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1, 2019

서슬이 시퍼런 한국교회

서슬이 시퍼런 한국교회
1.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을 때 그는 과연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까? 당시 34살의 마틴 루터는 당시의 교회를 비판함으로써 유럽 사회를 뒤흔들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 개혁 사상은 허무한 어둠의 힘을 물리치는 빛도 있었지만, 최고 선 그 자체는 아니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 속에는 그 시대의 어두운 종교적 유산도 섞여 있어 시간이 한 참 지난 후에 보면 악의 숙주 노릇을 하기도 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되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에는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도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은 진리 논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다양한 논쟁과 다툼을 불러왔다. 그의 주장은 인간 구원은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에서 비롯되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중명제는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돈이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핵심 사상에 모아진다. 따라서 성서적 근거를 가지지 않은 모든 행위나 사상은 오히려 인간의 구원을 훼방하는 마귀의 작업이므로 엄격하게 차단, 배척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정당화 했다. 루터는 교황의 세력을 적그리스도, 마귀와 거의 동일시함으로서 결과적으로 구교에 대한 극렬한 증오를 부추겼다.
루터의 주장은 네 가지 측면에서 당시 가톨릭교회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첫째, 성서에 근거되지 않은 성직자의 권위가 교도권(Teaching authority)과 더불어 거부되었다. 성직자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성직수임과 같은 예전이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 둘째,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이 가르치던 공덕주의(salvation through works)가 성서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따라서 돈으로 면죄부를 사거나 파는 행위는 비성서적이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면죄부 효과가 부정된다는 것. 셋째, 카톨릭 교회의 일곱 가지 성례(sacrament)중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세례와 성만찬뿐이라는 것. 넷째, 그러므로 인간을 거룩하게 여기고, 비성서적 구원을 주장하며, 인위적인 성례를 만드는 행위는 마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2.
루터의 이와 같은 주장은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론, 교회론, 성례론 등을 인간의 사유 이면에서 구원 사역을 훼방하는 마귀의 짓이라는 귀결을 불러왔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면죄부를 팔고, 신도들의 헌신을 요구하던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신앙 의인의 논거가 아니라 행위의인 논거에 세워져 있다고 판단하고 돈과 행위에 의한 구원을 약속하는 카톨릭 교회의 본질이 사탄적인 것이라는 루터의 주장에 경악했다. 경악하기는 교황 측도 마찬가지였다. 루터에 의해서 적그리스도라고 규정된 교황은 오히려 루터의 본질을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하고 계시록에 나오는 사악한 세력을 의미하는 짐승의 숫자, 666, 혹은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악마라고 비난했다.
루터 측과 교황 측은 서로를 향하여 성서 본문을 인용하며 적그리스도, 악마라고 규정한 셈이다. 교황을 비판하고 교황의 행태에 불만하던 세력은 루터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은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을 신뢰하며 기존의 가톨릭교회 편에 서게 되었다. 마침내 기독교 세계는 종교 개혁으로 인해 크게 두 진영으로 나누어지고, 이따금 종교 갈등을 넘어 정치적 사건으로 이어져 상대를 악마화 하는 전쟁으로 빠져 들었다. 이에 더하여 루터의 의식 속에 담겨 있었던 중세기적인 유산, 곧 교회의 가르침에 반하거나 맞지 않은 다른 주장을 할 경우 악마의 소행으로 몰아가던 악마화의 관행은 엄청난 증오의 광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와 진리 담론의 대척자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진리논쟁에서 촉발된 다툼은 이내 정치 사회적 다툼으로 이어졌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맞물린 제후들의 욕망이 더해져 30년 전쟁, 100년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상대를 악마의 졸개로 간주하는 시각은 종교 전쟁을 일종의 십자군 전쟁이나 마녀 사냥과 같은 성격으로 변환시켰다. 그 결과 상대에 대한 잔인한 살육을 정당화 하게 만들었다. 인간에게는 사랑과 자비의 기회를 주어야 하지만 악마에게는 일말의 사랑과 자비를 허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대자를 향하여 인간적인 동정과 관대함을 가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이런 성향은 기독교가 오래 동안 내장하고 있는 악의 유산이다.
3.
루터가 기독교를 성서적 신앙으로 개혁한 것은 위대한 사상적 공헌으로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위대한 신학적 사상을 남긴 루터를 칭송하기 위하여 그가 범한 오류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비판적인 태도는 결과적으로 루터 속에 담겨있는 비이성적이며 비인도적인 규범까지 기독교 신앙의 모범 사례로 여기도록 만드는 오류를 유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루터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에 감격하는 신앙을 깊이 각인 시켰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자신의 적대자를 악마화 하는 수단, 곧 중세기적 마귀론이나 마녀론을 개신교 안에 유입, 유통시키는 오류도 범했다. 그가 가진 편견과 시대 착오성은 그의 후예들에게 중세기적인 인종차별주의와 증오문화를 개신교 안에 유입시키는 것을 마치 신앙의 과제인양 여기게 만들었던 것이다.
루터가 1543년에 쓴 논문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서 루터는 유대인을 비하하며 박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을 향한 인종차별적 편견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부터 연원을 두고 있지만 기독교 세계 안에서 더욱 강화되어 왔다. 유대인은 예수를 죽인 자들의 후손이며, 개종을 거부하는 종족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적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집단, 저주받은 족속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루터는 기독교 안에서 습성화된 인종차별적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런 편견은 종교 개혁 세력에 의하여 더 강한 광기로 자리를 잡았다. 루터는 유대인 회당을 불 질러야 한다고 했고, 유대인의 기도서를 모두 불태우라고 했으며, 랍비의 설교를 금지하고 그들의 집을 불사르라고 했다 심지어 유대인을 게토에 가두고, 그들의 재산이나 현금을 몰수하며, 그들에게 어떤 자비도, 법적 보호도 베풀지 말라고 했다. 그들을 강제 노역을 시키거나 추방을, 심지어 벌레처럼 제거할 것을 교사했다. 이런 루터는 히틀러가 존경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루터가 유대인 박해를 정당화했던 논문은 나치 정권에 의하여 교과서처럼 이용되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 리스트는 원래 히틀러의 것이 아니라 중세기를 거치며 형성된 증오 문화를 이어받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의 주장이었고, 히틀러가 이를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긴 셈이다. 위대한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가 이런 문서를 남겼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루터가 이 논문을 쓴 후 정확히 400년이 된 시점, 공식적으로는 1942년 2월 26일자로 히틀러 정권은 유대인을 말살정책을 공식화했다. 그 결과 폴란드에 거주하고 있었던 유대인 90%가 죽었고, 유럽 전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 2/3가 야만적으로 살해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학살의 명칭은 “The Final Solution"(마지막 해결책)이었다. 나치는 루터처럼 유대인과는 도저히 더불어 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치는 루터가 그의 논문에서 주장했던 바, 그 내용을 거의 그대로 유대인에게 조직적으로 시행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종교 개혁자는 유대인 학살의 교사범이었던 셈이다.
4.
성서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던 루터의 사상을 이어받은 이들이 루터 이후 약 400년이 지난 시점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없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루터와 같은 위대한 선조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성서적 신앙의 후예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백만 명의 생명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학살할 수 있도록 안내한 루터의 주장은 과연 신학적으로 정당하며, 성서적인 것이었을까? 나는 명료하게 아니었다라고 생각한다. 성서는 증오와 혐오를 위한 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름을 차별로 인식하고, 증오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것은 성서적 신앙의 열매가 아니다. 나는 성서를 들고 혐오와 증오를 가르치는 이들을 보면 나치의 스승 역할을 한 루터를 떠올린다. 역사는 아니러니하다. 개혁자가, 성서를 든 자가 혐오와 증오의 교사가 되었으니. 오늘날에서 더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의 거친 소리에서 나는 또 하나, 나치의 출현을 예감한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악마로 몰았다. 생각이 다른 이를 악마로 몰아 혐오와 증오하도록 교사하고, 마녀로 몰아 죽이던 중세기적 종교의 습성을 개혁하지 못했던 것이다. 루터의 인종차별적 유대인 혐오주의는 어디서 온 것일까? 루터가 가졌던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중세기적 마귀론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그가 신실하게 믿어왔던 종교 전통과 습성에서 받아들인 것이었다. 종교는 자명한 진리 담론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진리 담론에는 무서운 폭력이 숨어있다. 나는 루터의 이런 어두운 측면은 그가 중세 후기를 살아가면서 기독교 세계가 그리고 있었던 신화적 세계관과 유대인 혐오주의라는 편견을 극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이용했다고 본다. 이처럼 종교개혁 사상은 옛 교회의 오류를 수정하고 비판하는 기능도 있었지만, 이처럼 인종차별적인 혐오와 증오를 유포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종교 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비텐베르크에 모인 사람들은 종교 개혁의 후세들이 서로 증오하며 사람을 살육했던 과거에 대하여 부끄러워했다. 서로 증오의 감정과 폭력을 주고받던 신 구교 지도자들은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이렇게 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교황청과 루터세계연합회)는 우리의 무수한 실패에 대하여, 그리고 종교 개혁이 시작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년 동안 서로 적대하며 그리스도의 몸에 상처를 낸 것에 대하여 서로 용서를 구합니다.”
구교와 신교 지도자들은 분파와 분열을 정당화하고, 신앙을 빙자하여 종교 전쟁까지 불사했던 지난 500년을 돌아보며 부끄럽게 머리를 숙이고 서로를 향하여, 그리고 세계 앞에서 용서를 구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종교 개혁 500년을 돌아보며 무슨 생각을 나누었을까?
내 눈에 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종교 개혁을 한 편에서 축하하면서도 다른 편에서는 비텐베르크 성 안에 있는 한 교회 벽에 1305년에 새겨져 700년이 넘도록 보존되어온 하나의 부조(浮彫) 형상(形象)을 제거하라는 항의도 있었다. 비텐베르크 마을 한 교회 외벽에 새겨진 부조물에는 누워있는 돼지의 젖을 빨고 있는 유대인들, 그리고 그 돼지의 다리와 꼬리 사이에 놓인 토라를 읽는 듯한 랍비가 새겨져 있다. 누가 보아도 유대인은 돼지 새끼 같고, 랍비는 음란한 자로 여겨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부조물이다. 루터도, 나치도 유대인을 사람이 아닌, 돼지(Schweine)라고 불렀다. 루터와 나치가 다른 것이 있었다면 나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동성애자와 좌파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더했던 점이 다르다.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든 도시 비텐베르크에서도 종교 개혁의 후예들도 오랜 동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유대인을 돼지라고 여겼다. 이러한 종교적 증오와 혐오를 불어 일으키는 편견이 종교개혁 500년 주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나치에 의하여 유대인들이 600만 명이 희생된 사실이 있음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데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며 항의한 것이다. 그러나 비텐베르크 교회는 그 부조물을 떼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적 편견을 이어온 자신들의 수치를 감추기보다는 후손 대대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나치 집단 수용소를 없애버리지 않고 유적지로 남겨두고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독일 정부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이다.
5.
한국 교회를 다시 들여다보자. 중세 교회로 돌아간 듯이 성직자 중심주의가 만연하다. 맘모니즘의 포로가 된 한국교회는 중세 교회가 면죄부를 팔았듯이 각종 헌금을 받으며 축복 장사를 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었다고 가르치면서 유대교나 되는 듯이 유대인 교육론을 유입시키고, 예수 이전처럼 제단을 차려놓고 각종 희생의 제물을 바치게 만든다. 기이한 기독교다. 사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고 증오했던 유럽 기독교의 오핸 습성을 따라 한국 교회는 좌파 증오와 혐오증을 좋은 신앙의 증거인양 가르친다. 좌파와는 함께 도무지 살 수 없다는 생각에 북진 통일론, 멸공통일을 외치는 교회도 있다. 그 결과 6.25 전쟁을 치르며 좌파라면 모두 잡아 죽였다. 미국이 키워준 기독교 지도자들은 복음과 반공주의를 동일시하는 일에 앞장섰다. 마치 독일인들이 유대인을 증오하듯 우리는 좌파를 증오하는 기독교인들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마치 반공 사상이 성서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기독교 윤리”라고 여긴다. 예수가 이런 것을 언제 가르쳤던가.
어느 교회의 새벽기도 시간에 목사는 갈멜 산상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도륙한 엘리야의 승리를 설교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동성애를 지지하는 좌파 정권이 하나님의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다고 열변을 토한다. 그가 좌파들이 물러가고 우파 정권이 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자라고 요구하자 이어 우레와 같은 통성기도가 이어졌다. 목소리가 썩시근한 어느 중년 사내는 큰 소리로 주문을 외듯이 소리를 질렀다. ”오 주여, 이 땅에서 좌파를 도말하여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좌파여 사라져라!“
루터도 자기와 생각이 다른 좌파적 사상가 토머스 뮨쳐(Thomas Müntzer)나 그의 선배이자 옛 벗, 비폭력 평화주의자 안드레아스 칼쉬타트(Andreas Karlstadt)를 악마의 사주를 받는 자로 규정했다. 나치처럼 루터를 따라야 할까? 마치 나치처럼 푸르등등한 살기를 품고 있는 한국 교회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충실한 루터의 후예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까? 아니다. 루터의 어두운 그림자를 닮아서는 안 된다. 독일 기독교인처럼 사죄의 성명서를 내고,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 새겨진 증오와 혐오의 조각들을 벗겨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우리 안에 있는 증오와 혐오를 신앙의 증표로 여기는 신앙의 악습, 악마화의 습성을 벗어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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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July 16, 2019

교단장들의 시대 착오성

시대 착오적인 교단장의 정신세계

교단장들 제발 경솔한 발언 하시지 마세요. 교단장이 되었다 하여 당신들 영성이나 인격이 더 높아진 것 아닙니다. 교단을 대표하려면 개신교 정신을 깊이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 사상은 인권의 수호자 노릇을 하는 것이지, 인권의 박탈자 노릇을 하는 것 아닙니다.

개신교 전통은 구교의 교도권 오남용을 경험했기에 성직자에게 교도권을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단장이 되었다고 하여 자신이 연구하거나 깊이 헤아려 보지 않은 문제에 대하여 남을 주제넘게 가르치거나 명령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개신교 지도자는 전광훈이처럼 기독교를 주제넘게 대변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 짓은 종교 파시스트나 하는 짓입니다. 청와대에 가서 기껏 발언한 것이 NAP 인권조항 반대라니요?  그런 수치스러운 주장이 도대체 어떤 신학적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요? 자의에 빠진 한기총 전광훈이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요?

미안하지만 그런 조야한 주장을 할 권한이 당신들에게 없습니다. 교단장이라 하여 모든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칙을 어기면 교단장입네 하며 자의를 따라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파괴하는 자가 됩니다. 당신들은 신학의 전문가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신들 수준에서 통일되고 획일적인 신학적 사고를 요구해선 안 됩니다. 개신교는 다양한 관점을 통해 공동체적 합의에 근거한 신학만이 교회를 건강하게 한다는 이성적인 합의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처럼 성직자 중심의 교도권을 우리는 행사하지 않습니다.

개신교는 성직자의 직무는 존중하지만, 성직자 개인의 우월성이나 특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직자도 유한하고 죄스러운 인간이라는 믿음 위에서 멈추지 않고 교회 공동체를 개혁해온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이지요.  교권을 사상적 지배권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종교 재판관 노릇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하고 무엇이 선한 하나님의 뜻인지 지혜롭게 숙고하고, 중지를 모아 신앙 공동체 구성원의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일해야 합니다.  국가 기관을 찾아가서 한다는 소리가 신학적 근거가 없는, 속 보이는 특권이나 달라고 주장하는 흰소리를 해댔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P.s. 7월 6일 오늘 아침 NPR 뉴스를 들어보니 독일에서는 2018년 1월 1일부터 증오 스피치를 하는 행위, 증오나 혐오를 담은 비디오를 만들어서 뿌리거나 웹에서 이를 방임하면 50만 유로까지 벌금을 물리는 법이 적용되고 있더군요.  프랑스에서도 최근 법이 통과되어 페북이나 유튜브, 트위터 등에서 증오스피치를 24시간 이상 방임하면 운영자에게 무려 200만 유로의 벌금을 물리는 법이 생겼습니다.  페북은 기존의 직원 수를 배나 늘여 무려 1만 명의 모더레이터를 고용하려 고심중이랍니다. 나치가 유대인을 증오한 역사적 기억을 가진 유럽은 증오 범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수장이라는 분들이 세상 바뀐 줄도 모르고 종교가 다르거나 성적 성향이 다른 소수자를 향한 증오 스피치의 자유를 종교의 자유로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을 보면 정말 문자 그대로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분들이 독일에서는 범죄자 수준의 증오를 가르치는 자를 강단에 불러 세우고 있습니다.  나는 이분들이 유럽에 가서 성 소수자를 향한 증오를 부추겨 보기를 바랍니다.  벌금 30억 원까지 물어야 하는 범죄자로 몰릴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짓 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소수자의 인권을 부정하는 자들을 강단에 세우는 짓, 부디 정신 차리고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자식들 그렇게 가르치면,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인권 선진국에 가서 증오 범죄자로 몰리게 됩니다.

종교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그것은 우리와 다른 이들을 증오할 자유가 아닙니다.  부디 정신 차리십시오.

The Way to Life and Death

오래 전 어느 범 교단 목회자 모임에서 전한 이야기입니다.  최근 이 글을 포함하여 책을 내겠다고 알려와 다시 살펴보고 나눕니다.  ( 책으로 펴낸다 하니 퍼가기는 하지 마세요. )

삶과 죽음의 길: 예수가 이긴 세 가지 유혹
(마태복음 4: 1-11)

 전제들
 
 예수가 경험한 유혹을 기록하고 있는 이 성서 본문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본문 중의 하나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공관 복음서 중에서 마태와 누가의 기록은 예수가 세례를 받고 하늘의 인증을 받았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마 3: 13-17; 눅 3: 21-22) 반면 마가복음은 1장 12-13절에서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머물렀다는 것과 사탄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을 두 절로 요약하여 간단히 밝히고 있다.

 마태복음과 병행기사로 볼 수 있는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거의 동일한 내용을 보고하고 있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의 순위가 바뀌어 있다. 광야에서 성전마루로 그리고 온 천하를 바라보는 지점으로 그 시험의 장소가 점점 넓어진다. 누가는 아마도 하나님의 성전이 세상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지점보다 더 높은 자리라 여긴 듯하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동일하게 예수가 (마귀, 혹은 사탄, 혹은) 유혹자에 의하여 세 가지 시험을 받았으며 이를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쳤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자의 시험인 동시에 성령에 의한 연단과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광야에서의 40주야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헤맨 40년(민수기 14장),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머문 기간 (출애굽기  34장), 엘리야의 고된 호렙산 여정 40일(열왕기 상 19장)과 같이 시련의 기간으로 상징되고 있다.

 예수가 겪은 유혹은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라는 칭호는 묵시문학적 메시아 칭호이기도(마 24; 눅 4; 요 20: 31; 롬 1, 3-4) 하지만 성서에서 사용되는 가장 폭넓은 의미는 그리스도인 혹은 하나님의 사람을 의미한다(마 5: 9; 6: 9). 따라서 성서기자는 예수의 시험을 통해 인간이 겪는 보편적인 유혹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본다. 인간의 삶은 간헐적으로 유혹자의 시험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본문은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마태는 예수를 유혹했던 유혹자가 예수 곁을 떠나갔다고 증언하지만 누가는 일시적으로 떠났다고 함으로써 예수의 생애에 다가올 또 다른 유혹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눅 4: 13).

 이 성서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많은 경우 사실적 진술로 이해하는 성서주의적 입장은 이 본문이 담고 있는 시간이동, 장소이동, 그리고 환상적 비전을 모두 사실화하는 무리수를 두게 된다. 예컨대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요구를 마술적 가능성의 요구로 이해할 수도 있다. 또한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는 순간 이동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시험에서도 마귀는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올라가 세상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언급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실 그 어느 곳에서도 세상 모든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마련해 주는 정점은 없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이 본문이 인간의 삶에 다가오는 유혹의 양태를 상징하는 의미를 찾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 따라서 나는 이 본문을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성서 기자의 창작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선호한다. 동시에 사탄 혹은 마귀, 혹은 유혹자로 상징되는 유혹의 주체를 객체화하는 데에는 신학적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죽음을 인격화하고 존재(存在)화하여 죽음의 사자라 타자화하여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사탄의 유혹은 사탄이라는 신화적 존재의 유혹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주체에서 일어나는 유혹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심오한 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는 흉측한 마귀의 형상을 보았다는 진술이 간혹 있지만 이런 이해는 문화적으로 덧입혀진 것으로서 종교 심리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사탄의 존재를 객체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모든 인간은 각자의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든지 아니면 사탄의 다중적 무소부재(無所不在)론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이 성서 본문의 비신화화는 본문을 오해하기 쉬운 유혹에서 벗어나는 매우 중요한 전제가 된다. 이 성서 본문은 신화적 현실이라는 모순을 담은 사실적 이야기가 아니라 특정한 삶의 현실을 드러내는 의미를 담고 있는 스토리로 보아야 한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이 본문을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에서 언급하고 있다. 예수가 광야에서 경험한 유혹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 3: 17)라는 예수에 대한 하늘의 인증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일어난 사건이다. 우리는 하늘의 인증 이후에 이어지는 예수의 유혹에 관한 성서의 증언을 읽으며 예수는 하늘의 인증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왜 그는 성령에 이끌려 40일 동안 광야에 나가 금식하며 머물렀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하늘의 인증을 받은 그가 왜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았을까? 라는 물음을 가질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 하늘의 인증을 받는 것 그것이 예수의 삶의 종료, 혹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깊은 종교체험에서 경험되는 순수한 영성적 차원과 영성적 관심에서 거리가 있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이처럼 이중적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현실과 세상 나라 현실 사이에 벌어진 틈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와 악의 현실이 겹쳐지고 있는 세상 나라로 이해하였다. 우리의 깊은 종교 체험은 얼핏 얼핏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맛보기, 혹은 순간적인 바라봄(erlebte Augenblicken)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간혹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충분하고 온전하지 않다. 바울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희미한 것이다(고전 13: 12). 따라서 여기와 그곳, 지금과 그 때, 세상과 하나님 나라라는 이중성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경험할 수밖에 없는 신앙의 지평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의 시간을 가지고 유혹자의 시험을 받은 것에 대하여 마태복음 기자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건임을 암시한다. 육체적으로 본다면 40주야의 금식은 인간이 지난 육체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된 고행의 시간이다. 영적인 측면에서는 영혼의 깊은 밤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친밀성의 시간이다. 육체적 한계와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은 교제 한 가운데에서 유혹자의 유혹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 이런 순간에서, 예수의 영성이 시험을 받은 것이다. 예수를 향한 유혹자의 시험의 성격은 예수의 인간성에 근거한 것이다.  

  이 시험은 예수의 인간성의 약함을 영성적 능력으로 해소해 보라는 요구였다. 그리고 유혹자는 단서를 달았다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증을 받았던 예수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명하게 입증하라는 요구다. 육체적인 배고픔의 해소, 하나님의 사랑의 입증, 온 세상의 권세를 상속하라는 요구다. 이 요구는 명료하게 인간성의 한계와 결핍을 파고드는 시험이다. 생존을 위협하는 배고픔도 결핍이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명료하게 입증할 수 없는 신앙조차도 일종의 결핍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획득하지 않은 상태도 결핍이다. 그런데 유혹자가 수단으로 삼은 이 결핍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상태를 파고드는 유혹이다. 배고픔과 불안과 억압의 구조 속에서 해방 받지 못한 우리 존재의 현실을 파고드는 유혹인 것이다. 유혹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성적 능력을 이 인간성의 결핍을 선명하게 극복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배고픔을 해소하고, 안전을 보장받고, 세상의 권세를 누리라는 것이다. 왜 이러한 요구가 유혹일까? 이런 것이 유혹이라면 오늘의 한국 교회는 유혹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약속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닌가? 여기에 이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유혹자의 유혹은 하나님과의 영성적 교제의 빈틈을 타고 찾아온다. 영성적 삶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확신을 우리의 일상에서 확인하는 것이 과연 영성적 삶과 병행하고 있는 굶주림의 해소,  하나님 사랑의 실증적 확증, 그리고 세상의 지배력의 소유와 같은 성격일까? 만일 이 본문의 저자가 이러한 성격에 동의했다면 예수는 매우 현실적이고도 놀라운 마술을 부리는 예수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본문의 저자의 신학적 윤리사상은 이러한 요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간이 지닌 결핍은 유혹의 조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 신앙의 깊이, 곧 영성의 깊이를 드러내는 기회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이 본문이 존재하는 이유다.

 첫째 유혹: 빵만의 죽음

  첫째 유혹은 결핍, 모자람을 지닌 인간성을 이용한 유혹이다.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의 취약성, 결핍에 대한 인식을 파고들어서 유혹자는 예수에게 돌을 들어 빵을 만들어 먹으라고 요구한다. 신적 능력을 행사하는,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라는 유혹은 에덴동산의 뱀의 유혹과 유사하다.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동산에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열매 앞에 서있는 이브를 향하여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창 3: 5)이라고 유혹했다.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유혹자는 굶주린 예수에게 배부름의 만족을 취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결핍을 자극하고 욕망을 불러내어, 그것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존재 증명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한 것이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면 우리의 삶에서는 이러한 결핍이 기적처럼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유혹, 완전할 수 없는 삶에서 완전한 것을 요구하는 유혹, 선명하지 않은 삶에서 선명성을 실증하라는 유혹이다. 불완전한 우리의 삶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라는 요구다. 영성을 통해 번영과 성공을 이루라는 번영 신학인 셈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결핍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영성적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장애가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여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똑같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그것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즐거운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이든,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의로운 사람들은 더도 덜도 아니게, 다시 말해 하나를 다른 것과 똑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수가 유혹자의 시험을 이긴 것은 바로 이러한 동일성의 신학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하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을 믿었던 것과 같다. 이런 전통은 세계내적 신비주의 신앙을 전승했던 켈트 신비주의자들이나 알버트 슈바이처의 “아래로의“ 신학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다.

  놀랍게도 예수는 유혹자가 보는 결핍만을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다른 결핍, 즉 영적인 결핍을 더 큰 위기로 생각한다. 예수는 빵만의 삶은 하나님 말씀의 결핍이고 따라서 빵만의 죽음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도로테 죌레도 빵만의 삶이 아니라 빵만의 죽음을 설교했다. 빵만의 삶은 곧 빵만의 죽음인 것이다. 생존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영성적 의미가 없는 삶은 곧 우리에게 있어서 “의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육체적 삶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적 능력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통한 자유와 정의와 사랑의 지평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이며, 이런 지평이 결여된 빵만의 삶을 살라는 유혹자의 요구는 인간다운 의미의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결핍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혹자가 보는 인간성의 취약성에서 나오는 배고픔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결핍도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결핍이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인간의 삶에서 진보를 불러온 모든 계기를 결핍이라고 보았다. 무엇인가 “아직 아닌 것으로(noch nicht)” 결핍되어 있다는 인식은 곧 그것의 충만함을 그리워하는 희망의 동인(動因)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핍은 희망의 자리가 될 수도 있다. 이 희망의 지평은 의미의 지평을 연다. 우리가 존재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보가 싹트고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낮 꿈이 꿈꾸어지는 것이다.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지평의 끝에 하나님 나라가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은 역사적 과정을 지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영성은 이러한 영성적 지평의 결핍을 결핍이라 보는 것이지 빵의 결핍을 결핍이라고 보지 않았던 셈이다. 역사는 실로 배고픔의 극복과정이며,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세상을 향한 것이고, 인간의 지배를 넘어선 하나님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향한 과정이다. 그런데 유혹자는 이 과정을 생략하는 마술을 부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는 마술적 능력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헛된 희망을 가지라는 요구다. 역사와 종말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이렇듯 유혹자는 역사적 과정과 종말의 거리를 제거한다. 기다림과 역사적 순화의 과정 없는 성취, 그것이 사탄의 유혹의 본질이다. 결핍은 희망의 동인일 경우 신앙인의 현실적 삶에 의미를 낳는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생존이 인간됨의 의미가 아니라 생존의 의미를 가지야 인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빵만의 삶은 이미 죽은 것이다. 유혹자는 이런 삶으로 예수를 불러들이려 했다. 예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의 의미 없는 생존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둘째 유혹: 안전만의 죽음

  둘째 유혹은 믿음의 보상으로서 안전을 요구하는 유혹이다. 유혹자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한다.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하나님의 아들의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이 장면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해 조롱했던 무리들의 요구와 흡사하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마 27) 예수를 향하여 ‘그대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대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는 요구와 이 본문에 담긴 유혹자의 유혹의 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이 본문은 또한 2007년 한 교회의 선교단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 한 가운데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던 이들의 모습을 클로즈업 시키는 본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신앙고백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아우슈비츠의 경험과 동남아시아의 쓰나미, 세계 1, 2차 대전이 일어난 이 병든 세계에서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겉으로는 멋진 신앙과도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 신앙과 상관없는 우리 인간의 기대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신앙 고백과는 달리 23명 중 2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무모한 믿음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런 너의 믿음을 실증하라는 유혹자의 태도는 마치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deus absconditus) 이 땅과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 사이의 거리를 부정하라는 것과 같다. 죄와 악이 교차하는 역사를 살아가는 인간과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하게 지배하는 천상의 삶을 동일시하라는 요구다. 숨어계신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가 해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을 우리가 깨고 우리가 하나님을 소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주술로 불어 내고 조정하는 자가 되겠다는 이교적 오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안전에 대한 욕망은 우리의 모든 욕망을 자극한다. 소유, 권력, 그리고 관계의 안전은 곧 우리 삶의 안전과 밀접하게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는 언젠가에는 죽음조차 홀로 맞아야 하는 존재다. 위험한 세계를 안전한 세계로 만드는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단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죽음조차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맞아야 한다. 안전한 세계,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가는 이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어질 것이라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이런 지평을 신앙의 한 축으로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안전에 하나님 신앙을 걸어두면 안전하지 못한 우리의 삶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될 수도 있다. 유혹자는 이 점을 들어 안전을 보장하는 하나님 신앙을 실증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의 삶은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공중의 새보다, 들판의 짐승들이 누리는 안전을 부러워하기도 했다(마 8: 20; 눅 9: 58). 예수는 헤르몬 산의 영광에 만족하며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라며 머물기를 소원하는 제자들의 청원도 물리치고 문제가 많은 세상 속으로 하산한다. 예수에게는 소명을 잊은 안전만의 삶은 죽은 것이었다. 안전은 좋은 것이나 안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빵만의 죽음이 있다면 안전만의 죽음도 있다. 빵만의 죽음이 의미 없는 삶을 뜻한다면, 삶의 의미 없는 안전만의 삶도 죽은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전 꼭대기에 서서 ‘내가 위험한 지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안전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오만 그 자체를 예수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불신앙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예수는 안전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신을 안전하지 않은 자리, 곧 십자가에 내 놓았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릴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렇듯 예수가 보여준 신앙의 길은 안전보장의 길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신앙의 길, 그것은 예수가 말씀하신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다.

  아마도 자본주의적인 남한 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안락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매사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하심을 간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억압 통치 속에서 생존과 희망을 보장받지 못한 채 신음하는 북한 주민들이 있다. 아프리카에는 열악한 위생시절과 영양실조로 인하여 죽어가는 무수한 아이들이 있다. 안전의 요구가 신앙의 본질이 라면 북한과 아프리카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증명이 불가능한 것이 된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우리의 욕구는 참된 하나님 신앙의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유혹은 더욱 클 것이지만, 북한과 같은 동토(凍土)의 땅에서는 안전은 신앙의 조건이나 증거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일본의 문학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1966)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의 현실에서도 침묵하는 하나님을 만난 인간의 고뇌를 다루고 있다. 슈사쿠는 이 소설에서 우리 삶의 현실은 하나님이 무섭도록 침묵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그려주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서 슈샤쿠는 인간의 생명을 지키는 편에 서는 것이 배교로 개념화한 신앙보다 낫다고 말하는 예수를 고백한다. 그는 배교로 개념화된 성화판을 밟아도 좋다고 말하는 예수를 본다. 자기를 밟으라는 예수를 만난 것이다. 슈사쿠는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버리는 예수를 보았다. 유혹자가 선택한 안전의 욕망은 스스로를 버리는 예수를 유혹할 수 없었다.

  셋째 유혹: 권력만의 죽음

  유혹자는 예수를 온 천하를 바라 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지배와 소유 권력의 유혹이다. 예수의 생애에서 권력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성서적 진술은 여러 곳에 있다. 소유와 지배 권력에 대한 욕망은 예수 주변의 사람에게도 있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가 큰 권세를 잡을 것이라 짐작하고 제자 중에 누가 큰 자인지 다투기도 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에게 찾아와 자기 아들 형제를 예수의 우편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원을 할 정도였다(마 20).

  그러나 예수는 권력의 욕망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권력만의 죽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소유만의 죽음, 권력만의 죽음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었다. 예수는 땅의 부요함의 어리석음을 간파했고, 권력을 가진 헤롯을 여우로 비유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의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 25-28).

  이  유혹은 예수의 삶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만들려는 유혹이었다. “인자가 이 땅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는 그의 소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그늘 아래에서 생의 의지를 견고하게 하여 초인적 삶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권력의지를 주장했던 니체는 현실 정치에 이용당해 나치의 권력의지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오용되었다. 권력의지는 자기 강화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와 정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권력의지가 아니라 생명을 돌보고 섬기는 희생의 길에서 더 강한 생의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의 역사 속에서 종교권력은 언제나 세속권력과 거룩하지 못한 연대를 이루어 지배 권력에 편승해 왔다. 어쩌면 오늘의 종교는 유혹자의 종교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는 명료하게 말한다. 사람이 예배할 분은 창조주 하나님 한분이시다 라는 선언이다. 초기 퀘이커 신앙을 가졌던 윌리암 펜(William Penn)은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그의 주님이시므로 오직 그에게만 복종할 것을 약속했다. 따라서 세상의 권세를 잡은 영국 국왕을 향하여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하여 그가 국왕을 모욕했다는 죄로 런던탑에 갇혔을 때 그는 (1682) 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 6장에서 오만이란 과도한 자기 영광과 영예를 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권력을 향한 유혹은 오만한 자가 걸려 넘어지는 유혹이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섬김의 길은 오만의 길이 아니라 겸비의 길이라 말하신다. 

  유혹자는 예수의 길과는 다른 탐욕과 권력을 향한 욕망을 자극했다. 탐욕과 권력의 유혹에 빠지면 우리는 경배의 대상을 하나님에서 유혹자로 바꾸게 된다. 결국 유혹자를 향해 엎드리는 길은 하나님 신앙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길을 가는 이는 신앙의 대가가 소유와 권세의 강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다. 하지만 예수는 탐욕의 윤리나 지배 윤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겸비의 길에서 하나님을 향한 복종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희생의 길을 가르치셨다. 예수는 탐욕과 권력의 유혹을 하나님 신앙에서 찾은 겸비와 희생의 영성으로 이기신 것이다.

  맺는 말
 
 예수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 40일간의 시험 기간을 거쳤고, 이 시험에서 승리함으로써 공생애의 길로 나가셨다. 그는 유혹자의 유혹에서 빵만의 만족에 담겨있는 빵만의 죽음, 안전만을 요구하는 삶 속에 담긴 안전만의 죽음, 그리고 지배 권력의 소유 이면에 묻어있는 권력만의 죽음을 이긴 것이다. 유혹자는 예수에게 하나님 신앙의 영성에서의 이탈과 배반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는 유혹자의 유혹에 담긴 불신앙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는 영성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영성은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 면면히 흘러 전승되어 오던  죽음의 유혹에 단호히 저항하는 영성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류 기독교는 어거스틴 이후 도덕폐기론에 오염되면서 빵의 유혹, 안전의 유혹, 권력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는 종교로 전락했다. 에른스트 트뢸취의 분석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는 대중을 얻기 위하여 세속적 가치들을 교회 안으로 수용해 들이는 타협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처방으로 타세계적 구원의 은총론을 강화했다. 소유와 안전과 권력을 향한 의지만의 죽음, 곧 죄스러운 삶은 내세의 구원 약속으로 처방을 받아 온 셈이다. 이 문제는 비록 복음이라는 명제로 포장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삶에서의 영성적 투쟁을 약화시킨 것으로서 비판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경험한 유혹자의 시험은 곧 사람으로서의 인간이 겪는 시험이며, 오늘의 그리스도인도 예외일 수 없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성서적 메시지가 교회의 가르침과 교리로 인하여 약화되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일상에 다가오는 유혹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는 데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빵만의 삶은 의미의 죽음을 의미하고, 실증적이며 효용론적 신앙이 요구하는 안전장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거래로 전도시켜 불신앙에 빠지게 만든다. 그리고 소유와 지배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예수의 겸비와 자기희생의 길과는 정 반대의 방향을 향하게 한다.

  우리가 오늘날 일상의 광야에서, 성전에서, 그리고 소유와 권력으로 유혹하는 세상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예수의 길을 따라 사는 (imitatio christi)의 것을 의미하며, 이 길은 예수를 닮은 영성적 분별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다. 광야의 시험에서 승리한 예수의 공생애는 잠자는 신앙을 가진 이들을 향하여 “회개하라!”(마 4: 17)는 외침으로 시작되었다. 500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도, 그의 종교 개혁 명제 95개 항목의 시작도 “회개하라“는 재촉에서 시작되었다. 빵만의 죽음, 안전만의 죽음, 권력만의 죽음의 그늘 아래 있는 우리를 향하여 오늘도 주님은 명하신다: ”회개하라!!”

Friday, June 28, 2019

『종교 없는 삶, Living the Secular Life』,

<본질과 현상, 2018년 겨울호>
 
박충구의 책읽기 (4)
필 주커먼, 종교 없는 삶, Living the Secular Life, 박윤정 역(판미동, 2018). 18,000)
 
저자 필 주커먼(Pill Zuckerman)은 미국 캘리포니아 클래어몬트 피쳐 칼리지(Pitzer College) 종교사회학 교수다. 그는 현대 사회에서 급증하고 있는 무종교성을 학문적 연구 주제로 삼아 다양한 저서를 냈다. 신없는 사회, Society without God, 2008, 믿음은 더 이상 필요 없다, Faith No More, 2011, 비신앙인, The Unreligious, 2016등이 최근 저작들이다. 그가 2014년 출판한 종교 없는 삶이 올해 우리말로 번역되었기에 소개한다. 그는 세속성에 대한 연구 분야 학과를 세계 최초로 개설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서구 기독교 세계 인구 중 근 95%가 종교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상당한 수의 신앙인들이 종교로부터 벗어나 비종교인 혹은 무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주커먼은 참된 인간상과 인간의 도덕성을 담보해주던 종교 없이 어떻게 무종교인들이 인간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하여 그 현상을 집중 분석하고 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대인은 종교에 대한 신뢰를 가지기 어렵게 되어 이전에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종교 없이 살아가는 길을 선호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종교 없이 산다는 것은 일면 신이 인간을 더 이상 감시하거나 혹은 신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인간을 위협할 힘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 편에서 본다면 하나님 상실의 시대다.

서구사회와 유사하게 우리 사회에서도 제도적 종교를 떠난 비종교인 수가 급증하고 있다. 이런 양상은 2015년 통계에서 종교가 없다고 답한 이들이 무려 전체 인구의 56.1%에 이르고, 지난 10년 동안 종교인구의 약 9%, 300만 명 정도 감소한 사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매년 전체 종교 인구의 약 1%씩 줄어들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시제에 종교없는 삶은 우리에게 현대인의 비종교화 현상에 대한 매우 탁월한 분석적 이해를 제시해 주고 있다.
 
종교없는 삶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사람이 종교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담겨있다. 전통적으로 종교를 가지고 살던 이들이 종교를 떠나기로 작정할 때에는 종교 없이 사는 것이 종교를 가지고 사는 것보다 낫다라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종교를 가지고 사는 이들은 종교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향하여 염려스러워하면서 종교 없이 과연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묻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상호 주고 받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하여 종교 없이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 종교를 가진 이들이 염려하는 여러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종교는 삶의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도덕적이며 영적인 지침을 마련해 주었다. 종교에 익숙한 이들은 종교 없는 삶이란 삶의 무수한 문제에 대하여 정답을 가지지 않고 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종교가 없다면 종교가 제시해 주던 도덕성의 근거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종교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다가 그 공동체를 떠나면 그와 같은 좋은 공동체나 사회 없이 사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없다면 자녀들의 영성교육은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가 없다면 죽음이나 고난에 직면할 경우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등등 무수한 질문을 제기하게 된다. 이런 질문에 답하면서 저자는 이 책의 부제를 낡은 질문에 대한 새 답변(New Answers to Old Questions)”이라고 달았다. 그는 이 책에서 종교를 떠난 사람을 비종교인, 혹은 무종교인, 혹은 세속적인 사람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오늘의 세계는 종교적인 사람이 더욱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신화가 깨진 세계라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종교를 가진 정치가들이 더욱 포악하고, 부정직하다는 사실, 그리고 종교성이 깊다고 여겨진 사회에서 폭넓게 일어나는 다양한 범죄가 종교인의 도덕적 우월성의 근거가 박약하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2) 이런 경험적 사실들에 더하여 사람들의 마음에서 종교를 떠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무종교화의 요인
이 책의 1장에서 3장까지 주커먼은 급격한 비종교 혹은 무종교화 현상을 분석하고 있다. 그는 무종교화를 불러온 요인들을 크게 보아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나누어 분석했다. 우선 그는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적 우파 편에 섬으로써 좌파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을 소외시킨 데에서 그 첫 번째 원인을 찾았다.(3) 기독교와 보수적인 정권과의 노골적 합작”(124)이 기독교 인구의 상당수를 실망하게 만들고 종교에 대하여 외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두 번 째 무종교화의 원인은 종교인의 도덕적 실패다. 특히 주커먼은 성직자의 성적 범죄의 만연함과 그것의 은폐 문화를 지적했다. 감추어졌던 성직자의 성적 일탈과 범죄적 행각이 드러나면서 종교의 도덕적 허구성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동부에서 광범위한 가톨릭 성직자들의 소아 성애적 범죄가 드러나면서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교구의 1/4이상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로 제시되었다. 주커먼은 무종교화의 세 번 째 요인을 여성의 사회화로 들었는데 이는 주된 종교 활동 참여자인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종교적 관심과 헌신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주커먼은 사람들을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두 가지 문화적 요인을 더 들었다. 그것은 종교인들의 성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비난 그리고 인터넷 영향력의 확산이다. 서구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비판이 한동안 확산되다가 그 강도가 많이 누그러진 데에는 많은 이들이 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옳다는 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이와 레즈비언에 대하여 악착같이 비방하는 이들은 그들의 전투적 거부의 이유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에서 얻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수적 기독교인은 종교를 앞세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부정하는 사람들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신념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훼방하고 인간이 인간을 혐오하는 문화를 생산한다면 그러한 종교는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127쪽 이하)

이에 더하여 인터넷은 무수한 종교인들에게 자기 종교 전통에 대하여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인터넷은 종교의 편협성을 드러내고 맹목적 신앙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인터넷은 개인이 종교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를 접할 수 있게 하여 개인의 종교적 회의나 의심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돕고 그와 유사한 생각을 가진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해줌으로써 맹목적인 신앙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은 현대인에게 다양한 관심을 촉발시켜 특정한 종교에 관심을 온통 뺏기도록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이 종교인들에게 종교에 대한 확신보다 불신이나 의심을 가지게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성세대보다 젊은 세대가 이런 무종교적 영향을 더 크게 받고 있는 셈이다.
 
종교 없는 생활
이 책 4장부터는 7장까지 저자는 종교를 가진 이들의 세계에서 종교 없이 사는 삶에 대하여 다양한 자녀교육 문제, 공동체적 관계, 삶의 위기극복과제, 그리고 죽음을 직면하는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저자는 많은 이들을 인터뷰하여 종교를 가진 이들의 삶에 비하여 종교가 없는 이의 삶이 보다 정직하며, 초월적 개입을 기다리지 않는 인간적인 삶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위안과 사랑의 샘과 같은 종교의 역할과 기능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종교를 가진 이들의 삶에 흔히 담겨있는 허구적 기대와 삶에 대한 미신적 해석의 부작용이 무종교인에게는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무종교인은 종교에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종교에 의존하지 않는 인본주의적 삶을 선호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종교를 가진 이의 입장에서 보면 무종교적 삶은 인간의 유한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초월적 구원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이다. 이들은 죽음 너머를 주제넘게 엿보려 하지 않고 인간의 유한성을 수납하며 자연주의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애적인 불가지론자인 셈이다.

주커만은 다양한 사례를 들어 종교인들이 종교를 통해 신의 창조와 섭리에 대하여 경외를 느끼듯이 무종교적인 사람들은 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삶에 대하여 경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연유에서 그는 진지한 무종교적인 사람을 경외주의자(Aweist)라고 부른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해서 이 세상이 덜 경이롭고 덜 싱그럽고 덜 신비롭고 덜 놀랍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자유롭게 생각하는 무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미학적인 영감과 신비함을 향한 경이, 줄어들지 않는 감사의 마음, 실존적인 기쁨, 타인과 자연 및 불가사의한 것과의 깊은 유대감 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302)라고 평가하고 이런 종교 없는 사람들은 신앙보다는 이성을, 기도보다는 행동을, 납득할 수 없는 확신보다는 실존의 모호성을, 권위에 대한 복종보다는 생각의 자유를, 초자연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인 것을, 신보다는 인류에 대한 희망을 더욱 가치 있게 여긴다”(380)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이 사실상 종교를 가진 이들보다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오는 말
탈종교적이라는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세속화”(secularization)라는 주제는 디트리히 본훼퍼(Dietrich Bonhöffer)의 옥중서간에 나타난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라는 삶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되었고, 하비 콕스(Harvey Cox)세속도시, The Secular City, 1965는초월성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요구했었다. 그 후 50년 만에 주커먼의 종교 없는 삶에서 믿을 수 없는 종교에서 벗어난 무종교적인 세속적 삶에 대한 이론으로 논의되고 있는 셈이다.

주커만이 본 무종교화된 현대 세계는 사람들이 종교 없이 삶을 살고 종교 없이 죽음을 맞는 사회를 향하여 가고 있다. 사람들이 종교 없이 살다가 죽어가는 세계는 종교적인 삶과는 상당부분 다르다. 예컨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해에서도 매우 다르다. 미국에서 의사조력 자살을 최초로 허용한 주는 오리건 주인데 오리건 주는 미국에서 가장 무종교적인 성향이 깊은 지역이다. 오리건 주를 따라 캘리포니아 주, 하와이 주, 워싱톤 주, 버몬트 주, 워싱톤 디시에서도 말기 환자가 스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는 선택권을 결정했다. 종교 없이 죽는 이들이 점증하는 이런 현상은 가장 기독교적이라고 여기던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 배후에는 무종교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324쪽 이하) 반면 다분히 종교적인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남부에서는 이런 경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것도 종교적인 이유에서이다.

죽음에 대한 종교적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유럽에서는 약 50%를 상회한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종교가 주장한 내용에 대하여 신뢰를 보내지 않는 것이다. 무종교적 성향이 증가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종교의 윤리적 가르침과 초월적 유산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종교가 지닌 전체주의적 속성, 획일성 속에 내재된 폭력성을 경험하면서 많은 이들이 종교에서 이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 주커먼은 이렇게 무종교화된 이들은 대부분 종교적 폭력에 대해서는 비판하지만 종교의 사회적 순기능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수긍하는 편에 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록 자신들은 그런 혜택을 거부하지만 종교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인간의 유한성이 불러오는 불안을 해소하는 기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맹목적인 종교인,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손상시키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깊이 내장하고 있다.



이 책이 가진 독특한 성격은 기독교 세계 속에서 무종교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해라는 점에서 장점과 한계를 뚜렷이 가지고 있다. 서구의 무종교화 현상을 깊이 조명해 주는 장점이 있지만, 아시아 다종교 문화권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경험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과연 종교적 초월성을 거부하고 이성적으로 납득가능한 삶에 제약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나 이 책에 담겨있는 종교 비판적 시각들은 한국 종교, 특히 한국 기독교의 감추어진 실상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 오늘의 한국 종교가 이 책이 지적하고 있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더욱 건강해 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신앙인이나 비신앙인 누구든지 진지하게 일독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