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 우린 분노한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마는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너희는 행위를 보고 그들을 알게 될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딸 수 있으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마태복음 7장 15절)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분노합니다. 주권재민을 힘껏 외치는 시민들의 고뇌를 마음에 품고 오로지 기도에 집중하기 위해 사제들이 오늘까지 이렇다 할 의견표명과 행동 없이 침묵 중에 지냈으나 이제 그런 절제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국민이 그토록 간절하게 호소하건만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 굴복하여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들끓는 국민여론을 제압하기 위해 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로써 촛불에 담겼던 간곡한 뜻은 짓밟혔고 우리는 대통령과 정부의 존립근거에 대하여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 각료들 그리고 한나라당의 교만과 무지를 탄식하면서 그들의 병든 양심을 교회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꾸짖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사제의 양심에 따라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먼저 보수언론의 폐해를 지적합니다. 참여정부 시절 광우병의 위험성을 무섭게 따지고 들다가 현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미국산 쇠고기의 절대 안전을 강변하는 조선·중앙·동아일보의 표변과 후안무치는 가히 경악할 일입니다. 정론직필의 본분의 버리고 이해득실에 따라 말을 뒤집는 언론의 실상이 널리 알려진 것은 만시지탄이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국가정책의 많은 부분에 대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는 현실은 더욱 큰 불행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이 순진하다고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의 궤적을 잘 알면서도 혹시 경제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지난 대선의 결과를 빚어낸 것뿐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기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금번 쇠고기 협상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도 울분을 터뜨릴 일이지만, 높이 받들고 깊이 새겨야 할 천심을 폭력으로 억누르는 정부의 교만한 태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미국에 충성하려 드는 맹목적 사대주의도 딱한 일이거니와 오늘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재앙은 무엇보다도 돈을 위해 정신의 가치를 값싸게 여기는 정부의 경박한 물신숭배에서 비롯했음을 지적합니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값싸고 질 좋은 외국산 쇠고기가 아니라 모두가 공생공락하는 드높은 자존감입니다.
국제적 망신을 일으킨 졸속협상이나마 정부의 주장대로 이에 복종하는 것이 한미FTA 체결 조건에 유리하고, 그래서 자유무역이 혹시 경제지수를 끌어올릴 것이라는 억측이 설령 옳다고 가정해도 그 결과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양극화 현상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게 교회의 판단입니다. 결국 정부는 불행한 미래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공권력을 악용하여 국민의 통곡과 신음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요한복음 1장 5절)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늘까지 촛불을 지켰던 민심을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청정한 수도자들과 전국의 모든 교우들과 함께 무장경찰들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 드리고자 합니다. 정부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벌어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압수수색과 체포 따위로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겠지만 이런 모진 마음 때문에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더욱 깊어만 갈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대통령에게 호소합니다.
1. 국민은 너그럽습니다. 대통령은 우선 쇠고기 협상의 실패를 인정하고, 국민 앞에 겸손하게 사죄를 청하는 뜻으로 장관 고시를 폐하고 쇠고기 전면 재협상을 선언하길 바랍니다.
2. 먼저 들으셔야합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대통령은 먼저 국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진실을 깊이 헤아린 다음 국민과의 대화에 나서길 바랍니다.
3. 국민은 현명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국민 건강의 안전성과 이를 보증할 검역주권입니다. 일부 언론이 쇠고기 문제를 친미와 반미, 진보와 보수의 이념갈등으로 몰아감으로써 핵심을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4. 과잉 폭력진압을 지시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시위 중 연행된 사람들과 대책회의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십시오. 그리하여 존엄을 바라는 국민의 상처를 씻어주길 바랍니다.
5. 국민 여러분에게도 호소합니다.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며 기도의 무기이며 비폭력의 꽃입니다. 우리가 비폭력의 정신에 철저해야만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신앙인에게 호소합니다. 촛불은 안으로는 내면의 욕심을 불태우고, 밖으로는 어둠을 밝히는 평화의 수단입니다. 저마다 마음을 비우고 맑게 하여 지친 세상을 위로하고 서로에게 빛이 됩시다.
2008년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Monday, June 30, 2008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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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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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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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 Cow Disease and Anti-Democratic Leadership
나는 1983년에서 6년까지 독일 쾰른/본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나는 독일 유학생으로 Bonn대학 박사과정에 적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당시 광우병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1986년 체르노빌 사건도 있어났습니다. 농축업자들이 초식 동물을 단 시간내 살찌우기 위하여 사료에 동종단백질을 섞었고, 이 동물성 사료를 먹었던 소들이 집단적으로 광우병에 걸려 쓰러진 것입니다. 이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큰 문제를 불러온 Mad Cow Diesease사건이 된 것입니다. 동물성 사료를 먹고 자란 소들 중 특히 20개월 이상이 된 소들에게서 광우병이 집단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이런 사건은 몇몇 나라에서 자국민의 건강권을 지키기 위하여 20개월 이상이 된 소 고기의 수입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게 했습니다. 대표적인 나라가 일본입니다.
축산업자들의 경우 20개월 이상 소를 키우는 것은 수지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즉 최고의 수익율이 나는 시점이 18개월에서 20개월 정도 소가 자랐을 때 잡아 파는 것이 가장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종류의 소들은 20개월 이상 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첫째는 젖소들입니다. 젖을 많이 내는 소는 계속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새끼를 낳는 소는 계속 키워야 합니다. 이런 소들이 소위 30개월 이상 자란 소라는 개념에 주종을 이룹니다. 문제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소를 키울 때 유럽과는 달리 동물성 사료를 엄격하게 금지하지 않아왔다는 데 있습니다. 즉 동물성 사료를 먹고 자란 30개월 이상이 된 소들이 15-20% 정도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식탁에 올리는 소고기는 당연히 20개월 미만의 소고기입니다. 그들은 내장이나, 뼈부위를 억지 않습니다. 내장이나 척수, 꼬리 뼈부위가 SRM물질로 분류되어 변형 단백질이 자리잡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은 이미 연구되어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먹는 소고기와 동일한 소고기를 우리가 먹는다는 주장은 이런 의미에서 설득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식생활 습관과 미국인이 다르고, 미국인들이 자국에서 파는 소고기의 질은 시장의 논리아래 질 좋은 고기를 내다 팔아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업자들이 무작정 싼 고기를 사다 팔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양심을 지키며 국민들의 건강을 배려하라는 것은 연목구어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런 사실을 짐짓 모르는 체하며 그들이 전략적으로 동의한 협상내용을 국민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르고 이제 와서는 촛불 시위대를 향하여 언론을 통하여 온갖 혐의를 다 뒤집어 쒸우고 있습니다. 우파들의 시위에 해병대 역전의 용사들이 예비군복을 입고 나와 사위를 해도 아무말 하지 않던 정부가 예비군복을 입고 시위하는 이들을 처벌할 법을 만들겠다고 하고, 평화시위를 하는 이들을 향하여 물대포를 쏘고, 최류탄액을 발사한다고 합니다. 전경들 수천명을 동원하며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정부는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국민을 두려워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군사독재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것과 평화 시위대를 공격하고, 언론을 동원하여 음해하는 정부는 민주적인 국민의 정부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특정 집단의 정치적 이해를 옹호하기 위하여 동원된 공권력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도 사실 따지고 보면 군사독재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전두환 정부의 과잉행위였습니다. 그 근본 원인은 국민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국민을 설득할만한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권력과 권위를 남용할 수 있는 지위들을 독차지 하고 있었지요. 역사는 이 사건을 두 가지로 평가했습니다. 당시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은 독재정권의 나팔수가 되었지요. 이들의 평가는 전국민을 속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언비어처럼 떠도는 이야기에서 국민은 진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보건당국은 우리 가족들에게 헌혈을 금지시켰습니다. 그 사유는 우리가 광우병이 발생한 유럽 지역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즉 광우병이 발발했던 1980년대 유럽에 살았던 이들의 몸에는 광우병 발생물질인 프리온 단백질이 섞여 있을 수 있으므로, 헌혈을 금지시킨 것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한다면 광우병 물질이 담겨있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만의 하나라도 있다면 정부는 광우병 물질이 국민들의 식탁에 오르지 않도록 조처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정부는 미국 축산업자들의 입이되어 광우병 물질이 담겨있을지도 모르는 소고기를 안전하다고 연일 선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인지 미국 축산업자들의 정부인지 헛갈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미국산 소고기가 수입이 된다면, 우리는 강요되어 미국산 소고기를 먹게 됩니다. 안 사먹으면 그만 이라는 말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식생활은 가정에서 만들어진 음식만 먹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식당에서는 값싼 소고기를 사다 음식을 만들것이며, 급식처, 군대, 공장, 모든 수익을 남기려는 식당에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고기를 사다가 음식의 재료로 사용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자녀 손자들이 만의 하나 광우병 물질이 들어 있을 수 있는 미국산 소고기를 먹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 가능성이 적으므로 염려할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광우병에 일단 걸리면 그 사람의 생명의 질은 최하위로 떨어지고, 뇌가 붕괴되어 모든 신경계와 근육이 주저앉게 됩니다. 미국에서 광우병걸린 소와 주저앉은 소가 반드시 연관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광우병 걸린 소의 전형적인 특징이 주저앉는 소가 된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품은 수천년 동안 자연속에서 식품으로서의 안정성이 확인 된 것들입니다. 요즈음 유전자를 변형시켜서 변종을 만든 GMO식품들도 적지 않게 논란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콩은 콩이고, 옥수수는 옥수수지만 그 변형된 유전자가 우리 몸에 들어와 생명의 안정성은 해할 수 있다는 염려때문에 우리는 유전자 변형 식품에 대하여 편안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국민 건강에 대한 경각심이 높은 사회는 유전자 변형 재료를 0.3% 이상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건강에 대하여 인식이 부족한 나라들은 법조항 조차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라에 미국이 생산한 유전자 변형 식품들이 수출되는 아이러니도 있습니다. 미국은 외국에서 30개월 이상된 소고기를 수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30개월 이상 된 소고기만이 아니라 SRM물질까지 모두 수입하도록 협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재협상은 불가하다 한다면 이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인지 미국 축산업자들의 정부인지 정말 헛갈리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이번 추가협상을 통하여 무엇인가 바꾸었다고 하지만 아래 문건을 읽어보면 정부의 주장이 얼마나 기만적인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때부터 진실공방이 꼬리를 물더니, 국가 행정을 하면서도 이들은 기만적인 방법과 선전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의혹을 불러 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국민들이 어리석어 보여도 진실은 밝혀지는 법입니다. 이런 정부에 의하여 앞으로 남은 이명박 정부 임기동안 국민들이 잘 참고 견딜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말 효율적인 정치를 하는 정부라면 이런 사태를 전문적으로 검토하고, 비효율적인 국민과의 충돌은 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이제라도 더이상의 고비용, 사회적 비용을 지출하지 않도록 정부가 나서서 재협상을 통하여 검역 주권을 되찾고, 국민들의 건강을 지켜주는 정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완용이는 우리나라 주권을 일본에게 넘기는 것이 우리 나라에 유리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판단은 후세 대대로 매국노라는 이름을 초래했습니다.
정치는 국민 편에서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어떤 다른 가치도 국민의 생명과 건강과 안전 그리고 평화보다 더 높을 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정치가라면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정부는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여 개인만이 나이라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상한 정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정부에 대한 비판과 평화적 시위를 통한 의사표시는 보장되어야 하고, 정중하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런데 서울 한 복판에서 국민들을 향한 물대포를 쏘고, 전경들의 방패로 국민을 위협하는 작태를 보이며 평화적인 시위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국민의 합의와 시위가 두렵다면 정부가 재협상에 나서야 합니다. 정부가 치러야 할 국민과의 갈등이 초래하는 비용은 더 커다란 비용입니다.
한나라당의 전신은 민정당이고, 민정당의 전신은 군부독재 정권입니다. 이제 그들이 다시 집결하여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국민들의 의사를 노골적으로 진압하려 하고 있습니다. 조갑제 식의 낡은 수법인 적색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가 하면, 공안정국으로의 회귀를 시도하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이런 반민주적인 작태에 대하여 민주주의를 뼈아프게 성취해온 우리 역사가 침묵할 리 없습니다. 어리석은 정권은 국민을 업수히 여깁니다. 우리 국민들은 착해서 광주항쟁을 진압한 전두환을 살려주고, 박정희 시대의 고깃가마를 그리워하다가 국민됨의 본질을 잃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곤봉을 맞고, 군화발에 짓밟히게 된 것입니다. 박정희 시대에 영달을 이룬 이들은 바로 군부독재의 그늘아래 기회를 얻은 이들입니다.
이들의 반민주적 권력을 탄핵하고 비판하는 것은 역사적인 우리 모두의 과제입니다. 어던 방법으로든지 국민들은 저항할 것이며, 권력을 조롱할 것입니다. 국민을 섬기지 않은 권력에 대해서는 나 부터라도 그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벌써부터 전경의 군홧발에 짓밟힌 여성들이 나오고, 성직자들이 구타를 당하며, 정부에 의하여 시민들이 폭도로 몰리고 있습니다. 강경진압정책이라는 어리석은 게임을 조장하는 구태를 벗지 못한 권위주의적 관료들은 그들의 행위가 국민들에게 심판받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자들이 기독교를 대표하고, 기독교 세력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 기독교인들은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서 밖에 서 있는 자들을 정당화하고 연대하며 추천하는 일은 기독교 사상을 천박한 이익을 쫒는 정치 파당에 종속된 것으로 만들려는 경박한 행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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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추가협상으로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해진 것인가요?
아닙니다.
정부 말을 다 믿는다 쳐도 이전에는 수입금지되었던 창자를 말하는 곱창, 막창과 회수육(AMR), 분쇄육, 등뼈, 사골뼈, 꼬리뼈, 혀가 제한없이 수입됩니다. 그리고 이 부위는 한국사람이 가장 잘 먹는 부위이지만 광우병 위험이 있는 부위입니다. 곱창은 유럽연합에서는 연령과 상관없이 전체가 광우병 위험부위로 지정되어있고 회수육은 척수조직이 88%에서 포함되어 있어 미국에서도 학교급식에서 금지되었습니다. 혀는 유럽과학위원회에서 편도조직이 붙어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프랑스에서는 실질적으로 혀요리가 금지되었습니다.
소곱창은 곰탕이나 설렁탕에 들어가며 직접 먹기도 합니다. 회수육은 일부 햄버거나 피자, 소시지 등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혀 요리는 편육이나 수육으로 사용됩니다. 결국 정부의 추가협상은 실제로 한국사람이 먹는 위험부위는 하나도 수입을 금지하지 못했습니다. 추가협상으로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이 하나도 담보되지 않은 것입니다.
2. 정부는 '품질 시스템 평가(QSA)'로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차단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거짓말입니다.
우선 이번 30개월 이상을 수입금지 한다는 QSA 프로그램은 일시적 조치이고 그 기간은 길어야 1년 정도라고 예상됩니다. 그 기간을 정하는 것은 미국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30개월 이상 쇠고기가 안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길어야 1년 뒤면 30개월 이상 쇠고기도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조삼모사라는 거죠.
또한 QSA는 민간자율프로그램으로 예전에 국내에 있었던 '품' 마크를 농산물에 실시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미국 쇠고기 업체에서 알아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실효성이 전혀 없습니다. 미국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QSA 보다 훨씬 강력한 '수출 증명(EV)' 프로그램이 작동되던 지난 2006년~2007년에도 전체 미국산 쇠고기 수입건수의 50% 이상에서 뼛조각이 적발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갈비통뼈가 9번, SRM인 등뼈가 2번이나 적발되었습니다. 정부가 직접 보증하는 수출증명 프로그램으로도 50%이상이 수입위생조건을 어기는데 기업들이 알아서 실시하고 정부가 간접 보증하는 QSA 프로그램이 지켜진다는 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꼴입니다.
3. 이번 추가 협상에서 SRM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하던데요?
거짓말입니다.
추가협상을 통해서는 4월 19일 졸속 협상으로 합의한 수입 위생 조건의 SRM 규정을 단 한글자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다만 30개월 미만의 뇌, 눈, 척수, 머리뼈 등 4개 부위는 "특정 위험 물질(SRM)은 아니지만 한국 수입업자의 주문이 없으면 반송 조치하겠다"고 정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들 4개 부위는 EU, 일본, 중국, 대만, 홍콩, 베트남, 태국 등에서는 특정위험물질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부위는 0.001g, 즉 후추 한알 정도만 들어와도 위험합니다. 그런데 이번 추가협상은 소량의 뇌, 척수, 머리뼈 등은 수입을 허용했습니다. 머리뼈조각은 머리뼈가 아니고 척수조각은 척수가 아니라는 해괴한 주장입니다.
정부가 전면적으로 수입을 허용한 곱창이나 막창도 EU에서는 특정위험물질입니다. EU는 십이지장에서부터 직장에 이르는 모든 내장과 장 사이에 붙어 있는 장간막까지 제거를 의무화하고 사료로도 쓸 수 없게 합니다.
뇌, 안구 머리뼈 등을 누가 먹습니까? 하지만 정작 한국사람이 즐겨먹는 곱창, 척수조직이 포함되는 회수육, 편도가 붙어있는 혀도 수입됩니다. 무엇을 막았다는 것입니까? 정작 한국사람이 잘 먹는 광우병 위험부위는 하나도 막지 못했습니다.
4. 이번 추가협상에서 검역 권한을 강화했다고 하던데요?
거짓말입니다.
수출용 작업장의 승인권과 취소권은 여전히 미국 정부에 있습니다. 동일한 작업장에서 2회 이상 식품 안전 위해가 발견해야 일시적인 작업 중단 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협정은 그대로입니다. 도축장 현지 점검에서 중대한 위반을 발견하더라도 도축장 승인 취소를 할 권한도 없습니다. 미국 도축장 현지점검 시에도 여전히 카메라조차도 가지고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변함이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검역주권은 전혀 강화되지 않았습니다.
5. 한국정부는 어쨌든 재협상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무역보복도 당할 수 있다는데요?
아닙니다.
정부는 추가협상도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해왔습니다. 그러나 추가협상을 했습니다. 정부는 이제와서 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국제법적으로 재협상이 불가능한 협정은 없습니다. 이번 미국쇠고기 수입고시보다 훨씬 강력한 협정인 미국-페루 자유무역협정(FTA)은 심지어 국회비준이 끝 난 후에도 미국정부가 재협상을 했습니다. 당연히 한미 쇠고기협상의 재협상은 어느 때나 가능합니다.
무역보복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검역협정 때문에 핸드폰을 수입금지하는 식의 무역보복은 한국정부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바 있습니다. 세계무역기구(WTO)에 한국과 미국이 모두 가입해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중국과의 마늘파동과 같은 보복조치도 중국이 WTO에 가입하기 이전의 무역보복조치였습니다.
이번 한미 쇠고기협상과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정말로 만에 하나 무역보복이 있다고 쳐도 그 액수는 많아야 400억 원 정도 입니다. 국민 1인당 900원인데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1년 예산의 0.02%쯤 부담을 하는 것이 무슨 문제입니까?
6.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을 위해 미국산 쇠고기는 전면 개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한국정부는 한미 FTA를 위해 쇠고기를 무조건 수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4대 선결조건이 바로 미국쇠고기 수입, 의약품 가격인하조치 금지,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 세제 금지, 스크린 쿼터 축소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부는 지금까지 쇠고기협상과 한미 자유무역협정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또 의약품 가격을 깎아서 건강보험재정을 절약하는 것을 금지하고, 배기량이 많은 자동차에게 세금을 더 물려 환경을 보호하는 것도 금지하고, 스크린 쿼터를 통해 한국의 영화를 보호하는 것을 금지하자는 것이 한미 FTA의 선결조건이라면, 이런 협정이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일까요? 여기에 또 미국쇠고기를 무조건 전면개방해서 한국국민의 생명을 걸면서까지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면 그런 FTA 과연 왜 해야할까요?
또 한미 FTA에 대해서도 그 내용이 자세히 밝혀지지도 않았습니다. 정부는 먼저 한미 FTA 내용을 소상히 밝히고 국민의 찬반입장을 물어서 결정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 시점은 미국 행정부가 바뀌면서 미국정부의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자체가 불투명해지고 있는 시점입니다. 한국정부가 말하는 것처럼 한국이 미리 국회비준을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한미 FTA 찬성입장을 가진 시민이라도 국민 생명과 안전을 내주면서까지 한미 FTA 협정을 맺는 것에 찬성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7. 어쨌든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유럽이나 일본은 동물성 사료를 아예 금지한 것과 달리 미국은 광우병 발생국임에도 교차오염의 위험이 있는 동물성사료를 여전히 소에게 먹입니다. 또한 미국은 유럽연합이나 일본에서 광우병 특정위험물질로 지정한 부위를 동물사료는 물론 인간 식품원료로도 사용합니다. 또한 일본은 모든 소에 대해 광우병 검사를 하고, 유럽은 30개월 이상 모든 소와 30개월 미만이라도 위험 도축소에 대해서는 모두 광우병 검사를 하지만 미국은 0.1%미만의 소만을 검사합니다.
또 미국은 30개월 미만에서 뇌, 눈, 척수, 머리뼈, 등배신경절, 등뼈, 창자, 장간막 등을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미국규정대로 30개월 미만 쇠고기와 부산물을 허용할 경우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이 국내에 들어오게 됩니다. 모든 나라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거나 연령제한과 부위제한을 엄격하게 하는 것은 30개월 미만 미국산 쇠고기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국제상식이기 때문입니다.
8. 국내검역을 강화하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나요?
아닙니다.
우선 국내검역으로는 30개월 이상인지 아닌지 판단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살코기, 갈비, 곱창, 혀, 사골, 꼬리뼈 등 한국에 수입되는 부위는 한국에서 몇 개월짜리 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미국의 업자가 30개월 미만이라고 딱지를 붙이면 그것을 믿어야 할 뿐입니다. 미국 수출업자들이 나이를 허위로 기재하더라도 적발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미국에서조차 이력추적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으므로 정확한 나이판정을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에서 하는 소의 이빨로 나이를 추정하는 치아판별법은 미국 교과서(Veterinary Anatomy, 3판, p639)에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방법이라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20개월 미만소의 뼈있는 살코기를 수입하려고 치아판정만이 아니라 원산지 및 생년월일을 알 수 있는 이력추적제를 포함한 상세한 나이판정장법을 미국에게 요구했고 이러한 수출증명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쇠고기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이런 수출증명 프로그램도 없이 나이 판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에 더해 광우병 검사는 도축장에서만 가능합니다. 한국에 일단 쇠고기나 부산물이 들여오면 이것으로 광우병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검역으로 광우병을 걸러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9. 미국 사람이 먹는 쇠고기와 똑같은 것을 먹는다고 한국정부는 주장하는데요?
거짓말입니다.
이번에 밝혀진 도축장 현지점검 보고서를 보면 30개 작업장 중 창자부위를 버리는 작업장이 10개였습니다. 미국에서는 곱창을 안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뼈나 사골, 꼬리뼈는 미국에서는 식용부위가 아닙니다. 미국 쇠고기산업의 원칙은 "미국사람이 선호하는 살코기로는 운영비를 충당하고 이윤은 내장과 가죽에서 남기는데 이 내장부위는 수출을 통해 남긴다"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소비되지 않는 부위를 한국이나 일본에 내다 팔아 이윤을 남긴다는 것이고 이것이 소 한 마리값의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일본은 20개월 미만의 살코기와 뼈붙은 살코기, 중국은 30개월 미만의 살코기만 수입합니다. 나머지 내장 부위는 이제 한국에만 팔게 됩니다. 이것이 미국축산업자와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정부가 한국의 쇠고기 수입전면개방을 그토록 환영하는 이유입니다. 미국사람들도 안 먹는, 그리고 전세계에서 아무도 안 먹는 미국소의 내장과 등뼈 등의 위험부위를 한국사람만 먹게 되는 것이 이번 추가협상입니다.
10. 정부는 쇠고기 재협상은 없다면서 이번 주에 쇠고기 고시를 강행한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부와 한나라당은 이번 추가 협상이 90점은 된다고 국민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4월의 협상이 미국기업과 미국정부에게 100점이라면 이번 추가협상은 미국기업에게 90점이 된다는 말입니다. 미국 거대 농식품기업에게 손해 본 것이 하나도 없고 수출할 것은 다 수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정부가 정작 막아야 할 부분은 추가협상으로 하나도 막지 못했습니다. 한국국민에게 이번 추가협상으로는 바뀐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 추가협상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팔아먹은 또 한번의 사기극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재협상을 요구하는데 왜 재협상이 불가능합니까? 우리는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부시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규탄해야 합니다. 국민의 힘은 협정무효 전면재협상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없는 정부는 정부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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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ne 22, 2008
The Impact of the Holocaust on Christian Theology
기독교 신학에 미친 홀로코스트 사건의 충격
Marc H. Ellis, Baylor Univ. Texas, USA
The attempted destruction of the Jews in what today is called the Holocaust was and is an event of world importance. In this essay I attempt to lay out some of the aftershocks of the Holocaust for Christians, Christian theology and for Jews and Judaism as well. I will concentrate especially on aspects of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since it is this dialogue, along with internal Christian reflection, that has changed Christianity considerably. Though some argue that the Holocaust has caused Christians to reengage their roots, thus returning to the original and real Christianity, where Jews and Christians dwelled in peace, the case for this pacific return is problematic. Just the opposite seems to be the case; it may be argued that because of the Holocaust, Christianity has jettisoned one of the foundational elements of its initial and longstanding understanding of itself as the “New” Israel over against the Old Israel of Jews and Judaism.
오늘날 유태인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사건에서의 유태 민족의 멸종 시도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일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본 글에서는 대학살의 파급효과가 기독교인, 기독교 신학, 그리고 유태민족과 유태교와 무슨 관계를 가졌는가에 대해서 다룰 것이다. 나는 특히 유태교-기독교 간 담론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이 담론은 내부적 반성과 함께 기독교를 변신시킨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은 Holocaust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뿌리를 재 발견하게 하여, 원래의 유태교와 평화적인 관계를 가진 기독교로 돌아갔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미비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에 더 가까울 수 있다; Holocaust로 인해 기독교는 기존에 자신을 ‘낡은 이스라엘’인 유대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이스라엘’로 이해하는 방식을 오히려 버렸다고 볼 수 있다.
Below I can only begin to sketch out some themes relating to this dramatic moment in Christian history where at least Western Christianity came face to face with its own culpability, I would say complicity, in the mass death of European Jews. I trace part of this story in the in fifteen points below. Obviously, this is worthy of a book or more, so we must see this as a discussion document rather than a complete discussion of this most important, horrific and ultimately hopeful journey.
아래에서 나는 기독교가 유럽 유태인들의 대량 학살에 대한 자신의 유죄성, 또는 가담성을 직면하면서 서구 기독교 역사의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과 관련된 몇 가지 주제에 대하여 윤곽을 짚어볼 것이다. 이 이야기 추적하면서 아래 15가지의 초점에 집중하여 다루려 한다. 물론, 이는 한 권의 책 이상의 것에 해당되는 내용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 글은 완결된 것이기보다는 중요하면서 공포스러운, 하지만 최종적으로 희망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토론을 위한 글’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1) Who can gauge the impact of the Holocaust on Christian theology? Though history is constantly interacting with and helping shape religion in its symbolic, creedal and practical realities, formative events like the Holocaust can disorient and reshape religion on all sides of the historical event. At least in Europe and America the effect of the Holocaust on Christianity has been incalculable. In some ways Western Christianity as we know it today can be divided into Christianity before and after the Holocaust.
1)유태인 대학살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을 누가 가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역사는 지속적으로 종교를 그것의 상징적 신조, 그리고 실질적인 현실 속에서 변화시키지만, 대학살과 같은 형성적 사건들은 역사적 사건의 모든 측면에서 종교의 방향을 재설정하거나 재구성할 수 있다. 적어도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에 미친 대학살의 영향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어떠한 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 기독교 역사는 대학살 이전과 그 후의 것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If it is true that Christianity has changed because of in relation to the Holocaust, it is also true of Judaism. Like Christianity, there is Judaism before and after the Holocaust. As with most of Jewish and Christian history, changes in the history of one religion affects changes in the other. Though Judaism and Christianity claim a sensibility that moves beyond history, their historical dimension is overriding. Obviously both religions have communities they represent and serve; both claim God’s active intervention in the world. As religions of destiny and salvation, Judaism and Christianity emerge from and are attentive to the historical moment.
기독교가 대학살로 인해 변했다면, 유태교도 상당히 변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와 같이, 유태교 역시 대학살 이전과 이후의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유태교와 기독교의 역사의 대부분에서 그렇듯이, 한 종교의 변화는 다른 종교에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비록 유태교와 기독교는 역사적인 측면 이상의 단계에서의 상호 민감함을 보이지만, 역사적인 면만을 봐도 상당히 주목 할만 하다. 두 종교는 각각의 신앙공동체가 있어 그것들을 상징하는 동시에 섬기고 있지만, 두 종교 모두 하나님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운명과 구원의 종교로서, 두 종교 모두 역사적 동기에서부터 비롯되며 그 동기들에 주목한다.
Of course, religion isn’t a one way street, coming from above and simply speaking from that vantage point. The Hebrew and Christian testaments are grounded in the historical moment and claim a continuing relevancy in their community’s journey. Both Passover and Easter, for example, representing the foundational events of Judaism and Christianity are also the foundational events for Jews and Christians; Passover and Easter have an eternal and worldly significance. Though both events are past in historical time, we are commanded to enter into this past as part of our own communal and personal autobiographies. In Judaism and Christianity past is past, present is past and past is present. For Jews and Christians, the Exodus and Easter narratives are as relevant today as they were then.
물론, 종교는 위에서 내려온 그런 시점에서 단순히 언급할 수 있는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히브리와 기독교 성서들은 역사적 순간에 기반 하여 각각의 공동체 활동에서의 지속적인 관련성을 가진다. 예를 들자면 유월절과 부활절은 유태교와 기독교의 모태적인 사건인 동시에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에게도 모태적인 사건이다; 유월절과 부활절 모두 영원하고 세계적인 의의를 가진다. 비록 두 사건 모두 과거지만,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적이고 개인적인 자서전의 일부로서 그 과거에 충실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 유태교와 기독교에서는 과거는 과거이고, 현재는 과거고, 과거는 현재다. 기독교와 유태인들에게 출애굽과 부활절 이야기는 그 사건이 일어난 당시만큼 오늘날에도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2) The Holocaust engages both the past and the present of Christianity. From its beginning, Christianity claimed Israel’s mantle, as the New Israel, historically based, with the coming of the Messiah, Jesus as the Christ, anticipated and rejected by the Israel that had predicted both. Though judged by Jews then, at least by Jewish leadership, as recorded in what became the Christian scriptures, as a selective and incorrect reading of the Hebrew canon, some Jews at the time and shortly afterward judged differently. For some Jews, Jesus was indeed the Messiah that Israel longed for. Jewish leadership, serving under and often benefiting from the Roman imperial and colonial regime, said no to Jesus, again according to what became the Christian scriptures, and from that time onward most Jews affirmed that no. This division within the Jewish community during and after the time of Jesus, especially with the rise of an empowered Christianity, began an extended and often violent Jewish-Christian conversation that culminated in the Holocaust.
2) 대학살은 기독교의 과거, 현재 모두 관련성을 가진다. 최초 기독교는 메시아를 예언했던 그 이스라엘에 의하여 예기되고 거절당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메시아의 강림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근거를 가진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이스라엘에 대한 주도권을 주장했다. 예수는 당시에 유태인들, 최소한 유태인 지도층에 의해서 심판을 받았고, 어느 정도의 선택적이며 부정확한 히브리 경전 읽기를 통해 기독교의 성서에 기록되었다. 당시 일부 유대인들은 이내 색다르게 판단을 받게 되었다. 일부 사람들의 입장에서 예수는 실제로 이스라엘이 바랬던 메시아였다. 로마의 제국주의적, 식민지적 정권에서 상당한 혜택을 받고 있던 당시의 유태교 지도층은, 기독교 성서의 내용에 의하면 예수를 부정했고, 그 후에도 대부분 유태인들은 그 입장을 고수했다. 유태인 공동체 내에서의 이 분열은, 특히 기독교의 권력 획득 이후에 상당히 증폭되고 폭력적으로 변하여 유태인 대학살에서 정점에 이르게 되었다.
As read in the Christian scriptures - scriptures written many years after the time of Jesus, with some narratives about Jesus and the Jewish authorities chosen for inclusion and others rejected - the coming of the Jewish Messiah in the person of Jesus and the Jewish rejection of Jesus set a historic and everlasting division between the two communities. From that moment on there was, from the perspective of Christianity, a New Israel and a Jewish Old Israel. The New Israel claimed Jesus the Christ as the new and everlasting truth and condemned the Old Israel as the witness to the truth the Jews rejected.
예수의 시대 이후 수 년 후에 쓰여져, 예수와 유태교 지도층에 관한 수 많은 이야기들 중 일부를 모아 둔 기독교 성서에서 볼 수 있듯이, 유태교의 메시아로서 등장한 예수와 그러한 예수의 유태 사회 측에서의 거부라는 사건으로 인해서 두 공동체 간에는 역사적으로 항구화된 분리가 이루어 졌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그 순간 이후로 새로운 이스라엘과 기존의 유태 이스라엘, 이 두 가지로 나뉜 것이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예수를 새로운, 그리고 영원한 진리로서 설명했고 기존의 이스라엘을 이 진리를 목격했지만 부정한 무리라고 배척하기 시작했다.
For Christianity, Jews and Judaism became theologically displaced but would continue to exist under God’s punishment as a degraded and wandering community. From the early centuries of the Christianity, Jews were seen as witnesses to the truth of Christianity as the bearers of the Good News they rejected; when Christianity crystallized as the religion of empire under Constantine, the triumph of Christianity and displacement of Judaism was codified and essentialized. From that moment on the two religious systems and communities would be at theological and sometimes physical war.
기독교의 입장에서 유태인들과 유태교는 신학적인 자리를 잃었고(displaced)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타락하여 방랑하면서 계속해서 존재하는 공동체로 이해되었다. 기독교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유태인들은 기독교 진리를 목격했지만 거부한 무리로서 이해되었고, 콘스탄틴 대제 아래서 기독교가 결정화되었을 때, 기독교의 승리와 유태교의 타락은 코드화되어 본질적인 것이 되었다. 이후 두 종교 체계와 구성원들은 서로를 향하여 신학적,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물리적인 전쟁을 벌렸다.
In many ways that war produced Christianity and Judaism as we know them throughout their history: most of the Christian creeds were produced in that and subsequent empires where Christianity held a dominant position; Judaism, now defeated and constantly under assault, reframed and reproduced itself as the heir of ancient Israel outside of the Promised Land and under the surveillance of a powerful, expanding and too often militant Christianity.
이 전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역사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와 유태교를 구성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기독교 교의들은 기독교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당시와 그 이후의 시점에서 생산되었다; 이제는 패배하여 계속해서 공격 당하는 유태교는 약속된 땅 밖에서 세력을 잡고 확장해 나가는 기독교, 너무나 자주 호전적인 기독교의 감시 아래에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후계자들로서 자신들을 재구성하고 재해석하게 되었다.
3) Of course, there are many sides to all religions and their journey through time. Characterizing Christianity as a whole simply through its involvement with Jews and Judaism carries dangers that bear analyzing so that Christianity as a whole is not caricatured. Yet another side of Christian history, its expansion, especially after 1492, specifically in the Americas but also into parts of Asia, especially the Philippines, contains striking similarities to Christianity’s history with Jews and Judaism.
3) 물론, 모든 종교들과 그들의 시간 속에서의 여정에는 여러 가지 측면들이 존재한다. 유태교와 유태민족과의 관계라는 기준만으로 기독교 전체를 특징짓는 것은 기독교 전체를 보지 못하는 분석을 불러온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하지만 특히 1492년 이후 기독교의 확장 과정-미국 뿐만 아니라 특히 아시아, 그 중에서 필리핀에서의 확장을 살펴 보면 기독교와 유태교간의 관계와 다름없는 유사점들을 찾을 수 있다.
Thus Christianity’s relationship to Judaism and Jews, coupled with its sense of and interaction with non-Jewish, non-Christian religions and peoples, illustrate a pattern in Christianity, at least when it has the backing of the empire and the state. In some ways, Christian mission to the degraded and blinded Jews within Europe is like its mission to those who are in the bondage to other religions in what becomes known as the Third World. Both Jews and Third World peoples need instruction and salvation brought to them, voluntarily or not; in the religious worldview of Constantinian Christianity the world is destined to be formed and/or conquered by Christianity.
그리하여 기독교와 유태교와 유태인들 간의 관계는, 기독교의 비-유태교인, 비-기독교 종교와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 상호관계와 함께, 제국과 국가의 후원을 받아온 기독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어떠한 면에서, 유럽의 타락하고눈이 어두어진 유태교와 유태인들에 대한 기독교의 선교는 오늘날 제 3세계로 알려진 곳에서 다른 종교들과 연결된 사람들을 향한 전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유태인들과 제 3세계 민족들 모두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지도와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며, 콘스탄틴 기독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세계는 기독교에 의해 구성되고 정복될 운명인 셈이다.
Form the 4th century on, Christianity’s world mission was tied to empires blessed by Christianity. Within these empires, Christianity was given in-kind privileges, including a religious monopoly and the ability to sink roots wherever the empire expanded to. At the same time, Christianity’s posture as the carrier of truth reinforced the empire and its own sense of mission, the empire’s mission being couched in civilizational terms. Christianity and empire thus spread the “truth” and “civilization” in one bundle. To oppose Christianity or the empire simply confirmed their mission to recalcitrant and backward peoples.
4세기 이후, 기독교의 세계 선교(world mission)는 기독교로 축복을 받은 제국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제국들 내에서 기독교는 종교적 독점과 제국의 범위 확장과 동시적인 확장과 같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다. 동시에, 진리의 보유자로서의 위상은 제국과 제국의 문명적 임무를 강화했다. 기독교와 제국은 그리하여 “진리”와 “문명”을 하나의 패키지로서 전파했다. 기독교와 제국에 대한 반항은 오히려 고집이 세고 뒤죽박죽인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 선교의 필요성을 확증했을 뿐이다
Nonetheless, and notwithstanding the commonality of attitude and treatment that Jews and Third World peoples experienced at the hands of Christianity tied to empire, Jews and Judaism remained special to Christianity. As “witness people” Jews merited a special place in Christian theology and history, since without them the world would not have known of the coming Messiah and with their rejection of Jesus as Christ, in light of their continuing albeit deservedly difficult life under Christian domination, they served as contemporary witnesses to the same Christ.
유태인들과 제 3세계 사람들에 대한 제국들과 규합한 기독교의 공통적인 태도와 대우에 불구하고, 유태인과 유태교는 기독교 입장에서 여전히 특별했다. “목격한 사람들” 로서, 그들이 없었더라면 메시아의 재림과 그들의 예수에 대한 거부에 대해서 세계가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기독교 신학과 역사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비록 기독교의 지배하에 있는 세상에서 보응의 어려움을 겪어왔지만, 여전히 기독교와 같은 그 예수에 대한 증언자로서의 장점도 지니고 있었다.
Thus rather than being expendable, Jews are extremely important within Christian theology. The salvation anticipated, predicted and then rejected by Jews and Judaism forms the backdrop for the truth of Christianity that is carried by Christianity. Jews are therefore needed and supremely prized witnesses to the triumph of Christianity and as soon as Christianity has state power to do its bidding, Christianity begins legislating against Jews and Judaism. This legislation placed strictures on Jews and Judaism, in religious practices and movement, enclosing Jews in ghettoes and often sending Jews across feudal and later state boundaries. Some of these restrictions in Church law bear striking similarities to laws proposed and adopted by Adolph Hitler and his Nazi movement when they assumed state power in Germany in 1933.
그리하여 유태인들은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 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존재로서 인식된다. 유태인과 유태교에 의해서 예상되고, 예언되고, 결국은 거부된 구원 개념은 기독교가 내포하고 있는 진리의 뼈대를 형성한다. 유태인들은 그리하여 기독교의 승리에 필연적인 존재가 되어, 국가적 권력을 획득한 기독교의 법적 제재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법적 제재는 유태인과 유태교를 그들의 종교적 풍습과 움직임을 제한함으로써 구속하여 유태인들을 게토에 가두고 유태인들을 봉건적 그리고 나중에는 국가적 경계 밖으로 추방하기도 했다. 교회 법에서의 이 같은 규정들은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와 그의 나치 운동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그들에 의하여 채택된 법과 놀랍게도 상당히 유사하다.
This constant, almost obsessive use of power against a small and scattered people shows as well an anxiety about the power of the witness of Jews and Judaism. What we know today as anti-Semitism is found within the Christian sense of Jews as a witness people testifying to the truth of the Christian confession of Jesus as Messiah and the fear that this degraded and punished people might also bear witness in another way, the possible Christian turn against the very teachings of the savior they claim as their own. It also illustrates another anxiety, that in fact the truth so triumphantly trumpeted might be less that it was made out to be. After all, if the people who foretold the messiah rejected him, it might just be that they were in fact correct. As long as Jews remained that tension existed.
소규모의 흩어진 민족에 대한 이 같은 지속적인, 거의 집착에 가까운 권력 행사는 유태인과 유태교의 목격자로서의 힘에 대한 불안감을 암시한다. 오늘날 반-유태주의로 알려진 것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기독교적인 고백의 진실성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있는 목격자로서의 유태인에 대한 기독교의 인식에 있으며, 이 타락하고 징벌을 받은 민족의 증언이 오히려 기독교에서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과시한 진리가 주장된 것보다 상당히 덜한 것으로 인식될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을 표상하기도 한다. 어쩌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한 사람들이 그를 거부했다면, 그들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상, 이와 같은 긴장감 역시 존재했다.
4) Religions do “turn”; they are born, solidify, change, evolve, retreat, expand, and sometimes retreat again. Religions are in history and respond to it. Some times the formative event which is their birth stands out above the present historical moment. Other times the present historical moment challenges the tradition that has grown up around the original formative event; the present challenges the past in fundamental ways.
4) 종교들은 “변신”한다; 그들은 탄생하여 결정화되고, 변화하면서 진화하고, 후퇴하고 확장하여 다시 후퇴하기도 한다. 종교는 역사 속에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반응한다. 어떤 경우에 그것의 모태적 사건이 현재의 역사적 현실보다 더 두드러질 때도 있다. 다른 경우에는 현재의 역사적 순간이 기존의 모태적 사건 주변으로 성숙한 전통에 도전하기도 한다; 현재가 과거를 근본적으로 도전할 때가 있다.
From its inception Christianity has revolved around ancient Israel, Judaism and Jews. Its very claim to existence and authenticity is found here. If Israel is intact, viable, under God’s guidance and protection, what need could there be for a “new” Israel? If Christianity comes into being as a variation of Israel, then it is simply a cultural or geographic hybrid, grafted within or upon Israel, then no special proclamation is needed by the world. Christianity’s claim however is quite different. Christianity asserts as truth that a fundamental break in Israel has occurred because the salvation of the world has appeared and has been rejected by Israel. A new reality has come into being which must be expressed over against the one time carriers of salvation’s promise.
기독교 태동기에 기독교는 고대 이스라엘, 유태교와 유태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존재와 정당성에 대한 주장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하에 온전하게 살아왔다면 ‘새로운’ 이스라엘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겠는가? 기독교가 단지 이스라엘의 하나의 변형으로서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내에서 또는 그것을 대상으로 구성된 문화적 또는 지리적인 혼합체에 불과하여 세계적으로 선언해야 할 대상이 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의 주장은 위와는 다르다. 기독교는 이스라엘에서 세상의 구원이 나타났고 이스라엘에서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진리로 주장한다. 한 때 구원의 약속을 받았던 민족과 역행하는 새로운 현실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In the beginning that new reality was discussed within the Jewish hierarchy and, after Jesus’ death, among Jews in the synagogues. A vibrant discussion it was, as far as we know, and again our major evidence of that discussion is found within the New Testament itself, primarily in the letters of Paul. Other commentary about Jews is found in John and in the other Gospels, with some of the commentary being quite moving and challenging within an intra-Jewish discussion and other commentary being quite demeaning, at least as the material was interpreted by later Christian communities. Whatever the initial discussions among Jews about Jesus, these discussions soon turned into arguments against Judaism by those who were no longer or who had never been Jewish.
최초에 이 같은 현실은 유태인 지도층(hierarchy) 내에서 논의되었고, 예수의 죽음 후에는 유태인들끼리 논의되었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 바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상당히 활발한 논의였다. 유태인에 대한 이외의 해설은 요한복음과 그 외 복음서에서도 나타난다. 이 중 일부는 감동적이고 유태인내(intra-Jewish) 담론에서 상당히 도전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에, 어떤 것은 최소한 이후 기독교 공동체의 해석에 따르면 상당히 천박한 것도 있었다. 예수와 관련된 어떤 대화가 있었던 것과는 무관하게, 이러한 대화들은 이후에 더 이상 유태인이 아니거나 유태인이었던 적이 없던 사람들에 의해서 유태교를 배척하는 논의로 바뀐 것이다.
When the discussion was no longer among Jews and Christianity as an empowered religion had arisen, polemics against Jews and Judaism became the norm. By this time a strict division between Christianity and Judaism was experienced and enforced and soon that division was explained in “blood,” thus racial terms. Though Jewish conversion to Christianity was always a possibility and a prized one at that, it is now thought that the division between Jews and Christians developed a racial element long before the Nazis.
이 대화가 유태인들 간에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권력의 힘을 얻은 기독교가 부상하기 시작했을 때, 유태인과 유태교에 대한 비판(polemics)이 일반화되었다. 이 때 기독교와 유태교 간의 분열이 경험되었고 강요(enforced)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이러한 분열이 ‘피’의 논리, 즉 인종적인 방식으로 설명되었다. 유태인들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언제나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인식되었고 장려되었지만,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 간의 인종적인 구분은 사실상 나치 이전 오래 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이다.
The Nazis, of course, dropped the theological arguments/polemics and turned the Jewish question into a purely racial one framed by an all encompassing ideology. The Nazis upped the ante of Christianity; whereas Christianity needed Jews as witnesses to their truth, the Nazi truth was dependent on the end of both Judaism and Jews. While the Nazi pursuit of Jews and Judaism upped the ante, in the end the Nazis forced Christians to face the role they played in laying the groundwork for the Nazi ideology that saw the annihilation of the Jews as an eschatology. The myths that developed around the Jews during the Christian medieval times in Europe, drawn from Christian images in the New Testament and then extrapolated into cultural, economic and political worldviews, were ripe for Nazi ideology. So, too, the revolutionary theologies of the Reformation, especially those of Martin Luther, were taken by the Nazis wholesale and inserted into the Nazi war against the Jews. In sum, the Christian theological war against the Jews, for centuries already institutionalized in Christian Europe, came to fruition in the Nazis vengeful combination of Christian myth and modern power.
나치들은 물론, 신학적인 논의와 논증(polemics)을 제쳐두고 유태인의 문제를 이데올로기로 꾸며 순전히 인종적 문제로 만들었다. 나치들은 기독교의 성립조건(ante)을 극대화시켰다; 기독교는 유태인들을 그들이 말하는 진리의 증인으로 필요했지만, 나치의 진리는 유태인과 유태민족의 종말에 의존했다.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동안, 결국 나치들은 일종의 종말론으로서 유태인의 전멸을 바라보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기반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기독교인들의 역할을 기독교인들에게 강제로 상기시켰다. 유럽의 기독교적 중세 시대에 구성된 유태인과 관련된 신화들은 신약 성경의 기독교적인 이미지들에서 끌어내어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세계관으로 발달해 온 바, 이는 나치 이데올로기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이와 비슷하게, 종교개혁의 혁명적 신학, 특히 마틴 루터의 주장들이 나치에 의해 전적으로 받아들여져 유태인과의 전쟁에 이용 되었다. 결국, 유태인에 대한 기독교의 신학적 전쟁은 기독교 유럽에서 수 세기 간 제도화되어 나치들의 기독교 신화와 현대적 권력의 잔인한 집합체로서 실체화된 것이다.
5) After the Holocaust, with more than six million Jews buried in mass anonymous graves, individual Christians, indeed Christianity as a religion, began to think again. Could the New Israel, with its highly sophisticated theological arguments against Jews and Judaism, had led to this mass slaughter and the virtual annihilation of the Jews of Europe? Knowing now the destination of these arguments and still holding them within its theological worldview, could this theology still be justified as Christian? If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Jews and Judaism was “true” could there be any change in the “truth” no matter the historical circumstance? If the Christian “truth” had been distorted by the Nazis, had it also been distorted by Christians before the Nazis? If the Christian “truth” was indeed distorted by Christians and Nazis how could this be changed since the terrible real truth on the ground was that the attempted annihilation of the Jews had occurred in a thoroughly Christian Europe?
6백만 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대규모 무명의 무덤에 매장된 나치의 대학살 이후, 기독교인 개개인뿐만 아니라, 종교로서의 기독교 스스로 지난 일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었다. 새로운 이스라엘이, 그들이 주장해온 유태인들에 적대적인 고도의 현란한 신학적 논의들이 유럽에서 실로 유태인 대량 학살로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일까? 이런 논의의 최종 결과를 안 이상, 그리고 그것을 기독교의 세계관속에 아직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런 신학이 기독교적인 것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유태인과 유태교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진리”였다면 역사적 상황과 상관없이 여전히 “진리”에 변화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기독교적인 “진리”가 나치에 의해 왜곡되었다면, 나치 이전의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왜곡된 것인가? 만약 실제로 이 “진리”가 나치와 기독교인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었다면, 기독교 유럽에서 일어난 유태인 학살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경험한 이상 이를 어떻게 우리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It could be that the “truth” of Christianity about the Jews and Judaism was wrong – from the very beginning or at least from the time of its very earliest interpreters. Yet since the fundamental need for a “new” Israel was the blindness of the “old” Israel – this seemed to be the essence of the question since salvation, at least for Christians, had come in the person of Jesus the Christ rejected by Jews and Judaism – how could Christians have misunderstood Jews and Judaism and still be Christians? If the original “old” Israel was intact, viable and worthy, under God’s guidance and not rejected because of its historical blindness toward the Messiah it predicted, could Christians be wrong about salvation itself? Since the Christian claim was and is universal, Jesus has to be all or nothing, for all not some. If Jews and Judaism are excused and can even reject Jesus as the Christ and still be right with God, does that make salvation, even for Christians, partial, varied and plural?
최초부터, 또는 최초의 해석이 일어난 시점에서부터 유태인과 유태교에 대한 기독교의 “진리”가 틀렸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새로운’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필요했던 것은 ‘옛’ 이스라엘의 어리석음(blindness)에 있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구원은 유태인들이 거부한 예수로부터 왔는데, 유태인들을 오해했다고 인정할 경우 어떻게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격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전의’ 이스라엘이 온전히 살아있고 가치 있으며, 메시아에 대한 역사적 어리석음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다면, 혹시 구원 그 자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기독교의 주장이 과거에나 지금도 보편적인 것이기에, 예수란 전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무(無); 일부 사람이 아닌 전체 인류를 위한 존재이어야 했다. 유태인과 유태교가 그리스도로서 예수를 거부할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면, 기독교인을 위한 구원은 부분적인 것, 다양한 것(varied), 그리고 복수의 것(plural)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As important, though rarely stated, the Christian understandings of salvation were now thoroughly covered with blood. This violence and death in the name of salvation that Christianity claimed raised the question of Christianity’s internal and external credibility. If Jews had turned their back on God and had been punished in history, could Christians be so punished for their sins toward Jews? Being in the place of victory with few to dispute Christian assertions of their way of being is one thing; standing in the ruins of Christian Europe in the wake of World War II forced another vantage point on the trajectory of Christian history and theology.
이와 동일하게 중요하지만 거론되지 않는 문제는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폭력과 죽음은 기독교의 내부적, 외부적 신용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유태인들이 하나님을 등져서 역사적 벌을 받았다고 한다면, 기독교인들도 유태인들을 향해 범한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되는 것인가? 기독교가 비판할 사람이 없던 승리자의 위치에서, 2차 세계대전 후 기독교 유럽의 폐허 한 가운데에 선 위치로 옮겨지면서 기독교 역사와 신학의 흐름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Even Christians began to judge Christianity in relation to Jews and Judaism. Any religion that stood in ruins of Treblinka and Auschwitz death camps had to rethink its essential truths. The death camps were so startling that even Christians began to doubt the truths of Christianity that had been passed on through the ages. In the end Christianity began to think again for its own well being. And in the modern age, where Christianity was completely voluntary and for many Europeans increasingly retrogressive, especially after the Holocaust, Christianity had to think again to maintain any credibility in the larger world.
기독교인들마저 유태인들과 유태교와 관련해서 기독교를 비판(judge)하기 시작했다. Treblinka와 Auschwitz death camps라는 결과 앞에 서 있는 종교라면 어떠한 종교라 할지라도 자신들이 주장해온 근본적인 진리에 대하여 재고해야만 할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들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기독교인들마저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기독교 진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결국 기독교는 자신의 안녕(well-being)을 위해서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는 오늘날, 유럽인들에게는 점점 퇴행하고 있는, 특히 홀로코스트 이후의 기독교는 더 큰 세계를 염두에 둔 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사고해야 했다.
6) The Holocaust provides the basis for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so prominent in the world today. For centuries there had been interfaith discussions between Jews and Christians, mostly held under Christian domination and Jewish duress. In these discussions, usually disputations, Jews weren’t free to argue their points without the possibility of individual and communal punishment.
6) 유태인 대학살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두드러진 유태-기독교 간 담론의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수 세기간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대부분 기독교가 지배하고 유태교가 구속 당하는 종교간 대화가 이루어져 왔다. 거의 논쟁의 형태로 이루어진 이러한 대화에서 유태인들은 개인 또는 단체에 대한 제재의 위협 없이 자신의 의견을 거의 내 세울 수 없었다.
In the wake of the Holocaust, however, all of this changed; Jews asserted equality with Christians and though the Jewish population was decimated in Europe, it was numerous, vibrant and empowered in the United Sates. In addition, just three years after the liberation of the death camps, the state of Israel was born. In a strange twist of fate, the destruction of European Jewry was accompanied by a new age of Jewish vibrancy and self-assertion. So, too, with the world, at least in Europe and America, Jewish culture, with its intellectual contributions and beyond, was finally recognized as an honored tradition in the West. The only question was how a thoroughly Christianized Europe had previously missed the Jewish contribution to the world. With its fierce opposition to Jews and Judaism, Christianity had also minimized, distorted and degraded the Jewish contribution to its own birth and being.
하지만 대학살 후에는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유태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동등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고 비록 유럽 유대인 인구는 상당히 줄었지만 미국에서는 수가 많아졌고, 활성화되었고,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죽음의 수용소가 해체된 지 3년이 지난 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탄생했다. 새옹지마란 말과 같이(in a strange twist of fate) 유럽의 유태인들의 파괴 이후 유태교가 활성화되고 자신감을 되찾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유태문화와 그 지적 기여는 특히 미국과 유럽에서 그 학문적, 문화적 공헌이 인정되어 서양에서 하나의 명예로운 전통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유일한 의문은 유태인들이 기여한 모든 것이 그 동안 왜 유럽에서 주목 받지 못했는가에 있었다. 기독교는 유태교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인해 유태교가 기독교 자신의 태생에 기여한 바를 경시하고, 왜곡하고, 격하시켜온 것이다.
How could Christian Europe and Christianity itself have missed the positive nature of Jews and Judaism now so easily seen and appreciated? Did this “missing” wound Christianity at the very core of its being in the world? With this “missing” established, what reversal was necessary in Christianity to right this wrong?
오늘날 너무나 주목 받고 있는 유태인과 유태교의 긍정적인 본성(positive nature)을 왜 그 동안 놓치고 있었을까? 이러한 “놓침”이 이 세계 안에서 기독교의 존재의 그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같은 “놓침”의 존재가 확실해졌다면, 그 간의 그릇됨을 바로 잡기 위하여 어떠한 변화가 요구되는 것일까?
7) From the beginning of this renewed Jewish-Christian discussion, then, the Holocaust played a major role in the internal discussion of Christian theology and what it meant and means to be a Christian in the world. After the war, new Christian movements sprung up in Europe to address the general question of what Christianity would mean within a post-Christian and post-Holocaust world. These movements, including theological sensibilities honed by the militarism and suffering in Europe, led to Vatican II, the Roman Catholic rendezvous with its history and future. This had long term and unintended results as seminarians from all over the world, who studied in Europe after the war, were part of this robust questioning of Christianity. Is it any wonder that some of these seminarians became, just decades later, the fathers of liberation theology in different parts of the world?
7) 지금까지 다룬 새로운 유태-기독교 간 대화의 최초부터, 대학살은 기독교 신학의 내부적 반성과 세계 속에서의 기독교의 존재의미에 관한 고찰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전쟁 이후, 유럽의 기독교-후기(post-Christian), 즉 대학살-후기 세계에서 기독교가 가지는 의미에 관한 여러 가지 기독교계의 운동들이 일어났다. 유럽 내의 군사주의와 고통에서 비롯된 신학적 민감성이 내재된 이러한 운동들은 자신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재고를 바탕으로 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Vatican II를 탄생시켰다. 전쟁 이후 유럽에서 공부한 전 세계의 신학자들이 기독교에 대한 건강한 질의에 참여하게 되어, 이 공의회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의도되지 않았던 여러 가지 결과를 낳았다. 여기 모였던 신학자들 중의 일부가 십여 년 후에 유럽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해방신학의 아버지 격이 된 것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Jews and Judaism became a key for the renewal of Christianity after the Holocaust. Obviously the Christian churches did little positive during the Nazis years, perhaps highlighted by the Roman Catholic church’s Concordant with the Nazi regime signed in 1933. For the most part, the Church stayed on the sidelines and tried to protect its institutional place in German society. Though uncomfortable with his rhetoric and megalomania, Hitler’s understandings of the Jews as a problem, including their attraction to liberal and radical causes, led the Church to side with the Nazis in their more important and mutual struggle against atheistic Communism as represented by the Soviet Union and those Europeans attracted to that Marxist ideology.
유태인과 유태교는 대학살 이후 기독교의 새로운 갱신의 열쇠가 되었다. 물론, 1933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나치가 함께 서명한 합의문에서 볼 수 있듯이, 나치 시대 당시에는 기독교 교회들이 그다지 많은 긍정적인 일들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로마 카톨릭 교회(the Church)는 옆으로 빗겨 서서(stay on the sidelines) 독일 사회 내에서의 제도적 위치를 사수하려고 했다. 물론 그(히틀러)의 수사학과 과대망상적인 경향에 대해서는 불편했지만, 유태인의 존재, 특히 그들의 진보적이고 극단적인 경향을 하나의 문제로 인식한 점, 그리고 이보다는 더 중요하게 소련으로 대표되는 무신론주의적 공산주의와 마르크시즘에 빠져 있는 유럽인들을 하나의 적으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나치와의 공통분모를 찾게 된 것이다.
Though some Protestants did protest, becoming the Confessing Church, for the most part that protest was confined to Hitler’s usurpation of political power and his desire to infiltrate the churches rather than his rhetorical denunciations and legislation against Jews. There were also those Christians who allied themselves with the Nazis, agreeing with the Nazi understanding of the Jews and invoking Nazi rhetoric along with some of the traditional anti-Jewish arguments already found within Christianity. These Christians sought to develop a Jew-free, Nazi-oriented Christianity with Hitler as a messianic figure. To do this even Jesus’ Jewishness had to be expunged. For these Nazi Christians, Hitler as a messianic figure was complimented by Jesus being rediscovered as an Aryan.
비록 일부 개신교도들은 Confessing Church를 형성하여 반대했지만, 이러한 반대는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수사학적 위협(denunciations)과 법적 조치와 관련된 것이기보다는 히틀러의 권력 독점과 교회들을 조종하려고 했던 욕망과 관련되어 있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나치의 유태인에 대한 시각에 동조하고 그들과 스스로 연맹을 맺어 나치 측의 주장과 기존의 반-유태적인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히틀러를 메시아-격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유태인이 전무한, 나치 위주의 기독교를 구성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의 유태성 마저 삭제해야만 했다. 이러한 나치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가 아리아 인이었던 것으로 재발견한 사건은 히틀러의 메시아-성을 강화시키기만 했다.
8) From the beginning of the post-Holocaust Jewish-Christian dialogue the issue of Christian complicity was at the fore. This took several trajectories: Christian complicity with unjust power in the Constantinian Christianity that developed in the 4th century and had survived into the Nazi period; Christianity’s colonial, indeed imperial model of mission that Christianity assumed and applied within Europe and outside of it; the way Jews were treated theologically and practically in a Christian dominated Europe; the cultural elements of anti-Semitism that survived within Europe after Christianity ceased to be a dominant political power.
8) 대학살-후기의 유태-기독교 담론은 형성 초기부터 기독교의 공모라는 문제가 상당히 부각되었다. 여기서 여러 가지 원인들이 제시되었다: 4세기에 Constantinian 기독교에서 시작되어 나치까지 부당한 권력과 결탁; 유럽 내외에서 시행된 기독교의 식민주의적, 그 이상으로 제국주의적인 전도 모델; 기독교가 지배한 유럽 내에서의 유태인에 대한 신학적, 실질적 억압; 그리고 기독교가 유럽에서의 절대적 권력을 잃기 시작했을 때 남아있던 문화적 반-유태주의적인 요소들이 그것들이다.
After the Holocaust, Jews saw an opening within Christian theology and practice to demand the cessation of anti-Jewish sentiments found in Christian teaching and ritual. At the same time, Jews demanded confessions of Christian complicity in the Holocaust and in anti-Jewish sentiments that were widespread throughout Europe for centuries before the Nazis. As Christians searched the internal aspects of Christian theology and witness in the world so that reform would be theologically-based as well as world inspired, these two trends increasingly dovetailed. Jews needed changes in Christian theology and practice so that their communal life and dignity could be safe-guarded; many Christians felt that the very soul and possibility of Christian life after the Holocaust depended on it.
대학살 이후, 유태인들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풍습에 내제된 반-유태주의적인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유태인들은 대학살을 묵인하고(Christian complicity) 수 세기 간 유럽 전역에서 이어져 온 반유태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성을 요구했다. 개혁이 신학적 근거가 있는 동시에 세계적 현실과의 관련성을 가지게 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학의 내부적 요소와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증언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과정에서, 이 두 가지 방식들이 서로 얽히게 되었다.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종교 생활과 민족으로서의 긍지가 이 것에 의존한다고 생각했고, 기독교인들은 대학살 후 정상적인 기독교 생활의 가능성과 기독교적인 혼 그 자체가 이에 의존한다고 생각했다.
Soon there was a whole-sale revisioning of Christianity. By the 1970s and after, almost every mainline Christian denomination had confessed Christian complicity in the anti-Semitism that led to the Holocaust. In addition, many church bodies vowed to eradicate anti-Semitism from their teachings and ritual and in doing so essentially, if not always explicitly, adopted a dual, complementary, covenant approach to Judaism and Christianity. In the main, this two covenant approach asserted that the Jewish covenant had always been valid and that the Christian covenant was either independent of the Jewish covenant - rather than replacing it - and/or grafted upon the Jewish covenant.
얼마 후 기독교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이 이행되었다. 1970과 그 후에 이르러서 거의 모든 주요 기독교 종파들이 대학살에 이르게 한 반유태주의를 묵인 또는 공모한 사실에 대해서 고백했다. 추가적으로, 대부분의 교회 단체들은 그들의 가르침과 의식에서 반유태주의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여 그럼으로써, 우회적일 때도 있겠지만, 유태교와 기독교에 대한 이중적, 보완적, 그리고 서약적 접근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이중 커버난트(성약, covenant)은 대체적으로 유태교의 성약이 유효하며, 기독교의 성약은 이와 독립적으로 유효하거나, 이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In this dual covenant understanding, Judaism and Christianity were distinct and interdependent, with Judaism being for Jews and Christianity being for Christians. Though other non-Christians were in need of Christianity, thus mission could continue though under changed conditions and methods, Judaism and Jews were exempt from Christian mission. Being sufficient unto themselves, Jews had their own role in God’s dispensation as the keeper of God’s covenant.
이 같은 이중 성약 위주의 이해에서 유태교와 기독교는 서로 독립적이면서 상호의존적이었으며, 유태교는 유태인을 위한 것이고 기독교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것으로 인정함을 알 수 있다. 이외의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필요로 하므로 전도 임무(mission)는 개선된 조건과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었고, 한 편 유태교와 유태인들은 이러한 전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자체적인 존립이 인정되어, 유태인들은 하나님의 성약의 계승자(keeper)로서 하나님의 계획에 포함된 민족이 된 것이다.
Christianity was a keeper of God’s covenant as well; its mission was to spread that covenant outside the Christian world to the nations that had yet to hear or accept God’s word. Judaism and Christianity thus worked together in God’s economy, Jews tending the original covenant, Christians spreading the second inaugurated by Jesus who became the message of God’s love from Israel to the nations.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하나님 계약의 준행자였다: 기독교의 사명은 그 계약을 기독교 밖의 세계에 머무는,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나라들에게 전파하는 것이었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이렇듯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함께 일했다; 유대인들은 그 본래의 계약을 향하고,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로부터 온 나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된 예수에 의하여 시작된 두 번째 의미의 계약사상을 전파한 것이다.
9) Questions abounded. Was this the Christianity being forged, a rediscovery of Christianity as it was known before the Church Fathers and Constantine? In the early days, Christianity had been defined by the Romans as a Jewish sect and most Christians were Jews still in conversation with the mainstream Jewish community. Was this what those who followed Jesus were supposed to be? If so Christianity had veered off course. Was Christianity now returning to its origins?
여기에 무수한 질문이 제기된다. 이렇게 조작되어진 기독교는 교부들과 콘스탄틴 시대 이전에 알려진 바, 일종의 기독교 재발견인가? 초기에는 기독교는 로마인들에게 일종의 유대적인 소종파로 규정되어왔고, (당시)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주류 유대 공동체와 대화를 나누던 유대인들이었다. 이것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원했던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는 코스를 이탈했던 셈이다. 기독교는 이제 비로소 그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을까?
There were other interpretations of this post-Holocaust journey. Some Christians felt that Christianity was, in effect, being re-Judaized, thus foreclosing the necessary and unbridgeable divide between Judaism and Christianity. If this was the case could a Christianity that felt divided from Judaism also live peacefully with Jews and Judaism?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was involved with these questions and more.
이러한 후기 홀로코스트적인 논의의 과정에 대한 다른 해석들도 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사실 다시 유대적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유대교와 기독교를 필연적으로, 다리를 놓을 수 없도록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유대교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느끼던 기독교는 유대인들과 유대교와 평화스럽게 지낼 수는 없었을까? 유대-기독교 대화는 이러한 질문들 등을 다루었다.
In the meantime some Jewish theologians were developing what later became known as Holocaust Theology. This movement began in 1966 with the publication of Richard Rubenstein’s After Auschwitz: Radical Theology and Contemporary Judaism, a book which paradoxically entered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as a positive contribution, even though Rubenstein denied the ability of thinking Jews to believe in the God of History after Auschwitz. After all, if God is a God of History who promised to be with the Jews in their historical journey, where was God in the Holocaust?
그러는 동안 몇몇의 유대 신학자들은 후에 홀로코스트 신학이라고 알려진 사상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 신학운동은 1966년 리챠드 루벤슈타인의 “After Auschwitz: Radical Theology and Contemporary Judaism.” 이라는 책과 함께 시작되었는 데, 비록 루벤슈타인이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이후 역사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을 부인했지만 모순적이게도 하나의 긍정적인 기여로서 유대-기독교간 대화를 열었다. 결국 만일 하나님이 역사적 여정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한 역사의 하나님이시라면 홀로코스트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단 말인가?
At Sinai, the covenant was proffered to Israel as a two-way contract, God promising to be with the Israelites in history and the Israelites promising to follow God’s Law as a sign of Israel’s mission and destiny. Since despite this promise from God, Jews suffered in history, the Rabbis posited this suffering as God’s punishment for Israel’s straying from the Law. As a rigorous but loving parent, God punished the Jews in order to bring the people back to him. Rubenstein rejected this understanding: how could Jews believe in a God who allowed the murder of six million Jews as a punishment for any amount of sins? This included the murder of over a million Jewish children. What were their sins?
시내산에서 계약은 상호 계약에 의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그 상호 계약은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것을 약속했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사명과 운명의 증표인 하나님의 법을 준행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이 약속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역사 안에서 고난을 겪었고, 랍비들은 이 고난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에서 이탈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단정했다. 엄격한 그러나 사랑이 넘치는 부모처럼 하나님은 유대인들은 그에게 돌아오게 하려고 징계했다는 것이다. 루벤슈타인은 이런 해석을 거절했다: 어떻게 유인들이 죄악에 대한 징계로 600만의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것을 허용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살해 사건은 100만 명이 넘는 유대인 어린 아기들을 포함한 숫자다. 그 어린아이들의 죄가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10) Rubenstein’s rejection of the theological assertion of God punishing Israel for its transgressions was echoed by the Holocaust theologians that followed in Rubenstein’s wake: Elie Wiesel, Emil Fackenheim and Irving Greenberg. Following Rubenstein and echoing Wiesel and Fackenheim, Irving Greenberg’s statement, published in 1974, spoke forcefully to the assertion of God’s presence in the face of the Holocaust: “After, the Holocaust, no statement, theological or otherwise, should be made that would not be credible in the presence of the burning children.” Speak about God, for Greenberg if it makes sense to a burning child. If such a statement doesn’t past that test, and what statement would, then we should be silent about God. Greenberg also applied to this same test to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Easter as the defining moment of the world’s salvation. Would speech about redemption make sense to a burning child in the Holocaust? Moreover, and perhaps as difficult, in the face of the burning children, can a Christian make sense of a triumphant Christian salvation especially since the anti-Semitism of Christianity helped make the burning of that child, indeed a million children possible?
10) 이스라엘을 그 죄값으로 징벌하였다는 신학적 주장에 대한 루벤슈타인의 거부는 류벤슈타인의 자각에 동조하는 홀로코스트 신학자들 - 엘리 비젤, 에밀 파켄하임 그리고 어빙 그린벅에 의하여 반향 되었다. 루벤슈타인에 동조하고 비젤과 파켄하임의 견해과 더불어 1974년에 출판된 어빙 그린벅의 주장은 강력하게 대학살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강변했다: “대 학살 이후 어떤 신학적 혹은 다른 주장도 불타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 앞에서 믿을 수 있는 주장이 아니었다.” 그린벅에게는 태워지는 어린 아이에게 의미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런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차라리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린벅은 이와 같은 기준을 세계의 구원을 규명하는 것으로서 기독교적 부활절 이해에도 적용한다. (기독교의) 구원에 대한 주장이 대학살 중에 불타고 있는 어린 아이에게도 의미 있는 것인가? 더 나가서, 비록 어려운 문제지만, 불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시신을 직면하면서 기독교는 불타는 그 아이를, 실로 백 만명의 아이들의 죽음을 의미 있게 할 수 있을까?
As much as the challenge of belief in God after the Holocaust, Greenberg and other Holocaust theologians also faced the difficulty of Jews and Christians becoming atheists in light of the Holocaust. Like other Jewish theologians, Greenberg challenged the traditional God of history, yet at the same time he challenged the “God of Science and Humanism.” While Auschwitz represented a triumph of Christian theological anti-Semitism, it was also a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wonder. With Rubenstein in his book The Cunning of History, Greenberg also emphasized the Holocaust as a thoroughly modern experiment that could not have taken place without the technology and advanced social organization of modern society.
대학살 이후 하나님 믿음에 대한 도전이 무수히 일어난 것과 같이 그린벅과 아들 ㄴ홀로코스트 신학자들은 대학살에 wrlausgkdu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가 되는 어려움을 직면 했다. 여타 유대 신학자들과 같이 그린벅은 전통적인 역사의 하나님에 대하여 도전하면서 동시에 “과학과 휴머니즘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대학살)이 기독교 신학의 반유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반면 그것은 과학 기술적 경이이기도 했다. 루벤슈타인의 책 역사의 교활함(The Cunning of History)과 더불어 그린벅은 대학살이란 철저히 기술과 현대 사회의 진보된 사회조직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던 철저히 근대적 경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For Rubenstein especially, it was this combination of theology and advanced modernity that allowed Hitler’s nightmare to become a nightmare reality. The caution that Rubenstein leaves us with is that it is a mistake to analyze the Nazis as retrogressive barbarians. Just the opposite, in important ways the Nazis were pioneers in the ability of the state to commit violence with modern methods. As a paradigm of the 20th century, the Nazis were in continuity and were innovators. The Holocaust warned of things to come.
루벤슈타인에게 있어서 특히 대학살은 히틀러의 악몽이 현실의 악몽이 되도록 허락한 신학과 진보된 근대성의 결합이었다. 루벤슈타인이 우리에게 남긴 경고는 나치를 퇴행적 야만으로 분석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치들이 취한 중요한 방법들은 현대적 수단을 동원하여 폭력을 저지른 국가의 능력에 있어서 선구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일종의 20세기적 패러다임으로서 나치는 연속선상에 있고 또한 혁신적이었다. 대학살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경고를 했던 것이다.
11) Partly through these Holocaust theologians, a Christian Holocaust theology was born, that is a Christian theology that had Holocaust as a pivotal point for Christian reflection. Just as Christians could not ignore Jesus as the central datum of Christian belief, the Holocaust began to stand for the central datum of Christian history. Just as in Jewish belief the Exodus narrative of liberation was confronted by the Holocaust narrative of destruction, so, too, the Easter narrative of resurrection was confronted by the reality of the Holocaust on a Christian continent. The Exodus and Easter remained but both were now chastened by a history of exclusion, destruction and death. The Jewish question of how redemption could be asserted in an unredeemed world became a serious discussion point for Christians involved in Jewish-Christian dialogue. Could it be that the Holocaust, but also Jews and Judaism, had to be seriously considered and reflected upon as data for Christian believers?
11) 일부 이런 신학자들을 통하여 일종의 기독교 홀로코스트 신학이 태어났다, 그것은 홀로코스트을 기독교적 사유의 중차대한 관점으로 받아들이는 기독교 신학이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항의 핵심적 근거자료로서 예수를 간과할 수 없듯이 대학살은 기독교 역사의 핵심적인 자료를 의미했다. 유대인들의 신앙 에서 해방의 출애굽 이야기가 대학살이라는 파괴의 이야기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듯이 (예수가) 부활 했다는 부활절 이야기는 기독교 대륙에서 대학살이라는 현실에 의하여 도전을 받았다. 출애굽과 부활절은 남아 전해지고 있지만 양자는 배제의 역사, 파괴와 죽임의 역사에 의하여 쫓기고 있다. 구원받지 못한 세계에서 어떻게 구원이 강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유대인들의 물음은 유대-기독교간 대화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논의점이 되었다. 대학살이,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학의) 자료가 되듯이 유대인과 유대교에게서도 진지하게 숙고되어야만 한다는 것일까?
Thus the back and forth in relation to Jews and Christianity. Christians considered the Holocaust as a backdrop for their reflection on what it meant and means to be a Christian. The Holocaust event, as horrible as it would be for any community, was the attempted destruction of the Jews; this had a surplus meaning for Christians and Christianity, bringing Christians back to their origins. The division posited there, albeit with subsequent important additions such as an empowered and colonial Christianity, could be traced to the beginning of Christianity and its split with Jews and Judaism.
이렇게 유대인들과 기독교 관계에서 밀고 당기는 논의들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대학살을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며 무엇을 의미해야 하는지를 비추어 보는 배경막처럼 생각했다.어느 공동체에게 있어서나 너무나 끔찍할 수 밖에 없는 그 대학살 사건은 유대인들을 박멸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에 잉여의 의미를 주었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근원을 돌려 생각해 보게 한 것이다. 여기서 비록 힘을 부여 받았던 식민지적 기독교라는 문제와 같은 중요한 부수적인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유대교의 분리는 기독교의 출발점으로 거슬러가 기독교가 유대인들 그리고 유대교와의 결별했던 그 자리를 드러냈다.
More than a few curious Christian theologians and laypeople began to see a connection between the anti-Judaism of early Christianity and the Holocaust so that the only way to repent and repair the Holocaust suffering of the Jews was to mend the age-old divisions between the two religions. In mending those divisions a new solidarity of Jews and Christians began to take hold. The positing of a dual covenant, coupled with active repentance for the historical wrongs of Christianity, became the nomenclature for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훨씬 만은 신학자들과 평신도들이 초기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와 대학살 사이의 연관성을 보고 유대인들의 대학살의 고통을 회개하고 치유하는 유일한 길은 낡고 오래된 두 종교간의 거리를 고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종교간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하여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간에 새로운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이중의 계약사상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역사적 오류에 대한 적극적인 회개와 더불어 유대-기독교 대화라는 전문용어가 생겼다.
12)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e Jewish side of this dialogue was assertive, properly so, both in its critique of Christian theology and history and in its demand that Judaism and Jews define themselves independent of Christian intervention. The entire history of Jewish-Christian interaction revolved around the Christian assertion of having replaced the “old” Israel. That and restrictions on Jews promulgated by Christianity made the total reversal of the one-sided relationship imperative. Still, it is remarkable that few if any Jewish interlocutors posited that Jews could learn anything from Christian theology or life. Nor did Jews apply any lessons from the failings of Christian history to Jewish history, then or now.
12) 이 대화를 하는 유대인의 입장은 기독교 신학과 역사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나 그리고 유대교나 유대인들이 그 자신들을 기독교와 개입 없이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확고하고도 적절한 것이라는 점은 주의해 두어야 할 일이다. 유대-기독교간 대화를 해온 전체 역사는 옛 이스라엘을 대체해왔다는 기독교의 주장을 맴돌았다. 이런 사실과 그리고 기독교에 의하여 공포되었던 유대인들에 대한 제약들은 그 일방적인 명령관계를 전반적으로 뒤집었다. 하지만 유대인 대담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엇인가 기독교 인들의 신학이나 삶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기독교 역사가 유대역사에 끼친 그 때나 지금의 실수로부터 얻은 교훈을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This was at a time when Jews were recovering from the trauma of the Holocaust, to be sure, though over time at least in the United States, Jews gained a needed and substantial ascendancy. This was true in the state of Israel as well. Beginning as a pioneering state in 1948, after the 1967 Arab-Israeli War, Israel became a major military power in the Middle East. Israel’s power, while independent, was also interdependent; by the 1980s Israel’s only benefactor, and a big one at that, was the United States. By the 1990s Israel’s security, as well as it continuing expansion into the West Bank, was enabled by the only superpower left in the world.
이런 현상은 유대인들이 대학살의 상처를 이겨내고 있을 때, 보다 분명히 하자면, 최소한 미국 내에서 유대인들이 필요하고 실질적인 우월성을 얻었을 때 였다 . 이런 태도는 이스라엘 국가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최초로 세워진 국가로서 시작하여 1967년 아랍과 이스라엘간의 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주요한 군사적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힘은 독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의존적인 것이었다. 1980년대에 이스라엘의 유일한, 커다란 후원자는 미합중국이었다. 1990년대 이스라엘의 안보가 유지되고 이스라엘이 웨스트 뱅크(팔레스타인의 서쪽)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에 남아있는 유일한 거대권력인 미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So just as the history of anti-Semitism and the Holocaust confronted Christian theological assertions – Easter confronted by the Holocaust - and Jewish Holocaust theologians confronted the Exodus with Auschwitz in terms of what could Jews say about God and what Jews needed to survive in an often dangerous world, an unanalyzed Jewish empowerment in America and Israel was taking place.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neglected this fact and indeed Jews insisted that it was unacceptable to place Jewish empowerment on the table for discussion. Form the Jewish perspective, Jewish-Christian solidarity precluded it.
반유대주의와 대학살이 기독교신학의 주장들에 도전했던 바와 같이 - 부활절은 대학살 사건에 의하여 정면 도전을 받았다 –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말 할 수 있고, 또한 공공연하게 위험한 세상에서 유대인들이 생존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했던 것인가라는 의미에서 유대 홀로코스트 신학자들은 출애굽사건을 대학살 사건과 함께 직면해야 했고, 그리고 분석되지 않았던 바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이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사실도 직면해야 했다. 유대-기독교간의 대화는 이 사실을 간과했고, 실제로 유대인들은 토론의 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지는 파우어를 논쟁점으로 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대-기독교간의 연대라는 점에서 이미 그 런 주제는 제외되어 있었던 것이다.
If an analysis of Jewish empowerment in America and what American empowerment meant for the world – America’s imperial power and Jews benefiting from it – and Israel’s empowerment in the Middle East and what that meant for the Middle East in general and the Palestinians in particular – were both out of bounds, did that mean that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had decided to emphasize the past and preclude history’s lessons to the present? Or did it mean that Jews were historically exempt from the critique Jews correctly leveled at Christians. In many ways, the ecumenical interfaith Jewish-Christian dialogue had become a deal.
만일 미국에서 유대인들이 권력획득에 대한 분석이 그리고 미국이 권력을 가지는 것이 세계에 무엇을 의미하는 가라는 질문이 – 미국의 제국주의적 권력과 유대인들이 그것의 덕을 보는 일 -, 그리고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힘을 가지데 된 것과 일반적으로 중동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와 특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 모두 논의의 범위를 지나치는 것이지만, 이런 것이 과연 유대-기독교간의 대화를 과거에만 집중하고 현재를 향한 과거역사의 교훈을 배제하는 것일까? 혹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규정했던 바 그 비판에서 유대인들은 역사적으로 제외된다는 것일까? 사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대-기독교간의 에큐메니칼한 종교간의 대화는 일종의 거래가 되어 왔다. (역자 주: ecumenical deal이란 에큐메니칼한 대화를 하는 이들이 서로의 약점이나 문제를 서로 모른 체하는 일종의 거래를 의미한다.)
This Jewish-Christian dialogue had devolved. Any discussion of American-Jewish or Israeli power was seen as a reversion of the Christian partners to traditional anti-Semitism, since Jewish empowerment in America and Israel was seen by Jews as the Christian vehicle for repentance for the Holocaust. Traditionally, Christians had kept Jews degraded and ghettoized with any hint of Jewish power to be destroyed as contrary to Christianity and God’s will. Since the Holocaust commanded Jewish empowerment could Christians so soon after the Holocaust critique Jewish power without being – at least subconsciously if not consciously – anti-Semitic? Holocaust theologians and other Jewish commentators coined a new word for Christians that critique the abuses of Jewish power in present time – as purveyors of the “new” or “real” anti-Semitism, defined solely as those who saw America as an imperialist power and Israel as a dominator of Palestinians.
이런 식의 유대 기독교간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미국계 유대인들 혹은 이스라엘의 파우워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 대화의 파트너가 전통적인 반 유대주의로 돌아가는 것처럼 비쳐졌다. 반면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유대인들의 파우어가 강해지는 것은 유대인들의 눈에는 대학살에 대한 기독교적 회개의 매개물처럼 보여졌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조금이라도 유대인들이 힘을 가지는 모양이라도 기독교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 여겨 파괴하면서 유대인들을 비하하고 게토에 몰아 넣어왔다. 대학살이 유대인에게 권력을 주라는 요구를 했다면 기독교인들은 대학살 직후, 의식적이 아니라면 최소한 무의식적으로라도 반 유태적이지 않으면서 유대인들의 권력을 그리도 빨리 비판할 수 있었을까? 홀로코스티 신학자들과 여타의 유대인 논평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새로운 말을 만들었는 데, 오늘날 유대인들의 권력남용에 대한 비판은 - “새로운” 그리고 “실제의” 반유대주의를 불러오는 것으로서 미국을 제국주의적 권력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인들의 지배자로만 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13) Though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remains intact, with the Holocaust and an uncritical embrace of Israel by Jews and Christians at the center, recent years has seen the realization by some Jews and Christians that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has become a deal and that this deal needs to be broken. These Jews and Christians who recognize that the dialogue has become a deal, thus trivializing the very foundations and values of the dialogue itself, are exercising their conscience as the Jewish-Christian deal, while emphasizing Jewish suffering and Christian repentance, is covering over new crimes, especially those committed against the Palestinian people. These Jews and Christians of Conscience pay homage to the terrible suffering of Jews in the Holocaust and the history of Christian anti-Semitism, while insisting on a critical history of contemporary history that includes an evaluation of Jewish and Christian power today.
비록 대학살 사건과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이 무비판적으로 이스라엘을 끌어 안는 논리가 핵심이 되어 있는 유대-기독교간의 대화가 그대로 진행되더라도, 최근 수년간 일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간에서 일어난 일이 드러난 바, 유대-기독교 대화가 일종의 거래가 되었고 이 거래는 파기되어야 한다는 사실 깨달은 것이다. 대화가 일종의 거래가 되고 대화 그 자체의 근본이나 가치가 하찮은 것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유대-기독교간의 거래의 일환으로서 한편으로는 유태인들의 고난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회개를 요구하면서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범해지는 새로운 범죄들을 감추어주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양심적 실천을 하고 있다. 이 양심적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유대인 그리고 기독교인이 가진 권력에 대한 평가를 포괄하는 현대 역사에 대한 역사적 비판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대학살 사건과 기독교의 반 유대주의 역사에서 일어난 유대인들이 겪은 끔찍한 고통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나눈다.
For many Jews and Christians,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while important in its day, now serves as a cover for some of the same sins it condemns in the past. Christians who understand that the dialogue has become a deal have to deal with the history of anti-Semitism as a caution on their speech about Jews and Jewish power, since certainly Jews deserve enough power to protect themselves against theological and political intruders. However, Jews do not deserve a fee pass on abuses of power, specifically in relation to the Palestinians. Joining with Jews of Conscience who condemn Christian and Jewish abuses of power, these Jews and Christians seek to reclaim the true horror of the Holocaust from being trivialized by using Jewish suffering as a weapon and a shield of unaccountability. The Holocaust is indeed trivialized when the very Holocaust memorials that dot Europe and America become rallying points for wars of choice like Iraq or censors of critical speech and action against Wall that is now encircling Palestinians in Jerusalem and the West Bank.
무수한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유대-기독교간의 대화란 그 당시에는 중차대했지만 지금은 그저 그 대화가 비난했던 과거의 죄악들과 동일한 범죄들을 가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유대인들은 신학적이나 정치적인 공격자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만한 힘을 당연히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 대화가 일종의 거래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유대인들의 권력에 대하여 언급할 때 조심하면서 반유대주의의 역사와 거래를 해야 한다. 하지만 특히 팔레스타인과 관계되어 유대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권력 오용을 당연시하는 일은 안 된다.. 기독교-유대인들의 권력오용을 비난하는 양심적인 유대인들과 연대하여 일련의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겪은 고난을 무책임의 무기로 삼거나 방패로 삼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로부터 진정한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으려 하고 있다. 소수의 유럽과 미국이 이락 전쟁이나, 비판적 언론이나 예루살렘과 웨스트 뱅크를 둘러싸고 있는 장벽에 반대하는 행위를 감시하는 것과 같은 선택적 전쟁에 힘을 모으면서 가지는 그런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은 그야말로 홀로코스트를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Paradoxically, the Jewish-Christian dialogue/deal has been moving in different directions over the years. As Jews have established power centers in the United States and Israel, the Jewish community has increasingly turned inward and neo-conservative in light of the lessons many Jews glean from the Holocaust. The Christian community, however, chastened by the lessons they perceive coming from the Holocaust, has increasingly expanded its vision and involvement in the world. For European and American Christians, especially, this has highlighted the emerging Third World as a locus for their political involvement and support.
모순스럽게도 유대-기독교인간의 대화/거래는 지난 수 년 동안 여러 방향으로 분기되었다. 유대인들이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권력의 중심을 형성함으로써 유대인 공동체는 무수한 유대인들이 대학살 사건에서 거두어 들인 교훈이라는 관점에서 내면화되고 신 보수화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홀로코스트로부터 배운 바 그런 교훈들에 의하여 닥달을 받았던 기독교 공동체는 세계 속에서 비젼과 참여의 범위를 점증적으로 넓혀왔다. 특히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정치적 개입과 지원을 위한 장소인 제 3세계의 출현에서 이런 점은 두드러진다.
14) Looking from the perspective of the Third World, the First World pursuit of affluence and power is quite different than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presumes. Anti-colonial and neo-colonial campaigns cannot help but critique American power in the world and Israel’s expansionary policies in the Middle East. Though Christian dialoguers have been relatively silent within the dialogue/deal, they, too, have continued expanding their horizons outside of earshot of the Jewish power elites. Moreover, they have encountered the emerging and now quite substantial liberation theologies emanating from the Third World that continue the arc of Christian revisioning beyond the Vatican II model of Christian renewal.
제 3세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 1세계가 추구했던 풍요와 권력은 유대-기독교간의 대화가 예측했던 바와 매우 달랐다. 반-식민지적 그리소 신식민지 비판여론은 세계에서의 미국의 파우어나 중동에서 이스라엘의 팽창주의 정책에 도움은 커녕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비록 기독교 대화자들은 비교적 그 대화/거래에 있어서 침묵 했지만, 그들 역시 유대 권력 지식인들과 나란히 그들의 지평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왔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바티칸 제 2 공의회의 기독교 갱신모델을 넘어서 기독교의 수정이라는 짐을 지고 제 3세계에서 나타난 대단히 실질적인 해방신학을 직면해야만 했다.
In this encounter with the Third World, Christians within the Jewish-Christian dialogue/deal and those Christians of Conscience outside of it have come into contact with a politicized Jesus. This Jesus is often portrayed as a figure in line with the prophets of Israel and who spent his life living within the context of Roman colonialism and Jewish leadership collaboration with the Roman power. Here Jesus, as Jew, struggles against the powers and principalities of the world in which he lived, applying the ancient principles of justice and compassion, drawn from Judaism, as Christians are instructed to do in the present. If Jews, among many others, are complicit in the present unjust power arrangement, can they be exempt from criticism and is all criticism of Jews and Jewish power ipso facto anti-Semitism?
제 3세계와의 조우에서 유대-기독교간의 대화/거래를 해오던 기독교인들과 그 거래 밖에서 양심을 지켜오던 기독교인들은 정치화된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이 예수는 종종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맥락에 서있는, 그의 삶을 로마 식민주의 안에서 그리고 로마의 권력에 협력하던 유대 지도자들이라는 정황에서 살았던 인물로 그려졌다. 여기서 예수는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지듯이, 유대교에서 유래된 정의와 동정의 오래된 원칙들을 적용하면서 유대인으로서 그가 살았던 그 세상의 권력들과 권세 잡은 자들과 싸웠다. 무수한 인종들 중에서 유대인들이 오늘날 불의한 권력 행사에 가담한다면 과연 그들이라하여 비판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모든 비판은 곧 유대인들과 그들의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같은 바로 그런 반셈주의가 아닌가?
By partnering with Jews of Conscience, Christians who are seeking a just world also enter into a deep solidarity with Jewish history, Judaism and the Jewish people. The question is what this journey might mean. Might it take both Jews and Christians beyond their old identities, identities which then and now are covered in the blood of the innocent? If Jews and Christians of Conscience are take this journey they no doubt will end in exile together. In this common exile, where no return is possible, will there form a New Diasp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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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인 유대인들과 연대하여 정의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은 유대 역사, 유대주의, 그리고 유대인들과 깊은 연대를 나누고 있다. 이렇게 연대를 나누는 삶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 그 의미는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을 그들의 낡은 정체성, 그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의 피 속에서 가려진 것일 터, 바로 그 낡은 정체성 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만일 이런 여정에 참여하고 있는 양심적인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라면 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마침내 함께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바로 돌아갈 길이 없는 이 공동의 추방에서 하나의 새로운 디어스포라가 형성되는 것은 아닐까?
15) What does reflection on the Holocaust portend for the future of Christian theology?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had it right in the beginning; Christian theology and practice did need to rid itself of it’s anti-Semitic elements; Christian theology and practice did have to reencounter its origins and see dispense with the sense that Israel had been split in half, into the Old “witnessing” Israel and New “truth-carrying” Israel. Any theological assertion that a community’s redemption is achieved over against another community’s damnation is bound to lead to a violence that ultimately destroys the very credibility of the truth claims held forth. Further, Christianity’s globalization, carried with the flag of empires then and now, is ripe for critique. By the time of the Holocaust, Christianity, at least in the West, had lost its empire moorings. Still, it hung for dear life and thus wrote the final chapter in its Constantinian wrappings. The question for Christians remains as to what is left of Christian “truth” and “witness” after the empire wrappings are taken away or voluntarily dispensed with. As we see in the post-Holocaust period, Christianity has not resolved this question of what is left; it is not even sure that it should or can survive without empire.
대학살 사건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숙고가 미래의 기독교 신학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유대-기독교간의 대화는 시초에는 참 옳았다; 기독교 신학과 실천은 실제로 그것이 가졌던 반 유대주의적 요소를 제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기독교 신학과 실천은 그 연원을 다시 만나야 했고 이스라엘은 “옛 증언”의 이스라엘과 새로운 “진리를 담지한” 이스라엘이라는 의미로 나누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공동체의 구원이 다른 공동체를 거스려 저주를 통해 성취된다는 어떤 신학적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진리라고 주장해 온 그 담론의 신뢰성을 궁극적으로 파괴해 버리는 폭력으로 이끌려 간다. 더 나아가 그 때나 지금이나 제국의 깃발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기독교의 세계화는 이제 비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홀로코스트 시대에, 기독교는, 적어도 서구에서, 그것의 제국주의적 지주를 잃었다. 여전히 기독교는 소중한 생명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그렇게 기독교의 콘스탄틴적인 야합의 마지막 장을 장식했다.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남아있는 문제는 제국주의로 감쌌던 것들을 털어내거나 혹은 스스로 버린 후 기독교의 “진리” 와 “증언”에서 남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가 후기 홀로코스트 시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독교는 아직도 무엇이 남아 있는가의 문제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가 제국주의 없이 살아남아야만 하거나 혹은 살아 남을 수 있는지 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다.
As to Jews and Judaism, again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had it right; Christians need to embrace Jews as their long lost brothers, articulate the Jewishness of Christianity, including the Jewishness of Jesus and how that Jewishness binds Jews and Christians in the search for God and for justice. Though that bondedness has been expressed often in the post-Holocaust ear, it has often been expressed in way that romanticizes Jews and Judaism, as if the tradition Christianity once demeaned can now be embraced uncritically. Romanticization of Jews and Judaism is simply the flip side of demonization. In neither understanding are Jews free to be themselves, they are still defined by Christians, and it also releases Christianity for a second as demanding look at themselves and their history. Romanticizing Jews is a false embrace and primarily for Christians to deal with the anti-Semitic history and then brush it away by celebrating everything Jewish. Here the harsh reality of anti-Semitism, even the Holocaust, can be sentimentalized; it can become a bridge out of the almost impossible situation that Christianity finds itself in. In the end, a romanticized embrace of Jews obscures as much as it highlights the Christian journey. In the deepest of ironies, the Holocaust becomes a place of rescue for Christians as it has become a place of unaccountability for Jews.
유대인과 유대주의에 관하여 말하자면 유대-기독교간의 대화는 옳았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형제자매들, 유대인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고, 예수의 유대인다움을 포함하여 그리고 그 유대성이 하나님과 정의를 찾아 나가는 길에서 어떻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엮어주는지를 밝히면서 기독교의 유대적인 연원(유대성)을 밝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연대적 연원이 후기홀로코스트 시대에 종종 표현되었음에도 불구라고, 마치 기독교 전통이 한 때 매우 불온했었지만 이제는 기독교를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 들여야 한다는 식으로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를 낭만화하는 방식으로 종종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유대교를 낭만화하는 것은 그저 악마화의 또 다른 측면이다. 여기 양자간의 이해에서 그 어느 쪽에서도 유대인들은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여전이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으며, 그리하여 기독교로 하여금 그들과 그들의 역사를 또 다시 힘겹게 바라 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을 낭만화하는 것은 거짓된 포용이며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반 유대주의의 역사를 거래하게 만들어 유대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나 칭송하면서 (쉽게 과거의 기억을)지워버리는 것이다. 여기에 반 유대주의의 난해한 현실이 있다. 홀로코스트 사건 그 자체도 감상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고; 기독교가 그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거의 불가한 상황에서 탈출하게 하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을 낭만화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여정에만 주안점을 두는 것으로 본질을 희석시키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의 깊은 내면에서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자리가 되어 버리듯이 기독교인들에게도 (책임을 면하게 해주는) 구원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The place of renewed contact with the hard question of Christian complicity, with regard to Jews but also the masses dislocated and conquered by a colonial and imperial Christianity, is the true bridge to the possibility of a Christianity of justice, truth-telling and reconciliation. That will be found only in the breaking of the Jewish-Christian dialogue become deal and with a new found solidarity with Jews of Conscience who analyzing and breaking with the Jewish counterpart to Constantinan Christianity – Constantinian Judaism.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식민주의적 그리고 제국주의적 기독교에 의하여 뿌리가 뽑히고 정복당한 무리들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공모라는 무거운 질문과 더불어 새로워진 (두 종교간의) 만남의 자리는 정의롭고, 진리를 증언하며, 화해를 이루어 내는 기독교의 가능성으로 이어주는 진실한 가교인 셈이다. 이 연결점은 오로지 일종의 거래가 되어버린 유대-기독교간의 대화를 그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콘스탄틴 기독교 – 콘스탄틴 유대교와 연대하는 유대적 동반자를 찾아내고, 그들과 결렬할 수 밖에 없는 양심적 유대인들과 나누는 새로운 연대성에서 찾을 수 있다.
As it turns out the Christian history that led to the Holocaust can take many twists and turns, isn’t confined to any one religious or political tradition and has donned various forms and flags throughout history. 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 conducted by Jewish forces in 1948, as well as the continual taking of Palestinian land since that time, shows that when Jews have power linked to empire, they can and do replicate the oppressive policies that Christians have perpetrated against Jews historically. At the same time, simply confessing Christian sins against Jews does not release Christians from other parts of their oppressive history then and now. Jews of Conscience, by exposing the post-Holocaust history of Jews, also warn Christians that they are still being watched carefully, by Jews and also millions of others, to see if in fact Christianity has embarked on a new path or it remains as it was, albeit with a confessional tone.
기독교 역사가 우수한 왜곡과 전도(轉倒)를 취한 홀로코스트를 불러왔다는 명제는 어느 한 종교나 정치적인 전통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다양한 형식들이나 깃발들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1948년 유대 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진 팔레스타인 인종 청소 사건이나 그 이후 지속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문제는 결국 유대인들도 제국과 연계된 권력을 가지게 되면 그들도 기독교인들이 역사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저질렀던 억압적인 정책을 반복할 수 있거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유대인에게 범한 기독교인들의 죄를 그저 고백한다 하여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의 억압적 역사의 다른 면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죄 없다고 할 수 있는 바는 아니다. 양심적 유대인들은 유대인들의 후기 홀로코스트 역사를 드러냈고,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들이 아직도 유대인들과 수백만의 타자들에 의하여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고, 비록 고백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 지라도 기독교가 진짜 새로운 길을 찾아 자리를 잡고 본래의 모습으로 남게 될 것인가를 살피고 있다.
When Jews and Christians leave the dialogue become deal and enter into a critical solidarity with one another the rest of the world must be included as well. This includes Christians who were historically missionized by a dominant European Christianity, Muslims, Hindus and others and native peoples everywhere who have endure the onslaught of arrogant and militarized monotheisms. Islam is included here on both sides of the equation, spreading and conquering with empire and those Muslims of conscience who are willing to struggle with others for another way of being in the world.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거래가 되어버린 그런 대화를 포기할 때, 비로소 그들은 세계민과 더불어 서로 간의 비판적 연대에 참여할 수 있다. 이 대화에는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유럽 기독교에 의하여 선교화된 이들, 무슬렘, 힌두, 그리고 신앙이 다른 이들, 오만하고 군사화된 유일신론에 의하여 공격을 견디어온 도처의 토착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국과 더불어 확장하고 정복하고 있는 무슬렘과, 이 세계에서 그들과는 다른 식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기꺼이 타인들과 더불어 투쟁하는 양심적 무슬렘이라는 두 가지 입장들을 포함하고 있다
In the end, all of our traditions are in tatters, with only fragments of truth left; our own narratives, including the struggles within them, are only part of a larger story, a piece of a truth beyond each telling and found, at least partially, in all tellings. Thus a Jewish-Christianity solidarity is part of a larger story, an important one to be sure, that can only find its way in exile from the “truths” and power of our communities, with each other, as we live toward a world beyond our own.
마침내 우리들의 모든 전통들이란 그저 진리의 파편들인 누더기들로 기운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이야기들은 세상의 사람들 속에서의 투쟁을 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들이란 각자가 말하고 있는 진리의 한 부분으로서,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최소한 부분적으로, 더 커다란 이야기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대-기독교간의 연대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주장들 너머의 세계에서 살아갈 때 우리 공동체들의 “진리들”과 “권력”에 소외되어 유배를 살아가면서 찾을 수 있는 더 큰 이야기의 소중한 한 부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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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une 14, 2008
Liberation Theology and the New Horizon of Christian Ethics
해방신학 이야기 6: 현대 해방신학의 지평과 신앙적 과제
기독교 후기 시대의 신학적 질문
현대 신학적 논의의 맥락을 따라가 보면 두 가지 입장이 매우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한 편의 신학자들은 오늘의 시대를 기독교 후기 시대라는 시대적 인식을 받아들이면서 입장을 표명하지만 다른 편의 신학자들은 기독교 후기 시대라는 언어조차 받아들이기를 꺼려하며 과거에 형성된 신학의 보편적 유효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고수 한다. 전통적인 가치와 주장에 연연하는 이들을 소위 보수적인 신학자라고 부른다면, 전통적인 가치와 신학적 주장이 상대화되거나 주변화 된 세계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신학적 지평을 찾는 이들을 일종의 진보적인 신학자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해방신학자들은 당연히 진보 진영의 신학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신학자들 중에는 여전히 유럽중심주의적인 신학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에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모두 해방신학자들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적어도 15세기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신학자들은 아시아 대륙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조차도 몰랐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전 세계(그 당시에는 유럽와 그 주변을 생각했겠지만) 어디에서나 타당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신학적 사유를 전개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이 명료한 진리처럼 주장해 왔던 이론들 중에는 오늘의 비판적 지식인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이 기독교의 진리가 절대적이라는 교리적 주장에 곁들여지면서 마치 절대적인 진리인양 가르쳐지고 기독교회 안에서 보편타당한 진리로 간주되어 왔었다는 사실들은 이제 날카로운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으로 가르쳐진 내용 중에는 인간을 차별하는 논리들이 주종을 이루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고, 그 결과 무수한 포악을 초래케 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뢰를 격하시키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런 오류들 중에는 인종차별, 여성차별, 타종교인 차별 등이 있다.
특히 정치신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뼈대는 거의 16세기 종교 개혁 이전 가톨릭 신학의 체계 안에서 이루어 졌고, 개신교조차 가톨릭 교회가 발전시켜온 주요 교리들을 모방 답습함으로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정치신학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 결과 4세기 초 콘스탄틴 시대 이후 로마 제국주의와 기독교 사상은 매우 독특한 타협의 과정을 거쳐 기독교는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승인했고,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승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유대 기독교 예언자적 전통을 예수의 메시아사상으로 대치함으로써 더 이상 예언적 메시아를 기다릴 필요가 없는, 즉 완성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현실을 변혁하고 개혁하라는 준엄한 사회 윤리적 요구를 담고 있었던 예언자 정신을 정시시킴으로써 사회정의에 대한 강한 유대 기독교적 충동을 급격히 약화 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인류 역사를 인간의 뿌리 깊은 원죄에서 비롯된 죄스러운 역사로 규정하고 오직 메시아이신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혹은 은총에 대한 교리적 해명을 통하여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르침으로써 죄와 구속의 역사가 병행하는 새로운 역사를 초월한 탈 역사적 구원을 기독교회 안에 유입시켰다. 즉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에 대한 궁극적인 구원은 역사 밖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밖에 없다는 그의 죄론과 은총설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 이후 유대-기독교적 예언자들의 사회 변혁과 개혁 의지는 기독교 전통 안에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가부장적 삼권(가정, 종교, 정치)에 의한 사회질서 유지적 가치에 혼란을 초래하는 항목들이 죄악으로 규정되었고, 그 내용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도덕적 항목들에 그치고 말았다.
비록 죄의 역사라는 비관적 이해가 깔려 있었지만 어거스틴은 그의 스승격인 암브로우스에게서 배운 바 대로 로마 제국의 질서를 인정하고, 로마 제국을 옹호하는 정당전쟁이론(Just war theory)를 발전시켰다. 결과적으로 로마 제국의 무수한 전쟁을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옹호해 준 이 논리 안에는 정의로운 싸움의 주체는 언제나 통치자이지 결코 신민이거나 민중일 수 없다는 전제가 깊이 깔려 있었다. 따라서 예언자 혼에서 울려 나오던 변혁과 회개의 메시지는 어거스틴 이후 종교와 정치간 이루어진 야합의 대가로 기독교 사상사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하여 기존의 질서를 위배하는 요구는 반사회적이며 심지어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정치가들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철저히 매도되고 척결 당했다. 거룩하지 못한 종교와 정치의 연대가 불러온 포악(atrocity)을 기독교는 사실 오래 동안 품고 있었다.
오랜 서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정치는 기독교를, 기독교는 정치를 이용하여 성장과 팽창 그리고 확장을 통하여 더 큰 권력을 얻고자 하였다. 이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본질은 오늘날에도 성장주의와 개발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18세기 이후 종교적 세계관에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급격히 세속화되었고, 종교개혁 이후 서구사회는 종교의 후견과 조언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 권력을 종교 권력으로부터 이탈 독립시켜 왔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제정일치 시대의 종말, 곧 기독교 후기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시대를 알리는 여명의 시점을 나는 종교개혁 시대라고 생각한다. 종교가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동시에 종교가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개혁자들이 주창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개신교는 종교의 자기모순을 지적하며 가톨릭적 세계관을 깨뜨리고 나온 가톨릭 후기 시대의 산물이다.
구원과 현실세계 관련성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가 주장해 온 구원은 예수의 대속설에 근거한 믿음의 유무에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절대적으로 의존시킨 것으로서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교도권과 은총 분여권에,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신앙 고백에 철저히 의존시켰다.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는 제도적 교회가 구원을 담보한다면 개신교는 개인의 신앙 고백에 구원의 문제가 직결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기독교의 구원론이 일종의 “사회현실 관련성 없는 구원“으로 이해되어 자연스럽게 ”영혼구원“으로 요약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고,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구원을 주장하기에는 어줍지 않은 처지에 처해 있었고, 가톨릭 교회나 개신교회나 오랜 역사를 지나면서 권력을 가진 이들과 매우 근친관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판적 대립보다는 권력의 공유자가 되는 것을 즐겼다. 다만 한 편은 영적인 직무를, 한편은 세속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달랐을 뿐이다. 루터는 이를 일러 하나님이 몸소 제정하신 두 기관이라고 하여 후대 사람들은 이를 소위 두왕국설(Zweireichelehre)이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다.
16세기 말 종교개혁 시대를 관통하면서 기독교적 세계관은 교파에 따라 각기 달리 해석되었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지배와 권위를 당연시하는 교리적 특성을 유지했다. 루터의 두왕국설이나 칼빈의 그리스도 주권론 (Herrschaft Christi)은 사실상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바 사회를 관통하여 나란히 존재하던 두 기관(intermingled, parallelling two insititutions)의 색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여전히 기독교는 우주적 지배 종교로서 절대성과 궁극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절대성과 궁극성은 사실 로마 제국이 가졌던 절대 권력에 버금가는 종교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로마 제국의 정복주의적 정책과 온화한 식민정책의 종교적 변형이었다. 즉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의하여 정복되어야 하고, 개종을 받아들인 이들과 형제우애를 나눌 수 있지만 이교도들에게는 영적 구원을 거절한 존재로서 짐승보다 못한 존재라고 보는 타자화의 논리다. 이런 기본적인 윤곽은 바로 콘스탄틴 기독교가 가진 정복주의적 호전성이며, 이 논리는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인들에게도 깊이 배어 있다.
여기서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되는 한 윤리적 숙고와 타당성을 검증할 기준이 증발해버린다는 데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의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구원”에 있다. 그 구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지극히 사적이고 영적인 것에 머문다면 삶의 다른 차원에서의 구원은 제외되기 십상이다. 즉 사회, 정치, 경제적 현실을 소외시키는 구원은 결국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원에 대한 질문을 침묵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런 질문을 불신앙으로 매도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구원은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원과 유리되거나 상관성이 결여된 영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런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의 구원은 결국 사회 정치 경제적 차별과 상관없이 구원을 선포하는 구원이 되어 사소한 개인적이며 영적인 악을 인식하는 데 그치고,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조악의 현실에 무지한 구원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인의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사회 정치 경제적 정의가 자연히 수반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그런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는 지난 역사가 보여주고 있고, 또한 해방신학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현실 관련성을 상실한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보편적인 진리일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밖에 없었고, 전통적인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구조악의 조장, 침묵에 대한 비판
해방신학은 개인적 영성과 죄악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서 사회 제도가 지닌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영성과 죄악에 대한 인식능력을 넘어서서 사회악에 대한 인식능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같은 기독교인 사이에서 한편은 식민지배자로서 머물고 한 편은 식민지 피지배자로 머무는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배와 억압의 현실을 간과했기 때문이고, 이런 도식은 기독교인인 남성이 기독교인인 여성을 억압해온 역사에 침묵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자초된 것이다. 더욱 극심한 사례는 기독교인 백인이 기독교인 흑인과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노예로 삼아 부리는 것조차 당연시 하는 경향을 초래했다. 영성적 기독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정의가 결여된 영성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의한 관계를 조장, 유지해 주는 억압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 점은 남아프리카의 해방신학이 왜 인종차별을 악으로 새롭게 정의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백인들의 신학과 영성이 왜 흑인들에게 보편타당한 진리일 수 없는지를 밝히는 이유가 된다.
지난 기독교 역사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기독교 사상이 백인이 흑인을 노예로 삼고, 남성이 여성을 하위 종속된 존재로 여기고, 지배세력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베풀고, 피지배계층에게는 복종을 가르쳐 온 사실을 숨길 수 없다. 따라서 주류 기독교 신학에서는 그 해석 주체들이 한결같이 지배자 편에 서서 지배세력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함으로써 피지배 계층을 소외시켜왔던 흔적이 적나라하다. 이는 결국 기독교적 영성 안에 사회비판적인 구조악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마르크스의 경제적 비판이론은 개인의 영성에 고무되어 사회악을 인식하지 못하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론으로 기능했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로부터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무신론적인 이론으로 낙인이 찍히기고 말았지만, 사실 그의 경제적인 구조악에 대한 비판은 기독교 경제윤리 형성에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억압과 지배 구조와 계기에 대하여 침묵해 온 기독교 신학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끈질기게 요구하면서 해방신학은 억압 현실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정치, 경제, 사회적 억압과 지배는 교묘하게 종교와 결탁되어, 종교는 지배구조를 하나님의 질서로 옹호해주는 한편 정치 경제 사회적 지배세력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안에 종교 지배자들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 대신 힘없는 남미의 민중들은 편만한 가난과 억압과 고통을 견디어야 했다. 유럽에서도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의 사회 구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근 20만명의 귀족화된 성직자들이 부패한 사회 안에서 기득권을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민중의 가난과 고난을 이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들이 타도하고자 했던 세력들은 왕족이나 귀족들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옹호해 주고 있었던 성직자 계급들도 타도의 대상이었다. 민중을 잊고 민중을 착취해 온 종교 세력은 결국 민중들에 의하여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긴 셈이다.
노골적인 식민지배 세력이 종식된 1945년 이후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했다. 현존질서 유지적인 기능을 해 오면서 대외적으로는 북아프리카, 아시아, 남미를 식민지화하고, 대내적으로는 기존질서를 옹호 유지해 주던 기독교의 지배세력 편집증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과 아메리카의 기독교는 스스로 비판 반성하고 그 속성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오랜 기간, 그리고 너무나 거대한 권력과의 유착관계를 극복할 내성이 없었다. 그리하여 보수적인 기독교는 사사화의 길을 걷게 되어 더욱 개인주의화 되었고, 진보적인 기독교는 정치 사회 경제 권력과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정의와 평화의 과제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기간 서구의 기독교는 신자들의 대다수를 잃었다. 비록 소수의 영성운동과 부흥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지만 오늘날 유럽의 기독교는 찬란한 과거의 유산을 남기고 황혼을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치명적이고도 고통스러운 기독교의 기억은 히틀러 나치 정권의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600만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사건의 정신적 배후세력이었다는 사실이다. 종교와 정치의 결탁은 결국 가장 참혹한 비극을 초래하고서야 비로소 종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독교 안에는 아직도 여전히 역사적 반성의식 없는 세력들에 의하여 종교와 정치의 결탁이 이루어지고, 지배세력과 야합함으로써 종교의 예언자적 전통을 스스로 잠재우는 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다. 역사의 다양성은 역사적 오류의 본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의 기억상실로 인하여 끝없는 악의 반복을 초래하기도 한다. 유태해방신학은 이런 점에서 유태인의 신학만이 아니라 종교와 정치의 경건치 못한 결탁이 얼마나 큰 포악을 불러오는 것인지를 고발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유태인들을 향한 기독교의 가학성은 기독교 선교의 이중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하나의 예증이다. 기독교적 구원이 아니라면 어떠한 것도 인간을 향한 구원의 길일 수 없다는 논리는 결국 기독교가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적 정복과 식민지적 지배를 정당화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무가치한 타종교인들은 개종의 대상일 뿐 기독교인과 동일한 생명의 권리를 누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따라서 개종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을 향해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너무나 쉽게 저주를 선언하며 비인간화 했고, 동류 기독교인들을 향해서는 이교도들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유태인들을 향한 차별이 종교적인 것이었다면, 아시아 대륙과 아프리카에서는 종교적인 이유에 인종차별주의가 덧 붙여졌다. 오직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서구 기독교의 신념을 아시아인들에게 이식하는 것이 선교였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들은 저주아래 놓인 보잘 것 없는 존재들로서 하나님도 버린 존재들이므로 기독교적인 사랑과 연민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피부색갈이라는 가시적 차별의 이유에 더하여 비기독교적인 문명과 문화에 대한 차별은 서구 우월주의를 조장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비서구세계로 진입한 기독교 제국주의와 식민세력은 착취와 억압을 당연시했고, 토착민들의 문화와 종교와 삶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부인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화란 기독교화이고, 기독교화는 곧 서구화였지만, 기독교인이 된다하며 피부색갈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고, 서구식민지배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식민지배자들의 비정치, 비사회, 비경제적인 종교적 가르침은 식민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차별을 복음과 함께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흑인 해방신학은 이 점을 강하게 거부하며 비판해 왔다. 샤론 웰치(Sharon Welch)는 이런 사실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종교재판, 마녀화형, 십자군 전쟁의 포악성,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정당화,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반 유태주의의 조장, 전쟁의 악마적 공포와 나치 홀로코스트에 직면하면서도 교회가 침묵했던 일들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조차 기독교가 주장해 온 진리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게 했다.“
아시아인들은 서구의 역사보다 오랜 문명세계를 형성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적 우월성을 지닌 서구 종교인 기독교에 의하여 아시아의 종교성과 그 종교가 지닌 도덕성을 부정당해 온 측면이 크다. 이런 성향은 종교적인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문화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아시아의 사유와 삶의 방식들이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풍토를 불러왔고, 이 문화적 차별주의는 서구 기독교 중심의 구원 개념에 의하여 더욱 깊이 자극되고 조장되었다. 구원이 없는 땅에서 유익한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논리는 기독교 복음안에 포장되어 서구의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서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와 남미에도 적용되었다. 개종 아니면 배타와 심판과 저주의 태도가 기독교적 구원이라는 이해를 둘러싸고 당연시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결국 전지구적 상황에서 기독교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기준이 되었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저주 아래 놓인 이교도들을 향하여 선교적 열정을 불태우게 하였으며, 서구의 우월한 정치 경제적 세력을 동반한 식민지화를 통하여 포악을 행하게 하였다. 기독교도들에 의한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북아프리카의 흑인들에 대한 차별정책, 600만 유태인들 학살사건, 무수한 십자군 전쟁과 마녀 사냥 사건들은 기독교의 구원론에 의하여 변형된 인간억압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이런 폭력성으로부터의 해방을 얻으려면 기독교는 앞으로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개신교는 그 교파적 다양성으로 인하여 그리고 신학적 인식의 깊고 옅음에 의하여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객관적 성찰을 받아들이는 교단도 있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교단도 있다. 아마 대다수의 교단적 신학과 개인적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유일무이한 구원을 부정하거나 상대화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서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신앙인과 신앙 공동체의 존재의미를 기독교 신앙의 확장과 팽창을 불러오는 영혼구원에 수렴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 길에서 우리는 기독교 외의 문화와 종교를 향한 화해와 평화의 길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예수의 평화로운 가르침을 받았던 기독교는 평화로운 삶보다 영혼구원의 종교라는 차원에서 그 정체성을 찾아 왔기 때문이다. 윤리론을 부정하며 구원론만을 쫒아 온 결과다.
전인적 책임과 구원을 선포 하려면
지난 2008년 6월 5일 나는 미국 하바드 대학 졸업식장에 앉아 있었다. 하바드 357년 역사에서 최초의 여성 총장으로 선임된 파우스트 박사는 대학교육의 본질을 일러 “자유와 책무"(freedom and accountability)라고 요약하였다. 대학을 세운 하바드 목사의 교육철학에서 시작된 그 대학의 엠블렘에는 오직 하나의 단어 ”진리“(veritas)가 새겨져 있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존의 질서로부터의 자유를 얻어 새로운 창조의 지평을 열수 있지만, 동시에 그 자유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책임의 지평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이 논리를 오늘의 기독교 신앙에 적용해 본다.
기독교가 참된 진리의 종교라면 영혼구원에서 그 진리성을 입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세계에 대한 책임 앞에서도 구원의 길을 제시해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까지의 기독교 신앙은 부유한 기독교 세계로 구성된 북반구와 그 부유한 기독교 세계의 식민지배지가 되었던 남반구인들의 가난과 고통 앞에서 보편적인 진리의 의미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은 착취와 억압자로서의 기독교인으로 존재하고, 한편은 착취와 억압을 받아온 기독교인으로 공존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구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현실 세계는 억압자와 억압받는 자, 착취자와 착취를 당해온 자로 나누이어져 있다. 기독교는 이런 불평등에 대하여 책임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18세기 중엽의 기술과학 문명이 촉진된 이후 서구 기독교 세계는 생산능력을 고도로 증가시킴으로써 물질문명의 대변혁을 주도해 왔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문명을 탄생시켰으며, 무한한 경쟁관계를 불러들임으로써 인간의 욕망과 충족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해 왔다. 영혼구원의 종교라는 내면적인 차원과는 달리 구원받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과 축복으로서 풍요로운 문명은 서구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특권과도 같이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런 욕망충족의 문명은 이제 서서히 그 막을 내리고 있다. 수천만 년 동안 지구가 저장해 두었던 화석연료들을 거의 고갈시키는 동시에 전 지구적 환경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전지구인들이 영혼구원을 받아 서구인들과 같은 류의 축복을 받아 그와 같은 삶의 질을 누리게 된다면 이 지구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는 연구 보고서가 이미 36년 전에 나왔다. 배타적인 풍요와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해 온 서구 기독교 문명 구조 안에서 우리는 예수의 청빈의 윤리가 거부당해 온 역사를 읽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몰락을 맞고 있는 서구적 구원 모델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구원의 길인가?
그 결과 서구 기독교 그리고 그 기독교를 모방 답습하는 기독교 안에서 우리는 인간의 욕망충족을 예찬하는 문명을 멈추게 할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기독교는 무한한 개발주의를 부추겼고, 소유를 축복으로 이해하는 성공신화를 조장해 왔으며, 최근에는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중들은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근근이 연명하고 있는 데 비하여 서구 사회의 사람들은 하루 100달러 이상의 돈으로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구가하고 있다. 오늘의 기독교는 이런 현실을 직면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가난한 대중의 영혼구원에만 관심을 보이며 전통적인 선교적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종교 지도자들은 현실 세계에 대한 사회과학적 이해능력을 상실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난과 억압을 불신앙의 결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지구의 생산능력의 한계 안에서 자신들이 더 많이 가짐으로써 그들이 더 가난하여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뿐아니라 그들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하여 가난한 나라를 자신들의 시장으로 삼고 있다. 지구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독교의 축복과 풍요의 메시지는 더 이상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여기서 구원의 기독교는 어떤 대안적 윤리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한 세기동안 화석연료를 불태워 이룩한 서구 사회의 풍요는 전 세계적인 생태계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오존층이 파괴되어 생명력이 약한 생물들이 궤멸하고 있으며, 지구온난화를 불러와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기후 변동은 급기야 라니뇨 및 엘리뇨 현상을 불러와 세계 기상도에 이변을 불러오고 있다. 생존환경을 문명사회구조화한 나라들에 비하여 자연친화적인 생태적 습성을 가진 가난한 나라의 민중들이 기후 변동으로 인하여 치명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파괴해 온 서구 문명의 정신적 후원자였던 기독교는 오늘의 이 정황에 대하여 과연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축복와 풍요를 여전히 약속하는 논리를 지속시켜야만 하는 것일까?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을 선포하는 복음의 자유를 누리려면 오늘의 세계에 대한 책임과 구원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의 영혼구원의 약속이 기독교내에서만 유효하다면 하나님은 수천년 동안 아시아 땅에 살아온 우리의 선조들을 저주하신 것일까? 그리고 동시에 서구 사회의 기독교 문명권 안에 놓인 이들에게만 사랑의 하나님 이셨던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독교 밖에 있는 아시아 대륙의 97% 민중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서 배제되어 저주아래 놓인 것일까? 이 저주의 논리는 어쩌면 유태인 600만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보다도 더 무섭고 잔인한 종교적 결론을 초래한다. 루벤슈타인의 주장대로 “죄없는 100만의 어린 아기들을 죽이도록 허용한 하나님을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홀로코스트 신학은 아시아에서도 적절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아시아인을 저주하는 신학으로부터 우리가 해방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
수천 년 동안 아시아인의 영혼을 외면하고 저주아래 버려온 하나님을 과연 아시아인들은 그들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 믿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부재증명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아시아 해방신학은 아시아 안에서 인간의 평화와 구원을 위하여 일해 오신 하나님의 다른 얼굴을 증거 하려 한다. 유일회적인 기독론을 넘어서서 사건으로서의 기독론, 패러다임으로서의 기독론을 낮고 천한 이들과 동행하는 그리스도론에서 정통교리가 아니라 정행의 길을 찾는 것이다. 이 길은 서구의 배타적 신학적 주장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아시아인의 종교 문화적 가치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종교해방신학적 과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현대 해방신학은 서구 전통 신학들이 간과하고, 제외시키고, 저주하고 차별했던 이들 편에 서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려는 신학의 특성을 지닌다. 가부장적인 하나님에서 해방되어 평등주의적인 하나님으로, 인종차별주의적인 하나님 신앙에서 보편적인 인권론적인 하나님 신앙으로, 착취와 억압을 간과하며 영혼구원만을 역설하는 하나님에서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전인구원의 해방의 지평을 가리키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들이 오늘의 해방신학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이 해방신학 이야기는 강단으로 이어지고, 기독교인들의 평화와 인권운동으로 이어지며, 환경운동과 민주화와 인간화를 통하여 확장되는 것이다. 온갖 차별과 억압과 착취문화에 의하여 포로 되었던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고귀한 인간으로 회복시키는 정치, 경제, 사회적 운동이 영혼구원의 가르침에 잇대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도덕적 모순과 해이
지난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내적 모순은 성서적 예수의 상실에 있다. 소종파적 신학자인 요더(John Howard Yoder)도, 기독교 현실주의적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도 예수의 정신을 유대 기독교의 예언자 전통에서 찾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폭력과 탐욕과 쾌락원리들을 하나님 신앙에 정면 대치되는 것이라고 간파했고 그것을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결코 십자가에 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영혼구원을 현실세계와 유리시키고, 권력과 타협하며, 대대로 욕망 충족의 원리를 유통시키며, 인간의 쾌락지향적 욕구를 적당히 충족시켜 주었다면 예수는 오늘날의 부유한 대형 교회 목회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로서 절대 정치적 억압이나, 가난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마찰을 겪었고 마침내 그들의 모함과 음모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이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예수의 죽음을 메시아적인 구속의 사건이라고 보았던 정통 기독교 신학은 완성된 구원론을 강조하여 예언자적 음성을 기독교 역사속에서 침묵시킴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역사 너머로 밀어 버렸다. 나는 1970년대 해방신학의 발흥은 4세기 경 기독교(종교)가 로마 제국(정치권력)과 손을 잡으면서 더 이상 저항적 종교가 아니라 현실 타협적 종교가 되기로 자처함으로써 현실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의 소리를 막아왔던 침묵의 역사를 깨고 다시 예언자의 소리를 이어가는 사건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본다면 기존의 정통신학이 가졌던 탈예언자적 구원론은 해방신학 안에서 비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예언의 소리를 침묵시킨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가 아니라 호전적 종교가 되었고, 로마 제국의 등에 업혀 세력 확장을 위한 교리를 개발해 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철저하게 삭제당한 것이 예수의 평화윤리사상이다.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었던 예수가 삭제되는 동시에 우주적 지배자로 높여진 예수가 등장했고, 평화의 임금으로 예루살렘에 들어 왔던 예수는 정당전쟁론을 앞세우고 주변 국가들을 괴롭히는 전쟁의 후원자로 합리화 되었다. 더불어 욕망과 쾌락의 문화를 지배하고 축복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세라와 바알을 방불케 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문화의 비판하고 심판하며 변혁하는 분이 아니라 죄 많은 인간들의 속죄주로 가르쳐져 온 것이다. 예언자 정신의 상실과 더불어 속죄주 예수에 대한 교설의 확립은 결국 보편적인 인간의 죄스러운 삶에 대한 용서와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심리적인 위안의 은신처가 된 셈이다. 문제는 이들이 범한 죄의 결과로 무수한 이들의 고난과 고통이 당연시되거나 간과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명백하게 기독교 안에 자리 잡은 도덕적 해이와 모순을 드러내는 증거로 남아 있다.
기독교 문화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 인종 가치를 타자화해 온 기독교의 도덕적 오류는 특히 여성억압, 노예제도, 거룩한 전쟁, 십자군 전쟁과 인종차별, 그리고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힘의 근원이 된 폭력을 지지해온 역사적 오류와 연계되어 있다. 기독교 죄론의 그늘 아래 핀 독버섯과 같은 사회윤리적인 치명적 결함이다. 이런 결함은 결국 기독교가 절대적인 종교로서의 지위를 스스로 격하시켜 그 도덕적 신뢰성을 상실하게 된 요인이 되었고, 기독교 진리에 대한 배타적 주장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오게 되었다. 완성된 구원론이라는 장벽 안에서 기독교 지도력은 권력과의 타협, 세속적인 탐욕문화에 대한 긍정, 그리고 폭력을 긍정하는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로마 제국과의 친밀성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로마 제국 멸망이후 서구 기독교 열강의 식민지배 세력을 후원했다. 지배와 정복문화는 기독교의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타자화와 더불어 차별과 배제와 착취와 정복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들이 가진 시각은 전통적인 기독교 내부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다. 서구, 백인, 남성, 지배자들과 손을 잡고 있었던 아퀴나스, 루터, 칼빈의 전통은 이런 점에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말씀은 서구, 백인, 남성, 지배세력에게 위탁된 것이 아니라, 아시아 문명, 유색인종, 여성, 피지배자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해방신학의 방법론적 관점이다. 류터(Rosemary Radford Reuther)는 이렇게 자신의 신학적 관점을 제시한다.
“영감과 종교적인 권위에 대한 나의 이해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한 지역에서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일단의 남성들에게만 옛날에 말씀하시고, 그 이후 그 남성들의 경험에서 나온 경전에 우리가 항상 의존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백인 남성들이 지배세력과 더불어 전개해 왔던 바 배타적이고, 차별적이며, 그리고 절대적인 자기주장으로 점철된 신학적 형이상학은 절대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기독교 전통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안에 있는 제국주의적 폭력성, 식민적 지배성’을 인식한 이상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여러 각도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지배자적 관점이 아니라 피지배의 경험에서 우러난 피맺힌 절규들에 의하여 촉진 되었다. 따라서 어떻게 폭력적 종교에서 거듭나 생명과 평화의 종교로 거듭날 것인가가 다양한 해방신학이 안고 있는 고민이며 주된 담론이다.
이 담론은 모든 역사적 지식들이 개방되어 더 이상 밀실 담합이나 비밀을 유지할 수 없는 오늘의 개방사회 안에서 폭력적 기독교를 해체하고 어떻게 평화적인 기독교로 재구성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따라서 해방신한은 한결같이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며, 구성적이다.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기독교 내부에 담고 있는 비윤리적이며 부도덕한 가치체계들을 직면하면서 기독교적 사유와 신앙과 신학 안에 내장된 억압과 지배와 차별의 논리를 스스로 해체하는 길 밖에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정통신학의 논제들을 해체하고 비판 한다. 그리고 배제와 차별의 근본구조를 불러오는 타자화가 아니라 동정과 연대와 나눔의 신학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해방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종교개혁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싶다. 이 해방의 사역을 받아들이는 이들과 거부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지만, 역사의 흐름은 거부하는 이들의 도덕적 오류를 거듭 거듭 드러낼 것이라고 본다.
홀로코스트와 현대신학의 특성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대량 학살 사건인 홀로코스트는 전통적인 기독교 문명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그 폭력적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기독교적 동류가 아닌 존재를 향한 타자화와 차별의 논리는 상대(유태인, 타종교인, 장애인, 동성애자, 집시)를 악마화하고, 상대의 인간성을 부정하며, 심지어는 말살시키는 인종 청소 프로그램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홀로코스트 이후 이런 폭력적 종교가 주지했던 영혼구원의 교리는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거대한 악의 현실을 불러온 기독교 내부의 악은 그동안 기독교 밖에서만 악을 규정해 오던 신학적 논리를 뒤집어 업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다른 이를 저주함으로써 얻어지는 구원이 참된 구원이며 평화일 수 있겠는가? 이를 아시아적 맥락에서 바꾸어 말한다면 오직 3%에 지나지 않는 기독교인들의 구원을 주장할 때 우리는 97%의 아시아인들을 저주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 97% 안에는 순진한 어린 아이들이 무려 10억이 넘는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과연 온 세계를 창조하고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이실 수 있겠는가? 이런 질문은 홀로코스트 신학자들로부터 신죽음의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과격한 이들은 전통신학이 주장하던 하나님의 죽음을 선언하거나 온건한 이들은 하나님 없는 세속화된 세계 속에서 새롭게 신학하기를 주창하기에 이른다.
주로 서구 세계에서 일어난 신 죽음의 신학은 결국 서구 기독교 신학자들이 주장해왔던 그 신학의 붕괴와 더불어 사라진 하나님에 대한 죽음의 선언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하여 현대 신학의 주된 과제는 서구신학과 함께 붕괴되어 죽은 신을 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진술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의 한계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이 상대적이라면 그 신학이 산출해 낸 신앙도 상대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 안에 제약된 인간의 인식구조를 뛰어 넘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고백되어 오던 내용도 결국 현대 세계의 인권사상의 빛에서 본다면 여전히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며, 주변을 타자화함으로써 폭력과 지배구조에 연연하는 면모를 감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자들은 올바른 신학적 태제, 조직신학적 정론(orthodox) 논쟁에서 벗어나 올바른 행위, 기독교 윤리학적인 정행(orthopraxis)에 더욱 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중심축은 조직신학적 논의가 아니라, 조직신학적 논의의 허구와 오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기독교 윤리학적 논의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서구 기독교의 역사에서 정행의 문제가 신앙과 삶에서 사라진 것은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면서 은총의 교설을 통한 교리적 구원을 통하여 의로워진다는 루터적인 “행위없이 의로워지는 낮선 의”에 대한 가르침에 크게 기인한. 그리하여 기독교 주류는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개인적 헌신과 경건을 강조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여 가능성을 부정해 왔다. 곧 도덕 폐기론적인 교리적 특성이 인간의 어둡고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도덕적 무능을 끝없이 고발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고발은 인간의 도덕적 무능을 영혼 구원에 연결시키는 데에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적 전통에서의 고발과 그 근본 성격이 다르다.
예언자적 전통에서는 도덕적 무능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실패와 불성실을 고발함으로써 도덕적 성실성으로 나갈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불성실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어 있다. 복음주의 인간론이 담고 있는 죄론과 예언자 전통의 죄론은 전자가 인간 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데 비하여, 후자는 인간 선의 가능성을 오히려 주장한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예언자들에 의한 부정의에 대한 고발은 바로 이런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를 라인홀드 니버의 표현을 빌려 다시 말한다면 죄성의 보편적 균등성(equality in sin)에 대한 통찰에 그치고 마는 것이 복음주의적 죄론이라면 개체 죄성의 불균등성(inequality of sinfulness)을 지적하는 것이 예언자적 전통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복음주의가 지니고 있는 불의한 현실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을 비판하고, 예언자적 전통을 회복시킴으로써 보다 나은 역사적 선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이런 윤리 신학적 주제는 18세기 이후 사회 정치사상의 발전과 더불어 인권사상의 발전 과 그 확대과정에서 기독교 윤리학적 실천과제를 규명하고 찾을 수 있는 논거를 찾으려는 노력과 일치한다. 이런 주제들은 전통적인 신학에 종속되었던 기독교의 행위론으로서 기독교 윤리학이 하나의 학문 분야로 독립되어 자리를 잡게 했고, 1960년대를 지나면서 인권과 생명권을 옹호하는 사회책임의 신학, 즉 기독교 사회 윤리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해방신학의 지평은 오늘의 세계 현실을 담아낼 수 없는 편협하고 왜소한 신학으로부터의 해방만이 아니라, 그러한 왜소한 신학에 갇힌 하나님의 해방을 요구하고, 나아가서 인문사회, 과학, 생물학과 의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권리와 생명권을 옹호하는 신학적 과제를 열어온 사상적 동인(動因)을 지니고 있다. 신학의 폭력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사상적 폭력과 기술과학 문명의 폭력성, 이데올로기적 폭력성으로부터 해방의 과제는 아직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분열된 세계의 화해와 치유의 과제
오늘날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수백 개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 우리 한국 사회만 해도 한국 기독교 협의회(NCCK)가 있는가 하면 한기총이 있다. 신학교육기관도 보수신학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신학대학과 비교적 진보적 사상을 연구할 수 있는 신학대학으로도 갈라져 있다. 그런가 하면 사회과학적 데이터를 부정하는 보수신앙을 중시하는 신앙 공동체가 있고, 사회과학적 진보를 받아들이려는 신앙공동체도 있다. 나아가 정치신학적인 변혁과 개혁을 요구하는 신학전통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 변혁과 개혁보다는 정치적 안정과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하려는 신학전통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적인 논의는 진보적인 신학자들이나 신학전통에서는 활발히 소개되고 이해되는 측면이 있지만, 보수적인 신앙 공동체나 신학자들은 해방이라는 표현 하나만으로도 경계하고 비본질적인 복음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그러나 두 진영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한 신앙체험과 고백을 중시한다.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과 그리스도 안에서 연대하신 사건이 복음이라면, 우리는 이제 차별받고, 소외되었을 뿐 아니라 배제되었던 이들과의 연대를 추구함으로써 복음적 실천을 지향해야 할 역사적 시점에 서 있다. 해방신학은 흔히 오해되듯이 붉은 사상에 물든 신학도 아니고, 교회를 파괴하는 신학도 아니다. 해방신학은 오히려 기독교가 너무나 오래 동안 잊고 있었던 사회윤리적 과제를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개혁하는 신학적 동기를 불어 넣어 준 새 술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억압과 차별과 배제와 지배가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는 해방자로서 일하시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이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참된 화해와 치유는 대립과 증오와 착취와 억압을 통하여 어느 한 편의 안락을 추구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착취와 억압, 차별과 배제의 관계가 극복될 때 비로소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던 장벽을 넘어 진정한 화해와 치유를 이루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남과 북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도 우리 안에 세워져 있는 이념적 장벽과 증오와 불신의 장벽으로 인해 지속되는 것일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장벽, 착취적 근성과 폭력성의 제거야말로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결해야 할 과제다. 그리고 고난과 가난, 억압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과 나누어야 할 연대는 기독교인들의 거룩한 의무다. 다양한 해방신학은 각기 그 관점에서 우리 안에서 무엇을 먼저 제거해야 할 것인지를 명료하게 일러주고, 무엇을 우리가 열어야 할 것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이런 해방신학의 지평은 우리가 잃었던 정의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주고, 불평등을 넘어선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되찾게 해주며, 폭력과 착취적 관계의 해소 없는 사랑과 평화란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가난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을 냉혹하게 바라보던 우리를 해체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신앙 공동체 혹은 우리 안에 내재된 억압과 차별과 착취 구조를 비판 해체함으로써 우리를 당황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 우리를 더 깊은 사랑과 화해와 치유 공동체로 이끌어 가는 예언적인 음성을 담고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의 해방 사역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이 예수의 정신에서 멀지 않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 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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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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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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