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4, 2009

한을 삭히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학기말이 다가오면 영락없이 나는 무수한 석사학위 논문을 읽어야 한다. 논문을 읽으면서 배우는 것이 많았던 때도 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요즈음에는 나를 감동시키는 논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대학원 학생들이 고민하지도 않고, 공부하지 않고 쓴 논문을 읽는 일은 참으로 피곤하고 지루한 일이다. 오늘도 세 편의 논문을 읽고 심사했다. 그 중에서 한 편의 논문이 내심 새로운 느낌도 있었지만 구지 그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않고 글 쓴 이의 진정성을 의심했다. 출처를 명료하게 밝히지 않고 쓴 글, 그리고 논문이 다 끝나가도록 직접인용한 글이 별로 없는 글이라서 시덥지 않은 글로 여겼다.

그런데 논문심사를 받으러 들어 온 학생은 나이 오십이 넘은 목사로서 경북 어느 지방에서 목회하는 분이었다. 논문에 대하여 질문하고 답변을 들으며 나는 그가 민중의 한을 단해야 한다는 민중신학적 태제를 변형시켜 민중의 한과 체념을 연결시키고 있는 그의 생각을 발견했다. 한을 풀어야 한다고 여겼던 종래의 민중 신학자들의 투쟁적 단(斷)에 비하여 그의 주장은 단 보다는 “삭힘“이 더 옳다는 것이다. 절망과 원과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가슴에서 그것들을 삭혀지고 발효되어 해학이 되기도 하고, 푸념이 되기도 하고, 노랫말이 되어 허공에 떠돌기도 한다는 것이다.

김용주 선생의 글을 읽다가 “잘난 체”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느꼈다. 등자락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글이다. 나의 뒷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그렇게 느낄 수도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나 역시 “잘난 체”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이율배반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으니 그런 “체 함”에 대한 혐오를 주고받는 셈이다. 그런데 며칠 전 동료 교수 한 분이 은퇴를 몇 년 앞당겨 명예 퇴직을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교수생활이 “재미없다”고 했다. 그 말에도 깊은 공감이 느껴졌다. 요즈음에 교수생활을 하려면 제자들의 안면몰수 하는 태도를 참아야 하고, 모욕적인 공개 대자보 정도는 상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얼마 전 교단 홈페이지에서는 학교를 떠난 지 10년도 채 못 되었을 젊은 목사가 나를 향해 “그대가... 아는가?”라는 표현을 던지기도 하고, 얼마 전 교정에서 본 듯한 이름들이 교단 홈페이지에서 안하무인 무례한 글을 던지기도 한다. 간혹 나 역시 비판과 비난을 던지는 이들의 이름에 겹치는 “잘난 체”하는 모습에서 나는 정의와 진실로 포장된 비인격을 느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은 사소한 이득을 위하여 인간성을 배반하는 진면목을 목도하는 순간이다. 요즈음에는 정의와 진실을 수단삼아 동료를 얽어매고, 도덕과 윤리를 이용하여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나는 옳고 그름을 잰체하면 주장하는 잘난 체 하는 이들의 경박한 진실이 동료 인간을 악마로 치부해 버리는 주장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한 편은 도덕적 인식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이라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그런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본 훼퍼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성공과 번영과 평화와 행복을 선물해 주는 마술방망이 같은 하나님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을 버리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없이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 앞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선 존재처럼 사랑과 책임을 걸머쥐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실용주의적 하나님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겹겹이,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과 고통과 멸시를 안고 살아온 노예들과 하층민들, 그리고 이 사대를 살아가는 제 3세계의 민중들에게 있어서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유한 나라의 하나님은 가난한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부유한 나라의 하나님 없이 가난한 나라의 무력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것은 그릇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이름이 빈 껍질과도 같이 텅 빈 것이지만 마치 가득 차 있는 것 같이 여겨진 까닭이다. 우리는 이렇게 빈 사랑의 껍질을 안고 살아갈 때도 있다. 나는 이런 것이 한(恨)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 아닌 사랑을 사랑으로 여기고 평생을 살아 온 삶에 대한 보상은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모든 것을 걸고 바치며 사는가. 그런데 그런 사랑이 기만을 당하고, 상대에게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 되었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도 보상될 수 없는 허무의 골을 남긴다. 상대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 삶의 한 자락이 무너지고,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런 허무의 골은 보복할 수도, 보상을 받을 수도 없다. 그저 삭힐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간을 향하여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는 하나님이란 보복과 정의의 심판을 선포하려는 지배자가 아니라, 도무지 메울 수 없는 무의미와 고통, 한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을 향하여 무조건적인 사랑을 건네는 하나님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철없는 이들은 이런 하나님을 일러 “나/우리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규정하려 들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사도 하고, 전쟁도 하며, 이름도 날릴 것이다. 나는 이런 모양이 종교를 그릇되게 이해한 이들이 필경 치러야 할 허무의 몸짓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한을 삭히며 살아가는 이들의 한을 읽을 수 있어야 참된 목회가 가능할 것 같다는 한 학생의 말 속에서 문자로 해명할 수 없는 큰 배움을 얻었다. 한을 삭히며 살아가는 이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 한 한을 품은 이들을 향한 우리의 사랑의 의무와 책임 또한 면제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