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논단 원고>
행동하는 신앙에 앞서 우리는 생각하는 신앙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 좋은 신자일수록 많은 경우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거의 맹목적인 신뢰를 가진다. 신앙은 이성적 판단 영역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근거를 가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 안에 악이 무성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지나간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보면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행한 악들이 적지 않다. 칼빈은 샴벨 형장에서 당대의 존경받던 인문학자 세르베투스의 처형에 가담했고, 청교도들은 지혜로운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그런가하면 요즈음에도 자신의 신앙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사회적으로 처형하려드는 이단시비도 계속되고 있다. 성서에 담겨진 주장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여 이를 실천하려는 이들 중에는 성서 속에 담긴 배타주의와 차별주의, 그리고 사형을 가하라는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동성애자나 이교도들을 향한 성서적 저주와 심판의 명령들은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부인하게 하는 오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는 오래 동안 사형 제도를 지지하고 찬성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 신앙이 역사적으로 부정적 기능만을 수행해 온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적이며 자기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게 했다. 악과 폭력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선과 정의를 실천하며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지켜온 기독교의 역할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사랑과 희생, 봉사와 헌신, 그리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여에 못지않게 미움과 이기, 착취와 억압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는 오랜 동안 노예제도를 존속시키는 데 합의했고, 여성을 차별하는 문화를 지속시켰으며, 타종교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습성을 키워왔다. 예수의 이름으로만 이라는 배타적 구원론은 기독교인들의 구원이외에 다른 종교와 문화의 가치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독교 우월주의적인 사고는 정치 경제적으로 지배와 정복과 승리주의를 당연시했다. 그러므로 이런 악습을 신앙의 이름으로 반복하려드는 행동하는 신앙은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의 기독교인 됨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Christian identity)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는 신앙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동하는 신앙인의 존재에 대한 해명은 그 이후의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오늘의 신앙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를 많은 부분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의 가르침에 나타난 근본적인 요소들의 상실이다. 몇 가지만 들어서 이러한 주장의 근거를 밝혀보자. 첫째, 기독교 사상은 이 땅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 사상에서 배태되었다. 예수의 복음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나라였고, 그 하나님 나라는 당시의 로마 제국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어 기독교 신앙은 지극히 세속화되었다. 여기서 상실한 것은 이 땅의 것들의 본질이 하나님나라의 영원성에 비추어 잠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나님 나라 사상이 증발한 자리에서 현실적인 가치들이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 안에 로마의 제국주의적인 요소가 유입되었다. 제국주의가 무력을 앞세운 폭력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듯이 기독교도 제국의 폭력에 의하여 보호받고, 그 폭력성을 통하여 선교하는 정복주의적 신앙이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하고 능한 기독교 신앙이 고취되었고, 고난과 희생을 수납하는 신앙적 태도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 강하고 능한 자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성직자들은 강한 지배자들과의 관계 유지를 중시하게 되었고, 기독교 본유의 차별 없는 사랑의 과제는 특정한 차원에만 적용되었다. 즉 이교도들에 대한 저주와 심판과 살상이 정당화되는 한 편 기독교인들 간에도 서열과 계급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독교 스스로 사랑의 과제를 제한하고 축소함으로써 미움과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벌려왔던 것이다.
오늘날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론이 기독교 신학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 제국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약한 나라들을 억압하고 착취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억압과 착취행위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석해 온 기독교 신앙은 오늘날 무수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도 이런 방향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려 한다면 그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방향을 수정하려면 우리는 교리적 신앙을 넘어서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예수는 사랑과 평화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일러준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평화의 나라다. 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제국주의는 그 본질이 사랑과 평화가 아니라 폭력과 권력에 의한 지배를 통해 제국의 이익과 유익을 얻기 위하여 약소국들을 희생시키는 일을 당연시 해왔다. 로마 제국이나, 일본제국주의나, 중국대륙, 미국제국주의의 제국성을 보면 그 우리는 그 행적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제국주의적인 것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 기독교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한 1492년 이후 전체 기독교 세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를 식민지화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배의 앞잡이가 되어 온 서구 제국의 지도자들이나 병사들이 한결같이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끊임없는 활력을 불어 넣어 주었던 이들이 바로 기독교 목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사랑과 평화와 의를 행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나그네 처럼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모두 빼앗기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성서적 가르침보다는 식민 지배세력을 향하여 기독교는 자신들만의 부와 권력과 성공의 윤리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우리는 노골적인 정치적 식민 세력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공간의 개념을 뛰어넘어 식민주의는 문화, 경제, 정치적 지배 영역으로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학습받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가치는 서구 식민지배자들의 종교가 남긴 바 이 땅에 집착하며 부와 성공과 정복의 윤리를 반복하고 데에서 두드러진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랑과 평화의 길보다는 간혹 종교의 이름으로 미움과 폭력의 길을 묵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자랑스럽게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 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를 여는 길이 아니라 닫는 길이 된 셈이다.
둘째,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상을 넘어서서 예수의 제자들이 받았던 가르침은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삶이란 세상의 물질적 가치에서 안정과 평화를 얻는 삶과는 다른 묵상과 명상, 그리고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걸으며 사치와 안일과 쾌락에 마음을 두지 않고 정결한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우리에게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을 길을 걷기를 요구했고, 청빈한 삶을 가르쳤다. 이런 삶의 본질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속하는 세계는 이 땅이 아니므로 이 땅의 가치에 궁극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에 기초한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고, 그의 제자들이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려는 욕망을 신앙으로 정당화함으로써 고도의 경쟁사회를 만들어가거나 유발시키는 데 참여하고 있다. 단순한 삶에서의 경쟁이 아니라 더 많이 가지고 소유하며, 더 누리기 위하여 모두 다 질주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어느 목사의 “저 윗 자리는 비어 있다!”는 설교제목에서 보듯이 곧 최상의 지위와 권력을 향유하기 위하여 신앙의 힘을 사용하라는 메시지가 남발되고 있다. 기독교인이 사회적 지위를 독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장로 대통령을 연호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섬김의 종교를 가르친 예수와는 달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배의 종교가 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런 태도는 두 가지 심각한 기독교 신앙의 위기를 불러온다. 무엇보다 이런 류의 성공과 승리를 지향한 신앙적 지침은 우리가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그리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과 승리에 집착하여 정신을 팔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권력과 부유함을 통한 쾌락이다. 예수는 권력과 부유함을 칭송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망각한 기독교가 되어 교회 안에 권력과 부유함을 가진 이들이 지배력을 행사하게 되고, 진실한 신앙고백은 구축되고 만다. 그 결과 예언자적 메시지가 증발하거나 침묵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참된 예언적 메시지를 전하는 이들을 박해하고 내어 모는 기독교가 될 수도 있다. 이런 행위에 참여하면서 행동하는 신앙인이라 스스로 여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군 전쟁에 나서는 이들은 자신의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결연한 각오를 앞세우고 결과적으로 비기독교도들을 살육하는 살육자들이 되고 말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맹목적 신앙을 가르쳐온 결과다. 그리고 맹목적인 신자가 되어 상대 속에서 인간의 존엄함을 보지 못하는 무서운 기독교도들이 된 것이다. 단순한 삶이란 경멸의 대상이 되고,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예찬이 이어지는 세속집단으로 자리를 잡으면 집단 이기가 꽃피기 시작한다.
셋째, 세속적 성공주의와 승리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위선적으로 영적구원을 기대한다. 영적 구원이란 이 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여 천국에 들이신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일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지 폭력과 미움을 동원하고, 이 세상에서 즐길 것을 다 즐기면서 살아간 이들에게 보험처럼 약속된 것은 아니다. 간혹 세속적 가치들을 유입시켜 세속화된 교회일수록 영성적 구원론을 강화시킴으로써 그 세속성을 가리고 기독교 신앙을 영적인 것으로만 대치시키는 경향이 짙다. 참된 영성이란 다름 아닌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따라 사는 길이지 교리적으로 명문화된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오늘날 지극히 세속적인 가치로 범벅이 된 혼탁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간다. 신앙을 통한 정화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무수한 반목과 질시와 다툼으로 가득한 교회가 바로 이런 현장임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유리된 영성이란 허구와 거짓이며 위선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권력과 물욕으로 충만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최소한 알아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 탐욕과 오만을 부리고, 자기중심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복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아야 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들이 탐욕과 권력과 욕망과 야망으로 뭉쳐져 성서의 예수를 왜곡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거기에는 희망이 없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주장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런 이들에 의하며 하나님의 선교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사실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를 예측하였는지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이런 사실을 미리 우리에게 일러주셨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신앙을 가진 행동하는 신앙인은 교리주의에서 구원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위선과 교리를 깨뜨리고 하나님 말씀을 신자들에게 안겨주며 직접적인 하나님 신앙과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온 것이다.
넷째, 신앙이 세속화되면 행동하는 신앙은 역선교적인 기능을 불러온다. 세속화된 신앙인들의 행태로 인하여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믿을 가치가 없는 종교로 오인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순은 중세기의 타락상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교회가 사고 팔리며, 성직이 세습되고, 교회가 사유화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땅의 것들에 대한 집착이 평신도들 차원을 넘어서서 성직자들의 의식세계까지 점령하고 있다는 증거다. 교단적 정치 세력을 가진 이들이 연대하여 카르텔을 형성하고 그릇된 교회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을 봉쇄하고, 심지어 예언자적 소명을 수행하는 이들을 박해하기도 한다. 교회의 수장들이 된 이들은 대부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꾼들이다. 그들은 돈으로 표를 사며 파벌을 만들어 권력을 나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나 있는지 나는 그들을 의심한다.
부유하고 안락한 삶에 익숙한 성직자들은 그런 안락한 자리를 떠날 용기가 결여된 이들이 된지 오래된 이들이다. 동시에 그들은 그들을 거스르는 예언자의 소리를 침묵시키는 세력에 가담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사유화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비성서적인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가 지녀야 할 고귀한 영성 그 자체를 붕괴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들도 초라한 죽엄이 되어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질 들의 풀과 같은 존재들인 까닭이다. 예수는 구약의 율법을 갱신하면서도 예언자적 전통을 소중히 따라 산 사람이었다. 그는 세속주의를 옷입고 권력 다툼을 하던 제사장들과는 소원한 삶을 살았고 마침내 그들의 음모에 걸려 처형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이 시대의 예언자들은 추방과 유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도 성문 밖으로 추방을 당했고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적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으며, 선교의 장애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타락에서 오고 있다.
비록 일수 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성직자가 수억원짜리 최고급 차를 타고 다니며 수백억 원대의 재산을 보유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인친척에게 교회를 물려주며 교회에 대한 지배권을 마지막까지 쥐려는 이들은 이 시대의 거짓 선지자다. 두렵고 무서운 것은 성직자들이 모두 그들을 부러워하며 본받으려 한다는 데 있다. 비록 그들의 입술은 매끄러울지라도 그들은 예수를 파는 자들이요, 복음을 거역하는 자들이며, 기독교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이다. 비록 우리 스스로 온전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자들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 이들은 하나님 보다 자신의 욕망을 더 믿는 자들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런 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 21-23) 거룩한 것을 속된 것과 바꾸는 물신주의에 그들의 영혼을 판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성 위기의 시대를 꿰뚫고 나가야 할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 돌파의 길은 다름 아니라 성서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며, 예언자적 혼을 되찾는 일이다. 시대정신이 타락하여 하나님과 세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만들 때 보다 선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 이들이 바로 예언자들이다. 이들은 제사장 계급들과는 달리 정치적 이해관계나 물질적 탐욕을 초극하며 살아온 영성의 소유자들이며, 자신의 안락에 연연해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자신의 삶의 안락을 돌볼 줄 모르는 이들이었으므로, 하물며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만연한 제자식의 안락한 삶을 보장하기 위하여 교회 물려주기를 시도하는 이들과 나란히 천박한 정신의 나누는 이들이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자유로운 정신을 소유한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메신저가 될 수 있다는 적나라한 사실을 보여준 이들이 바로 예언자다.
예언자적 영성이 결여된 세계에서는 타협과 모략과 중상과 시비가 끝없이 일어나거나 자발적 복종과 침묵이 이어진다. 그리하여 살아있는 영성이 사라진 하나님의 교회는 세속화되어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십자가 아래에서 제비뽑기를 하며 예수의 걷옷을 나누던 이들과 다를 바 없이 하나님앞에 드려진 헌물을 나누고 가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자적 영성을 결여한 행동하는 영성이란 자칫 잘못하면 폭력적이고, 집단 이기적이며, 탐욕과 권력싸움에 동원된 영성일 수도 있다. 이런 영성에 고무받은 이들은 덕과 도덕적 판단과 법적 질서조차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들이 지닌 신앙적 영성이 이 새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교육을 받은 까닭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된 영성은 결국 아전인수적 신앙의 해석을 불러와 교회를 집단 패거리 싸움의 아수라장으로 만들기도 한다. 교회가 영성의 왜곡을 통하여 세속적인 세상의 상식도 지키지 못하는 지경이 된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다른 것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예수의 평화의 영성, 사랑의 영성,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초대받은 손님처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나그네처럼 조심스럽게 강도만난 이들을 돌보며 살아가는 나그네의 영성이다.
기독교회의 역사는 다양한 신앙의 표현형을 남기고 있다. 이 땅의 주인이 되어 점령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부여받았다고 가르쳐온 영성을 따라 포악을 행할 수도 있다고 믿게 만든 신앙도 있다. 이 땅을 교리적 소명의 자리로 여겨 온 땅을 복음으로 정복하라는 지상과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영성도 있다. 제국의 종교가 서구 기독교 우월주의를 감추고 있었던 방법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이런 가르침은 예수의 사상과 행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에 마음을 두고 이 땅을 살아갈 것을 명하셨다. 지상에 국가를 세우고 권력을 잡고 지배자가 되라는 요구는 예수의 요구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 땅의 부요함에 마음을 두지 말고 의와 진리를 행하고,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걷기를 요구하였다.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경고하면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던 예수, 이 예수의 영성이 오늘날 우리 교회안에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르려면 어느 부자 청년의 고민에서 우리가 읽었듯이 탐욕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최소한의 요구이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걸어야 한다. 저마다 자기 십자가도 져야 한다. 부유함으로 치장한 성직자들의 입에서 어찌 정의와 평등이 외쳐지고, 청빈하고 단순한 삶에로의 부름의 소리가 울려나겠는가? 그것은 오늘날 연목구어인 셈이다. 그런데도 부유함에 찌든 성직자들의 교회로 무수한 대중이 몰려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의 가르침은 재미있고, 적당히 건전하며, 여러모로 부담이 되지 않는 까닭이다. 은근히 탐욕과 교만을 가르치고, 욕망충족을 자극하는 하나님의 축복이란 사실 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짧은 삶을 살아가면서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일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고, 조금 일하다보면 어느덧 인생의 석양이 찾아오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밤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일하는 일꾼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를 따라 평화와 사랑의 길을 걷고, 예언자들의 길을 따라 살며 정의와 평등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예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나는 믿는다. 그들에게 약속대로 하나님 나라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Saturday, April 19, 2008
Prophetic Spirit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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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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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pril 13, 2008
Marc H. Ellis' Jewish Liberation Theology

해방신학 이야기 4
마크 엘리스(Marc H. Ellis)의 유대 해방 신학
- Auschwitz -
마크 엘리스는 홀로코스트 이후 1세대 유대 신학자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 대학에서 홀로코스트 신학자 리챠드 루벤슈타인(Richard L. Rubenstein) 문하에서 종교와 신학을 공부했고, 뉴욕 메리놀 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택사스 베일러 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유대해방신학을 향하여(Toward a Jewish Theology of Liberation, 1987), 거룩하지 못한 연대: 우리 시대의 종교와 포악 (Unholy Alliance: Religion and Atrocity in Our time, 1997), 유배 생활 (Practicing Exile: The Religious Odyssey of an American Jew, 2002), 아우슈비츠 끝내기 (Ending Auschwitz: The Future of Jewish and Christian Life, 1994)등과 같은 대표적 저작을 포함하여 16권의 저서를 가지고 있다. 그의 글들은 자전적 성격이 강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 정황 한 가운데에서 쓰여 졌기 때문에 오늘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에 비추어 기독교 신학의 미래적 과제를 조명하는 데 시사하는 점이 많다.
엘리스는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자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명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와 매우 가까운 친구였고, 해방신학 및 페미니스트 신학자들과도 매우 활발한 토론을 벌려왔다. 그는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베일러 대학의 유대학과 종교 연구소에서 2007년 해방신학 컨퍼런스를 열어 오늘의 해방신학의 향방을 점검했다. 그는 그가 최근 발표한 논문들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였던 이스라엘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박탈하는 가해자로 변신한 현실에 개탄하면서 팔레스타인인들과 평화로운 연대를 나누는 길만이 이스라엘의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89년 그는 전 세계의 해방신학자들의 글들을 모아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의 회갑기념 논문집을 편집했다. 그는 종교와 권력의 야합을 이루어 낸 콘스탄틴 신학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였고, 오늘날 제국주의적 종교의 위험과 타락을 지적하며 성서의 예언자적 소명을 재강조하고 있다. 이 글은 홀로코스트의 사상적 배경이 되어온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의 흔적을 살펴본 후 마크 엘리스의 유대해방신학의 사상적 기초를 논하는 것을 주된 과제로 삼는다.
기독교와 반유대주의
유대교는 기독교 이전 사막의 종교에 뿌리로 두고 기독교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종교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가 4세기 초 콘스탄틴 대제 시대를 맞아 점점 굳어진 교리체계를 형성하면서 권력화 되어 갈 때 유럽 기독교 사회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들과 겹치면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종족으로 규정되었고,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뿌리 깊은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계몽주의 이후 유럽의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끊임없는 인종차별적 증오와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유대인들은 마침내 20세기 중반 인류역사 속에서 가장 참혹한 고난을 겪었다. 물론 러시아 혁명 당시 근 2,000만 명이 살상을 당하고, 세계 1차 대전 중에도 근 2200만명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맞았지만 인종차별적인 편견에 지배를 받아 종족 말살의 대상이 된 유대인들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기억 홀로코스트(Holocaust)를 가슴에 담고 있다.
내가 2002년 독일 베를린 근교 유대인 집단 수용과 학살이 이루어졌던 집단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느꼈던 그 섬짓함은 미국 워싱톤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뮤지엄을 방문했을 때 보다 현실적인, 캄캄한, 길고 긴 절망의 역사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다. 지난 2008년 2월에는 미국 휴스톤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찾아가 보았는데, 거기서 나는 홀로코스트야말로 기독교 문명의 붕괴를 드러내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홀로코스트는 단순히 나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기독교 문명 세계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졌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문제를 철학과 신학적 작업을 통해서 조명한 인물들 중에 기억할만한 사람들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엘리 비젤(Elie Wiesel), 그리고 수산나 헤셀(Susannah Heschel), 그리고 신학자로서는 리챠드 루벤슈타인(Richard Rubenstein)등이 있다. 이들은 그들이 믿어온 하나님과 아우슈비츠의 현실 사이에서 깊이 고통하고 고뇌한 사람들이다. 매카피 브라운(Robert McAfee Brown)은 이 고뇌의 정황을 일러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과 아우슈비츠 “그 중 어느 하나도 다른 것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고립된 개체로 각기 다룰 수는 있었지만 - 즉 아우슈비츠가 있다면 하나님은 없어야 옳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아우슈비츠는 없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하나님, 하나님과 아우슈비츠를 동시에 직면해야 했다.”
홀로코스트 이후 악의 현실과 공존하는 하나님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되었다. 선하신 하나님과 너무나 깊은 악의 현실이 공존할 수 없다고 믿어온 사람들은 이 질문을 회피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에 빠지곤 했다. 1945년 이후 홀로코스트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나치즘의 사상적 책임을 기독교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고 지목했다. 돌이켜 보면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이후 흩어진 유대인들은 유럽전반에서 박해를 받아왔다. 가톨릭교회에서 자란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도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증오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태도에 크게 기인하였고, 특히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가한 유대인들의 사악함에 대한 책임을 후손들에게까지 묻는 데에서 증폭되었다.
특히 537년 경 유대인들은 정부의 고위직에 취임할 수 없는 법령이 제정되었고, 545년에는 기독교인들의 재산을 유대인들에게 파는 것을 금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보다 앞서 306년 엘비라 공회(Synod of Elvira) 에서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결혼만이 아니라 성적 접촉, 심지어는 함께 식사하지도 못하도록 결정했다. 1179년에는 기독교인들이 병들거나 다친 유대인들을 의료적으로 돕는 일도 금지했다. 이어 1215년에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이 구별되도록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옷을 입도록 법을 만들었다. 1431-43년 열린 바젤 공의회(Basel Council)에서는 유대인들이 대학에 다니는 것을 금하고, 반드시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도록 법령을 제정했다. 1096년부터 시작되어 1272년 종료된 십자군 원정기에는 개종을 거부하거나 세례받기를 거절하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543년에 출판한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이라는 논문에서 마틴 루터는 카톨릭 교회와의 프로테스탄트간의 대립과 갈등 사이에서 예수를 구원자로 믿기를 거절하는 유대인들을 지목하여 적그리스도(anti-Christ)라고 규정했다. 그는 유대인들을 일러 사악한 기생충과 같은 존재이므로 독일에서 추방되어야 마땅하며 그들의 회당은 모두 불에 태워져야 하고, 모든 유대인들의 책들은 압수되어야 한다고 주장 했다. 종교적 관용이나 인간적인 배려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을 가지고 루터는 유대인들의 종족적 말살을 요구하며 그들을 일종의 종말론적인 복음의 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점철된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의 나치즘에서 가장 극악한 형태로 실천되기에 이른 셈이다.
독일교회는 1975년부터 반유대주의에 관한 교회의 입장을 발표하면서 루터신학의 인종차별적 편견이 나치즘에 연계된 것을 시인하였고 “기독교인과 유대인“에 관한 백서를 출간하여 독일 개신교인들 내면의 인종차별적 편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종교적 믿음과 전통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인종차별적인 편견을 조장해온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부터 중세 가톨릭교회를 지나 개신교,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사상까지 파고든 반유대주의는 히틀러의 인종청소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는 인류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악한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유대인들을 향해 보여주었던 지난 기독교의 태도는 개종, 추방, 아니면 말살 중 하나였던 것이다.
홀로코스트 신학
홀로코스트에 대한 유대 신학자들의 고민의 흔적은 매우 역력하다.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유대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홀로코스트를 그들의 신실치 못함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고 유대인들에게 유대교를 향한 충성을 요구하였다. 일련의 신학자들은 홀로코스트 사건은 곧 거룩한 것의 붕괴와 부정, 신의 일식(Eclipse of God)으로 이해했고, 초자연적 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경향을 불러왔다. 특히 정통 하레디(Haredi) 유대 신학자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오니즘의 상실에 대한 주님의 격노한 응보(Wrath)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신학자 리쳐드 루벤슈타인은 아우슈비츠 이후, (After Auschwitz), 그리고 역사의 교활함, (The Cunning of History)에서 홀로코스트 사건을 일러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에 대한 거절, 그리고 모든 존재를 궁극적으로 무의미하게 보게 만든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홀로코스트는 20세기의 정신의 어두움을 드러내는 포악의 한 측면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나치에 의하여 “불태워지는 어린 아이들은 모든 인간적이거나 신적인 가치의 부재“를 여실히 드러냈다고 그는 생각했다.
반면 에밀 파켄하임(Emil Fackenheim)같은 신학자는 홀로코스트를 일러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계명을 준 사건으로 이해했다. 그 새로운 계명이란 다름 아니라 “히틀러에게 사후에도 승리를 안겨주지 말라”는 것, 즉 악이 승리하는 경우를 다시는 허용하지 말라는 계명이다. 유대인들의 생존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그리고 악을 정복하는 승리주주의를 고무하는 이런 류의 해석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시오니즘적 해석으로서 2차 대전 이후 이스라엘이 힘을 부여받게 되었을 때 강력한 정치력의 확보라는 과제로 이어졌다. 반면 루벤슈타인은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현실 개입을 부정하면서 이신론적인세계관 아래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의 책 홀로코스트 이후(After Holocaust)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촉발한 책이 되었다. 현대 유대 신학자인 그린벅(Irving Greenburg)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불성실로 인하여 유대인들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건이 홀로코스트라고 하면서 계약사상의 회복을 위하여 자발적인 계약사상(voluntary covenant)의 준수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엘리스는 “홀로코스트를 염두에 둔다함은 곧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현대 종교와 휴머니즘에 대한 심원한 비판을 의미 한다; 홀로코스트 사건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재고할 것을 요구한다. 어떤 의미에서 홀로코스트는 기독교와 서구의 유산이며, 그 피해자들은 정의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유대인 공동체는 이 기억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 앞에) 성실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그가 홀로코스트 사건에서 보는 중요한 의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과 그 기억을 가진 공동체가 힘을 부여받는 일(empowerment)이다. 즉 홀로코스트 경험을 가진 유대인들은 그 기억을 통하여 악에 저항하고 정의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 앞에 선다는 것이다.
엘리스는 파켄하임의 시오니즘적 해석을 넘어서서 유대인들이 피해자로서의 탄식과 항변과 생존을 위하여 힘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바로 홀로코스트 기억을 가지고 그러한 악이 재현되지 않도록 살아야 할 책무가 있고, 그러한 악이 스스로에게 기생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제는 역사 안에서 홀로코스트의 재현을 막고 종식시키는 윤리적 과제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오늘 날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보편적인 인간의 악의 출현으로 보았던 루벤슈타인의 이해를 받아들이되 그 협소한 해석을 넘어서서 기독교도와 유대교도들은 악과 비인간화의 상징인 "아우슈비츠"의 종식을 위하여 거룩한 연대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본질
엘리스는 홀로코스트 사건을 유대인들의 특별한 경험이라는 범주만으로 보지 않고 이를 보편적인 종교와 권력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에서 일어나는 악의 전형이라고 보았다. 그는 2차 대전 이후 홀로코스트 신학이 힘을 얻고 급진적으로 진행되어 나가면서 파괴의 제의(The liturgy of destruction)를 불러 오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럽의 종교적 풍토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의 극단화된 폭력에 의하여 희생자들이 되었던 유대인들이 전후 이스라엘과 미국에서 힘을 모으고, 그 힘을 가지고 이번에는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아우슈비츠는 관료주의의 냉정함, 종교와 정치의 야합, 그리고 인간의 노예화, 사물화, 점령과 개입, 찬탈과 무국적, 고문과 학살이 일어난 자리였다. 이런 악의 자리는 그 주인공을 바꾸어 이번에는 나치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기독교가 아니라 유대 시온주의자들이, 가해자가 되고 동시에 팔레스타인인들이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의 독점적 전유물이 아니며 악의 상징일 뿐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변증하기 위하여 전거로 삼을 수 있는 사건만은 아니다. 엘리스는 새로운 아우슈비츠를 만드는 이스라엘을 일러 콘스탄틴 유대주의라고 명명한다. 어거스틴 이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주의의 국교가 되어 권력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종교로 전락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1967년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점령 이후 유대인들은 더 이상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이 아니며, 오히려 아메리카 유대인들의 지지와 이스라엘 근본주의적 유대인들과 자유주의적 유대인들의 연대를 통하여 이루어낸 막강한 힘을 가지고 이제 겨우 국가를 형성하려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생존권과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리스는 하나님은 결코 포악을 인정하지 않은 하나님이므로 포악을 불러들이는 기독교나 유대교는 이미 그 자신들의 종말에 이른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유대주의가 포악을 받아들인 오류를 지적한다.
“ 유대인들이 경험했던 바 그 포악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생존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혹은 바로 이 경험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 포악이 다시는 어느 민족에게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지 않았던가? 죠지 슈타인이 제기했던 질문처럼, 만일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들이 역사와 인간성의 종말을 경험했다면 유대인들에게 남은 역사적 소명은 무엇이며 어느 방향으로 그 소명을 이루어 가야 하는가?”
그 소명은 포악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포악을 소명처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역사를 반추해 본다면 각 종교 전통은 피할 수 없는 포악의 유산을 지니고 있다. 콘스탄틴 기독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는 데 눈을 감았고, 마침내 홀로코스트를 조장 방임했다. 반면, 유대교는 오늘날 미국 유대인들의 영향과 이스라엘 유대인들과의 연대를 통하여 아랍과 팔레스타인 세계에 포악을 행하고 있다. 특히 엘리스는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안고 있는 유대 공동체가 피해자의 신분에서 가해자가 된 것은 역사적 소명을 잘못 이해하고 그릇되게 해석해온 데 문제가 있다고 지적 한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마치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명백한 죄악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각 종교 전통은 이러한 포악의 유산을 극복할 수 있는 갱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스는 현실로 일어나고 있는 포악을 드러내고 고발하는 과제를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엘리스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서로 배우고, 적당히 타협하는 에큐메니칼한 거래(Ecumenical Deal)을 하려는 데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는 흔히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이들은 서로의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눈감아 주고 서로를 적당히 은폐 보호해 줌으로써 불의를 지속시키는 데 기여해 왔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 침묵으로 인해 여성들과 소수자들의 억압이 지속되어 왔다. 그가 지적하는 하나의 대표적인 불의한 침묵의 예가 기독교와 이스라엘 세력 간에서 일어나는 침묵이다. 기독교는 이스라엘이 행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한 포악을 못본 체 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기독교의 무비판적인 태도를 일러 반유대주의를 넘어선 기독교라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두 종교 집단 간에 이루어지는 에큐메니칼 거래로 인하여 불의한 피해를 입는 이들은 약자들인 바로 팔레스타인인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포악의 현실을 바라보며 침묵하거나 그 정황을 희석시키는 행위는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기억하는 신앙인들의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 정치와 종교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를 파기하고 다시 예언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엘리스는 주장한다. 이스라엘 병사들이 벌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한 비인도적인 행위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이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었던 땅을 점령하고, 그들을 추방하고, 그들이 살아오던 거처들을 파괴하며, 기관총이 달린 헬기를 타고 집단 학살하는 일들을 포괄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며 엘리스는 결국 우리의 후손들에게 포악의 역사를 남겨주는 비극일 뿐이라고 탄식한다. 홀로코스트의 본질은 종교와 권력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에서 일어나는 포악이며 비극을 드러내는 사건이라는 데 있다. 하나님 백성들의 소명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가 재현되지 않도록 정의와 동정을 행하는 것인데, 오늘의 이스라엘은 그 소명을 실천하기는커녕 그 소명에 적대적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틴 유대주의
성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포악에서 건지시는 해방의 하나님인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해방된 백성들은 너무나 손쉽게 권력을 가진 자들과 연대하며 또 다른 포악을 생산해 낸다. 이런 현실에 대하여 비판하고 저항해 온 정신이 바로 성서의 예언자 정신이며,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포악을 그치고, 이를 비판하며 정의를 행하라고 요구해 왔다. 팔레스타인 현실과 관련하여 엘리스는 오늘날 세계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이들이 소리 없이 제거되거나 사라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대학이나 제도권에서 밀려나 추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추방의 자리에 동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하지만 이 하나님은 제국주의의 시녀가 된 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엘리스는 오늘의 유대주의에 대하여 탄식하기를 “내가 오직 기독교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바, 하늘에 상달된, 국가와 연계된 콘스탄틴적인 종합 속에 구체화되어온 바로 그 힘을 가진 자들의 위선은 그 내용과 행위에 있어서 유대인들에게도 완벽하게 전수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콘스탄틴 유대주의가 바로 여기, 그리고 미국 안에서 만개한 것을 보고 있다. 폭력은 하나님과의 계약의 핵심이 되었고; 계약과 유대적 삶은 포악으로 오염되었다.”고 하였다. 지난 세기 포악에 희생되던 순진한 유대주의는 사라지고, 바로 그 포악의 희생자가 되었던 유대인들이 오늘의 포악을 일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엘리스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무엇에 동일시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무력했던 유대인들과 근본적으로 달라진 오늘의 유대인들은 미국 안에서나 팔레스타인에서 힘을 부여받은 자들로서 존재한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보다 훨씬 세련된 엘리트들이며 자본주의 세계의 기득권을 걸머쥐고 있는 이들이다. 이들은 기관총을 단 헬기를 팔레스타인인들의 머리위에 날리고 있으며, 그들을 추방하고 그들은 고문하며, 그들의 생존과 희망을 빼앗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모든 잘못과 책임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돌리고 있다. 마치 온갖 무기로 무장한 어른들이 새총을 가진 어린 아이를 두들겨 패면서 어린 아이가 새총으로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높은 벽을 세우고, 이들을 벽 밖으로 내 몰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하나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정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 내어 읽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엘리스는 성서는 명백하게 권력의 오용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며, 권력은 권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계약사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 즉 팔레스타인인들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되므로 권력오용의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성서의 메시지가 전하는 바로 이 요구를 외면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자신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위에 폭탄을 퍼부으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정체성
엘리스는 오늘날의 유대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진보적 유대인들이 공모하여 벌리는 포악에 대하여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한때 종살이하던 민족을 포악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바로 그들에 의하여 또 다른 포악을 저지르게 하기 위함이었던가? 라고 되묻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이 이제는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불러온다는 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가진 신앙의 정체성에 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콘스탄틴적 왜곡에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벌리는 위선은 스스로를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로 위장하면서 동시에 다른 민족을 향한 잔혹한 가해자가 되는 데 있다.
엘리스는 이스라엘의 최근 정책을 분석하면서 유대인들은 오늘날 이중의 장소와 초점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유대적 삶의 콘스탄틴 제국화(Constantinianization of Jewish life)는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종교적 맥락을 따라서 움직이고 있어서 중동에서나 미국에서도 상황적이다. 중동에서 주인은 아랍인들이며 무슬렘이다. 미국에서는 주인이 미국인들이며 기독교인들이다. 콘스탄틴 유대주의의 건설을 위한 전략은 그러므로 이중적인 장소와 초점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그 영역이 대부분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것이지만; 미국에서는 대부분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것이 때문이다. 안전하고, 확장된 그리고 번영하는 이스라엘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바로 그 두 컨텍스트가 동시에 작용해야 한다. 거기 그 두 전선(戰線)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한 비하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주의 정책은 다름 아니라 역사를 망각한 오류의 결과라고 그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은 그 당시 자신들을 박해했던 크리스쳔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고 평등과 정의 위에서 새 출발을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요구를 했던 이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해서 정의와 평등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며, 신앙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의 혼란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엘리스는 이스라엘에서 정의와 평등을 요구하는 소리에 대한 억압과 진압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으며, 의로운 예언자들의 추방이 권력 오용에 의해 교묘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러므로 의로운 예언자적 삶에서 일어나는 유배는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늘 있었던 중요한 차원이다. 히브리 성서는 의심의 여지없이 약속의 땅에 대하여 말하고 있고, 동시에 그 핵심에는 추방의 현실이 있다. 바로 그 약속의 땅과 추방의 저변과 주변에는 언제나 예언자적인 것이 있다. 따라서 그는 신앙인의 정체성은 유배자의 경험과 예언적 메시지로부터 분리되어 해명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배(exile)의 제의와 예언자
지난 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견해차라는 다양성을 거부할 때 종교는 이내 기존 질서 이데올로기에 집착함으로써 새로운 담론을 거절하는 자기 우상화에 빠지곤 했다. 이런 정황에서 보다 인간다움을 실현해 나갈 수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젼은 언제나 기존질서에 권위를 부여하는 세력과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려는 혁명적이며 변혁적인 세력 간 마찰을 불러오곤 했다. 하지만 대중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모험보다는 안정을 요구하고, 이기적이거나 집단 이기적인 안전을 요구한다. 여기서 기존 세력은 새로움을 말하는 이들을 추방하고, 제거함으로써 그 권력과 질서의 안정성을 다지려 한다. 종교의 영역에서 바로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추방의 제의이며 유배자의 삶이다. 성서적 맥락에서 본다면 제사장 계급들은 예언자들을 추방했고, 신학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콘스탄틴 기독교는 정의와 평화의 소리를 억압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서 제국의 이익에 반하는,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소리를 내는 이들의 운명은 유배자의 삶이거나 망명의 길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엘리스는 콘스탄틴 유대인들과 예언자적인 양심적 유대인을 구별하고, 양심적이며 예언자적인 삶을 사는 이들과 동행하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양심과 진실을 따라 살아가는 이에게 주어지는 삶은 장외의 삶(out of place)이다. 즉 추방되어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것이다. 엘리스는 유배자로 살아간 사이드가 팔레스타인의 한 지식인으로서 언제나 장외의 삶을 살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사이드와 다른 유배자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한다. 그것은 엘리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자기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서 나는 하나님 없이 유배자의 삶을 살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해는 내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 있었고 합리적인 논의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나는 나의 유배의 세월동안 언제나 하나님의 현존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분은 나를 성실함으로 부르시고 나의 삶을 인도하셨다. 내가 경험한 그 유배적 정황은 나의 역약함을 더 깊게 하였고 나로 하여금 내 안에 감추어 두고 있었던 문제들에 대하여 더욱 분명히 규명하게 하였다. 나는 새로운 깊이를 경험했고 그 분의 동행을 열망했다. 혹은 신뢰. 내가 가졌던 그 유배 생활에는 빛이 있었고 어둠이 있었으며, 감사와 더불어 고통이 있었다. 그 본질을 말하자면 나는 새로운 차원의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내가 느끼고 있던 바, 그리고 다가오는 시간 속에서 더 강화될 것인, 내 삶을 뒤틀리게 만든 유배생활과 그것이 주는 고통과 더불어, 나는 동시에 나의 유배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을 것인가?”
엘리스에게 있어서 양심적 신앙인이 겪어야 하는 유배는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다. 이는 예언자적 삶을 사는 이들이 겪어야 할 숙명과도 같은 삶이지만 유배 속에서, 유배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예언자적 삶을 실천하게 된다고 한다. 예언적인 것들은 그러므로 깊은 어둠속에서 발견된다. 그 어둠속에서 예언자들은 빛을 찾아 그 빛을 모은다. 어둠속에서 빛을 모아 밝히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 토착적인 것이다. 성서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것들이라고 그는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예언적 유배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방어능력이 전혀 없고 뿌리가 뽑힌 사람들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기관총을 탑재한 헬기들을 과연 에레미야나 아모스가 즐거워 할 리가 없는 일이다.
엘리스는 경전적 복음(canonic gospel)과 역사적 복음(historical gospel)을 구별한다. 추방의 제의를 벌리는 이들이 사용하는 경전적 복음은 성서를 교리로 축약하고, 그 교리를 들어 추방의 제의를 벌린다. 하지만 역사적 복음은 예수의 살아있는 음성을 듣게 하고, 예수의 따스한 가슴을 증언하는 복음이다. 경전적 복음은 사람들로부터 예수를 분리시켜왔지만, 반면 역사적 복음은 예수를 사람들 가슴속에 되 돌려주는 복음이다. 경전적으로 굳어진 종교가 되어가면, 예수와 더불어 살아있는 관계가 약해지고 예수 대신 폭력과 포악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전적 복음에 앞서는 것이 역사적 복음이라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해방신학
오늘날 우리가 아우슈비츠에 대하여 관심하는 까닭은 아우슈비츠가 유대인들만이 경험이 아니라 극명한 인간 억압과 말살의 악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도, 광주에도, 필리핀에도, 방글라데시에도, 미얀마와 티벳 에서도 일어나는 사건이다. 거대한 제국주의가 꿈꾸는 종교와 권력의 거룩하지 못한 연대는 도처에서 일어난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하여 콘스탄틴 기독교와 콘스탄틴 유대주의가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를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홀로코스트로부터의 해방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해방의 작업은 성서의 예언자들과 예수를 통하여,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해지는 과제다.
엘리스는 성서의 메시지는 잃어버려지거나 어제의 것이 아니며, 결코 길들여지거나 교화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언자적인 메시지는 오늘날의 포악한 권력을 인정하기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과, 결국 성서적인 것은 무엇을 정확하게 인정하기를 거절했는가를 확증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서의 메시지에 의하여 끊임없이 자기 비판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것이 바로 해방의 과제이며, 사회정치적 해방의 지평을 여는 일이다. 이 해방의 지평은 정치와 종교의 야합에 의하여 일어나는 포악을 멈추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늘의 유대주의에서 보듯이 포악을 경험한 이들은 자기비판이 약화되어 또 다른 포악을 행하는 자들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대 해방신학은 예언자 영성을 통하여 포악으로부터, 스스로, 그리고 다른 이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1960년대 이후 전개되어 온 해방신학은 유대 해방신학과 이 해방의 지평에서 만난다.
현대 해방신학은 그 다양한 표현을 통하여 예언자들과 동행하려는 것이며 예언자들을 포로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언자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란 곧 “지금 여기서” 예언자적인 삶의 내용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 신학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긴장은 그들을 묶어둔 바로 그 종교전통의 구조 안에서 예언자들을 해방하려는 의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해방의 과제는 온갖 폭력과 포악의 포로가 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방시키고, 예언자들을 자유케 하며, 종국에는 하나님까지 포로로 삼고 있는 종교에서 하나님을 해방하는 과제를 의미한다. 이 과제는 엄밀히 말하여 거짓된 하나님 숭배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며, 이는 곧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자리로 겸손히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엘리스는 홀로코스트 경험을 가진 유대주의의 특수한 경험을 통한 보편적 봉사의 과제를 일러 유대해방신학의 요구라고 강조한다. 이 요구는 첫째, 유대적 전통의 깊이에서 울려나는 지기 비판의 소리를 듣고 세계를 섬기는 것이며; 둘째, 오직 비판적 토론과 책임있는 행위를 통해서만 성서가 요구하는 참된 증언을 할 수 있다는 것; 셋째, 성서적 명령에 충실한 종교는 반드시 포괄적인(종교인과 세속인들을 포함하여 남성과 여성을 모두 아우르는) 종교로서 온갖 형태의 억압과 포악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는 다는 것; 넷째, 유대인들의 생존과 존속은 세계에 보편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증언을 동반해야 한다는 것; 다섯째, 유대해방신학은 우상숭배로부터 예언자적인 증언의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 여섯째, 유대 해방신학은 역사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더불어 헌신과 연대의 소명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콘스탄틴 기독교가 제국주의에 세례를 받고 세계를 향한 섬김과 봉사의 사명을 식민지배 세력과 제국주의에 종속시켰던 그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유대해방신학은 다름이 아니라 예언적 유대 신학이다. 이 신학은 홀로코스트 경험을 통하여 아우슈비츠를 종식시키라는 요구를 받아들이는 신학이다. 아우슈비츠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유대해방신학은 유대인들의 연대만이 아니라, 포악을 거부하고 제거하려는 기독교도들과의 연대를 넘어서서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연대를 포괄적으로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나오는 말
마크 엘리스는 정치적 정책을 달리 펴는 세 유대주의자들, 즉 1967년 7일 전쟁 이전의 종교적 유대인들과 양심적인 유대인들, 동예루살렘과 웨스트 뱅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세속적인 유대인들, 그리고 전통적으로 종교적인 미국의 유대인들과 양심적 유대인들을 대별하고 그 중에서 양심적 유대인들의 역할을 매우 강조한다. 종교적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하여 팔레스타인 이웃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제국주의적 논리를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마치 뿌리 채 뽑혀 던져진 나무를 상상한다. 생존과 미래를 잃어버린 뿌리 뽑힌 민족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들을 뽑아 내고 자신들만의 번영을 구가하겠다는 이스라엘의 정책에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이스라엘로 이주해 오던 사람들보다 이제는 이스라엘을 떠나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다고 한다. 성서가 약속했던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포악과 전쟁의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를 벌린 독일 사람들을 대표하여 독일인으로서 수치감을 느끼고 있다는 독일 수상의 발언이 최근 보도되었다. 매우 순진난만한 표현이다. 수치감과 미안함이 아니라 더 이상 천진난만함으로 다른 이들의 비극을 간과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악에 의하여 무수한 이들이 생명을 빼앗기고 가정이 파괴되며,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는 그 역사 한 복판에서 살아가면서 모른 척 순진무구한 신앙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어쩌면 불신앙이고, 신성모독적인 것이며, 성서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라 해야 마땅하다. 죄의 역사를 안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제국주의가 이 지상의 최고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신앙 고백 위에서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앙 공동체들이 바로 서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엘리스는 주류 유대인들의 환영을 받지 못한 유대 신학자로서 그의 삶을 일종의 유배처럼 살아왔다. 나는 그를 2006년 필리핀 유니온 신학교에서 만나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필리핀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는 수용소를 함께 방문하고, 필리핀 정부의 눈을 피해 숨어있는 노동운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필리핀 대학의 이슬람 지도자들을 함께 만나 생각을 나누기도 한 경험이 있다. 홀로코스트를 빙자하여 더욱 세력화되고, 세력화된 권력을 이용하여 이웃 민족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온 그의 삶의 여정에 대한 긴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그의 삶과 사상을 통하여 오늘의 한국 기독교도 더 이상 순진난만함을 자랑하는 신앙이 아니라, 역사 비판적이며 예언자적인 지평을 신실하게 회복함으로써 한 반도 안에서 정의와 평화의 지평을 열어나가며 더 나아가 아시아와 이 땅의 포악한 역사를 제거하는 과제, 엘리스의 표현대로 한다면 스스로의 폭력성에서 해방되어 이 지구위에서 아우슈비츠를 제거하는(Ending Auschwitz) 과제에 연대하며 동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991년 엘리스가 아우슈비츠를 방문했을 때 그는 아우슈비츠 방문 마지막 날 그의 어린 아들 아론에게 엽서를 한 장 보냈다. 나는 이 엽서를 소개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 한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삶은 우리의 자식들의 미래와 연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론에게,
나는 지금 아우슈비츠라는 곳에서 이 카드를 너에게 보낸다.
이곳에서 무수하게 많은 유대인들이 죽은 곳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오늘 이렇게 살아있구나.
나는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네가 미래에 이런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세계를 이루어 나가기를 희망한다.
사랑 한다!
아빠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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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April 3, 2008
Peace in Tibet and World Peace

Tibet Rabrang, 2008년 3월 14일
제국주의의 행패에 의하여 아시아의 고난이 깊어진다. 내게는 작년 미얀마 사태로 인해 무수한 시민들과 수도승들이 살육을 당했던 일에 대한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강에 부유하는 스님의 시신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죽인 것도 모자라 강에 내다 버려 유기한 사람들의 섬듯한 악에 대하여 놀란 마음이 가시지도 않았는 데 이번에는 티벳이다. 미얀마는 부패한 군부 독재 통치가 이어지고 있고, 티벳은 중국의 꼭두각시 정부가 지배하고 있다. 티벳은 중국 공안의 지배 개입이 티벳 정부의 반민중적 억압 통치를 강화하고 있다면 미얀마 역시 중국정부의 지지와 방조의 산물이다. 아시아에서 미국 제국주의만 나무랄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제국중의 하나인 중국의 제국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적인 해방으로 모자란다 하여 사회주의적 해방을 주창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해방론은 결국 죽써서 개준다는 속담처럼 제국주의적인 거대 악마를 키워내고 그 통치 세력에 의하여 자유주의 세계보다 훨씬 못미치는 가난과 억압과 인권유린의 현실을 세계 도처에 남겼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약소 국가들은 충분히 자결권을 행사 할만큼 정치 경제적 역량을 갖추지도 못했다. 이런 세계에서 민주와 독립을 외친다는 것은 정신의 힘이 무력의 힘과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염려하는 바는 중국의 새 정부가 장개석을 밀어 낸 1949년 이후 티벳의 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인도로 밀려나 있고, 내부의 정치세력을 키워낼만한 민주 세력의 구심점이 없다는 점이다. 현실 정치에서 대안적 방안이 없을 경우 혁명과 변혁의지는 잠간 불타오르다가 사그러드는 불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세계에서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와 자결권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지난 50년의 냉전체제하에서 우리가 무수히 보아왔던 일이다. 체코의 봄이 무참이 쏘련군에 의하여 짓밟혔던 일이나 이념 전쟁터가 되어버린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한반도, 대만, 미얀마 등의 나라가 가지는 오랜 내적 갈등은 바로 인간을 섬기지 않는 냉혹한 이념성 때문이다. 자유주의를 외치는 이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그리고 사회주의의 복지이념을 외치는 이들이 사회주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여왔던가? 러시아 혁명을 전후로 근 2000만명이 죽임을 당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여 수천만명을 죽인 자들이 살아남아 문명을 이어가는 21세기는 과히 폭력과 야만의 세기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티벳 사태만 보아도 거대한 경제제국을 꿈꾸는 중국이 앞으로 아시아 평화의 주축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자국의 국민들의 인권을 존중하지 못하는 정부가 더 높은 인권 기준을 가지고 아시아인들의 인권을 옹호할 능력이 없는 까닭이다. 나는 티벳의 독립과 자결권을 존중하라는 전 세계인들의 염원과 기도가 중국의 포악한 정치를 지양시키고, 주변 국가들을 향한 정치 군사 보안적 개입을 스스로 억제할 수 있는 정치적 도덕성을 가질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연대하여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중국제국주의의 인권억압적 행태에 대한 비판이 정중하게 제기되어야 한다고 본다. 중국은 서구권에 대립한 제국적 일치를 위하여 종교의 자유를 공안 통치아래 두며 탄압해 온 나라다. 인류의 20% 이상을 끌어안고 있는 중국이 인권의 수위를 높일 수 있다면 그것은 중국정부의 성공이기도 하고 아시아인들의 고난을 줄이는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세계의 가장 높은 산을 가진 티벳이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라마의 추상적 지도력으로 새로운 세기를 견디어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현실 정치에서 사회 구조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공백이 커져 정치적으로 약소국가가 되든지 아니면 강한 나라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제적으로 궁핍한 세계일수록 자국민들에 의한 야만적 인권침해도 그 수위가 심각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해방의 기준이 정권획득이라는 목표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상대적인 정치적 자율권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들일수록 자국의 정치권력에 의한 민중억압과 수탈이 도를 지나치는 경우가 아시아에서는 허다하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미얀마, 캄보디아, 북한 등은 지식인들이 살아남을 수 없는 억압의 땅이다. 민주와 해방적 의식을 가진 사회 운동가들이 한 해에 7-800명씩 무참히 살해당하는 야만의 사회에서 우리가 말하는 자결권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스스로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무참하게도 무수한 민중의 피를 삼킨다. 정치도, 종교도, 이념도 민중을 지켜주지 않는다. 오직 민중을 지켜온 것은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확신을 가진 대중의 힘이 세운 정치가 가능할 때이다. 서구 로마 세계가 주변국가들을 향하여 벌린 천년의 수탈이 서구 사회의 원천적 부를 증가시키고 중세 봉건사회를 가능하게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이루어온 인권의 수위를 아시아가 따라 가려면 서구세계가 그 제국성을 버리고 아시아와 연대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서구 제국주의 세계와 아시아 제국주의가 경제 정치 군사적 경합을 벌리기 시작한다면 아시아는 여전히 빈곤과 포악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문제는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아시아제국, 곧 중국에 의한 제국주의적 지배를 종식시키려 한다면 서구 제국주의가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포악성을 버리고 평화로운 지구체제를 만들려는 진심을 보일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이 오끼나와에 거대한 군사기지를 세우고, 뒤이어 한반도 평택에 거대한 군사기지를 세운다면 이는 곧 중국을 경제하려는 군사적 우월성을 먼저 점하려는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거대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약소국가를 교두보로하는 긴장과 대립이 더욱 심화될 것이 나는 두렵고 염려된다. 더구나 향후 화석 연료가 고갈되고 새로운 에너지원의 확보가 시급한 이 때 약소빈국들이 자국민들을 위하여 최소의 생존조건을 공급할 수 있는 능력조차 확보활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염려한다. 국민을 섬길줄 모르는 정치권력은 결국 가난한 대중의 비인간적 삶의 현실을 외면하는 빈익빈 부익부의 극한 상황을 존속시키고, 가진 자 편에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요구를 억압하는 세계가 되어 허다한 아시아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악몽이 더 깊이 재현될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아시아의 평화는 제국주의 유산을 청산하는 일과 더불어 인간의 존엄함을 차별없이 적용하려는 보편적 가치의 확산에 달려있다.
해발 2000m가 넘는 외로운 고원의 땅 티벳에 평화가 깃들려면 세계의 평화가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인구 600만에 지나지 않는 조그만 나라 티벳의 자유와 민주를 향한 여정에 평화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빈다. 중국은 티벳민들의 평화와 인권을 지켜주는 도덕적인 지도력을 행사해야 한다. 티벳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포악한 군사개입은 중국의 웃는 얼굴 이면에 어두운 악마의 웃음을 감추고 있다는 경고를 주변에 하는 셈이다. 이 포악이 장차 어디까지 미쳐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세계 평화는 약소국의 평화가 보장될 때 가장 아름답게 꽃필 것이다. 티벳의 저항이 이런 꽃을 피우는 봄꽃이 되기를 기원한다. 비록 눈서리가 내린다 할지라도 봄이 오면 화려한 벗꽃과 개나리가 차가운 겨울의 빈들판을 이겨내고 화려하게 만개하듯이 나는 티벳에서도 하루속히 인권의 봄꽃이 활짝 피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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