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6, 2008

A Prolegomena for an Asian Christian Peace Ethic





아시아 기독교 평화윤리의 과제와 전망(초고)


“비폭력, 살생금지, 사회질서의 개혁을 주장했던 반항아 예수와 그의 신자임을 소리 높여 내세우면서 제국주의와 전쟁, 배금사상으로 치닫는 자들을 비교해 보면 기이하다. 산상수훈과 현대 유럽 및 미국의 기독교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 - 네루 -

1. 들어가는 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과 평화사상이 주축이 되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평화윤리는 4세기 어거스틴 이후 콘스탄틴 기독교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수정되었다. 권력 없는 이들의 평화론이 권력을 가진 이들의 평화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에 직면해야 했다. 주류 기독교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수도원 주의자들의 탈세계적 평화론이 대두되기도 했고, 종말론적인 폭력적 평화론이 대두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사의 주류는 영원한 하나님의 평화와 구분하여 지상의 평화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상대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과제라고 이해한 현실주의적 타협론이 주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한결 같이 로마 제국의 그늘 아래에서 전체 인구가 기독교화 된 사회의 주류 세력이 가졌던 사회 정치적 배경 안에서 형성된 것 이어서 그 역사적 정황을 떠나면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서구 사회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평화 이론이 실질적인 전쟁행위를 독려한 측면이 있는가 하면, 동양 특히 극동 아시아에서는 영적 전쟁의 해석학이라는 좁은 통로 안에서 이 이론이 해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사회, 정치, 종교적 정황이 바뀐 자리에서도 마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서구 기독교인들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정황과 관계없이 서구 기독교가 오래 지속시켜 왔던 평화론, 즉 콘스탄틴 기독교(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로마 제국의 평화를 기독교의 평화로 이해 한)의 평화론을 되뇌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이 글에서 논자는 콘스탄틴 평화론과 대별되는 예수의 평화론, 즉 성서의 계약법전과 예언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예수의 평화사상이 어떤 과정에서 로마제국의 평화와 동일시되었는지를 밝힐 것이다. 이어 지난 서구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과연 평화주의적인 종교였는지 검토한 후 군사적 폭력의 그늘 아래 형성된 콘스탄틴 평화론을 벗지 않고서는 참된 기독교 평화론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려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기독교가 평화를 가르치려면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평화론이나 악어의 눈물과 같은 회심이 아니라, 콘스탄틴적 기독교가 쓰고 있는 이리의 탈을 벗는 패러다임적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는 귀결에 이르려 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먼저 우리가 기독교 평화론을 검증하려는 삶의 자리를 밝히기 위하여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기독교 주류 세력들이 평화론을 구성해 온 콘스탄틴 기독교의 평화론의 본질을 규명한 후, 콘스탄틴 평화론에 빠진 기독교 사회윤리학적인 변증적 논리들을 검토하고, 아시아 특히 한반도 안에서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평화의 길을 탐색하는 데까지 논의하는 것을 이 글의 목적으로 한다.

2. 시작하는 질문들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논자의 관점과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즉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밝힐 수 있고,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변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관심을 첨예화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1) 세계 인구 65%를 점하고 있는 아시아 대륙 46개 나라들 중에서 근 30%에 달하는 기독교 인구를 가진 나라는 오직 세 개 밖에 없다. 대한민국, 필리핀, 그리고 레바논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기독교 인구는 전체 기독교 세력을 다 합해도 아시아 전체인구의 3%에 지나지 않는다. 97%의 아시아 인구는 이슬람, 회교, 불교, 도교, 유대교, 등 서구 기독교가 기독교 선교 초기에 경험하지 못했던 종교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의 질문은 “아시아에서 소수자의 종교인 기독교가 다수자인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함께 나눌 평화론이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될 것이다.

2) 아시아 대륙은 1492년 유럽인 콜럼부스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 아프리카 남미와 더불어 해양 무역항로를 따라 확장과 팽창을 거듭해 온 서구 기독교 열강의 식민지배지였다. 서구 열강은 모두 신, 구교를 포함하여 기독교 국가들이었으며 18세기 이후 미국도 이러한 식민세력에 참여해 왔다. 아시아에서 소수의 나라들을 제외하고, 특히 티벳과 타일랜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구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식민 지배를 겪었다. 오늘날 공간적 지배라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식민지배는 청산되었지만 경제적 지배구조라는 새로운 신식민지배의 구조는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 있다. 식민지배의 주체는 제국이며, 식민지배인들의 신념은 효율적인 제국주의적 이익을 전제한 통치에 있다. 이들의 막강한 군대 뒤에는 언제나 영혼구원에 불타는 순진한 선교사들이 뒤 따르고 있었다.

“제국들은 - 물론 영국만이 아니라 -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인간의 정치, 사회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경험을 불러온다. 제국의 기원, 활동, 진화와 몰락을 연구하다보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항구적인 위계적 구조들과 인간 사회를 넘나드는 변화의 강압적 힘, 즉 정부의 형태로부터 부와 가난을 만들어내고 확산 시키거나, 더 깊게는 개인과 집단적 정체성이라는 미묘한 표현에 미치는 힘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제국은 이렇듯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위계적 질서요 힘이다. 물론 서구의 역사 속에서 제국이 사용한 방법은 군사 폭력이었고, 서구의 위계적 질서를 강화시켜 준 것은 기독교 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들 앞에서 그들은 영적으로 선택된 민족이며, 그들의 우월성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선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 식민지배자들이 사용한 평화이해를 우리도 건네받아 의심 없이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 질문을 바꾸어 본다면, “우리는 과연 서구 기독교인들과 동일한 식민주체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3) 서구 제국의 군대 열병식 앞에서 아시아인들이 겪었을 열등감과 박탈감이 없었다면 서구에 의한 오리엔탈리즘이나, 자발적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헌신적 기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포대를 앞세운 거대한 군대 조직을 전시하고 나열하는 것을 통하여 그들은 그들의 우월성을 드러냈고, 그 우월성을 전수받기 위한 친제국주의자들이 모여들었으며, 친제국주의자들은 앞 다투어 서구 제국과의 근친성을 통하여 국가 민족과 사회를 위한 기여에 참여한다고 믿었다. 서구의 화려한 군사문화는 수세기를 거쳐 겪어온 아시아의 가난과 고난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새로운 대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사영 백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만일 할 수 있다면 군함 수백척과 정예군 五六만명을 얻어 대포와 무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말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선비 三,四명을 데리고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종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생령을 구원하러 온 것이니 귀국에서 한 사람의 정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 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절대로 대포 한방이나 화살하나 쏘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치고 춤추며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반듯이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으리니 왕께선 한사람을 받아들여 나라에 벌을 면하게 하시려는지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그 한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실는지 그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천주 성교는 충효와 자애를 가장 힘써 의무로 삼으니 온 나라가 봉행하면 실로 한국에 한없는 복이 올 것이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왕께선 부디 의심치 마옵소서 라고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서양 여러나라가 참된 천주를 흠승하므로 오래 태평하고 길게 통치하는 결과를 동양 각국에 미치게 하리니 서양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 드리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결코 해 받는 것이 없음을 거듭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감히 쫒지 아니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함에 척수와 군대의 인원수가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은 숫자면 대단히 좋겠지만 힘이 모자란다면 배 수십 척에 군인 五六천명이라도 족할 것입니다.“

식민지배 세력에 의한 교묘한 수탈과 억압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기독교 세계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생략된 채 종교적 관심만이 농후하였다. 나는 이러한 선교 초기의 복음은 서구 기독교 역사의 다양성 속에서 교회유형으로 “선택되고,” 다시 한 번 더 선교적 목적을 위하여 단순화된 “생략된 복음” 이라고 생각한다. 즉 서구의 주류 기독교 역사는 콘스탄틴 제국의 종교를 선택하고, 교파주의적 종교로 자라오다가 외방선교를 위한 전략적 생략의 과정을 거쳐 지극히 “단순화된 복음”이 피선교지에 전래되었던 것이다. 이 단순화된 복음은 우리 나라의 경우 서구 기독교 1900년 역사를 담고 있었던 신학적 통찰이 아니라, 한 단면을 통하여 재구성된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산물이었다.

선교를 위하여 축약된 복음은 정치적 개입을 극소화하는 비정치화, 서구우월주의에 포장된 기독교 문화, 그리고 영혼구원의 메시지를 성서주의적 복음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축소된 복음의 전수자인 동시에 전도자가 될 수 있는가? 그 결과는 탈 세계적인 기독교 신앙의 제국주의적 선교가 될 것인데, 강력한 군대도 없이 이슬람, 회교, 불교국들을 향하여 서구 선교사들의 정복주의적 승리주의의 패턴을 이어갈 수 있는가? 사실상 이런 정복주의적 시도들은 서구 기독교 역사 안에서 멜히어 호프만(Mechior Hoffmann)이 이끌었던 초기 재세례파운동, 그리고 십자군 종교전쟁, 개혁교회의 퓨리탄 운동에서 그 오류가 번번히 지적되었던 역사적 기억을 남기고 있다.

4) 이런 우리들의 자화상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아시아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구 신학의 바벨론 포로“ 였다는 고백이 한국의 윤성범, 대만의 송천성, 그리고 인도의 엠엠 토마스(M.M. Thomas) 등을 비롯한 아시아 신학자들에게서 들려왔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서구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신론, 기독론, 구원론, 그리고 교회론이 아시아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이유들이 논의되었다. 식민지배자들의 의식과 판단범주가 피식민지인의 가치판단을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아시아 기독교인들은 서구 식민지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아시아 신학의 문제는 신학적 사유의 종속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학지 담고 있는 세계관과 이에 따르는 평화론이 더욱 심각한 폐해를 낳았다. 서구 자유주의 사상의 형성과정에서 이루어진 인권 개념이 19세기 사회주의 사조와 만나면서 개인에 근거한 자유주의 사상의 확대가 일어나 삶의 공동성과 사회성에 관한 권리와 책임이 논구되었지만, 신학 안에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냉전 논리가 고수되었고, 개혁사상에 고무되어 하나님의 주권을 서구 기독교 제국의 주권과 동일시하던 기독교 제국의 정복주의가 “기독교 승리주의”로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시아 기독교는 냉전 기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수인에 의한 신앙적(맹목적)승리주의가 예찬을 받고 있다.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묵시적 대립을 고취해온 자본주의 사상으로 각색된 근본주의 신앙이 과연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일본, 대만, 방글라데시 근동아시아 지역에 기독교 평화사상의 열매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5) 1960년대 박정희 군사개발독재 20년은 가족가치를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우리 사회의 교육열과 만나면서 경제 성장의 동력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듯 한 휴전상태에서 냉전의 기류가 흐르고, 국가안보를 내세운 독재정권에 의한 민중들의 인권이 억압받았다. 이 시기에 급성장한 한국 교회의 평화론은 6.25 동란의 어두운 기억을 배경으로 반공주의적으로 정치화된 복음화를 통한 평화론으로서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만 정권 이후 군사독재 정권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내세움으로써 민족 통일의 목표를 무력통일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미국 힘과 군대를 의지하면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 왔다.

이런 현실을 배경으로 한국 교회 안에는 서구 식민주의적 선교 정책에 깊이 영향을 받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승리주의의 열기가 높아 영광의 신학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반면 지난 40년 동안 아시아 신학 전반에 나타나는 신학적 주제는 아시아의 고난과 가난, 그리고 가시관을 쓰신 하나님, 고난의 그리스도, 영광없는 십자가의 신학이었다. 특히 아시아 문화 속에서 천대받아온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읽는 한국의 민중신학, 인도의 달리(dalit)신학, 일본의 브라쿠민(部落民) 신학, 대만의 송천성의 제 3의 눈의 신학(The Third Eye Theology)은 서구적 삶의 모델을 통항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선포하는 신학은 더 이상 사회 정치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구신학이 지니고 있는 제국성과 그것의 승리주의를 우리 신앙의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승리주의를 표방해 온 서구 기독교의 평화론의 본질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기독교 주류의 평화론: 불가능한 이상
초기 기독교는 당시의 유대주의 종교적 전통 안에서 새롭게 부상한 종교운동이었다. 이 초기 기독교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알려진 예수의 행태와 어록에 충실한 제자직의 윤리를 가진 신도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당시 신학적 교리나 교회의 체계가 온전히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초기 기독교의 평화사상의 근본 성격을 규정하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성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 내용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포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의 평화사상은 결국 주변 환경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의 사유와 실천에 있어서, 예배와 삶을 깊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기독교 전통은 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평화윤리를 외면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새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의 평화사상을 새롭게 조명한 윤리학자는 죤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책 에서 기독교 평화윤리의 패러다임을 나누고 평화주의 전통을 상실한 윤리적 오류들을 밝히면서 평화를 상실한 호전적 기독교의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듀크 대학의 감리교 윤리학자인 하우어와스(Stanley Hauerwas)도 요더를 일러 자신에게 비폭력 평화주의자가 되도록 인도해준 신학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우어와스는 요더의 책을 읽고서 비폭력 평화주의란 그저 하나의 신학적 윤리의 주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향한 예배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고 고백 하였다. 결국 하우어와스는 요더가 주장하는 바 기독교 평화주의란 기독교가 자유롭게 여러 가지 옵션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예배의 핵심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일치된 견해를 가지게 된 것이다.

세계관적 평화 이해에 있어서 메노나이트 전통을 따르는 요더는 평화의 근본적인 조건을 일러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해명함에 있어서 그 세계관적 이해가 평화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착취적이고 공격적인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는 1992년 미국 위스칸신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한 개인이나 공동체를 감싸는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는 세계관을 축으로 환경적 가치를 이해하는 차원이 있고, 현실 세계의 존속가능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불의의 제거를 위한 노력에서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차원이 있지만, 요더 자신은 가치를 담지하고 있는 교회론적인 측면에서 땅과의 관계성의 빛에서 환경문제를 바라본다는 그의 독특한 입장을 밝혔다.

이 글에서 요더는 일단 기독교가 부정적 보편주의를 선택한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즉 기독교가 공인된 콘스탄틴 대제(AD 313) 이후 기독교는 진리를 주장함에 있어서 로마 제국을 설득할 수 있는 공적인 증언에 점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는 데에서 기독교 평화론의 이탈이 시작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 상황은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되기 위하여 기독교의 내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져버리고, 세상의 보편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길, 즉 효율성의 논리를 기독교의 내적 가치보다 중시하는 데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는 콘스탄틴 대제이후 권력의 비호를 받게 된 기독교는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정적 보편주의를 선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내적 가치를 있는 그대로 증언하면, 로마 제국의 논리와 어긋나고, 결국 세상이 경청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결국 대중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교회가 로마 제국주의적 제 가치와 타협해 온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다. 이러한 타협적 태도는 트뢸치가 해명했던 바 전형적인 교회유형(church type)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교회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고, 어느 정도 세속적인 질서들을 수용하며, 대중을 지배하기도 하고, 원칙적으로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다. 즉, 교회는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관여하려고 한다.”

부정적 보편주의를 선택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트뢸치의 주장대로 대중을 얻기 위하여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희생시킨 타협주의자들이다. 요더는 이와 같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부정적 보편성을 위하여 희생시킬 것이 아니라, 기독교 본유의 존재가치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므로 결코 타협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종파적 입장을 지지한다. 따라서 요더는 종교가 역사 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헤겔적인 이해를 거부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한 공동체성을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소종파적 신앙은 비교적 소수의 그룹들이며, 개인의 내적인 완전을 추구하고, 각 신앙 공동체간에 직접적인 인격적 사귐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이들은 소규모의 그룹을 형성하게 되어있고 세상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버린 이들이다.”

결국 요더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실천 가능성과 타협해 온 교회유형과 기독교 진리의 특수성을 고수해온 소종파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고유성을 보존 유지하는 편을 더욱 본질적인 기독교성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교회 유형의 신앙은 보편성을 강조해 온 철학적 윤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와 타자들이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적 공리를 주장한 임마누엘 칸트의 보편성의 격률(axiom of universality)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등의 원칙과 수평적인 호혜성의 원칙이 존중되는 이 보편성의 원리는 요더에게 있어서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입장은 교회의 내적 가치를 일반화시킴으로써 세속적 타협을 불러오는 윤리적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다른 이들이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리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지복주의적인 보편타당한 욕구에 승복하는 것이지 결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원칙은 아니라고 보는 까닭이다.

제도적 삶, 인간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삶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보편적인 원칙을 따를 경우, 죄에 대한 승인이 일어나고, 타세계적인 구원론을 결과한다는 점에서 요도는 기독교 윤리의 주요 논제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제도적 삶이란 죄인들을 어거하는 억제책으로서 정당화되고, 인간은 죄의 경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통제와 억압과 지배의 대상으로 타자화되어 통치자와 신민이 구별, 차별 받게 되고, 인간의 성취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매우 비관적인 것이 되어 평화는 현재의 평화가 아니라 미래의 평화로, 실질적인 구체적 평화가 아니라 관념적인 평화로, 공동성을 지닌 평화가 아니라 억압적인 평화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는 근본적인 혁명과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궁극적인 구원은 사후에나 얻는 것이며, 영원한 복락이란 사후의 세계에서 성취된다는 견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상과 같은 분석에 의하면 결국 기독교 윤리학의 주류는 “어떻게 예수의 평화윤리를 실천할 것이냐?” 라는 물음보다 “왜 예수의 평화윤리를 따라 살 수 없는가”를 변명해 온 역사적 증거다. 이런 변명의 역사는 사실상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제국의 종교가 되기로 자처한 데에 그 소이가 있다. 즉 거대한 제국의 권력을 이용하며 스스로를 강화시켜온 기독교는 이제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평화주의의 길을 사실상 포기하거나 배반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갈래 길을 만난다. 기독교가 걸어 온 제국주의의 종교적 전통이라는 넓은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평화사상을 따라 좁은 길을 걸을 것인가? 이 둘 중의 하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4. 성서와 예수의 평화사상
성서가 담고 있는 평화사상은 예수의 평화사상에 수렴되어 있다. 요더는 구약성서의 원역사(Urgeschichte)에 담긴 고대 야훼신앙의 속성을 일러 자연과 인간사이의 친화성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 신앙이었다고 주장한다. 원창조 이야기가 밝히는 바는 인간이란 자연의 산물이다. 즉 인간(아담)은 아다마(흙)에서 나오고, 흙에서 나온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인간화가 깨진 현실을 밝히 드러내는 사건이 바로 카인에 의한 아벨 살해 사건이다. 아벨의 제사는 땅을 파 헤치는 것이 아니었지만, 카인의 삶은 자연을 이용하기 위하여 기구를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땅을 파헤치고 착취하는 테크놀로지와 정복의 패턴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비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받은 것은 그의 삶이 평화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며, 카인의 제사를 수납하지 않은 것은 카인이 폭력적이며, 착취적인 삶을 살아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벨은 자연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었고, 자연에 의존된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카인은 자연을 정복과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그의 삶은 땅을 해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연과의 관계 상실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땅을 훼손하고 파헤치며 살아 온 카인의 제사는 수납하지 않고, 자연에 의존하여 생존의 조건을 찾는 아벨의 제사를 더욱 평화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주의적 삶의 태도를 더욱 높이 평가하였다는 의미로 요더는 받아들인다. 그 결과 카인의 해함과 정복의 논리는 자연과 인간, 즉 자신의 아우까지도 대상화함으로써 마침내 땅을 파헤치고, 동생의 생명을 해하는 폭력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이렇듯 히브리적 사유의 특징은 주객미분의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에 기초해 있었지만, 동일성의 논리는 분리와 타자화를 거쳐 정복과 착취문화를 발전시키고 급기야는 폭력을 동원한 전쟁과 죽음을 불러오는 힘의 제전을 벌린 대가로 풍요를 누리는 도시문명을 형성한 것이라고 요더는 생각한다. 그는 성서가 지니고 있는 정신은 대단히 반문화적인,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성서와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인간들이 영위해온 정치는, 지배논리를 강화 하고, 경제는 착취와 차별의 논리를 뒷받침하여 소수자의 특권을 옹호하는 차별적 관계를 용인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보복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국가권력이 출현하고, 문명의 상징인 도시가 세워지며, 철기문화를 축으로 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나아가 보복적 행위를 승인하는 전쟁행위를 용인하는 논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카인의 삶은 바로 이런 권력과 보복과 가술문명의 효용성을 받아들이는 문화적 대표성을 가진다. 이런 점에서 자연의 비신성화를 넘어서서 자연을 도구화하는 문명이 전개되고,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었으며, 그 결과 인간과 자연간의 평화가 깨진 생태계의 위협을 초래하게 된 것이라고 요더는 지적했다. 결국 요더는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죄의 뿌리는 에덴의 타락이 아니라 바로 이런 세계관적 이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타자화는 동류 인간의 타자화로 이어지고, 타자화는 차별과 배제, 착취와 정복 문화를 정당화하며, 착취와 정복의 문화는 종국적으로 적자생존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논리를 결과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가 담고 있는 유대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선민의식, 그리고 거룩한 전쟁에 관한 언급들과 지상에서의 부귀와 오랜 수명을 누리는 현실지복의 윤리는 사실상 예수에 의하여 수정되었다. 예수는 편협한 유대민족주의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보복의 윤리가 아닌 사랑의 윤리를 설교했으며, 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제자직을 가르쳤다. 그는 이 땅에 궁극성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며 살아야 할 원칙들을 가르쳤다. 사랑과 평화 사상이다.

사랑과 평화가 가장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는 예수의 사상에서 우리는 폭력과 전쟁을 예찬하고, 미움과 정복과 착취의 문화를 옹호하려는 뜻을 추호라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상은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것이며, 지상에 터를 잡고 영화를 누리려는 동기를 상대화하는 하나님 나라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예수의 윤리는 소종파 신앙인들에게는 새로운 법으로 이해되었지만 제국주의적 야망을 가까이 하기로 작정한 콘스탄틴 기독교는 예수의 윤리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은 불가능한 이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트뢸치는 콘스탄틴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교회 유형은 소위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효용성이 높은 길”을 골라 걷는 데에서 기독교 신앙의 연관성(relevance)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교회 유형의 신앙은 세상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윤리를 신학적으로 합리화하는 대신 예수의 가르침을 일정부분 침묵시키거나 외면하게 되었다. 신앙의 본질(authenticity)보다 효율성(efficacy)가 더욱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었던 소수자의 내적 가치는 교회 유형의 신앙에서 약화되었고, 그 대신 로마 제국의 사회 윤리적 논리와 가치가 교회 안에서 유입되었으며, 이를 옹호하고 합리화 하는 제도권 신학자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소수자의 내적 확신에서 이어지던 가치들이 담고 있었던 진리에 대한 이해는 결국 대중적 진리운동으로 바뀌고 이와 동시에 제국의 종교가 만들어내는 공식적인 교리로 체계화 되었던 것이다.

5. 변질된 기독교 평화론: 전쟁 지지론
콘스탄틴 대제 이후 제국의 종교로 기독교를 탈바꿈시킨 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악과 죄가 관영하는 지상에서는 결코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평화를 이중적 구조로 나누어 하나님 도성(civitas dei)의 평화와 지상의 도시(civitas terrena)의 평화로 나누고, 하나님의 도성이 지향하는 평화를 궁극적이며 영원한 것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한편, 신자의 내면적 영성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반면 세속적인 평화는 악을 제어하는 힘에 의한 평화로서 상대적인 평화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중적 섭리에 의하여 영적인 평화와 세속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의 평화사상이 이중적 구조로 분리된 것이다.

“평화는 이 썩어질 것들이 썩지 아니할 것이 될 때까지 오지 않을 것이지만, 오직 구원을 받은 이들을 위해서 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이란 해소되지 않은 갈등들이 편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평화는 하늘에 있다. 거기에는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없고 원수들의 훼방도 없는 곳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 윤리의 내면화는 외면적인 폭력을 정당화해 주었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이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자세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이후 제국의 종교를 자처한 기독교는 한편으로 예수의 역사적 증언과 하나님 나라 운동을 재해석함으로써 그 급진성을 희석시키고, 경전과 교리를 앞세운 신앙의 대상에 대한 신앙운동에서 정체성을 찾았다. 이 신앙운동은 세속과 거룩의 영역을 나누고, 거룩의 영역에서 기독교의 권위를 보전하는 길을 열었다. 세속은 원죄로 오염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간이지만 교회는 거룩의 영역으로 이 세상을 초월하는 신비와 초월의 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와 동시에 세속은 거룩의 영역을 보호하는 현실적 힘이었고, 교회는 세속의 지배자들의 행위와 존재를 신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었다. 소위 왕권신수설과 정당전쟁론이 그것이다. 왕권신수설은 교회의 영적 권위 아래 세속 권력을 종속시키면서 동시에 지상의 지배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옹호했고, 정당전쟁론은 세속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온갖 전쟁행위를 교회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가 옹호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 이었다.

이 전통은 중세기를 지나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까지 파고들었다. 마틴 루터는 후에 두 왕국설(Zweireichelehre)로 이름 지어진 두 가지 권위를 긍정했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오른손 역할을 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왼손 역할을 하는 세속관헌(Obrigkeit)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 하지만, 세속 관헌은 창과 칼을 동원하여 악한 자를 재갈 먹이는 기능을 하는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루터는 “군인들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그는 이웃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행위를 하며 적을 살상하는 데 참여한 군인들은 자신들의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공적 소명을 다한 것이므로 구원받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교회의 영역에서는 기독교적 평화의 원칙이, 사회 공동체에서는 세속적 평화 원칙이 적용되었다.

이런 루터의 가르침은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공인으로서의 냉철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관료(bureaucracy) 사상을 낳았다. 종교적으로 위임된 공직을 수행하는 관료(Amttraeger)사상은 공직자로서의 엄정성과 더불어 잔인성을 동반하였다. 사정감정을 지극히 제한하는 공직 수행자의 역할을 수용한 기독교는 정의의 집행자로서 공적 살인인 사형과 전쟁에서의 살상행위를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이 사상은 후에 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기독교도들에 의한 이교도 징벌과 처형을 영적으로 정당화하는 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치 신학적 가르침은 퓨리탄 전통을 낳은 칼빈주의적 개혁교회에서 더욱 철저히 나타나는 데, 다만 칼빈의 경우 신정론(theocracy)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으로써 세속정권의 타락 가능성을 고려하여 저항권을 적극적으로 승인한 점이 두드러진다. 종교적으로 현실적 악은 결국 종교적인 악으로 규정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탄이나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인정과 배려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잔인성이 동반되곤 했다. 이런 영적인 관료의식은 간혹 교회 정치나 세속 정치가들에 의하여 정적을 음해하고 처단하는 데 오용되기도 했다.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형성된 두 도성설은 기독교 복음을 담지한 신앙공동체와 정의를 집행해야 하는 세속정권의 본질이 윤리적으로 동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신학적 이중성은 현대신학에까지 이어져 칼 바르트는 시민사회와 기독교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이를 규명하였다.

결국 이런 논의 속에 담겨있는 이중구조가 지시하는 바는 기독교 공동체가 평화를 논의할 경우, 교회내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교회 외적 현실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전개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 주류의 담론을 구성해온 신학적 입장은 기독교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교회 공동체의 내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련성을 항상 고려하려는 입장을 가졌고, 이러한 관련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교회의 내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대신 보편적 지배와 승인의 구조를 획득하기 위하여 일종의 대중 선교를 위한 타협적 태도를 수긍해 온 것이다. 즉 엄격한 성서적 원칙을 적용하기보다는 성서가 함축하는 사랑의 과제에 대한 해석학적 지평을 자의적으로 열어 간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하여 완전한 평화에 대한 희구는 종말론적 지평 너머로 밀려가고, 현실세계 속에서 평화를 찾는 일은 결국 악의 제거라는 현실주의적인 과제로 남게 되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로운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폭력을 의로운 폭력으로 승인하는 정당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주류 교회들은 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후원해 온 것이다. 이 이론은 로마 제국주의를 종교적으로 후견하였고, 16세기부터는 서구 제국주의의 아시아,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3세기 암브로우스에서 시작하여 어거스틴이 기초를 놓고 아퀴나스가 완성한 정당전쟁론의 제 조건을 충복시킬 수 있는 주체는 사실상 바로 로마제국, 즉 승리의 확신과 더불어 상대가 자신보다 더 악하다고 보는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당전쟁이론과 더불어 서구 기독교 문명에 대한 우월성이 덧 붙여져 정당전쟁론은 성전론(Crusade)로 발전되어 무수한 전쟁을 불러왔다. 전쟁을 선포한 강자는 언제나 전쟁의 이유를 상대에서 찾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 상대를 악마화 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독교 문명권 안에서 일어난 전쟁은 전쟁에서 승리한 편에서 한결 같이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6. 제국주의와 콘스탄틴 기독교
트뢸치가 초대 교회가 콘스탄틴 대제시기를 지나며 세속화되고, 교회의 생존을 위하여 타협의 길을 걸어 문명화된 윤리(civilizational ethic)를 형성했다고 지적한 것은 옳지만, 그런 방식을 통하여 세계를 향한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는 효용성의 논리의 정당화는 바른 평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효용성의 윤리는 제국주의적 확장과 팽창, 지배와 착취를 통한 부유함의 효용성만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반대 편에 속한 이들, 강자의 시장이 되고, 강자를 위하여 쳔연자원을 공급해주고, 강자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온 식민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 효용성은 식민자의 것이었지, 피식민지인들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연 지배와 정복 문화 안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종교의 효용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이 예수의 평화윤리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나는 여기서 예수의 평화주의가 증발해 버렸다는 사실을 간과한 트뢸치의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그에게 있어서 초대 기독교가 지향했던 바 기독교 평화 윤리를 상실하고 제국의 종교로 변신한 어거스틴 이후의 콘스탄틴 기독교 사상은 심각하게 예수의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거나, 일면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잘못 들어선 길에서 기독교는 예수의 윤리를 잃어버린 채 제국의 종교가 되어 예수 사상과 관련 없는 지배적 폭력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담해 왔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설령 합리적 사유를 근간으로 하는 트뢸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의 윤리는 원래 종교적으로 순수한(pure) 것으로서 현실 적용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으나, 현실 세계의 문제들과 조우하면서 자기 조정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예수의 평화윤리를 상실한 콘스탄틴 기독교의 평화론은 그 조정 과정에서 사라지고 로마의 평화로 대치되고 말았다고 우리는 판단 할 수밖에 없다.

콘스탄틴 기독교는 기독교 신앙의 일치를 강조하다 못해 그 일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박해와 살육을 일삼았다. 그 대상은 유대인, 이슬람 교도, 터키인, 그리고 타종교인 들이었다. 기독교가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 시대를 맞아 점점 굳어진 교리체계를 형성하면서 권력화 되어 갈 때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과 겹치면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종족으로 규정되었고,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뿌리 깊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런 증오의 역사는 계몽주의 이후 유럽의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이어졌고 마침내 20세기 중반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종족 말살의 대상이 된 유대인들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기억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남겼다.

내가 2002년 독일 베를린 근교 유대인 집단 수용과 학살이 이루어졌던 집단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그 섬짓함은 미국 워싱톤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 보다 현실적인, 캄캄한, 길고 긴 절망의 역사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지난 2008년 2월에는 미국 휴스톤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찾아가 보았는데, 거기서 나는 홀로코스트야말로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홀로코스트는 단순히 나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기독교 문명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매카피 브라운(Robert McAfee Brown)은 이 고뇌의 정황을 일러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과 아우슈비츠 “그 중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고립된 개체로 각기 다룰 수는 있었지만 - 즉 아우슈비츠가 있다면 하나님은 없어야 옳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아우슈비츠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하나님, 하나님과 아우슈비츠를 동시에 직면해야 했다.”

홀로코스트 이후 악의 현실과 공존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되었다. 선하신 하나님과 너무나 깊은 악의 현실이 공존할 수 없다고 믿어온 사람들은 이 질문을 회피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에 빠지곤 했다. 1945년 이후 홀로코스트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나치즘의 사상적 책임을 기독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고 지목했다. 돌이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은 유럽전반에서 박해를 받아왔다. 가톨릭교회에서 자란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증오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태도에 크게 기인하였고, 특히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가한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한 책임을 후손들에게까지 묻는 데에서 증폭되었다.

1543년에 출판한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이라는 논문에서 마틴 루터는 카톨릭 교회와의 프로테스탄트간의 대립과 갈등 사이에서 예수를 구원자로 믿기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지목하여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규정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일러 사악한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므로 독일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며 그들의 회당은 모두 불에 태워져야 하고, 모든 유대인들의 책들은 압수되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종교적 관용이나 인간적인 배려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을 가지고 루터는 유대인들의 종족적 말살을 요구하며 그들을 일종의 종말론적인 복음의 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점철된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의 나치즘에서 가장 극악한 형태로 실천되기에 이른 셈이다. 콘스탄틴 기독교가 비 기독교도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개종, 추방 아니면 말살정책이었다. 이렇듯 로마제국 속에서 강고함을 자랑하던 콘스탄틴 기독교는 예수의 평화윤리를 철저히 배반해 왔다.

7. 예수 평화 윤리가 거부된 이유
요더는 예수 윤리에 대한 왜곡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그의 책 <예수의 정치: The Politics of Jesus>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는 메시야적 윤리(Messianic ethic)가 예수 윤리사상의 핵심이라고 보고 그 밖의 윤리적 이해구조들은 인간의 합리적 실천능력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의하여 여과된 타협주의적인 결과들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기독교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순하게 말해서 그런 윤리체계를 앞세운 가르침에는 예수가 더 이상 기독교 윤리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비록 기독교 윤리를 표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주류 기독교가 가르치고 있는 윤리는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삭제하거나 심지어 예수를 부담스러워하며 도외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더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기독교 주류의 윤리학적 전제들을 분석한다. 예수를 윤리학의 핵심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윤리학을 구성하게 된 요인은 세속적인 가치들과 융합하며 예수를 모방하는 제자직의 윤리를 거부하는 입장을 택했기 때문인데 그런 논의를 정당화한 데에는 예수가 사회 윤리적인 제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가이드를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즉 예수에게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복잡한 세계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정치 경제 사회 윤리가 결여되어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이러한 입장은 여러 가지 기독교 윤리학적인 경향을 불러왔다. 첫째, 예수의 윤리가 특정한 시대적 의미에서 잠정적(interim) 윤리적 관점에서 그의 가르침을 전개 했다는 견해가 있다. 예수가 지녔던 세계관은 그 당시의 세계가 곧 종말을 맞아 지나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어서 종말론적인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구체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다만 그가 삶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들은 곧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기위한 태도를 촉구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 즉 폭력 사용의 거절, 자기 방어 금지, 안전을 위한 부의 축적, 거주할 곳 없는 예언자적인 삶에 대한 가르침은 일상의 규범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이를 역사적 책임의 윤리로 적용하거나 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종말론적인 기대”를 따라 살아야 하는 종말론적인 삶에는 적용할 수 있지만 종말이 아닌“지속하는 역사”안에서 미래를 배려하고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삶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예수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 기대는 그의 기대와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종말론적인 윤리는 역사 책임의 윤리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낳게 되었다. 이런 방향으로 작업을 수행한 사람은 기독교 현실주의의 초기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이었고, 이어 아퀴나스와 루터, 칼빈, 라인홀드 니버 등이 모두 이런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반제국주의적인 평화적 가르침은 많은 부분 포기하거나 내면화하고, 외면적으로는 전쟁의 윤리와 폭력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이용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어거스틴은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왕들이나 백작들은 전쟁을 선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제는 병사들의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이유를 가지고 그리고 누구의 권위 아래 전쟁을 벌이느냐라는 질문은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의 평화를 위하여 기획된 자연의 질서는 전쟁을 벌이고, 계획하는 권위를 국가의 수반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평화와 모든 신민들을 위하여 이미 결정된 전쟁을 수행하는 의무를 져야 한다.”

둘째, 요더는 프란시스칸 수도사들과 톨스토이 같은 사람은 예수를 단순한 시골출신의 인물로 생각하고 예수의 윤리를 포기의 윤리(ethics of renunciation)로 해석하였다고 보았다. 예수는 들의 백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자라는 씨앗에 대한 비유를 들며, 농부와 추방당한 문둥이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그는 주로 개인적인 관심사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윤리의 차원은 서로가 안면을 잘 알고 있는 조그만 특수한 인격적인 사회인 시골에서 적용할 일이지, 대도시나 국가 기관 같은 그런 영역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규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인격적인 관계구조 안에서는 적용 가능하나, 비인격적인 관계를 상정하는 더 넓은 사회구조 안에서는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예수 윤리의 사회윤리학적 적용의 한계를 주장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는 사회, 정치, 경제적 요인들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을 주었을 뿐 오늘의 현대적인 삶의 복잡한 현실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예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삶은 복잡한 제도적 삶의 구조를 부정하거나 벗어나서 단순한 삶으로의 복귀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단순한 삶의 비결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가르쳐진 내용들 중 하나다. 이런 삶은 수도적인 삶을 살아간 수도원주의의 원형이었고, 사제들의 삶에 적용되기도 하였다. 프랑스 남부 리용의 테제(Taize) 공동체나 퀘이커들을 비롯한 소종파 공동체들은 지배와 착취문화를 거절하고 공동적 삶을 제자직의 윤리로 받아들여 묵상과 명상 그리고 노동을 비롯하여 단순하고 청빈한 영성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테제 수사 로져의 글에 단순함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이렇게 담겨있다.

" 공동체로서 우리의 소명은 기부를 받거나 유산이나 선물을 받는 것도 아니라 우리가 오직 우리들의 노동을 통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위하여 자금을 가지고 지키거나 가난하게 될 가능성을 두려움하지도 않는 담대함이야말로 셈할 수 없는 강함의 원천입니다. 청빈의 영성이란 극빈을 추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그리면서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하는 것이지요. 단순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셋째, 폴 램지(Paul Ramsey)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그들이 전혀 컨트롤 할 수 없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으므로 사회적 책임 운운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신앙의 증거를 지닌 소수의 무리였다고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램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발전시켜서 비록 예수가 대면했던 상황과 같은 것이 아니지만 오늘의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사회적 책임을 논구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정황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어도 기독교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에 의하여 잘 설명된 바 있다. 트뢸치는 예수의 윤리가 순수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교회들은 그 예수의 가르침을 세계 현실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시켜서 문명화된 윤리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트뢸치는 기독교 윤리는 당대마다 사회학적 요인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가장 적절한 기독교 윤리적 표현을 찾아 왔다고 보면서 세 가지 표현형을 예증했다. 그 세가지 표현형은 교회유형, 소종파 유형과 신비주의 유형인데 그는 기독교 신앙의 사회 윤리학적 영향력의 크고 적음의 관점에서 교회유형을 가장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트뢸치는 교회 유형의 사회윤리학적 속성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교회는 구원사역의 결과로서 은총과 구원이 담지 된 제도이며; 대중은 수용해 들일 수 있고 세상에 교회를 적응하게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객관적인 은총과 구원을 위하여 주관적인 거룩함의 요구를 어느 정도 간과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의 순수한 종교적인 가르침이 약화되거나 변개되고,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적 가치들과의 타협을 통하여 보다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요더는 이런 입장에서도 역시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 윤리의 규범으로 자리 잡지 못하여 그 유효성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넷째, 예수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사회적 적용을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고, 이를 영적인 것이라고 축소하는 입장이 있다. 이 경우는 예수의 메시지의 본질이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으며, 실존적인 내면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 구체적인 삶의 제 문제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예수가 준 메시지는 사회변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갱신을 위한 것이며, 내면의 신앙적인 요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맥락에서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은 비역사화(ahistorical)된다.

여기서 예수는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실존적인 내면적 변화를 촉구하는 분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맥락에서 본다면 복음의 사회 정치 문화적 해석은 복음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리챠드 니버가 문화에 적대적인 그리스도 론 (Christ against culture)을 전개한 맥락과 만나는 견해이다.

“이 입장은 2세기 경에 쓰여진 <디다케>, <바나바 서신>, <디오그네투스 서신>과 같은 문서에 발전한 것이다. 터툴리안(Tertulian)도 분명 이 그룹의 일원이다. 이런 초기 기독교 그룹이 지니고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은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율법을 지닌 새로운 백성이라는 이해이다. 가장 기초적인 이 법의 출처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따라 살거나 본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새법을 따라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협의 윤리는 거절되고 비타협적이며 반문화적인 영적인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입증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다섯째, 위와는 약간 다르지만 예수를 급진적인 유일신론자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지엽적이거나 유한한 가치들을 벗어나서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데 집중하게 하는 메시지를 주신 분이 예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강조되고,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윤리적 척도와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본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하신 초월자 하나님간의 거리를 강조하는 이 입장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칼 바르트나 헬무트 리챠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이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입장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역을 인간이 침범하거나 하나님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 내리는 사고를 경원시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지 우리들의 해석의 대상이 아니며,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의 행위와 동일시하는 입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즉 죄로 오염된 인간의 사역이 곧 하나님의 사역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정치 영역에 현존하는 질서들은 그것이 민주적인 것이든 아니든,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인간의 질서들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지배자들이나 정부는 동료 인간들 위에 더 고등의 옳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릇 주장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정치론(theocracy)도 최상의 그릇된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 정치적 혁명조차도 여하간의 정부 안에 담겨있는 악에 대한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정의는 인간의 죄 성 안에서 주장되는 정의라는 인간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다르고, 단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의 수납자로서 복종의 윤리(ethics of obedience)를 가질 뿐이라는 입장이다.

여섯째, 이 입장은 예수 이해에 있어서 교의학적인 강조를 하는 입장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만인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므로, 그를 믿고 의로워져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로만 카톨릭 교회나 개신교회나 구원론적으로 예수를 이해하는 점에서 일치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예수는 교회의 교의학적 해석에 따라 그의 구체적인 윤리적 요구들은 교의학적 구원론적 기독론에 가려지고, 예수의 삶과 사상의 적용 영역은 교회 안으로 내면화되고, 교회 밖으로는 선교적 과제가 두드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개인적 차원에서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기독교 윤리학은 성서나 예수의 가르침 이외의 다른 자료들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로만 가톨릭 교회의 윤리신학에서 볼 수 있는 이 입장은 성서적 진술과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적 전통을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 윤리신학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윤리학은 교의학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으로 가톨릭 전통은 성례전을 통한 의로움을 강조했다면 개신교는 선포된 말씀에 의한 자기이해의 갱신을 중시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칭의의 중요성이 도덕적 행위론에 앞서게 된다.

이상과 같은 요더의 논의들은 결국 한 가지 관심, 즉 왜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윤리를 형성하는 데 충분하지 않는가를 해명하는 것들이다. 이 논의들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너무 도덕주의적이거나, 종교적이어서 현실적 타당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발전시키거나 혹은 다른 자료들을 첨가해야만 적용 가능한 윤리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논의는 기독교 윤리학을 전개하면서 예수가 더 이상 윤리 규범의 핵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이유를 밝힘으로써 예수이외의 사유가치를 도입하자거나 아니면 예수의 관점에서 벗어난 타협적 가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요구를 정당화 한다.

“그리하여 이런 전환적 측면에서 재구성하는 사회윤리는 상식이나 사물의 본질 따위의 것들로부터 안내를 받아 이끌려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것이 ”맞는지“, 그리고 어느 것이 ”적절한 지,“ 무엇이 ”상관적인지,“ 무엇이 ”효과적인지“ 를 따지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현실주의적이거나 책임적이 된다.”

이렇게 예수의 평화사상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현실주의자들의 손에서 재해석됨으로써 평화주의가 아닌, 호전주의, 혹은 현실적 전쟁 옹호론으로 발전하게 되거나, 아니면 현실에서 퇴각하여 정적주의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 안에서 사회 책임의 윤리를 강조할 수는 있었으나 평화를 위한 실천 방법에서는 매우 호전적이고 방어적인 논리를 수용하여 예수의 평화 사상과 참으로 먼 거리를 가지는 기독교가 되고 말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요더는 이상에서 본 기독교 윤리학의 성향이 예수의 복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신학적 관심으로 기울어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8. 요더의 트뢸치 비판
이상의 논의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이 개인적인 것, 종교적인 것, 실존적인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그의 가르침은 사회적 관련성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적 관련성을 가지도록 보다 적절한, 정황에 맞는 수정을 통해 효과적인 방안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성향은 로만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나 혹은 근래의 상황윤리에서나 동일한 공리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고 자신의 경험과 이성적 합리성에 맞추어 변개한 셈이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청자가 아니고, 예수의 말씀의 적용 가능성을 판단하는 입장에서 예수를 수정해 온 역사, 그것이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 주류 신학자들에 의하여 지속되어 왔고, 오늘의 대부분의 기독교회들은 이런 입장에서 나온 신학적 귀결을 근거로 평화와 믿음과 구원을 이해하게 되었다.

요더는 예수의 사회 윤리적 가르침이 실존적이고 내면적이며 종교적인 성격에 그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현실 관련성을 결여하고 있다면 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했는지에 대하여 묻는다. 뿐 아니라 예수를 통하여 전해지는 메시지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현실적인 삶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는 신앙적 태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요더는 예수의 메시지가 현실적인 것일 뿐 아니라, 현실 관련성이 있고, 특별한 기독교 사회 윤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충분히 규범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트뢸치는 예수의 윤리사상이 너무나 순수 종교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의 현실과 만나고 타협하면서 변형되어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이 변형의 과정 없이 기독교 사회 윤리의 효용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런 점에서 그는 소종파적 윤리의 취약성을 그 사회적 영향력의 미약함에서 지적함으로써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교회 유형을 최상의 것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요더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의 평화 윤리는 철저하게 성서적인 근거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교권 신학자들이 예수의 윤리의 적용 불가능성을 주장해 온 것은 예수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일방적인 그들의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 그는 다음의 몇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요더의 주장을 살펴보면 트뢸치를 비롯한 교단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예수 윤리의 비사회적 순수성과 종교적인 성격에 대한 주장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예수는 그의 시대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매우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소명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여하간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나온 비폭력 평화주의 원칙이었고, 이 원칙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이라고 요더는 주장한다.

둘째, 당시 유대적 상황 속에서 예수가 선택할 수 있었던 정치적 대안들은 현존하는 질서를 거절하고 변혁시키는 방법이던지 혹은 역사 현실을 회피하고 사막으로 퇴각하는 것이었으나, 예수는 현실 한 가운데에서 비폭력 평화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고 요더는 믿는다. 여기서 분명하게 다시 떠오르는 예수의 이미지는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다가 고난을 수용하는 십자가의 삶이다. 그리하여 요더는 "오직 한 가지 관점에서, 오직 한 가지 주제에 초점을 두면 그리고 지속적으로 또한 보편적으로 예수는 우리의 모범이다: 그의 십자가에서"라고 주장한다.

셋째, 저항적 약자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받을 수밖에 없는 유혹은 사회적 책임을 수납하기 위하여 저항적 폭력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저항적 폭력을 가르치지 않았다. 요더는 우리가 예수를 이해하려면 세 가지 거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적주의의 거절이며; 질서형성을 위하여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의 거절; 그리고 십자군적 태도를 가지라는 지속적인 유혹을 거절한 것이다.

따라서 성서적 기록에 근거한 이해가 아닌, 성서외적인 사회학적 영향력이라는 논거를 가지고 예수를 이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요더는 판단한다. 그 결과 요도는 명료하게 예수가 위의 세 가지 입장을 거절하고, 비폭력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 평화윤리는 비폭력 평화주의가 아니라 폭력적 평화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강자의 논리위에 의존하는 기독교 평화윤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평화에 관한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일종의 선택사항(optional)이 아니라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선택사항이라면 수정도 하고, 개선도 하며 적절히 조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명령형의 형태일 경우에는 철저한 복종(radical obedience)을 요구할 뿐이다.

9. 콘스탄틴 기독교를 넘어서
나는 이 강연을 우리 정황에 근접한 현실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으로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몇 가지 질문을 추가하고 싶다. 과연 아시아 한 반도에서도 우리가 서구 콘스탄틴 기독교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정당전쟁이론을 앞세운 정복주의적이며 호전적인 평화론을 주장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구의 콘스탄틴 기독교를 가능하게 했던 로마 제국, 혹은 유럽제국주의와 같은 막강한 기독교 문명권의 우월성을 옷 입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신앙적 명제 뒤에 숨어 있는 정치신학, 즉 콘스탄틴 기독교의 오류를 우리도 반복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 한국 교회가 신학 함에 있어서 지난 역사 속에서 서구 콘스탄틴 기독교와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의 대상이 되었던 바로 그 아시아 대륙이 남기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과 고난에 대한 기독교 평화적인 접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만일 우리의 신학적 사고의 축이 제국주의를 옷 입은 콘스탄틴적 기독교라면 우리 안에 있는 폭력성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독교 평화론은 콘스탄틴 기독교적 평화론이 아니다. 서구 역사속에서 1500년간의 로마 제국주의와 편승했던 강자의 신학, 로마제국의 멸망 후 서구 제국 속에 편재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식민지화를 정신적으로 지원했던 콘스탄틴 기독교를 수용해 들인다면 우리들의 정체성은 "fake Romans," 몸은 아시아인인데 정신은 유럽인이며 로마인이 되어야 한다.

서구 문명사 속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유산을 물려받은 로마인들 곧 서구 유럽인들과는 달리 우리는 어두운 식민지인의 기억들만을 안고서 가난과 고난의 터널을 헤쳐오는 아시아인이다. 바로 이런 우리들에게 필요한 평화론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향후 풀어야 할 숙제이다. 강자가 아닌 약자들의 평화론이 정당전쟁론일 수는 없다. 부유한 자가 아닌 극빈의 삶을 살고 있는 아시아인들이 전쟁 문화를 부추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시아 도처에서 빈발하고 있는 내전과 갈등과 대립은 식민지배의 유산이며, 그들이 남긴 적대적 헤게모니즘의 잔재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일러주어야 할 평화의 길은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는 폭력성에 대한 진지한 돌이킴 없이 평화를 논구한다는 것은 위선이거나 허위의식에 머무를 뿐이다. 간혹 약자를 향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면서 평화를 위한 노력이라고 자인할 수도 있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을 추방하는 제의에 참여하는 것을 평화운동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오늘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 울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축복을 받으려면 단연코 우리는 평화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콘스탄틴 기독교를 넘어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이 길로 향하는 문들이 몇 가지 있다. 무엇보다도 콘스탄틴 기독교의 그늘 속에서 묵묵히 평화의 윤리를 실천해 온 소종파 평화윤리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필요하고, 1960년대 이후 해방신학이 제기해 온 “억압과 차별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의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콘스탄틴 신학이 적대적으로 만들어 놓은 이웃 종교들과의 화해를 통하여 지구적 평화를 위한 봉사에 나서는 방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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