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십년 전 나는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에 출강을 했던 적이 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한신대 교정에 들어 섰을 때 내 눈에 띠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예수는 누구인가?" // 아마도 진지하고 양심적인 신학자나 신앙인들은 우리의 예수인식에는 늘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와 동일한 물음을 가슴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 한 잘나가는 부흥사가 뉴욕 순복음 교회에서 부처는 불교를 만들면 안되는 일이었다고 설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분이 어떤 분이기에 불교, 기독교, 예수에 대하여 다 파악한 하나님처럼 말하는 것일까. 부흥회 다니느라고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텐데 어느 틈에 그 모든 것을 다 헤아려 보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소리는 사실 기독교인이라면 여기 저기서 많이 듣던 소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사도 바울이 자신이 평생 해 온 학문, 신분, 자랑거리를 예수를 만난 이후 값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고백을 좋아한다. 자신의 자랑스러웠던 것들을 그리스도 앞에서 배설물로 여겼다는 바울의 고백은 결국 그가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들이 진짜 배설물이라는 소리가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담긴 고백이리라. 만일 황금을 돌처럼 여겼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황금이 돌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말귀를 잘 못알아 듣는 사람이거나 조금 바보일 것이다. 사람의 주장에는 그의 자전적 고백이 담겨있다. 주관적 생각은 그의 사람됨을 나타낼 뿐 객관적인 사실을 바꾸어 놓는 마술이 아니다.
나의 주일학교 시절에는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예배실은 마룻 바닥이었다. 당시 나는 회기동 근처에 있었던 동안교회에 다니고 있었는 데 교회에 가서는 얌전히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당연한 의무인줄 알았다. 그 시절 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라고 일러준 주일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천금같이 믿고 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지낸 적이 있다.
그 선생님 이름은 잊었지만 그 분의 말씀은 아직도 나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주고 있다. 이 가르침은 나로하여금 무엇인가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하는 삶의 태도를 주기도 했지만, 인간다움의 욕구라든지 타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도 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죄의식을 가지기도 했고, 가족에 대한 호혜적 사랑도 하나님 앞에서 죄스럽게 느끼기도 했다. 더구나 이런 시각은 나로 하여금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종교나 신을 믿는 것을 우상숭배하는 것이라 판단하게 만들었다. 해서 나는 소시적에 사찰 경내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나님께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화계사로 소풍을 갔을때 부처상을 목격하고 고개를 돌린적도 있었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을 구별하면서 몇 안 되는 신사참배 거부자들을 영웅적 신앙의 표상으로 인식하게 만든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목숨을 걸고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행위가 정말 기독교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예수외에는 구원을 얻을 이름이 없다"는 성서적 주장과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가톨릭 교회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다른 종교가 동등하게 혹은 평등하게 공존할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주장이다. 믿음이 좋은 목사들은 이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이의 인권과 생존권을 박탈하는 죄도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이런 목사 밑에서 신앙을 교도받은 이들, 특히 모태신앙이나 혹은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은 타종교인은 받지 못할 구원을 받은 특별히 선택된 자들로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라는 주문에 걸려있는 셈이다. 죄로 인하여 저주와 심판을 면치 못할 죄인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심판의 대상에서 왕중왕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으니 그야말로 영적 귀족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더구나 현세에도 축복을 받고 내세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기독교의 교리는 교파를 초월하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고 받아들이는 신앙원칙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자기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최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기독교인들을 향한 사랑과 관심을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최상의 것은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 장경동 목사의 발언이 오히려 속시원한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종교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종교를 비하하고, 따져보지도 않고서 다른 종교를 무가치한 것으로 매도하며, 누군가로부터 전수받고 배운 대로 다른 종교를 거짓 종교라고 을러대기 때문이다.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한 종교재판관들은 신앙의 이름으로는 오만도, 살인도, 전쟁도, 심지어는 저주를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기독교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당연한 것처럼, 장경동 목사처럼,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향한 측은지심을 가지고 그리했다. 그들만의 종교가 아닌 종교는 모두 헛된 것이라고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세기 사람들이 어찌 불교를 알고,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알았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라는 헛된 교만과 자부심을 가짐으로써 타방을 두려워 했던 것이다. 최근 물의를 빗고 있는 장경동 목사의 발언은 이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습성처럼 가지고 있는 천박한 인식을 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경우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현세의 축복"과 "내세의 영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불교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저 성직자들이 가르쳐 준 대로 믿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는 빛이요 생명이요 진리라고 하고, 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될 계시의 총체라고 생각한다. 오직 기독교내에 계시로 인정하는 것 외의 다른 모든 계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부정한다. 이런 까닭에 예수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던 유대인들은 성서시대부터 미움의 대상이 되었고, 기독교는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그들을 향한 증오와 저주의 문화를 유발시켰다. 이런 역사는 유럽 기독교안에 깊이 내재되어 세계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이라는 범죄에 기독교가 가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중세기를 지나면서 예수가 아닌 마호멧을 믿는 이슬람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증오는 결국 십자군 전쟁을 유발시겼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이런 논리에서 장경동 목사의 불교폄하 발언이 나온 것이다.
기독교는 사실 그 초기에 모진 박해를 받기도 했던 종교다. 예수조차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으니 기독교는 따지고 보면 승리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의 종교다. 그 당시에는 최고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오히려 고난을 수납하면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이들의 종교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로마 제국주의와 손을 잡기 시작하면서 제국의 세력을 향유하기 시작한 기독교는 거대한 제국의 영적 옹호자가 되고 만다. 제국주의와 교잡하여 제국의 종교로 변신한 콘스탄틴 기독교는 십자가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는 거대한 힘을 과시함으로서 공간, 시장, 정치, 종교속에 동일한 지배 논리를 심어 놓았다. 제국주의자들은 지배와 종속, 점령과 확장, 탐욕과 착취의 주체가 되는 것을 당연시 한다. 그러므로 승리주의자들이다. 다른 이들은 지배와 점령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신학이 아퀴나스-> 루터 -> 칼빈 -> 웨슬리 전통이다. 이들 속에 점증하는 시민사회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어 오고 있었지만 이들의 권력에 대한 이해는 철저하게 종교 제국주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15세기 중엽 거대 로마의 지배가 종식되고 로마 제국주의에 의하여 해방된 유럽 각 나라의 정치 세력들은 제국주의적인 침략 전쟁을 반복해 왔을 뿐 아니라, 광활한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을 식민지화하려 했다. 아니러니하게도 이들은 한결같이 가톨릭 혹은 개신교 신앙으로 무장한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국가들이었다. 공교육이 오늘날처럼 확산되지 않은 시대에 이들을 교도한 이들은 당연히 기독교 성직자들이었다. 이렇듯 전쟁과 지배문화를 조장해 온 기독교의 역사는 깊은 악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점이 요도가 시종일관 번번히 지적해 온 문제다.
지배논리는 평등보다는 차별을, 포용보다는 배타를 조장함으로써 그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상대에게는 피지배 상태를 받아들이게 만드는 주체성의 혼란을 불러오게함으로써 지배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한다. 힘을 가진 이들이 힘없는 이들을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 지배 이데올로기와 접착된 교리적 예수는 이렇게 이용되었다. 따라서 기독교 문명은 우월하고, 비기독교 문명은 야만적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건전한 기독교인들이라 할지라도 당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병든 정서다.
백인은 유색인들을 지배해야 하고, 백인은 유색인보다 우월함으로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주장에서 나온 것이 노예제도였고, 백인들의 세계에서도 정치 경제적 힘을 가진 남성들이 남성우월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한 전통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지울 수가 없는 사실로 남아있다. 기독교인들인데도 그리했다. 이런 논리는 오늘의 모든 사회 제도 이면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심리적 바탕에서 작용하고 있다. "내가 (장)경동교를 만들지 않은 것 처럼 부처도 불교를 만들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말은 불교는 붙다의 실수요, 탄생해서는 안될 종교였다는 뜻이다. 장목사의 예수는 장목사를 오만하게 만들고, 그에게 시대착오적 인식이 작동하게 만드는 예수인 것이 틀림없다. 중세기에 모든 이들의 사상의 자유를 박탈하고 오직 기독교 신앙만 강요하면서 그들의 교리적 기준에서 벗어나면 종교재판을 걸어 화형에 처하던 시대와 방불한 전근대적 역사인식이 엿보이는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평신도였던 칼빈조차 당대에 존경받던 인문학자 세르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아시아 36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니다. 아시아 전역에서 천주교 기독교인들을 모두 모아도 3%에 지나지 않는다. 97%는 비기독교인들이다. 나는 장목사의 주장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근거없는 "오만과 자기 의"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가 주장하는 예수가 팔레스타인 어느 우물가에서 삶에 지친 한 여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에게 구원을 약속했던 예수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십가가에 달려 죽어가면서도 한 강도의 고백을 받아들여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고 그의 영혼을 보살펴 준 대자대비한 예수의 모습을 그가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수에게서는 다른 종교를 향한 배타와 저주와 심판은 없다. 오히려 거짓과 탐욕에 물든, 배타와 자기의에 가득한 거짓 선지자들과 오만한 성직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 돈계산하는 이들을 향하여 채찍을 들고, 일곱번 저주를 선언하였을 뿐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를 방문한다면 5월이 가장 제일 좋은 계절이다. 영국식 대학의 교정에는 어디나 정원이 있다. 봄이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그 계절의 아름다움을 찬란하게 드러낸다. 5월에 케임브리지에 간다면 분명 푸르른 조그만 들꽃과 여기 저기 수선화들이 무리지어 피어있고, 이름모를 아름다운 꽃들이 온 도시 어느 곳에 가나 피어있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이렇게 다양성과 다수성을 가진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하나님을 향한 영성의 샘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이 기독교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장미 한 송이가 피어나 모든 꽃들을 꽃들이 아니라고 선언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부정하는 배은망덕한 오만한 행위로서 그 얼마나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는가?
팔레스타인에서 참새 한마리도, 머리터럭 한 올이라도 다 헤아리시는 그 하나님께서 아시아에서 피어난 무수한 종교들도 꽃피우게 하신 것은 아닐까? 가난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장경동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는 아시아 대륙의 36억의 가난한 이들 곁을 지키고 계시는 그리스도, 그 가난한 이들의 고통앞에서 아파하는 하나님의 고통도 헤아리지도 못하는 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본주의와 승리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반공주의와 교잡된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아닐것이다. 아시아인의 영성의 뿌리가 되시는 하나님, 그들의 삶속에 동행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예수의 눈이 아니라 교리가 만든 인공의 각질이 우리 눈을 어둡게 한 까닭이리다. 장경동 목사의 호언장담속에 갇힌 예수를 넘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예수 과연 그 분은 누구신가?
Wednesday, August 27, 2008
Who is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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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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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August 26, 2008
Speech by Richard von Weizsacker, the former president of Germany
<종전 40주년 기념일 연설>
Speech by Richard von Weizsacker, President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in the Bundestag during the Ceremony Commemorating the 4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the War in Europe and of National Socialist Tyranny,
May 8, 1985
I
Many nations are today commemorating the date on which World War II ended in Europe. Every nation is doing so with different feelings, depending on its fate. Be it victory or defeat, liberation from injustice and alien rule or transition to new dependence, division, new alliances, vast shifts of power–May 8, 1945, is a date of decisive historical importance for Europe.
We Germans are commemorating that date amongst ourselves, as is indeed necessary. We must find our own standards. We are not assisted in this task if we or others spare our feelings. We need and we have the strength to look truth straight in the eye–without embellishment and without distortion.
For us, the 8th of May is above all a date to remember what people had to suffer. It is also a date to reflect on the course taken by our history. The greater honesty we show in commemorating this day, the freer we are to face the consequences with due responsibility. For us Germans, May 8 is not a day of celebration. Those who actually witnessed that day in 1945 think back on highly personal and hence highly different experiences. Some returned home, others lost their homes. Some were liberated, while for others it was the start of captivity. Many were simply grateful that the bombing at night and fear had passed and that they had survived. Others felt first and foremost grief at the complete defeat suffered by their country. Some Germans felt bitterness about their shattered illusions, while others were grateful for the gift of a new start.
It was difficult to find one's bearings straightaway. Uncertainty prevailed throughout the country. The military capitulation was unconditional, placing our destiny in the hands of our enemies. The past had been terrible, especially for many of those enemies, too. Would they not make us pay many times over for what we had done to them? Most Germans had believed that they were fighting and suffering for the good of their country. And now it turned out that their efforts were not only in vain and futile, but had served the inhuman goals of a criminal regime. The feelings of most people were those of exhaustion, despair and new anxiety. Had one's next of kin survived? Did a new start from those ruins make sense at all? Looking back, they saw the dark abyss of the past and, looking forward, they saw an uncertain, dark future.
Yet with every day something became clearer, and this must be stated on behalf of all of us today: The 8th of May was a day of liberation. It liberated all of us from the inhumanity and tyranny of the National Socialist regime.
Nobody will, because of that liberation, forget the grave suffering that only started for many people on May 8. But we must not regard the end of the war as the cause of flight, expulsion and deprivation of freedom. The cause goes back to the start of the tyranny that brought about war. We must not separate May 8, 1945, from January 30, 1933.
There is truly no reason for us today to participate in victory celebrations. But there is every reason for us to perceive May 8, 1945, as the end of an aberration in German history, an end bearing seeds of hope for a better future.
II
May 8 is a day of remembrance. Remembering means recalling an occurrence honestly and undistortedly so that it becomes a part of our very beings. This places high demands on our truthfulness.
Today we mourn all the dead of the war and the tyranny. In particular we commemorate the six million Jews who were murdered in German concentration camps. We commemorate all nations who suffered in the war, especially the countless citizens of the Soviet Union and Poland who lost their lives. As Germans, we mourn our own compatriots who perished as soldiers, during air raids at home, in captivity or during expulsion. We commemorate the Sinti and Romany Gypsies, the homosexuals and the mentally ill who were killed, as well as the people who had to die for their religious or political beliefs. We commemorate the hostages who were executed. We recall the victims of the resistance movements in all the countries occupied by us. As Germans, we pay homage to the victims of the German resistance–among the public, the military, the churches, the workers and trade unions, and the Communists. We commemorate those who did not actively resist, but preferred to die instead of violating their consciences.
Alongside the endless army of the dead, mountains of human suffering arise–grief over the dead, suffering from injury or crippling or barbarous compulsory sterilization, suffering during the air raids, during flight and expulsion, suffering because of rape and pillage, forced labor, injustice and torture, hunger and hardship, suffering because of fear of arrest and death, grief at the loss of everything which one had wrongly believed in and worked for. Today we sorrowfully recall all this human suffering.
Perhaps the greatest burden was borne by the women of all nations. Their suffering, renunciation and silent strength are all too easily forgotten by history. Filled with fear, they worked, bore human life and protected it. They mourned their fallen fathers and sons, husbands, brothers and friends. In the years of darkness, they ensured that the light of humanity was not extinguished. After the war, with no prospect of a secure future, women everywhere were the first to set about building homes again, the "rubble women" in Berlin and elsewhere. When the men who had survived returned, women had to take a back seat again. Because of the war, many women were left alone and spent their lives in solitude. Yet it is first and foremost thanks to the women that nations did not disintegrate spiritually on account of the destruction, devastation, atrocities and inhumanity and that they gradually regained their foothold after the war.
III
At the root of the tyranny was Hitler's immeasurable hatred against our Jewish compatriots. Hitler had never concealed this hatred from the public, but made the entire nation a tool of it. Only a day before his death, on April 30, 1945, he concluded his so-called will with the words: "Above all, I call upon the leaders of the nation and their followers to observe painstakingly the race laws and to oppose ruthlessly the poisoners of all nations: international Jewry." Hardly any country has in its history always remained free from blame for war or violence. The genocide of the Jews is, however, unparalleled in history.
The perpetration of this crime was in the hands of a few people. It was concealed from the eyes of the public, but every German was able to experience what his Jewish compatriots had to suffer, ranging from plain apathy and hidden intolerance to outright hatred. Who could remain unsuspecting after the burning of the synagogues, the plundering, the stigmatization with the Star of David, the deprivation of rights, the ceaseless violation of human dignity? Whoever opened his eyes and ears and sought information could not fail to notice that Jews were being deported. The nature and scope of the destruction may have exceeded human imagination, but in reality there was, apart from the crime itself, the attempt by too many people, including those of my generation, who were young and were not involved in planning the events and carrying them out, not to take note of what was happening. There were many ways of not burdening one's conscience, of shunning responsibility, looking away, keeping mum. When the unspeakable truth of the holocaust then became known at the end of the war, all too many of us claimed that they had not known anything about it or even suspected anything.
There is no such thing as the guilt or innocence of an entire nation. Guilt is, like innocence, not collective, but personal. There is discovered or concealed individual guilt. There is guilt which people acknowledge or deny. Everyone who directly experienced that era should today quietly ask himself about his involvement then.
The vast majority of today's population were either children then or had not been born. They cannot profess a guilt of their own for crimes that they did not commit. No discerning person can expect them to wear a penitential robe simply because they are Germans. But their forefathers have left them a grave legacy. All of us, whether guilty or not, whether old or young, must accept the past. We are all affected by its consequences and liable for it. The young and old generations must and can help each other to understand why it is vital to keep alive the memories. It is not a case of coming to terms with the past. That is not possible. It cannot be subsequently modified or made not to have happened. However, anyone who closes his eyes to the past is blind to the present. Whoever refuses to remember the inhumanity is prone to new risks of infection.
The Jewish nation remembers and will always remember. We seek reconciliation. Precisely for this reason we must understand that there can be no reconciliation without remembrance. The experience of millionfold death is part of the very being of every Jew in the world, not only because people cannot forget such atrocities, but also because remembrance is part of the Jewish faith.
"Seeking to forget makes exile all the longer. The secret of redemption lies in remembrance." This oft-quoted Jewish adage surely expresses the idea that faith in God is faith in the work of God in history. Remembrance is experience of the work of God in history. It is the source of faith in redemption. This experience creates hope, creates faith in redemption, in reunification of the divided, in reconciliation. Whoever forgets this experience loses his faith.
If we for our part sought to forget what has occurred, instead of remembering it, this would not only he inhuman. We would also impinge upon the faith of the Jews who survived and destroy the basis of reconciliation. We must erect a memorial to thoughts and feelings in our own hearts.
IV
The 8th of May marks a deep cut not only in German history but in the history of Europe as a whole. The European civil war had come to an end, the old world of Europe lay in ruins. "Europe had fought itself to a standstill" (M. Sturmer). The meeting of American and Soviet Russian soldiers on the Elbe became a symbol for the temporary end of a European era.
True, all this was deeply rooted in history. For a century Europe had suffered under the clash of extreme nationalistic aspirations. At the end of the First World War peace treaties were signed but they lacked the power to foster peace. Once more nationalistic passions flared up and were fanned by the distress of the people at that time.
Along the road to disaster Hitler became the driving force. He whipped up and exploited mass hysteria. A weak democracy was incapable of stopping him. And even the powers of Western Europe–in Churchill's judgment unsuspecting but not without guilt–contributed through their weakness to this fateful trend. After the First World War America had withdrawn and in the thirties had no influence on Europe.
Hitler wanted to dominate Europe and to do so through war. Re looked for and found an excuse in Poland. On May 23, 1939, he told the German generals: "No further successes can be gained without bloodshed.... Danzig is not the objective. Our aim is to extend our Lebensraum in the East and safeguard food supplies... so there is no question of sparing Poland. And there remains the decision to attack Poland at the first suitable opportunity... the object is to deliver the enemy a blow, or the annihilating blow, at the start. In this, law, injustice or treaties do not matter."
On August 23, 1939, Germany and the Soviet Union signed a non-aggression pact. The secret supplementary protocol made provision for the impending partition of Poland. That pact was made to give Hitler an opportunity to invade Poland. The Soviet leaders at the time were fully aware of this. And all who saw realized that the implications of the German-Soviet pact were invasion of Poland and hence the Second World War.
That does not mitigate Germany's responsibility for the start of the Second World War. The Soviet Union was prepared for other nations to fight one another so that it could have a share of the spoils. The initiative for the war, however, came from Germany, not from the Soviet Union. It was Hitler who resorted to the use of force. The outbreak of the Second World War remains linked with the name of Germany.
In the course of that war the Nazi regime tormented and defiled many nations. At the end of it all only one nation remained to be tormented, enslaved and defiled: the German nation. Time and again Hitler had declared that if the German nation was not capable of winning the war it should be left to perish. The other nations first became victims of a war started by Germany before we became the victims of our own war.
The division of Germany into zones began on May 8. In the meantime the Soviet Union had taken control in all countries of Eastern and South Eastern Europe that had been occupied by Germany during the war. All of them, with the exception of Greece, became socialist states. The division of Europe into two different political systems took its course. True, it was the postwar developments which cemented that division, but without the war started by Hitler it would not have happened at all. That is what first comes to the minds of the nations concerned when they recall the war unleashed by the German leaders. And we think of that too when we ponder the division of our own country and the loss of huge sections of German territory. In a sermon in East Berlin commemorating the 8th of May, Cardinal Meissner said: "the pathetic result of sin is always division."
V
The arbitrariness of destruction continued to be felt in the arbitrary distribution of burdens. There were innocent people who were persecuted and guilty ones who got away. Some were lucky to be able to begin life all over again at home in familiar surroundings. Others were expelled from the lands of their fathers. We in what was to become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were given the priceless opportunity to live in freedom. Many millions of our countrymen have been denied that opportunity to this day.
Learning to accept mentally this arbitrary allocation of fate was the first task, alongside the material task of rebuilding the country. That had to be the test of the human strength to recognize the burdens of others, to help bear them over time, not to forget them. It had to be the test of our ability to work for peace, of our willingness to foster the spirit of reconciliation both at home and in our external relations, an ability and a readiness which not only others expected of us but which we most of all demanded of ourselves.
We cannot commemorate the 8th of May without being conscious of the great effort required on the part of our former enemies to set out on the road of reconciliation with us. Can we really place ourselves in the position of relatives of the victims of the Warsaw Ghetto or of the Lidice massacre? And how hard must it have been for the citizens of Rotterdam or London to support the rebuilding of our country from where the bombs came which not long before had been dropped on their cities? To be able to do so they had gradually to gain the assurance that the Germans would not again try to make good their defeat by use of force.
In our country the biggest sacrifice was demanded of those who had been driven out of their homeland. They were to experience suffering and injustice long after the 8th of May. Those of us who were born here often do not have the imagination or the open heart with which to grasp the real meaning of their harsh fate.
But soon there were great signs of readiness to help. Many millions of refugees and expellees were taken in who over the years were able to strike new roots. Their children and grandchildren have in many different ways formed a loving attachment to the culture and the homeland of their ancestors. That is a great treasure in their lives. But they themselves have found a new home where they are growing up and integrating with the local people of the same age, sharing their dialect and their customs. Their young life is proof of their ability to be at peace with themselves. Their grandparents or parents were once driven out. They themselves, however, are now at home.
Very soon and in exemplary fashion the expellees identified themselves with the renunciation of force. That was no passing declaration in the early stages of helplessness but a commitment which has retained its validity. Renouncing the use of force means allowing trust to grow on all sides. It means that a Germany that has regained its strength remains bound by it. The expellees' own homeland has meanwhile become a homeland for others. In many of the old cemeteries in Eastern Europe you will today find more Polish than German graves. The compulsory migration of millions of Germans to the West was followed by the migration of millions of Poles and, in their wake, millions of Russians. These are all people who were not asked, people who suffered injustice, people who became defenseless objects of political events and to whom no compensation for those injustices and no offsetting of claims can make up for what has been done to them.
Renouncing force today means giving them lasting security, unchallenged on political grounds, for their future in the place where fate drove them after the 8th of May and where they have been living in the decades since. It means placing the dictate of understanding above conflicting legal claims. That is the true, the human contribution to a peaceful order in Europe which we can provide.
The new beginning in Europe after 1945 has brought both victory and defeat for the notion of freedom and self-determination. Our aim is to seize the opportunity to draw a line under a long period of European history in which to every country peace seemed conceivable and safe only as a result of its own supremacy, and in which peace meant a period of preparation for the next war.
The peoples of Europe love their homelands. The Germans are no different. Who could trust in a people's love of peace if it were capable of forgetting its homeland? No, love of peace manifests itself precisely in the fact that one does not forget one's homeland and is for that very reason resolved to do everything in one's power to live together with others in lasting peace. An expellee's love for his homeland is in no way revanchism.
VI
The last war has aroused a stronger desire for peace in the hearts of men than in times past. The work of the churches in promoting reconciliation met with a tremendous response. The "Aktion Sühnezeichen," a campaign in which young people carry out atonement activity in Poland and Israel, is one example of such practical efforts to promote understanding. Recently, the town of Kleve on the Lower Rhine received loaves of bread from Polish towns as a token of reconciliation and fellowship. The town council sent one of those loaves to a teacher in England because he had discarded his anonymity and written to say that as a member of a bomber crew during the war he had destroyed the church and houses in Kleve and wanted to take part in some gesture of reconciliation. In seeking peace it is a tremendous help if, instead of waiting for the other to come to us, we go towards him, as this man did.
In the wake of the war, old enemies were brought closer together. As early as 1946, the American Secretary of State, James F. Byrnes, called in his memorable Stuttgart address for understanding in Europe and for assistance to the German nation on its way to a free and peaceable future. Innumerable Americans assisted us Germans, who had lost the war, with their own private means so as to heal the wounds of war. Thanks to the vision of the Frenchmen Jean Monnet and Robert Schuman and their cooperation with Konrad Adenauer, the traditional enmity between the French and Germans was buried forever.
A new will and energy to reconstruct Germany surged through the country. Many an old trench was filled in, religious differences and social strains were defused. People set to work in a spirit of partnership.
There was no "zero hour," but we had the opportunity to make a fresh start. We have used this opportunity as well as we could.
We have put democratic freedom in the place of oppression. Four years after the end of the war, on this May 8, in 1949, the Parliamentary Council adopted our Basic Law. Transcending party differences, the democrats on the council gave their answer to war and tyranny in Article 1 of our constitution: "The German people acknowledge inviolable and inalienable human rights as the basis of any community, of peace and of justice in the world." This further significance of May 8 should also be remembered today.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has become an internationally respected state. It is one of the most highly developed industrial countries in the world. It knows that its economic strength commits it to share responsibility for the struggle against hunger and need in the world and for social adjustment between nations. For 40 years we have been living in peace and freedom, to which we, through our policy in union with the free nations of the Atlantic alliance and the European Community, have ourselves rendered a major contribution. The freedom of the individual has never received better protection in Germany than it does today. A comprehensive system of social welfare that can stand comparison with any other ensures the subsistence of the population. Whereas at the end of the war many Germans tried to hide their passports or to exchange them for another one, German nationality today is highly valued.
We certainly have no reason to be arrogant and self-righteous. But we may look back with gratitude on our development over these 40 years, if we use the memory of our own history as a guideline for our future behavior.
* If we remember that mentally disturbed persons were put to death in the Third Reich, we will see care of people with psychiatric disorders as our own responsibility.
* If we remember how people persecuted on grounds of race, religion and politics and threatened with certain death often stood before the closed borders with other countries, we shall not close the door today on those who are genuinely persecuted and seek protection with us.
* If we reflect on the penalties for free thinking under the dictatorship, we will protect the freedom of every idea and every criticism, however much it may be directed against ourselves.
* Whoever criticizes the situation in the Middle East should think of the fate to which Germans condemned their Jewish fellow human beings, a fate that led to the establishment of the state of Israel under conditions which continue to burden people in that region even today.
* If we think of what our Eastern neighbors had to suffer during the war, we will find it easier to understand that accommodation and peaceful neighborly relations with these countries remain central tasks of German foreign policy. It is important that both sides remember and that both sides respect each other.
Mikhail Gorbachev, General Secretary of the Soviet Communist Party, declared that it was not the intention of the Soviet leaders at the 4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the war to stir up anti-German feelings. The Soviet Union, he said, was committed to friendship between nations. Particularly if we have doubts about Soviet contributions to understanding between East and West and about respect for human rights in all parts of Europe, we must not ignore this signal from Moscow. We seek friendship with the peoples of the Soviet Union.
VIII
Forty years after the end of the war, the German nation remains divided.
At a commemorative service in the Church of the Holy Cross in Dresden held in February of this year, Bishop Hempel said: "It is a burden and a scourge that two German states have emerged with their harsh border. The very multitude of borders is a burden and a scourge. Weapons are a burden."
Recently in Baltimore in the United States, an exhibition on "Jews in Germany" was opened. The ambassadors of both German states accepted the invitation to attend. The host, the President of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welcomed them together. He stated that all Germans share the same historical development. Their joint past is a bond that links them. Such a bond, he said, could be a blessing or a problem, but was always a source of hope.
We Germans are one people and one nation. We feel that we belong together because have lived through the same past. We also experienced the 8th of May 1945 as part of the common fate of our nation, which unites us. We feel bound together in our desire for peace. Peace and good neighborly relations with all countries should radiate from the German soil in both states. And no other states should let that soil become a source of danger to peace, either. The people of Germany are united in desiring a peace that encompasses justice and human rights for all peoples, including our own. Reconciliation that transcends boundaries cannot be provided by a walled Europe but only by a continent that removes the divisive elements from its borders. That is the exhortation given us by the end of the Second World War. We are confident that the 8th of May is not the last date in the common history of all Germans.
IX
Many young people have in recent months asked themselves and us why such animated discussions about the past have arisen 40 years after the end of the war. Why are they more animated than after 25 or 30 years? What is the inherent necessity of this development?
It is not easy to answer such questions. But we should not seek the reasons primarily in external influences. In the life span of men and in the destiny of nations, 40 years play a great role. Permit me at this point to return again to the Old Testament, which contains deep insights for every person, irrespective of his own faith. There, 40 years frequently play a vital part. The Israelites were to remain in the desert for 40 years before a new stage in their history began with their arrival in the Promised Land. 40 years were required for a complete transfer of responsibility from the generation of the fathers.
Elsewhere, too (in the Book of Judges), it is described how often the memory of experienced assistance and rescue lasted only for 40 years. When their memory faded, tranquillity was at an end. Forty years invariably constitute a significant time span. Man perceives them as the end of a dark age bringing hope for a new and prosperous future, or as the onset of danger that the past might be forgotten and a warning of the consequences. It is worth reflecting on both of these perceptions.
In our country, a new generation has grown up to assume political responsibility. Our young people are not responsible for what happened over 40 years ago. But they are responsible for the historical consequences.
We in the older generation owe to young people not the fulfillment of dreams but honesty. We must help younger people to understand why it is vital to keep memories alive. We want to help them to accept historical truth soberly, not one-sidedly, without taking refuge in utopian doctrines, but also without moral arrogance. From our own history we learn what man is capable of. For that reason we must not imagine that we are quite different and have become better. There is no ultimately achievable moral perfection. We have learned as human beings, and as human beings we remain in danger. But we have the strength to overcome such danger again and again.
Hitler's constant approach was to stir up prejudices, enmity and hatred. What is asked of young people today is this: do not let yourselves be forced into enmity and hatred of other people, of Russians or Americans, Jews or Turks, of alternatives or conservatives, blacks or whites.
Let us honor freedom.
Let us work for peace.
Let us respect the rule of law.
Let us be true to our own conception of justice.
On this 8th of May, let us face up as well as we can to the truth.
from Geoffrey Hartman, ed., Bitburg in Moral and Political Perspective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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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24, 2008
An Introduction to Quakerism
권력 종교로부터의 해방: 퀘이커 평화윤리
“성직자들과 모든 인간들에게 가졌던 나의 희망이 사라졌을 때.... 나는 ”너의 형편에 대하여 말씀해 주실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라는 음성을 들었고, 내가 그 음성을 들었을 때 나의 가슴이 기쁨에 벅차올랐다.”
-George Fox-
에큐메니칼하고 교파주의적인 신학의 그늘 아래에서 기독교인이 된 이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익힌바 신앙 고백에 어긋나는 주장에 대하여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일방적인 진리 주장과 이해에 익숙하여 신앙인 간의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더딘 까닭이다. 여기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는 자신들의 전통을 절대화하는 오류다. 깊은 신앙체험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 전통에 대한 절대화의 경향이 강하다. 배타적이고 심지어는 동료인간들을 향하여 저주도 서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자기 절대화의 오류가 얼마나 복음에서 먼 것인지 인식하려면 복음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는 절대화의 오류로 인해 스스로를 닫힌 세계관 안에서 가두는 오류다. 이 경우 생명과 평화와 자유를 누리기보다 반생명적이며 파괴적이고 억압적이다. 이런 가치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을 넘어서 집단을 이루고, 집단의 권위와 위력을 통하여 전승된 종교적 가르침은 인간성의 취약함을 틈타 이 두 가지 오류를 전승시켜오며 복음을 거슬러 인간의 존엄함과 자유를 훼손하기도 했다.
이런 이중의 윤리적 오류를 넘어서려면 지난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 담긴 신앙 고백의 전통을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의 정신세계는 그리도 흔히 서로를 배타하고 약자를 괴롭히던 논리, 즉 정통과 이단, 혹은 주류와 비주류의 종교 정치적 갈등의 시대가 어느 정도 지나갔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종교와 정치의 일치를 기하는 종교적 전통을 벗어난 세계에서 종교 권력이 오늘날 보편적인 인권사상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권법보다 숭고한 가치를 지난 것이어야지 인권법보다 저급한 가치를 주장하는 것을 일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사상의 유산 속에서 형성되었던 다양한 신앙 전통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이런 이해를 통하여 보다 나은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기독교 전통 가운데 가장 평화스럽고 평등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온 퀘이커 신앙 공동체의 평화 해방신학을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퀘이커 운동의 연원
퀘이커(Quakers)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 앞에서 전율하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퀘이커 공동체의 창시자인 폭스(George Fox)는 1650년 재판에 임하는 판사 베넷(Bennet)에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전율하는 태도를 가지기를 권했다. 하지만 판사는 폭스와 그의 동료들을 조롱하면서 퀘이커들이라고 불렀다. 폭스는 그의 신앙의 동지들에게 별명처럼 명칭을 ”퀘이커들“ 이라는 이름을 받아 들였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처럼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력한 열정에 감동하여 전율하는 이들 이었기 때문이다.”
퀘이커들은 동료 인간들을 향하여 “벗”(friend)이라 부른다. 그들에게서 신앙 안에서 가지는 교제는 벗으로서의 교제일 뿐이다. 여기에는 아무 것도 개입하지 않는다. 나이, 지위, 신분, 권력, 소유 -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서 서로에게 벗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그들은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라고 믿는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이르고 있는 바와 같이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퀘이커들은 서로에게 벗이다. 이 언표 안에는 모든 주종관계, 상하관계, 억압관계, 그리고 지배관계로부터의 자유와 해체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벗들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든 권력과 폭력, 소유와 탐욕과 사치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다. 평화롭고 평등한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단순함을 받아들이기 위함이다. 단순한 삶 그것이 내가 2004년 기독교 평화사상을 연구하기 위하여 필라델피아의 퀘이커 수도원에서 그들과 더불어 지낸 9개월 동안 보고 배운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말이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먹는 것이나 입는 것, 치장하는 것이나 가진 것에서 사치함이나 호화스러움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조지 폭스(George Fox)
1534년 헨리 8세는 수장령을 통해 영국교회를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 독립시킨 후 국왕이 성직자를 임명하는 교회의 틀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영국교회는 감독교회의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국교와 같은 성격을 가짐으로써 영국 교회는 귀족중심의 영국 사회의 틀을 닮아가는 귀족 교회(high church)의 성격을 더욱 가지게 되었다. 독일에서의 종교개혁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확대되었다면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셈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교회에 대한 정치적 지배가 강화되었고, 많은 성직자들이 투옥되었다. 가톨릭교회의 교권이 일단 부정된 영국 사회 속에서 교회 안에 형성되고 있는 불평등한 신분적 질서에 이상을 느낀 사람들이 간혹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성서적 삶의 원리와 당시 현존하는 영국교회 현실에 대하여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왕권과 결탁하고, 성직자들은 귀족화되었으며, 교리는 타락한 교회를 남루하게 치장하고 있는 과거의 유산에 지나지 않았다.
17세기 중엽 남다른 신앙의 열정을 가진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는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을 만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 의문을 제기하고 그들에게 답변을 구했지만 오히려 거의 절망에 가까운 현실을 느꼈다. 성직자들이 깊이 타락해 있는 현실 한 가운데에서 폭스는 영적으로 깊이 좌절했고, 탄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깊이 좌절하고 있었던 그에게 불현듯 "예수만이 나의 상황에 답을 주실 분"이라는 음성이 들려왔고, 그 순간 그는 캄캄함 한 밤중에 빛을 보는 것과 같은 기쁨을 얻었다. 며칠 후 그는 인근에 있는 펜들 힐(Pendle Hill)이라는 높은 언덕에 올라 묵상하는 중에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 몰려드는 환상을 보았다. 그 환상을 본 직후 폭스는 확신을 가진 거리의 설교자가 되어 교회제도와 성직자의 매개 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요지의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 교회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교류 가능성을 부정하는 성직자들의 권위 이면에 무수한 도덕적 오류들을 지니고 있었다: 성직자들의 부패와 타락, 신학자들의 성서적 근거 없는 논리, 억압적인 신적인 질서, 탐욕적인 성직자들의 담합과 착취, 권력과의 결탁과 권력에 대한 집착, 그리고 감격과 기쁨과 비전이 사라진 구태 의연한 형식적 예배, 신앙과는 상관없는 비본질적인 전례와 의식들, 무수한 헌금 강요와 의무로 인해 신자들은 지쳐있었다. 비교적 교육을 받은 이들이 제일 먼저 이런 현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서서히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국가의 권위와 교회의 제도적 타락에서 벗어난 신앙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영국 북부 일각에서는 성직자들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인 모임들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은 성직자들의 역할 없이 모여 앉아 기도와 묵상을 하고, 성령 체험이나 영감을 받은 이들이 말씀을 증언하는 모임을 만들어 그들의 갈급한 영적 목마름을 해소하고 있었다. 폭스는 이런 모임을 찾아가 그들의 신앙과 삶에 깊은 위로를 주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성직자 없는 신앙 공동체인 친구들의 모임(society of friends)이 만들어 졌다. 이들은 서로를 하나님을 두려워 떠는 이들이라는 의미에서 퀘이커(quakers),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는 차별과 위계질서가 없는 벗들(friends)이라고 불렀다. 이런 명칭들은 성서에서 가져 온 것들 이었다. 하나님의 현존 없는 부실한 교회 안에서 인간의 주장과 하나님의 말씀을 혼동하고 있었던 교회의 가르침은 신자들로 하여금 오히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경건한 체험을 가로 막고 있었다. 하나님 현존과 임재의 경험이 없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메마르고 건조할 수밖에 없었고, 교회의 영성은 점점 텅 비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폭스의 뒤를 이어 퀘이커들의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한 사람은 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 1648-1690)다. 바클레이는 자신의 영혼의 눈으로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매우 단순한, 그러나 쉽지 않은 신학적 견해를 표명하였다. 결국 너무나 인간적인 계산과 타협의 논리를 받아들여 온 과거의 기독교 전통에 대하여 격별을 선언하는 신학적 견해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가 영국 교회의 전통주의를 버린 것은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고, 동시에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신앙체험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리에 앞선 살아있는 신앙체험
이런 까닭에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신비주의 전통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영적인 존재라는 깊은 자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귀기우림, 그리고 진실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채워 나갔다. 만일 직접적인 신앙체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누군가 매개자를 필요로 하거나 매개물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주요 교단에서는 신자들의 직접적인 영적 체험에 근거한 신앙을 다소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영적 분별의 과제는 매우 신중하고 깊은 신학적 훈련을 받은 이들이 담당해야 할 과제라고 보아온 까닭이다. 교직제도와 교의학적 체계는 바로 이렇게 훈련받은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에 의하여 구성되거나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이런 교권 주의적 견해는 하나님 앞에서 직접적인 계시적 관계를 부정하고 신자와 성직자간에 평등한 영적 권위를 부인하는 이론으로 간주되어 퀘이커들에 의하여 매우 급진적으로 거부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퀘이커 운동은 기존의 교단적 교회들에 비하여 매우 독특한 신학적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우선 계시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성경은 과거에 기록된 계시적 증거로서 받아들여진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서 거룩한 영감에 고무되어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를 담은 경전은 우선적인 중요성을 가지지만 그렇다고 하여 유일회적인 것은 아니다. 즉 새로운 계시 사건은 계속 일어나고 있으므로 사도신경과 같이 지난 사건을 굳혀버리려는 의도를 가진 신앙고백은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기존의 사건에 더하여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그 계시에 대한 인식가능성을 열어두게 된 것이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귀를 가진 이들에게 진리를 계시하신다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계시가 성서 경전이 교회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결정되었을 때 완성되었다는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은 타락했지만 원죄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주어진 영적인 씨앗, 곧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더욱 타락하거나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 죽임을 당하신후 부활하셔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위한 진리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은총을 귀히 여기고 그 분의 가지가 되어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를 얻고, 그와 동시에 성화의 길에 들어선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힘입어 빛과 사랑을 증언하고 봉사하는 삶으로 나간다. 물에 의한 세례는 그 본질상 원형의 것이지만 참된 세례는 성령에 의한 감화다. 그리고 이들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떡과 포도즙을 먹고 마시는 제의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고난과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영에 닿는(reached) 체험을 중시하였는데 조지 폭스는 이런 체험의 계시적 의미를 일러 씨앗(seeds)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경험을 '직접적인 개인적 체험'(an immediate personal experience), '충만한 하나님 의식'(an overwhelming consciousness of God), '경험의 극치'(peak experience)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으나 이 모든 표현들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앙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복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초기 퀘이커들은 이런 체험을 내적 빛(Inner Light)에로의 복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거친 이들은 한결같이 깊은 기쁨과 더불어 무한한 용기와 능력을 얻게 되었다.
조지 폭스에게 있어서 이 체험은 그의 일상을 변혁시킨 능력의 원천이었다. 퀘이커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함으로부터 이러한 변혁의 능력에 사로잡힌다고 믿게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경험은 배타적인 구원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해되었고, 근원적으로 주어진 말씀의 씨앗, 혹은 내면적 빛의 역사로 이해되었다. 이렇듯 성령에 의한 내적 증거와 보편적인 계시론은 퀘이커들로 하여금 배타적 교리주의를 허물고 보편적인 계시의 수납가능성을 긍정하는 신앙을 키웠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들에게 살아있는 증거와 내면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는 빛을 판단할 수 있는 거룩한 영을 판단할 기준을 주셨다”고 고백한다.
탈위계적 신앙 공동체
1691년 죠지 폭스가 세상을 떠나게 될 즈음에 퀘어커들은 영국에서 근 6만 명에 달했다. 퀘이커 신앙 운동 초기에는 성직주의를 거절하면서 일어난 평신도 운동과 같은 성격을 가지면서 그 중심에는 여전히 복음주의적인 핵을 지니고 있었다. 이 핵심은 인간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통한 은총의 수납을 통한 의인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반성직주의(anti clericalism)는 곧 성직자들이 인식론적 우위를 주장하던 신학적 테마들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기존의 복음주의적인 신앙내용에서 이성적 합리성을 소외시키는 미신적 요소들에 대한 비판과 제거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런 비판적 흐름을 형성하게 된 배경으로서 당시 이신론(theism)적 영향도 지대했지만 영국의 경험론적 사유의 영향도 매우 컸다. 하지만 이러한 회의를 불러일으킨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요인은 미신적 요소를 주장하던 성직자들의 도덕적 부패와 타락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도 믿지 않는 내용을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강요하고 있었고, 경건을 가르치는 이들에게서 경건의 능력은커녕 도덕적 타락이 현저하여 그들이 가르치는 하나님 신앙에 대한 회의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신론적 영향보다는 성직자들이 보여주는 무신론적 삶의 태도가 오히려 평신도들을 중심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신앙 운동을 하게 만들었고, 여기서 자연스럽게 퀘이커 신앙운동이 활기 있는 신앙세계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이론적이고 고답적인 교리체계를 넘어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 신앙운동은 신비주의적 체험에 바탕을 두는 대신 문자와 권위와 제도를 뛰어넘게 되었다.
대부분의 소종파적 신앙운동은 성서적 공동성과 평등성의 이상을 찾아 위계적 사회질서를 극복해 보려는 노력을 기우려 왔다. 그러나 이상적 신앙 공동체들은 그 지나친 “이상주의”로 인하여 그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역사 속에서 실험하다가 지리멸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2만 여명의 추종자들을 두었던 바, 앤 리(Ann Lee)가 이끌던 쉐이커(Shakers), 그리고 진첸도르프(Count Nicholas Ludwig Zinzendorf)가 이끌던 모라비난 형제단(Moravian Brethren), 랲스의 조화공동체(George Rapp's Harmony Community),원시 공산주의적 사회 형성을 시도했던 신도덕 세계 건설자 오웬(Robert Owen)을 비롯하여 이카리아(Icaria) 공동체, 평화선교 공동체를 형성했던 디바인(Father Divine), 자유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려 했던 오네이다 공동체(Oneida) 등이 그러한 경우다.
이들 중 대부분은 그 사회적 원리의 불충분함과 인간의 죄성에 대한 통제와 억압 혹은 지나친 낙관적 이해로 말미암아 사회적 기여는커녕 그 공동체의 존속 그 자체를 위태롭게 만든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17세기에 형성된 퀘이커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여전히 크고 작은 모임들을 이루고 있으며, 그들의 평화주의적 실천능력은 오늘의 세계에서 크게 인정을 받아 왔다.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이나 개신교적 특성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점에서 매우 탈위계적이지만, 그들의 평화주의적인 삶의 자세로 인하여 오늘의 세계에서 많은 이들로부터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퀘이커 신앙은 일고 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평등주의적 신앙 공동체
사회 윤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퀘이커리즘은 무엇보다도 매우 강한 평등주의를 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평등주의를 가르친 조지 폭스는 세속 권력을 가진 이들만이 아니라 성직자들의 영적 혹은 지적 우월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종교개혁적인 만인 사제론을 성과 제도와 신분을 넘어선 차원에서 긍정했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리즘은 급진적으로 평등주의적인 인간론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삶을 단순 검소하게 살아가는 원칙을 가짐으로써 소유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평등한 삶을 살아가려 했고, 권력과 소유로 인하여 평등주의적 관계가 훼손되지 않는 "친구들"의 관계를 중시했다.
따라서 수직적인 상하위계질서를 주장하는 일이 퀘이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이 평등주의적 경향은 기독교 평화운동으로 연계되어 20세기에는 생명평화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평등주의는 깊이 있는 연대와 동정의 감정을 불러 일으켜 개인주의적인 고립주의나 가학적인 집단의 공격성을 극복하게 했을 뿐 아니라 불의한 힘에 의하여 고난을 겪는 이들과 연대하는 강한 유대감을 불러 왔다. 따라서 퀘이커 공동체 안에서는 평등하게 피조된 생명 간에 혹은 인간과 인간관계를 심원하게 훼손하는 여하간의 폭력도 거부하는 절대 평화주의적 입장이 형성되었다. 결국 퀘이커들이 지닌 평등주의적 신념은 권위적 위계질서의 해체와 폭력의 거절이라는 실천적인 과제로 이어진 것이다. 이 점에서 퀘이커 평화운동은 기독교 전통에서 유래한 하나의 성서적이며 사회윤리적인 실천 모델로 여겨졌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신앙 공동체가 끊임없이 유혹받아 왔던 것은 바로 자기 안전에 대한 개인적 혹은 공동체적 욕망의 충족을 긍정하려는 것이었다. 힘이 없고 미약할 때 기독교 공동체는 고난과 고통을 수납했을 뿐 아니라 소유와 권력에 대한 의지조차 경원시했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점차 힘을 부여받기 시작했을 때부터 기독교 공동체는 부여된 힘을 오용하기 시작했다. 섬김의 공동체를 지향했지만, 자신들과 다른 이들을 향한 배타와 정죄와 심지어는 전쟁까지도 불사했던 것이다. 이런 경향은 4세기 어거스틴 시대를 지나면서 강화되었고, 결국 기독교 신앙에 내면화되어 기독교 승리주의 혹은 정복주의 사상으로 진화되어 나갔다.
기독교 승리주의는 겉으로는 도덕주의적 우월성이나 영적 구원론을 제시하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그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현실적으로 권력화 된 힘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권력은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으로 양분 되지만 이 두 가지는 친화성이 있어서 언제나 서로 보완 지지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국교화된 영국 성공회는 이런 속성을 매우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영국 국교가 주장한 내용을 살펴볼 때 종교적으로 본다면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하며 영적 승리주의를 외쳤지만, 이런 영적인 승리주의가 대영 제국의 힘과 동행하게 될 때 힘에 의한 약자들의 억압과 착취와 수탈을 당연시 했다. 대영제국 하에서 전 세계적인 식민지주의가 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기독교 승리주의의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초기 퀘이커들은 권력의 악마적 속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이 얼마나 잔인하며, 비인도적인 일도 서슴지 않고 시행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관료적 질서의 냉혹함이 어떻게 비기독교적인 삶을 지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따라서 퀘이커들은 모든 현실주의적 기득권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들의 대부분은 성직도, 공직도, 나아가서 모든 권력구조가 주는 지배력의 효용성을 포기한다. 성서의 평화 주의적 원칙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다른 이를 지배하고 판단하며 심판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서는 것이다. 이로서 그들은 평등주의적인 기도교적 삶의 방식을 공동체적 혹은 개인의 퀘이커적 삶의 기본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1640년대부터 1660년대는 매우 중요한 사상적 뿌리가 내린 시기이다. 이 시기에 퀘이커리즘이 일어났고, 정치적 민주주의 개념, 토지의 공개념, 신분적 차별에 대한 비판, 초기 원시적인 공산주의 사상, 국가권력과 교회권위에 대한 의문 등은 인간간의 평등이라는 급진적 개념에서 나온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요구하는 표현이었다. 이런 평등주의 사상은 신학적으로 모든 사람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직접성의 원리에 기초한다. 즉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매개도 필요하지 않다는 사상은 결국 매개적 권위인 교회 성직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불러 일으켰고, 성직자들에 의하여 권위를 부여받아 온 국가권력과 권위의 근거에 대한 회의를 불러왔던 것이다.
여기서 소종파적 신앙인(the Separatists, the Brownists, Independents, Baptists, Milenaries, Familists, Diggers, Ranters, and Seekers)들은 성직자들의 목회나 십일조 봉헌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교회출석도 거부하고, 침묵 중에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때에 평범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교육의 본질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여성들도 성경 해석의 자유를 가지게 했으며 때에 따라 강단에서 설교를 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남성중심의 권위아래 해석되던 성경이 여성적 가치를 담은 의미로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서 해석은 교권에 의하여 길러진 학자들이나 성직자들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은 이들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령에 감동을 받은 이면 남성이든 여성이든지 막론하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의 증언자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기존의 교회들과 정치가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이라고 비판했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논리와 근거를 가지고 퀘이커들의 평화주의를 탄압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
이와 같이 퀘이커들은 평화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보적인 태도를 열어 나가게 되었다. 사실 개신교 운동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종파들 중의 하나가 바로 퀘이커였다. 이들은 1660년을 전후해서 극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살아남았던 많은 이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들이 가졌던 신학적 사고는 "지속적으로 내리는 계시"(a continuing revelation)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신앙적인 "지속적 혁명"(a continuing revolution)이다. 여기서 여성의 평등권 문제는 매우 중요한 새로운 삶의 혁명적 원리로 받아들여졌다. 1656년 여성들에게 설교하기를 허락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조지 폭스는 지난 16세기 동안 여성들을 침묵 속으로 몰아넣었던 바울의 주장을 넘어서서 새로운 영의 빛에서 여성의 영적 지위를 긍정하는 입장을 가졌다. 즉 성서의 진술을 넘어선 계시적 진술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페미니즘 운동의 씨앗이 바로 퀘이커리즘 안에서 태동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퀘이커들은 성서주의적인 입장에서 2000년 전에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되었다거나 닫혀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지속적인 계시를 통해 지속적인 혁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인 신앙운동은 정부와 기존 교회로부터 다양한 이유로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 주요한 이유는 십일조 거부와 지방 장관들을 향해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추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이유와 목사의 주례를 받지 않는 결혼을 한다는 등의 이유였다.
초기 퀘이커 지도자들은 많은 고난을 겪었다. 조지 폭스도 수차례 옥에 갇혔고, 그의 아내인 마가렛도 랑카스타 감옥에 4년 동안 갇혔다. 그러나 온갖 박해에도 굴복하지 않고 퀘이커들은 1660년 경 신앙 양심상 전쟁행위에 가담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군복무 거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관용법(the Toleration Act of 1689)이 제정되기 까지 무려 15,000명 정도의 퀘이커들이 감옥에 갔고 450명 정도가 죽임을 당했다. 퀘이커 신앙을 신학화 했던 윌리암 펜(William Penn)도 신성모독 죄로 런던 타워에 8개월간 강금된 적도 있었다. 그는 후에 영국 국왕으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하사받았는데 국왕은 이 땅을 펜실바니아라고 불렀다. 펜은 감옥에 있는 중 "고난 없는 영광은 없다"(No Cross, No Crown)라는 소책자를 써서 퀘이커들의 삶에 영광이라는 삶의 목표보다 고난을 수납할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밝혔다.
제의적 구속력을 벗어난 비언어적 영성
현재 퀘이커들은 전 세계적으로 약 36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예배 형식을 전혀 프로그램화하지 않는 모임(Unprogrammed meeting)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우리는 퀘이커들의 독특한 예배 관을 이해할 수 있다. 성직자의 영적 우월성을 전제하지 않는 퀘이커들에게는 목사라든지, 신부, 혹은 이에 상응하는 직제를 가지지 않으며, 동시에 모든 구성원들 사이에 직제에 따른 지위고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이들의 예배는 주로 예배처소(meeting house)라 불리는 곳에서 일정한 시간에 모여 침묵과 명상으로 이루어진 예배를 드린다. 어느 누가 선도하거나 가르치거나 지시하는 내용은 없다.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언어적 세계를 넘어서서 비언어적 영적인 교제와 영성적 체험과 치유가 일어나는 신앙 체험을 매우 중시한다. 예배의 주체는 인간들이 아니라 그 들 속에서 역사하는 빛과 거룩한 영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퀘이커들은 “치유를 위한 모임을 언어적으로 표명된 요구들이나 기도 없이 전적으로 침묵 가운데 가질 수 있다. 많은 경우 기독교적 예배를 드리는 우리는 구화적 문화 속에서 살고 의미를 나누기 위하여 우리는 언어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퀘이커 치유모임에서 간혹 그들은 비언어적인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침묵은 간혹 사실상 언어를 넘어선 교감과 영적인 공감의 능력을 불러오기 때문에 언어가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라면 침묵은 언어를 초월한 영적인 교제를 가능케 한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들의 예배와 모임에서 참여자들은 언제나 침묵 속에서 자기 정화와 절제, 그리고 영적인 교제를 위한 준비와 수용의 길을 열어 나간다.
시편 46장 10절에 기록된바 “너희는 고요 중에 내가 하나님인 줄을 알라.“라는 영성적 요구를 퀘이커들은 진지하게 수용했다. 내면적인 침묵은 나의 언어와 주장을 철회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기 증거가 일어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침묵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것들이 우리에게 미치는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자유를 거쳐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향한 자유로운 경청의 자리에 서게 된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실존이 여실히 드러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퀘이커 공동체는 철저한 자발성에 기초한 공동체이며 하나님 앞에서 서로의 영적인 자율과 독립을 인정하고 누구나 하나님의 신성 혹은 거룩한 영에 접촉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가장 급진적인 퀘이커들은 조직 자체를 완전히 해체시켜 월별, 혹은 연례적 모임(annual meeting)에조차 가입하지 않는 독립적인 모임을 가지고 있다. 비록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신앙을 목표로 하지만, 서로 연계하고 집합적으로 모이게 되면 권력이 형성되고, 권력을 통한 지배와 조작이 일어나는 것을 경원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간혹 아주 큰 모임이 자연스럽게 형성될 경우 전문적인 신학 훈련을 받은 이들이 목회적이며 공동체적 책임을 전임으로 맡아 수고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모임을 programmed meeting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예배의 근본 원칙과 내용에서 이들은 교조주의적인 권위를 넘어서 다양성을 수용하며 영적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나는 2005년 필라델피아의 스왓츠모어(Swathmore College) 대학의 평화 도서관에서 기독교 평화주의 사상을 연구하며 퀘이커 공동체에서 9개월을 그들과 더불어 지냈다. 내가 경험한 퀘이커들의 영성은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에 늘 접촉된다고 믿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준비되고 예비된 의식이 아니라 직접적인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 예배를 중시한다. 인위적인 제의, 위계적 질서, 테크닉을 동반한 음악, 성직자에 의한 인도, 인도자와 예배자가 구별되는 예배 -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서 모두가 서로 서로 평등한 위치에서 예배를 드린다.
예배 장소도 성직자가 주도하는 강단과 강단을 향한 청자들의 좌석이 배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방향이 서로 마주보면서 둘러앉는 형식을 취한다. 예배 시간이 되면 모두 편안한 자세로 침묵과 묵상의 시간을 가진다. 영혼의 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마음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간혹 침묵이 계속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때로 거룩한 영에 인도함을 받아 공동체를 향한 자기 체험과 신앙을 고백한다. 간혹 참여자 중에서 조용히 일어나 찬송시를 읊기도 하고, 성서의 말씀을 묵상하며 깨달은 바를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순서는 예배에 앞서서 미리 정해지는 일이 없다.
침묵에는 수도사들의 침묵이 있고, 신비주의자들의 침묵이 있다. 수도사들의 침묵은 수도원의 침묵과 명상적 훈련을 위하여 요구되는 것이라면 신비주의자들의 침묵은 신성 앞에서 인간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침묵이라고 할 수 있다. 퀘이커들의 침묵은 수도사들의 것이라기보다는 신비주의자들의 침묵에 가깝다. 퀘이커들은 인위적인 질서와 화려한 수사학적인 언술을 버리려는 깊은 절제가 몸에 배어있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공격적인 언어도 자기 과장의 언어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가지는 고백의 언어이다. 퀘이커들의 예배에는 이런 까닭에 화려한 교회음악의 전통도 이어지지 않는다. 이들의 청빈하고 단순한 예배실에는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한 소리도 성가대의 아름다운 화음도 없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수성을 일정한 범주 안에 제한하여 자유로운 초월의 차원을 제거하기도 하고, 문화적 관습 속에 우리를 매어두기도 하는 까닭이다.
합의 공동체를 지향한 해명 위원회
성직과 교리 체계를 중시하지 않는 퀘이커들의 삶에는 매우 독특한 모임이 있다. 그것을 일러 해명위원회(Committees for Clearness)라고 부르는 데 이 위원회는 원래 퀘이커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의사를 확인하거나 퀘이커들이 다른 퀘이커와 결혼하려 할 때 새롭게 형성되는 부부에 대한 퀘이커 공동체의 인준절차를 위하여 형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모임은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퀘이커 공동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기구로 발전하고 있다.
퀘이커 공동체는 교파 주의적 교회들과는 달리 아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명 위원회는 퀘이커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만나 당사자의 의지와 결단의 성실함을 검증한다. 뿐 아니라 퀘이커들은 자신이 결혼을 할 경우에도 공동체의 동의와 이해를 구하기 위하여 이 해명위원회가 열리기를 요구한다. 또한 누군가가 삶에 있어서 커다란 계기나 위기를 만났을 때 이 위원회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것인지를 공동체의 합의를 거쳐 해명 받을 수도 있다.
누가 직업을 바꾸려 할 때도 이 위원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신앙 공동체 안에 있는 누군가가 어려움과 고뇌에 휩싸이지 않도록 배려하는 위원회이기도 하지만, 개인이 결단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하여 이 위위원회를 통하여 합의에 이를 수 있기도 하고 또한 지원이나 후원을 받을 수 있다. 예컨대 퀘이커 평화 팀(friends peace team)에 들어가 일하고 싶은 데 자신의 개인적 결단만을 가지고 그 일을 할 수 없을 때 당사자는 해명위원회를 열고 왜 자기가 평화 팀에 들어가 일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밝히면 위원회는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고 그 동기와 목적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질문을 하고, 마침내 결정에 이르면 퀘이커 공동체가 그의 사역을 위하여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정하기도 한다.
이 위원회의 운영에는 몇 가지 원칙이 적용된다. 우선 만장일치제로 의제를 합의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휴회하고 다음 모임에서 왜 우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지를 검증한다. 특별한 의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그 반대 이유를 명료하게 밝혀야 하고, 찬성하는 이들은 찬성의 이유를 입증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들은 성령의 조명아래 종국에 가서는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해명위원회에서의 진술방법 또한 매우 독특하다. 이들은 자신의 발언을 극도로 자제하며 내용을 매우 간략하고도 명료하게 밝힌다. 누군가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반박하듯이 발언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 앞에서 그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으며 발언하고, 생각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공동적 합의를 매우 의식적으로 존중한다.
따라서 누군가의 발언이 있을 경우 조용히 경청하고 제아무리 이견과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즉시 반대 견해를 표명하지 않는다. 즉 앞 다투는 일이 없고, 이해관계나 정치적인 이유를 들어 반박과 논박을 하지 않는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운 발언들은 해명위원회에서 대부분 걸러지게 되므로 그런 발언들은 거의 돌출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혹 이 모임에서 신성에 인도함을 받는다는 보이지 않는 합의가 깨어질 경우 대부분 그 자리에서 휴회하는 것이 원칙이다. 다툼을 연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발언을 독차지 하지도 않는다. 모든 퀘이커 모임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신앙고백이 전제되어 있다. 이들은 개인이나 공동체나 거룩한 빛에 의하여 인도 받음으로써 어둠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고백을 일상화하며 살아가는 삶을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방법으로 위원회를 운영하는 퀘이커 공동체 안에는 여러 가지 위원회들이 있는 데 “돌봄과 후원 위원회“ (Meeting for Care and Supports Groups), 화해 위원회 (Committees for Reconciliation), 그리고 목회적 관심을 나누는 위원회(Committee for Concern in Ministry) 등이 있다. 이 위원회에서는 새로운 목회적 혹은 영성적 문제가 대두될 경우 공개 서신을 내기도 하고, 공동체의 영적 및 사회적 인식의 확장을 위하여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다양한 웍삽 프로그램을 열기도 한다. 우리는 대부분 민주적 합의를 중시하는 문화적 풍토에 있지만, 퀘이커들은 민주적 다수결의 원칙을 넘어서서 구성원 만장일치의 방법으로 합의를 도출한다.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를 받는다면 다양성을 넘어선 일치에 이를 수 있다고 믿어온 까닭이다.
퀘이커 평화주의
종교적 전통 안에서 본다면 성서적인 평화주의적인 원칙은 몇 가지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세계 현실의 갈등구조와 떨어져 개인의 영성적 평화를 추구하는 소극적인 평화주의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평화를 깨는 요인들을 제거해 나가는 적극적 평화주의가 있다. 이 경우 평화를 깨는 적은 폭력들을 더 큰 폭력으로 제압하는 방법을 받아들여야 한다. 종교는 본래 폭력집단을 형성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이런 방법에 동의하는 경우 종교와 정치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해 진다. 심지어 지난 역사에서 대량 살상을 피할 수 없는 전쟁행위도 평화의 방법으로 이용되어 왔던 사례를 우리는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많은 전쟁은 사실 평화를 위한 방법이기보다 자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이해관계를 관철하기 위하여 동원되어 왔다.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 전통은 이런 길을 함께 가면서 정당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을 만들어 국가권력을 지원해 왔다. 미셜 왈쩌의 주장을 따른다면 정당전쟁 이론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섬기기 위한 것이었다: “정당 전쟁 이론은 권력들을 섬기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최소한 이것이 내가 어거스틴이 이루어 놓은 것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그 자리에 기독교 군병들의 적극적인 직무로 채웠다.” 그리하여 주류 기독교 공동체는 평화의 종이 되겠다고 하면서 많은 경우 전쟁의 종이 되어 전쟁을 지지하는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평화주의와 관련해서 본다면 퀘이커들은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 평화적인 신앙 공동체를 지향한다. 이들은 소극적인 평화주의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평화주의 정책을 가지고 있다. 내적인 평화를 중시하면서도 이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외면 세계의 평화를 위한 참여와 실천에 어느 기독교 공동체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비폭력 평화주의를 현실주의적 평화주의보다 더욱 우월한 도덕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퀘이커들은 모든 폭력적인 기획을 포기하고 거부한다. 그와 동시에 갈등을 야기하는 폭력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 즉 폭력적 기획에 대한 대안(Alternatives to Violence Project)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원칙은 퀘이커 운동 초기에 확정되었다. 예컨대 1660년 퀘이커들의 정치적 성향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퀘이커들은 찰스 2세에게 보낸 문서에게 다음과 같이 그들의 비폭력 평화주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혔다.
“우리는 그 목적이 무엇이든, 어떤 전제가 있는지와 상관없이 무기를 들고 싸우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징벌 그리고 다툼을 철저히 부정 합니다; 이것은 전 세계를 향한 우리의 증언입니다. 우리가 인도함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은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일단 무엇인가 우리에게 그것이 악이라고 가르쳐진 이상 항상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진리에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서라든지 혹은 이 세상 나라들을 위해서 어느 누구와도 적대하여 다투거나 무기를 들고 전쟁하는 길로 인도하시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이를 세상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폭스는 전쟁과 다툼에 대한 정당화의 논리는 타락한 아담의 부패한 인성에서 나온 것이지 우리의 모범인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의 평화 서신에서 명확히 밝혔다. 그는 이 서신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전사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사람들도 아니요 그리스도의 나라와 더불어 있는 이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는 평화와 의속에 세워지지만 전사들은 육욕을 쫓는 이들인 까닭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이들은 생명을 구원하려 오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니다; 그 나라는 평화로운 나라이고; 투쟁 한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그의 나라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복음을 위하여 싸우는 체 하는 자들은 기만을 당하는 이들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것은 악마와 타락한 인간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즉 복음은 다툼이 있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싸우고 언쟁하는 체 하지만 그들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시온을 위하여 싸운다고 말하는 소리는 어둠에 사로잡힌 것이다: 시온은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떤 유형의 폭력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용될 수 없다고 보는 퀘이커 평화주의적 원칙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적용되어 이들은 노예제도 폐지 운동에 앞장섰고,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정한 거래 문화를 촉진시켜왔으며, 여성의 권리 확장에 크게 기여해 왔다. 이와 더불어 갈등이 야기되었을 때 이를 폭력 없이 해결하기 위한 관계론을 발전시켜 왔고, 고난을 당하는 이들 편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돕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모해 왔다. 이들은 1810년 노예폐지운동과 정의를 위한 평화적 노력을 위하여 기독교 공동체 중에서 최초의 평화 운동기관을 형성했다. 이들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특히 세계 1, 2차 대전 중에 두드러졌고, 적대감에서 비롯되지 않은 그들의 평화를 위한 기여와 노력을 인정하여 세계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퀘이커들에게 수여했다. 기독교 세계 2000년의 역사에서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신념을 가지고 내적인 평화의 힘을 권력이나 무기의 힘보다 더 강한 것이라고 믿고 평화를 위하여 살아온 종교인들에게 평화상을 수여한 경우는 아마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들에게 있어 정부, 정책, 교리와 신조 모든 것은 변경 가능할지라도 평화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불변의 원리로 남는다.
퀘이커적 삶의 원칙들
생명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헌신과 희생의 대상이 되는 모든 이들의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이들은 기독교 내 어느 집단보다도 생명권 지향적인 가치를 존중한다. 이 가치를 연장하고 확대하여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적대자들을 향해서도 생명존엄의 가치를 적용한다. 이런 생명윤리의 내적 근거는 물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내재적 동행, 참여, 그리고 인도하심을 이들의 일상에서 체험으로 만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에 대한 퀘이커들의 체험은 계시에 대한 폐쇄적 이해를 넘어서 지속적인 하나님의 계시 사건을 받아들이게 했다. 이런 점에서 기존의 신앙원리를 화석화시키고 율법적으로 적용하는 이들과 매우 다르다. 따라서 이들은 권력화된 배타적 교조주의나 교리적 승리주의나 정치와 종교의 시너지 효과를 통하여 길들여진 호전적인 종교적 적대성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퀘이커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 윤리적 합의는 그들의 삶을 단순함(simplicity)과 정직함(integrity), 공동성(community) 그리고 다양성(diversity)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무엇보다도 성직주의의 계층성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허위의식에서 깊이 절망하며 퀘이커 신앙을 발전시켜온 전통으로 인하여 이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대한 보편성(universality) 이해는 그들의 사상을 개방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교조화하지 않도록 방부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예배를 통하여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이루고, 깊은 동정과 공감을 나누는 평화 공동체의 실현이 가능하고 믿는다. 이들은 생명과 평화의 그리스도는 죽음과 폭력의 문화를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자리에서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러한 생명과 평화의 사역에서 전통적인 견해들을 수정하고, 현대 세계가 불러오는 새로운 삶의 영역에서도 평화와 생명적 사역을 확장한다. 이 연장 선상에서 이들이 추구하는 환경윤리와 환경운동은 그들의 근검절약하는 단순한 삶의 구조를 타고 매우 실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필라델피아에 소재를 두고 있는 퀘이커 수도원 펜들 힐에서는 몇 가지 원칙을 공동체 내부에 적용하고 있다. 우선 첫째로 그 공동체의 스텝들은 그 역할에 따라 높은 임금을 받는 이들이 없고 대부분 거의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 교수가 되어 가르치는 일을 하는 이나 주방에서 일하는 이, 정원을 관리하는 이 사이에 임금의 격차가 거의 없다. 둘째, 이들은 내면의 가치의 소중함을 중시하면서 사치한 옷차림이나 불필요한 치장을 하지 않고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아간다. 셋째, 이들은 공동적 식사를 하며 모든 이들이 분담하여 노동에 참여한다. 넷째, 이들은 “공정한 거래“(fare trade) 원칙을 적용하여 센터 소재에서 300Km 이내에서 생산된 물품을 구입하도록 힘쓰고, 노동의 착취를 통해 값싸게 공급되는 물건들은 구입하지 않는다.
하나의 예로 펜들힐에서는 커피를 구입할 때 시중에 값싸게 유통되는 것에 비하여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비싼 커피를 사서 끓인다. 근 8-90명이 마시는 커피를 이렇게 공급하기 위하여 이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큰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면서도 노동과 환경의 착취 없이 생산된 것들을 구입하는 것도 사회 정의를 지키는 것이 며 이는 정의 실현을 위한 매우 중요한 실천적 증언적 행위라고 믿는다. 이들은 단순하고 청빈한 삶을 산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먹거리와 관련하여 사회적 정의, 환경적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권력으로부터의 해방
퀘이커 평화주의 전통에 근접한 쉐이커 신앙 공동체는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의 영적 경험을 중시하면서 가부장적인 가족주의적 이기성도 극복하려는 의지까지 신앙 공동체가 받아들이는 면모를 보였다. 이들은 매우 강력한 완전 주의적 윤리를 적용하여 세상과의 분리, 평등주의, 소유의 포기, 성결의 원칙, 그리고 절대 평화주의와 신생(New Birth)의 원리를 적용하면서 종말론적인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러나 퀘이커들은 쉐이커들이 지향한 격리된 완전한 사회를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세상과 구별되는 삶의 원리를 평화주의에서 찾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일을 공동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적용했기 때문이다.
퀘이커들의 평화적 삶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멈추지 않는 성실성에 그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한국 기독교가 교회 성장주의와 영적 승리주의를 옷 입고 세속적인 가치들을 통합하면서 매우 폭력화되어 있는 현실을 바라볼 때 퀘이커적 영성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혹은 우리가 슬며시 버리고 만 기독교 평화주의 전통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퀘이커 운동은 앞 다투어 크기를 자랑하고 장자교단이라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 오만한 교회가 보기에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소종파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거스틴 이후 콘스탄틴 제국의 종교가 되어 기독교 스스로의 정체성을 제국성과 결합해온 기독교 신학 전통에 대한 비판이론이 적지 않은 오늘 날 제국주의적 종교성을 철저히 배제하고 성서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인 평화 주의적 원칙을 지키고 있는 퀘이커들의 신앙 유산은 우리가 가진 신앙 속에 내제되어 있는 폭력성을 드러내어 되돌아보게 하는 기독교 평화 윤리적 유산을 담고 있다.
일찍이 에른스트 트뢸치가 언급한 바 있듯이 교회유형은 세속의 권력을 이용하여 선교적 도구로 삼는 데 비하여 소종파 신앙은 현실주의적인 이해, 양적인 성장, 확장, 성공의 논리를 초월하여 내적인 가치를 중시하고 성서적 원칙을 찾아 그 원칙을 통하여 자신들의 기독교적인 삶을 규명해 왔다. 과연 오늘의 한국 교회들이 “진정한 기독교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사회적 비판과 질문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이 때, 성장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결코 성공적이지 않은 퀘이커 신앙은 우리 교회들이 성장과 확장을 서두르면서 소홀히 해온 평화주의적인 가치와 내면적 신앙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영성의 샘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퀘이커 영성의 샘은 모든 굳어진 종교적 규범과 가치, 제도적 경직성에서 그리스도적인 신앙을 해방시킨 하나의 모델이다. 이 퀘이커 신앙은 그 흔한 권력과 탐욕의 유혹에 대응하여 국가주의나, 제국주의, 자본주의나 집단주의의 유혹을 자유롭고 내적인 평화의 영성으로 극복해 온 양심적 전통을 형성해 왔다. 기독교 신앙이 지난 역사 속에서 간혹 억압자 편에 서서 민중을 억압해 온 측면이 적지 않으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폐쇄적인 기독교 공동체가 아니라면 지금도 여전히 내외적인 억압으로부터 쉬지 않고 인간을 해방시켜온 전통을 열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종교 개혁적 가르침(ecclesia semper reformanda)에 우리가 충실하다면 퀘이커 운동은 소종파적 신앙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혁해 온 하나의 사례라 할 것이다.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지나치리만큼 세속화되어 있고, 자본주의화 되어 있으며, 이데올로기적 권력, 사소한 이해관계에 천작하며 하나님 나라 사상을 세속화시키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 이런 비판을 극복하려면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부패하게 만드는 요소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자유를 버리고 속된 가치들과 야합하고 타협했던 그릇된 종교성의 자기 우상화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 이런 해방의 지평은 예수의 평화 주의적 삶의 방식, 참된 영성적 의미에서 비폭력적인 평화 섬김의 길, 즉 양들의 전쟁(The Lamb's war)을 몸으로 살아가며 열어 나가는 데에서 열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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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August 22, 2008
77 Questions Young Christians used to raise
젊은 크리스쳔의 77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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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10, 2008
Lawyers... for what?
[박홍규칼럼]걸리버의 야후 관광여행
어제 어느 독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내가 최근 몇 달간 정권 비난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헛발질이 너무나 보기 딱하니 차라리 평소 버릇인 맨발로 숲을 걷는 이야기나 쓰는 것이 나에게도 좋고 독자들에게도 조금이나마 유익하리라는 것이었다. 사실 최근 두어 달 나는 많이 변했다. 평소 거의 찾지 않던 인터넷을 자주 보게 된 것도 그 중 하나지만 어느 날은 정신없이 몇 시간을 들여다보다가 스스로 깜짝 놀라 끈 적도 있다.
독자의 편지를 받고 개과천선한 것은 아니지만 장마철에 숲을 맨발로 걷기란 무리니 이왕이면 세계화 시대에 남들 다한다는 외국 피서여행을 안내할까 한다. 그것도 그 수많은 관광안내에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약 300년 전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마지막 여행지, 그러면서도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이름인 야후의 나라로 모셔볼까 하니 관심을 가져주시라.
인간을 닮은 야후를 다스리는 말인 휘늠 앞에서, 인간의 나라 직업 중에 가장 어려운 시험을 거쳐야 하는 수재 중의 수재인 법률가들에 대해 걸리버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먼저 판사란 분들은 평생 동안 오로지 진실과 정의 편에 서기는커녕 그 반대로 진실과 정의에 대해 편견만을 품어 와서 숙명적으로 사기와 위증과 탄압을 두둔해야만 하는 버릇에 빠진 자들로서, 특히 권력자의 눈치 하나만큼은 귀신같이 알아채 그를 만족시키면서도, 언제나 자신은 세상과 무관하게 사는 고고한 자임을 자처한다고 찬양한다.
이는 물론 야후 나라의 이야기이고 우리나라의 훌륭한 판사님들과는 절대로 무관한 것이니 오해 없기 바란다.
- 판사는 ‘고고’한 권력의 시녀 -
반면 말의 나라에는 법도 재판도 없다. 그 이유는 말은 이성이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이 없는 인간에게는 법과 재판이 있어야 한다. 법률가는 받는 돈 액수에 따라, 검은 것은 희고 흰 것은 검다고 거짓말하는 전문기술을 배운 자들로서 그들이 그렇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 만든 핑계들을 집대성한 것이 법이고 재판이다.
판례라는 것도 정의와 이성에 반한 것들임은 물론이어서 법률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가장 부당한 의견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것을 애용한다. 그러나 이런 본심을 들키면 곤란하기 때문에 그들은 남들이 알아챌 수 없도록 하기 위해 그들만의 특별한 암호나 은어를 사용해 난해한 법을 만든다. 그래야 옳고 그른 것을 거꾸로 씌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법과 재판의 본질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검은 것은 희고 흰 것은 검다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법률가만이 그것을 할 수 있고, 그것도 법률가가 받는 돈의 액수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니 재판에 이기는 길은 오로지 더 비싼 몸값의 변호사를 사는 것뿐이다. 그래도 야후의 나라에는 전관예우라는 것이 없어 그 비싼 비율이 수 십 배나 수 백 배가 아니라 기껏해야 두 배 정도에 그친다는 것을 보는 것에 우리 관광여행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유일한 차이점이니 말이다.
문제는 인간 세상에도 가끔은 정의를 찾으려고 법률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변호사란 오로지 거짓과 불의를 변호하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에 혹시 진실과 정의를 찾으려고 변호사를 고용하는 사람은 반드시 손해를 보게 마련인데 이 세상에는 꼭 그런 이상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변호사란 원래부터 진실과 정의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 법과 판례는 거짓말의 집대성 -
따라서 정의를 추구하여 재판에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대방이 자기 변호사에게 치른 값보다 두 배를 주어 매수해 자기 의뢰인을 배반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오로지 돈이다. 돈은 재판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자도 사게 한다. 이어 돈과 권력에만 혈안이 된 대통령이 오로지 매수로만 권력을 유지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니, 아니, 다시 권력 이야기가 되면 다시 권력에 대한 헛발질이 되니 여기서 그치자.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더위를 쫓아주기는커녕 도리어 더위를 몰아오는 짜증난 것이었다면 대단히 죄송하지만 걸리버 탓이라고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아니 이것도 최근 누구에게 배운 책임전가인가?
<박홍규 | 영남대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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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s heißt, zuerst kommen die Werte, unsere Werte, für die unschätzbar viel geopfert wurde; dann kommen die Freunde und die Freundschaften. In diesem Sinne sind Lebens-Werte wie Frieden, Geschwisterlichkeit, Demokratie, Freiheit, Gleichheit, ein Leben in Harmonie und Frieden mit Natur und Umwelt, Abrüstung und Kriegsgegnerschaft einige unserer primären Werte, die vor allen Freundschaften Vorrang haben." - Leyla Zana
* "Das Menschengeschlecht befindet sich im besten Zustande, wenn es möglichst frei ist." - Dante Alighieri, Über die Monarchie
* "Dass die Wölfe nach Freiheit schreien, ist begreiflich; wenn aber die Schafe in ihr Geschrei einstimmen, so beweisen sie damit nur, dass sie Schafe sind." - Rudolf von Jhering, Der Zweck im Recht
* "Da, wo's zu weit geht, fängt die Freiheit erst an." - Werner Finck
* "Der freie Mensch handelt niemals arglistig, sondern stets aufrichtig." - Baruch de Spinoza, Ethik
* "Der fundamentale Akt der Freiheit ist der des Verzichtes auf Unterjochung eines Unterjochbaren, der Akt des »Seinlassens«." - Robert Spaemann, "Handbuch philosophischer Grundbegriffe"
* "Der Mensch ist zur Freiheit verurteilt." - Jean-Paul Sartre
* "Die äußere Freiheit des Geistes ist der Humor, er ist immer souverän." - Ludwig Börne
* "Die Armut hat ihre Freiheiten, der Reichtum seine Zwänge." - Denis Diderot, Gründe meinem alten Hausrock nachzutrauern
* "Die Freiheit des Menschen liegt nicht darin, dass er tun kann, was er will, sondern dass er nicht tun muss, was er nicht will." - Jean-Jacques Rousseau
* "Die Fähigkeit, das Wort Nein auszusprechen, ist der erste Schritt zur Freiheit." - Nicolas-Sébastien de Chamfort
* "Die Freiheit ist die Wahl zwischen den Zwängen." - Unbekannter Autor
* "Die Freiheit wird einem nicht gegeben, man muss sie nehmen." - Meret Oppenheim
* "Die glücklichen Sklaven sind die erbittertsten Feinde der Freiheit" - Marie von Ebner-Eschenbach
* "Die wahre Freiheit ist nichts anderes als Gerechtigkeit." - Johann Gottfried Seume
* "Einem anderen gehöre nicht, wer sei eigener Herr sein kann." Paracelsus, Wahlspruch
* "Es darf keine Freiheit geben zur Zerstörung der Freiheit." - Karl Jaspers
* "Es gibt kein Wort heutzutage, mit dem mehr Mißbrauch getrieben wird als mit dem Wort »frei«. Ich traue dem Wort nicht, aus dem Grunde, weil keiner die Freiheit für alle will; jeder will sie für sich." - Otto von Bismarck
* "Es gibt mehr als eine Art der Freiheit... die Freiheit zu, und die Freiheit von." - Margaret Atwood, "A Handmaid's Tail"
* "Es ist eine andere Welt, in der man zwischen »Freiheit« und »Freizeit« nicht unterscheiden kann, »Gesellschaft« sagt und »Zielgruppe« meint, von einem »Konzept« spricht und nicht einmal eine »Idee« besitzt, von einer »Idee« spricht und nicht einmal einen Einfall hat." - Roger Willemsen, Deutschlandreise
* "Es ist eine unrechte und unkluge Eifersucht, einen Mann seiner natürlichen Freiheit zu berauben, auf den Verdacht oder die Annahme hin, er könne sie missbrauchen. Erst wenn er sie missbraucht hat, ist der Moment gekommen, über ihn zu richten." - Oliver Cromwell
* "Es lebe die Freiheit" - Hans Scholl, Die letzten Worte unmittelbar vor seiner Hinrichtung auf den Schafott
* "Es nützt der Freiheit nichts, dass wir sie abschaffen, um sie zu schützen." - Wolfgang Thierse
* "Es reicht nicht aus, allein die Gleichheit der Bürger vor dem Gesetz zu fordern und formale Freiheitsrechte zu garantieren. Der Staat ist vielmehr verpflichtet, die objektive Voraussetzung dafür zu schaffen, dass der einzelne seine Rechte und Freiheiten mit Aussicht auf Erfolg wahrnehmen kann." - Kurt Biedenkopf
* "Falls Freiheit überhaupt etwas bedeutet, dann bedeutet sie das Recht darauf, den Leuten das zu sagen, was sie nicht hören wollen." - George Orwell, aus dem Nachwort zu "Animal Farm", 1945
* "Fortschritt ist ambivalent. Er entwickelt zugleich das Potential der Freiheit und die Wirklichkeit der Unterdrückung." - Theodor W. Adorno
* "Frei, aber nicht frech, das ist so mein Satz." - Theodor Fontane, Der Stechlin
* "Freiheit bedeutet, daß wir in gewissem Maße unser Schicksal Kräften anvertrauen, die wir nicht beherrschen." - Friedrich August von Hayek
* "Freiheit bedeutet lediglich, daß du nichts mehr zu verlieren hast." - Janis Joplin, "Me and Bobby Mc Gee"
* "Freiheit findet sich nur dann, wenn man die Macht nicht missbraucht; aber es ist eine ewige Erfahrung, dass jeder, der Macht hat, ihrem Missbrauch geneigt ist; er geht so weit, bis er auf Schranken stösst. So unwahrscheinlich es klingt: selbst die Tugend bedarf der Begrenzung." - Charles de Montesquieu
* "Freiheit ist die Freiheit zu sagen, daß zwei plus zwei vier ist. Wenn das gewährt wird, folgt alles weitere." - George Orwell
* "Freiheit ist ein Luxus, den sich nicht jedermann gestatten kann." - Otto von Bismarck
* "Freiheit ist Gabe und Aufgabe. Sie erfordert Selbstbestimmung anstelle von Fremdbestimmung, Mitverantwortung anstelle von Gleichgültigkeit, Mitmenschlichkeit anstelle von Vereinzelung. Freiheit umfasst Rechte und Pflichten. Sie ist untrennbar von der Verantwortung der Person für sich und andere." - Unbekannter Autor
* "Freiheit ist nur möglich, wo Alternativen, Wahlmöglichkeiten praktisch bestehen. Wenn ein Junge Hilfsarbeiter werden muss, weil die Eltern den Lohn des Fünfzehnjährigen nicht entbehren können, so hilft ihm die verbürgte Freiheit der Berufswahl wenig." - Erhard Eppler
* "Freiheit nur für die Anhänger der Regierung, nur für Mitglieder einer Partei – mögen sie noch so zahlreich sein – ist keine Freiheit. Freiheit ist immer Freiheit der Andersdenkenden." - Rosa Luxemburg, "Die russische Revolution"
* "Freiheit und Verantwortung gehören zusammen. Nur wer frei ist und immer auch anders agieren könnte‚ kann verantwortlich handeln." - Heinz von Förster, "Wahrheit ist die Erfindung eines Lügners. Gespräche für Skeptiker" (1999)
* "Freiheit war niemals gleichbedeutend mit einem Freibrief für Willkür." - Mahatma Gandhi
* "Frieden und Freiheit können nur dann unter uns sein, wenn jeder jeden zufrieden und frei sein läßt." - Robert Walser
* "Früher sind die Menschen für die Freiheit auf die Barrikaden gestiegen. Jetzt tun sie es für die Freizeit." - Werner Finck
* "Ich bin bekannt für meine Ironie. Aber auf den Gedanken, im Hafen von New York eine Freiheitsstatue zu errichten, wäre selbst ich nicht gekommen." - George Bernard Shaw
* "Ich habe mein ganzes Leben über Freiheit gesprochen." - Nelson Mandela, Rede in Soweto, Februar 1990
* "Ich sehne mich nach der Freiheit, alleine ausgehen zu können, dass ich kommen und gehen kann, wann und wohin ich will." - Marie Bracquemond
* "Ihm, den ich liebe, wünsche ich Freiheit, sogar vor mir selbst." - Anne Morrow Lindbergh
* "In der DDR ist alles real, bloß nicht der Sozialismus; in der BRD ist alles real, bloß nicht Freiheit, Gleichheit, Brüderlichkeit." - Rudi Dutschke
* "In einem Staat, das heißt in einer Gesellschaft, in der es Gesetze gibt, kann Freiheit nur darin bestehen, das tun zu können, was man wollen darf. Freiheit ist das Recht, alles zu tun, was die Gesetze erlauben." - Charles de Montesquieu
* "In Freiheit und Unabhängigkeit ein positives Leben führen zu können ist wohl eine der schwierigsten Aufgabe in dieser Gesellschaft" - Urs Beeler, 1963
* "Jeder von uns ist es sich selbst schuldig, kein Spielball derer da oben zu sein." - Marianne Birthler
* "Jeder will Freiheit haben, und niemand will sie geben." - Oliver Cromwell
* "Keine Unterwerfung ist so vollkommen wie die, die den Anschein der Freiheit wahrt. Damit lässt sich selbst der Wille gefangen nehmen." - Jean-Jacques Rousseau, "Emile"
* "Man ist in dem Maße zur Freiheit reif als man zur Selbstkritik fähig ist." - Martin Kessel
* "Mir ist die gefährliche Freiheit lieber als eine ruhige Knechtschaft." - Jean-Jacques Rousseau
* "Nicht wegen des Fanatismus der Gerechtigkeit, sondern weil all das Belebende, Heilsame und Reinigende der politischen Freiheit an diesem Wesen hängt und seine Wirkung versagt, wenn die Freiheit zum Privilegium wird." - Rosa Luxemburg, "Die russische Revolution"
* "Niemand ist frei, der nicht über sich selbst Herr ist." - Matthias Claudius
* "Oh Freiheit, welche Verbrechen begeht man in deinem Namen!" - Marie-Jeanne Roland
* "Solange es einen Staat gibt, gibt es keine Freiheit." - Lenin
* "So wie die Freiheit eine Voraussetzung für die Demokratie ist, so schafft mehr Demokratie erst den Raum, in dem Freiheit praktiziert werden kann." - Willy Brandt, Briefe
* "Was wir brauchen, um frei zu sein, ist die Liebe, die die Kraft hat, die Last der Welt freudig zu tragen." - Rabindranath Tagore
* "Wem viel erlaubt ist, soll sich am wenigsten erlauben." - Seneca
* "Wenn Freiheit und Demokratie auch keine äquivalenten Begriffe sind, so sind sie doch komplementär: Ohne Freiheit ist die Demokratie Despotie, ohne Demokratie ist die Freiheit eine Schimäre." - Octavio Paz, Essays II
* "Wer die Freiheit nicht im Blut hat, wer nicht fühlt, was das ist: Freiheit - der wird sie nie erringen." - Kurt Tucholsky, Brief an Arnold Zweig vom 15. Dezember 1935
* "Wer grundlegende Freiheiten aufgibt, um ein wenig Sicherheit zu gewinnen, verdient weder Freiheit noch Sicherheit." - Benjamin Franklin
* "Wer sagt: Hier herrscht Freiheit, der lügt, denn Freiheit herrscht nicht." - Erich Fried
* "Wir haben die Wahl zwischen Sklaverei und Freiheit, wir wählen die Freiheit." - Konrad Adenauer
* "Wo die Zivilcourage keine Heimat hat, reicht die Freiheit nicht weit." - Willy Brandt
* "Wo wir unfähig sind, die Gesetze der Notwendigkeit zu erkennen, da glauben wir, frei zu sein." - Ludwig Bö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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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ffiti
* "Freiheit für Grönland! Nieder mit dem Packeis!"
* "Freiheit für mein Sparschwein."
* "Nieder mit den Tüten! Freiheit für die Gummibärchen!"
Bibel
* "Alles ist mir erlaubt, aber nicht alles dient zum Guten. Alles ist mir erlaubt, aber es soll mich nichts gefangen nehmen." - 1.Korinther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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