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anuary 24, 2008

petition

His Excellency
President, Sri Lanka
CC: Office of the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Your Excellency,

Petitioners comments: Please stop killing out of juriditialjustice!

I support the call made by the United Nations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 Ms. Louise Arbour, to extend support for Sri Lanka through human rights monitoring of all violations of human rights done by any group whatsoever. I also believe that the sovereignty of Sri Lanka will be enhanced by revitalizing competent and effective criminal investigation sections of the Sri Lankan police through this support by the United Nations.

I urge the Sri Lankan government to utilise this opportunity to address many of the problems that have caused enormous insecurity to the people and that act as an obstacle to development in the country. I fervently hope that petty interests of power and corruption will not prevail against the better interests of the nation and the Sri Lankan people by resisting this move by the United Nations. I see no reasons for the independence of the judiciary of Sri Lanka to be affected adversely by such investigations. In fact, I see the sovereignty of the people and the state being enhanced by such investigations in the present circumstances of Sri Lanka.

Yours sincerely,

Dr. Choong Koo Park
Methodist Theological University
Seoul Korea

Tuesday, January 22, 2008

Living in a Violent Society


- 겨울 산 -



1. 해악금지의 원칙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윤리 공식들이 있다. 그 공식들은 대부분 매우 적극적이며 진취적인 삶의 자세를 요구 한다. 그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해악금지의 원칙은 모든 법적 제재의 기준이 된다. 최소한의 선을 위한 긍정적인 가치보다 부정적인 가치가 사실상 법적인 의미에서 가장 최소의 규범이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규범으로 다른 이에게 의도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해를 끼치지 말라는 요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규범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가 고급화되려면 이런 기초적인 규범을 넘어서는 상식이 보편화되어야 한다. 만일 종교 지도자들이 이 최소 규범을 자기 방어막으로 치고 살아간다면, 그리하여 범법자가 아니라는 최소의 규범을 지키는 것으로 그의 공적인 삶을 이해하고 있다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이런 이들은 덕과 사랑과 희생을 가르치기에는 부적절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생명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하라는 존중과 보살핌의 윤리는 사실 종교의 기본이 되어야 할 윤리 규범이다. 하지만 법의 세계에서는 누군가를 존중하지 않고 보살피지 않았다 하여 법적 제재를 가하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천륜을 버리는 행위와 같이 늙은 부모나 장애가 있는 자식을 방기하는 행위는 범법적인 행위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거나 존중하지 않는다 하여도 우리는 법적 혹은 도덕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 종교윤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존중의 윤리는 그러므로 철저히 개인의 성숙한 도덕적 자율성에 근거한다.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성선설 전통에 비하여 이를 부정하는 성악설 전통도 있지만, 사실상 우리는 교육과 종교라는 수단을 통하여 사회적 상규에 저촉되지 않으며, 사회적 선을 도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소양인을 길러낸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란 존중의 윤리를 넘어서 더 깊고 높은 선의 실현을 구상하는 데 그 종교의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선이란, 이기적 속성을 넘어서서 이타적인 사랑, 덕을 행하는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 가치를 삶의 의미물음과 연관시키는 데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종교적인 가치는 존중과 이해의 인격적인 관계를 넘어서되 보상을 구하지 않고, 자기희생적인 제의와 가치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신학교육 공동체는 최소의 규범을 적용하는 자리가 아니라, 존중의 인격적 가치를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희생과 봉사의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사는 종교 지도자들을 양육하는 자리가 되어야 마땅하다. 종교의 진정성은 신비주의적 제의나, 비의의 체험만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종교는 평범을 넘어선 상위의 고귀한 도덕율과 품위있는 자율 그리고 높은 최상의 선을 향한 기여를 이루어 내는 영성을 키워낼 능력에서 그 귀천이 가늠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십자가는 고난과 희생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2. 특수한 정황에서 만나는 경험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나의 신념과 삶에 대한 이해에서 매우 깊은 배리를 경험했다. 종교를 담고 있는 제도들이 한결같이 사회 윤리적인 최하의 기본규칙에 미달하는 규범들을 자신의 방어막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서 경악했기 때문이다. 생명과 평화를 섬길 지도자들을 길러내고 이들에게 종교적 지도력을 가르치는 이들이 정작 자신들의 삶에서는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향하여 무자비한 폭력과 비열한 공격을 해댈 뿐 아니라, 기만과 조작도 서슴치 않는 모리배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도덕지수가 저열한 이들을 지도자들로 옹휘하고 있는 집단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연목구어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가 점점 세속화되더니, 이제는 이익집단화되고, 앞으로는 종교안에서의 인권침해가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될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나는 도덕적 가치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정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반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강패들의 세계에서는 옳고 그름의 윤리가 아니라 패거리 윤리가 그들의 의리를 형성한다. 정의로움을 선택하는 것을 용기라고 가르쳐온 보편적인 윤리 교육은 도덕지수가 최소한 해악금지의 원칙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서 통용될 뿐, 도덕적 지수가 저열한 자들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정의로운 용기를 가진 이는 거친 집단으로부터 몰매와 소외를 겪게 된다. 아시아 각국에서 나온 인권보고서에서 한결같이 담겨있는 항목중의 하나는 인권을 옹호하는 이들을 향한 권력집단의 폭력이다. 인도적인 활동을 하는 이들이 오히려 공격을 받고 살해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한 사회의 도덕지수가 높으면 높을 수록 윤리교육은 보다 폭넓은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지만, 도덕지수가 저열한 집단 안에서 윤리교육은 학생들에게 더 깊은 갈등을 불러오고 더 깊은 고난을 불러온다.

이런 이유로 도덕지수가 저열한 세계에서는 용기 있는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용기있는 사람은 옳고 그름에 대한 예민한 도덕적 감수성을 가진 이로서 도덕적 신념을 지키려는 이들이다. 따라서 도처에서 불의하고 불공정한 담합적 행위들이 일어날 때 그는 언제나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말썽꾼”으로 간주되기 쉽다. 정의와 평등을 주장하는 이가 오히려 평화를 깨는 이들로 규정되는 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는 억압과 침묵이 지속된다. 불의한 정황을 목도하면서도 침묵을 강요받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며, 자기모멸과 기회주의적인 생존에 매달리는 자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이들이 교육자가 될 때 그 학생들이 경험하는 도덕적 아노미 현상은 가히 정신분열적인 것이리라.

나는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의 신학교육 구조에서 종교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상실한 이들의 언어들이 넘쳐나고 있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인격적인 신뢰와 믿음보다는 위선과 권위와 허영의 가치들이 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교적 신념은 바로 그러한 가치를 가르치는 자들에 의하여 처절히 배반당하고 있다. 종교의 적은 타종교도 아니고, 악마도 아닌, 바로 일부 종교적 제의와 가치를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들과 다른 이들을 종교의 적으로 몰아 마타도어를 외치며 증오와 미움을 종교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있다. 종교가 이렇게 되었다면 이미 성/속의 규범은 혼란에 빠진 셈이다. 즉 종교가 더 이상 거룩함의 영역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성장하는 종교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3. 불의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사유

불의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묵종과 침묵과 비정함을 겪으며 살아가는 비인간화를 유도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여 가해지는 제도적 폭력, 인격적 폭력, 그리고 권력의 오용과 남용으로 인하여 표적이 되어 고통을 겪는 이들을 보면서도 침묵하는 “양들의 침묵”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제도적 권력을 우상화하는 사회는 개인의 권리와 존엄함에 대한 신념을 비웃고, 권력중심적인 권위와 탐욕의 문화를 양육한다. 비인간화된 인간들이 벌리는 제의는 인간간의 가장 원초적인 신뢰의 조건도 가볍게 배반한다. 서로의 인간다움을 지켜주는, 서로가 인간임을 지각하는 근원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구신학자들의 윤리학이 지시하는 내용은 대부분 그들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준에 따라 상식과 보편적인 정의와 평등에 대한 기본적 신뢰를 전제하고 형성된 것이다. 인간의 권리만이 아니라 동물의 생명권, 행복권까지 숙고하고 그 권리를 지켜주는 사법경찰관들이 존재하는 사회에서의 윤리규범은 법과 제도, 그리고 법집행의 객관적 엄정성에 대한 신뢰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신념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옹호 받고 인정받는다. 서구에서는 짐승을 학대한 사람을 경찰이 수배하고 형사입건하거나, 공격자의 정신을 병원에서 감정하도록 조치한다. 이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은 필경 동료 인간을 향해서도 공격적인 인간이 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며, 동물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동물에게 행사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규범에 사회적 합의가 주어진 까닭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가장 최고의 지성을 갖춘 최고의 학문 공동체 안에서 음모와 술수와 차별과 축출, 불이익을 가하는 수단들이 정당화되고 있다. 국가의 법은 최소의 규범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은밀한 불의가 여기 저기서 합법성을 표방하며 행해진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외면하고 잔인하게 해고하는 기독교 기업, 비위에 맞지 않는 학자들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몰아내는 지식인들, 보편적 선의 기준을 외면한 정치권력이 막강한 법제도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 따라서 양심과 자유를 가르쳐야 할 대학에서 양심과 자유보다는 기회주의적 생존 전략을 가르치는 자리로 전락하고 있다. 대학 사회가 가져야 할 이상은 상실된지 오래다. 유년 시절부터 패거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은 기초적인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뿌리 깊은 배반의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그들의 제자들은 존경할 스승을 가지지 못하고, 삶의 모델을 찾을 수 없는 불행한 이들이다. 그리하여 냉소와 비난을 통용시키는 문화에서 왜곡되어 가는 자신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의 정의는 냉소와 비난을 통하여 표출될 뿐이며, 그것은 기회주의적인 발산경로는 되어도 진정한 정의를 선택하는 행위로 이어지지 못한다. 이렇게 우리 문화는 비겁한 소시민들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한 차별과 힘없는 자들의 동료에 대한 무관심은 억압사회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두 통로다. 남아프리카의 개혁교회 해방신학자인 알렌 보잭은 정의란 선택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는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며, 누군가가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그는 정의란 자신이 정의롭게 살기위하여 선택하는 것이고, 그 선택의 대가가 고난과 고통일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선택이 이루어져야 할 상황에서 신앙의 행위를 곧 축복으로 해석하는 이들의 설교는 가히 악마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고난 없는 영광이 없다”는 명제를 너무나 손쉽게 종교 안에서만 해석하는 경향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 길은 넓은 길이며 다 같이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해방신학자들은 신학의 명제를 올바른 실천에서 찾았다. 올바른 실천은 올바른 이론을 요구하지만 사실상 올바른 이론은 도덕적 호소라는 수단으로만 성취될 수 없다. 자원이 고갈되고 삶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희소한 사회에서 도덕적 호소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오히려 사회의 도덕지수가 높은 사회일수록 도덕적 호소와 품위는 존중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한 해에도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평화와 인권 운동가들이 살해당하고 있는 스리랑카나 인도, 그리고 필리핀, 베트남, 방글라데시와 같은 사회에서 정의를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곧 고난을 겪고 심지어 죽음을 직면해야 하는 위험이 따른다. 결국 위험지수가 높은 사회일수록 정의와 자유의 투사들은 상대적으로 적고, 억압의 제도적 기재는 강화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열악한 아시아 나라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인권의 수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제도적 권위와 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누구나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어야 하는 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하다. 권위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사회 지배 장악력이 매우 높은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 저기서 권력의 오용이나 남용이 일어난다. 소집단일수록 그 권력 장악을 위한, 억압적 수단과 방법이 직접적이며, 집요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노골적으로 대립되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로가 물고 물린 소집단 안에서 질서와 관계를 개혁하고 변혁시킨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가 된다. 정의와 사랑과 평화란 그저 공여불일 뿐이다.

해방신학자들은 외부 세계의 악마적 억압을 향하여 일부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총을 들고 싸운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과격성을 서구 신학자들은 비난하였지만. 사실상 서구적 기준에서 반성적으로 참고할 이는 본훼퍼이다. 바로 반세기 이전만 해도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으로서 정당한 폭력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정황이 있었다. 종교가 포악을 용납하고 받아들일 때, 종교가 차별을 종교 안에서 수용할 때, 그 종교는 사회적 자살을 선택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종교가 정의를 선택할 때, 그 정의는 평화적일수도 있으나 한계 상황에서는 정의로운 폭력을 수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해방신학이 남겨준 교훈이다.

4. 너무나 반(反) 변혁적인 신학

내 눈에 비치는 신학은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너무나 현실 집착적인 신학 체계다. 이런 신학은 정치 경제적 이익에 집착하는 현실주의적 실용성을 매우 중시한다. 대부분의 부흥사들과 목사들이 강단에서 대중을 모으기 위하여 사용하는 신학적 프레임이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 성향은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바울을 충실한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이 신학에서는 종종 역사적 예수를 교리적 예수로 만들어 버린 바울의 사상이 강조된다. 역사적 예수를 신학적 예수 속에서 잃어버리고 만 주와 객이 바뀐 신학이라고 할까. 이런 신학은 혁명과 변혁에 대한 기대와 예기 의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이 신학에서는 구원이란 단지 영혼구원이며,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찾기 어렵고 하나님 나라에 충동되는 혁명적 변혁을 지향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다.

둘째, 신학 중에는 철저한 인식과 실천을 점검하는 중에 형성된 신학이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예수를 교리와 이념 체계에서 해방하고, 화려한 제의와 왕관을 벗겨낸 예수를 따르려는 이들이 가진 신학이다. 여기에는 세속적인 법과 규범에 저촉되지 않는 높은 도덕적이며 영적인 규범을 중시한다. 소유와 탐욕, 욕망의 유혹을 제어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드문 신학의 길이다. 이 신학은 성실한 소종파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들은 문자와 이념과 탐욕의 문화를 벗어나, 단순한 복종과 겸비의 길을 택하라고 가르친다. 이들의 도덕성은 그 어느 종교 공동체보다 높아서 사회적 해악을 끼치기 보다는 법과 제도적 선을 초월한 평화와 섬김의 봉사를 위한 기여에 있어 매우 공헌도가 깊고 높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정치, 경제 권력을 상대화하고 심지어는 종교 권력까지도 해체한다. 내면적인 혁명과 변화의 요구는 지속적인 삶의 과제와 마주하고 있다. 현실주의적 종교가 매우 천박함과 노골적인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것에 비한다면, 이 신학은 탐욕과 욕망을 극복하고 정의와 평화를 선택하는 것을 신앙의 길이라고 믿는다.

셋째, 교파주의적 신학의 한계가 세속적 가치와의 타협에 의하여 신학 본유의 변혁성을 상실하고, 세속적인 지배방식을 선교의 도구로 삼는 것에 비하여 이 세 번째 신학은 매우 개인주의적인 영역에 존재한다. 신학자들의 신학은 매우 개별화되고, 신앙 체험을 가진 이들은 개인적 확신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신학과 체험에서 형성된 하나님 신앙은 성서라는 캐논과 교리라는 객관적인 범주, 그리고 공동체라는 집단의 이해관계에서 독립된 주체로서 자리잡는다. 따라서 이들은 체험과 사유라는 자원을 통하여 내면적 성찰을 형성한다. 신비주의적이며, 사색적인 신학의 특징이다. 이들의 약점은 변혁적이지만, 지나치게 사변적이라는 점에서 함정이 깊다. 종교체험을 현실주의적인 이해관계의 틀 속에 여과시키는 신학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버리지 못해 첫째 범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하여 체험과 사유가 불러오는 강한 혁명성을 제거한다. 사변적 신학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반면 개인의 체험에 근거한 주관적 종교성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외부세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하여 사회변혁의 의무를 인식하기 어렵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신학의 흐름은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을 공히 가지고 있다. 하지만 종교적 정화의 정직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소종파적인 신앙 공동체 운동이 가장 높은 도덕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반면 가장 세속적인 가치와 타협하기 쉬운 신학은 결국 실용주의적인 가치를 수용하여 실용주의적인 종교로 변신함으로써 주술적 축복을 남발하는 부흥사들의 신학이다. 그들은 인간의 죄성의 깊이를 빌미삼아, 회개와 변화를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구원받지 못한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누구도 죄인의 범주를 떠날 수 없다는 고백에서 용서를 구하지만, 그들의 상습적인 고백은 그들이 도덕적 진실과 정직을 고의적으로 포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선적이라는 진면목을 드러낸다. 가장 속된 가치와 타협하는 것을 죄인의 이름으로 정당화 해주는 사이비성을 얼마만큼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리챠드 니버는 기독교의 사회윤리학적인 참된 종교적 본질을 벽혁성에서 보려고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보았던 변혁성은 오랜 기독교 문화가 일반화된 세계 속에서 기독교적 이상이 사회적 합의에 이르기 쉬운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형성된 것이다. 이런 논리를 아시아에 적용할 경우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게 됨으로써 결국 내면적 변혁과 승리주의로 전환된다. 그것은 회개와 구원이라는 이중 도식을 통하여 체계화되었다. 그리하여 아시아 기독교는 사회 변혁성을 거의 포기하고, 개인의 영적 변화에 치중하게 되었다. 개인의 인격적 변화도 불러올 수 없을 만큼 내면화된 구원관은 개인의 변화란 사회변화를 동반하지 못할 경우 지속될 수 없는 요구로 남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변혁을 향한 충동이 취약한 한국 기독교는 지나치게 내세적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신학적 조류는 불의한 상황이 주어질 때 타협, 회피, 내면화라는 공식으로 대응한다. 그리하여 사회 변혁적 충동이 결여되어 사회 통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폭력과 차별과 권력의 오용이 일어나는 세계에서 종교도 그러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사회 구조와 다를 바 없는 사회 윤리적 질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소종파적 신념을 가진 이들은 서구 사회에 비하여 지나치리만큼 소수이다. 하나의 원인은 소종파적 신념을 가진 이들이 공동적인 삶을 살아갈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종파적 신념을 가진 이들의 사상적 철저성의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1970년 대 이후의 한국 기독교는 많은 부분 경제성장의 추세와 발맞추어 현실적인 효용의 윤리를 받아들였고, 삼박자 축복을 빌어주는 샤머니즘적인 종교로 전락했다.

이러한 축복 신학은 앞으로도 오래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는 언제나 고통과 죽음이 있고, 기대하지 못했던 실패와 예기치 못한 곤경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인간다움의 취약성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이들은 종교적 위안과 보호와 축복이 필요하고, 또한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다움의 일부를 종교적 주술과 축복으로 극복하기 보다는 당당히 받아들일 용기를 가진 이들에게는 천박한 종교적 제의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리고 합리화된 복지사회일수록 주술의 효과는 감면된다. 예기치 못한 불행에 대한 대응조치가 마련된 합리적 사회에서는 종교적 축복의 의미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다만 사후의 안전을 보장하는 약속을 받기 원하는 이들의 심리적 위안이 될 뿐이다. 이렇듯 실용주의적 종교의 최후는 우리가 이미 서구와 북구 사회에서 경험한 것이다. 신학의 반변혁성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잃어버린 집단이 자초한 “맛 잃은 소금”이 되고 마는 함정이다.

5. 하나님 나라 예기(anticipation)의식

불의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신학적 사유는 묵종과 침묵과 비정함을 가르치고 일상의 비인간화를 유도한다. 사회적 약자들을 향하여 가해지는 제도적 폭력, 인격적 폭력, 그리고 권력의 오용과 남용으로 인하여 표적이 되어 고통을 겪는 이들을 보면서도 침묵하게 하는 “양들의 침묵”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제도적 권력을 우상화하는 사회는 개인의 권리와 존엄함에 대한 신념을 비웃고, 권력중심적인 권위와 탐욕의 문화를 양육한다. 비인간화된 인간들이 벌리는 제의는 인간간의 가장 원초적인 신뢰의 조건도 가볍게 배반한다. 서로의 인간다움을 지켜주는 서로가 인간임을 지각하는 근원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회주의자가 되라는 사회적 요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연대가 취약한 세계에서 고립된 개인들은 정의를 선택하기 어렵다. 정의를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불의를 행하는 자들과 대립되는 것을 의미하고, 불의를 행하는 집단에 의하여 몰매를 맞거나, 축출될 수 있는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해악금지의 도덕적 계명을 종교적으로 번언 한다면 “악마에게 승리를 주지 말라”라는 것이다. 즉 악에게 지지말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실천하려면 우리는 선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거나 상실하지 않을 내면의 무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비록 우리가 각기 분절되어 고립되어 있다 할지라도, 사소한 이익관계를 위한 파당적 연대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에 대한 평등한 신념을 나누는 사회적 연대의식을 키워나가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내면의 좌절을 이기는 길이기도 하고, 외면적 위협에 무릎을 꿇지 않는 투지를 가지는 노력이기도 하다. 오늘의 세계는 지역에 따라, 정황에 따라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여전히 양육강식의 야만적 폭력이 상재하고 있다. 나는 성서를 읽으며 예수의 정신세계에서 이러한 야만적 폭력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늘 궁금해 한다.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바로 이런 야만적 폭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집단이 스스로 정의와 평등과 평화를 위하여 살지 않으면서 그러한 가치를 설파하는 것은 그 집단이 이미 신념을 잃고 스스로 거짓되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런 집단은 정의와 평등과 평화가 주는 기쁨이 아닌 헛된 기쁨을 추구하는 속물들이 모인 집단일 뿐이다. 종교 집단이 속물들로 가득 차면 도무지 진실과 정직을 지킬 용기를 가지지 못한다. 지난 9차 세계 교회협의회는 "God in your grace, transform the world"주제를 내 걸었다. 세계를 변혁시켜나가는 힘을 가진 종교는 세상에 의하여 지배받거나, 정복되거나 혹은 감염되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폭력으로 얼룩진 세상을 해방시키고, 치유하며, 깊은 동정과 연대를 나누며 보다 생명이 존중받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종교이다. 나는 이런 꿈을 가진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고, 이런 꿈을 꾸는 벗들을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영적 지도자라 자처하는 이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더러운 이익을 취하고, 불의를 행하며, 사소한 욕망에 정신을 팔며, 인간다움에 대한 신뢰를 배반하기에 익숙하고, 약자와 연대하고 그들을 치유하기보다는 상처를 내며, 동정보다는 차가운 차별과 배타의 논리를 앞세우고 있다. 참으로 한국 교회의 미래가 염려되고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감출길 없다.

우리는 그러므로 기존 질서에서 단맛을 보려는 이들이 전하는 거짓 복음이라는 소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거짓 희망으로 만드는 이들이고, 오늘의 적그리스도이며,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이다. 정의와 평화와 평등을 가르치지 않는 이들은 단연코 진정한 하나님의 종들이 아니다. 예수가 가졌던 그 하나님 나라를 향한 희망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어찌 하나님의 종들이 될 수 있을까. 저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열어가는 작업, 그것이야말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탁된 삶의 참된 과제라고 우리는 믿어야 한다. 현존하는 폭력을 상대화하여 부정하고, 그것의 본질을 잠정적인 것으로 간파하게 하는 힘은 성령의 역사다. 성령의 역사에 이끌려 예언자적 음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권위를 옷 입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Monday, January 14, 2008

The 20th anniversary of the death of Park Jung Chul. a former Yon Sei University Student

국가 권력의 포악함을 드러냈던 박종철군의 죽음이 어연 20주년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이들의 죽음과 눈물이 그치지 않았던 그 시대 넘어
오늘 아시아 대륙,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나는 여전히 포악의 그림자를 보고 있습니다.
제도적 폭력과 악에 저항하는 이를 부도덕하다고 몰아 세우는 권력은
민주주의를 외치다가 고문끝에 죽음을 당한 박종철을 낳았지요.
고귀한 인간애와 사랑, 그리고 참된 가치에 대한 헌신을 가르치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현실이 여전히 있습니다. 박종철군의 20주기를 맞아 무자비한 포악이
사라진 세계를 마음에 그립니다. 그의 젊은 날 기록해 놓은 시 한편을 올립니다.





참 무거운 나

-박종철


아무도 없는 산에서
아무도 없는 물길을 내려다본다
아무도 없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산에는 누군가 있다기에 올라와서
아무도 못 만나고
그냥 홀로인 산만을 화인하고

도시에서 챙겨온 나를 내려놓고
그 옆에 한동안 앉았다가
다시 둘러업고 내려온다

참 무거운 나
쌀가마보다도 들독보다도
무거운 나

아무도 안 도와주는 산행의 등짐
오르는 나의 무게만을 온몸에 걸고
오르다 보면

소나무와 참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나를 가리키고
나를 불러 세우고 나를 앉히고
또 나를 일으켜 세운다

사람만이 나를 못 본 체한다

Tuesday, January 1, 2008

Each Moment for Blossoming Flowers: New Year Greetings to Friends



- Every moment has been a beautiful moment for blossoming flowers! -


Dear friends,

Happy New Year!
New Year greetings from CK, Seoul!
We are already in the first day of 2008!
I send my warmest greetings to you, to all my dear friends around the world.

William Ellery Channing, a Unitarian theologian and transcendental poet who lived in the 18th century, once said in his new year greetings as follow:
"I will seek elegance rather than luxury, refinement rather than fashion. I will seek to be worthy more than respectable, wealthy and not rich. I will study hard, think quietly, talk gently, and act frankly. I will listen to stars and birds, babes and sages, with an open heart. I will bear all things cheerfully, do all things bravely await occasions and hurry never. In a word I will let the spiritual, unbidden and unconscious grow up through the common."

As William, I want to be a spiritual person, listening to the words in silence more than words coming out of mouths. I want to come closer to the Light, to be more faithful to the truth, more courageous to do justice, warmer to share solidarity with the Least. I believe all of you also dream of a better life in the sense that William thought two centuries ago.

I am still thinking of the task "to love." Sometimes I am very much confused with the real meaning of love. Yet I could only say that without being equipped with humbleness it is hardly possible to love somebody. So I want to humble my self more lowly. I know how difficult it is. However, as a Christian, I think I am obliged to imitate Jesus. I come to believe that "imitatio christi" should come first prior to building peace and justice for others.

Friedrich Nietzsche said that "No, life has not disappointed me. On the contrary, I find it truer, more desirable and mysterious every year ever since the day when the great liberator came to me: the idea that life could be an experiment of the seeker for knowledge and not a duty, not a calamity, not trickery." I totally agree with Nietzsche. I do also want to think that life itself is not a dutiful burden, rather it is an open system to new experimental understandings. Even though we are not able to deny all the duties that this life requires, we need to find more meaningful realm of life while we are alive rather than satisfaction with the ready made duties that formulated by the forerunners of this life. For this reason, I am very much grateful for my being as a scholar in ethics, living in the full anticipation of new things.

I also believe that we need to be more proactive and positive to the future. Everybody expects to have a better year whenever we welcome a new year. In fact, I think this belief is true. The future is a gift from God which is always coming in the expectation for a better than the past one. Thus, we need to forgive and forget something happened in the past in order to make a room for new things. New year season is a time to clean and vacate for making a room, room for hope. As Ernst Bloch said, hope is for "Novum." "das Novum" is a metaphysical space for newness that will emerge in future. I think our belief in the New Year cannot deceive us. Therefore, I am excited to be alive in this coming new year. I want to enjoy my life at best and make it the most beautiful one, for it is the gift from God.

Dear friends!
We do not know what will happen in the future. Some of us may have painful experiences. Or even we may confront with some body's misfortune. However, I would like to say that all things are "ours." I would like to admit that my mistakes, my misunderstandings, or my failures are all mine. I also recollect the pains inflicted upon me by others. From my experience of being targeted, insulted, and outcasted, I come to know that such things are so bad that they ruin not only victim's life but also vitimisers' lives. One of the basic norms that ethics has taught me is the principle "not to harm others" including "not to harm yourself." So inevitably, what we can do is only to love ourselves as well as others, as much as we can, if possible.

Last year, I spent my days mostly both in Taiwan and Hong Kong for teaching, and traveled to many countries: Manila Philippines, Tainan in Taiwan, Waco in America, Okinawa in Japan, and Shinchen and Beijing in China including Hong Kong. I am planning to visit more Asian countries to get to know the reality of Asia during this coming new year. May God give me more opportunities! On my journey to Asia, I wish I could meet people who are in struggle for peace and justice.

Today I am officially reinstalled to my seminary. Due to unfair misuse of power of my seminary leadership I had to leave my seminary for three years. However I am so much grateful for the period of my absence from the seminary. I was lucky to experience the core of Quaker's life at Pendle Hill, Philadelphia, and to meet so many wonderful people who are sincere coram mundo, coram deo. I got an American brother there, Bob, a Japanese friend, Takashi with whom I came to think more spiritually and globally. My Indian friend, MP who is teaching philosophy in Taiwan, my Hong Kong friend, Lap yan who teaches ethics in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they and I shared a lot with each other. Particularly Lap Yan was my company and tour guider during the days of my travel to Beijing.

My former students, Chung Hwan at Drew, Ji Young at Yale, Woo Young in Union New York, YuJin in Philippines now at Aubrey, Eung Young in Manila, Peggy in Tainan, Anna in Hong Kong, my teaching assistant at CUHK were the hands of God who gave me happiness and helped me a lot. Now I come to believe that the love of God is greater than our pain. In particular, I am very much grateful to Dr. Weaver, a former Harvard professor, for his warm hospitality has been extended to my son Jihyun who started his graduate study at Harvard two years ago. He has invited my son to his feast table whenever he invites his best friends to his home.

I was blessed to know and befriended with the dean of Pendle Hill, Niyonu and the vice president of Philippine Christian University and the dean of theological seminary, Romy; and the president of Southern Christian University, Mel who was a Christian social ethicist at Union, but recently inaugurated as the president of SCU, Philippines; the vice president of Jang Long University, Tainan, Taiwan, Po Ho; the president of Tainan Theological seminary, Fuya; and the director of the divinity school of Chung Chi College,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Lo Kwang. My Jewish friend, Professor Marc Ellis with whom I visited suffering people in Manila, invited me to his conference on liberation theology. All these leaders of theological education invited me to teach or deliver a lecture for their academic communities. It was so rich and wonderful time for me to meet them and to learn about their desperation and hope for humanity. Their warm hospitality made me feel home in their institutions.

I was blessed to have many students who are not Korean. I remember, the faces of each of my classes, recollecting the moments we shared together, particularly with the classes at Pendle Hill, Union Theologial Seminary in Philippines, Tainan Theological College and Seminary, and the Divinity School of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When I finished my Ph.D dissertation I thought I will never be a student again. But I realized that I was wrong, for I met so many wonderful teachers, particularly Chris Ravndal at Pendle Hill who taught me how to free myself from all kinds of weird values and norms that had bound me. Sometimes I feel like to visit his study to talk to him as I was privileged at Pendle Hill. At the sanctuary of Pendle Hill we were all radically equal. I really loved the radical peace at Pendle Hill.

Today I visited my parent's grave. My father passed away 9 years ago, and my mother 2 years ago. They were real to me, but no more exist. I begin to think about the distance between being alive and dying. This thought brings me a lot of pressure that my time will be not the same as I had thought. I feel I need more time to be with myself, preparing for the last few steps of my life.

I do bless your life will be guided by the brighter Light and momentum for blossoming beautiful flowers! I put a picture on the head of this posting which I found in a university campus I visited. The sentence in the picture says that "alas I should have loved the moments more enthusiastically! I never knew that each moment I had before was the moment for blossoming a flower!" Yes, each moment of our life should be the best and the most beautiful. I am going to believe in that! Augustine said, "ama et fac quod vis."(love and do what you like!) Prior to make a decision, I want to check myself whether I am in true love. I believe that only actions motivated by true love have power to change.

Stay in love and peace!

January 1, 2008
Seoul, 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