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주 필리핀에서 목회학 박사과정 학생들을 위한 coteaching에 초대되어 가르쳤다. 샌드라 휠러(Sandra Wheeler) 교수가 주강사였고 나는 통역을 맡았다. 과목은 웨슬리 전통에서의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 in the Wesleyan Tradition)이었다. 웨슬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신학적 입장을 살핀 후 우리는 웨슬리의 초기 설교문과 후기 설교문을 주 텍스트로 사용했는 데, 그 중에서 가슴에 깊이 남은 내용들은 웨슬리의 경제윤리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웨슬리는 고전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했고, 다양한 설교를 출판했다. 그 결과 요즈음으로 환산한다면 수억의 수입이 있었다 한다. 목회 초창기에 받은 급여와 후반에 받은 급여가 상당액수 차이가 났지만 웨슬리는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비용 이외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금에 헌금했다.
그의 검소한 생활을 단적으로 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있다. 웨슬리의 초상화를 보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늘어진 것이 많은 데, 그 당시의 유행에 따르면 머리를 단정하게 짜르는 것이 일반이었으나 웨슬리는 머리를 짜르는 비용을 아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의 겉옷은 낡고 헤어져 팔굽이 나올 지경이어서 그의 주변 사람들이 웨슬리에게 새 옷을 입히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번번히 웨슬리는 새옷 입기를 거부했다. 그 옷을 살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스프와 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웨슬리는 성탄절 이브, 눈이 내리는 길목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금을 모았다. 어느 해 성탄절에는 800파운드나 모은 적도 있었다. 이제는 이런 전통이 구세군으로 건너갔지만, 사실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하고 돕기 위하여 성탄절에 자선남비 운동을 하는 것은 웨슬리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웨슬리는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용서함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도상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의롭다함을 받은 이들은 따라서 거룩한 삶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 거룩한 삶을 일러 신학적으로 성화(sanctification)라 한다.
그런데 웨슬리는 그런 신학적 개념에 머물렀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마다 자신의 가족들을 생존을 위한 배려와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 정도의 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했다. 따라서 근면하고 성실하여 돈을 버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가르치곤 했다. 그러나 그는 근면하게 번 돈을 가지고 과도한 사치와 욕망을 채우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날카롭게 경고했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물질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사회에는 중세 장원경제의 몰락으로 인하여 도시로 몰려든 빈민들이 넘쳤고, 사회보장제도는 전무했다. 그나마 중세부터 가난한 이들의 연명을 위한 공동경작지(commons)도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갔다. 웨슬리의 일기를 보면 거리에서 뼈다귀를 주워다 끓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개가 물고온 뼈다귀를 빼앗아 멀건 국을 끓여 먹는 이도 있었다 하니 그 가난의 극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의 부유층들은 쌍두마차에서 사두마차, 육두마차로 갈아 타면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사람들이 먹어야 할 곡식들이 부유한 집안의 마차를 끄는 말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위스키를 만드는 자재가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가난한 이들이 먹어야 할 곡식을 그릇 사용하는 풍토에 대하여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웨슬리의 금주운동은 술 그자체를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극단의 빈부의 현상을 분석하면서 웨슬리는 부유한 이들의 귀에 거슬릴 설교를 수없이 했다. 부유함의 위험(the danger of riches)이라는 설교와 돈의 사용(the use of money)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웨슬리는 자신의 말년에 도달하면 할 수록 세속적인 가치와 적당히 타협하는 감리교회를 향해 불타는 마음으로 권고했다. 사치와 행락, 그리고 이기적인 삶에 빠져드는 감리교도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부유함이 가져오는 영혼의 파멸을 두려워하라고 설교했다. 그는기독교의 무능의 원인이라는 글(Causes of the inefficacy of Christianity)에서 복음의 정신을 망각한 이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불타고 있으니 타오르는 웨슬리를 보러 오라!"고 외쳤다. 그의 가슴은 복음으로 불붙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 사랑과 가난하고 지극히 적은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웨슬리는 결코 부유함과 성공을 노래하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 편에서서 부유함과 안략을 누리는 이도 아니었다. 그는 교권을 자신의 명예로 삼고 돈을 사랑하는 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가난한 자들을 성서가 말하는 지극히 적은 자(the Least)와 동일시하고, 그 적은 자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이런 웨슬리의 정신을 잃어버린 감리교회를 보고 있다.
한 주간동안 웨슬리의 삶과 사상, 그의 설교들을 읽으며 가르치는 우리 교수들이나 목회학 박사과정의 마지막 수업을 듣던 18명의 목사들은 이 따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목회를 해오면서 가졌던 가치들이 얼마나 세상과 타협한 것이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웨슬리와 먼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몰염치한 주의 종들이었는가? 에 대하여 깊은 후회와 자책, 그리고 새로운 결단에 이르려는 숙연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나는 웨슬리가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그가 좋아하던 차를 마시지 않기로 작정하고 일년에 5파운드를 모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그리고 그가 머리깍는 비용을 아껴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잠시 통역을 멈추어야 했다. 나의 삶의 일부분에서 가난을,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며 살아온 모습이 눈 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안일과 편안함, 악락과 부유함, 사치와 고급스러운 품위있는 삶 - 웨슬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품위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허세를 부리는 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굶주린 가난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이들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았던 웨슬리를 새롭게 만난 귀한 시간이었다.
좀더 검소하고, 좀더 절약하여 고된 삶을 사는 이들의 이웃이 되려는 것 - 이런 노력이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의 과정이고, 사회적 성결의 출발점 이었다. 성화와 성결은 그러므로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뚜렷이 타자를 위한 삶의 증거다. 종교적인 개념으로서의 성화는 늘 인간의 죄성에 가로막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검약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하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삶이 없다면 성화와 거룩함이란 참으로 공허한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웨슬리가 임종에 가까웠을 때 성공회의 전통에 따라 존경할만한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의미에서 교회의 모든 창을 검은 천으로 치기 위하여 천을 구입하려는 이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낭비하지 말것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관을 덮는 검은 천을 구입하는 것은 허락했으나 관과 함게 묻지 말고 자신의 장례가 끝나면 그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유언했다.
웨슬리의 삶과 사상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말하라면 이제부터 나는 그의 지극히 적은 자에 대한 헌신적인 관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항목을 빼어 놓는다면 웨슬리의 삶을 해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그는 그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치부한다는 비난에 답하면서 그의 삶의 청렴함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내가 죽은 다음 내 재산이 10파운드 이상 남거든 나를 도적이나 강도였다고 증언해도 좋다." 그가 이렇게 청빈한 삶을 살아간 것은 다름 아니라 지극히 적은 자와 예수를 동일시하는 그의 신앙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우리는 죽기까지 검소한 삶의 원칙을 지키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잃지 않았던 웨슬리의 그 정신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예수가 가르친 청빈의 윤리가 웨슬리에게 와서는 아웃들을 위한 나눔을 위한 청빈의 윤리로 나타나고 있었다. 보다 검소한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성결과 성화의 길과 깊이 마주닿아 있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Friday, July 13, 2012
웨슬리 전통에서의 사회적 성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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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and Justice in Solida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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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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