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May 17, 2020

명진 표 기독교 파시즘

명진 표 기독교 파시즘
기독교 파시즘에 관하여 언급한 사람은 톰 드라이버, 도로테 죌레 같은 신학자다. 이들은 기독교에는 파시즘의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고 말했다. 도대체 기독교 안에 파시즘은 왜 생기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무엇보다 목사가 권위주의적이고 권력지향적일 때 여지없이 기독교 파시즘이 생성된다. 또한 목사가 신도에게 기독교가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가르칠 때 기독교 파시즘이 발생한다. 목사가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은 추종자를 많이 거느릴 때다.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려면 신자들에게 자아도취를 시키는 동시에 그들을 갈라놓고 충성과 복종 경쟁을 시켜야 한다. 평등 공동체에서는 목사 중심의 파시즘이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치와 화합과 평등보다는 위계적인 질서를 이용해 신자를 하향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교회에는 자연스럽게 가진 자, 배운 자, 힘 있는 자가 상위의 지위를 가지고 없는 자, 못 배운 자, 힘없는 자를 지배하는 구조로 이어진다. 이런 구조에 익숙한 교인들은 당연하다고 여기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파시즘에 사로잡힌 공동체 안에서 파시즘이 구조화되어 있으므로,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니,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다른 파시스트가 목사가 되면 파시즘을 좋아하는 신도들은 그것을 오히려 자랑한다. 강력한 지배자를 선호하는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신도들이 모이면 그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통제하는 방법으로 진리독점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전체주의적 정서와 더불어 자기 집단에 대한 충성과 복종 경쟁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리고 파시즘의 구조적 특성, 목사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영웅시하고, 자기 집단을 기독교 그 자체와 동일시함으로써 목사에 대한 순종과 집단에 대한 충성을 마치 하나님이나 기독교를 향한 충성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충성과 순종은 중앙화된 권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권력은 점차 경제권력, 정치권력으로 변하고, 지배 권력의 성격을 가지게 되어 오만해 진다. 대부분의 큰 교회 목사들은 교회가 큰 것에 정비례하여 오만하고, 권력욕이 강하고, 신도들의 복종과 충성을 유발하는 법을 잘 아는 이들이다. 이들이 아무런 업적을 남기지도 않으면서 교단장 명예와 지위를 탐하는 이유다.
신도들의 남다른 충성과 복종을 유발하는 목사의 교회는 신도 수가 증가하게 된다. 신도의 충성과 복종이 과연 그리스도를 향한 복종인지, 교회나 목사를 향한 복종과 충성인지에 관해서는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설교나 교육과정이나 신도들과 관계하는 형식에서 은연중 충성과 복종을 요구하는 행위가 간증이나 예화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목사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자기 스스로를 의화하고, 영웅적으로 묘사하며, 깊은 영성가로 포장한다. 이런 포장 속에 지배와 복종을 요구하는 논리가 내재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하나님에 대한 충성이 은연중 가시적인 교회와 목사를 향한 사랑과 충성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런 속성에 익숙한 이들이 모인 교회는 일종의 전체주의 집단으로 굳어간다. 사람다운 생각, 이견과 갈등을 용납하지 않는 오만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이견과 갈등을 불러오는 요인은 모두 사탄이나 악마의 기획으로 간주되고, 영웅적인 목사는 그러한 일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증하는 설교를 하며 교인들을 세뇌시킨다. 동시에 우둔한 신자들이 스스로를 하나님 편으로, 상대는 악의 수하로 간주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런 관계가 형성되면 신도들에게서 이내 군사주의적 십자군 멘탈리티가 작동된다. 평소에 따스한 이해와 사랑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이 갑자기 증오와 혐오의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상대는 이제 이견자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적, 하나님의 원수로 낙인찍히게 된다. 70년 넘게 냉전이 지속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주의를 교도하고 군사 훈련을 통하여 원수에 대하여 증오와 혐오를 하도록 익숙하게 방향 지어져 있기 때문에, 국가보다 더 소중하고 높은 하나님, 기독교 신앙에 적대하는 자를 향해서는 더욱 노골적인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면 그는 그간 사랑을 입에 달고 살던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가학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게 된다. 죄와 악은 징벌되어야 한다는 공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고 심판자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런 심판자 자처는 생각이 다른 이견자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체주의적 집단이 그에게 부여한 우월한 권위와 권력을 행사하며 이견자를 공격함으로써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자기 집단을 보호하고, 상대의 존재 가치를 부정함으로써 승리를 거둠으로써 종교적 쾌감을 얻는 것이다. 한 예로, 이들이 이를 악물고 동성애를 저주하고, 악착같이 동성애자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흔히 말하는 동성 공포증(homophobia)현상으로 다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오만으로 가득한 전체주의자들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상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말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종교적 심판자 노릇을 자처함으로써 자신의 독점적 신앙의 진리를 타협없이 입증하는 쾌감을 얻는 것이다. 기독교 사디즘은 이렇게 작동한다.
따라서 가학적 기독교인들은 근본적으로 권력 숭배적이며 권력 지향적이다. 이들은 상대보다 강한 힘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들 편에만 서 계신 것으로 판단하고, 권력도, 물질도, 다른 여타의 가치들도 자신들이 우선적으로 독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가나안 땅을 침공하던 이스라엘 무리를 이끌어가던 사무엘같은 이를 리더의 모델로 삼는다. 불순을 허락하지 않도록 인간적인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고, 합리성도, 인의도 무시하라고 교사한다. 순수한 사람은 오직 자신들만 이라는 착각이 집단적으로 일어난다. 이 때 나타나는 그들의 모습은 선의 도구가 아니라 악의 도구다. 태중의 아기까지 죽이라는, 하나님 신앙 이전의 원시적 습속을 신앙 속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태중의 아기까지 잔인하게 죽이기를 요구하는 종교적 폭력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이다.
무덤가에서 서로 매질을 하는 짓, 온 몸에 화상이 입도록 한증막에서 목숨을 걸고 견디는 일, 뇌출혈이 일어나 쓰러질 때까지 맹목적인 복종을 하는 일, 심지어 인분을 수저로 떠먹는 비상식, 비이성적인 일은 그러니까 약과인 것이다. 이들이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파시스트 종교가 이들을 가학적인 인간으로 세뇌하고, 그 가학성에서 만족과 쾌감을 얻는 신종 인간으로 개량해 놓았기 때문이다. 극한의 과정을 견딤으로써 전체주의적인 종교 집단 안에서 충성과 복종을 보이는 행위에는 보상이 따른다. 피라밋처럼, 사다리처럼 계층화된 계급 구조에서 한 단계 높아질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이 자격은 인격이 아니라, 영성이 아니라, 우월성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된다. 비상식적인 모멸과 수치를 견뎌낸 대가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사랑과 이해와 협력과 섬김이라는 언어로 곱게 포장된다. 인분을 먹으라는 권고는 그를 높여주고 싶어서, 사랑해서다. 서로 매질을 하는 이유는 서로 성장하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디라는 것은 보다 높은 경지의 신앙인으로 승화되라는 요구다.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공포를 느끼는 훈련도 사랑해서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가학적 과정이 사랑인지, 기독교 지도자의 훈련 과정이 되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조작된 집단 속에서 이미 그렇게 해야만 통과하는 절차를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이는 앞다투어 인분도 먹고, 매를 맞아야 하고, 공동묘지를 헤매야 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이 전체주의적으로 혐오하기로 한 동성애자를 찾아가서 그들을 자극하고 괴롭히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미 이 집단은 획일적인 사디스트 변종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변신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수기와 잠언서와 고린도후서에 문자적인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읽도록 교사 받은 사람은 1세기의 종교적 문자를 20세기에 사실적 문자로 읽는다. 여기엔 지성이, 이성이, 문화 비판이, 사회적 분석이, 인문학적이거나 역사적 지식이 요구되지 않는다. 성서에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 하는 것이 충실한 것이라고 여긴다. 의심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믿으라고 세뇌되어 왔으므로 충실한 신자일수록 더 철저하게 비이성적이고, 비지성적이어야 한다. 교회 집단이 전체주의 집단이 되었으므로 이런 흐름에 역행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그간 자신이 쌓아온 자신의 지위, 관계, 신앙을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가 된다. 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것이다.
이 반이성의 행진에 참가자가 많을수록 회의의 질도 낮아지고 두려움도 적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대형 교회에서 불안한 영혼을 안심시킨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의 이성에 반하는 집단 안에서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스스로를 자해한다. 자신의 지성,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다. 근본주의 집단 안에 몸담고 있는 소위 일류 대학 출신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자학적 인간이 되고, 다른 이를 향해서는 가학적 인간이 된다. 자기가 인분을 먹고, 다른 이에게 인분을 먹으라고 하는 이유다. 빛과 진리의 교회라는 게토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일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이 부끄러운지 이들은 서둘러 일부의 이탈적 행위로 치부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정말, 집단으로 기독교 파시즘에 감염된 것이다. 파시스트의 삶이 기독교인 됨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이다. 인간을 가해하면서 쾌락을 느끼고 자기를 자해하면서 신앙을 지킨다고 착각하는 무리다.
이들은 우리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며, 공연히 언론이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주장한다. 사탄이 공격하는 것이라고 신화화한다. 그러나 목사 이름이 명진, 빛과 진리다. 교회와 목사는 애초부터 어의상 하나가 되어 있다. 그리고 장로 권사 집사 직제도 모자라 10단계의 사다리 계단을 만들어 그의 교회를 위계적으로 구조화 했다. 그 맨 꼭대기에 걸터앉아 있는 이가 누구일까? 그리고 그는 신도들을 사병화하기 위하여 바울을 빌려오고, 해병대 특수부대 UDT 극한 훈련 과정을 불러오고, 공동묘지, 인분, 매질, 그리고 뜨거운 한증막을, 이태원 게이바를 이용했다. 그리고 마치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처럼 스스로를 지도자라 자처했다. 충실한 추종자에게는 2세기의 영지주의자들처럼 “지혜자”라고 불러주어 영지적 나르시시즘에 빠지게도 만들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무엇이 문제냐고 되묻는다. 목사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중얼거린다.
목사나 신도나 파시스트 병이 들어도 너무 깊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