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22, 2009

Desmond Tutu의 No Future without Forgiveness를 읽고...

“정의의 윤리를 넘어서 ‘우분투’의 윤리로...”



가장 잔인한 인류 역사는 백인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흑인 노예제도였다. 그리고 그 노예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잔혹하고 포악한 사건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36년간 저질러진 인종차별정책이었다. 흑인노예제도는 수세기에 걸쳐 약 4000만명의 흑인들과 그들의 가족을 희생시켰다. 남아공에서는 암암리에 시행되던 차별정책은 그것이 공식화된 후 36년간 약 150만 명의 흑인들에게 잔혹 행위를 한 포악의 역사를 남겼다. 그러나 포악의 역사는 지속될 수가 없는 법이다. 남아공에서는 흑인들의 참정권을 거부하던 인종차별 정책이 폐지되고 1994년 4월 27일 흑인들이 참여한 투표에 의하여 의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감옥에서 27년을 갇혀 있었던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만델라 정부가 직면한 가장 커다란 과제는 백인 정권이 흑인들에게 가한 잔혹의 역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자칫 잘못하면 기존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의 저항과 힘없는 흑인들의 변혁의지가 부딪혀 역사적인 참극이 일어날 수 있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이 역사의 장면에 하나님은 성공회 남아프라카 대주교였던 데스문드 투투를 준비해 두셨다. 투투 감독은 깊고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이었다. 그는 “진실과 화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깊은 신앙에서 우러난 맑고 투명한 통찰과 지혜로 남아공의 신생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사람이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의 내면 깊은 곳에 담겨있는 용서의 능력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수 십년간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했으며 심지어는 고문하고 살해해 온 역사를 들추어내면서 그리고 무수한 흑인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한 끔찍한 잔혹 행위들을 진실의 이름으로 불러내면서도 그는 용서만이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남아공의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위원회는 그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협력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책을 덮었다가 다시 열었다.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지르는 잔혹함의 역사를 마치 내 목전에서 목격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인간의 존엄성이 철저히 박탈된 자리에서 죄 없이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며 나는 인간의 추함과 악의 깊이에 대하여 경악했다. 남아공의 고위 정치가들이 “처리하라”는 말 한마디가 정의를 요구했지만 아무런 힘이 없었던 흑인들에게는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포악은 포악을 낳았다. 백인 정권에 저항하던 흑인 저항 운동가들에게서도 백인들의 포악과 유사한 포악이 행해졌다.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두 가지 포악의 진실을 드러내려고 했다: 억압자들의 포악과 피억압자들의 포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이 정치화될 때 얼마나 부도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라인홀드 니버의 통찰이 적중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인간의 영혼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더 깊이 감격했다. 진실과 회해 위원회에 나와 증언하는 이들을 통하여 너무나 엄청난 잔혹한 인권침해 사실들을 알게 되자 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하면서도 투투 감독은 정의의 윤리보다 용서의 윤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아들과 딸, 형제 자매에게 고문, 강간, 살인 등 짐승같이 포악을 행한 자들에게 징벌을 요구하는 대신 용서를 선택하고 복수를 꾀하기보다는 아량을 베풀며 기꺼이 그들에게 사면을 베풀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프리카 토착민들의 영혼 속에 담겨 있는 “우분투”의 정신에서 나온 관대함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저 사람 우분투가 있어” 라고 말하는 것이 최고의 찬사이다. 우분투란 용서와 아량을 베푸는 마음과 태도를 의미한다. 2차 대전 직후 유태인들이 가졌던 보복의 윤리와는 사뭇 다른 윤리다. 자신의 가족들에게 고문, 강간,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던 잔혹행위자들을 향하여 아프리카인들은 “우분투”를 실천했던 것이다.

투투는 말한다. 우리는 보복을 위하여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기 위하여 진실을 규명한다고. 온통 가해자와 피해자로 얼룩진 남아공의 악몽과 같은 포악의 역사를 청산하면서 투투 감독이 추구했던 것은 가해자가 동료 인간의 권리를 무참하게 훼손했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 용서를 구하면 그에게 사면을 베푸는 것이었다. 관대하여 친절하고, 남을 보살피며 자비롭게 살아야 한다는 아프리카인들의 평화와 화해의 정신, “우분투”의 정신은 자칫 남아공이 빠질 뻔했던 폭력에 의한 보복과 피의 악순환을 영원히 멈추게 한 아름다운 영혼의 힘이었다.

나는 이 책을 고통스러운 피해의 아픔을 가진 이들, 혹은 다른 이에게 고통을 준 기억으로 인하여 잠 못 이루는 밤을 새기도 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2차 대전 직후 나치에 의하여 포악을 겪다가 죽임을 당한 동료 유태인들을 대신하여 유태인들은 정의를 요구했고, 그들은 뉴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서 나치들을 처형할 것을 요구 했다. 유태인들이 타자를 향하여 요구했던 것이 정의와 보복의 윤리였다면, 유사한 고통을 겪은 아프리카인들은 정의와 보복의 윤리보다 관대함과 너그러움의 윤리를 선택하고 실천했다. 아마 어떤 이는 이러한 용서의 윤리에 대하여 정의의 부재라고 영리하게 비판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 편으로는 정의의 윤리를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하여 불의를 행하는 유태인들에 비하여, 자신들을 가해한 이들에게 까지 관대함과 보살핌의 태도를 실천하는 “우분투” 정신이 보다 높고 고귀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그릇 행한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정의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우분투”의 부재일 따름이다. 그리고 간혹 우리 자신이 누군가를 가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우분투”의 결여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데스문드 투투 감독은 잔혹한 인종차별정책, 아파헤이트를 멈추게 하는 것은 정의의 힘으로 피의 보복을 불러와 또 하나의 미움과 원한을 남기는 길이 아니라, 그런 잔학의 폭력의 길과는 전혀 다른 길, 인간다움의 실천에서 그 비결을 찾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우분투”의 실천으로 인하여 세계의 주목과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우분투의 정신을 가진 이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 온 지난 역사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참으로 놀라운 정신의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보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려면 우리는 용서를 구하고, 또한 용서를 해야 한다. 이 귀한 가르침은 이 책의 내면에 흐르는 영혼의 소리이다.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누구나 이 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 믿는다.

Wednesday, June 17, 2009

한명숙 전총리의 조사

노무현 대통령님. 얼마나 긴 고뇌의 밤을 보내셨습니까? 얼마나 힘이 드셨으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봉하의 논두렁을 달리셨던, 그 어여쁜 손녀들을 두고 떠나셨습니까?

대통령님. 얼마나 외로우셨습니까? 떠안은 시대의 고역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새벽빛 선연한 그 외로운 길 홀로 가셨습니까?

유난히 푸르던 오월의 그날, ‘원칙과 상식’ ‘개혁과 통합’의 한길을 달려온 님이 가시던 날, 우리들의 갈망도 갈 곳을 잃었습니다. 서러운 통곡과 목 메인 절규만이 남았습니다.

어린 시절 대통령님은 봉화산에서 꿈을 키우셨습니다. 떨쳐내지 않으면 숨이 막힐 듯한 가난을 딛고 남다른 집념과 총명한 지혜로 불가능할 것 같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님은 꿈을 이루기 위해 좌절과 시련을 온몸으로 사랑했습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힘차게 세상에 도전했고, 꿈을 이룰 때마다 더욱 큰 겸손으로 세상을 만났습니다. 한없이 여린 마음씨와 차돌 같은 양심이 혹독한 강압의 시대에 인권변호사로 이끌었습니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정의를 향한 열정은 6월 항쟁의 민주투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살아온 님에게 ‘청문회 스타’라는 명예는 어쩌면 시대의 운명이었습니다.

‘이의 있습니다!’ 3당 합당을 홀로 반대했던 이 한마디! 거기에 ‘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있었고 ‘개혁과 통합’의 정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원칙과 상식’을 지킨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거듭된 낙선으로 풍찬노숙의 야인 신세였지만, 님은 한 순간도 편한 길,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노사모’ 그리고 ‘희망돼지저금통’ 그것은 분명 ‘바보 노무현’이 만들어낸 정치혁명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은 언제나 시대를 한 발이 아닌 두세 발을 앞서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너무나 영악할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왜곡과 음해들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돌아가지 않았고 급하다고 건너뛰지 않았습니다.

항상 멀리 보며 묵묵하게 역사의 길을 가셨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젖은 이 땅의 권력문화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았습니다. 화해와 통합의 미래를 위해 국가공권력으로 희생된 국민들의 한을 풀고 역사 앞에 사과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님이 대통령으로 계시는 동안, 대한민국에선 분명 국민이 대통령이었습니다.

동반성장, 지방분권, 균형발전 정책으로 더불어 잘사는 따뜻한 사회라는 큰 꿈의 씨앗들을 뿌려놓았습니다.

흔들림 없는 경제정책으로 주가 2천, 외환보유고 2,500억 달러 무역 6천억 달러,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를 열었습니다.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어 한반도 평화를 한 차원 높였고 균형외교로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해 냈습니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쓰는 세계 첫 대통령으로 이 나라를 인터넷 강국, 지식정보화시대의 세계 속 리더국가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 땅에 창의와 표현, 상상력의 지평이 새롭게 열리고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한류가 넘치는 문화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습니다.

대통령님이 떠난 지금에 와서야 님이 재임했던 5년을 돌아보는 것이 왜 이리도 새삼 행복한 것일까요.

열다섯 달 전, 청와대를 떠난 님은 작지만 새로운 꿈을 꾸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잘사는 농촌사회를 만드는 한 사람의 농민, ‘진보의 미래’를 개척하는 깨어있는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는 소중한 소망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봉하마을을 찾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을 보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뇌하고 또 고뇌했습니다.

그러나 모진 세월과 험한 시절은 그 소박한 소망을 이룰 기회마저 허용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문제에 대해선 한없이 엄격하고 강인했지만 주변의 아픔에 대해선 속절없이 약했던 님.

‘여러분은 이제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는 글을 접하고서도 님을 지키지 못한 저희들의 무력함이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그래도 꿈을 키우던 어린 시절의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지막 꿈만큼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입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세상은 ‘인간 노무현’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회조차도 빼앗고 말았습니다.

님은 남기신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근 써놓으신 글에서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실패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맞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남아 있는 저희들을 더욱 슬프고 부끄럽게 만듭니다.

대통령님. 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님의 말씀처럼 실패라 하더라도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제 저희들이 님의 자취를 따라, 님의 꿈을 따라 대한민국의 꿈을 이루겠습니다. 그래서 님은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는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 생전에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분열로 반목하고 있는 우리를 화해와 통합으로 이끄시고 대결로 치닫고 있는 민족 간의 갈등을 평화로 이끌어주십시오.

그리고 쓰러져가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시금 꽃피우게 해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대통령님을 떠나보냅니다. 대통령님이 언젠가 말씀하셨듯이,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대통령 하지 마십시오. 정치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바보 노무현’으로 살지 마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는 부디 더는 혼자 힘들어 하시는 일이 없기를, 더는 혼자 그 무거운 짐 안고 가시는 길이 없기를 빌고 또 빕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님을 놓아드리는 것으로 저희들의 속죄를 대신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가시는 길, 이승에서의 모든 것을 잊으시고, 저 높은 하늘로 훨훨 날아가십시오.

대통령님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했습니다.

대통령님 편안히 가십시오.

2009년 5월 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위원장 한명숙

Saturday, June 6, 2009

벌거벗은 임금님

한 사회 안에서 교수 집단은 지식인 상층부를 구성하는 위치에 있다. 교수들은 다른 이들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지식을 계발하여 현실 세계 이해의 폭을 더욱 넓힐 뿐 아니라 보다 심원한 차원에서 정신적 사회적 자유를 확대해 나가는 소명을 가진 집단이다. 그런데 대학 사회를 바라보면 가관이다. 가난한 제자들로부터 향응을 제공받는 이들, 은밀히 사소한 선물 받기를 즐겨하는 이들, 심지어는 연구비 착복도 서슴치 않는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일부 몰지각한 지식인들의 경우다. 대다수 교수들은 교수로서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며 학문하기에 모든 힘을 쏟는다. 오랜 기간 국내외적으로 학문을 연마해 온 교수들에 비하여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법관들은 어떠할까?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나라 검찰과 법원의 비인격성에 대하여 깊은 회의를 가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직무를 감당해 낼만한 도덕적, 이성적, 학문적 깊이가 없다는 생각이 나의 편견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면 그 행태들이 졸렬하기 그지없고 사소한 이해관계에 천작하는 가벼운 존재들이 많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지난 2년 전 난생 처음 내가 근무하는 대학의 총장의 고소로 검사를 만났을 때, 나는 그가 가지는 비인격적 태도에 깊이 놀랐다. 대학 교수인 나를 마치 어린아이 취급하듯 눈을 부라리기도 하고, 은근히 자기 견해를 쫒지 않으면 버릇없는 청소년처럼 역정을 내면서 은근히 위협적인 언사도 마다 않았다.

나보다 나이가 열다섯은 아래일 것 같은 그 젊은 검사는 그가 가진 권력이 공권력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했다. 그에게 주어진 공권력이 마치 그의 개인적인 권력인 것처럼 그는 인간으로서 한 인간 앞에 매우 우월한 자세와 태도로 일관했다. 처음 검사를 만나고 돌아온 그 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슨 깊은 함정에 빠진 듯한 답답한 느낌이 나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서로 옳음을 주장하는 두 편의 주장을 듣다보면 어느 한 편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혹은 더욱 간교한 방법으로 거짓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총장과 교수라는 신분의 차이를 계급적으로 인정하는 그 검사의 시선에 의하여 차단되고 있었다.

국가 권력은 권력을 독점한다. 비록 민주사회라 할지라도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받은 기관이 사법기관이다. 대대수의 선진국에서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사형제도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므로 사법부는 실상 특정한 경우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권한까지 가진 무서운 존재다. 사실상 법원은 법을 지키기 위하여 존재한다. 법은 인간을 지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가질 때 이 명제는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면 정권의 개 같은 법관들이 버젓이 활동하던 시대도 적지 않다.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잡아다가 사상범으로 몰기위하여 죄를 조작하고, 법관들은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던 것이다.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헌법기관이 저지르기도 한다.

이명박 정권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후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국민들의 입과 귀를 막고, 장벽을 치며 자신들만의 요새를 만들 모양이다. 세종로에서 컨테이너로 민의의 통로를 막더니 이번에는 시청광장을 경찰 버스로 둘러막는 모양이 어쩌면 그리도 미련한지 모르겠다. 노무현 정권에 비하여 하는 모양이 나라의 체면과 양식과 품위를 고려하기에는 역부족인 무리들처럼 보인다. 민주와 인권에 눈을 뜬 많은 젊은이들은 이 시대착오적인 현상을 바라보며 이명박 정권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다. 반민주적인 정권이다. 이런 반민주적인 정권의 양태들을 모른 척 눈감고 있는 검찰, 그리고 두드려 패고 막는 이들을 옹호하는 정권, 민주적 사유의 확산을 위하여 노력하던 시민 운동가들을 잡아 가두기 위한 정치사찰의 망령이 되 살아난 느낌이다. 이 반민주적인 역류에 편승하여 정치검찰은 노무현 가치를 분쇄하기 위하여 전정권의 도덕성을 표적 삼았다.

나는 오로지 고시에 매달려 젊음을 소비하던 이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스스로의 인격과 교양을 위한 노력에 그들이 과연 얼마나 시간을 사용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두식 교수의 최근 책 불멸의 신성가족은 법관들이 권력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사법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저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정작 섬겨야 할 국민들은 잊어버린 전근대적인 집단의 양태를 보이고 있다는 실상을 그리고 있다. 이렇게 평생을 산 법관들의 “정의에 대한 의식“이 얼마나 현실주의적인 것일 것인가에 대하여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검찰의 교양 없음 위에 얹어진 절대 권력을 염려한다. 그리고 더 큰 권력을 향한 유혹이 거기에 더해질 때 자진하여 정권의 개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까?

나는 노무현의 탈권위적 정치에 대하여 지지를 보냈던 사람이다. 그의 교양 없음보다 나는 그의 신념이 더욱 귀해보였고, 그의 교양 없음이 그의 신념을 비하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권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를 지으며 한 국민으로서 민주의식의 확산과 참여에의 권리를 행사하던 그를 검찰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검찰이 보수 여론에 혐의 사실을 과장 확대하도록 나발을 불던 그의 혐의 때문이 아니라 한 정치가의 사상과 신념의 깊이를 헤아릴 줄 모르고, 그 사상의 소중함을 인식하지도 못하며, 그러므로 존중할 능력이 없었던 검찰의 천박함 때문이다. 노무현의 영전 앞에 머리를 숙인 무수한 남남북녀들을 노무현을 파렴치하게 몰아가던 검찰이 어찌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정권의 개가 된 일부 검찰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이며 절차적인 합의가 가능할 때만 제대로 기능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제아무리 99%의 지지를 받는다 하여도 인권을 보장할 능력과 자신이 없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이거나 권력의 전횡 곧 야만이 되는 법이다. 나는 이명박 정권의 입과 경찰 수뇌의 입과 검찰의 입이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다. 저들이 국민 앞에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것은 저들이 진실하지 못한 까닭이다. 입으로는 국민을 섬긴다고 하면서 섬기기는커녕 국민의 입과 귀를 틀어막고, 민주적 대화와 소통의 길을 폐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 표현의 자유와 집회 결사의 자유는 절대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민주사회의 필수 조건이다.

함량미달의 정권이 결국 노무현을 죽였다는 생각을 나는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은 자신의 죽음으로 노무현의 신념과 가치를 지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무현의 죽음 이후 지난 두 주간 나의 가슴에는 비가 내렸다. 나의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난 후의 슬픔은 오래되지 않아 지나갔지만, 노무현의 죽음 앞에서 나를 찾아온 슬픔은 쉽게 나를 떠나지 않았다.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육두문자를 써가며 그를 줄창 비난해 대던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면, 이명박 정권은 정권을 잡자마자 국민들의 귀를 통제하고, 문화를 통제하며, 소통을 감시하는 권력이 되었다. 노무현 정권이 이해하던 권력과 이명박 정권이 이해하던 권력은 이렇듯 다르다. 누가 국민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섬긴 사람인가? 노무현인가 이명박인가?

청와대 뒷산에서 무수한 촛불을 바라보며 반성했다는 그가 촛불을 진화하기로 작정한 것이 과연 반성의 증거인가 아니면 입따로 몸따로 국민들 앞에서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쟁이의 진면목인가? 어떤 이는 노무현이 너무나 이상주의자였기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모든 권력기관을 놓아 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힘이 없는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이명박 정권처럼 집권하자마다 친 노무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굿판을 벌리고, 언론을 장악하고, 민주시민들의 언로를 막은 것이 당연한가? 노무현은 노무현을 마음껏 비판하도록 바보처럼 허용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언론과 인터넷을 사찰하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소리들을 가려내어 축출하려 든다.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이란 그 근본이 민주적 의식의 결여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유로운 토론이 결여된 세계에는 아부와 첨언을 일삼는 무리들에 둘러싸인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가 빈번해질 뿐이다. 어린 아이 눈에 벌거벗은 알몸을 보이고 있는 데도 임금은 민주주의를 옷 입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사실 벌거벗은 임금이란 권력을 탐하여 권력에 도취된 집단의 희생물이다. 길거리의 어린 아이도 손가락질하는 벌거벗음을 인식할 통로를 잃어버린 것은 그의 아둔함의 결과이기도 하다.

권위주의적 정권이 빠지는 함정은 도덕적 판단능력을 권력의 위하력으로 대신한다는 점에 있어서 언제나 오류에 빠진다. 그리고 이런 정권은 그 본질이 반민주적일 수밖에 없다. 합법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에 국민적 합의와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권력을 힘으로 장악하려 드는 독재적 본성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어떤 정권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려 든다면 그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불행을 막으려면 사법부가 국민의 기본권을 명료하게 옹호해야 한다. 사법부가 정권의 개가 되면 애꿎은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 막대한 정신적 물리적 비용을 물게 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정치가들보다 법관들이 한 수 위의 도덕적이며 민주적인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벌거벗은 임금을 칭송하는 우스꽝스러운 사법부가 아니라 국민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벌거벗은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있는 기관이기를 바랄 뿐이다. 여기저기서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적 작태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의 검찰은 농부로 돌아간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검찰이 되었다. 전직 대통령의 인권을 지켜주기는커녕 온 사회의 희롱거리로 만드는 검찰이 힘없는 국민을 과연 두려워하고 있을 것인지 나는 의문한다. 이런 자들에게 정의의 칼을 맡겨 놓은 우리의 현실이 나는 참으로 불안하기만 하다.

벌거벗은 임금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뒤늦게 대통령 재임시절 노무현의 사심 없는 삶의 태도, 그의 신념과 가치를 되새기고 있다. 투박한 진실을 천하다고 여기던 이들이 벌리는 우스꽝스러운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의 정치현실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는 아마도 노무현의 거짓 없는 진실을 외면하고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던 거짓된 진실의 진면목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노무현이 보여준 탈권위, 탈권력정치는 반민주 정권에 대한 비판을 불러오는 위험한 기억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다. 탈권위, 탈권력적인 정치란 정권의 한계를 명시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 실천될 수 없는 것이다. 노무현이 남겨준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을 안고 있는 우리 국민들에게 있어서 벌거벗은 임금이 강요하는 억압정치의 포악성은 이제 더이상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