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김용옥 선생이 보는 대운하,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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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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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13, 2008
Asia, the Continent of Poverty and Pppression: Asian Religious Liberation Theology

알베르또 라멘토 감독, 그는 필리핀 농부들의 인권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2006년 10월 3일 살해 당했다.
가난과 억압의 대륙, 아시아 종교해방 신학
서구의 전(前)식민지 아시아
아시아는 지구에서 가장 큰 땅과 인구를 가지고 있는 지역을 의미 한다. 전 세계를 6대주로 나누어 본다면 아시아는 46개의 나라들이 모여 있는 집합체이고, 전 지구 인구의 약 60%가 거주하고 있는 광범위한 땅이다. 힌두교, 이슬람, 불교, 라마교, 유대교가 자리를 잡고 있는 대륙 아시아에서 기독교는 구교와 개신교를 합쳐 3% 정도이다. 아시아에서 비교적 기독교 문화가 터를 잡고 있는 곳은 필리핀과 대한민국 그리고 레바논 정도이다. 따라서 아시아에서 기독교 인구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정치적 상황과 유사하게 대부분의 아시아 지역은 서구 열강들의 식민주의 세력의 팽창과 더불어 기독교 선교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아시아에는 토착종교들의 뿌리가 깊어 서구 기독교 제국의 정치 종교적 동일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나라에서 기독교가 자리를 잡지 못했다.
아시아를 향한 서구 기독교 열강의 식민지 정책은 근 400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45년 세계 2차 대전의 종료와 더불어 독립을 얻기 시작한 아시아 각국은 정치적으로 새로운 민족주의의 발흥과 더불어 서구 제국의 식민 지배로부터의 벗어나려는 탈식민주의적 노력이 이어졌지만, 오랜 식민지배로 인하여 독립국가로서 자생적 지도력을 상실한 면모를 현저히 드러내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군부나 특정 세력에 의한 독재적 억압통치가 이루어져 왔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비록 독립국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서구 제국들은 아시아 각국의 군부정치 세력을 통한 지배구조를 유지하였고, 자유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을 지향한 양대 정치 세력이 충돌하면서 각국은 오랜 내전의 고통에 시달렸다. 우리 한반도 역시 중국제국주의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고, 특히 20세기 초 일본제국주의에 강점되어 36년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나라는 두 동강이 났을 뿐 아니라 1950년부터 3년간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면서 분단 고착화의 비극을 겪었다. 아시아 이곳저곳에서는 아직도 미국과 구소련간의 냉전기류 속에서 형성된 양대 제국의 이념적 팽창주의가 부딪치는 이념의 전쟁터가 되었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여러 곳은 정치 군사적 긴장 속에 놓여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시아 도처에서 정치, 경제적 긴장과 대립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한반도의 남북대결, 중국과 대만의 정치적 긴장, 필리핀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캄보디아 및 베트남에서의 전쟁, 그리고 다양한 종족간의 갈등을 풀지 못하는 인도, 종교적 이유로 분단된 인도와 파키스탄간의 긴장, 거대해지는 중국의 제국주의적 야망과 최근 미얀마, 티벳 사태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니 종교적으로 긴장관계 속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현장이 아시아다.
아시아의 인권상황
아시아 46개국 중에서 1970년대 이후 비교적 기아에서 벗어나 민중의 삶의 질을 어느 정도 이루어 낸 나라들은 몇 되지 않는다. 일본과 호주, 싱가포르, 대만, 한국, 홍콩, 그리고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에 속하는 중동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아시아 민중의 다수는 절대빈곤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은 하루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연명하는 절대빈곤의 대중이다. 비록 아시아의 몇몇 개발도상 국가들이 성공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아시아 전체를 본다면 가난한 나라와 부유한 나라간의 빈부격차가 가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주축이 되어 전 세계를 시장화하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아시아는 생산적 경쟁자가 아니라 서구 제국들의 소모적 시장이 되어왔다. 아시아 각국에서는 소수의 특권층들만이 서구적 기준에 맞는 생활양식을 즐기는 한편 대다수의 민중은 절대빈곤과 영양실조에 방치되어 있다. 식민지배 구조 속에서 서구 국가의 대외정책에 의하여 비호를 받아 온 아시아 각국의 정치권력들은 자국민의 생존과 삶의 질 향상보다는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권력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따라서 극우파들이 정권을 잡은 지역에서 반군들은 좌파로 몰리고, 좌파들이 권력을 잡은 곳에서는 우파들이 반사회적 인물로 지목되어 억압을 받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시아 각국에서 민중들은 독점적 권력과 카르텔을 구성하고 있는 사법부와 군부 그리고 자본가들로 인하여 법정적 정의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회정의의 부재를 노골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아시아인권사무소에서 발간한 아시아 11개국에 대한 2007년 인권보고서에 의하면 대부분의 나라들은 우상화된 권력의 온상이며, 무수한 대중들의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권력은 권력집단을 위하여 존재할 뿐 대다수의 아시아 나라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도, 자유와 평등이념도 그리고 복지사회에 대한 희망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 대신 통치자들의 철권적 억압이 있다. 2006년 필리핀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는 이유로 무려 750명의 인권운동가들이 영장 없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 죽거나 살해당했다. 2006년 내가 필리핀 유니온 신학교 교정에서 만났던 나발타 목사(E. Navalta)는 당시 정부군에 의하여 반군지원자로 지목을 받고 피신 중이었다. 그가 섬기던 교회의 평신도 대표는 정부군에 끌려가 죽음을 당하고 그의 아들과 아내도 체포되어 어디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피신해 나와 필리핀 유니온 신학교의 Sanctuary 프로그램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군부 세력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고문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시아 도처에서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인식의 수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낮아 그 어디에서도 인권 보호를 요청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권력의 부당한 횡포에 저항하거나 비판하면 권력자에 의한 명예훼손 형사고소가 이루어져 합법적으로 구금, 고문을 겪는다. 이런 고소사건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고 2005년 인권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무수한 대중들의 고난과 고통에 연대하여 인권운동을 벌리는 이들을 향한 협박, 언어 및 물리적 폭력, 강제실종, 그리고 비사법적 살인 등이 저질러지고 있다. 인도의 경우 공권력에 의한 잔인한 비인도적인 고문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유엔인권위원회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고문의 방법으로는 주먹과 장화, 긴 대나무 지팡이, 나무 손잡이가 달린 가죽채찍, 쇄 혁대장식이 달린 가죽 혁대, 소총 개머리판을 이용한 구타, 팔목이나 발목이 묶인 후 매달린 채 구타,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몸 전체가 천장에 달린 채 구타, 손을 짓밟거나 망치로 치기, 전기충격 사용, 인두로 살 지지기, 펜치로 손톱 뽑기, 다리를 강제로 180도 벌려서 고통주기...“
아시아 각국에서 공권력에 의한 공포정치로 인한 인권침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인도적인 정황을 드러내고 있다. 아시아 각국에서는 정치폭력, 공권력 남용과 불처벌 특권, 원시적 수준의 사법제도, 정치적으로 동기화된 사법기관, 인권기관의 부재, 여성을 향한 심각한 수준의 폭력과 차별,그리고 재판 없는 임의적 살해 등이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폭력적 사회에서는 권력 오용이나 남용에 대한 비판자들이나 인권옹호 기관들이 살아남기 어렵다.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2005년 인권위원회 방화사건은 이러한 정황을 드러내 준다 할 것이다. 유럽에서 1940년대 홀로코스트가 있다면 대만에서는 1950년대 백색테러가 있었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는 1960년대 내전이, 한국에서는 1950년대의 한국동란 그리고 1980년 광주항쟁이 있었다.
아시아 신학의 컨텍스트
프리만 나일(Preman Niles)은 아시아 현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적 응답의 컨텍스트에 대하여 몇 가지 주요한 요소를 지적한 바 있다. 이 요소들은 복잡한 아시아적 상황을 그려주고 있다. 그것들은 ①종교 문화적 부활, ②인종차별과 압제에 대한 민중적 저항, ③ 마르크스주의의 도전, ④ 기술과학 발전의 압력, 그리고 ⑤ 독재정권과 자유의 제한이다. 서구 유럽의 문명사 속에서 성장해 온 기독교 사상이 아시아의 다차원적인 정황을 직면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기독교인 자체의 동일성과 더불어 문화적 상관성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즉 아시아적 상황에서 아시아 각 종교들과 기독교와의 상관성문제, 종교 정치적 억압과 차별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 기독교 선교와 더불어 지속되어 온 정치적 억압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도전에 대한 기독교적 응답, 서구사회의 발전 모델을 따른 개발이데올로기에 대한 아시아 기독교인들의 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랜 정치적 억압의 종식을 위한 투쟁에 관한 아시아 기독교 신앙의 응답과제 등이 직접적인 이슈가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 신학을 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거대한 아시아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신학적 해법을 내놓을 수 없었다. 따라서 지난 50년을 살펴보면 다층의 아시아 현실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응답들이 나타난 사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응답들은 대부분 신학자 자신이 처한 정황에 대한 실존적 응답의 양상을 보이고 있어서 전체 아시아의 해방신학적 흐름을 규명하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아시아 해방 신학을 논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신학 사상을 연구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유형별로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네델란드 캄펜대학의 큐스터 폴커(Kuester Volker)는 아시아 신학의 유형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었는 데, 하나는 아시아의 사회, 정치, 그리고 경제적 정황에 관심하는 아시아 해방신학이라 칭한다면 다른 하나는 대화의 신학을 주장하는 문화종교 신학이다. 전자가 가난과 억압을 신학적 주제로 삼고 민중고난의 역사를 인간의 존엄함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려 한다면 후자는 문화종교적 다원상황에서 문화적 가치를 재건함으로서 아시아인의 동일성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노력에 관심한다.
아시아 해방신학이 예수의 삶을 기독론의 핵심으로 읽는 반면 아시아 종교신학은 아시아적 종교성에서 신학적 유비를 찾는다. 이런 점에서 한편은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지향하고 있다면 다른 한 편은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을 지향한다. 아시아 해방신학은 아시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해방적 사역을 드러내는 데 반해 아시아 종교신학은 아시아 문화와 종교 속에 임재한 하나님을 증언하려는 관심을 보인다. 따라서 아시아 신학적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는 해방자로 드러나거나 하나님의 여러 모습 중 한 측면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문화와 종교 신학이 신학적 담론을 통하여 아시아적 가치를 회복하려는 것이었다면 결국 그것은 아시아의 가난과 고난의 깊은 원인이 되어 온 아시아 종교의 억압적 내면을 보지 못한 오류를 지닌다. 또한 아시아 해방신학이 종교 문화적 해석학적 지평 없이 아시아의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적 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였다면 그것은 아시아 종교가 지닌 해방의 역동성에 대한 진지한 이해 없이 이루어져 또 하나의 오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일련의 아시아 해방신학의 흐름을 통하여 아시아 종교와 해방 이라는 두 축이 아시아 신학 안에서 상호보완적인 해방의 지평을 형성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아시아 신학의 근본 성격이 서구 종교의 콘스탄틴적인 해석학적 지평으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아시아의 구체적인 현실, 즉 사회 정치 경제적 현실로부터 지극히 적은 자들과 연대와 구원을 나누는 신학적 과제를 명료하게 지시하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아시아 종교해방의 과제를 수행하는 신학과 아시아 종교해방이 아닌 콘스탄틴적, 혹은 서구적인 호전적 선교를 신학의 주된 과제로 이해하는 신학은 마땅히 대별되어야 할 것이다.
아시아 종교 해방신학
아시아 신학은 서구 세계와는 달리 기독교 문명이라는 공통된 문화적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양한 국가들이 모여 있는 유럽에서 기독교가 그리스 로마 문화권 안에서 형성된 법질서와 도덕론을 받아들여 기독교 세계를 구성하였던 사례에 비한다면 아시아는 너무나 다양한 종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기독교 세계와는 유리되어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이슬람, 회교, 유대교, 불교, 유교, 도교 등이 각 지역에서 주축이 되는 종교문화를 형성해 왔기 때문에서 아시아는 종교적으로 다원적인 세계이다. 이 종교 다원적인 세계에서 소수자인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인들과 공존하며 인간의 해방과 평화를 추구하는 일은 정치사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일일 뿐 아니라, 아시아 기독교인 개인의 자기 정체성을 규명하는 일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서구 기독교 신학이 어거스틴 이후 로마 문명권 안에서 절대 다수자의 종교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스스로를 세계의 구원 세력으로 신앙고백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아시아 신학은 아시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에 있어서 단일 종교문화권의 논리를 수용하기 어려웠다. 다원적인 종교들 속에서 소수자의 기독교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문화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대화와 상호 이해를 통한 평화를 위한 공동기여의 발판을 마련하거나, 유일무이한 기독론을 앞세워 정복주의적인 호전적 선교 운동을 벌이거나, 아니면 기독론적 해석지평을 넓혀 다원적인 그리스도론을 주창하거나,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초점을 흐리게 함으로써 하나님 중심의 다원적 종교론을 창안하는 방법 등이 있다.
첫째 방식이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의 대화방식이라면, 둘째 방식은 근본주의적 선교신학이고, 셋째 방식은 포괄적 그리스도론이며, 넷째 방식은 신중심적인 초점을 가지고 기독론의 상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각기 장점이 있는 반면 심각한 비판과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기독교 신학의 교리적 배타성이라는 그물에 걸릴 때 그 작동 능력을 잃고 만다. 더구나 이런 신학적 논의는 아시아의 가난과 고난의 관점에서 본다면 탁상공론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성서적, 계약사상적, 예언자적 전통의 빛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을 축으로 한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기독교 복음의 본래 동기를 회복시키지 않고 지배신학의 연장선상에서 종교 신학적인 대화와 타협과 화해의 신학은 실제적인 행동양식을 유발하지도 않을 뿐 더러 종교 전통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상대의 윤리적 약점과 문제들을 고의적으로 간과하는 에큐메니칼 거래 동기에 좌초될 수 있다. 서구에서 지배 종교가 된 기독교가 아시아의 종교성과 가난으로 육화할 수 있는 길을 찾을 때 비로소 아시아 해방신학은 선교 방식과 대화의 틀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 정치 경제적 원리들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종교대화의 신학은 신학의 바벨론적 포로를 “문화적 포로”로 이해한 흔적이 역력하고, 그 바벨론적 포로 상태가 주는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토착종교와 문화의 가치를 재해석함으로써 서구 신학적 개념을 새롭게 유도해 내거나 형성해 내는 데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 결과 콘스탄틴적 신학의 폭력성을 그대로 답습 모방하고, 기독교적 우월성과 승리주의에 버금가는 아시아적 가치를 사회 지배계층에 이식하는 작업을 결과했다. 이런 작업은 객관적인 사회과학적 데이타의 비교 없이 수행되어 매우 주관적인 복고주의를 초래하기도 했고, 서구와 동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본질론적인 대립의식을 초래하기도 했다.
송천성은 대만 타이난 신학대학의 학장을 역임하고 미국 신학대학에서 가르쳤기 때문에 대만의 보안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신학적 사색을 한 데 비하여 윤성범은 한국의 군부 독재의 감시의 그늘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학 사상을 전개함에 있어서 자유롭지 못한 점이 있다. 윤성범은 바르트 개혁신학의 그늘 안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한국 사회의 고난에 동참하며 정의와 혁명을 향한 강렬한 의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 송천성에게 있어서 아시아의 가난과 부정의, 그리고 착취에 관한 신학적 분석과 권력 비판이 한 편에 뚜렷이 자리 잡고 있다. 신학자의 사회적 분석내용은 그의 신학적 윤리학의 방향을 결과하므로 매우 중요하다.
"사실 오늘날 아시아에서는 무수하게 많은 민중들이 여전히 가난과 불의와 착취 상황에 처하게 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보다 나은 삶의 의욕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제도, 사회적 관습, 그리고 수세기에 걸쳐 종교적인 영성에 의해 길러진 문화적 가치들은 오늘의 인간 실존의 새로운 기반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아시아 문화와 종교가 남긴 오랜 관습과 가치들이 아시아의 빈곤과 차별, 억압과 고난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시아 토착신학자들은 토착문화의 긍정적인 요소들을 찾아 해석해 내는 과제를 수행하면서도 그 토착문화가 가진 억압성을 지적하는 일을 소홀히 하였다. 그들의 토착화 신학적 관심의 축이 일차적으로 아시아적 신학 형성과 그 변증에 있었지, 민중의 해방에 주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시아 땅에 창궐한 가난과 고난, 착취와 억압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나 분석이 결여되어 있다. 이에 비해 송천성은 아시아적 기독론을 축으로 하여 개혁신학적 비판의 관점을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서 고통과 고난의 종말을 내다보는 희망의 미래를 본다.
천민 연대의 신학
아시아 해방신학은 한국의 민중 신학이 그러했듯이 아시아 신학의 주류는 사회의 최하층민들과의 연대를 신학의 주제로 받아들였다. 인도의 니르말(Arvind P. Nirmal)의 달리(Dalit)신학, 구리바야시(Teruo Kuribayashi)의 일본의 천민(Burakumin)신학, 한국의 서남동과 안명무의 민중 신학 등은 그리스도론을 비신화함으로써 내재적 기독론에 이른다. 그리스도는 유일화적인 구원자가 아니라 사건으로 존재하며, 오늘의 민중, 천민, 달리들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증언들이 나왔다. 기독론의 탈신화화를 과감하게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가진 서구 신학에 대한 의심에 크게 기인하기 때문인데, 이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일회적인 교리화된 그리스도는 콘스탄틴 기독교가 지향한 지배세력의 도구가 되었고, 오히려 억압받고 있는 민중, 오클로스, 달리, 부라쿠민을 외면하는 정치 경제적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시아 해방 신학은 고난 받고 천대받아 온 이들 속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고백함으로써 천민과 민중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되찾고 그들의 인권을 회복시킨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주체(민중)들이며, 고난의 관을 쓴 그리스도(부라쿠민), 기존질서 유지적 기능을 해 오던 신학에 대한 개혁적 반신학 운동의 주체(달리)이기를 주장한다. 이 신학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론적 초점을 가지면서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해체한다. 그 대신 고난 받는 민중들 속에서 고난 받는 하나님, 그리스도의 현존을 고백한다. 콘스탄틴 기독교가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천민의 신학들이 아시아 해방신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데루오는 스스로 자신의 아버지가 백정출신이며 어머니가 기생출신이었으므로 백정과 기생사이에 태어난 자신이 겪는 다층의 차별 경험을 통하여 일본 사회의 천민인 부라쿠민의 경험을, 그리고 차별받고 있는 이들 중에서 한 단계 더 차별을 받는 여성천민의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가시관을 쓰신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예수의 ‘가시’를 통해서 스스로 고통을 당했을 뿐 아니라, 현대에서도 ‘가시’에 찔림을 당하는 무수한 무언의 사람들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의 끝날에 신앙인은 이러한 피차별민 안에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함께 ‘가시관’을 쓰고 있었는가 아닌가에 따라 심판받는다. 고통 받지 않은 자신을 방향 전환하여 고통 하는 자와 고통하고, 고통 하는 자의 투쟁에 참여하는 회심의 삶을 살아왔는가가 물어진다.”
천민연대의 신학은 아시아의 고난 속으로 육화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증언을 통하여 천민들의 가난과 고통이 곧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읽혀지고, 아시아 고난의 잿더미 위에서 하나님의 고난(つらさ)을 이해하게 했다. 이렇듯 아시아에서 하나님은 승리와 영광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 아니라 굶주리고 고난을 겪으며, 전쟁의 포화에 의하여 아픔을 겪는 이들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낮아지고, 고난을 겪으며, 버림을 받은 예수의 고난이 아시아인들의 고난에 겹쳐지고, 하나님의 고통이 울려나는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 신학들은 가난과 고난을 겪고 있는 아시아인들의 이웃이 되기위하여 영광의 그리스도론을 떠나 고난받는 그리스도론을 형성해 왔다. 아시아의 민중들의 고난과 가난을 그리스도론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피에리스의 아시아 종교해방신학
스리랑카의 예수회 사제인 피에리스(Aloysius Pieris)는 다른 아시아 신학자들과는 달리 가난과 고난의 문제를 독특하게 그의 신학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아시아의 가난과 해방의 문제를 논의한 메델린 회의(1968)와 푸에블라 회의(1980)의 의제들을 검토하면서 제 3세계 해방신학의 연장에서 아시아의 종교 해방신학을 제시했다. 그의 출발점은 기독교가 아시아 전체인구의 3%에 지나지 않는 소수무리로서 절대 다수의 다양한 종교인들과 더불어 아시아의 가난과 고난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데 있다. 그는 아시아의 가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제시된 바 서구 기독교의 자유주의적인 개발 이데올로기, 사회주의적인 혁명적 대안이 있지만 그 양자는 아시아의 가난의 영성을 거부하는 길이며, 맘모니즘에 아시아의 영성을 팔아넘기는 길이라고 보았다.
개발과 혁명이라는 두 대안은 필연적 귀결로서 아시아의 빈곤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아시아적 영성을 간과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이며, 또한 한 편은 맘모니즘의 노예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다른 한 편은 유물론적 세계관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대안은 가난의 영성을 통하여 맘모니즘과 싸워온 아시아인의 깊은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가난을 악으로 보는 막스주의적 견해는 종교성의 깊이를 아편으로 간주하였고, 서구 자본주의의 개발 이데올로기는 가난 속에서도 지켜온 아시아의 영성을 경멸하고 비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방법은 아시아의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해방의 지평을 열 수 없다고 피에리스는 생각한다.
성서적으로 본다면 경제적 가난은 비참함이며 저주이기도 하지만 복음적인 자발적 가난은 축복이기도 하다. 예수도 돈과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받았지만 그의 영성으로 그 유혹을 이겨냈다. 따라서 성서와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아시아 종교해방신학은 아시아인들의 종교성과 가난으로 육화되어야만 한다고 피에리스는 주장한다. 이 육화의 신학은 맘모니즘을 앞세우는 개발과 권력을 앞세우는 지배의 신학이 아니라 해방을 향한 육화와 겸비의 신학이다.
피에리스에 따르면 종교는 지배종교와 해방의 종교로 대별된다. 지배종교는 억압과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해방의 동기를 억압한다. 이 종교는 미신적인 가르침, 종교적 제의를 강조하고, 교조주의에 기반 하면서 타세계적인 초월적 구원을 설파한다. 반면 해방의 종교는 권력과 탐욕의 카르텔을 만들어내는 맘몬 숭배의 죄에 대한 예언자적 고발과 비판을 담고 있고, 죄의 구조를 변혁시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지배종교는 가난의 문제를 저주라고 규정하고 이를 맘모니즘의 확대과정을 통하여 해결하는 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해방의 종교는 강요된 가난은 인간의 존엄성을 항구적으로 침해하는 악이라고 규정하고, 맘몬숭배로부터 해방되는 자의적 가난에의 참여를 통하여 연대와 해방을 이루어 냄으로써 극복해 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개발을 통한 빈곤 퇴치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불러올 뿐 아니라 문화 전체를 맘모니즘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이며, 이런 문화는 결국 아시아의 고난 그리고 가난과 더불어 아시아인의 심성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가난의 영성을 외면하게 함으로써 아시아인의 종교적 실존을 소외시킨다. 그러므로 예언자적 운동을 결여하고 있는 지배종교는 아시아인의 종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결국 아시아의 정신과 영성을 파괴할 뿐 아니라 종국에는 아시아인들을 맘모니즘의 노예로 복속시킨다는 것이다.
연대와 참여의 신학
피에리스는 절대 다수가 불교적 심성을 가진 스리랑카인들의 종교적 심성은 그들의 사회적 공동성을 유지해 온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치 서구의 수도원주의와 방불한 승려/사회 공동체는 소유를 포기한 승려들이 소유를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소유를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데에서 연대와 참여와 공동성의 가치를 가르쳐 왔다고 분석한다. 한편에서 소유의 포기, 그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소유의 나눔을 통하여 공동성과 유대를 지키는 동시에 맘모니즘의 유혹을 이겨내고 삶의 공동성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피에리스는 바로 이런 맘모니즘 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아시아 종교해방의 지평을 여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아시아의 맥락에서는 ‘부’의 반의어는 ‘가난’이 아니라 소유 또는 인색이며, 바로 이것들이 부를 반종교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제일 관심사는 가난의 제거가 아니라 맘몬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정체가 잡히지 않는 어떤 세력, 각 사람 안에 또 인간들 사이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부를 반인간적, 반종교적, 압제적 사물로 만드는 세력이 맘몬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서구 역사 속에서 제국과 식민지배의 틈 속에서 오랜 동안 습득한 “지배종교”로서의 특질을 내세워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라 아시아의 깊은 영성에서 먼저 “배우는 종교”가 되기를 권한다. 이런 종교가 되려면 자발적 가난에로의 참여, 가난한 대중 속으로 육화하는 신학, 즉 아시아의 종교성과 가난의 세례를 받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지배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정체성을 버리고 예수의 종교로 돌아가는 길이다. 마치 예수처럼 스스로 낮아지고 자기를 버리고 비움으로써 자기를 찾은 것처럼 아시아적 영성은 스스로 비우는 자리에서 경험되고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광야의 예수가 부와 권력과 명망에로의 유혹에 정면으로 대결하였을 때 그는 그의 영성을 통하여 단호히 포기함(detachment)으로써 그것들로부터 해방을 얻었다는 사실을 피에리스는 중시한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의 영성은 아시아의 영성과 만날 수 있고, 특히 가난한 이들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영성이라는 특질을 가진다고 그는 생각한다. 이런 영성을 가질 때 비로소 억압적 권력과 탐욕의 카르텔을 형성하는 맘모니즘으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난다. 이 해방 없이는 아시아의 가난은 계속 강요된 가난, 아시아인의 인권을 항구적으로 해하는 가난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피에리스에게 있어서 가난의 반대는 부유함이 아니라, 소유욕이며 나누지 못하는 인색함이다. 소유에 집착하여 인색해지면 우리는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도 이룰 수 없는 까닭이다.
피에리스는 개발과 과학적 발전을 통하여 가난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논리는 아시아의 서행(徐行)적 진보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적 진보가 물적 확대와 팽창을 불러와 가난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자의적 가난에서 얻는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 문명은 끝없는 욕망충족과 향락주의에 의해 좌초되거나 전복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배가 아니라 연대와 참여, 나눔의 실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로부터 배우는 나눔의 영성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모든 강요된 가난을 낳는 맘모니즘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자의 종교해방신학
제 3세계의 특징은 가난과 억압에 있다. 3세계 지역은 대부분 서구 기독교의 식민지배지였다. 아프리카와 남미에서는 기독교의 성장과 팽창이 일어났지만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된 나라들은 필리핀과 한국이다. 필리핀은 가톨릭이 한국은 개신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피에리스의 아시아 해방 신학은 소수자인 기독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아시아의 종교와 고난을 직면하는 데에서 형성되었다. 이 신학은 아시아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아시아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영성의 깊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피에리스의 신학은 서구 기독교로부터의 탈식민화된 신학적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의 주류세력이었던 기독교가 그들의 막강한 제국주의적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이웃들을 향하여 요구했던 개종, 추방, 말살 정책은 아시아 기독교에 의하여 수용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피에리스는 아시아인들의 가난의 영성과 고난에로의 연대를 나누기 위하여 아시아 종교 속으로 육화할 수 있는 아시아 해방신학의 지평을 열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날 필리핀과 한국의 기독교는 기독교의 활성화와 더불어 기독교 선교의 팽창주의가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 졌고, 이웃 종교를 향하여 개종을 요구하는 선교운동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동일한 과제로 이해하고 있다. 서구의 부유한 나라들을 선망하며 가난을 수치로 이해해 온 가르침은 삼박자복음의 성령운동으로 민중들 속을 파고 들어가고 있기도 한 것이다. 피에리스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신학운동은 아시아 가난의 영성을 비하하고 맘모니즘의 노예가 되는 길이다.
아시아의 싱가포르, 대만, 한국과 같은 나라들은 1960년대 이후 권위주의 정권을 통한 개발독재를 통해 상대적으로 빈곤으로부터 탈출한 나라들이다. 그 결과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비기독교적 삶의 양식을 벗어버리고 서구적 생활패턴의 한 양식으로서 기독교를 수용한 큰 무리의 계층이 형성되었다. 개발도상국이 가졌던 빈부간의 경제적 갈등과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에서 민중을 주제로 한 신학은 편만한 민중의 한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성격을 가지지만 아시아 고유의 영성에 대한 이해를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민중의 실체화에 빠지기도 했고, 민중과 지배자의 계급성을 극복할 대안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피에리스의 종교 해방신학은 개발주의로 인하여 민중을 잃어버린 민중신학의 공허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민중 예찬에 머물다가 개발주의와 맘모니즘의 유혹에 빠진 민중 문제를 지적하지 못한 까닭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시아 대륙은 여전히 극심한 가난과 고난의 짐을 진 민중들의 땅으로 남아있다. 이런 현실에 더하여, 1990년 이후 불어오는 세계화 바람과 인도와 중국의 개발붐은 향후 10년을 전후하여 새로운 아시아의 면모를 불러올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볼 때 아시아를 덥쳐오는 거대한 맘모니즘과 개발주의의 힘과 맞서기에 피에리스의 종교해방신학은 이상적인 삶의 공동성의 지평을 제시하고 있지만, 사회 정체적 현실속에서는 매우 역부족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에서도 서구제국주의의 방법을 이어받은 적은 제국들이 형성되고 있고, 맘모니즘에 의한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민중예찬과 가난예찬의 방식으로 이 두터운 가난과 차별의 현실을 뚫고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하여 의문한다.
따라서 새로운 아시아 종교해방신학의 지평을 열어나가기 위하여 지난 400여년의 서구 제국들에 의한 식민 지배를 벗어내기 위한 오리엔탈리즘 비판이론과 탈식민 담론이 아시아 신학 담론 안에 적극 수용되어야 할 뿐 아니라, 제한된 지구자원을 지난 한 세기 동안 소모해온 서구의 소비문명에 대한 비판이 더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배와 성장이데올로기를 신학의 중심축에 받아들인 콘스탄틴 기독교에 대한 자성적 비판 없이 진행되는 신학담론은 식민지배를 통하여 풍요를 누려온 서구의 착취적 기독교 문화를 모델로 삼아 그 확장과 팽창을 하나님의 뜻으로 읽는 오류를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콘스탄틴 기독교가 가르쳐온 지배와 정복으로 이끌어가는 기독교 승리주의보다 콘스탄틴 기독교에 억눌려온 탈 교의적인 평화교회 전통과 신학을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전통은 피에리스의 종교해방신학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독교의 본유의 평화주의적 유산인 까닭이다.
나오는 말
이 글을 쓰면서 아시아 신학의 광범위한 내용을 좁은 지면에 담기에는 논자의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수한 아시아 신학자들 중에서 소수만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었다. 이런 까닭에 이 글은 아시아 극단의 가난과 다양한 차별과 억압의 현실을 다룬 신학을 축약하여 소개하는 것이라는 데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보다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전통신학의 지배와 차별 문화를 비판하고 서구 식민제국의 정치 경제적 회심을 요구하면서 정의의 영성을 통한 새로운 세계질서 이론을 제시한 발라수리야(Tissa Balasuriya)는 그의 지구 신학(Planetary Theology)에서 그동안 신학이 급진적 정의의 영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오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신학의 부재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정의의 영성을 상실한 신학이 문제이고, 정의의 영성의 부재가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인간다움을 지속적으로 훼손하는 강요된 가난과 억압 이야말로 하나님의 부재 증명과 같은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의의 영성이 결핍된 신학은 가난과 억압의 정황에 침묵하고 묵인해 온 차가움(apartheid)의 신학이다. 그러나 가난과 억압의 제거를 신학의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약속했던 메델린, 프에블라 회의가 결의한 신학적 방향은 따스함(compassion)의 신학을 의미한다. 아시아 종교해방신학이 한결같이 증언해 온 것은 강하고 능한 하나님이 아니라, 가난과 억압에 신음하고 있는 아시아 민중들과 더불어 고통하고, 가시관을 쓴 하나님은 동정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자기를 버리시는 하나님이시다. 이 아시아의 하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땅에 와서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한 하나님이시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제기한 초기 주제처럼 아시아 해방신학에서도 정설(orthodox)이 아니라 정행(正行, orthopraxis)에 더 강한 초점이 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시아 종교해방신학은 전통신학이 로마 제국주의의 뜰에서 키워온 교의적 체계도 버리고, 심지어 종교재판소에서 무수한 이단을 정죄하는 데 기준이 되었던 크레도도 넘어선다. 그것들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가난과 고난으로 신음하는 지극히 적은 자들의 이웃이 되기 위하여 콘스탄틴 기독교의 정설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이 길은 “이 세상에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주장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라 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가르친 예수의 말씀을 청종하는 길이다. 마태복음 25장, 예수의 마지막 설교에서 드러난 비밀은 지극히 적은 자를 차별 없이 섬기는 따스함의 신학이 옳다는 것이다. 아시아 종교해방신학은 맘모니즘에 정신을 팔지 않으면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이 길을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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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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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May 6, 2008
A Prolegomena for an Asian Christian Peace Ethic

아시아 기독교 평화윤리의 과제와 전망(초고)
“비폭력, 살생금지, 사회질서의 개혁을 주장했던 반항아 예수와 그의 신자임을 소리 높여 내세우면서 제국주의와 전쟁, 배금사상으로 치닫는 자들을 비교해 보면 기이하다. 산상수훈과 현대 유럽 및 미국의 기독교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 - 네루 -
1. 들어가는 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과 평화사상이 주축이 되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평화윤리는 4세기 어거스틴 이후 콘스탄틴 기독교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수정되었다. 권력 없는 이들의 평화론이 권력을 가진 이들의 평화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질문에 직면해야 했다. 주류 기독교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으려는 수도원 주의자들의 탈세계적 평화론이 대두되기도 했고, 종말론적인 폭력적 평화론이 대두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사의 주류는 영원한 하나님의 평화와 구분하여 지상의 평화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상대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기독교 공동체의 과제라고 이해한 현실주의적 타협론이 주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한결 같이 로마 제국의 그늘 아래에서 전체 인구가 기독교화 된 사회의 주류 세력이 가졌던 사회 정치적 배경 안에서 형성된 것 이어서 그 역사적 정황을 떠나면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서구 사회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평화 이론이 실질적인 전쟁행위를 독려한 측면이 있는가 하면, 동양 특히 극동 아시아에서는 영적 전쟁의 해석학이라는 좁은 통로 안에서 이 이론이 해소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사회, 정치, 종교적 정황이 바뀐 자리에서도 마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서구 기독교인들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정황과 관계없이 서구 기독교가 오래 지속시켜 왔던 평화론, 즉 콘스탄틴 기독교(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어 로마 제국의 평화를 기독교의 평화로 이해 한)의 평화론을 되뇌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이 글에서 논자는 콘스탄틴 평화론과 대별되는 예수의 평화론, 즉 성서의 계약법전과 예언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예수의 평화사상이 어떤 과정에서 로마제국의 평화와 동일시되었는지를 밝힐 것이다. 이어 지난 서구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과연 평화주의적인 종교였는지 검토한 후 군사적 폭력의 그늘 아래 형성된 콘스탄틴 평화론을 벗지 않고서는 참된 기독교 평화론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하려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기독교가 평화를 가르치려면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평화론이나 악어의 눈물과 같은 회심이 아니라, 콘스탄틴적 기독교가 쓰고 있는 이리의 탈을 벗는 패러다임적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는 귀결에 이르려 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먼저 우리가 기독교 평화론을 검증하려는 삶의 자리를 밝히기 위하여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고, 기독교 주류 세력들이 평화론을 구성해 온 콘스탄틴 기독교의 평화론의 본질을 규명한 후, 콘스탄틴 평화론에 빠진 기독교 사회윤리학적인 변증적 논리들을 검토하고, 아시아 특히 한반도 안에서 기독교가 추구해야 할 평화의 길을 탐색하는 데까지 논의하는 것을 이 글의 목적으로 한다.
2. 시작하는 질문들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논자의 관점과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즉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밝힐 수 있고,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과 관련된 주변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관심을 첨예화하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몇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1) 세계 인구 65%를 점하고 있는 아시아 대륙 46개 나라들 중에서 근 30%에 달하는 기독교 인구를 가진 나라는 오직 세 개 밖에 없다. 대한민국, 필리핀, 그리고 레바논이다. 아시아 대륙에서 기독교 인구는 전체 기독교 세력을 다 합해도 아시아 전체인구의 3%에 지나지 않는다. 97%의 아시아 인구는 이슬람, 회교, 불교, 도교, 유대교, 등 서구 기독교가 기독교 선교 초기에 경험하지 못했던 종교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의 질문은 “아시아에서 소수자의 종교인 기독교가 다수자인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함께 나눌 평화론이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될 것이다.
2) 아시아 대륙은 1492년 유럽인 콜럼부스가 미국에 도착한 이후 아프리카 남미와 더불어 해양 무역항로를 따라 확장과 팽창을 거듭해 온 서구 기독교 열강의 식민지배지였다. 서구 열강은 모두 신, 구교를 포함하여 기독교 국가들이었으며 18세기 이후 미국도 이러한 식민세력에 참여해 왔다. 아시아에서 소수의 나라들을 제외하고, 특히 티벳과 타일랜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서구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식민 지배를 겪었다. 오늘날 공간적 지배라는 정치적 의미에서의 식민지배는 청산되었지만 경제적 지배구조라는 새로운 신식민지배의 구조는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 있다. 식민지배의 주체는 제국이며, 식민지배인들의 신념은 효율적인 제국주의적 이익을 전제한 통치에 있다. 이들의 막강한 군대 뒤에는 언제나 영혼구원에 불타는 순진한 선교사들이 뒤 따르고 있었다.
“제국들은 - 물론 영국만이 아니라 -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인간의 정치, 사회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경험을 불러온다. 제국의 기원, 활동, 진화와 몰락을 연구하다보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항구적인 위계적 구조들과 인간 사회를 넘나드는 변화의 강압적 힘, 즉 정부의 형태로부터 부와 가난을 만들어내고 확산 시키거나, 더 깊게는 개인과 집단적 정체성이라는 미묘한 표현에 미치는 힘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제국은 이렇듯 모든 것을 지배하는 위계적 질서요 힘이다. 물론 서구의 역사 속에서 제국이 사용한 방법은 군사 폭력이었고, 서구의 위계적 질서를 강화시켜 준 것은 기독교 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교도들 앞에서 그들은 영적으로 선택된 민족이며, 그들의 우월성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선물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 식민지배자들이 사용한 평화이해를 우리도 건네받아 의심 없이 사용하는 것이 타당한가?” 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 질문을 바꾸어 본다면, “우리는 과연 서구 기독교인들과 동일한 식민주체로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될 것이다.
3) 서구 제국의 군대 열병식 앞에서 아시아인들이 겪었을 열등감과 박탈감이 없었다면 서구에 의한 오리엔탈리즘이나, 자발적 오리엔탈리스트들의 헌신적 기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포대를 앞세운 거대한 군대 조직을 전시하고 나열하는 것을 통하여 그들은 그들의 우월성을 드러냈고, 그 우월성을 전수받기 위한 친제국주의자들이 모여들었으며, 친제국주의자들은 앞 다투어 서구 제국과의 근친성을 통하여 국가 민족과 사회를 위한 기여에 참여한다고 믿었다. 서구의 화려한 군사문화는 수세기를 거쳐 겪어온 아시아의 가난과 고난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새로운 대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사영 백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보자.
“만일 할 수 있다면 군함 수백척과 정예군 五六만명을 얻어 대포와 무서운 무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말도 잘하고 사리에도 밝은 중국선비 三,四명을 데리고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요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종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에 생령을 구원하러 온 것이니 귀국에서 한 사람의 정교사를 용납하여 기꺼이 받아 들이신다면 우리는 이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도 없고 절대로 대포 한방이나 화살하나 쏘지 않고 티끌하나 풀 한 포기 건드리지 않을 뿐 아니라 영원한 우호 조약을 체결하고는 북치고 춤추며 떠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면 반듯이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으리니 왕께선 한사람을 받아들여 나라에 벌을 면하게 하시려는지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그 한사람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실는지 그 어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천주 성교는 충효와 자애를 가장 힘써 의무로 삼으니 온 나라가 봉행하면 실로 한국에 한없는 복이 올 것이요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왕께선 부디 의심치 마옵소서 라고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서양 여러나라가 참된 천주를 흠승하므로 오래 태평하고 길게 통치하는 결과를 동양 각국에 미치게 하리니 서양선교사를 용납하여 맞아 드리는 것은 매우 유익하며 결코 해 받는 것이 없음을 거듭 타이르면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고 두려워 감히 쫒지 아니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함에 척수와 군대의 인원수가 앞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은 숫자면 대단히 좋겠지만 힘이 모자란다면 배 수십 척에 군인 五六천명이라도 족할 것입니다.“
식민지배 세력에 의한 교묘한 수탈과 억압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기독교 세계는 정의와 평화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생략된 채 종교적 관심만이 농후하였다. 나는 이러한 선교 초기의 복음은 서구 기독교 역사의 다양성 속에서 교회유형으로 “선택되고,” 다시 한 번 더 선교적 목적을 위하여 단순화된 “생략된 복음” 이라고 생각한다. 즉 서구의 주류 기독교 역사는 콘스탄틴 제국의 종교를 선택하고, 교파주의적 종교로 자라오다가 외방선교를 위한 전략적 생략의 과정을 거쳐 지극히 “단순화된 복음”이 피선교지에 전래되었던 것이다. 이 단순화된 복음은 우리 나라의 경우 서구 기독교 1900년 역사를 담고 있었던 신학적 통찰이 아니라, 한 단면을 통하여 재구성된 19세기 미국 부흥운동의 산물이었다.
선교를 위하여 축약된 복음은 정치적 개입을 극소화하는 비정치화, 서구우월주의에 포장된 기독교 문화, 그리고 영혼구원의 메시지를 성서주의적 복음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축소된 복음의 전수자인 동시에 전도자가 될 수 있는가? 그 결과는 탈 세계적인 기독교 신앙의 제국주의적 선교가 될 것인데, 강력한 군대도 없이 이슬람, 회교, 불교국들을 향하여 서구 선교사들의 정복주의적 승리주의의 패턴을 이어갈 수 있는가? 사실상 이런 정복주의적 시도들은 서구 기독교 역사 안에서 멜히어 호프만(Mechior Hoffmann)이 이끌었던 초기 재세례파운동, 그리고 십자군 종교전쟁, 개혁교회의 퓨리탄 운동에서 그 오류가 번번히 지적되었던 역사적 기억을 남기고 있다.
4) 이런 우리들의 자화상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아시아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구 신학의 바벨론 포로“ 였다는 고백이 한국의 윤성범, 대만의 송천성, 그리고 인도의 엠엠 토마스(M.M. Thomas) 등을 비롯한 아시아 신학자들에게서 들려왔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서구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신론, 기독론, 구원론, 그리고 교회론이 아시아에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이유들이 논의되었다. 식민지배자들의 의식과 판단범주가 피식민지인의 가치판단을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결국 아시아 기독교인들은 서구 식민지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아시아 신학의 문제는 신학적 사유의 종속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학지 담고 있는 세계관과 이에 따르는 평화론이 더욱 심각한 폐해를 낳았다. 서구 자유주의 사상의 형성과정에서 이루어진 인권 개념이 19세기 사회주의 사조와 만나면서 개인에 근거한 자유주의 사상의 확대가 일어나 삶의 공동성과 사회성에 관한 권리와 책임이 논구되었지만, 신학 안에서는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냉전 논리가 고수되었고, 개혁사상에 고무되어 하나님의 주권을 서구 기독교 제국의 주권과 동일시하던 기독교 제국의 정복주의가 “기독교 승리주의”로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시아 기독교는 냉전 기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수인에 의한 신앙적(맹목적)승리주의가 예찬을 받고 있다.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묵시적 대립을 고취해온 자본주의 사상으로 각색된 근본주의 신앙이 과연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 미얀마, 캄보디아, 필리핀, 일본, 대만, 방글라데시 근동아시아 지역에 기독교 평화사상의 열매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5) 1960년대 박정희 군사개발독재 20년은 가족가치를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우리 사회의 교육열과 만나면서 경제 성장의 동력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언제라도 전쟁이 일어날 듯 한 휴전상태에서 냉전의 기류가 흐르고, 국가안보를 내세운 독재정권에 의한 민중들의 인권이 억압받았다. 이 시기에 급성장한 한국 교회의 평화론은 6.25 동란의 어두운 기억을 배경으로 반공주의적으로 정치화된 복음화를 통한 평화론으로서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승만 정권 이후 군사독재 정권은 반공주의를 국시로 내세움으로써 민족 통일의 목표를 무력통일이라는 원칙을 고수하면서 미국 힘과 군대를 의지하면서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 왔다.
이런 현실을 배경으로 한국 교회 안에는 서구 식민주의적 선교 정책에 깊이 영향을 받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승리주의의 열기가 높아 영광의 신학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반면 지난 40년 동안 아시아 신학 전반에 나타나는 신학적 주제는 아시아의 고난과 가난, 그리고 가시관을 쓰신 하나님, 고난의 그리스도, 영광없는 십자가의 신학이었다. 특히 아시아 문화 속에서 천대받아온 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읽는 한국의 민중신학, 인도의 달리(dalit)신학, 일본의 브라쿠민(部落民) 신학, 대만의 송천성의 제 3의 눈의 신학(The Third Eye Theology)은 서구적 삶의 모델을 통항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선포하는 신학은 더 이상 사회 정치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구신학이 지니고 있는 제국성과 그것의 승리주의를 우리 신앙의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런 승리주의를 표방해 온 서구 기독교의 평화론의 본질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기독교 주류의 평화론: 불가능한 이상
초기 기독교는 당시의 유대주의 종교적 전통 안에서 새롭게 부상한 종교운동이었다. 이 초기 기독교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알려진 예수의 행태와 어록에 충실한 제자직의 윤리를 가진 신도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당시 신학적 교리나 교회의 체계가 온전히 갖추어지지 않았으므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초기 기독교의 평화사상의 근본 성격을 규정하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성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 내용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포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의 평화사상은 결국 주변 환경세계를 바라보는 사람의 사유와 실천에 있어서, 예배와 삶을 깊이 마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기독교 전통은 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평화윤리를 외면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많은 이들이 예수를 새롭게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수의 평화사상을 새롭게 조명한 윤리학자는 죤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책
세계관적 평화 이해에 있어서 메노나이트 전통을 따르는 요더는 평화의 근본적인 조건을 일러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해명함에 있어서 그 세계관적 이해가 평화스러운 것인가 아니면 착취적이고 공격적인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는 1992년 미국 위스칸신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한 개인이나 공동체를 감싸는 특별한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는 세계관을 축으로 환경적 가치를 이해하는 차원이 있고, 현실 세계의 존속가능성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불의의 제거를 위한 노력에서 환경문제를 바라보는 차원이 있지만, 요더 자신은 가치를 담지하고 있는 교회론적인 측면에서 땅과의 관계성의 빛에서 환경문제를 바라본다는 그의 독특한 입장을 밝혔다.
이 글에서 요더는 일단 기독교가 부정적 보편주의를 선택한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즉 기독교가 공인된 콘스탄틴 대제(AD 313) 이후 기독교는 진리를 주장함에 있어서 로마 제국을 설득할 수 있는 공적인 증언에 점점 더 의존하기 시작했다는 데에서 기독교 평화론의 이탈이 시작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이 상황은 기독교가 주류 종교가 되기 위하여 기독교의 내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스스로 져버리고, 세상의 보편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길, 즉 효율성의 논리를 기독교의 내적 가치보다 중시하는 데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는 콘스탄틴 대제이후 권력의 비호를 받게 된 기독교는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부정적 보편주의를 선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 신앙 공동체의 내적 가치를 있는 그대로 증언하면, 로마 제국의 논리와 어긋나고, 결국 세상이 경청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결국 대중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하여 교회가 로마 제국주의적 제 가치와 타협해 온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견해다. 이러한 타협적 태도는 트뢸치가 해명했던 바 전형적인 교회유형(church type)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교회란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고, 어느 정도 세속적인 질서들을 수용하며, 대중을 지배하기도 하고, 원칙적으로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다. 즉, 교회는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관여하려고 한다.”
부정적 보편주의를 선택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은 트뢸치의 주장대로 대중을 얻기 위하여 기독교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희생시킨 타협주의자들이다. 요더는 이와 같은 사실을 지적하면서 교회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가치는 부정적 보편성을 위하여 희생시킬 것이 아니라, 기독교 본유의 존재가치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므로 결코 타협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소종파적 입장을 지지한다. 따라서 요더는 종교가 역사 속에서 발전해 왔다는 헤겔적인 이해를 거부하고,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한 공동체성을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소종파적 신앙은 비교적 소수의 그룹들이며, 개인의 내적인 완전을 추구하고, 각 신앙 공동체간에 직접적인 인격적 사귐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이들은 소규모의 그룹을 형성하게 되어있고 세상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버린 이들이다.”
결국 요더는 기독교 진리의 보편적 실천 가능성과 타협해 온 교회유형과 기독교 진리의 특수성을 고수해온 소종파적 입장에서 기독교의 고유성을 보존 유지하는 편을 더욱 본질적인 기독교성에 가깝다고 본 것이다. 교회 유형의 신앙은 보편성을 강조해 온 철학적 윤리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와 타자들이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적 공리를 주장한 임마누엘 칸트의 보편성의 격률(axiom of universality)를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평등의 원칙과 수평적인 호혜성의 원칙이 존중되는 이 보편성의 원리는 요더에게 있어서 그리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그런 입장은 교회의 내적 가치를 일반화시킴으로써 세속적 타협을 불러오는 윤리적 노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다른 이들이 동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리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지복주의적인 보편타당한 욕구에 승복하는 것이지 결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원칙은 아니라고 보는 까닭이다.
제도적 삶, 인간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삶의 성취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보편적인 원칙을 따를 경우, 죄에 대한 승인이 일어나고, 타세계적인 구원론을 결과한다는 점에서 요도는 기독교 윤리의 주요 논제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제도적 삶이란 죄인들을 어거하는 억제책으로서 정당화되고, 인간은 죄의 경향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통제와 억압과 지배의 대상으로 타자화되어 통치자와 신민이 구별, 차별 받게 되고, 인간의 성취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매우 비관적인 것이 되어 평화는 현재의 평화가 아니라 미래의 평화로, 실질적인 구체적 평화가 아니라 관념적인 평화로, 공동성을 지닌 평화가 아니라 억압적인 평화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안에서는 근본적인 혁명과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궁극적인 구원은 사후에나 얻는 것이며, 영원한 복락이란 사후의 세계에서 성취된다는 견해가 지배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상과 같은 분석에 의하면 결국 기독교 윤리학의 주류는 “어떻게 예수의 평화윤리를 실천할 것이냐?” 라는 물음보다 “왜 예수의 평화윤리를 따라 살 수 없는가”를 변명해 온 역사적 증거다. 이런 변명의 역사는 사실상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제국의 종교가 되기로 자처한 데에 그 소이가 있다. 즉 거대한 제국의 권력을 이용하며 스스로를 강화시켜온 기독교는 이제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평화주의의 길을 사실상 포기하거나 배반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갈래 길을 만난다. 기독교가 걸어 온 제국주의의 종교적 전통이라는 넓은 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평화사상을 따라 좁은 길을 걸을 것인가? 이 둘 중의 하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4. 성서와 예수의 평화사상
성서가 담고 있는 평화사상은 예수의 평화사상에 수렴되어 있다. 요더는 구약성서의 원역사(Urgeschichte)에 담긴 고대 야훼신앙의 속성을 일러 자연과 인간사이의 친화성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 신앙이었다고 주장한다. 원창조 이야기가 밝히는 바는 인간이란 자연의 산물이다. 즉 인간(아담)은 아다마(흙)에서 나오고, 흙에서 나온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로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인간화가 깨진 현실을 밝히 드러내는 사건이 바로 카인에 의한 아벨 살해 사건이다. 아벨의 제사는 땅을 파 헤치는 것이 아니었지만, 카인의 삶은 자연을 이용하기 위하여 기구를 만들고, 이를 이용하여 땅을 파헤치고 착취하는 테크놀로지와 정복의 패턴을 담고 있는 것으로 유비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을 받은 것은 그의 삶이 평화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며, 카인의 제사를 수납하지 않은 것은 카인이 폭력적이며, 착취적인 삶을 살아 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벨은 자연과의 평화를 누리는 사람이었고, 자연에 의존된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카인은 자연을 정복과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그의 삶은 땅을 해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연과의 관계 상실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땅을 훼손하고 파헤치며 살아 온 카인의 제사는 수납하지 않고, 자연에 의존하여 생존의 조건을 찾는 아벨의 제사를 더욱 평화스러운 것으로 간주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주의적 삶의 태도를 더욱 높이 평가하였다는 의미로 요더는 받아들인다. 그 결과 카인의 해함과 정복의 논리는 자연과 인간, 즉 자신의 아우까지도 대상화함으로써 마침내 땅을 파헤치고, 동생의 생명을 해하는 폭력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이렇듯 히브리적 사유의 특징은 주객미분의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에 기초해 있었지만, 동일성의 논리는 분리와 타자화를 거쳐 정복과 착취문화를 발전시키고 급기야는 폭력을 동원한 전쟁과 죽음을 불러오는 힘의 제전을 벌린 대가로 풍요를 누리는 도시문명을 형성한 것이라고 요더는 생각한다. 그는 성서가 지니고 있는 정신은 대단히 반문화적인,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결국 성서와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인간들이 영위해온 정치는, 지배논리를 강화 하고, 경제는 착취와 차별의 논리를 뒷받침하여 소수자의 특권을 옹호하는 차별적 관계를 용인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보복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국가권력이 출현하고, 문명의 상징인 도시가 세워지며, 철기문화를 축으로 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나아가 보복적 행위를 승인하는 전쟁행위를 용인하는 논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카인의 삶은 바로 이런 권력과 보복과 가술문명의 효용성을 받아들이는 문화적 대표성을 가진다. 이런 점에서 자연의 비신성화를 넘어서서 자연을 도구화하는 문명이 전개되고,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었으며, 그 결과 인간과 자연간의 평화가 깨진 생태계의 위협을 초래하게 된 것이라고 요더는 지적했다. 결국 요더는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죄의 뿌리는 에덴의 타락이 아니라 바로 이런 세계관적 이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의 타자화는 동류 인간의 타자화로 이어지고, 타자화는 차별과 배제, 착취와 정복 문화를 정당화하며, 착취와 정복의 문화는 종국적으로 적자생존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논리를 결과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서가 담고 있는 유대인들의 배타적 민족주의와 선민의식, 그리고 거룩한 전쟁에 관한 언급들과 지상에서의 부귀와 오랜 수명을 누리는 현실지복의 윤리는 사실상 예수에 의하여 수정되었다. 예수는 편협한 유대민족주의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보복의 윤리가 아닌 사랑의 윤리를 설교했으며, 땅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나그네처럼 이 땅을 살아가는 제자직을 가르쳤다. 그는 이 땅에 궁극성을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며 살아야 할 원칙들을 가르쳤다. 사랑과 평화 사상이다.
사랑과 평화가 가장 궁극적인 가치를 가지는 예수의 사상에서 우리는 폭력과 전쟁을 예찬하고, 미움과 정복과 착취의 문화를 옹호하려는 뜻을 추호라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상은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것이며, 지상에 터를 잡고 영화를 누리려는 동기를 상대화하는 하나님 나라에 기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예수의 윤리는 소종파 신앙인들에게는 새로운 법으로 이해되었지만 제국주의적 야망을 가까이 하기로 작정한 콘스탄틴 기독교는 예수의 윤리를 그대로 계승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은 불가능한 이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트뢸치는 콘스탄틴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교회 유형은 소위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효용성이 높은 길”을 골라 걷는 데에서 기독교 신앙의 연관성(relevance)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교회 유형의 신앙은 세상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윤리를 신학적으로 합리화하는 대신 예수의 가르침을 일정부분 침묵시키거나 외면하게 되었다. 신앙의 본질(authenticity)보다 효율성(efficacy)가 더욱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 구성원들이 지니고 있었던 소수자의 내적 가치는 교회 유형의 신앙에서 약화되었고, 그 대신 로마 제국의 사회 윤리적 논리와 가치가 교회 안에서 유입되었으며, 이를 옹호하고 합리화 하는 제도권 신학자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소수자의 내적 확신에서 이어지던 가치들이 담고 있었던 진리에 대한 이해는 결국 대중적 진리운동으로 바뀌고 이와 동시에 제국의 종교가 만들어내는 공식적인 교리로 체계화 되었던 것이다.
5. 변질된 기독교 평화론: 전쟁 지지론
콘스탄틴 대제 이후 제국의 종교로 기독교를 탈바꿈시킨 신학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어거스틴이다. 그는 악과 죄가 관영하는 지상에서는 결코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는 평화를 이중적 구조로 나누어 하나님 도성(civitas dei)의 평화와 지상의 도시(civitas terrena)의 평화로 나누고, 하나님의 도성이 지향하는 평화를 궁극적이며 영원한 것으로서 하나님에 의하여 성취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한편, 신자의 내면적 영성세계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반면 세속적인 평화는 악을 제어하는 힘에 의한 평화로서 상대적인 평화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중적 섭리에 의하여 영적인 평화와 세속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의 평화사상이 이중적 구조로 분리된 것이다.
“평화는 이 썩어질 것들이 썩지 아니할 것이 될 때까지 오지 않을 것이지만, 오직 구원을 받은 이들을 위해서 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지옥이란 해소되지 않은 갈등들이 편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평화는 하늘에 있다. 거기에는 배고픔이나 목마름이 없고 원수들의 훼방도 없는 곳이다. 그리하여 어거스틴 윤리의 내면화는 외면적인 폭력을 정당화해 주었다 왜냐하면 옳고 그름이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 자세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이후 제국의 종교를 자처한 기독교는 한편으로 예수의 역사적 증언과 하나님 나라 운동을 재해석함으로써 그 급진성을 희석시키고, 경전과 교리를 앞세운 신앙의 대상에 대한 신앙운동에서 정체성을 찾았다. 이 신앙운동은 세속과 거룩의 영역을 나누고, 거룩의 영역에서 기독교의 권위를 보전하는 길을 열었다. 세속은 원죄로 오염된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간이지만 교회는 거룩의 영역으로 이 세상을 초월하는 신비와 초월의 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와 동시에 세속은 거룩의 영역을 보호하는 현실적 힘이었고, 교회는 세속의 지배자들의 행위와 존재를 신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었다. 소위 왕권신수설과 정당전쟁론이 그것이다. 왕권신수설은 교회의 영적 권위 아래 세속 권력을 종속시키면서 동시에 지상의 지배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옹호했고, 정당전쟁론은 세속권력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온갖 전쟁행위를 교회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가 옹호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전쟁 이었다.
이 전통은 중세기를 지나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까지 파고들었다. 마틴 루터는 후에 두 왕국설(Zweireichelehre)로 이름 지어진 두 가지 권위를 긍정했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오른손 역할을 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왼손 역할을 하는 세속관헌(Obrigkeit)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 하지만, 세속 관헌은 창과 칼을 동원하여 악한 자를 재갈 먹이는 기능을 하는 소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루터는 “군인들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그는 이웃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행위를 하며 적을 살상하는 데 참여한 군인들은 자신들의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공적 소명을 다한 것이므로 구원받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리하여 교회의 영역에서는 기독교적 평화의 원칙이, 사회 공동체에서는 세속적 평화 원칙이 적용되었다.
이런 루터의 가르침은 독일 기독교인들에게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공인으로서의 냉철성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관료(bureaucracy) 사상을 낳았다. 종교적으로 위임된 공직을 수행하는 관료(Amttraeger)사상은 공직자로서의 엄정성과 더불어 잔인성을 동반하였다. 사정감정을 지극히 제한하는 공직 수행자의 역할을 수용한 기독교는 정의의 집행자로서 공적 살인인 사형과 전쟁에서의 살상행위를 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이 사상은 후에 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가지는 기독교도들에 의한 이교도 징벌과 처형을 영적으로 정당화하는 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치 신학적 가르침은 퓨리탄 전통을 낳은 칼빈주의적 개혁교회에서 더욱 철저히 나타나는 데, 다만 칼빈의 경우 신정론(theocracy)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함으로써 세속정권의 타락 가능성을 고려하여 저항권을 적극적으로 승인한 점이 두드러진다. 종교적으로 현실적 악은 결국 종교적인 악으로 규정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사탄이나 악마적인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인정과 배려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잔인성이 동반되곤 했다. 이런 영적인 관료의식은 간혹 교회 정치나 세속 정치가들에 의하여 정적을 음해하고 처단하는 데 오용되기도 했다.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형성된 두 도성설은 기독교 복음을 담지한 신앙공동체와 정의를 집행해야 하는 세속정권의 본질이 윤리적으로 동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신학적 이중성은 현대신학에까지 이어져 칼 바르트는 시민사회와 기독교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이를 규명하였다.
결국 이런 논의 속에 담겨있는 이중구조가 지시하는 바는 기독교 공동체가 평화를 논의할 경우, 교회내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서서 교회 외적 현실에 대한 책임의 윤리를 전개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기독교 주류의 담론을 구성해온 신학적 입장은 기독교회를 이해함에 있어서 교회 공동체의 내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세상과의 관련성을 항상 고려하려는 입장을 가졌고, 이러한 관련성을 형성함에 있어서 교회의 내적 정체성을 약화시키는 대신 보편적 지배와 승인의 구조를 획득하기 위하여 일종의 대중 선교를 위한 타협적 태도를 수긍해 온 것이다. 즉 엄격한 성서적 원칙을 적용하기보다는 성서가 함축하는 사랑의 과제에 대한 해석학적 지평을 자의적으로 열어 간 흔적이 역력하다.
그리하여 완전한 평화에 대한 희구는 종말론적 지평 너머로 밀려가고, 현실세계 속에서 평화를 찾는 일은 결국 악의 제거라는 현실주의적인 과제로 남게 되었다. 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의로운 폭력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폭력을 의로운 폭력으로 승인하는 정당전쟁 이론(just war theory)을 만들어 오늘날까지 주류 교회들은 이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후원해 온 것이다. 이 이론은 로마 제국주의를 종교적으로 후견하였고, 16세기부터는 서구 제국주의의 아시아,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3세기 암브로우스에서 시작하여 어거스틴이 기초를 놓고 아퀴나스가 완성한 정당전쟁론의 제 조건을 충복시킬 수 있는 주체는 사실상 바로 로마제국, 즉 승리의 확신과 더불어 상대가 자신보다 더 악하다고 보는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당전쟁이론과 더불어 서구 기독교 문명에 대한 우월성이 덧 붙여져 정당전쟁론은 성전론(Crusade)로 발전되어 무수한 전쟁을 불러왔다. 전쟁을 선포한 강자는 언제나 전쟁의 이유를 상대에서 찾았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 상대를 악마화 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독교 문명권 안에서 일어난 전쟁은 전쟁에서 승리한 편에서 한결 같이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6. 제국주의와 콘스탄틴 기독교
트뢸치가 초대 교회가 콘스탄틴 대제시기를 지나며 세속화되고, 교회의 생존을 위하여 타협의 길을 걸어 문명화된 윤리(civilizational ethic)를 형성했다고 지적한 것은 옳지만, 그런 방식을 통하여 세계를 향한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다는 효용성의 논리의 정당화는 바른 평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효용성의 윤리는 제국주의적 확장과 팽창, 지배와 착취를 통한 부유함의 효용성만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 반대 편에 속한 이들, 강자의 시장이 되고, 강자를 위하여 쳔연자원을 공급해주고, 강자에 의하여 지배를 받아온 식민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 효용성은 식민자의 것이었지, 피식민지인들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연 지배와 정복 문화 안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종교의 효용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이 예수의 평화윤리의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었을까?
나는 여기서 예수의 평화주의가 증발해 버렸다는 사실을 간과한 트뢸치의 오류를 지적하고 싶다. 그에게 있어서 초대 기독교가 지향했던 바 기독교 평화 윤리를 상실하고 제국의 종교로 변신한 어거스틴 이후의 콘스탄틴 기독교 사상은 심각하게 예수의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거나, 일면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잘못 들어선 길에서 기독교는 예수의 윤리를 잃어버린 채 제국의 종교가 되어 예수 사상과 관련 없는 지배적 폭력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담해 왔다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설령 합리적 사유를 근간으로 하는 트뢸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의 윤리는 원래 종교적으로 순수한(pure) 것으로서 현실 적용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으나, 현실 세계의 문제들과 조우하면서 자기 조정의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예수의 평화윤리를 상실한 콘스탄틴 기독교의 평화론은 그 조정 과정에서 사라지고 로마의 평화로 대치되고 말았다고 우리는 판단 할 수밖에 없다.
콘스탄틴 기독교는 기독교 신앙의 일치를 강조하다 못해 그 일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박해와 살육을 일삼았다. 그 대상은 유대인, 이슬람 교도, 터키인, 그리고 타종교인 들이었다. 기독교가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 시대를 맞아 점점 굳어진 교리체계를 형성하면서 권력화 되어 갈 때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과 겹치면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종족으로 규정되었고,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뿌리 깊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런 증오의 역사는 계몽주의 이후 유럽의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이어졌고 마침내 20세기 중반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종족 말살의 대상이 된 유대인들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기억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남겼다.
내가 2002년 독일 베를린 근교 유대인 집단 수용과 학살이 이루어졌던 집단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그 섬짓함은 미국 워싱톤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 보다 현실적인, 캄캄한, 길고 긴 절망의 역사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지난 2008년 2월에는 미국 휴스톤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찾아가 보았는데, 거기서 나는 홀로코스트야말로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홀로코스트는 단순히 나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기독교 문명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매카피 브라운(Robert McAfee Brown)은 이 고뇌의 정황을 일러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과 아우슈비츠 “그 중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고립된 개체로 각기 다룰 수는 있었지만 - 즉 아우슈비츠가 있다면 하나님은 없어야 옳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아우슈비츠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하나님, 하나님과 아우슈비츠를 동시에 직면해야 했다.”
홀로코스트 이후 악의 현실과 공존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되었다. 선하신 하나님과 너무나 깊은 악의 현실이 공존할 수 없다고 믿어온 사람들은 이 질문을 회피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에 빠지곤 했다. 1945년 이후 홀로코스트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나치즘의 사상적 책임을 기독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고 지목했다. 돌이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은 유럽전반에서 박해를 받아왔다. 가톨릭교회에서 자란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증오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태도에 크게 기인하였고, 특히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가한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한 책임을 후손들에게까지 묻는 데에서 증폭되었다.
1543년에 출판한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이라는 논문에서 마틴 루터는 카톨릭 교회와의 프로테스탄트간의 대립과 갈등 사이에서 예수를 구원자로 믿기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지목하여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규정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일러 사악한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므로 독일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며 그들의 회당은 모두 불에 태워져야 하고, 모든 유대인들의 책들은 압수되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종교적 관용이나 인간적인 배려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을 가지고 루터는 유대인들의 종족적 말살을 요구하며 그들을 일종의 종말론적인 복음의 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점철된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의 나치즘에서 가장 극악한 형태로 실천되기에 이른 셈이다. 콘스탄틴 기독교가 비 기독교도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개종, 추방 아니면 말살정책이었다. 이렇듯 로마제국 속에서 강고함을 자랑하던 콘스탄틴 기독교는 예수의 평화윤리를 철저히 배반해 왔다.
7. 예수 평화 윤리가 거부된 이유
요더는 예수 윤리에 대한 왜곡이 왜 그리고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그의 책 <예수의 정치: The Politics of Jesus>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는 메시야적 윤리(Messianic ethic)가 예수 윤리사상의 핵심이라고 보고 그 밖의 윤리적 이해구조들은 인간의 합리적 실천능력을 염두에 두고 그것에 의하여 여과된 타협주의적인 결과들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기독교 신앙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내용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단순하게 말해서 그런 윤리체계를 앞세운 가르침에는 예수가 더 이상 기독교 윤리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비록 기독교 윤리를 표방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주류 기독교가 가르치고 있는 윤리는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을 삭제하거나 심지어 예수를 부담스러워하며 도외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더는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기독교 주류의 윤리학적 전제들을 분석한다. 예수를 윤리학의 핵심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기독교 윤리학을 구성하게 된 요인은 세속적인 가치들과 융합하며 예수를 모방하는 제자직의 윤리를 거부하는 입장을 택했기 때문인데 그런 논의를 정당화한 데에는 예수가 사회 윤리적인 제 문제에 대하여 직접적인 가이드를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즉 예수에게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복잡한 세계안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정치 경제 사회 윤리가 결여되어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이러한 입장은 여러 가지 기독교 윤리학적인 경향을 불러왔다. 첫째, 예수의 윤리가 특정한 시대적 의미에서 잠정적(interim) 윤리적 관점에서 그의 가르침을 전개 했다는 견해가 있다. 예수가 지녔던 세계관은 그 당시의 세계가 곧 종말을 맞아 지나가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어서 종말론적인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구체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다만 그가 삶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들은 곧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기위한 태도를 촉구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 즉 폭력 사용의 거절, 자기 방어 금지, 안전을 위한 부의 축적, 거주할 곳 없는 예언자적인 삶에 대한 가르침은 일상의 규범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이를 역사적 책임의 윤리로 적용하거나 응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종말론적인 기대”를 따라 살아야 하는 종말론적인 삶에는 적용할 수 있지만 종말이 아닌“지속하는 역사”안에서 미래를 배려하고 준비하며 살아야 하는 삶에는 적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예수의 종말에 대한 예언과 기대는 그의 기대와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종말론적인 윤리는 역사 책임의 윤리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낳게 되었다. 이런 방향으로 작업을 수행한 사람은 기독교 현실주의의 초기 사상가라 할 수 있는 어거스틴이었고, 이어 아퀴나스와 루터, 칼빈, 라인홀드 니버 등이 모두 이런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반제국주의적인 평화적 가르침은 많은 부분 포기하거나 내면화하고, 외면적으로는 전쟁의 윤리와 폭력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이용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어거스틴은 합법적인 권위를 가진 왕들이나 백작들은 전쟁을 선언할 수 있지만 실제로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과제는 병사들의 의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이유를 가지고 그리고 누구의 권위 아래 전쟁을 벌이느냐라는 질문은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 인간의 평화를 위하여 기획된 자연의 질서는 전쟁을 벌이고, 계획하는 권위를 국가의 수반에게 부여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평화와 모든 신민들을 위하여 이미 결정된 전쟁을 수행하는 의무를 져야 한다.”
둘째, 요더는 프란시스칸 수도사들과 톨스토이 같은 사람은 예수를 단순한 시골출신의 인물로 생각하고 예수의 윤리를 포기의 윤리(ethics of renunciation)로 해석하였다고 보았다. 예수는 들의 백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자라는 씨앗에 대한 비유를 들며, 농부와 추방당한 문둥이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 그는 주로 개인적인 관심사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윤리의 차원은 서로가 안면을 잘 알고 있는 조그만 특수한 인격적인 사회인 시골에서 적용할 일이지, 대도시나 국가 기관 같은 그런 영역에서는 적용할 수 없는 규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인격적인 관계구조 안에서는 적용 가능하나, 비인격적인 관계를 상정하는 더 넓은 사회구조 안에서는 적용이 불가능하다는 예수 윤리의 사회윤리학적 적용의 한계를 주장하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예수는 사회, 정치, 경제적 요인들에 대한 단순한 가르침을 주었을 뿐 오늘의 현대적인 삶의 복잡한 현실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예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는 삶은 복잡한 제도적 삶의 구조를 부정하거나 벗어나서 단순한 삶으로의 복귀에 그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다. 단순한 삶의 비결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가르쳐진 내용들 중 하나다. 이런 삶은 수도적인 삶을 살아간 수도원주의의 원형이었고, 사제들의 삶에 적용되기도 하였다. 프랑스 남부 리용의 테제(Taize) 공동체나 퀘이커들을 비롯한 소종파 공동체들은 지배와 착취문화를 거절하고 공동적 삶을 제자직의 윤리로 받아들여 묵상과 명상 그리고 노동을 비롯하여 단순하고 청빈한 영성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테제 수사 로져의 글에 단순함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이렇게 담겨있다.
" 공동체로서 우리의 소명은 기부를 받거나 유산이나 선물을 받는 것도 아니라 우리가 오직 우리들의 노동을 통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자신을 위하여 자금을 가지고 지키거나 가난하게 될 가능성을 두려움하지도 않는 담대함이야말로 셈할 수 없는 강함의 원천입니다. 청빈의 영성이란 극빈을 추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그리면서 모든 것을 질서정연하게 하는 것이지요. 단순함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셋째, 폴 램지(Paul Ramsey)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그들이 전혀 컨트롤 할 수 없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으므로 사회적 책임 운운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신앙의 증거를 지닌 소수의 무리였다고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톨스토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램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발전시켜서 비록 예수가 대면했던 상황과 같은 것이 아니지만 오늘의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사회적 책임을 논구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정황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어도 기독교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에른스트 트뢸치(Ernst Troeltsch)에 의하여 잘 설명된 바 있다. 트뢸치는 예수의 윤리가 순수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교회들은 그 예수의 가르침을 세계 현실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발전시켜서 문명화된 윤리 체계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트뢸치는 기독교 윤리는 당대마다 사회학적 요인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가장 적절한 기독교 윤리적 표현을 찾아 왔다고 보면서 세 가지 표현형을 예증했다. 그 세가지 표현형은 교회유형, 소종파 유형과 신비주의 유형인데 그는 기독교 신앙의 사회 윤리학적 영향력의 크고 적음의 관점에서 교회유형을 가장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하였다. 트뢸치는 교회 유형의 사회윤리학적 속성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교회는 구원사역의 결과로서 은총과 구원이 담지 된 제도이며; 대중은 수용해 들일 수 있고 세상에 교회를 적응하게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객관적인 은총과 구원을 위하여 주관적인 거룩함의 요구를 어느 정도 간과하기도 한다.”
따라서 예수의 순수한 종교적인 가르침이 약화되거나 변개되고,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적 가치들과의 타협을 통하여 보다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요더는 이런 입장에서도 역시 예수의 가르침은 기독교 윤리의 규범으로 자리 잡지 못하여 그 유효성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넷째, 예수의 가르침을 구체적인 사회적 적용을 위한 것이라고 보지 않고, 이를 영적인 것이라고 축소하는 입장이 있다. 이 경우는 예수의 메시지의 본질이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루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으며, 실존적인 내면의 문제를 다룬 것이지 구체적인 삶의 제 문제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예수가 준 메시지는 사회변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와 갱신을 위한 것이며, 내면의 신앙적인 요구를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맥락에서는 예수와 그의 가르침은 비역사화(ahistorical)된다.
여기서 예수는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실존적인 내면적 변화를 촉구하는 분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맥락에서 본다면 복음의 사회 정치 문화적 해석은 복음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리챠드 니버가 문화에 적대적인 그리스도 론 (Christ against culture)을 전개한 맥락과 만나는 견해이다.
“이 입장은 2세기 경에 쓰여진 <디다케>, <바나바 서신>, <디오그네투스 서신>과 같은 문서에 발전한 것이다. 터툴리안(Tertulian)도 분명 이 그룹의 일원이다. 이런 초기 기독교 그룹이 지니고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생각은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율법을 지닌 새로운 백성이라는 이해이다. 가장 기초적인 이 법의 출처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을 따라 살거나 본받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새법을 따라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타협의 윤리는 거절되고 비타협적이며 반문화적인 영적인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입증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다섯째, 위와는 약간 다르지만 예수를 급진적인 유일신론자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이 입장은 지엽적이거나 유한한 가치들을 벗어나서 오직 한분이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데 집중하게 하는 메시지를 주신 분이 예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강조되고,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윤리적 척도와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고 본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하신 초월자 하나님간의 거리를 강조하는 이 입장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입장이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칼 바르트나 헬무트 리챠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이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입장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역을 인간이 침범하거나 하나님의 영역을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 내리는 사고를 경원시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지 우리들의 해석의 대상이 아니며,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의 행위와 동일시하는 입장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즉 죄로 오염된 인간의 사역이 곧 하나님의 사역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정치 영역에 현존하는 질서들은 그것이 민주적인 것이든 아니든, 하나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인간의 질서들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지배자들이나 정부는 동료 인간들 위에 더 고등의 옳음을 가지고 있다고 그릇 주장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정치론(theocracy)도 최상의 그릇된 행위로 드러나게 된다. 정치적 혁명조차도 여하간의 정부 안에 담겨있는 악에 대한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정의는 인간의 죄 성 안에서 주장되는 정의라는 인간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정의는 다르고, 단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의 수납자로서 복종의 윤리(ethics of obedience)를 가질 뿐이라는 입장이다.
여섯째, 이 입장은 예수 이해에 있어서 교의학적인 강조를 하는 입장이다. 예수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만인의 죄를 사하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므로, 그를 믿고 의로워져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틀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로만 카톨릭 교회나 개신교회나 구원론적으로 예수를 이해하는 점에서 일치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예수는 교회의 교의학적 해석에 따라 그의 구체적인 윤리적 요구들은 교의학적 구원론적 기독론에 가려지고, 예수의 삶과 사상의 적용 영역은 교회 안으로 내면화되고, 교회 밖으로는 선교적 과제가 두드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을 개인적 차원에서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대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으므로 기독교 윤리학은 성서나 예수의 가르침 이외의 다른 자료들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로만 가톨릭 교회의 윤리신학에서 볼 수 있는 이 입장은 성서적 진술과 가르침만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적 전통을 이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 윤리신학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윤리학은 교의학을 통하여 완성되는 것으로 가톨릭 전통은 성례전을 통한 의로움을 강조했다면 개신교는 선포된 말씀에 의한 자기이해의 갱신을 중시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칭의의 중요성이 도덕적 행위론에 앞서게 된다.
이상과 같은 요더의 논의들은 결국 한 가지 관심, 즉 왜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윤리를 형성하는 데 충분하지 않는가를 해명하는 것들이다. 이 논의들의 핵심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너무 도덕주의적이거나, 종교적이어서 현실적 타당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발전시키거나 혹은 다른 자료들을 첨가해야만 적용 가능한 윤리가 될 수 있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결과적으로 이런 논의는 기독교 윤리학을 전개하면서 예수가 더 이상 윤리 규범의 핵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이유를 밝힘으로써 예수이외의 사유가치를 도입하자거나 아니면 예수의 관점에서 벗어난 타협적 가치를 도입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요구를 정당화 한다.
“그리하여 이런 전환적 측면에서 재구성하는 사회윤리는 상식이나 사물의 본질 따위의 것들로부터 안내를 받아 이끌려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것이 ”맞는지“, 그리고 어느 것이 ”적절한 지,“ 무엇이 ”상관적인지,“ 무엇이 ”효과적인지“ 를 따지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현실주의적이거나 책임적이 된다.”
이렇게 예수의 평화사상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현실주의자들의 손에서 재해석됨으로써 평화주의가 아닌, 호전주의, 혹은 현실적 전쟁 옹호론으로 발전하게 되거나, 아니면 현실에서 퇴각하여 정적주의로 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 안에서 사회 책임의 윤리를 강조할 수는 있었으나 평화를 위한 실천 방법에서는 매우 호전적이고 방어적인 논리를 수용하여 예수의 평화 사상과 참으로 먼 거리를 가지는 기독교가 되고 말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요더는 이상에서 본 기독교 윤리학의 성향이 예수의 복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연신학적 관심으로 기울어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8. 요더의 트뢸치 비판
이상의 논의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이 개인적인 것, 종교적인 것, 실존적인 것으로 규정됨으로써 그의 가르침은 사회적 관련성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의 가르침이 사회적 관련성을 가지도록 보다 적절한, 정황에 맞는 수정을 통해 효과적인 방안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성향은 로만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나 혹은 근래의 상황윤리에서나 동일한 공리로 작용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변화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고 자신의 경험과 이성적 합리성에 맞추어 변개한 셈이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청자가 아니고, 예수의 말씀의 적용 가능성을 판단하는 입장에서 예수를 수정해 온 역사, 그것이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 주류 신학자들에 의하여 지속되어 왔고, 오늘의 대부분의 기독교회들은 이런 입장에서 나온 신학적 귀결을 근거로 평화와 믿음과 구원을 이해하게 되었다.
요더는 예수의 사회 윤리적 가르침이 실존적이고 내면적이며 종교적인 성격에 그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현실 관련성을 결여하고 있다면 왜 유대인들이 예수를 저주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했는지에 대하여 묻는다. 뿐 아니라 예수를 통하여 전해지는 메시지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현실적인 삶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는 신앙적 태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요더는 예수의 메시지가 현실적인 것일 뿐 아니라, 현실 관련성이 있고, 특별한 기독교 사회 윤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 충분히 규범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트뢸치는 예수의 윤리사상이 너무나 순수 종교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세상의 현실과 만나고 타협하면서 변형되어왔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는 이 변형의 과정 없이 기독교 사회 윤리의 효용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런 점에서 그는 소종파적 윤리의 취약성을 그 사회적 영향력의 미약함에서 지적함으로써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교회 유형을 최상의 것으로 평가하였다. 하지만 요더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의 평화 윤리는 철저하게 성서적인 근거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다양한 교권 신학자들이 예수의 윤리의 적용 불가능성을 주장해 온 것은 예수의 삶과 사상에 대한 일방적인 그들의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서 그는 다음의 몇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요더의 주장을 살펴보면 트뢸치를 비롯한 교단 신학자들이 주장했던 예수 윤리의 비사회적 순수성과 종교적인 성격에 대한 주장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예수는 그의 시대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매우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소명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의 정치적 입장은 여하간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나온 비폭력 평화주의 원칙이었고, 이 원칙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엄연히 살아 있었던 것이라고 요더는 주장한다.
둘째, 당시 유대적 상황 속에서 예수가 선택할 수 있었던 정치적 대안들은 현존하는 질서를 거절하고 변혁시키는 방법이던지 혹은 역사 현실을 회피하고 사막으로 퇴각하는 것이었으나, 예수는 현실 한 가운데에서 비폭력 평화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소명을 다했다고 요더는 믿는다. 여기서 분명하게 다시 떠오르는 예수의 이미지는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다가 고난을 수용하는 십자가의 삶이다. 그리하여 요더는 "오직 한 가지 관점에서, 오직 한 가지 주제에 초점을 두면 그리고 지속적으로 또한 보편적으로 예수는 우리의 모범이다: 그의 십자가에서"라고 주장한다.
셋째, 저항적 약자의 입장에서 끊임없이 받을 수밖에 없는 유혹은 사회적 책임을 수납하기 위하여 저항적 폭력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저항적 폭력을 가르치지 않았다. 요더는 우리가 예수를 이해하려면 세 가지 거절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적주의의 거절이며; 질서형성을 위하여 사회적 책임을 지겠다는 태도의 거절; 그리고 십자군적 태도를 가지라는 지속적인 유혹을 거절한 것이다.
따라서 성서적 기록에 근거한 이해가 아닌, 성서외적인 사회학적 영향력이라는 논거를 가지고 예수를 이해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요더는 판단한다. 그 결과 요도는 명료하게 예수가 위의 세 가지 입장을 거절하고, 비폭력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길을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 평화윤리는 비폭력 평화주의가 아니라 폭력적 평화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강자의 논리위에 의존하는 기독교 평화윤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의 평화에 관한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명제는 일종의 선택사항(optional)이 아니라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선택사항이라면 수정도 하고, 개선도 하며 적절히 조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명령형의 형태일 경우에는 철저한 복종(radical obedience)을 요구할 뿐이다.
9. 콘스탄틴 기독교를 넘어서
나는 이 강연을 우리 정황에 근접한 현실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질문으로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몇 가지 질문을 추가하고 싶다. 과연 아시아 한 반도에서도 우리가 서구 콘스탄틴 기독교의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여 정당전쟁이론을 앞세운 정복주의적이며 호전적인 평화론을 주장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구의 콘스탄틴 기독교를 가능하게 했던 로마 제국, 혹은 유럽제국주의와 같은 막강한 기독교 문명권의 우월성을 옷 입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는 신앙적 명제 뒤에 숨어 있는 정치신학, 즉 콘스탄틴 기독교의 오류를 우리도 반복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 한국 교회가 신학 함에 있어서 지난 역사 속에서 서구 콘스탄틴 기독교와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의 대상이 되었던 바로 그 아시아 대륙이 남기고 있는 아시아의 가난과 고난에 대한 기독교 평화적인 접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만일 우리의 신학적 사고의 축이 제국주의를 옷 입은 콘스탄틴적 기독교라면 우리 안에 있는 폭력성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가져야 할 기독교 평화론은 콘스탄틴 기독교적 평화론이 아니다. 서구 역사속에서 1500년간의 로마 제국주의와 편승했던 강자의 신학, 로마제국의 멸망 후 서구 제국 속에 편재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의 식민지화를 정신적으로 지원했던 콘스탄틴 기독교를 수용해 들인다면 우리들의 정체성은 "fake Romans," 몸은 아시아인인데 정신은 유럽인이며 로마인이 되어야 한다.
서구 문명사 속에서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유산을 물려받은 로마인들 곧 서구 유럽인들과는 달리 우리는 어두운 식민지인의 기억들만을 안고서 가난과 고난의 터널을 헤쳐오는 아시아인이다. 바로 이런 우리들에게 필요한 평화론은 무엇인가? 이것이 우리가 향후 풀어야 할 숙제이다. 강자가 아닌 약자들의 평화론이 정당전쟁론일 수는 없다. 부유한 자가 아닌 극빈의 삶을 살고 있는 아시아인들이 전쟁 문화를 부추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시아 도처에서 빈발하고 있는 내전과 갈등과 대립은 식민지배의 유산이며, 그들이 남긴 적대적 헤게모니즘의 잔재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일러주어야 할 평화의 길은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는 폭력성에 대한 진지한 돌이킴 없이 평화를 논구한다는 것은 위선이거나 허위의식에 머무를 뿐이다. 간혹 약자를 향하여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면서 평화를 위한 노력이라고 자인할 수도 있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을 추방하는 제의에 참여하는 것을 평화운동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오늘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 울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축복을 받으려면 단연코 우리는 평화의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콘스탄틴 기독교를 넘어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하고 싶다. 이 길로 향하는 문들이 몇 가지 있다. 무엇보다도 콘스탄틴 기독교의 그늘 속에서 묵묵히 평화의 윤리를 실천해 온 소종파 평화윤리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필요하고, 1960년대 이후 해방신학이 제기해 온 “억압과 차별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의 과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콘스탄틴 신학이 적대적으로 만들어 놓은 이웃 종교들과의 화해를 통하여 지구적 평화를 위한 봉사에 나서는 방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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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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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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