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November 10, 2023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


정의로워야 인간이다.

기독교인은 인간이다.

기독교인도 정의로워야 한다.


1.
원숭이 무리를 관찰한 과학자들은 원숭이에게는 같은 무리에 대한 책임감, 부당함에 분노할 줄 아는 정의감, 그리고 최소의 연대감을 나눌 줄 아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다. 원숭이 무리는 강자에게 누군가가 공격받았을 때 지도급 원숭이가 앞장서서 상대를 공격하고 무리가 뒤이어 공격한다. 원숭이를 부당하게 차별 대우 할 경우 이에 대하여 원숭이가 분노를 드러내는 태도를 보였다는 연구보고서도 있다. 이런 원숭이의 사회 윤리가 원숭이들이 무리지어 서로 보호하며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2.
간혹 사람답지 못한 처신을 하는 이들을 비난하는 말로 “짐승보다 못하다”라는 표현이 있고,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짐승같이 행세하는 이를 일러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 일컫는 경우도 있으니 사람에게는 짐승보다 더 나은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기대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동료 인간에 대한 연대와 책임감도 없고, 부당함에 항의하는 정의감도 행사할 줄 모르며, 그리고 갈등과 투쟁보다 평화를 애호하는 공동성의 윤리가 없다면, 그는 어쩌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의 속성을 가진 이라 할 것이다.

3.
짐승이 가지고 있는 사회윤리 규범은 물론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깊이 숙고하며 올바름을 선택하는 윤리적 존재의 차원과는 매우 다르다. 짐승은 반성적 사유보다 본능에 따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살아있는 먹잇감을 사정없이 뜯어먹는 야수의 잔인함은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인간 본성이 야수 같다고 주장한 이도 있지만 인간에게는 생명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유독 짐승보다 우월한 도덕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다소 허무맹랑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4.
윤석열에게 표를 주고, 윤석열 정권을 지지하는 무리 중에는 유독 기독교인들이 많다. 나는 이들에게서 그들이 가진 사회 윤리나 도덕의식이 원숭이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기 무리 안에서 최소한의 연대성을 나누며 강한 외부의 세력과 싸울 줄 모르는 인간, 사회의 불공평과 다양한 차별을 경험하면서도 이에 대하여 정의로운 분노를 표현할 줄 모르는 인간, 성조기나 일장기까지 들고 나선 인간을 보면, 간혹 원숭이 무리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
검찰이 은폐해준 윤석열의 본부장 비리는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이에 분노할 줄을 모른다. 윤석열이 자기 장모를 공개적으로 옹호하며 “남에게 1원 한 장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단언한 것도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그의 장모가 감옥에 가도, 윤석열 처가 식구들이 이곳저곳 땅 투기를 한 것으로도 모자라 권력을 동원해 양평 고속도로 원안을 고쳐 휘게 만든 권력형 불법을 저질러도, 그 무수한 기독교인들은 이에 분노할 줄을 모른다. 원숭이보다 못하다.

6.
윤석열 정권이 부자들은 감세해 주면서 노인복지 예산을 줄이고 깎아도, 청년들의 일자리 예산, 하다못해 군대 보낸 자식에게 돌아가야 할 예산까지 줄이고 깎으면서, 대통령이 갈 곳, 안 갈 곳 마다하지 않고 해외에 쏘다니며 흥청망청 혈세를 낭비하거나 퍼주는 짓을 계속 해도 아무 소리도 못한다. 대통령 해외 순방 예산은 다섯 배, 고위 검사들이 흥청망청 산해진미 나눠먹고, 서로서로 용돈 나눠주고, 영수증도 남기지 않고 쓴 검찰 특활비가 뭐가 문제냐 하는 태도다. 불공평과 부정의에 대해 분노라도 표현하는 원숭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

7.
원숭이들은 자기 새끼가 해를 당할 경우 어미가 나서서 목숨을 바쳐 상대와 싸우고, 무리가 달려들어 그 어미와 함께 새끼를 되찾아오는 용맹함을 보이지만, 멀쩡한 새끼가 길 가다가 참변을 당해 울고 있는 동료 인간을 향하여 연대와 위로를 나누지는 못할망정, 온갖 비정한 말로 공격하여 그 상처를 덧내는 기독교인이 한 둘이 아니다.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들이다.

8.
미국이 앞장서서 우리 바다 동해를 일본해라 불러도 미국에 항의의 표정도 짓지 못하는 팔푼이 행세를 하는 자들이 과연 미국이 노골적으로 편들고 있는 일본으로부터 우리 땅 독도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이나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 국회에서는 독도를 지키기 위한 결의안도 처리하지 않겠다고 했다. 제 것 지킬 생각도 못하면서 바다 이름 빼앗아 가는 미일, 우리 땅을 제 땅이라 하는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겠다는 윤석열 정권을 일편단심 지지하는 기독교인을 보면 자기 무리 영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원숭이 무리보다 한 참이나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9.
한국 기독교는 일제에 머리를 숙였던 과오를 가진 종교다. 강한 자 편에 서기를 좋아하는 종교는 더 강한 자 앞에서 배반을 일삼는 습성이 있다. 하나님은 강한 존재이므로 강한 자 편에 서야한다는 정서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미국을 숭상하고, 미국의 적을 우리의 적이라고 여긴다. 미국이 동해를 빼앗아 일본해라 이름을 바꾸어 일본에게 주어도 기독교인은 이에 분노할 줄을 모른다. 이런 기독교인은 언제라도 강한 지배자 편에 빌붙어 나라와 민족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다. 제 무리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원숭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10.
연대감을 나누고 불의에 항거하며 평화를 지키는 일, 인간이나 짐승에게 똑같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에는 연대감도 없고, 정의감도 없으며, 평화를 지킬 능력도 없는 인간들이 너무나 많다. 원숭이들은 자기 자식과 자기 무리를 목숨을 걸고 지킬 줄 안다. 친미 친일에 빠져 동족을 원수로 삼고 있는 일부 목사들과 신도들을 보면 원숭이보다 못한 무리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원숭이보다 못한 목사들이 앞장서고 원숭이보다 못한 신도들이 성조기와 일장기를 들고 그 뒤를 따른다. 분명 원숭이보다 못난 인간들이다.

 In Love

(사랑을 담아, 문학동네 2023, 신혜빈 옮김)를 읽고....
우리의 작은 독서모임에서 읽고 토론하던 책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특별히 마음에 남는 이의 책을 읽은 후 우리는 각기 연장 독서를 한다. 그 저자의 다른 책을 구입해 읽거나 그와 유사한 책을 찾아 읽는 것이다. 몇 달 전 스코트 니어링(Scott Nearing)의 책을 읽은 후 에이미 블룸(Amy Broom)의 책을 읽은 벗이 내게 이 책을 권했었다. 당시 이 책을 찾아보니 초판이 매진된 상태여서 구할 수 없었다. 지난 주 동해 촛대바위 앞에서 함께 캠핑을 하면서 그 벗에게 그가 읽었던 책이라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교보문고 봉투에 담긴 이 책이 나의 집으로 배달되어온 것이다. 처음에는 최근 내가 주문한 책이 도착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벗이 재판되어 갓 나온 새 책을 나를 위해 주문해 준 것이었다.
엊저녁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가슴에 잔잔한 울림이 이어졌다. 작가이자 심리 치료사인 에이미 블룸의 남편, 브라이언은 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은 후 그의 기억이 남아있을 때, 두 발로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때, 그리고 분별력이 남아있을 때,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기로 작정했다. 그 남편을 지켜보며 조금씩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달라지는 것을 느끼던 그의 아내 블룸은 남편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결정을 실행하는 모든 과정에 동행하며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이 책에 담고 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을 마감하고 죽음을 앞당기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는 통틀어 그것을 자살이라고 부른다. 자살은 자살하는 이가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는 이유에 따라 다양하다. 순교도 일종의 자살이고, 사랑에 실패하여 자기를 버리는 경우도 자살이며, 배반을 당하여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경우도 여기 포함된다. 이 이 모든 경우는 살아있는 자기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여 일어나는 절망의 병이다. 그런데 그 절망은 간혹 속임수일 경우도 많다. 절망이 아닌 것을 절망이라고 여긴 경우다. 그런데 아주 드물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자살도 있다. 이 경우를 일러 합리적 자살이라고 한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공포는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의 무게는 어디까지 일까? 나는 나의 책 <인간의 마지막 권리>에서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오류가 아닌 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것은 나의 생각만이 아니라 조력사를 인정하는 사회에서 이미 합의된 사안이다. 이 책에서 브룸은 남편 브라이언의 선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최악의 공포가 현실이 됐다는 게 끔찍했을 거고 이것이 미칠 영향을 최대한 빨리 파악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그는 무방비 상태에서 당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라고(229쪽)
202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된 욘 포세(Jon Fosse)의 말처럼 시간 속에서 사람은 가고 사물만 남는다. 죽음을 겪는 것들은 모두 간다. 그런데 죽음만이 아니라 공포와 무의미에 짓눌리는 것은 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부당한 것이다. 말로 듣고 생각하는 이들은 본능적으로 어떤 경우의 자살이라 할지라고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특히 신앙심이 깊은 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신이 주신 생명을 어떻게 인간이 멈추게 하느냐고, 그것은 살인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이들은 살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하다. 그 무서운 것이 자기의 것일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싫어한다.
브라이언의 의지나 선택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의 뇌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주저 않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몸은 이미 프로그램화되어 100년을 전후하여 죽음에 도달하게 운명 지어져 있다. 불행한 경우 어떤 이는 조기에 죽음에 이르고, 어떤 이는 100세가 넘기까지 살기도 하지만 사실 늙어간다는 것은 일정 부분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몸의 죽음, 정신의 죽음, 욕망의 죽음, 사유능력의 죽음 등은 존재의 죽음 이전에 이미 찾아온다. 그래서 몽테뉴는 우리의 마지막 죽음은 1/3, 혹은 1/4의 죽음이라고 했다. 우리는 죽음 이전에 부분적으로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더욱 무서운 것들이 있다. 고통, 소외감, 무의미, 독립성 상실, 단절, 그리고 기억 상실과 주체 상실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찾아오면 우리는 적거나 많거나 삶의 독립성을 상실한다. 그 중에서 사람에게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이 자기 상실이다. 자기 상실은 시공간에서 존재가 이탈하는 것이다. 삶의 좌표 평면을 읽어낼 능력을 상실하여 시간도 공간에도 적응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삶의 질에 대한 논의와 삶의 지속에 대한 애착이 있을 경우라면 여전히 희망적 이다. 그러나 모든 논리와 삶의 질서가 순식간에 혹은 서서히 증발한하는 상태에 처하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상태가 확인되기까지 혼란의 시기가 몇 년 걸린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행동들이 면밀히 추적되기 시작할 무렵이면 벌써 병이 한참 진척된 경우다. 브라이언의 경우 2년, 혹은 3년 전에 이미 발병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렇게 확인이 된 후 알츠하이머는 평균 12년이라는 시간 속에 환자를 포로로 삼는다. 환자의 노력 여부에 따라서 그 속도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끝은 자기 상실과 죽음이다. 브라이언은 알츠하이머로부터 놓여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기 전에 방어할 길을 다방면으로 모색했다. 그 결과 츄리히 디그니타스로 가기로 결정하고 아내 브룸의 동의를 얻었다.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겪는 공포보다 그의 가족이 겪는 고통의 양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진다는 것을 브룸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양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브라이언부부가 스위스 츄리히행 비행기를 타게 된 이유다.
미국에서도 의사 조력사를 허용하는 11개 주가 있다. 하지만, 각 주마다 입법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어떻게 하면 환자가 조력사를 받지 못하도록 할 것인가라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까다로운 조건과 절차와 과정을 만들어 놓았다. 말기환자에게나 적용되는 조건과 동시에 건강한 사람이나 수행할 수 있는 독립적인 행동능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블룸과 브라이언은 미국에서보다는 스위스 디그니타스(Dignitas)에서 출구를 찾고, 여러 단계의 절차를 거쳐 브라이언의 마지막 여정, 스위스 취리히로 향하는 편도 여행을 떠난 것이다.
디그니타스에서 조력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조건도 매우 까다롭다. 충동이나 우울증, 염세적인 동기에서 조력사 도움을 청하는 경우는 모두 스크린이 되어 거절된다. 충분한 합리적인 이유, 그리고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온전한 정신, 자신이 투약할 수 있는 능력이 모두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브라이언 부부는 이런 검증과정을 거쳐 마침내 알츠하이머 포로 상태의 삶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 죽음의 과정은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일단 구토억제제를 음용하고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펜토바르비탈나트륨, 몰핀보다 50배 이상 강력한 약을 스스로 투약해야 한다. 2020년 1월 30일 오후, 디스니타스에서 자신이 바라는 바대로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어감의 과정을 지켜보는 이의 가슴에는 사랑하는 만큼 눈물이 흐르기 마련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공감과 이해가 더해지는 울림이 있었다. 존엄한 죽음에 대한 여러 논의는 각자의 종교 전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스위스 디그니타스에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고령의 노인이거나, 고통이 없다할지라도 자신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 견딜 수 없는 장애나 고통을 겪는 사람인 경우다. 디그니타스는 엄격한 기준에 따라 이런 이들의 죽음을 돕는다.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이 극도로 손상되는 정황에 버려지는 경우, 디그니타스에서는 곤경에 처한 이가 죽음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여기고 그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돕는다.
나의 벗은 나의 책, <인간의 마지막 권리, 홍성사, 2019>를 읽을 때에는 내면에서 거부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책에서 내가 주장한 바가 이해가 되고 동의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우리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어느 누군가는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지 않는, 무엇인가에 의하여 이미 결정된 한계 안에서 삶의 질과 의미를 박탈당하는 정황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이해하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경건한 신앙인은 극단의 한계마저도 신의 뜻이라 여기고 고통을 견디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신의 뜻이 인간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것을 합리화하는 데까지 적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신은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아주 특별한 경우,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주셨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말하는 “죽을 권리“라는 개념은 삶을 구차한 이유에서 포기하는 자살할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권리는 한 인간의 존엄성이 극도로 손상되는 경우를 전제한 개념이다. 극도로 존엄성이 손상되는 정황이란 어떤 수단으로도 막아낼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신체적이거나 정신적 고통“이 개인의 일상을 무의미하게 지속적으로 지배하는 경우다. 이 책에서는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뇌가 붕괴되어 기억을 상실해 가고 있는 정황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법의 이름이나 신의 이름으로 이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신의 이름이나 법의 이름으로 죽어가는 이를 고통 속에 속수무책 버려두는 입장을 택하게 된다.
2021년 독일 헌법 재판소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극도로 손상되는 정황에 처한 이에게서 국가 권력이 법의 이름으로 죽음을 택할 권리를 빼앗는 것은 인권침해라는 판결을 내렸다. 법이나 국가는 그럴 수 있는 권위까지 가지지 못한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그러나 종교는 이런 인권침해를 간혹 신앙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한 인간을 고통 속에 지속적으로 버려두며 죽음은 적이고 삶의 지속 그 자체가 승리라고 여기는 신앙을 지키라고 강요하기도 한다. 나는 이런 태도는 명백한 인권침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아주 특별한 경우,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자유와 권리를 주셨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이들을 위하여 쓴 나의 책 제목을 <인간의 마지막 권리>라고 붙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