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28, 2022

소크라테스는 왜 사형수가 되었을까?

 “오류”


1.
소크라테스, 그는 시대의 반역자로 취급받았다. 그의 죄명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불경한 자라는 것이었다. 그를 고발한 자들의 참소가 이어지고, 아테네 시민으로 구성된 500명의 배심원의 투표에 의하여 280 : 220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그 부당함에 항의하거나 비록 구차하게라도 도망칠 기회가 있었으나 모든 의도를 포기하고 "마지막 행위로서의 증언", 곧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이면서 숨졌다.

이 부당한 재판 과정에서 그가 남긴 말은 “깊이 숙고하지 못한 삶은 살 가치가 없다(Unexamined life is not worth of living.).”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인류사회는 그를 지혜의 스승이라 일컫고 있지만, 사실 그는 깊이 숙고할 줄 모르는, 그래서 무가치한 삶을 살아가던 아테네 시민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철학자였다. 사유 능력을 결핍한 시대에서 철학자는 이렇게 버림을 받았다.

2.
아테네 시민들이 바라본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가 바라본 아테네 시민은 사실 서로에게 같은 의미의 판단을 주고받았다. “살 가치가 없다.”라는 의미에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바라보면서 “깊이 사안을 헤아릴 능력이 없어 가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자들의 삶은 살 가치가 없다. 그래서 깨우쳐 주고 싶었다.”라고 생각했다면,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의 근저를 흔들며 불안하게 만드는 경건치 못한 자, 그래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주어진 질서에 적응하거나 순복하지 못하도록 타락시키는 자, 그래서 죽어 마땅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판단의 내용은 비슷하지만, 목적이 달랐다. 그런데,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새로운 것”을 말하는 자는 모두 잡아, 죽여야 한다는 지배자의 욕망은 왜 피지배자, 곧 힘없고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의 주장이 되는 것일까? 280 : 220. 나는 이 수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도 깊은 상징성을 가진다고 본다.

3.
나에게는 어느 시점부터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지 않았다가” 수십 년 만에 만난 소싯적의 친구들이 있다. 중고등부 시절 교회 친구, 청년 시절 함께 성가대를 하고 교회 학교 교사를 했던 친구들, 군대 친구들, 그리고 신학교 동기들... 하지만, 수십 년 지나온 시간 속에서 우린 나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공유해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벗들을 만나면 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마음에 떠오른다. 그들의 패각 투표에 의하여 나의 사상과 신념이 사형 선고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을 간혹 받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만나면 나의 주장을 하지 않고 조용히 듣는 편이다. 몇 주 전에는 그들의 초대에 의하여 그들의 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수락산 계곡에 모여서 점심을 함께했다. 서로 헤어져 있는 사이에 나는 신학자 목사가 되었고, 그들은 교회 장로, 선교사, 사랑의 교회 신도, 온누리 교회 신도이니 우리는 우리의 젊은 날부터 셈하면 수십 년 신앙생활을 해온 셈이다. 오랜 벗이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으나, 나는 솔직히 그들과 함께 자리를 계속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어제도 군대 동기들의 모임에 몇 달 만에 나갔다. 그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성격도 위의 벗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친구는 문재인 정권의 부도덕함을 질타하면서 형편없는 윤석열이 정권을 잡게 한 원흉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나 역시 문재인 정권의 못난 점을 비판하곤 했지만, 매도성 원색 비난에는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조국 가족이 파렴치하다는 평가를 더 하고, 대학 교수라는 정경심이 동양대 표창장을 위조하여 딸의 입시에 사용한 사실을 들어 지식인 계층의 부덕성을 비난하면서 인간 이하로 본다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한명숙 전 총리 재판 결과도 명료하게 파렴치한 부패와 타락의 결과였다. 한명숙이나 조국 같이 부패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뺏긴 것이라는 현실 진단까지 내놓았다.

옛 교회 친구들은 좌파 빨갱이들이 주변에 많다면서, 전광훈이 파로 해외 선교 활동한다는 벗은 “그렇게 북이 좋으면 좌파들을 모두 북한으로 보내버려!”라는 경멸조의 결론을 내렸다. 사랑의 교회에 나가는 벗은 국가 유공자 가족을 대변하는 듯 북한 정권과 북을 싸잡아 큰 소리로 비난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설교하러 갔던 나는 졸지에 그들에 둘러싸여 오후 내내 적대적 증오를 품은 언행을 하염없이 들어야 했다. 계속 주변에 여러 사람이 피서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들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식과 판단이 틀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는 기독교 신자 무리”와 어울려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좌파, 빨갱이, 친북, 용공주의자를 상상하며 평생을 증오를 품고 살아온 것이다. 그들이 틀렸다고 비판하는 소리는 그저 좌빨의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하며 살아온 것이다.

이런 의식과 사고를 하고 있는 집단의 정신세계에 민주주의, 인권, 평화, 세계의 환경 위기라는 복잡한 사유체계가 어떻게 들어설 수 있을까. 나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로 다가왔다.

4.
나는 교회 벗에게는 그저 몇 마디만 남겼다.

“우리가 젊은 날부터 시작해 오늘까지 ‘평생 예수를 믿었다’고 자부하는 그대들이 어떻게 그리도 무시무시한 증오와 독설, 저주와 심판, 그리고 혐오를 가슴에 여전히 품고 있는가? 그런 그대들은 예수와 어떤 관계인가? 예수가 그대들에게 평생 증오와 독설, 저주와 심판, 그리고 혐오를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가르치신 것인가?”

나는 군대 동기 정 사장에게는 이런 말을 했다.

“이봐 정 사장, 자네는 비교적 양심과 의리를 지키는 상식인이라고 나는 믿네. 그렇다면 내가 하나 묻겠네. 자네 같으면 자네 딸을 앞에 불러 앉혀놓고 ‘자 동양대 표창장을 같이 위조하자. 그래서 이걸 이용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네가 의학전문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하자.’라며 딸과 함께 모의하겠는가? 그게 아비로서 할 짓인가? 그런 짓을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정말 믿는 건가?”

그러자 그렇게 열을 내며 비방하던 친구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며 아무 말을 못 했다.

“자네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 정경심 교수는 할 수 있다고 그렇게 확고하게 생각하는 것인가?”

5.
정 사장은 이재명을 향해서는 정말 파렴치한 자라고 혀를 차며 분노했다. 김 모 씨와 불륜이 있었을 것으로 의심하지 않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를 향한 비방을 생각하면, 나도 어느 정도 의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정말 그런 행위를 했다는 물증이나 증거가 없으므로 의심은 하지만 단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이재명의 형수 욕설을 인용하면서, “더러운 놈”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이재명의 형수가 동일한 내용의 언행을 정 사장 어머니에게 했다면 정 사장은 어떻게 반응하겠느냐?”고 물었다. 평소 정의감이 남다르고, 이미 돌아가신 모친에 대하여 각별한 정을 가진 친구는 다소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자기 어머니를 모욕하는 며느리에 대하여 이재명이 “되갚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라도 그런 경우를 겪었다면 용서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적인 응대보다 좀 더 합리적인 응대를 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하지만, 그 순간 “덕스러움을” 나는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일에 대하여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자신의 불찰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던가?

6.
나에게 나의 친구 정 사장처럼 “어떻게 신학대학 윤리학 교수로 산 사람이자, 목사인 사람이 이재명 같은 사람을 지지하는가? 당신도 같은 부류냐”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

나는 정 사장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판단에는 사실을 확인한 ‘사실 판단’이 있고,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흘리는 것을 듣고 미루어 판단하는 ‘추정 판단’이 있네. 나는 윤리학자로서 추정 판단을 공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네. 진실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이는 마치 재판도 하기 전에 판결을 하는 행위와 같이 그릇된 일이네. 오로지 사실로 확인된 것에 근거한 판단만이 내가 공개적으로, 책임지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하네.

예컨대 누군가 도둑이라고 의심이 간다고 하여 내가 공적인 세계에서 도둑이라고 소리를 지르면, 그 행위에 대한 사실을 입증할 책임을 내가 져야 하는 것이네.

그런데 자네의 판단은 대부분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내리는 판단이고, 그런 판단을 자네가 유통해도 자네 주변에서는 그것을 틀렸다거나, 교정해 주는 사람이 없는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렇게 되면 추정 판단과 사실 판단을 혼동하면서 선거 때마다 의도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흘리는 자들의 농간에 놀아나게 되는 것일세.”

7.
소크라테스의 죽음, 그것은 배심원들의 현명한 판단에 따른 민주적 죽음이었을까? 아니면 소크라테스를 죽이기로 모의하고 그를 법정에 고발한 아테네 지배 계급들의 음흉한 의도와 면밀한 기획에 선동을 받아 배심원들이 저지른 오판이었을까? 배심원 배후에서 과연 누가 웃었을까?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죽음은 이렇듯 사유 능력이 빈약하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대중, 자신들의 판단 오류를 인지할 능력이 없는 집단이 저지른 죄의 결과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판단의 오류를 비판해주거나 지적할 이웃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세계가 초래한 불행, 비극이 아닐까?

8.
나는 나의 교회 벗이나 군대 벗들의 분노를 이해는 한다.

그들은 평소 착한 기독교인으로 평화적으로 살아가려 노력했기 때문에 “북한을 평화의 파괴자라고 인식하는 순간” 가슴에 분노가 이는 것이다. 자신을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더욱 분노하는 것이다.

나의 친구 정 사장은 평소에 합리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약자를 배려하며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에 “부당한 행위를 한 사람으로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정경심 교수를 향하여” 분노하는 것이다. 평소 다소간의 불륜적 상상은 해도 정작 불륜에서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만 들어도” 그는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분노가 과연 의로운 분노인가?

나는 나의 벗들이 “조작된 허위 진실”에 의하여 소크라테스도, 예수도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한 번쯤은 깊이 숙고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들은 왜 사형수가 되었을까?

광주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민주주의의 요람이 된 것은 광주시민들이 "군부에 의해 조작된 허위 진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을 사형수로 만들었던 세력을 믿을 수 없었다.

9.
전쟁 당사자들은 상대를 당연히 악마로 몬다. 내 자식, 내 남편, 내 재산, 내 나라를 짓밟은 무리룰 향해 서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사악한 자들이여!” 분단된 나라 남쪽에서는 북을 “사악하다”라고 하고, 미군의 폭격에 의하여 대대로 살던 땅이 초토화되고, 형제자매 부모를 잃은 북은 남을 향하여 “사악하다”라고 한다.

나는 한 편의 주장에만 현혹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잘못은 미련하게 내 나라를 전쟁터로 만들고, 형제간에 서로 원수가 되어 서로를 죽이는 인간이 된 것이다. 한 편은 천사, 한 편은 악마가 아니다. 내 눈에는 둘 다 악마 노릇을 한 것이다. 악마는 원수 맺기와 증오와 다툼으로 우리를 내몰아간다.

왜 예수를 따른다며 평생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증오와 혐오, 미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가?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는가?

10.
부정직한 지배자들은 사실이나 진실을 감추고 지배가 용이하도록 조작한다. 진실을 몰랐던 우리는 광주 민주항쟁에 참여한 이들을 폭도라 여겼던 경험이 있다. 이 조작된 인식을 바꾸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 백인들은 흑인을 노예로 삼기 위해 성서의 진리를 조작했다. 하나님이 유색인종을 열등한 종족으로 만들어서 노예로 살아가도록 섭리하셨다는 주장이다. 인종차별의 뿌리 깊은 악이다.

-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기 쉽도록 조작한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인류 역사 속에서 여성에게 사회적 결정권을 주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오랫동안 진리처럼 굳어진 억압 규범 체계, 곧 가부장주의다.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이 비판 없이 유통된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하나님은 남성이다. 이런 주장은 틀린 것이다.

- 나는 검사들의 주장을 믿지 않는 사회가 민주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도대체 재판이 3심까지 왜 필요한가? 나는 심지어 검사만이 아니라, 판사들의 판단도 절대적이라 믿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옳을 수가 없다. 그들이 늘 옳다면 하나님의 심판이나 역사의 심판은 불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11.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의 배심원, 나는 소크라테스의 자리에 조국을, 한명숙을 넣고, 아테네 배심원의 자리에 우리 국민을 대입시켜본다. 현재로서는 아테네의 배심원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판단이 나올 것이다. 나의 옛 교회 친구들이나, 나의 군대 친구 정 사장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Unexamined life is not worth of living.“

“깊이 숙고할 줄 모르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풀어 말하자면, “깊이 숙고할 능력을 결핍한 경박한 삶은, 말은, 판단은 가치가 없다.”

얼마나 쓸쓸하고 슬픈 말인가?
그리고 무서운 말인가?
그리고 Unexamined life를 살아온 자들에게 우리 생명, 재산, 우리 자식들을, 우리의 미래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불안한 일인가?

12.
한 가지, 더,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증오하여 죽임으로 넘겨주었지만, 사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을 사랑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을 위하여 더욱 가치 있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려다가 아테네 시민들의 판단에 의해서 죽임을 겪어야 했다. 한 편은 영문도 모르고 증오했고, 한 편은 자기를 죽이려 드는 이들을 사랑했다.

예수 역시 예루살렘 거민들의 분노와 조롱과 저주의 소리 “저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마디를 남겼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십시오. 저들은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증오나 미움, 혐오, 살의를 가르친 적이 없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이다.

Saturday, April 2, 2022

신학수업에 대하여...

 신학에 대하여

 

1.

이 글은 감리교 목사로서, 그리고 감신대에서 교수로 지낸 나의 삶과 경험에 바탕을 둔 것으로 한계가 있는 글이다. 이 글은 신학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오해를 하고 있어서 나름 오해를 하지 않도록 설명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글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사실 신학이란 목사가 되기 위해 배우는 학문이라는 정도로만 여긴다. 어떤 이는 신학을 성경 공부와 같은 것이라 여기는 이도 있다. 심지어 서재에 책을 가득 꽂아놓은 일부 목사들조차 신학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른다. 그 이유는 목사라 할지라도 신학 전반을 섭렵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지나쳐 왔는지 늘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목사들이 가끔 신학자를 종교 재판 하겠다고 달려든다. 이런 현상은 신학 대학에서 그들이 기초 신학만 공부했기 때문이고, 그나마 수업 시간에 컴퓨터나 들여다보기도 하며, 그저 목사 라이선스 따기 위한 과정이기에 마지못해 억지로 수업을 듣는 이도 적지 않다.

 

2.

대부분의 신학대학에서의 신학 교육은 독일식과 미국식을 모델로 하는 2중적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독일에서는 신학수업과 인접 인문 사회 과학 수업을 겸하여 들을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종합대학 안에서 신학전공 대학 과정을 마쳐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국가고시에 합격해야 한다. 미국식은 학부에서 다른 전공을 한 후 3년 과정의 석사 과정을 마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목사 전문직을 수행할 적격자인지에 대한 검증과정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학부과정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는 교단 신학대학들이 주류였지만, 1980년대를 지나면서 일반대 출신을 위한 신학석사 과정을 설치한 후 이 과정이 주류로 바뀌고 있다.

 

신학대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단 2년의 교양과정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신학대학으로 선택한 이들이 여기서 철학, 심리학, 역사학, 법학, 종교학, 문학, 예술사, 성서 개론 등을 개론 수준에서 배운다. 아주 열심히 독서에 매진해야 제대로 교과과정을 소화할 수 있다. 그 이후에 비로소 성서신학, 조직신학, 기독교 윤리학, 종교철학, 교회사, 기독교 교육학, 기독교 상담학, 실천신학, 종교사회학 분야의 기초과정을 2년간 배워야 한다. 여기에 더해 영어는 독해 수준, 독일어는 사전 들고 독해할 수준, 그리고 성서 원어 단어 변화를 알아볼 정도의 수준에서 사전을 들고 찾아 읽을 수 있도록 희랍어, 히브리어 기초를 마쳐야 한다. 요즈음엔 어학과정을 소화해 내는 학생들이 적어 많이 약화되는 추세다. 이렇게 신학 대학과정은 교양 2, 기초신학 2, 언어 준비에 4년을 다 바쳐야 한다.

 

과거에는 학부만 공부하고 목사가 될 수 있었으나, 1980년대부터 교단마다 2년의 석사과정을 필수 과정으로 정하고 대학원 과정을 추가하였다. 대학원에서 2년은 자신이 선택한 전공 분야를 심화하는 과정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자기 전공 분야에 거의 대학원 총 학점 중 절반을 집중해 공부하고, 나머지 학점은 다른 분야의 심화 과정으로 채워야 한다. 학문적 편파성을 막기 위한 조치로서 대학원 과정은 대부분 세미나 형식으로 진행된다.

 

특히, 신학대학이 아닌 일반 대학을 마치고 온 이들은 위의 4년 과정(기초신학+전공 심화)3년에 마쳐야 한다. 이 과정 역시 너무 많은 과목을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학생들 중에는 소위 M. Div고등학교라고 칭하기도 한다. M.Div. 신학 교육을 3년에 마치는 일 쉽지 않다. 미국에서도 3년 안에 마치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전공 심화에 이르지 못하고, 논문도 써보지 못하고 졸업한 후 교회 실습 기간, 성품 및 자격 심사를 매해 통과해야 목사 안수를 받는다.

 

3.

학부와 석사과정에서 6년을 공부해도 전공분야에서 탁월한 식견을 갖추기 쉽지 않다. 전공분야는 성서신학, 조직신학, 기독교 윤리, 실천신학, 기독교 교육, 종교철학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 대학과 대학원 6년 신학을 공부했다 해도, 대학 마치고 3M. Div공부했다고 해도 내가 보기에 신학 여섯 분야 중에서 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면 그 분야에서 초보적 수준을 조금 벗어난 정도에 머물다가 대학원 공부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을 공부했다 하여 마치 신학 전반을 다 이해하고 있는 듯 주장한다면 어불성설이다.

 

이렇듯 신학대학에서 신실하게 공부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셀폰도 없고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 신학대학을 다녔던 나로서는 밥 먹고 거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렇게 공부했던 이들이 해외에 나가 다른 언어로 5~10년 유학을 하고 돌아와 함께 교수가 되어 일했다. 따라서 신학공부를 하고, 국내에서 공부를 하거나 해외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이들은 사실 자기 분야에만 다소 정통한 이해를 가질 뿐이다. 자기 분야 외, 다른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대학에는 각 분과를 전공한 교수들이 협력하여 전체적인 신학교육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다.

 

좋은 신학대학은 전공 분야에서 심화한 교수가 충분히 포진하고 있다면, 그렇지 못한 대학에서는 자신이 전공하지도 않은 분야를 적당히 가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4.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후 신학교육은 대부분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지다가 점차 한국인이 담당하게 되었다. 선교사 신학은 서구의 문화, 가치, 종교, 정치, 사회 환경에서 자라 형성된 사상체계였기 때문에 미국이나 유럽의 문화에 각색된 사상 체계가 되었다. 이것을 그대로 한국 사회에 이식하려 했을 때, 소위 서양과 동양의 존재 가치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기독교의 우월성과 동양 종교의 무가치성, 한국의 전통과 습성, 습관에 대한 몰안시, 그리고 서구 민주주의와 조선의 왕조문화, 서구에서 발달한 인권사상과 한국 사회의 남존여비, 차별문화 등등은 결과적으로 다양한 갈등을 초래했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기독교 신학은 교회 안에서 우월성을 강조하고, 우리의 종교 문화유산을 우상타파의 대상으로 삼는 풍조가 만연했고, 동양의 고등종교 역시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5.

소위 1970년대 토착화 논쟁이 일어난 분야는 조직신학과 기독교 윤리 분야였다. 다른 분야에선 직접적인 논쟁거리가 안 되었다. 가장 토론이 많은 분야는 기독교 교리를 해명하는 조직신학 분야였고, 거기서는 창조주 하나님은 왜 동양인에겐 계시하지 않으실 수 있나?”라는 질문이 나왔고, 윤리 분야에서는 어떻게 하나님 신앙 없이 동양인들도 인간성을 지켜왔나?”라는 물음이었다. 가장 핵심적인 논의는 기독교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서구신학의 모든 논거가 서구인의 삶에서 형성된 것이어서 서구의 역사, 언어, 관념, 가치, 철학이 규범으로 자리 잡고, 비서구적인 것을 이단시하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서구신학의 편협함과 우월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서구신학을 절대 규범으로 삼으면 동양인의 삶, 전통, 역사, 종교, 문화, 철학이 상대적으로 하위에 놓이게 되어 거대한 동양의 역사와 사상이 부정된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이 이런 배타적 인식에 빠져 자기 역사와 전통과 종교 철학을 멸시하는 기독교인으로 산다. 그리고 소위 보수적인 목사들은 지금도 이런 방향에 서서 서구를 숭상하며 자기 전통은 몰안시하며 이율배반적인 목회를 한다. 서구신학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동양의 사상과 문화에 대해 무지하다. 이런 서구 신학을 비판적 시각 없이 수용할 경우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동양적인 것을 하찮은 것이나, 우상으로 여기고 서양에서 수입된 신학만을 진리로 여기는 태도, 곧 서구 우월주의를 따라 맹종의 태도를 가지게 된다.

 

6.

우리나라에서 토착화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킨 윤성범 교수의 두 주저, <()의 신학(神學)><()>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서구신학 주류(主流)론을 비판한 이론을 담고 있다.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칼 바르트 밑에서 공부한 윤성범 교수는 율곡의 성() 사상으로 기독교 신학을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신실한 믿음의 차원을 그리스도론으로 해명하고, 믿음 없이는 설수 없는 존재론을 율곡의 불성무물(不誠無物)론과 유비시켰다.

 

이런 그의 신학적 작업은 동양 사상과 종교 문화는 계시론적으로 ()가 아니라, ()라는 새로운 이해를 제기한 것이다. , 기독교 경전 성서만이 계시가 아니라, 다른 종교나 문화 속에서도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켜온 것들 역시 계시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시각을 열어준 것이다. 이런 윤성범 교수의 신학과 기독교 윤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동양 문화 속에 담겨있는 삼위일체 하나님 계시의 흔적이라는 신학적 주장에 대한 논쟁을 낳았다.

 

, 비기독교적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동양의 종교를 통해 서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다운 삶을 일러주시며 일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후에 폴 니터, 죤 힉 같은 종교 신학자들의 논의와 일맥상통한다. 하나님은 기독교에 제한되는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를 통해 영성적으로 관계하며 계시하시는 분이라는 주장이다. 죤 힉의 책 <God Has many Names>는 기독교만 유일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배타적 폭력성을 해소시킨 책이다.

 

7.

토착화 혹은 종교 신학적 이해가 1970년 대 후반에 나오자, 근본주의자들은 맹렬히 이를 비판했다. “종교혼합주의다, 이단이다, 비정통이라는 비판과 비난이 쏟아지고, 심지어 감리교회 안에서 윤성범 교수를 감신대에서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으나, 다행이 그 당시 감리교 감독들의 지성(知性)이 불행을 막았다. 이어 1980년 대에 변선환 교수는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기독교와 불교 등 이웃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를 이끌어가면서 이웃종교의 선함에서 기독교가 서로 배워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고, 홍정수 교수 역시 아시아의 영성 속에서 일하는 하나님에 대한 논의를 전개 했다. 그러자 감리교회의 부흥사들이 나서서 당시 감신대 조직신학 교수였던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를 이단 재판에 붙이고 마침내 교단에서 축출하는 일까지 벌였다.

 

그는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교단에서 축출 당했다. 1990년 대 초에 일어난 이런 일련의 현상은 일종의 비이성이 지배하는 한국 교회의 현주소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사건 이후, 감신대에서 토착화 신학 논의는 내면화 되고, 표면에서 사라졌다. 이 시점부터 소위 성공을 거둔 대형교회 목사들이 신학대의 학문과 교수임용 까지 손대기 시작했고, 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교단장과 신학대 이사장이나 이사로 들어와 대학을 지배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그들의 세력의 선호도에 따라 교수가 임명되거나 거부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입장은 한국 기독교 초기에 팽배했다. 선교사들은 정복자, 혹은 문화 제국주의자가 되어 동양의 종교전통과 도덕적 가치를 비하 멸시하는 선교 사역을 했다. 이 맥락에서 진리를 서양 신학에서만 찾으려 하는 이들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보수 신앙인이다. 이들은 서구인이 자신들의 입맛대로 규정한 열등한 동양론으로 자기를 해석하고, 서구적 우월성에 영혼을 판다. 그 결과 서구의 문화제국 주의적 지배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목사가 되고, 후기 식민주의 담론, 포스트모던 담론이 왜 대두되었는지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해 지성사에서 낙오한다.

 

현대 지성사에서 낙오한 목사들이 이끄는 대형교회, 여전히 전근대적 지배자로 목사가 군림하며 신도들에게 차별금지법반대하라 교사하며 차별주의자 행세를 하는데도 그들은 영웅 대접을 받는다. 시와 문학과 철학, 예술을 하는 전위적 사유자들의 숨이 막히는 교회, 자유와 창조성이 폐쇄된 교회 - 이것은 교묘하게 신자들의 일치된 충성과 헌신을 유발하는 신천지 부류와 다름없이 사교에 가까운 것이다. 법관에게 법리적 이해가 부족하면 법관의 자의가 판치듯이, 목사에게서 신학적 기준이 미달하면, 목사의 자의가 일상을 지배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과 코드가 맞는 서양의 목사들과 입을 맞추며 서로 지지해주는 전거로 삼고, 자신들이 마치 범세계적인 시각을 가진 목사임을 주장하지만, 현대 지성사에서 그들은 낙오한 자들이며, 인문사회학의 세계에서 대화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정신적 미숙아들이다. 이렇게 한국 교회는 지성적으로 낙후된 영역으로 전락하고, 신도들은 그 속에서 발전없는 제자리 뛰기를 일삼는 자위적 신앙생활에 관습적으로 빠져 있다.

 

8.

신천지에 경을 떨면서, 신천지와 방불한 대형교회, 도덕성도, 지성도, 영성도 물신주의 앞에 후위 하는 현실은 사회 윤리적 판단 능력의 부실함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헌금과 기복신앙이 붙어 있고, 기도와 마술적 하나님 신앙이 짝을 이루며, 영성과 신비주의를 강조함으로써 합리적 사유를 회피하고, 성직자 영웅주의에 빠져 교회의 보편성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빙자하며 헌금을 받아 온갖 사치와 화려함으로 치장한다. 오만한 목사는 교인의 수에 따라 자신의 영성과 인격이 동반 상승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들이 내는 메시지는 주술가를 믿는 이를 무당과 한 목소리로 선한 지도자라 평가하고, 아무리 부정한 짓을 저질러도 권력을 가진 자라면 모두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여긴다. 그들의 교회는 인간의 합리적, 비판적 사유가 정지된 영역이 되어, 그저 아멘 할렐루야만 앞 다투며 외치는 똑 같은 모습, 평범한 무리로 채워진다. 나치 전범 재판소에서 재판을 지켜보던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의 살인적 국가 폭력의 수행자이자 기독교인이었던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역사에서 무서운 악이 일어날 때, 그 악은 거대 악의 표상을 가진 괴물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일상의 이웃 같은 이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도 상식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그들이 악을 행하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찬송을 부르던 기독교인들이 제주 4.3 학살대가 되고, 독재자 박정희의 열열한 지지자도 되고, 친일 앞잡이가 되기도 하며, 전두환의 충실한 신하이기도 했다. 이들은 세월호 유족을 조롱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사회 속에서 소수자로 온갖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된 동성애자를 향하여 저주를 퍼붓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선한 목자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누군가를 해하는 악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을 악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기비판 능력과 합리성을 자발적으로 반납하거나 몰수당했기 때문이다.

9.

베를린 중심가에는 나치의 범죄를 기억하게 하는 조형물과 기념관이 여러 개 있다유대인 대량 학살집시 학살동성애자 살해를 저지른 나치의 악행을 기억하고 반복하지 말자는 의미일 것이다그 중의 하나는 나치가 저지른 만행 중에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다 못해 조직적으로 살해한 역사를 드러내는 기념관이다왜 나치는 이들을 살해하기로 작정했을까그들은 차별받아야 할 사람증오와 미움의 대상그리고 죽어도 좋은 인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들의 존재는 독일 기독교인에게 불순이었기 때문이다.

독일 본(Bonn)대학 신학부의 마틴 호네커 교수는 기독교인은 때에 따라서 인권의 파수꾼, 변호사, 전사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일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늘진 곳에서 소수자의 인권이 침해받는 일이 없도록 지키는 파수군의 역할을, 강한 자들이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 일어날 경우, 피해자 편에서 변호사처럼 변증하는 일, 그리고 인권침해가 극심한 사회에서는 인권 침해자를 향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독일 기독교인들이 인권에 무지했을 때 그들은 나치 정권과 더불어 유태인을 증오했고, 동성애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정당화 했고, 이웃 나라를 침공하면서도 애국주의를 표방했다.

독일인들은 대중 조작에 능한 나치 정권의 속임수에 자신의 판단 능력이 마비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인종 우월주의에 빠져 자만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사회 심리적 쾌락을 누리는 기독교인들이었다. 호네커 교수는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기준을 잃으면 누구나 억압자가 되고, 착취자가 되며,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런데, 인권에 대한 이해능력이 모자라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자랑스럽게 차별을 금지하자는 법을 반대하라고 신도들에게 요구를 하고 있다. 이런 목사들이 바로,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그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인간을 차별하고 해하는 나치, 한국판 나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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