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2, 2010

순수의 이름으로 불의를 감행하는 배리에 관하여

기독교인으로서 경험하는 비합리적 배리는 대부분 타락한 교회 권력구조의 산물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교회 지도자들의 의식이 전근대적 가치와 권위 그리고 질서를 신도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정황이라고 할까요.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함이라는 신학적 방패 뒤에 숨어서 온갖 추태를 부리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교회 정치 경력이 오래되면 될수록 그들의 영혼은 파멸에 가깝고, 신앙과 권위의 외피를 입은 짐승과도 같은 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이런 이들에 의하여 불미스러운 이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반면 이런 이들에 의하여 길들여진 기독교인들조차도 간혹 도덕주의적 인민재판에 앞장서면서 합리적 절차에 의한 징벌을 초월하여 사적 감정과 공격적인 행위를 감행합니다. 교회의 평화라는 미명 속에 억눌려 있던 가학적 본능이 특정한 이들을 향한 증오로 돌변하곤 합니다. 이들은 집단적인 행태를 갖출 때는 간혹 정의와 순수의 이름으로 매우 야만적인 행위도 불사합니다. 여기에도 비합리적인 배리가 있습니다.

최근 성희롱 사건이 회자되는 양태를 바라볼 때 나는 이 두가지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 권력은 주제넘게 오랫동안 신도들의 침실까지 엿보고 이를 재판해 왔습니다. 간통과 간음이라는 죄목을 일단 던지면 아무도 구해 낼 수 없었지요. 일단 혐의만 던져도 인권사각지대로 당사자를 던져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역할을 했던 이들이 주로 성직자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 구조가 바뀌어 신도들이 성직자들의 침실을 엿보고 고발 하는 것이지요. 일단 고발이 되면 그는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인권사각지대로 몰리게 됩니다. 하지만 성직자들의 사법권이 박탈당한 오늘날 성직자들은 평신도들의 성적 일탈에 대한 심판자를 자처하지 않습니다. 그럴 만한 권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리고 인권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인 국가의 권력들도 개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고 법정의 심판 대상으로 보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권력이 아직도 오만을 떨고 있습니다. 국민들의 순결과 정조를 국가 권력이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이지요. 교회 안의 도덕주의자들 역시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보호하고 가해자는 짐승으로 몰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즈음 유일하게 남은 영역이 바로 성직자들의 성적 일탈에 대한 초법적인 공격입니다. 인터넷 세계의 모호함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사건을 보면서 나는 도대체 누가 그렇게 한 개인의 삶과 모든 것을 부정하고 박탈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 변호사의 도덕주의적 권고도 읽어 보았지만, 그것은 법률가로서가 아니라 한 신앙인의 읍소와 같았습니다. 서양에서는 통계상 성직자들의 약 4%가 성적인 일탈을 범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평신도들의 성적 일탈율은 그보다 훨씬 높을 것입니다. 남성중심적 질서를 기반으로 하는 군대에서 여성을 성적 도구로 바라보는 동료들이 벌리는 매춘문화를 보면서 나는 거의 50% 이상의 남성들이 성적 유혹 앞에서 도덕적 저항 능력이 없다는 것을 경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류의 사람도 성직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특히 가부장적인 남성적 권위를 자랑하는 목화자일수록 위험도는 더욱 증가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현실을 모르는 것처럼 벌리는 도덕적 순수논쟁은 매우 위선적인 것입니다. 성적 일탈의 문제는 그것이 개인이든, 공인이든, 성직자이든 막론하고 그들의 사생활의 영역이고, 문제를 구지 삼아야 한다면 그것은 당사자간 법정에서 판단을 받아야 할 문제입니다. 제 3자가 이에 개입하여 심판자를 자처하는 것은 그 정당성의 근거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도덕주의자들이 되어 도덕의 이름으로 한 인간을 매장시키려 하는 것이 고작이겠지요.

나는 비일 비재 일어나는 이런 현상을 바라보면서 기독교인들 속에 내재된 성적 억압이 특정인에 의하여 저질러진 방종에 가까운 성적 일탈행위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과도한 분노로, 혹은 지켜야 할 망루가 무너졌다는 일종의 처절한 몰락으로 보개 만드는 심리적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교인만큼은, 성직자만큼은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기대와 희망이 붕괴되는 데 대한 분노라고 할까요. 아마도 이런 생각은 성이란 여전히 타부가 되어야 하고, 결혼이라는 구조 안에서만 허용되어야 하고, 반드시 남성과 여성 사이에만 일어나는 사건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보수적으로 집착하는 양태이기도 합니다. 하여 성직자들은 대리적으로라도 마지막 남은 망루가 되어야 하는 데 그것이 안 되어 분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나는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자는 논리에 동의하거나 힘을 더하지 않은 예수가 과연 무엇을 생각 했는지 가끔 그 분의 속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정의롭다는 것, 그것은 단순한 타인의 실수를 나발불기가 아니라 나의 비판의 대상이 된 그 이 /그 녀의 인간다움의 고귀함과 권리도 잊지 않는 태도를 지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 이 홈피에서 한 기자가 뉴욕의 어느 목사의 성적 일탈에 분노하여 기자로서의 객관성을 상실하고 오류를 범한 이의 자식들까지 대대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글을 쓴 일에 대하여 커멘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기자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답 글을 달아 몇 번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후기를 쓰겠다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이 글이 그것을 대신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개인 성직자의 외도에 저리도 분노하는 그의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공개적으로 한 목회자의 불륜을 비판하고 드러냄으로써 그의 부적절한 처신과 사생활을 공적 영역에 드러내는 행위의 비윤리성과 부덕함의 심각성에 전혀 민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행위는 도덕주의를 앞세워 교회의 공공성에 치명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한 개인의 오류를 침소봉대하여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의 오류로 과장 확대하는 부당함을 불러옵니다. 그리고 당사자와 주변인에게는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는 바, 개인의 인격과 인권을 몰수하는 행위를 벌리는 것이지요. 대형 교회의 목사일 경우 세간의 이목이 있어 가십의 깊이와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그런 이들에게 있어서 명분 있는 좋은 먹이감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이런 사고 방식 자체가 매우 전근대적인 개인 이해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적 의식을 가지고 한 때는 목사의 영웅주의적 권위를 비난하던 이들이 목사의 일탈행위를 보면서 판단하는 기준은 왜 영웅이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여 고발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이율배반을 보지 못하는 그 자리에는 정의로움보다 불의한 것이 더 많습니다. 정의와 순수를 앞세운 이런 공격행위에 담겨 있는 불의와 배리는 주로 황색 저널리즘이 가지고 있는 유치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정의로움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곰씸어 보아야 할 과제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잘못했다 할지라도 재판권을 행사하는 공적 기관이 있는 현대 세계에서 인터넷 매체를 이용하여 사적 형벌을 가하는 태도는 가학적인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 일일뿐 기독교적인 것도 아닙니다. 동료 인간의 실수와 잘못을 비판할 때는 정중해야 하고, 상대의 동료됨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박탈하려 드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본성을 감추거나 억누름으로써만 가능한 행위로서 매우 위선적인 것입니다. 이런 위선적인 행위들을 과거의 성직자들이 무수히 범했는데 오늘날 충분히 훈련받지 못한 이들에 의하여 인민재판식으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회, 경제, 정치적 오류는 다수의 사람들을 죽임으로 몰아갈 수도 있는 일임에도, 그런 오류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고, 너무나 관대하거나 심지어 의식도 하지 못하던 이들이 누군가의 성적 일탈이라는 주제만 나오면 흥분하며 앞장서서 돌을 던지며 야수집단처럼 한목소리를 내며 공격하는 양태를 보면서 나는 기독교인들의 이런 점이 간혹 너무나 무섭다고 생각합니다. 마녀 사냥을 외쳐대던 중세기의 기독교인들, 퓨리탄의 후예들의 피가 아직도 흐르기 때문일까요? 실인즉 그들이 마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금도 의심치 않고 마녀라고 내심 규정하고 두려워하며 마치 "나는! 우리는 마녀가 아니야!" 라는 외침과 함께 상대의 목숨을 잔인하게 빼앗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의 후예라도 되는 것 같습니다. 자기 의가 지나친 그런 이들의 참된 삶의 진면목은 얼마나 정의로운 것일까 나는 궁금해집니다.

1980년대 미국을 주름잡던 텔레비전 설교가인 지미 스왜거트는 자신과 경쟁 관계에 있던 짐 베이커가 교회내 신자와 가졌던 부적절한 성희롱을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얼마 후에 지미 스왜거트가 매춘여성과 모텔에서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었습니다. 그는 텔리비젼 앞에 나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 그는 또다시 매춘행위를 하다가 잡혔습니다. 비범한 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점은 자기 자신이 매우 특별하고 예외적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위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완벽한 인간은 없는 데도 그렇게 늘 보여야 했기 때문이지요. 이런 경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한 인간으로 대우를 받기 어렵게 되지요. 그의 위선을 가장 잘 알게 되는 까닭입니다. 위선자를 끊임없이 사랑하는 일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리하여 영웅적인 많은 이들은 정작 자신의 아내로부터 사랑과 만족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성공한 목회자들의 비극의 이면에는 이런 속성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위선과 거짓이 싹트고, 점차 죄에 대하여 민감성이 결여되어 간혹 부적절한 성적인 위로를 구하는 초라한 인간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주변에 너무 영웅적인 목사를 숭배 할 정도로 따라다니거나 좋아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은 그들이 그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이상이 될 수 없는 법입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인은 인간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직 보수적인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만 지도자의 성적 일탈에 관한 사건들이 가장 큰 화제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인들이 인식하는 죄가 그런 문제에만 과민 반응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아니라 과도한 자기의 혹은 스스로에게 강요해 온 순수가 부정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혼란을 느끼고 이를 부정하며 분노하는 자기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양태들은 타인의 도덕성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경박한 판단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직자의 성적 일탈의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개인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증오의 제전을 벌리는 것은 마치 범죄자를 사형시키면 교회 안에는 그런 죄와 악이 억제되거나 사라질 것이라는 단순한 망상을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터넷 세계에서 공개되어 있는 왜곡된 성문화, 성인인증이 필요한 세계가 또 하나의 세상으로 존재하는 현실, 그리고 무수한 네온사인들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음주와 성매매문화, 노골적인 매춘문화 이런 것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교회가 지켜야 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의 성적일탈에 대하여 분노의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성이 무엇인지, 성애의 본질은 무엇인지, 결혼이 무엇인지, 그리고 몸과 성의 소중함과 인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우리들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