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23, 2017

평화강연 원고

일시: 2017년 2월 24일
장소: 감리교신학대학교 웨슬리 채플 


기독교 평화윤리 사상의 형성과 그 과제

                                                                                                박충구 박사 (생명과 평화 연구소)

I. 들어가는 말

일제 강점기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독립된 국가의 미래를 그리던 상해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주석 김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모두 감리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전 국민의 5% 정도였으나 제헌의회의 의석 30% 이상이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었고, 게 중에는 개신교 목회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시작했던 대한민국은 불행하게도 이승만의 독재로 이어졌다. 이 나라 부끄러운 독재의 역사 앞에 감리교회와 기독교는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

1) 올해가 2017년 분단 72, 해방 72, 종전 72년이다. 왜 우리는 4/3세기를 분단된 나라로 살아가고 있는가한국 교회는 무엇을 생각하며 지난 날을 살아왔는가?

2) 분단은 3단계를 거쳤다.
- 일제에 의한 36년간의 식민지배의 여파
- 국토분단 1945 8 15일 미군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으로 분할
- 주권분단 1948 8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9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가슴의 분단 1950 6 25일 북한 남침으로 인한 3년간의 동족상잔의 전쟁

3) 독일도 분단을 겪었으나 전쟁은 하지 않았다. 마음의 분단이 없었으므로 우리보다 쉽게 화해와 일치를 찾을 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나는 기독교 평화사상의 줄기들을 찾아보는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 종교의 두 얼굴: 평화와 폭력이라는 책을 출판했다.[1] 이 강연은 이 책을 평화윤리의 관점에서 다시 정리한 정리한 것이다.  

II. 평화의 파노라마
나는 인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 있는 평화는 시대마다 그 의미가 달랐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 역사를 찾아본다면 우선 고대 그리스문명권에서 이해한 평화가 무엇이었는지, 그 뒤로 이어진 로마의 평화(Pax Romana)의 성격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어진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의 변화 과정을 살피고, 오늘날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고대 그리스인들의 평화

Ancient Greek, 지중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에게해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그리스문명은 크레타문명과 미케네 문명권으로 나누어진다. 고대 그리스는 하나의 통일된 제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조그만 소도시 국가 즉 무수한 폴리스로 구성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많을 때는 약 240, 적을 때는 160개의 폴리스들이 난립했다. 하나의 정치체제로서 폴리스는 주변의 폴리스들과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반도에서는 무수한 전쟁이 일어났다전쟁이란 이들에게 있어서 생존과 파멸의 갈림길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이기는 편과 지는 편은 천국과 지옥의 대비와 같았다. 이긴 편은 상대 진영에서 마음껏 노략질하고, 여자들은 성노예가 되었으며, 아이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버려졌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은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죽여 버리는 것이 일반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 속에서 출현한 문화는 군대문화였다. 군대는 강력한 살인적 폭력성을 가진 집단이었고, 그 집단의 수뇌는 영웅이었다. 영웅들은 상대편을 진멸시키고 우리 편에게는 승리와 영광과 우월성을 안겨주는 이들이었다. 하여 이 영웅들은 비범했다. 일반인과 같은 심정을 가진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남다르게 적의에 불타고, 보복에 치밀하며, 잔인하기가 그지없고, 적의 생명을 빼앗기를 주저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당시 트로이전쟁을 이끌었던 장군이자 왕이었던 아가멤돈 포로로 잡힌 한 병사가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을 때 이렇게 말했다고 호머는 <일리아드>에 기록하고 있다.

아니다! 우리는 결코 그들 중의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어미의 태에 있는 생명까지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 종족 전체가 흔적도 없이 도말되어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리지 못할 것이다.[2] 

          이들에게 있어서 평화라는 것은 피 튀기는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얻는 것이었다그러므로 평화는 상대를 죽여야 얻고 지켜지는 것이었다그리스인들은 이런 전쟁의 문화 속에서 전투인으로 키워졌고, 증오를 배웠으며, 종족적 우월성과 연대를 덕목으로 여겼다. 이런 교육은 그들을 강력한 배타성과 잔인성으로 무장하게 만들었고, 동족에게는 우정을 타방을 향해서는 적대성을 가지게 되었다이들의 평화는 우리만의 평화 상대방의 죽음위에 세워지는 것이었다.
              어느 문화권이나 고대 사회의 구조는 유사하다증오와 편협성, 적대감과 우월성, 군사문화와 폭력성이 예찬을 받는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는 남다른 특출한 이들이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트로이 성의 왕자였던 핵토르는 그리스 군대를 사냥하기를 즐겨했다. 그러나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3] 그는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킬레스의 전차에 거꾸로 매달려 끌려 다니는 수치를 당했다. 다른 자를 사냥하던 자가 또 다른 사냥꾼에 의하여 사냥을 당한 것이다이런 역사를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공동의 평화라는 것이 없었다. 그런 평화는 근 천년이 지난 후에야 찾아왔다.
              그리스 반도 안에서 특출한 평화사상이 발아하게 된 것은 에게 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래 약 900년 동안 이들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른 이후였다. 비참한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은 33편의 비극을 남겼다. 온갖 비극을 겪으면서 전쟁을 통하여 얻는 평화가 일방적일 뿐 아니라 지속적인 평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무려 900년이 걸린 셈이다.  이들이 당시 맺은 평화협정은 446/7년에 조약된 30년 평화 협약이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그 당시 기록에 의하면 페르시아와 전쟁(BC 480-479)을 치르면서 그리스 정치가들은 제국의 통일된 전선을 가진 페르시아로부터 도시국가들의 연합 전선의 펼요성을 배웠다. 산재해 각자도생하던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의 침공을 받아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들이 서로 원수나 적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당시 그리스에는 두 개의 거대한 동맹체제가 형성 되었는데 아테네를 중심으로 연합한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맹주로 삼은 펠레폰네소스 동맹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들은 공동의 적인 페르시아와 전쟁을 치른 후에 또 다시 그리스 반도에서 패권 싸움을 벌렸다.  1차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치른 후 이들은 공동의 평화를 찾기 시작했는 데, 그 때 맺은 협약은(BC 455) 나 살고 너 죽기의 옛 방식을 버리고 공존의 가치를 인정한 것이었다. 이 시점부터 그들은 그리스인들 사이에 서로 원수가 아니라 공동 운명을 나누는 존재라는 인식을 하면서 서로 인정하기 시작했다이 때 이들이 사용한 개념이 eirene[4]였다. 그리스 말로 평화라는 단어다.
              이 조약에서 이들은 피차 상대의 생존을 보장하는 조건을 담았다.[5]

-선제 공격을 하지 않는다.
- 보급로와 수로를 차단하지 않는다.
- 문제가 발생해도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를 의심하던 태도를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영웅주의적 군사 안보 문화에 의하여 더욱 깊이 조장되었다. 이들이 지녔던 영웅 문화는 각기 자기 집단에 의한 거대한 제국을 꿈꾸었으며, 평화를 약속했던  기억을 지우려 했다. 아테네가 점차 강성해지는 것을 느낀 스파르타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선제공격을 가함으로 27년간 치른 제 2차 펠레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 이처럼 전쟁은 강자가 일으키기도 하지만, 간혹 약자의 두려움이 전쟁의 동기가 되기도 한다이 전쟁은 아테네에 역병이 돌기도했고, 스파르타가 마케도니아 - 외세를 불러들여 일단  스파르타가 승리를 거머쥐게 되었다. 기원전 371년 아덴에서 평화의 축제가 열렸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테미스의 딸로 알려진 세 자매와 그의 아들이 그려졌다.[6]

              역사가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하다가 이런 문장을 남겼다.

평화시에는 아들이 아비를 장사지낸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아비가 아들을 장사지낸다.  - 헤로도투스[7]

평화란 전쟁이 계속 되는 사이에 있던 일시적 휴전에 지나지 않았다.
                                     - 투기디데스

              2차 펠레폰네소스 전쟁은 27(BC 431-404)년간이나 치러졌다. 그 사이에 국력은 바닥이 나고 국민들은 지쳐 있었다. 이어 새로운 야욕을 가지고 그리스 반도를 재패하려 든 테베에 의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이어 그리스 반도는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의 군대에 의하여 마케도니아에 합병되고, 필립포스의 아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를 점령하지만 요절하고 만다. 그 이후 마케도니아는 198년 새롭게 부상한 도시국가 로마에 의하여 점령당하고, 이내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로마제국에 의하여 자치권을 상실하게 되어 고대 그리스는 마침내 로마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리스인들이 그리던 평화를 살펴보면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전쟁은 영웅들의 전쟁이었고, 그들의 전쟁은 평민들의 운명을 좌우했다. 영웅들은 거대한 제국을 꿈꾸고 전쟁을 통해 자신의 영웅됨을 드러내기를 원했다. 그들은 언제나 영웅주의와 애국주의를 앞세우며 평화를 파괴했다. 그들은 잔인한 역사를 반복했고, 공동체의 운명을 전복시켰다. 기원전 약 8000개의 평화협약이 있었으나 그 평화 협약은 평균 9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평화의 길은 험하고 수명은 짧았다.  고대 그리스의 평화는 평화의 이상을 꿈꾸었으나, 그실현 방법은 제대로 찾지 못했던 것이다.


2.Pax Romana:로마의 평화와 그리스도교의 변질

서설적 이해: 철학자들이 생각했던 평화-  Socrates(496-399 BC), 에피큐러스(341-270 BC)내적인 평정의 길: 아타락시아 아파테이아의 길- Zeno of Citium(334-262 BC)  influenced by cynics like -  Diogenes(404-323 BC), 권력과 부와 폭력을 조롱하던 시닉스 전통
1) 로마제국의 흥망성쇠
          지중해 연안에서 급성장하던 도시국가 로마(BC 509-27)는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악티움 해전(BC 31)에서 격파하고 로마로 금의환향하자 원로원에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위대한 자라는 칭호 아우구스투스 황제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때부터 도시국가였던 로마는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며 급속히 팽창하기 시작했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반도가 마케도니아에 접수되자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지배 체제 혹은 원수정(principatus)을 사실상 시작한 기원전 27년 부터 1453년 동로마제국의 몰락까지의 로마제국을 일컫는다. 로마 제정은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하여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그리고 1453년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서양 세계에서 장구한 세월에 걸쳐 강력한 제국으로 존재했던 로마의 위용은 로마가 남긴 흔적에서 오늘날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네그리( Antonio Negri)제국의 국경은 유동적이다[8] 라고 했다. 안토니오 네그리에 의하면 제국은 유동적이다. 왜냐하면 제국은 확장성, 권력, 권위를 가지기 때문이다( imperium,  power, authority). 제국주의적 확장은 국경을 유동적으로 만들고, 강한 군사력을 통해 지배한다. 그리고 그 지배를 통해 제국의 중앙부로 부와 가치있는 것을 흡수한다. 로마 제국역시 이러한 속성을 가졌다. 따라서 로마가 추구한 평화는 제국의 평화, 로마의평화, Pax Romana였다.  제국의 폭정에 의한 억압적 평화는 로마에 저항하는 이들을 십자가에서 처형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 졌다.

유다와 갈릴레아에 배속된 로마의 장군과 총독은 계속해서 십자가 형을 집행함으로써 주민들을 위협해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게 했다. 즉 기원전 대대적으로 일어난 반란에 보복하기 위하여 로마의 장군 바루스는 성읍을 불태우고 그 지역을 초토화하려 소탕한 후 마침내 2,000여명을 십자가 형에 처했다.[9] 

2) 로마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 250

          핍박받던 기독교는 네로의 박해에서 시작하여 콘스탄틴 대제에 의한 밀라노 칙령에 이르기까지(64- 313) 모진 고난을 겪었다.기독교는 예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따라 철저한 비폭력 평화주의, 종말론적 신앙으로 고난의 시대가 가져온 긴 터널을 지났다.  

3)사랑과 평화의 길
          박해기에 교회를 세운 것은 교리가 아니라 예수의 가르침, 곧 말씀이었다. 그것은 평화주의적인 가르침이었다.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you. I do not give to you as the
   world gives, Do not let your heart troubled and do not be afraid.[10]

  Blessed ar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as children of God.[11]

          초기 교회는 그 실천원리로서 예수의 말씀에 새겨진 새법위에 세워졌다. 그 내적 원리는 복음서의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하라는 것이었으므로 해함이 없는 삶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박해받던 교회의 성장은 박해자를 감동시킨 박해 받던 이들의 비폭력 평화사상이었다.

         정치적 원리 지배적 질서가 아닌 섬김
         경제적 원리 자기중심의 탐욕이 아닌 나눔
         문화적 원리 쾌락추구의 퇴폐가 아닌 정결

- 박해 속에서 성장한 교회,  ( Cyprian of Cartago, AD 258 순교
  extra ecclesiam nulla salutus 
                                                                                            
          평화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비폭력적인 삶을 사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군사는 평화를 무기로 삼는다고 Tertulian은 가르쳤다. 박해 받는 이들의 신앙이 견고하여 이 박해기에도 교회가 성장했다. 박해를 각오한 신앙의 길은 평화, 사랑, 생명의 길이어서 예수의 평화의 윤리의 조명을 받았다. 그렇지 않다면 초대 교회의 성장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의 평화의 복음이 로마 제국의 평화라는 밭에 심겨진 것이다

3. Pax Christi: 제국화된 기독교의 평화

서로마제국 27BC -476
동로마제국  395-1453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한 기독교 국교화 382

        4세기 말 부터는 기독교는 더 이상 박해 받는 종교가 아니었다교리와 정경을 확정하고, 제국의 종교로 변모하기 시작했다제국의 종교가 되어가는 무렵 신앙 공동체는 두 무리로 나뉘게 되었다. 박해받던 자들의 종교가 박해하는 종교가 되는 것이 정당한가 라는 내면의 물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로마의 평화와 예수의 평화는 같은 것인가 아닌가?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제국의 권력, 탐욕, 욕망, 문화를 수용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로마 문명이 낳은 평화론을 선택하는 한 편 예수의 평화론은 부록 정도로 다루기 시작했다. 소수의 사람들은 이런 타협을 거부하는 의미에서 세상 한가운데를 피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로마화된 교회는 배타적 구원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타종교 적대론, 하나님의 예정과 선민론, 하나님의 질서론, 징벌과 폭력의 수용, 이단자들 처형, 마녀화형, 심지어 십자군 전쟁도 정당화했다. 박해받던 자들이 박해자가 되었다. 암부로스와 그의 제자격인  어거스틴도 로마 제국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죄의 덩어리 로마를 끌어안는 대신 원죄의 교리를 주장했다원죄란 인간의 삶의 자리 그 자체가 죄스럽다는 주장이고, 원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 곧 은총의 분여자인 교회의 능력으로 해석되었다. 은총의 신학은 거룩한 교회에, 세속은 죄인들의 세상이라고 여기고 모든 죄인들은 교회를 통해 예외없이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공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순교자의 신학은 여기서 나온다. 칼타고의 사이프러스의 선언은 이미 3세기에 이 길을 지시한 셈이다: extra ecclesiam nulla salutes. 
         4세기 부터 20세기까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스스로를 주장하면서 영혼 구원의 우월성을 자랑하며 모든 전쟁을 정당전쟁(just war)이라며 그 이면에서 후원했다. 영적 우월성은 다른 편을 열등하게 보고, 정복과 통치의 대상으로 보게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세상을 보는 안경이었다.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도 기독교 사회의 공동선을 조화로운 평정 상태라 보고, 이를 깨거나 훼방하는 세력을 향한 징벌적 전쟁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결과 이교도 징벌을 위한 전쟁이 우르반  1세부터 시작하여 8차에 걸쳐 일어났다. 십자군 전쟁 역사가 전개되고, 이견자를 징벌한다며 마녀사냥  종교재판을 열고, 그 대상을 황제까지 삼음으로써 지상권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정당전쟁론:
- Just War Theory: 로마의 자연법론자 키세로권력은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다. 불의한 권력은 존재이유를 상실하는 것이며, 권력은 불의를 제거하는 데 존재 이유가 있다.
- Jus ad Bellum (의로운 전쟁의 요건)   Just defensive cause (Comparative Justice); Last Resort; Just Authority; Just Intention; Probability of Success;
- Jus in Bello (의로운 전쟁의 수행원칙): Discrimination principle, Principle of Proportionality

          이 전통은16세기 종교 개혁자들에게도 이어졌다. 루터는 농민들을 개같이 죽이라고 가르쳤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58명의 이견자들을 처형하고 무수한 지식인들을 추방했다. 츠빙글리히는 칼을 든 복음의 정복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 유럽의 주류 세력이 된 기독교는 한 편으로는 종교 재판소(Inquisition, Consistory) 를 차려 놓고 최고 재판정의 역활을 자인했다. 그리고 세속 정부를 향해서는 정당전쟁이론으로 전쟁을 후원했다. 이렇게 기독교 세계는 비기독교 세계를 향하여 폭력적인 방법으로 평화를 유지하려는 길을 택했다.
      반면 예수의 평화 사상은 그저 수도원 주의자들의 삶에서 이어지거나 주류 교회가 이단시했던 소종파 교회들에게서 이어졌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나타난 평화교회들은 모두 주류교회들이 아니었다. 재세례파에 연원을 둔 메노나이트후터리안형제단 교회, 그리고 18세기 영국에서 발현한 퀘이커들이 초대교회의 평화주의적 영성의 길을 다시 찾아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주류 교회 로만 카톨릭교회, 개신교 주류 루터파와 칼빈의 개혁 교회 전통을 모두 정당전쟁론을 수용했다박해받던 종교가 박해하는 종교로 변신한 것이다오직 소규모의 소종파들만 예수의 평화의 길을 따랐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평화를 기독교적 평화로 오인한 것이다.[12] 그 결과 기독교는 폭력종교가 되어 전쟁을 지지, 후원했다. 한국 교회도 이런 성향의 유전자를 선교사들로부터 물려 받았다.  
          정당전쟁이론은 기독교 주류가 세계 1, 2차 대전을 지나면서 가졌던 사회이론이었고, 지금도 우파들의 강고한 주장이 되고 있다. 군비증강과 핵무장, 진압적 정복주의와 영적으로는 상대를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세력이라고 규정하곤 했다그 대상이 국가일 경우, 정의로움은 강자 편에서 해석했고, 그 대상이 이교일 경우 하나님을 거역하는 저주받은, 신으로부터 버림받아 영혼이 파멸된 집단으로 간주했다.

4. 21세기 기독교 평화운동
1) 서구 기독교는 제국주의적인 종교다[13]라는 명제는 이렇듯 제국의 우월한 군사주의적 폭력을 교회가  이용하거나 재가했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명패다기독교가 우월성과 배타성을 가지고 다른 신앙의 사람들을 정복하고 괴롭혀 왔기 때문이다동시에 제국화된 교회는 예수의 평화의 가르침을 망각했다. 교회가 굳건하게 지켜왔던 원칙,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창과 칼로 다스려야 한다는 공리는 기독교가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크게 공헌 했다. 정당 전쟁론을 주장할 때마다 신학자들은 구약성서의 거룩한 전쟁 이론, 즉 성전론(cruade)을 빌려왔다동시에 구약성서에 담겨 있었던 계약법전의 평화사상과 샬롬의 신학을 생략했다
         기독교 역사에서 무수한 전쟁이 있었다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이 정당한 전쟁이었다종교간의 30년 전쟁, 100년 전쟁심지어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까지 정당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 1차 대전은 재래식 무기로 끝이 났지만, 세계 2차 대전은 재래식 무기가 아닌 신병기가 사용되었다. 핵폭탄이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여 핵폭탄을 개발한 맨해턴 프로젝트, 그 결과 두개의 핵폭탄이 완성되었다.
 
핵무기의 위력
- 핵융합반응 폭탄 리틀 보이(16,000, 우라늄 64 kg으로 만듬)  1945 8 6
   히로시마에 다른 하나
- 프루토늄 팻맨(플루토늄 6.2kg, 21kt)  3일 후인 8 9일 나가사키 상공에서 폭발했다히로시마에서는 13만 명이, 나가사키에서는 7만 명이 일순간에 죽임을 당했다.

- 1945년 이후 냉전이 강화되면서 군비 경쟁을 벌리며양대 진영은보다 강한 핵폭탄을 가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실전 배치된 핵무기가 약 17,300 , 그 중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각각 2,000-2,500 개를 전시체제로 운영하고 있다.
       Trident nuclear Submarine: 핵탄두와 154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을 장착하고 70-90일 잠행한다미국의 트라이던트 잠수함 5대가 항상 잠항 중인데 이 잠수함 한대에 실린 무기만 히로시마 원폭 1,000배의 화력을 가지고 있다현재 5대에 적재된 핵탄두는 약 900기이며, 2013년 다섯배 정도 강한 핵탄두 D-5로 업그레이드 했다.[14] 이제는 재래식 무기의 전쟁이 아니라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여기서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정당전쟁이론은 핵무기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그 결과 제일 처음 입장을 발표한 교회는 독일 교회였다.

2) 독일 개신교의 반전반핵운동
         1979년 헬무트 슈미트의 중재로 대륙간 3,000km -3,500km급 미사일 폐기 협상을 벌리면서 소련이 이를 실행하지 않을 경우 유럽에 퍼싱 II 미사일과 쿠루즈 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나토의 전략이 나왔을 때, 독일 개신교가 앞장서서 이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을 벌렸다. 1980-1983년까지 400만명 이상이 핵무기 도입을 반대하는 서명에 참여하며 평화운동에 참여했다그 결과 1983년 당시 집권당이었던  SPD-FDP 연정이 붕괴되었고, 나토의 이중전략을 독일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으로 선회하여 마침내  포기하게 되었다.
         이 때 독일 개신교회는 기독교가 말하는 평화는 군사주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만의 하나 핵무장을 하게 된다면 독일은 핵 선제공격의 타겟이 되어 독일이 지상에서 증발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 Dec. 8, 1987. The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 is signed in Washington, D.C. by U.S. President Ronald Reagan and Soviet leader Mikhail Gorbachev. Some later claim this was the official end of the Cold War. Gorbachev agrees to START I treaty. 

          냉전의 차가운 얼음이 풀리자 독일의 통일이 2년 후에 찾아 왔다. 평화를 선택한 독일이 인접한 구 소련 진영에 적대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과 서독의 국력이 큰 작용을 했다이 때 독일 교회는 교회가 낸 문서에서 오늘날 정당전쟁론은 핵시대를 직면하여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선언했다.  교회의 선택은 인류를 핵전쟁의 위협에서 지키려는 노력, 오직 반전 반핵 운동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라는 입장 전개했고. 독일 교회는 이어서 이 입장을 지난 50년간 거듭 천명해 왔다.[15]

3) 가톨릭교회
          1963. 교황 바오로 23세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 전 지구적 관점에서 평화를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지키는 길이라 선언했다. 이 입장은 그간 가톨릭교회가 지지해 왔던 정당전쟁론의 정당성에 다소 의문을 제기하는 수준이었다.
          1983년 미국 가톨릭교회 평화백서인류사회는 핵전쟁으로 인한 핵겨울과 멸망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서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교회가 선택할 길은 정당전쟁론이 아니라 평화신학이라는 점을 밝혔다.[16]

- 도로테 죌레: 군비경쟁은 사실상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2011년 전세계적으로 소모된 군사비는 약 1 7,380억달러

- F35 19000만 달러, 아파치 헬기 한대가 1억달러, 토마호크 미사일 한 발이 140만달러, 15억원이다.

- 우리는 군비 경쟁을 멈추게 하고 세계 평화를 지키려는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남녀와 더불어 공공의 노력에 참여하기를 원한다.[17]

- 원자폭탄  2메가급, 수소폭탄은 20메가급도 있고 가장 강력한 56메가톤 급도 있다.
서울 상공에서 20메가톤 짜리가 폭발하면  폭심 15킬로 미터를 증발시킨다. 반경 30킬로 미터 내에 있는 생명은 4도 화상을 입는 데, 이는 순식간에 숫덩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Ohio Class Trident Submarine:  14
한 대에는 155명의 승무원이 탑승하며, 한번 발진 하면 70-90일을 잠항한다. 토마호크 미사일 154기를 탑재할 수 있고, 핵탄두는 10만톤 급, 최근 D-5급으로 업그레이드, 핵탄두가 46.5만톤 으로 교체중탄도미사일 직경이 2m가 넘는 발사대를 갖추고 있다.   이 잠수함 한대가 가지고 있는 핵무기의 위력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1,000배의 위력을 가지고 있디

4) WCC  핵시대의 평화운동 평화란 그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는 결코 불의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평화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다움과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평화는 이사야의 가르침과 같이 정의가 가져오는 선물이다.
                                      - WCC 1983년 뱅쿠버 문서

1983년 뱅쿠버, 정의와 평화 창조의 보전 위원회 출발[18]
주류교회의 정당전쟁이론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


1998년 하라레 총회에서 폭력을 극복하는 10년 운동
         평화운동을 폭력을 극복하는 운동으로 해석

1999년 서울에서 열린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 대회

2011  정의로운 평화에 대한 에큐메니칼 선언[19]  킹스톤 문서
         평화운동을 비폭력, 반폭력을 통한 정의실현 과제로 해석
         하나님의 평화, 샬롬의 신학, 평화의 그리스도, 평화교회의 실현

2012  “생명과 정의 그리고 평화를 위한 경세”(Economy of Life, Justice and
       Peace for All)[20]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폭력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난날 폭력을 정당화한 것에 대한 회개를 촉구해야 한다따라서 평화를 생각한다는 것은  정당전쟁론이 더 이상 수용될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인식을 요구하는 것이며, 실천적 지평에서는 군사, 정치, 경제, 문화, 종교적 영역에서 모든 정당하다고 여겨졌던 폭력을 버리라는 요구다. 정의로운 평화가 요구되는 이유다.
          모든 생명이 군거하고 있는 지구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의로운 평화는 경제적 정의, 생태적 정의를 요구하고 실천하는 평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평화의 과제를 신앙고백적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경세, 즉 전 지구적인 정의로운 평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사회, 경제, 정치, 종교 등 제반 영역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지구의 모든 생명을 위한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세계를 변혁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III. 결론

         세계의 교회들은 예수의 평화사상으로 회귀하고 있다전쟁과 평화라는 이중 구조에서 오래 머물렀던 평화 이해는 이제 전지구적 지평에서 요구되는 정의로운 평화의 안내를 받아 모든 생명을 위한 평화, 생명을 위한 평화의 영성의 안내를 받아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정당전쟁론을 앞세워 전쟁을 지원하던 모든 사고와 행동은  낡고 진부한 것이며, 진정한 평화를 오히려 거스리는 것이 된다. 이제는 지난 것에 대한 반성과 회개, 그리고 새로운 평화의 영성의 길로 들어서야 할 때다. 여기서 구약의 샬롬 사상과 예수의 평화를 재음미할 필요가 있다.

1) 그리스 로마의 평화는 폭력적 평화였다. 전쟁 폭력, 군사주의적 폭력이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2) 예수의 가르침은 비폭력적 평화의 길이다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어 강력한 제국의 종교가 된 다음부터 주류 교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버렸다핵폭탄의 위협 앞에서 비로소 예수의 비폭력 평화, 비군사적 평화, 비정치적 평화의 길을 찾고 있다물론 아직도 많은 교회들이 폭력적 평화를 지향한다그러나 적어도 독일교회, 미국교회, 가톨릭 교회, 세계교회협의회는 핵무기를 앞세운 전쟁을 더이상 지원하지 않는다. 그 길은 지구의 멸망의 길,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생명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간혹 일본 정치가들을 보며,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생각한다. 사랑의 종교의 이름을 평화를 주장하면서 사실은 군사주의적 폭력을 평화의 수단으로 삼아 왔다. 이런 긴 역사를 돌이켜 회개하고 죄책을 고백한 사실이 없다. 오직 2011/2012 WCC 평화문서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여전이 무수한 교회들이 오만하고, 배타적이며, 영적 우월성을 자랑하며 구원의 독점자임을 자처한다. 동시에 이들은 영적 전투 상태를 선언하며 폭력적 평화를 조장하고  있다.

마태복음 5 9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는 복이 있다. 저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에베소서: 3: 14,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원수의 담을 허시고, 화해케 하며 율법 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지구에 생명으로 초대된 사람들,   만일 30년 내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핵전쟁으로 인한 것일 것이다증오와 미움은 서로를 위협하고, 적대성을 부추기고, 전쟁과 죽임의 문화를 불러들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평화의 일군으로 부르신다. 모든 미움과 폭력을 극복하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 부르며, peacemaker로 살아가라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는 평화교회여야 하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지구위의 모든 생명들을 위한 peacemaker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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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충구, 종교의 얼굴: 평화와 폭력(서울: 홍성사, 2013).
[2] Homer, Illiad, p. 147.
[3] The Dignity and Indignity of Dying as Illustrated by Literature If you want Life, Prepare for Death. in Hans Kueng, and Walter Jens, Dying With Dignity (New York: Continum, 1995).

[4] 에이레네( Greek: Εἰρήνη) 어원학적으로 연합하다, 혹은 하나로 묶다 라는 뜻을 가진 eirō에서 파생된 단어. 나뉜 것을 엮어 하나로 묶는다는 의미에서 갈등을 봉합하고 하나된 상태를 의미했다. 경우 나뉘지 않은, 하나의 상태를 의미하여, 이런 하나된 상태를 요구하거나 명령하는 계약의 의미로도 해석된다. 결국 평화상태를 지칭하거나 명령하는 의미를 가진다. Gerardo Zampaglione, The Idea of Peace in Antiquety(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1973), 26.
[5] Thucydides, The Pelopeonnesian War, tr. Steven Lattimore(Undianapolis/Cambridge: Hackett Publishing Co. Inc., 1998), 291-92.
[6] 그들의 이름은 에이레네(평화), 다이케(정의), 유노미아(행복), 풀루투스(풍요)였다. 평화는 정의와 행복, 풍요를 동반한다.
[7] Herodotus, The History of Herodotus(Chicago: Chicago UP, 1987), 1.87.4.
[8]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제국 Empire, 유수종 ( 서울 이학사, 2001), 36.

[9] 리쳐드 호슬리, 예수와 제국, 김준우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54.
[10] 요한복음 14 27
[11] 마태복음 5: 9
[12] Roland Bainton, Christian Attitudes Towards War and Peace(Nashville: Abingdon Press, 1964), 138.
[13] Joerg Rieger, Christ and Empire: From Paul to Postcolonial Times(Minneapolis: Fortress Press,2007).
[14] Center for defense information, US Navy, www.bangor.navy/navpalib/factfile. 참조.


[15]이 입장을 담은 대표적인 문서들은 다음과 같다.
1962, Die christliche Botschaft, die weltlichen Friedensprogramme und politische
            Arbeit fuer den Frieden.
1968 , Frieden Aufgabe der Deutschen.
1969 , Die Friedendienst der Christen.
1981 , Frieden Wahren, foerdern und erneuern, Denkschrift.
2007 . Aus gottes Frieden Leben Fuer gerechten Frieden sorgen.

[16] National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The Challenge of Peace: Gods Promise and Our Response : A Pastoral Letter on War and Peace(Washington D.C., 1985). (이하 The Challenge of Peace)
[17] The challenge of Peace, 99
[18] 이위원회의 설립 목적: “To analyze and reflect on justice, peace, and creation in their interrelatedness, to promote values and practices that make for a culture of peace, and to work toward a culture of solidarity with young people, women, Indigenous Peoples, and racially and ethnically oppressed people.”  참조: http://fore.yale.edu/religion/christianity/projects/wcc_jpc/
[19] WCC Decade to Overcome Violence, Initial Statement Toward an Ecumenical Declaration on Just Peace(Kingston, Jamaica, May 17-25, 2011).
[20] 2012 8, 크레타 (Kolympari, Crete)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 문서. 평화문제를 생태-경제적 정의의 빛에서 조명한 문서. 지구적인 가난과 권력과 환경 문제를 연계시킨 종합적 이해를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