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ugust 20, 2013

기독교 사상 기고문

한 반도에서 의로운 전쟁(just war)은 가능한가?
 
 
지난 412일자 뉴욕 타임스지에 미국 텍사스 대학 교수인 제레미 슈리(Jeremy Suri)는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방관할 것이 아니라 북한이 미사일을 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는 논지의 글을 실었다. 그는 이 글에서 북한의 더 큰 위협이 있기 전에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와 무고한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그 위험의 소지를 제거하는 것은 정당한 방어 개념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 이면에는 북한을 하나의 희생양으로 잡아 이란과 같은 약소국가들이 핵을 수단으로 한 도발적 행위를 벌릴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하는 선을 긋는다는 전략도 담겨있다.
 
이런 주장은 남북 정권이 벌이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긴장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화된 시점에 나온 것이다. 북한은 핵폭탄 실험에 성공한 듯 마치 서울을 비롯하여 미국령인 괌, 미국 서부와 일본 전역까지 핵미사일 사정거리에 들어와 있다고 선언하며 온갖 위협적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북한은 모든 대화의 채널을 닫았고, 남북의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던 유일한 장소인 개성공단도 폐쇄했다. 남한의 국방장관은 만의 하나 북한이 남한의 노동자들을 억류하면 구출작전이라도 벌리겠다고 호언했다. 이어 박근혜 대통령은 개성공단에 잔류하고 있었던 남측 관리직원들의 귀환을 선언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남북화해 무드에 대하여 혹평을 서슴치 않았던 반대파들이 정권을 잡은 후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북한과의 갈등을 심화시켜 왔다. 북한을 지원한 돈을 퍼주기로 규정하고 비난해 오던 정권들이 금강산 관광을 위하여 투자했던 모든 것을 북한에 빼앗기더니 이제는 1조원이 넘는 개성공단 마저 비워주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정황을 연출하고 있다. 그 책임이 북한 당국에 있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경색 정국을 불러온 남한 당국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 이런 갈등 속에서 남북의 대립이 극한에 도달하여 전쟁이 일어나도 이젠 피할 수 없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갈등이 고조되면 전쟁이라도 치러 북한이라는 악을 제거하는 것은 정당성이 있다는 주장은 미국 우파 지식인뿐 아니라 남한 사회의 우파 지식인들도 주장해 온 것이다. 심지어 보수 기독교 지도자들의 주장에서도 이런 주장들이 섞여 나오고 있다.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한 정당인은 이웃집 깡패가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위협하는 데 우리는 지금 돌맹이를 들고 맞서려 하고 있다. 우리도 기관총을 구입해야 한다.“며 남한 정부의 핵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과연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혹은 공직자로서 소리 높여 주장할 소리인가? 기독교인의 정치적 행위와 그가 가진 신앙은 과연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정치윤리의 유산
지난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취해 온 정치 윤리적 유산은 세 가지 전통이 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려왔던 십자군 전쟁(crusade) 논리고, 둘째는 현실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로운 폭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로운 전쟁(just war)이론, 그리고 예수의 산상수훈의 요지를 담고 있는 기독교 평화주의(pacifism) 유산이다. 지난 역사 속에서 이 이론들은 시대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양심을 나름대로 표현하는 사회윤리 의식을 반영해 왔다.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이념은 구약성서에서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해 가던 시절에 가장 빈번히 사용했던 이념이다. 십자군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못 미치는 속된 것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다는 종교적 동기에 의하여 촉발되는 전쟁으로서 매우 잔인하고 포악한 전쟁이었다. 상대가 된 적은 인간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로 취급된다. 따라서 십자군 전쟁이념에는 하나님은 거룩하시지만 하나님의 원수는 속된 것이며 이질적인 것이므로 그 존재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를 부수했다.
 
십자군 전쟁 이념은 정치와 종교가 거룩하지 못한 연대를 나누는 과정에 형성된 것이다. 이 이념은 어거스틴 이후 이단자들을 처단하는 논거가 되기도 했고, 11세기 이후 근 삼백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 이념을 후원하기도 했으며, 제네바의 실권자 칼빈이 적대자들을 처단하는 논거가 되기도 했고, 청교도들의 마녀사냥과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처단하는 논거가 되기도 했다. 십자군 정신은 상대편의 인간다움을 부정하고 악마화하는 데에서 인간의 폭력성을 증폭시켰다. 적의 편은 하나님의 원수로 각인되어 남녀노소 어린아이도 모두 살육을 당했고 심지어 우양의 새끼까지도 화를 당하는 잔인한 살육의 제의를 불러왔다.
 
십자군 전쟁이념은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종교와 정치가 야합하며 벌렸던 종교의 야만성의 표현이었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상대편을 하나님의 원수로 규정하고 기독교적 사랑과 연민의 대상에서 삭제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이념은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직간접적으로 후원을 받았다.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은 각기 하나님이 편을 들어주시는 의로운 전쟁이라고 주장하는 아전인수의 논리들이 형성되기도 했다. 성직자들이 보편적인 하나님의 정의보다 정치적, 종족적, 국가적 이해관계에 기독교 신앙을 종속시킨 결과였다.
-의로운 전쟁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번성기에 로마 제국 안에서 뿌리를 내린 종교다. 서구 사회에서 문명사적 축을 형성했던 그리스 반도의 도시국가들의 전쟁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는 호머의 글이나 타키투스의 저작들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의 전쟁의 잔학상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상대편의 남자들을 몰살시키고 여성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삼곤 했다. 이런 전쟁문화를 기독교적으로 승화시킨 논리가 바로 정당전쟁 이론이다. 로마제국 안에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던 기독교는 정당전쟁이론을 승인함으로써 제국안에서 제국의 종교로서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암브로우스와 어거스틴에서 싹이 튼 정당전쟁론은 아퀴나스에게 와서 하나의 이론적 체계를 갖추어 기독교 세계의 사회원리로 적용되었다. 정당전쟁론의 요지는 인간의 죄성이 갈등과 불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런 죄의 힘을 억죄일 수 있는 방책으로서 폭력을 동원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치른다하여도 기독교적인 사랑의 관점에서 교회는 전쟁을 승인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정의로운 전쟁의 구성요건에서 어느 한 항목이라고 정의롭지 못하면 교회는 이를 정당한 전쟁이라고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한 전쟁은 그 원인이 상대편의 악에 기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즉 공격적인 행위가 아니고 방어적이어야 하며, 하급자가 발리는 저항이 아니라 사회의 최고 명령권자가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성적이며 외교적인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도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을 불가피하게 해결하기 위하여 선택하는 마지막 수단일 때 그 전쟁은 의롭다. 동시에 의로운 전쟁은 반드시 악을 징벌하고 선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악이 더 강해지기 때문에 질 전쟁은 의로운 전쟁이 될 수 없다.
의로운 전쟁을 수행할 때는 비율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상대편의 악보다 더 큰 악을 사용하되 상대적으로 적은 비율의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편의 악보다 무한히 큰 악을 사용하는 것은 정의로운 전쟁이 아니다. 그리고 전쟁수행 과정에서 차별의 원칙, 즉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을 구별하여 살상의 대상을 전투요원으로 한정해야 한다.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는 행위는 결코 의로운 전쟁이 될 수 없다. 이렇듯 의로운 전쟁의 일곱 가지 요건 이면에는 기독교적 가치가 내재 되어 있다.
 
기독교적인 의로운 전쟁은 불가피하게 폭력적인 행위에 참여한다 할지라고 그것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차원이나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공인으로서 이웃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려는 사랑의 행위로서 대리적 성격을 가질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기방어가 아니라 이웃을 방어하는 행위에서 불가피하게 폭력성이 요구될 경우 이는 기독교인의 소명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런 논의를 루터도 수용했다. 그리고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악은 제거하되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주어야 한다는 논리는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죄와 인간을 구별하는 신학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의로운 전쟁이라는 개념은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 4세기 로마 제국의 황제들이 기독교인이 된 이후부터 적용되기 시작했고, 기독교 세계 안에서 모든 전쟁의 이면에서 신앙인의 양심을 지켜온 이념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의로운 전쟁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과 연합하면서 로마 제국의 평화를 기독교적인 평화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로마 제국의 야만성을 제거한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막강한 제국의 힘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제국만이 의로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논리적 귀결점을 낳았다. 정의로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던 편은 언제나 강자였기 때문이고, 이런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만이 정의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약자는 정의로운 전쟁을 벌일 수 없었다. 약자는 악을 징벌할 힘도, 승리의 확신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평화주의
기독교 평화주의 유산은 어거스틴 이후 주류 기독교 안에서 버림받았던 이론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십자군 전쟁이념이나 정당전쟁론에 비하여 더욱 성서적이며 그리스도론적이다. 왜냐하면 평화주의는 예수의 어록, 특히 산상수훈의 정신을 가장 깊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는 도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평화의 임금,혹은 평화의 주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산상수훈에서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복이 있다, 저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 울 것이다.”라고 약속하고 있다. 심지어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 고 하였다.
 
예수의 평화는 예수의 삶과 직결된다. 예수는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심지어 악에게 악한 방법으로 저항하는 것도 금했다. 예수는 지배자의 논리를 조장하거나 축복하지 않고 오히려 적은자의 윤리, 섬기는 자의 윤리를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로마의 지배세력과 유대의 종교 세력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다.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향하여 초대 교회는 평화의 주님이라 불렀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주권이 세상의 주권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이렇듯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아간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로마 정권에 의하여 수차례에 걸친 혹독한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산채로 원형경기장에 던져져 굶주린 사자나 짐승들에게 찢겨 죽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과 동일하게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죽음을 걸고 지켰던 초기 기독교 신자들의 평화주의 전통은 이렇듯 순교와 십자가의 신학으로 이어졌다. 이 전통을 이어가던 이들은 순교자 저스틴, 터툴리안, 클레멘트, 오리겐과 같은 신학자들에 의하여 전승되었다.
 
그러나 이 전통은 기독교가 로마에 의하여 국교화되면서 로마정권과 근친성을 나누던 주류 교회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약화되었다. 어거스틴의 경우 평화주의 전통을 기독교 성직자들의 삶 속에 적용하면서도 로마 사회의 신민들에게는 평화주의보다는 정의로운 전쟁론을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이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은 의로운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를 지나면서 의로운 전쟁이라는 논리 자체가 비성서적이라고 생각했던 재세례파 교도들에 의하여 다시 이어졌다. 그리고 18세기 영국에서 타락한 교회의 위선적인 성직자들의 슬하에서 벗어난 퀘이커 신앙운동에서도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이 더욱 성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수의 전통, 초대교회, 그리고 소종파적 신앙 속에서 이어지던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은 의로운 전쟁이란 것은 기독교적이거나 성서적인 주장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폭력으로부터 멀어져 평화스러운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 세상을 섬기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전통에서는 차라리 죽임을 당할지언정 죽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비폭력 평화주의적 원칙을 중시해 왔다. 내가 살기위하여 남을 죽이는 행위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벗어난 행위일 뿐 아니라 생사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은 기독교 세계 안에서 주류 교회들의 이론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으나 성직자들의 삶의 내면적 원리로는 수용되어 왔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은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원칙을 실천하는 이들로서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우월성을 견지해야 했다. 하지만 세속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까지 평화주의를 실천적인 원리로 가르치지는 않았다. 다수의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모든 이들이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삶을 선택할 경우 외부의 야만족의 위협에서 기독교 세계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에서 평화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적 전통은 신자의 내면적 삶에서 평화를 사모하는 이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왔다. 성프란시스 전통이라든지, 켈틱 신비주의 전통이라든지, 메노나이트, 형제단, 퀘이커, 아미쉬 공동체 등은 기독교인의 정치적 책임보다 영적이며 평화적 책임을 강조해 온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을 계승해 온 소종파 신앙을 지켜오고 있다.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 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생명을 해하는 폭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에 평화를 지키며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imperative)이지 선택사항(option)이 아니라고 보는 까닭이다.
 
현대 기독교 평화주의
1980년대를 지나면서 주류 교회들 안에서 평화주의 전통이 되 살아나고 있다. 독일교회, 미국 가톨릭교회, 연합감리교회, 그리고 세계 교회협의회는 거듭해서 평화주의로 선회하는 문서들을 내고 있다. 기독교 주류 교회들이 천년 넘게 의로운 전쟁을 인정해 오던 입장을 버리고 평화주의 전통으로 되돌아오는 이유를 살펴보면 오늘의 한국 교회가 처한 현실에서 기독교적인 실천을 숙고하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사회 윤리적 지침을 찾을 수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핵무기 시대에서는 의로운 전쟁 이론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므로 의로운 전쟁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주류 교회들이 평화주의로 선회한 징후를 보여주는 최초의 입장은 19504월 바이쎈제(Weissensee)에서 열린 동서독 교회 총회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동서독 교회가 기독교적인 입장으로 수용한 것이다. 나치즘을 경험했던 독일 교회들은 평화의 그리스도의 명령을 국가에 대한 충성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신앙인의 양심을 지키는 일에 합의를 이루었다. 그 이후 동서독 헌법에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하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민족적 가치나 국가적 가치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보다 상위할 수 없다는 신학적 판단을 선택한 셈이다.
 
둘째 변화는 1979년 구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바르샤바 조약국들이 중거리 핵을 배치하여 서독을 위협하게 되자 미국은 이중방어전략의 일환으로 독일에 퍼싱II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하였다. 동서독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 아니라 바르샤바 조약국들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해 있었던 서독의 입장에서는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교회는 서독에 핵을 배치할 경우 독일이 핵전쟁의 전쟁터가 될 수 있는 사실을 고려하여 반전 반핵운동을 전개했다. 이런 서독 교회의 입장은 독일 사회를 설득하여 마침내 미국의 퍼싱II 미사일은 독일에 배치되지 못했다. 핵무기를 가지고 상대를 위협하는 핵 위하력 전략을 취할 경우 그 피해는 동일 국민들이 입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독일 교회는 반핵 평화주의를 재차 선언했던 것이다.
 
독일교회는 동구권이 몰락하자 통일시대를 지향한 평화백서(2001, 평화의 도상으로 나가자)를 발표하고 2007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며 정의로운 평화를 지키자)라는 문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독일교회는 과거의 정의로운 전쟁이념을 깨끗이 청산하고 기독교 평화주의만이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을 표방했다. 이 문서에서 독일 교회는 군비경쟁의 어리석음이 전 지구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는 정황에서 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을 명료하게 선언했다. 따라서 이제는 의로운 전쟁이 아니라 의로운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합의를 표방한 것이다.
 
이렇듯 독일 교회가 의로운 전쟁이론을 버리고 의로운 평화론을 제기한 데에는 핵무장을 한 세계에 대한 교회의 신실한 평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라는 행성 위에는 약 5만개에서 23천개에 달하는 핵무기가 존재하고 있으며 인명살상용 화학무기도 약 7만톤이나 적재되어 있다. 전 지구를 수차례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분량이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의로운 전쟁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정치적 이념이나 국가주의, 지엽적 민족주의에 경도된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혼동해 온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독일 교회는 그런 오류를 다시 범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가톨릭교회(1983, The Challenge of Peace)나 연합감리교회 문서(1986, The Nuclear Crisis and a Just Peace),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 킹스톤 문서(2011) 역시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세계의 교회들이 정당 전쟁이론을 버린 이유는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 정당전쟁론이 요구하는 승리의 확신도 없고, 비율의 원칙도 적용되지 않으며, 선의 회복도 없고, 비전투요원을 차별 살상해야 한다는 차별의 원칙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핵무기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은 핵평화주의(Nuclear pacifism)밖에 없다. 지구를 초토화할 수 있는 핵무기로 대치되어 있는 상황이라면 의로운 전쟁은 없다는 것이 교회의 선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의로운 전쟁?
세계 교회들이 세계 평화를 위하여 고민을 거듭해 온 흔적을 살펴보면서 나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세계 평화를 위하여 어떤 고민을 해 왔는지 생각하게 된다. 남북이 분단된 지난 60여 년 동안 한국교회는 이념적 편들기에 전력해 온 기질이 농후하다. 평화를 위하여 기여해 오기보다 분단을 정당화하고 북한 정권의 사악함을 증언하며 십자군적인 증오의 윤리를 확산시켜왔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민족적 노력에 대해서 비방을 하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기독교 집단들도 있다. 증오를 앞세우면 대립이 첨예해질 뿐 그것을 가지고 통일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일이다.
 
한반도에서 의로운 전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불의한 전쟁만 가능할 뿐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관계를 고려한다면 한반도에서의 핵전쟁은 동남아의 핵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세계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을 수 있다. 핵폭탄에 의하여 발생한 먼지들이 지구 상공을 덮어서 태양열을 차단하여 모든 생명을 죽게 하는 영하 4-50도의 캄캄한 핵겨울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측이 있기 때문에 세계의 교회들은 의로운 전쟁론을 버리고 의로운 평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정말 민족을 사랑하고 한반도의 생명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의로운 전쟁을 조장하는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위기 한 가운데에서 한국 교회가 증언해야 할 것인 의로운 전쟁이 아니라 의로운 평화다
 
북한이 핵을 개발했으니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파괴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논리는 유아기적인 논리다. 이런 갈등의 시제를 타고 미국의 전투용 헬기를 수십 대 도입하겠다는 정부의 계획이 발표되었다. 군사주의적 해결책을 기독교적인 방안으로 동의하는 것은 평화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서울 상공 750미터 지점에서 2메가 톤짜리 핵폭탄이 터진다면 반경 20 Km에 이르는 지역은 초토화될 것이다. 폭심 3Km이내에 있는 사람들과 모든 생명은 태양 표면보다 더 뜨거운 열에 의하여 일순간 증발하고 만다. 서울을 초토화시키고 과연 우리 민족이 얻을 수 있는 선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나라 국방비는 세계 12위에 해당한다. 국민 1인당 50만원인 넘는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서울시 모든 초등학교 학생들 급식비가 3,900억원이 든다고 야단치던 사람들이 정부가 도입하려는 미제 전투기(F-35) 1대가 2.100억원, 아파치 헬기 1대가 1,100억원이나 드는 것에는 침묵한다. 정부가 구입하려는 헬기 72대 가격이 무려 62억 달러(7조원)에 이른다. 전국적으로 모든 대학생 반값등록금을 시행하는 데 드는 비용이 7조원이다. 지난 60년간 치러온 군사비에 더하여 우리는 아직도 얼마나 더 많은 무기를 구입하는 나라가 되어야 할까. 동구권과 인접해 있던 독일이 자국의 국방력을 평화군대로 바꾸었듯이 우리도 그럴 수는 없을까 생각하며 이 글을 마친다.
 
(기상, 2013년 6월 호)

Monday, May 27, 2013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영성적인 측면에서 말한다면 나의 삶이 그리스도의 삶과 사상을 닮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윤리적으로 말한다면 사랑과 평화를 나누며 생명을 사랑하는 길이다. 더욱 세밀하게 말하자면 모든 힘의 관계에서 지배적 의지보다는 섬김의 의지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경제적으로는 자기중심적인 탐욕에서 멀어져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충족의 길이 아니라 그런 욕망을 해체하면서 자기를 낮추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겸비를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최근 읽은 한스 큉의 책에서 나는 큉의 시선을 통해 교회를 보는 방법을 배웠다. 그의 책 제목이 이상하다. 책 제목이 이상하게도 “Ist die Kirche noch zu retten?" ”교회가 아직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2년 전 큰 아들과 함께 스위스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츄리히 공항서점에서 사들고 온 책이다. 유럽의 책방에서는 신학자들의 신간이 진열되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부러운 일이다. 신학자들의 책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한국 크리스챤들을 생각하면 쓸쓸하기까지 하다. 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스 큉은 이 책에서 기독교가 만성적인 질환에 걸려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걸린 고질병에 대하여 신자들은 일곱 가지 형태의 반응을 한다고 한다. 우선 그 중에서 일반적인 현상으로 네 가지 형태의 반응을 살펴보자. 첫째, 병에 걸린 교회를 떠나는 길이다. 유럽에서 정말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났고 떠나고 있다. 둘째, 새로운 분열을 도모하여 보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길이 있다. 셋째, 그저 내면적인 영성에 집중하면서 침묵하는 길이다. 넷째, 외면적으로는 잘 적응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형태다.
 
큉은 여기에 더하여 세 가지를 더 말하고 있는 데, 첫째 교회가 고질병에 걸렸든 말든 그저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태도다. 동시에 교회의 고질병을 그대로 존속시키는 부류다. 주로 교회에서 보람찬 활동을 하는 이들이다. 둘째, 그릇된 교회의 행태, 특히 권위주의적인 성직자들의 그릇된 가르침과 행태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자세다. 일종의 종교개혁주의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셋째, 교회가 보이고 있는 고질병을 학문적으로 연구 규명하여 발표함으로써 교회의 지도자나 교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경우다. 큉은 이 길이 신학자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신학은 교회를 지키는 파숫꾼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신학이 죽으면 교회의 질병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신학을 혐오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우선 두 부류를 먼저 생각해 보자. 첫째, 교회의 고질병으로 혜택을 입는 이들이다. 겉으로는 겸손을 가장한 오만한 성직자들이 이런 부류다. 그들은 현존하는 불의한 질서를 옹호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는 이들이다. 그들의 이면에는 권력과 탐욕과 욕망이 숨겨져 있다. 둘째, 자유의 의미를 모르는 무수한 신자들이다. 스스로 사고하거나 책임적이지 못하여 늘 다른 이의 지도와 후견을 받아야 하는 미성숙한 이들이다. 수십 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초보적이다. 이들은 신학의 다중성과 다양성을 도무지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스스로 독서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염려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의 사고와 신앙을 근거 없이 절대화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사고는 매우 유아기적이다. 그러나 매우 폭력적이다. 그래서 맹목적이다. 간혹 신학대학원 1학년 교실에서 일어나는 풍경에는 영락없이 단세포적인 사고에 익숙한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신학의 다양성에 의해 심각한 실존적 위기를 느끼며 저항한다. 이들은 동일성의 원리가 곧 신앙의 원리라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같은 것이면 안심하고, 다른 것이면 불안해한다. 합리성도 없고, 과학이성도 안중에 없다. 그래서 무지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가르쳐도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래야 안심이 되는 까닭이다. 이런 이들은 약자들을 향해서 동일성의 폭력을 행사한다.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으면 위기를 느끼고 갑자기 십자군적 전사로 돌변해 공격적이 된다. 야만적 행위도 불사한다.
 
한스 큉은 이런 현실을 독일에서 경험하고 있고 나는 한국에서 경험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가 부럽다. 아니 공항 서점에서도 그의 책이 팔리고 있는 그가 사는 세계의 문화적 역량이 부럽다. 그는 이렇게 교회의 고질병을 진단한다. 병명을 나름대로 풀어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제국주의적인 권력과 진리의 독점 주장, 2. 율법주의와 성직자주의, 3. 성과 여성에 대한 혐오주의, 4. 폭력성과 십자군 정신, 5. 은밀하게 감추어진 권력욕, 6. 진실 회피증, 7. 개혁 증오증. 내가 보기에 큉이 분석한 교회의 질병은 다름 아닌 교회의 거룩함을 무너뜨리는 요인들이다. 큉은 거룩함을 상실한 교회를 향하여 세상을 구원하기에 앞서 교회가 아직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염려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 이들일까?

Friday, May 10, 2013

새 책 <기독교 평화윤리학>의 결론


<기독교 평화윤리> 최종 원고를 홍성사에 넘긴지 2주가 되었습니다. 2500매 분량을 1600매 가량으로 줄였지만 아직은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충분하다고 생각 됩니다. 이 책의 결론부를 아래와 같이 매듭지었습니다.  가을 학기가 오기 전 예쁜 책의 모습으로 나오게 될 것이라 희망합니다.
 
인간의 삶과 평화는 아무리 분리시키려 해도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갔던 그리스도인들도 나름대로 기독교적인 평화를 구상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역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기독교가 지난 2000년 동안 추구해온 평화는 각 시대마다 폭력을 극소화 해왔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에 크게 공헌했다. 초기 교부들의 내적인 평화가 외적인 억압과 핍박 속에서 선택한 길이었다면 어거스틴 이후의 제국화된 기독교 안에서의 기독교 평화론은 로마 제국의 폭력성을 기독교적 사랑의 관점에서 국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16세기 이후 소종파 신앙 운동 속에서 재현된 예수의 평화주의 사상은 기독교 역사의 가장 소중한 유산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둘째, 기독교 평화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은 기독교가 핍박받던 종교에서 권력종교로 변신하면서 하나님의 평화를 교회의 평화 혹은 국가의 평화로 잘못 해석한 지점이다. 이러한 오류의 길은 암브로우스와 어거스틴부터 시작되었다. 로마 제국을 선교적으로 끌어안으면서 그들은 로마 제국의 폭력성까지 끌어 안았다. 그들은 선교를 위하여 로마 제국의 폭력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평화보다는 지상의 불완전한 평화를 선택하면서 정당한 평화가 아니라 정당한 전쟁 이론을 제시했던 이들이었다.
 
셋째, 어거스틴 이후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로만 가톨릭교회의 정치이론은 철저하게 강자의 이론을 대변했다. 정당전쟁론의 일곱 가지 요건은 강자가 아니면 정당한 전쟁을 도모할 수 없다는 이론이었다. 이는 사실상 기독교 세계의 영적이며 군사적인 우월성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 전통은 역사 속에서 기독교를 평화의 종교가 아닌 지배적이며 폭력적인 종교로 만들어 왔다. 종교개혁자들의 사상 속에서도 이런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그 결과 종교와 정치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가 기독교를 포악한 종교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평화라는 지평을 상실하고 교회의 평화, 혹은 기독교 세계의 평화를 옹호해 온 기독교 전통은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이교도 징벌 등 종교재판의 역사를 점철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극심하게 짓밟았다. 이러한 기독교의 오만은 계몽주의 이후 근대화된 세계에서 형성된 인권사상과 민주사상에 의하여 부정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18세기 혁명의 시대를 지나면서 기독교가 행사하던 종교 재판권은 몰수되었다.
 
다섯째,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전개된 재세례파 신앙운동은 초기의 종말론적 기대에서 발생한 폭력성을 비판적으로 극복한 이후 메노나이트 등 소종파 평화주의 운동으로 그 명맥을 이어왔고, 18세기 영국 국교의 교권적 형식주의에 반하여 형성된 퀘이커 신앙운동은 반교권적 반권력적 기독교 평화운동으로 자리를 지켜왔다. 이들의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한 증언과 실천의 중요성은 오늘의 핵무기 시대에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여섯째, 기독교 정당전쟁 이론은 세계 1, 2차 대전의 비참함을 경험한 후에도 이념적 편당성을 지원하며 각 진영의 군비경쟁의 이론적 논거를 제공해 왔다. 그 결과 지구를 수차례 초토화시키고도 남을 핵무기를 비축한 양대 진영은 지구라는 행성에 거주하는 모든 생명을 담보로 삼아 핵폭탄으로 서로를 위협하는 정황을 초래했다. 이런 위기 인식에서 독일교회는 핵평화주의를 선택했고, 미국 가톨릭 교회 역시 핵평화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세계교회협의회도 정당전쟁론의 유효성을 폐기하고 정의로운 평화이론을 기독교 평화운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함으로서 기독교 평화운동의 대전환을 이루었다.
 
일곱째, 2011년 킹스톤 평화문서에서 세계 교회협의회는 인류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군비경쟁과 핵전쟁의 위협 앞에서 기독교가 하나님의 평화가 아니라 민족적, 국가적, 이념적 가치에 편승하며 군사 및 폭력적 수단에 동의해 온 지난 역사에 대하여 반성과 회개를 촉구했다. 오늘의 기독교가 자기 안에 있는 폭력성을 근절하고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사람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화를 위한 소명 앞에 새롭게 서야만 한다는 당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연구를 통하여 나는 오늘의 기독교 평화 운동은 단순한 정치적 평화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 집단과 국가, 그리고 동류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폭력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제거함으로써 일구어 내는 평화운동으로 재규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위하여 세계교회협의회는 평화의 신학을 제창하고 정의로운 평화운동을 제안했다. 따라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사람의 평화나 국가의 평화, 혹은 이념적 평화를 위한 봉사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원을 넘어서서 개인, 교회, 사회, 국가 안에 기생하는 모든 폭력성을 제거함으로써 보다 정의로운 하나님의 평화의 사역자로 나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런 결론은 핵무기 시대를 직면하여 소종파 교회들만이 아니라 주류 교회들조차도 교회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핵전쟁으로 인한 공멸과 자멸을 초래할 수 있는 정당전쟁론이 아니라 비폭력 평화주의의 길 뿐이라는 현실 인식에 합의한 것을 의미한다. 2000년의 긴 방황 끝에 주류 교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의 가르침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이 복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 울 것이다 (5: 8).“ 

목 차
 
-머리말
I. 그리스의 평화(είρήνη)이해: 에이레네
II. 로마의 평화: Pax Romana
III. 구약성서의 평화: 샬롬
IV. 예수의 평화사상
V. 초기 교부들의 평화사상
VI. 제국화된 기독교의 평화
VII. 기독교세계의 평화론 (pax christi)
VIII. 종교개혁자들의 평화
IX. 재세례파 신앙운동과 평화
X. 퀘이커 신앙운동과 평화주의
XI. 독일개신교의 평화운동
XII. 미국교회의 평화운동
XIII. 세계교회협의회(WCC)의 평화운동
- 맺는 말
- 참고도서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