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1, 2021

주례사

 

제자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주례를 했다. 요즈음 주례를 하는 일이 마음에 쉽지 않다. 결혼에 대하여 결혼 생활에 대하여 안내를 하고 권고를 하기 전에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기 때문이다. 늘 착실하고 성실하여 내가 아끼는 오래된 제자가 오래 전에 부탁했었는데 그 마음을 한참이 지난 후에도 여전하여 주례를 하기로 했다. 목사로서 교수로서 주례자로서, 나보다 더 행복하기를 마음으로 주례사를 준비했다. 두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상투적인 결혼의 약속을 나누기보다 두 사람이 신실하게 서로에게 언약할 내용을 써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고백과 다짐을 담은 글을 보내왔다. 그 글을 읽은 후 쓴 주례사다. 결혼 주례사 1. 오늘 신랑은 신부에게 ”그대의 미소가 곧 나의 행복“이라고 고백했고, 신부는 신랑에게 ”그대의 편에서 응원하고 같은 꿈을 꾸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따듯한 남편“이 되겠다는 약속, ”현명한 아내“가 되겠다는 약속 - 나는 오늘의 이 고백과 약속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인격적으로, 평생 지켜지기를 축복합니다. 2. 나는 오늘 한 가정을 이룬 두 사람을 바라보며 양가의 부모님과 어른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너희 두 사람, 부디 행복하게 잘 살거라!”라고 비는 마음이 아닐까요? 주례자인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오늘은 신부와 신랑이 나와 너에서 “우리”가 되지만, 앞으로는 두 사람 사이에 자녀들이 더해져 더 큰 “우리”를 이룰 것입니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선에 선 두 사람에게 저는 주례자로서, 인생의 선배로서,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의 세 가지 습관을 일러주고 싶습니다. 습관은 반복하면 아름다운 덕이 되어 우리 삶을 지지해주는 원칙이 됩니다. 첫째는 서로 귀하게 여겨 존중하는 습관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최고의 남편, 최상의 아내가 되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대를 respect, 존중하는 것입니다. 남편으로부터 소중하게 존중을 받는 여인은 언제나 평화의 미소를 잃지 않을 것이고, 아내로부터 귀하여 여겨 존중을 받는 남자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남편이 될 것입니다. 서로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평생 잃지 말라! 이것이 첫 원칙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관계는 부부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만이 아니라, 자식 앞에서도 모범이 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지는 처가와의 관계, 시댁과의 관계에서도 깊은 이해와 존중의 원리가 될 것입니다. 개인이나, 집안도 상대편으로부터 귀히 여김을 받으면 오가는 마음이 고맙고, 따스해지는 법입니다. 둘째, 평화를 지키는 습관입니다. 사람이 평화를 느끼는 순간은 언제 일까요? 상대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을 때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좋은 차를 타고, 궁궐 같은 집에 살아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이의 삶을 살펴보면 평화가 있어야할 자리에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을 신뢰하는 선원들은 바다가 아무리 요동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온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장을 향한 신뢰가 없으면 이내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히지요. 삶은 험한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아서 부부가 서로 깊은 신뢰를 가질 때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신뢰가 없는 이들은 서로 의심하고, 서로 상처를 냄으로써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불행을 불러들입니다. 지혜로운 부부는 서로 깊이 신뢰함으로써 자신의 평화와 상대의 평화를 지켜줍니다. 평화를 지키는 습관, 서로 신뢰하는 원칙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가 되는, 일치, unity의 습관입니다. 오늘 내가 말하는 일치란 하나가 아니라 각기 살아가던 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30년 넘게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세상을 보는 습성, 느낌, 이해, 감각, 논리, 사고방식이 다른데 어떻게 일치를 이루라는 말일까요? 서로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더 큰 하나가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구요? 그 비결은 사랑의 신비입니다.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면 마음이 넓어져서 그것이 가능해 집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지만, 사랑이 머물면 둘을 언제나 하나로 묶어줍니다. 사랑하면 서로 다른 것도 용납할 수 있고, 상대의 허물도 가려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식으면 허물을 덮어주기보다는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돌변하지요. 그러니 저는 두 사람, 아주 얄밉도록 서로 사랑하여 언제나 마음과 뜻이 하나 되는 일치의 습관을 가진 부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3. 요즘은 한국인의 수명이 연장되어 평균 83세 이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혼 약속을 지켜야 하는 기간이 이전보다 많이 연장된 셈이지요. 오늘 결혼한 두 사람은 30대니 앞으로 50년 이상 오늘의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서로 귀히 여기며 존중하는 습관, 서로 신뢰함으로써 평화를 지키는 습관, 그리고 변치 않는 사랑으로 언제나 하나가 되는 습관, 이 세 가지야말로 두 사람이 부부로서 평생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의 원칙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021년 2월 20일 주례자

Monday, February 15, 2021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파친코를 읽고....


1. 

이 책은 일제하에서 한 가난한 식민지인 가족사를 다룬다. 일본 오사카를 주(主)무대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한 식민지인 가족이 일본 땅에서 4 세대에 걸쳐 기형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담아내고 있다. 이 이야기의 서두에 나오는 언청이 훈이의 모습은 이미 불리한 삶의 그늘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형화되어 남과 구별되고, 차별을 겪어야 하는 훈이의 불리한 처지가 비록 온전한 얼굴을 가졌지만 기형인과 유사하게 취급받는 재일 조선인의 처지와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조선인의 삶은 일본인이 쳐 놓은 조선인을 향한 차별과 배제의 구조 속에서 철저히 하위하는 존재(subaltern)의 삶이었다. 그들의 삶의 주체성은 이미 탈각되었고, 그들은 어디서나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제한된, 이등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비운을 피할 수 없었다.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후에도 이념적 갈등이 빗어내는 불안으로 인해 재일 한국인에게는 분단된 조국은 마음 편히 다가설 수 없는 곳이었다. 재일 조선인은 그들을 식민 지배했던 식민주의자들 속에서 차별과 배제의 벽에 갇혀 꾸역꾸역 살아간다. 


2.

언청이 훈이는 자기보다 더 가난한 집 딸 양진을 아내로 맞아 순자를 낳는다. 훈이의 딸 순자가 소녀티를 벗을 무렵 야쿠자 순지한 건달 한수를 만나 그의 아기를 가진다. 하지만 한수는 이미 일본에 아내와 세 딸을 두고 있는 기혼자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양진은 순자를 오사카로 목회하러 떠나는 이삭에게 맡긴다. 이삭은 순자를 아끼는 마음 반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반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아 형이 있는 오사카로 건너간다. 순자는 한수의 아들 노아를 낳고, 이삭의 아들 모자수를 낳는다. 그리고 모자수는 솔로몬을 낳는다.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차별이라는 장벽 속에 갇혀 4대에 걸쳐 이어간 이들의 삶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영역이 아닌 파친코를 중심으로 이어진다. 왜 이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파친코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3.

상상할수록 끔찍하게 느껴지는 식민주의자들의 차별적 시선 앞에서 재일 조선인 가족은 세 가지 형태의 비극적인 삶의 유형을 보여준다. 첫째는 자기 부정형이다. 순자의 첫 아들 노아와 같이 똑똑하고, 경쟁력이 있는 사람은 불평등을 감내해 내야하는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 노아는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조선인으로 태어났고, 한수와 순자의 잘못된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사실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자기 존재를 제한하고 낙인찍는 현실 속에 몰아넣는 것도 힘겨운 일인데, 그에 더해 부정한 관계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그는 모든 관계를 떠나 가족들의 시선에서 차단된 곳에서 마치 일본인인 것처럼 살아간다. 자신의 신분을 세탁했지만 인친척이 없는 고독한 삶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직업은 일본인이 명예롭게 여기지 않는 파친코 관리인이었다.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자발적으로 부정하고 지워버림으로써 일본인인 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노아는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 그 정체성이 밝혀지는 시간이 다가오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오래 전 자기를 부정했으나, 그 부정된 자기 자신을 아주 지워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몸은 조선인, 삶은 일본인이라는 이중 모순을 가진 존재, 이 모순 앞에서 명예로운 생존의 길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모자수의 삶에 비치는 삶의 양태는 차별의 벽을 수용하고 차별적 세계의 유한한 한계 안에서 타협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모자수는 조선인을 향한 억압에 저항함으로써 학교생활을 중도에서 포기한 후 파친코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삶을 살아간다. 돈을 벌어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것에 타협의 의미를 두었다. 노아가 일본인을 기준으로 삼아 자기 삶을 바라보았다면, 모자수는 조선인으로서 자기를 받아들이면서 일본인으로서의 삶의 질은 포기한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기 아들 솔로몬만큼은 자신이 넘지 못한 그 벽을 넘어 일본인에게 뒤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그는 솔로몬을 국제학교에 보내고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유학을 시킨다. 그 자신은 파친코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아들만큼은 차별의 벽을 넘어 일본인도 선망하는 미국적인 지평에서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여기서 모자수는 자기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바, 일본인을 이겨내는 삶을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실현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에 있어서 모자수는 자신의 삶에서는 재일 조선인의 한계 지워진 삶을 수용하고 타협하면서도 아들 솔로몬을 통해 희망의 출로를 여전히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셋째, 식민지 시대가 지나갔으나 여전히 배타적이며 차별적인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보다 더욱 우월한 실력과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솔로몬이 아버지의 소망대로 콜롬비아 대학을 나와 일본에 있는 영국계 은행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자기 상사였던 간교한 일본인에 의하여 부당해고를 당하는 벽에 다시 부딪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솔로몬은 아버지 모자수가 일구어낸 파칭고에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아버지 파친코를 찾는다. 이로서 모자수의 꿈은 좌절되고 솔로몬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현실적인 타협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조선인을 버리고 일본인처럼 살아가려던 노아의 자살, 그것은 아마도 오래 전에 일어난 자아 부정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차별받는 식민지인의 불리한 정황을 수용하면서도 그것을 초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모자수의 꿈은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솔로몬의 귀환으로 인하여 그의 꿈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파친코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벗어나 다른 세계를 향했던 솔로몬의 탈출 시도의 좌절과 파칭코로의 귀환은 어쩔 수 없는 이중성 속에서 끝없이 시도하는 이민자의 자기 부정의 양태를 보여준다. 재일 조선인의 삶은 결국 도처에서 차별과 배타의 벽을 넘지 못하고 파칭고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세대가 될 솔로몬의 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까? 이런 물음에 저자는 답하지 않지만, 독자는 독백하듯 묻게 된다. 


파친코를 찾는 사람은 비틀거리는 삶을 살아가다가 한 순간의 환희를 찾는 이들이다. 희망을 품고 슬롯 머신에 매어달려 있다가 이내 빈털터리가 되어 힘없이 지루한 삶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하는 그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얄팍한 희망과 좌절을 겪는 이들이다. 이들을 파칭고에서 살아가게 만든 이들은 누구일까? 


4.

 식민 지배를 받은 이들의 삶이 기형으로 태어난 훈이의 모습에서 전조를 보였다면, 임신한 순자의 삶에 주어진 구원의 길은 사실 익숙한 세상에서 추방당한 삶을 의미하며, 이렇게 잘못 자리 잡은 삶의 자리에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은 저항이 불가능함으로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self-denial) 변종적 삶으로 이어진다.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된 세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치유할 수 있는 세상은 – 일본, 남한, 북한, 미국 -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불리한 정황에서 이미 그들의 삶은 시작되었으므로 하여튼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길을 가도 조선인이 파칭코로 돌아가게 만드는 나라 일본에 대하여 작가는 하루키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 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2권, 220) 


5.

제한된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이의 푸념이다. 이 푸념은 그들이 운명에 대한 푸념이고, 그 운명을 만든 것은 식민 지배자를 조선에 들인 우리의 허약한 역사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가 우리를 망쳤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은 그래도 여전히 살아가야 하는 과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저자는 주인공들의 죽음에 대하여 매우 단순하게 처리한다. 대부분 한 줄 이상 언급도 안 한다. 매우 냉정하다. 죽음의 의미보다 삶을 서술하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세 개의 단어가 내 마음에 남아돈다. 내가 보아온 독일 이민자들, 미국 이민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의 삶보다 더욱 열악하게 느껴지는 재일 한국인의 삶 - 기형적 삶과 잘못 놓인 삶의 자리에 갇힌 하위존재의 삶(deformity, dislocation, subaltern), 아마 이런 요소들은 재일 한국인을 포함하여 제나라를 떠나 낯선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많은 부분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이나, 겹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