 철학과 문학, 옳고 그름... 등에 관하여 무지한 문화적 야만 상태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무지 가운데에서 태어난 인간은 인간 공동성을 통해 지,정,의를 키워나가면서 자신과 세상을 잇고 관계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어린 생명은 문화적으로 접속하게 되는 가족 공동성을 통해 신뢰와 믿음, 사랑과 연대감을 배우면서 삶의 의미와 보람, 그리고 행복을 감지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모든 생명은 앞선 인간들이 형성해온 문화 구조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 문화가 중시하는 가치와 질서를 획득 모방함으로써 한 사회인이 되어간다.
이렇게 전통적 질서에 적응하고 통합되어가는 과정은 간혹 자신의 삶을 근본에서 위해하고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과거의 전통 속에는 다양한 자기 파괴의 폭력성도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쟁 영웅 신화에 세뇌된 청년이 전쟁터에서 영웅적 행위를 하려다가 참살될 수도 있었고, 인도의 수티(suttee, sati) 힌두 제의에서는 남편이 사망할 경우 그의 처가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 사망한 남편과 함께 화장되는 것을 예찬하는 끔찍한 전통도 있었다. 인간 공동성에는 삶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력도 전승되지만, 간혹 약자의 삶을 무화시키려는 죽음의 힘도 함께 전승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삶의 자리에는 아직도 제거되지 못한 반생명적인 폭력의 산물들이 다양한 차별 의식과 행위로 잔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다른 이를 젖히고 더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하며, 남보다 높은 소득을 얻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유리한 고학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다 나은 경쟁력을 가지고, 소유와 지배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우월성을 가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어려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2년 전에 4명의 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공저한 ”인간의 행복의 연원에 대한 연구“(The Origins of Happiness, 2018)에서 저자들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돈이나 성공이나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행복을 창안하고 느낄 줄 아는 정서적 능력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행복은 소유나 지위나 학식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신뢰와 타인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은 이들에게서 더 깊고 짙다는 것이 이들의 사회학적 연구 결과였다.
우리의 정서는 합리적 사유나 이성적 논리에 앞선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이유를 “자신이 부유하지 않아서”, 혹은 “성공하여 높은 지위를 가지지 못해서”, 혹은 “공부를 많이 못해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해서”라는 등등의 이유를 대지만, 더 근원적인 원인은 행복을 누리고, 나누며,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 정서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당사자가 유아기에서 중등학교를 마칠 정도의 시기에 어떤 세계를 경험했는가에 크게 좌우된다는 공통된 견해를 내 놓았다. 어릴 때 신뢰를 경험한 아이와 신뢰를 배우지 못한 아이, 어릴 때 행복을 느끼며 살아온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차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정신세계는 성장한 후에도 그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에 심원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 아이가 자라온 가정, 학교, 그리고 교회, 사회에서 경험하는 신뢰 관계를 포함한 심리적 환경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가 그 안에서 학습하고 삶을 나누어온 삶의 공동성의 구조는 어떤 것이었을까? 가정이라는 공동성, 학교라는 공동성, 교회라는 공동성, 우리 사회라는 공동성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신뢰하고, 믿고, 배우며, 우리의 안전과 행복, 그리고 우리의 욕망을 충족하며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웠을까? 물론 이런 공동성의 환경에서 우리는 옳고 그름의 기초를 배우고, 사람과 관계하는 형식을 배우고, 신뢰의 관계를 학습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은 과연 우리를 야만의 속성에서 해방되어 다양한 차별적 관계로부터 우리를 충분히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욕망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파당지어 배타하고, 혐오를 드러내고 비판하며, 비열한 평가를 가하여 배제하면서 안도감을 느끼는 그런 관계였을까?
우리 안에 있는 차별의 현실은 우리가 학습하며 살아온 삶의 공동성을 통해서 지양(止揚)되지 않은 차별 감정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증명이다. 차별은 하나의 판단이므로 그 차별을 결과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 우리 안에 이미 하나의 판단으로 착색되어 내재하고 있는 어떤 “당위, 혹은 질서”다. 당위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는 의무와 강요적 성격을 가진다면, ”질서“는 하나의 정형화된 서열적 관계에 대한 승복을 요구한다. 즉 ”선한 것, 좋은 것, 당연한 것, 아름다운 것, 바람직한 것”에 대하여 우리는 논리에 앞서 우리 안에 감정적 정서를 가지고 있고, 또한 그러한 정서를 뒷받침하는 논리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런 것들은 대부분 한 개인이 스스로 알아서, 찾고, 배우고, 경험하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삶의 공동성을 통해 사회적으로 이미 누군가가 경험하고 판단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학습하여 얻은 것이다.
이는 마치 구전(oral tradition)을 통해서 하나님 신앙을 전수받았던 고대 이스라엘 집단의 공동성을 연상하게 한다.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선대하라는 인류애적 가르침도 그 속에 담겨 있었지만, 다른 편에서는 이교도를 비인간화하여 태중의 아기까지도 참살하라고 가르치는 무서운 죽음의 윤리와 차별 감정도, 바로 그 공동성을 통하여 전수되고 학습 되었다. 태중의 아기까지 진멸하라는 요구는 사실 하나님 신앙보다는 적으로부터 보복의 가능성을 제거하려는 고대 포악한 전쟁의 논리와 동일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더해진 것이 성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공격적인 태도다. 이런 것들이 모두 하나님 신앙이라는 박스 속에 담겨 전수되어온 셈이다.
5.
사회적으로 학습한 것은 실제에 있어서 개인이 책임적으로 내린 순수한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회를 통일시키고 유지, 보존하기 위하여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판단의 형식에 순응하거나 적응함으로써 형성된, 후천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차별적 인간이 가진 차별 의식은 이미 “누군가에 의하여 판단되거나 규정된 내용”, 즉 “앞서서 판단한 내용”을 이어가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편견(prejudice)이다. 그리고 이 편견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유통되는 상투적 가치 판단(stereotyping)을 옷 입는다. 어의적으로 편견이란 사유와 관찰을 통합하여 개인지 그 진실함과 오류를 판단하기에 "앞서서(pre)" 미리 "판단된 것(judged)을 의미한다. 인간은 야만으로 태어나서 가정에서는 부모, 학교에서는 선생, 교회에서는 목사, 사회에서는 권력자가 중심이 되어 형성되는 여러 사회적 원 안에서 삶의 공동성을 나누고, 이 원 안에서 과거에 형성된 “앞선 판단”을 획득한 셈이다. 그 결과 우리는 “편견 덩어리“가 될 운명에 갇혀 있다. 차이가 있다면 편견에서 더 많이 해방된 삶의 공동성에서 자란 사람이 있고, 해방되지 못한 삶의 공동성 속에서 자란 사람이 있을 뿐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그 이유 그 한 가지를 가지고 인류사회는 수천 년 동안 동류 인간을 차별하다가 비교적 근래 1960년대를 지나면서 비로소 인종차별을 극복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 뿌리는 여전히 왕성하게 남아 있다.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가진 인간이라고 여기지 않는 성차별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정치적 평등,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경제적 평등,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인권론적인 평등론을 확산하며 부단히 극복해 왔지만 아직도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차별적 현실이 제거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다. 지난 2000년을 전후하여 유엔과 세계 교회 협의회가 전 세계적으로 20년 동안 여성을 향한 다양한 차별적 폭력을 극복하자는 운동을 펼쳐왔지만, 2020년 현재 아직도 주류 남성들에 의한 여성 차별은 다양하고 교묘한 이유로 지속되고 있다. 지금도 인류 사회는 매년 11월 25일을 “여성을 향한 폭력 반대의 날“로 지정하고 여성을 향한 폭력과 차별을 제거하자는 성차별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유럽과 미주에서는 다양한 차별이 상당부분 극복되어 사회의 지배 권력에 소수자의 참여를 중시하는 평등주의적 관점이 정치적 진보의 상징이 되고 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학 교수는 물론, 신학대학 교수직에도 동성애자가 차별 없이 임용되기도 하고, 캐나다와 미국, 유럽에서는 성소수자가 높은 지위를 가지고 일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의 46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는 지난 12월 15일 피트 부티지지(Pete Buttigieg) 전 인디애나 주 사우스벤드 시장을 교통부 장관으로 공식 지명함으로써 그의 정부 각료로 초대했다. 그가 최종 임명되면 미국 역사상 ‘성소수자 1호 장관’이 된다. 이런 현상을 진보라 여기지 않고 타락이라고 읽는 보수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인권 선진국에서는 진보를 타락이라 읽는 우둔함은 결코 보편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성소수자(LGBTQ)에 대한 차별이 수천 년 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가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격렬한 윤리적 논쟁을 거쳐 서서히 청산되어가는 현상의 하나라고 나는 보고 있다. 성소수자 차별은 다수자들이 이성애자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들과 다른 성적 성향을 가진 소수자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정당하게 여기는 야만성에 그 본질이 있다. 내가 야만성이라 지칭하는 까닭은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행위가 매우 원시적이고 사악하기 때문이다. 차별주의자들은 소수자의 성적 성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고의로 무시하려 들거나, 심지어 물리적 폭력이나 종교적 주술을 가하여 제거하려 하고, 지속적으로 괴롭혀 자살로 몰아가기도 했으며(스티븐 스프링클은 성소수자 혐오 범죄로 죽임을 당한 이들에 관한 기록을 책으로 남겼다, <누가 무지개 깃발을 짓밟는가>, 2013), 성소수자의 삶을 엿보고 감시하거나, 직장이나 학교에서 따돌리며 불이익을 주고, 생존권과 거주권을 박탈하려 들기도 하며,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부인하는 등의 혐오와 증오 행위를 지속적으로 저지른다. 이런 부류의 차별 행위는 “성소수자의 인간성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나치가 범한 홀로코스트의 다른 버전이거나 그 연장선상에 벌어지는 것과 같은 성격의 범죄라고 규정되어야 마땅하다. 대부분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이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증오 범죄다.
6.
합리적인 성소수자 이해를 위한 자료는 매우 다양하다. 즉“성서 신학적 해명”, “성성(sexuality)에 대한 윤리적 해명”, “인간 성성(sexuality)에 대한 임상학적인 설명”, “현대 심리학적 해명”, “정신 의학적 해명”등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차별주의자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 의식에서 쉽게 해방되지 못한다. 특히 스스로 경건한 기독교 신앙인이라 여기는 경우 더욱 심하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교도자들이 신자들을 미성숙하게 여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안을 살펴보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며, 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 결과이며, 동시에 일방적으로 “그러한 편견“을 주입시키며 교도해 왔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신자들은 ”은혜와 감동을 받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심각한 차별주의자로 길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도대체 하나님 신앙을 가지고 살려는 우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상한 차별주의자가 되어 살아가게 된 것일까? 나는 이런 왜곡의 과정은 바로 우리 자신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 살기를 바라는 속성에 크게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주류에 속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차별받기보다는 차별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사회의 주류(main stream)를 대변한다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언제나 우월한 지위를 점하기 때문에 도리어 도덕적 위기에 처하게 된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우리에게 일러준 지혜는 힘 있는 주류 집단에 속하게 되면 도덕적 자각이나 반성 혹은 성숙의 기회가 오히려 더 적어진다는 사회심리학적 통찰에 담겨있다. 사회 주류에 속하는 이들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지지와 옹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이들은 더 많은 것을 결정할 수 있는 결정 권한을 행사한다. 다양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주류 세력을 집단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결속을 도모하고, 전통을 강조하며, 비판적 자각보다는 복종과 일치를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주류 세력은 차별과 편견을 시정하고 교정할 기회보다는 이를 유포하고 전파함으로써 이견을 약화시키고 집단의 힘을 강화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다수이면서 동시에 권력을 가진 집단, 이것이 차별주의자가 속한 집단의 사회적 특징이다. 이런 까닭에 차별 행위는 대부분, 다수에 의한 소수 차별, 혹은 힘 있는 집단에 의한 힘없는 이들을 향한 일종의 공격 행위, 증오와 혐오를 동반한 억압적 권력 행사가 된다. 기독교 인구가 다수가 되고, 주류가 되는 문화를 형성하면, 거기서 소수를 향한 혐오와 박해가 일어나기 쉽고, 이러한 혐오와 박해를 정당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순수 논쟁이 등장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이단 재판은 이런 식으로 일어난다.
나는 모든 차별 행위는 야만으로 태어나 야만의 본성을 극복해온 인류의 역사와 진보의 방향에 역행하는 구태(舊態)라고 여긴다. 야만의 속성을 벗겨내지 못한 차별 행위는 모든 사회 구성원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상상력이 결핍한 자리에서 쉽게 일어난다. 사람을 차별하는 이는 차별 대상자가 자기 자신과 같은 “동류 인간”이라는 인식을 거부하거나 결여한, 적대적 불화를 내면화한 인간이다. 즉 차별 행위자는 차별 대상자와의 관계가 이미 단절되고 파괴된 관계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일종의 사이코패스 환자의 징후를 보이게 된다. 그가 비록 제아무리 화려한 언변을 동원하고, 동정과 연대, 사랑과 연민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이미 “냉혹한 판단”을 수용한 야만, 즉 관계의 단절, 곧 차별 의식을 그의 정신세계 속에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주의자들은 흔히 자신들의 야만성을 감추기 위하여 두 가지 논리를 유포한다. 첫째는 차별 대상자를 뚜렷한 근거 없이 악마화 하는 것이다. 악마가 아닌 인간을 악마화 하려는 노력에는 거짓과 과장, 허위와 모략이 동원된다. 동시에, 둘째, 자신들을 의의 편에 선 자로 가장, 과시하는 것이다. 차별주의자들이 흔히 동원하는 것이 성경, 윤리와 도덕, 혹은 신앙과 믿음이다. 하지만 이들이 동원하는 무기는 “도덕주의“라는 틀 안에 갇혀있는 특성을 피하지 못한다. 도덕주의란 도덕을 무기 삼아 상대를 공격하는 수단이다. 도덕론을 앞세우는 차별주의자들은 이미 그들 내면에 “자기 의”에 빠져있는 냉혹한 야만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의 도덕 논리는 상대를 정죄하고 증오와 혐오를 발산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차별주의자들은 상대를 악마화 하는 거짓 선전, 과장, 비하, 악의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자신을 신앙과 의의 수호자라 간주하는 자기 의라는 오만의 덧에 걸려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차별주의를 배양해온 숙주가 바로 주류 종교, 특히 기독교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교는 차별을 신앙화하고, 신의 뜻으로 포장하며, 의의 싸움이라는 표어를 내 걸면서 혐오를 정당화 한다. 역사 속에서 열광주의적인 차별주의자의 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종교에 의하여 증오심과 혐오가 동기화 되었다. 열광주의적인 종교인의 특징은 인권도, 민주적 가치도 이해할 도덕적 능력이 없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심지어 이들은 무책임한 종말론으로 무장하기도 하며, 말세의 묵시적 선악 대결구도를 대입하기도 하면서 차별적 세계관을 과장하여 해석하기도 한다. 이 정도까지 나가면 차별주의자들의 눈에는 동성애자란 인간이 아니라 악마, 사탄, 교회를 허무는 사악한 존재로 영화(靈化)된다. 종말론적이거나 묵시적 증오를 동원하면 차별주의자는 자기 자신과 다른 인간을 종교나 영성의 이름으로 악마화 하는 흉측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7.
옳고 그름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 사유의 근본적인 구조다. 여기서 판단의 옳고 그름의 내용을 정하는 것은 자기가 자의(恣意)를 따라 “미리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확인”하는 이성적이며 비판적인 절차(reasoning)를 요구한다. 이 절차에 더하여 필요한 것은 그 확인된 사실을 “상대적인 중립적 위치”에 놓는 신학적 작업이다. “중립적 위치란 없다”라는 이론도 있지만 나는 그 중립적 위치라는 것은 바로 억압과 지배력에서 거리가 가장 먼 해방 신학적 방법에 있다고 본다. 즉 누군가의, 혹은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모든 자력(磁力)을 중화한 지점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유한하여 하나님의 뜻을 명료하게 말할 수 없는 인간이다. 하지만 내가 상상하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 중립적 지점에서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 중립적 위치에 가깝다면 우리는 어떤 이익 집단으로부터, 간접적으로, 획득한 판단이 아니라(not acquired),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성소수자에 대한 현실을 살피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될 것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스스로 공부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여러분은 (편견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편견에서 해방된)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 하도록 하십시오.”(로마서 12: 2)
이 성서 구절에 비추어 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의 윤리적 요건은 무엇일까? 편견에서 해방된 마음과 언제나 생각이 새로운 인간이다. 차별 반대를 운동 차원에서 하는 것도 좋고, 집단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별적 편견에 지배받지 않는 “자유 하는 신앙인의 주체적 지평”에서 나오는 차별 반대의 힘이다. 그 신앙인이 서 있는 토대는 자신이 메인 스트림을 형성하여 완성되거나 굳어지는 지평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 열려있는 주체로 설 때만 항상 열리는 지평이다. 다시 말해 답을 얻어 이미 굳어진 주체가 아니라 새로운 것(das Novum)을 향하여 열려진 주체가 만나는 새로운 지평이다. 이런 주체는 새로운 것을 상상할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럼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를 가진다.
나는 성소수자 차별 행위를 옹호하는 집단에 반하여 결성한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정치적”이기를 바란다. 모든 신앙행위는 정치적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정치적이란 말은 가치를 제도화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즉 차별을 제도적으로, 법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차별 행위를 지원하는 제도나 법을 차단하기까지 실천적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정치적 행위는 그 행위의 구성원의 통전적 인격이 담보될 때에만 진실하고 설득력이 있고 힘이 있다. 따라서 이 운동이 힘이 있으려면 모든 참여자들이 사실에 적합한 인식을 위하여 부단히 연구하고, 편견에서 해방되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집된 힘을 가지고 그릇된 제도와 법을 바꾸고 바로 잡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지켜내는 능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958년 야스퍼스가 받았고, 1967년 에른스트 블로흐가 받았던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Friedenspreis des Deutschen Buchhandels)을 2016년 수상한 카롤린 엠케(Carolin Emcke)는 여성이며 성소수자다. 그녀는 그녀의 책 <Gegen den Hass, 2018>(직역하면 “증오에 반대하여“라고 할 수 있지만 번역자는 이 책을 ”혐오사회“라고 정했다.)에서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은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상상력이 결핍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했고, “누군가를 증오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이들의 다양한 논리를 분석해 다분히 알고 있지만, 그저 오직 한 가지 이유로 성소수자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침해하는 이들을 거부 한다. 그들이 우쭐대며 제아무리 수백 가지 이유를 들이댄다 해도, 나는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할 그럴 권리는 인간에게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은 무척 무섭기 때문이다.
차별은 인간성을 거스르는 악이다. 선한 상상력이 결핍되어 편견에 찌든 차별주의자는 있어도, 선한 차별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끝-

동정과 연대 나누기 Sharing Compassion and Solidarity

 연대 나누기

1. 새해를 맞으면서 제 마음에 내상이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검찰에 의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 괴롭히기가 법원 1심에서 불의하게 합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국 장관을 공격하는 윤석열 검찰의 공공연한 법의 오용과 남용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마음이 1심 판결로 인하여 또 크게 상처를 받았습니다. 판사의 성향을 분석하고 있었던 검찰은 검찰을 편드는 판사와 그렇지 않은 판사를 나누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판사를 공정치 못한 판사라는 단서를 달아 교체시키는 교활함도 보였습니다. 불의한 검찰의 꼭두각시가 된 법원의 실상도 보았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성탄절을 전후하여 일어나는 것을 목도하면서 제 마음에 있었던 상식과 정의의 기준이 부정되는 것이 느껴져 한동안 도무지 마음이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민주사회가 판사에게 법적 심판을 맡긴 것은 그가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할 것이라는 민주사회 구성원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고, 판사는 그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질 것이라는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판사들은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조롱했습니다. 판결문은 판사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좌충우돌 억지 논리를 더해놓은 꼴입니다. 결과적으로 현 정권의 개혁 의지를 가로막고 훼방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야한 정치적 판결을 접하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 나라의 법원이 정의와 공정의 보루가 아니라 수구 질서를 옹호해오던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는 의구심이 확신으로 굳어지는 것이 느껴져 깊은 좌절감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젠 검찰과 법원이 손만 잡으면 누구든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무서운 세상이라는 느낌에 두려움까지 다가옵니다.
우리 사회에는 일제의 끄나풀에서부터 이어진 100년 묵은 검찰과 법원이 불의한 언론-정치 세력과 손을 잡고 4겹으로 된 줄로 꼬아진, 정의와 공정사회를 가로막고 수구 세력의 이익을 지키는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지도 않은 세력인데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히 검찰과 법원의 구성원들은 지난날 권력자들과 손을 잡고 자신들만의 특권행사 방식, 전관예우라는 초법적 횡포를 유통하며 굽은 판결을 주고받고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의 편에서 축재해온 자들을 그들의 상관, 선배로 모시고 있습니다. 이 집단의 비리를 근절하려는 개혁자들이 이들과 조우하는 최전선에서 온갖 모욕과 상처를 입고 있던 셈입니다. 노무현, 한명숙, 조국, 정경심, 추미애,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바로 이들에 의하여 치명상을 입은 분들입니다.
저는 이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 문재인 대통령이나 개혁을 외쳐온 일련의 인물들의 안전조차 어느 누구도 담보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득권을 거머쥔 검찰 세력, 법원 세력, 언론 세력, 정치 세력의 연대를 과연 누가 깰 수 있을까요? 문재인 정권이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아무리 보아도 역부족입니다.
민주 시민들은 개혁을 약속한 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개혁하겠다는 정당에 180석 의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수년이 지나는 동안 민주 시민들의 피부에 와 닿는 개혁의 정도는 너무 약하고, 오히려 수구 세력에게 멱살 잡혀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무능한 모습을 보여 한동안 내심 불만스럽고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니 지금 우리가 싸우고 있는 상대가 생각보다 무서운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4겹줄로 엮여 100년 동안,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정의와 공정한 사회를 가로막아온 집단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동족을 학살하기도 하고, 모함하여 죽이기도 하는 냉혹한 무리를 상대로 하는 싸움입니다. 어떤 이의 말대로, 농담 삼아 웃으며 “너 그러다 죽는 수가 있다.”라고 하던 이들이 이제는 사법 농단을 저지르는 세력의 손에 걸리면 얼마든지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세상이라는 두려움까지 느끼게 된 것입니다.
수구 특권 세력은 정치, 언론, 검찰, 법원 곳곳에 숨어서 개혁의 선봉에 서있는 이들을 교묘하게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치명상을 입히고 있습니다. 이런 수구 세력이 과연 종교, 교육계, 감사원, 경찰, 군대 등등 사회 곳곳에는 없을까요? 나는 이런 세력이 국민이 선출한 정권도 무력하게 만들고, 민주사회의 인권의 보루인 법치도 제 손아귀에 놓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상대의 성향을 조사 분석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주 세력의 개혁 동력을 멈춰 세우려 합니다. 이들은 심지어 개혁 성향의 정치가의 처와 자식, 친척까지 볼모로 삼고 수사와 기소, 판결로 보복의 칼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많은 분은 상당수의 선한 검사, 판사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들 역시 지난 역사 속에서 불의한 제도와 조직에 몸담고, 불의한 자들에 의해 법절차가 오용되고 있는 현실을 못 본 척하면서 부귀와 영달을 누리며 비굴하게 살아온 이들이기도 합니다.
일부 타협주의자들은 박근혜와 이명박을 감옥에 보낸 것으로 족하니 이제 그 선 이상 더 가지 말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 사회는 다시 수구 세력의 수중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결국 개혁 정권에서도 정치가 정의와 공정을 압도하고 지배하는 세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정치가 법치를 압도하는 세상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시대로 끝나야 하지 않나요? 죄를 지은 자들에 대한 최종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 사면을 요구하는 소리가 나오는 까닭은 바로 이런 타협주의자의 어설픈 현실 인식과 판단 기준 때문입니다. 이런 소리가 개혁과 공정과 정의를 주장해 오던 민주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것이기에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2.
저는 한 기독교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이 무척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명실공히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아도 “그렇다”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기독교가 참된 기독교가 아닌 악성 변종이 되어 세상에 치이고 삶에 지친 이들을 포로로 잡아 오직 교회만 섬기는 교회의 종으로 만드는 집단이 되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생명을 섬기는 생명의 하나님 교회가 아니라, 생명이 교회를 섬기고, 마치 교회의 하나님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변이 시켜 놓은 것 같습니다. 교회라는 집단이 거대한 집단 이기성에 매몰되어 기득권 세력이 되고, 심지어 정의와 공정을 짓밟는 불의한 사회를 편들고 있다는 생각은 저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최근 저는 시민운동을 하는 한 선배로부터 정의의 문제는 정치가에 맡기고 우리는 정직 운동만을 하자는 요지의 문자도 받았습니다. 과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할까요? 이는 마치 일제 식민지배 아래에서 ‘신앙인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은 하지 말고 오로지 정직 운동만 해야 한다’라는 논리와 하등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온 이들이 과연 정치가들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사회의 정의와 공정을 염원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종교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 수구 세력의 미움을 받을 일을 멀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습성에 빠진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세계 교회 협의회가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책임을 논구하기 시작했던 때가 지금부터 70년도 더 지난, 암스테르담 회의가 열렸던 1948년이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불의한 정치, 포악한 군부, 탐욕스러운 기업가들이 하나님 백성의 존엄성과 권리를 마구 짓밟는 현실을 교회가 외면하지 말고 함께 책임을 지자고 외쳤던 것이지요.
참된 양심의 빛이 살아 있다면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삶에서 종교와 정치는 공존해야 합니다. 종교도 마땅히 정치의 과제, 즉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이루어 나가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70년 동안 깨어 있었다면 오늘의 4겹 줄 수구 세력이 저렇게 겹겹이 강고하게 자리를 잡았을까요?
3.
저는 종교 개혁 시대 전후에 피어난 특이한 신비주의자 집단의 사상을 접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라인지역에 모여 살던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명 독일어로 라인지역 신비주의자(Rhineland Mystiker)라 불렸던 이들입니다. 이들의 삶과 사상의 자취를 살피면서 저는 정의와 공평의 기준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가 인류사에서 이 세상의 다른 영역보다 영성이나 도덕적으로 더 높은 정신세계를 간직한 영역으로 그 지위를 인정을 받아온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종교가 종교의 영성 속에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질서, 더욱 참된 정의와 평화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인강 주변에 살던 신비주의자들은 영육을 분리하는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영과 육을 하나로 바라보는 비이원론적 사유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육을 하나로 바라보는 전통은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적인 영성과 질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성 신비주의자들은 순수 영성의 세계를 찾아 세상, 부모, 가족, 심지어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떠나 물성을 초월하는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현실을 버리고 떠나면 떠날수록 이들은 영육 이원론적 세계관에 갇혀서 자기 부정, 육체성의 부정, 욕망의 부정을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해 싸웠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 삶과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그러나 라인지역에 살고 있었던 신비가들은 정신과 몸, 육체와 영혼이 나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부장적 신비가가 버리고 떠나간 곳에서, 자연에서, 우리 몸에서, 모든 생명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지요. 이들은 차이를 강조하며 순수 영혼을 찾아 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차이가 아니라 모든 것이 동질의 것,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가 담겨있는 피조물로서 등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남성 신비가들은 천사를 흠모하고 인간의 육체를 혐오하거나 물질을 멀리했지만, 이들은 아주 사소한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창조 신비를 예찬했습니다. 새나 나무나 시냇물조차도 이들의 눈에는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형제요 자매라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위대한 사랑의 힘이 솟았습니다. 형제와 자매의 아픔, 사람의 아픔만이 아니라 자연의 아픔도 들여다볼 줄 아는 깊은 동정과 연대의 영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여성이었던 그들은 생명을 낳아본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낳은 생명은 바로 자기 분신이었기 때문이지요. 아기의 아픔이 엄마의 아픔, 피조 세계의 신음이 바로 하나님의 신음이었기 때문입니다.
4.
어느 신앙인에게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초월적인 영성의 세계에 비하여 하찮고 비영성적인 것이라 여겨져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었지만, 이들에게는 그 모두가 소중한 하나님의 피조물, 자기 자신과 같은 피조물이므로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져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되었습니다. 나무도, 새도, 심지어 흐르는 시냇물을 향해서 이들은 형제요 자매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세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세계 내적 신비주의” 영성이 피어났습니다.
이들은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자기 주변에 있는 약한 생명을 향한 강력한 동정과 연대의 영성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로 이 연대의 영성에서 이들은 약자를 위한 정의와 공평을 요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약한 생명과의 연대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약자를 괴롭히며 희생시키는 불의한 힘의 제거, 곧 정의의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연대감과 정의의 요청은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암울한 가운데 맞는 새해, 우리는 한동안 펜데믹으로 인한 어려움과 더불어 불의한 세력의 횡포를 겪으며 어둡고 답답한 시간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픔이 그들의 아픔이 되고, 그들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으로 느껴지는 연대(solidarity)의 마음이 우리에게 살아 있다면 더욱 정의롭고 공평한 세상을 향한 우리의 염원은 멈추지 않고 쑥쑥 자랄 것입니다.
다시 일어서서 더욱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을 상상하면서 다시 희망을 가슴에 품어야 하겠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장로교 신학자 알렌 보젝은 포악한 자들에게 외면당해 땅에 버리어진 진리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진리는 진리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있어서 언젠가 다시 하늘로 높이 솟구친다고 했습니다.
불의하고 포악한 자들은 언젠가 역사 속에서 제거되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연대를 나누는 이들에게는 아직 희망의 지평이 열려 있습니다. 새해 아침, 좌절과 우울의 시간을 잘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야 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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