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13, 2012

웨슬리 전통에서의 사회적 성결

나는 지난 주 필리핀에서 목회학 박사과정 학생들을 위한 coteaching에 초대되어 가르쳤다.  샌드라 휠러(Sandra Wheeler) 교수가 주강사였고 나는 통역을 맡았다. 과목은 웨슬리 전통에서의 사회적 성결(Social Holiness in the Wesleyan Tradition)이었다.  웨슬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신학적 입장을 살핀 후 우리는 웨슬리의 초기 설교문과 후기 설교문을 주 텍스트로 사용했는 데, 그 중에서 가슴에 깊이 남은 내용들은 웨슬리의 경제윤리와 연관된 것들이었다.

웨슬리는 고전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했고, 다양한 설교를 출판했다. 그 결과 요즈음으로 환산한다면 수억의 수입이 있었다 한다.  목회 초창기에 받은 급여와 후반에 받은 급여가 상당액수 차이가 났지만 웨슬리는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비용 이외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금에 헌금했다.

그의 검소한 생활을 단적으로 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있다. 웨슬리의 초상화를 보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늘어진 것이 많은 데, 그 당시의 유행에 따르면 머리를 단정하게 짜르는 것이 일반이었으나 웨슬리는 머리를 짜르는 비용을 아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의 겉옷은 낡고 헤어져 팔굽이 나올 지경이어서 그의 주변 사람들이 웨슬리에게 새 옷을 입히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번번히 웨슬리는 새옷 입기를 거부했다. 그 옷을 살 돈이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스프와 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웨슬리는 성탄절 이브, 눈이 내리는 길목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금을 모았다. 어느 해 성탄절에는 800파운드나 모은 적도 있었다. 이제는 이런 전통이 구세군으로 건너갔지만, 사실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하고 돕기 위하여 성탄절에 자선남비 운동을 하는 것은 웨슬리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모금운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웨슬리는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용서함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도상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의롭다함을 받은 이들은 따라서 거룩한 삶으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 거룩한 삶을 일러 신학적으로 성화(sanctification)라 한다.

그런데 웨슬리는 그런 신학적 개념에 머물렀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마다 자신의 가족들을 생존을 위한 배려와 인간다움을 지켜낼 수 있는 정도의 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권장했다. 따라서 근면하고 성실하여 돈을 버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가르치곤 했다. 그러나 그는 근면하게 번 돈을 가지고 과도한 사치와 욕망을 채우는 일에 대해서는 매우 날카롭게 경고했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물질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사회에는 중세 장원경제의 몰락으로 인하여 도시로 몰려든 빈민들이 넘쳤고, 사회보장제도는 전무했다. 그나마 중세부터 가난한 이들의 연명을 위한 공동경작지(commons)도 산업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라져갔다. 웨슬리의 일기를 보면 거리에서 뼈다귀를 주워다 끓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개가 물고온 뼈다귀를 빼앗아 멀건 국을 끓여 먹는 이도 있었다 하니 그 가난의 극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회의 부유층들은 쌍두마차에서 사두마차, 육두마차로 갈아 타면서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사람들이 먹어야 할 곡식들이 부유한 집안의 마차를 끄는 말들의 먹잇감이 되었고, 위스키를 만드는 자재가 되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가난한 이들이 먹어야 할 곡식을 그릇 사용하는 풍토에 대하여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했다. 웨슬리의 금주운동은 술 그자체를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차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극단의 빈부의 현상을 분석하면서 웨슬리는 부유한 이들의 귀에 거슬릴 설교를 수없이 했다. 부유함의 위험(the danger of riches)이라는 설교와 돈의 사용(the use of money)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웨슬리는 자신의 말년에 도달하면 할 수록 세속적인 가치와 적당히 타협하는 감리교회를 향해 불타는 마음으로 권고했다. 사치와 행락, 그리고 이기적인 삶에 빠져드는 감리교도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부유함이 가져오는 영혼의 파멸을 두려워하라고 설교했다. 그는기독교의 무능의 원인이라는 글(Causes of the inefficacy of Christianity)에서 복음의 정신을 망각한 이들로 인하여 기독교가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불타고 있으니 타오르는 웨슬리를 보러 오라!"고 외쳤다. 그의 가슴은 복음으로 불붙고 있었고, 그의 영혼은 하나님 사랑과 가난하고 지극히 적은 자들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웨슬리는 결코 부유함과 성공을 노래하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권력을 가진 자들 편에서서 부유함과 안략을 누리는 이도 아니었다. 그는 교권을 자신의 명예로 삼고 돈을 사랑하는 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가난한 자들을 성서가 말하는 지극히 적은 자(the Least)와 동일시하고, 그 적은 자들을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늘날 이런 웨슬리의 정신을 잃어버린 감리교회를 보고 있다.

한 주간동안 웨슬리의 삶과 사상, 그의 설교들을 읽으며 가르치는 우리 교수들이나 목회학 박사과정의 마지막 수업을 듣던 18명의 목사들은 이 따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눈물을 글썽이곤 했다.  목회를 해오면서 가졌던 가치들이 얼마나 세상과 타협한 것이었던가? 그리고 얼마나 웨슬리와 먼 삶을 살아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몰염치한 주의 종들이었는가? 에 대하여 깊은 후회와 자책, 그리고 새로운 결단에 이르려는 숙연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나는 웨슬리가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그가 좋아하던 차를 마시지 않기로 작정하고 일년에 5파운드를 모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그리고 그가 머리깍는 비용을 아껴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으면서 잠시 통역을 멈추어야 했다. 나의 삶의 일부분에서 가난을,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며 살아온 모습이 눈 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안일과 편안함, 악락과 부유함, 사치와 고급스러운 품위있는 삶 - 웨슬리는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품위있는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허세를 부리는 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굶주린 가난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이들을 늘 마음에 품고 살았던 웨슬리를 새롭게 만난 귀한 시간이었다.

좀더 검소하고, 좀더 절약하여 고된 삶을 사는 이들의 이웃이 되려는 것 - 이런 노력이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의 과정이고, 사회적 성결의 출발점 이었다. 성화와 성결은 그러므로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뚜렷이 타자를 위한 삶의 증거다. 종교적인 개념으로서의 성화는 늘 인간의 죄성에 가로막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검약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웃들을 배려하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삶이 없다면 성화와 거룩함이란 참으로 공허한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웨슬리가 임종에 가까웠을 때 성공회의 전통에 따라 존경할만한 이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의미에서 교회의 모든 창을 검은 천으로 치기 위하여 천을 구입하려는 이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낭비하지 말것을 요구했다. 그는 자신의 관을 덮는 검은 천을 구입하는 것은 허락했으나 관과 함게 묻지 말고 자신의 장례가 끝나면 그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유언했다. 

웨슬리의 삶과 사상에서 핵심적인 부분을 말하라면 이제부터 나는 그의 지극히 적은 자에 대한 헌신적인 관심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항목을 빼어 놓는다면 웨슬리의 삶을 해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그는 그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치부한다는 비난에 답하면서 그의 삶의 청렴함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내가 죽은 다음 내 재산이 10파운드 이상 남거든 나를 도적이나 강도였다고 증언해도 좋다."  그가 이렇게 청빈한 삶을 살아간 것은 다름 아니라 지극히 적은 자와 예수를 동일시하는 그의 신앙관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우리는 죽기까지 검소한 삶의 원칙을 지키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와 사랑을 잃지 않았던 웨슬리의 그 정신이 참으로 소중하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예수가 가르친 청빈의 윤리가 웨슬리에게 와서는 아웃들을 위한 나눔을 위한 청빈의 윤리로 나타나고 있었다. 보다 검소한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인의 성결과 성화의 길과 깊이 마주닿아 있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Tuesday, June 19, 2012

나가사키 카톨릭 순교지 여행







34일의 나가사키 여행을 다녀왔다. 16세기 가톨릭교회의 선교지였던 일본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외부를 향해 개방했다. 해상을 통한 교역은 활발했다. 상업용 해상로를 따라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이 선교사로 유입되었고, 일본인들은 선교사들의 삶과 신앙을 보고 그들을 따라 하나님 신앙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본 문화 구조 속에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이들이 갈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황제숭배와 신토이즘때문이었다. 신토이즘은 일본식으로 토착화된 정치와 종교가 야합한 권력구조다. 서양 종교를 가진 이들은 권력이 요구하는 범주안에서 이해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종교가 정치와 만나면 두 가지 사회 현상중 하나가 나타난다. 권력종교로 살아남든지 아니면 박해를 받는 것이다. 정치와 종교가 잘 만나면 정치는 종교를 이용하고, 종교는 정치를 이용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낸다. 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가 취했던 방식이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가 잘 만나기 이전에는 충돌이 일어났다. 이런 충돌이 일어날 경우 언제나 약자 편에 선 이들에게서 피의 역사가 뒤따랐다. 권력에 길들여지지 않는 종교일수록 피를 많이 흘렸다. 로마 제국 안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초기 기독교 역사가 순교의 역사였던 것이 그 사례라면, 어거스틴 이후의 기독교는 오히려 비기독교 세계를 박해하는 권력종교가 되었다. 종교개혁자들도 자신과 견해가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일을 당연시 했다. 
 
16세기에서 비롯하여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의 가톨릭교회 선교는 억압과 핍박의 대상이었다. 교토에서 사로잡힌 천주교인들을 850 킬로나 떨어진 나가사키까지 끌고 와 참형에 처한 역사를 들었을 때 나는 인간의 잔인함에 대하여 탄식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 교회가 이교도들이나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간주했던 이들을 고문하고 죽이던 방식과 유사했다. 그들은 인간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고문을 가하고, 잔인하게 처형했기 때문이다. 낮선 아시아 땅에 찾아와 죽음을 당했던 선교사들, 그리고 그들이 전해 준 새로운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던 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이 숙연함을 주었다. 종교는 종교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에 대한 기억의 제의를 가지지만, 종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이들에 대한 기억은 역사 속에서 소리없이 지워지곤 했다. 
 
그렇게 많은 순교의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소수의 사람들만 기독교인일 뿐이다. 주일을 맞아 찾아갔던 교회에는 노인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래된 낡은 교회에 와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한국교회에 비하여 일본교회는 일본에서 권력종교로서 자리 잡지 못했다. 일본의 천황체제와 결탁한 신토이즘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종교권력구조가 천황체제를 부정하는 곳에서 형성될 수 없었기 때문이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번영신학도 자리 잡지 못했는데 이 또한 신토이즘이 히노데이즘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대체효과가 없었다고나 할까. 그에 반해 우리 나라의 토착 종교들은 정치권력과의 밀접도가 매우 약했다. 개신교가 정치권력과 밀착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이 있었던 셈이다.
 
순교자들이 죽임을 당했던 자리는 종교들에 의하여 성지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신앙으로 치장되고 미화되어 선명한 영웅적 신앙으로 투사되곤 한다. 이런 문화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생명보다는 죽음을 예찬하는 종교가 될 수 있다. 어느 신학자의 주장대로 죽음을 사랑하는 종교(necrophilia religion). 그런 느낌이 들어서인지 우울했다. 권력과 종교가 조우하여 일어난 박해가 억압자와 박해자는 무죄방면 하듯 흘려보내고 죽임을 당한 이들에 대한 기억을 담아 신앙의 영웅으로 흠모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없고, 고난을 겪은 피해자도 없고, 다만 제도권 종교가 칭송하는 신앙의 영웅들만 남은 듯 하였다. 생사를 넘나드는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비극적으로 죽어간 이들에게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은 현세에 대한 미련을 포기한 이들이다. 그들은 초월적 신을 위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소유도 가지지 않으며, 더구나 권력의지도 포기한 이들이다. 그러므로 박해와 순교의 순간이 다가오면 신명(神命)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평범한 신자들은 그들의 모범을 보고 순교의 길을 뒤따랐을 것이다. 개신교 성직자들은 이런 가톨릭교회의 타세계적, 혹은 세계를 초월하는 성격의 신앙을 비판해 왔다. 그 대신 그들은 세속적인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고 삶을 누리며 살아간다. 이들은 권력 투쟁도 하고, 살아남기 위하여 동류 교회와 경쟁도 한다. 승리를 얻기 위하여 상대방의 몰락을 의도하기도 한다. 개신교 전통의 세속화된 가치체계 안에서 내세에 대한 희망만을 남기고 자신의 육신을 내어주는 순교의 길을 걷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사키는 19458911시경 원폭이 투하되었던 곳이다. 우리 일행은 원폭 현장과 평화공원을 찾았다. 비가 내리는 평화공원에는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편으로는 수평선을 가리키는 팔의 모양을 한 거대한 남성 상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하늘과 주변, 그리고 그 폭탄에 의하여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인류 역사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기념관을 가지고 있다. 나가사키 상공 약 500미터 즈음에서 터진 원자폭탄은 순식간에 나가사키 중심부를 날려 버렸고, 수만의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어머니의 젓을 물고 있었던 아기부터 일상으로 밥을 짓던 아낙까지 순식간에 죽임을 당했다. 그들은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없이 죽임을 당했다. 제국주의의 망령에 자식들을 전선에 보내고, 서구 제국주의의 원자 폭탄에 의하여 영문없이 죽임을 당했다.  
 
나가사키 여정은 내게 무고한 이들의 죽음, 그리고 그들에게 죽음을 가져온 이들에 대한 망각을 일깨워 주었다. 여행 내내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는 매우 우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기록들을 살펴보며 나가사키 주변을 다녔다. 나가사키 중심부, 나가사키 항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외국인으로서 무역을 하던 한 유럽남성과 사랑을 나누었던 게이샤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 있는 동산이 있었다. 푸치니의 오페라 쭈쭈(나비)부인의 작품상 무대가 되었던 곳이 바로 나가사키다. 서양 남자를 사랑했던 한 게이샤의 낭만적 사랑은 끝없는 기다림 끝에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타난 사람으로 인하여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일편단심 기다림을 아는 동양여인의 사랑에 비하여 이미 그런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서양남자의 사랑은 여인에게는 비극의 결말을 예고할 수 밖에 없었다. 서구를 향하여 일찌기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문물을 제일 많이 받아들였던, 그리고 서양 종교를 수용했던 바로 그 자리가 서양인들이 만든 원자폭탄에 의하여 피폭된 자리가 되었다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가사키 서단 소토메 언덕에는 일본 천주교 박해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 침묵의 작가 엔도 슈샤쿠 문학관이 있다. 신학교 시절 읽었던 그 책에서 나는 예수의 초상을 밟고 살아남는 한 연약한 인간을 그리고 있는 슈샤쿠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세와 초월을 위하여 기꺼이 현세를 내던질 수 있으리라 스스로 여겼던 로드리고 신부, 그리고 그 신부 곁을 맴돌면서 현세의 구원과 내세의 구원을 교차하며 희구하면서도 배교를 서슴지 않는 기치지로, 배교를 하면서도 살아남는 인간을 향하여 나를 밟으라“ ”밟아도 된다고 하는 예수초상의 음성이 내게 남아 있었다. 수난자들에게 주어진 내재적 그리스도론은 배교를 침묵으로 감싸주는 예수를 이해하게 했던 작품이다.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소토메 앞 바다의 정경은 아름다웠다. 그 바다를 바라보던 슈샤쿠는 주여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왜 바다는 저리도 푸르른 것입니까?“라는 글을 침묵 시비에 남기고 있었다.
 
그렇다. 신은 침묵하신다. 인간의 가슴이 아프고 절절해도 하나님의 침묵은 계속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나가사키에서도 침묵하셨다.  수난의 계절에도 순교의 자리에서도 신은 침묵하셨다. 고난과 수난의 계절에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신의 침묵을 배웠다. 그러나 고난과 죽임이 없는 곳에서 인간들은 신을 대리하여 신의 소리를 발한다. 거기서 신은 침묵하는 신이 아니다. 거기에는 너무나 말이 많은 신, 사람에 의하여 강요당한 언어를 내뿜는 우상만 존재한다. 아마도 우리 삶의 깊은 고뇌의 순간, 우리 죽음의 순간에서도 신은 침묵할 것이다. 우리 일행 중 침묵을 배운 일본 그리스도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는 소리도 나왔다. 나는 그의 요구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공항으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순교지 숙연한 죽음의 자리에서 계속되던 신의 침묵에 대한 우리 내면의 물음은 각자의 가슴 속에 가라 앉았다.

Sunday, May 6, 2012

젊은 날 가슴을 적셨던 시

"비에도 지지 않고..." 군대를 마치고, 어느 길을 가야 할까 고민하던 그 시절 가난한 나의 가슴에 선명한 자유를 준 시... 마르크스 아우레리우스의 명상록과 이 시는 나에게 있어 삶의 순수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안겨주었다.


宮沢賢治 미야자와 켄지(1896-1933)

雨にも負けず 雨にも負けず 비에도 지지 않고
風にも負けず 바람에도 지지 않고
雪にも夏の暑さにも負けぬ 눈에도 여름더위에도 지지 않는
丈夫な体を持ち 튼튼한 몸을 가지고
欲は無く 욕심은 없고
決して怒らず 결코 성내지 않으며
いつも静かに笑っている 언제나 조용히 웃고 있어
一日に玄米四合と 하루에 현미 4흡과
味噌と少しの野菜を食べ 된장과 약간의 야채를 먹으며
あらゆる事を 모든 일을
自分を勘定に入れずに 자신을 계산에 넣지 않고
よく見聞きし分かり 잘 보고 듣고 알며
そして忘れず 그리고 잊지 않으며
野原の松の林の陰の 들판 솔 숲 그늘의
小さな茅葺の小屋にいて 조그마한 초가지붕 오두막에 살면서
東に病気の子供あれば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行って看病してやり 가서 간호해 주고
西に疲れた母あれば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行ってその稲の束を負い 가서 그 볏단을 져주고
南に死にそうな人あれば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行って怖がらなくてもいいと言い 가서 두려워 말라 일러주고
北に喧嘩や訴訟があれば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이있으면
つまらないから止めろと言い 부질없으니 그만 두라 말하고
日照りの時は涙を流し 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
  寒さの夏はおろおろ歩き 추위 닥친 여름엔 허둥지둥 걸으며
皆に木偶の坊と呼ばれ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 우고
褒められもせず 칭찬도 받지 않고
苦にもされず 부담도 되지 않는 そういう者に
그런 사람이 私はなりたい 나는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