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10, 2008

An Interview With Marc H. Ellis, A Jewish Liberation Theologian



자유의 다리 앞에서


특별 대담: 유대 해방신학자 마크 엘리스 교수 인터뷰

일시 2008년 6월 2일 / 장소: 감신대
대담자: 박충구 (감신대 기독교 윤리학 교수)

박: 반갑습니다. 분주한 일정 중 시간을 내 주셔서 기독교 사상을 대신하여 교수님과 인터뷰 기회를 가지게 된 것에 감사드립니다. 엘리스 교수님에 관하여 기상의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제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만, 가능하면 이 인터뷰가 오고 가는 대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수님께서 그 동안 한국과 관련하여 가진 관계들은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특히 금번 한국 방문 목적과 관련하여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엘: 제가 한국과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제가 뉴욕의 메리놀 대학에서 1980년부터 1995년까지 교수로 지낸 시절로 되돌아 갑니다. 그 당시 많은 한국 학생들이 메리놀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왔는 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 문규현 신부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저는 당시 한국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문 신부님을 비롯한 다른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면서 저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민중신학을 접하게 되었고, 이어 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홍콩, 인도, 파키스탄, 필리핀을 거쳐 1990년 저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었습니다. 이번에는 한국 학 연구소 (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가진 “ 문명과 평화 국제 포럼” (2008 global Forum on Civilization and Peace)에 강연자로 초청되어 오게 되었습니다.

박: 지난 방문에 비하여 이번 방문에서 한국에 대한 특별한 인상을 받은 것이 있는지요?

엘: 각 방문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었는데요… 1990년대 초에도 이번 처럼 정부와 시민사회간의 긴장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번 방문에서 뭔가 특이한 것이 있다면 광우병 소고기 사태 (웃음)가 특별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사회는 아직 정부와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두 번의 방문 기간 동안 제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한국인들이 평화와 정의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한반도 평화에 대한 문규현신부님의 증언에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광우병 쇠고기 문제가 관심의 초점이 되어 있다는 점이 달랐습니다.

박: 기독교 사상 독자들의 관심을 대변한다면 아마도 많은 독자들이 도대체 마크 엘리스 교수가 누구냐고 물을 것입니다. 엘리스 교수님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규정하면서 그리고 한 유대 해방신학자로서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교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교수님의 삶의 여정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엘: 저는 1952년에 태어났습니다. 홀로코스트 대학살 사건 이후 첫 세대인 셈이지요. 저는 어린 시절 유대주의 전통을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엔 이스라엘이 건국 이전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아직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판가름하는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만해도 대학살 사건을 홀로코스트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저는 이런 정황의 그늘 아래에서 자랐습니다. 나치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홀로코스트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67 전쟁 이후입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이나 홀로코스트에 대한 질문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핵심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한 유대인으로서 저의 삶은 이렇듯 홀로코스트나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논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형성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의 삶은 유대주의와 이스라엘 민족의 전체역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저의 삶의 부분을 나타내고 있고 또한 상대화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삶에는 깊고 깊은 문제, 혹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대학 교수로서 이 문제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연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박: 결국 ‘유대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안고 살아오신 셈이로군요.

엘: 예 그렇습니다. 저는 유대인인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왔습니다. 이런 관심을 넘어서 저는 제 주변의 비유대인들과 많은 교제를 나누었는데, 그 중에 대부분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을 향해 매우 공격적인 입장에서 기독교가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사귐은 제 삶에서 아주 커다란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몇 가지 이유에서 저는 유대인이 정말 무엇이냐를 찾기 위하여 제가 속했던 유대인 공동체 밖으로 나가야 하기도 했습니다.

박: 유대인 공동체 밖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엘: 저는 저의 어린 시절을 플로리다 회당에서 유대인으로 지냈고, 플로리다 대학에서 루벤슈타인 문하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루벤슈타인이 바로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홀로코스트”라고 이름을 붙인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의 핵심에서 자기를 규정하는 그 정체성과는 다른 이해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저는 유대인들로부터 배제나 간접적인 추방을 경험하기도 했다는 의미입니다.

박: 유대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데요. 교수님은 1967년 전쟁을 전후해서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정체성이 이루어 졌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왜 그런가요?

엘: 아…. 말하자면 그 전쟁 이전에는 유대인들이 자기를 동일화할 대상이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1967년 전쟁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 동안 무엇이 벌어졌는지에 대하여 명료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또 그런 사실들을 확대 해석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어떤 현실을 가지고 있지만 그 현실에 대하여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로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한반도가 분단되었을 때 아마도 사람들은 그 분단의 의미가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 온전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분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료하게 밝힐 수 있는 바와 같은 것입니다. 역사적 사건 그 자체가 있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이전 보다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홀로코스트 사건 역시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안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힘을 가질 수 있었을 때 비로소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아마도 우리 유대인들은 1967년 전쟁 이전엔 우리를 규명 할 충분한 힘과 명료성을 가지지 못했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선생님이었던 루벤수타인이 아우슈비츠 이후( after Auschuwitz)를 쓴 때가 1966년 이었습니다.

박: 그러니까 67년 전쟁이 일어나기 바로 한 해 전이로군요.

엘: 그 책에 실린 대부분의 논문들은 1950년대를 거쳐 60년대 초반에 발표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유대해방신학을 향하여” (Toward a Jewish Liberation Theology) 가 1987년에 출판 되었는데 이 책이 제대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몇 년 후 팔레스타인 항쟁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점부터였습니다. 신학자들이나 사상가들은 간혹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아직 충분히 파악하거나 인식하지 못한 무엇인가를 예기하고 글을 씁니다. 루벤슈타인의 책이나 저의 책이 그랬습니다.

박: 바로 그 점에서 우리가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인식과 이해 구조가 다른 까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시점에서 우리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가지는 예기의식은 투철한 역사 인식과 통찰에서 오는 해방적 파우어에 의하여 촉진되는 것이므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런 해방적 예기 의식과 관련하여 교수님의 책을 읽다 보면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해방신학의 선구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 Gutierrez), 그리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MIT의 노암(Noam Chomsky) 촘스키와도 매우 가까이 친분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는 데 교수님과 그 분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엘: 데스몬드 투투 감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련하여 매우 활동적인 분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활동하면서 우리는 서로 잘 알게 되었습니다. 리챠드 루벤슈타인은 저의 선생님이었고, 노암 촘스키는 제 책을 읽고 저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와는 학문적인 친구였습니다. 그는 제 책을 읽고 제게 긴 편지를 써서 보냈는 데, 그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되어 여러 차례 만나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 분들 중에서 루벤슈타인(Richard L. Rubenstein)과 사이드는 서로 퍽 달랐습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와의 관계는 제가 메리놀 대학에 있을 때, 그러니까 1988년 그 분의 환갑을 기념하기 위하여 해방신학(The Future of Liberation Theology)라는 논문집을 편집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구티에레즈, 사이드, 그리고 루벤슈타인과는 개인적인 친분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아주 다른 사람들이었지요.

박: 그 차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 분들 간에 있었던 차이에 대하여 좀더 말씀해 주시지요.

엘: 루밴슈타인은 정치적으로 신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지요. 루벤슈타인은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겪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비해 구티에레즈, 촘스키나 사이드는 아주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벤슈타인은 홀로코스트 사건을 겪은 후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박: 루벤슈타인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했을 때 그의 말의 진정성은 무엇이었나요?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본 것입니까? 아니면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본 것입니까?

엘: 루벤슈타인은 크게 본다면 소위 “하나님 죽음의 신학” 신학자들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하나님 죽음의 신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루벤슈타인은 하나님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유대 백성을 선택하시고 역사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 하셨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아우슈비츠에서 드러났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지요. 루벤슈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 하신다 해도 상관없는 일이지요. 하나님과의 계약관계(covenant)가 파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벤슈타인의 다른 책 “역사의 교활함” (the Cunning of the History, 1975)에서 그는 하나님을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기능적으로 하나님 없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박: 하나님 없는 세계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알타이저의 하나님 죽음의 신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되는 데… 신죽음의 신학자들과 루벤슈타인 사이에 차이는 없는지요?

엘: 알타이저는 신죽음의 선언을 통하여 (유신론적 체계로부터) 자유를 진술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루벤슈타인은 신죽음의 현실을 비극이라고 본 것이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양자간의 유사성도 있겠지만 루벤슈타인의 입장은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해도 그는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박: 엘리스 교수님은 루벤슈타인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데, 교수님은 루벤슈타인의 탈유신론적인 진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엘: 제자인 것은 맞습니다만, 제자라고 해서 꼭 그 분을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저는 그 분의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분이 제게 있어서 위대한 선생님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 분은 제게 평생동안 씨름해야 할 중요한 신학적 질문들을 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의 대답은 제게 충분한 것이 아니었지요.

박: 그런 질문들의 예를 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엘: 예컨대 그 분은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들은 반드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여기에 윤리적인 질문들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했지요. 윤리적인 수도 있지만, 윤리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요건은 유대인들의 생존이라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그 분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길로 따라 갈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이 깨졌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거기에 머물 수 없었지요. 루벤슈타인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왜냐하면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 사회가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낳을 것이라고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루벤슈타인의 주장을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런 보수적 결론에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루벤슈타인이 제기한 문제들에 대하여 저나름대로 저의 평생을 씨름하며 답하고 있습니다.

박: 루벤슈타인은 결국 유대인들에게 가장 커다란 유대인의 하나님과 관련된 자기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을 제기한 셈이로군요.

엘: 맞습니다. 그 분은 많은 문제를 제기했고 거기 답했지만, 제게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관점 때문에 제가 한국에 온 것이기도 합니다. 제가 제 선생님 루벤슈타인을 떠나 카톨릭에서도 진보적인 대학인 뉴욕 메리놀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그 대학이 카톨릭 대학이었기 때문에 거기 간 것이 아니라 메리놀 대학이 가난한자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의 영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엔 해방신학이 나왔지만 아직 해방신학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이전이었습니다. 저는 해방신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 했는 데 그 이유는 해방신학이 기독교적인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신실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해방신학이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인간의 고난에 직면하여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그런 질문에 관심하게 된 것이지요.

박: 아마도 우리 한국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유대인 됨을 역사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 측면은 성서적인 민족이라는 점에서, 성서 속에 담긴 이야기들의 주인공인 셈이지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홀로코스트를 통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은 민족이라는 측면입니다. 그리고 현대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의 이스라엘이 포함될 것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들의 3/2가 학살당했습니다. 거기에는 백만명 이상의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되었지요. 이런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비극을 경험한 유대인으로서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깊은 상처가 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엘: 예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고난은 사실 홀로코스트 이전부터 주어져 왔습니다. 성서에도 유대인들의 고난에 대한 언급들이 있기도 하지만, 기독교 서구유럽에서는 이미 오래 동안 유대인들의 고난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사실 유대 역사 그 자체가 고난이기도 하고, 투쟁이기도 하며, 또한 인류역사에 대한 기여의 측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카톨릭 소설가인 워커 퍼시(Walker Percy)는 유대인의 역사를 일러 하나의 신비(mystery)라고 했습니다. 성서민족이 2000년 역사를 지나면서 살아남아 왔다는 점에서, 제 자신도 유대인을 이해하는 데 거의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인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로서는 유대인들의 역사 안에는 깊은 상처들로 인하여 형성된 무엇인가 폭발적인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출애굽에서, 사막의 방황에서,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 무엇인가 매우 강한 폭발적인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생물학적인 이해라기보다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유대인 됨을 생각하시는군요. 그 폭발적인 것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지는 자기 초월 능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종의 해방의 파우어라고 할까요.

엘: 예,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종교와 정치, 인종성, 하나님, 유대인들의 고집, 그리고 고난, 예언자적인 영성 등으로 이루어진 총체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 교수님은 그 동안 광범위한 해방신학자들과 학문적 교제를 가져온 것으로 알고 있는 데요. 예컨대 스스로를 해방신학자로 규정하기도 하고, 개신교와 카톨릭 해방신학자들을 필자로 초청하여 근 50명의 해방신학자들의 글이 담긴 “해방신학의 미래”를 편집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요?

엘: 그 계기는 메리놀 대학에서 제가 담당했던 정의와 평화학에 대한 연구가 직접적인 것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 석사과정을 구성하면서 학기마다 새로운 주제들을 설정하고 연구하는 과제를 다루었는 데, 그 당시 해방신학에 대하여 바티칸에서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리놀에서 해방신학자들을 만나면서 폭력적 기독교와 다른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 또한 폭력적 기독교에 의하여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서 저는 당시 제가 만난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제가 가진 정의와 평화에 대한 생각과 유사한 점들을 그 분과 공유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60세 생일을 기념하는 논문집을 구상했지요.

박: 유대인들이 가졌던 고난의 상흔들과 가난과 고난을 겪고 있는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과의 만남에서 공유할 수 있는 경험들이 있었던 것이로군요.

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난의 상흔은 아주 깊고 깊은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그런 상흔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상흔을 가지고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뿐 아니라 유대인들은 그런 상흔을 이용하여 다른 민족, 특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다른 민족의 권리를 박탈하면서 자신들이 받았던 상흔의 치유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을 여행하면서 무수하게 많은 이들의 고난을 보았습니다. 하여 저는 내 민족의 고난에 대한 나의 응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계속 묻게 되었고, 저들의 고난에 대한 나의 책임적 응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묻게 되었습니다.

박: 저는 한국의 신학대학들 안에서 유대인들의 고난에 대한 이해의 기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 거의 침묵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관계에 대하여 적절한 이해를 가질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기독교는 유대인들을 다차원적으로 차별하고, 모욕했고, 심지어는 사회적 권리를 박탈해 왔었습니다. 히틀러 나치 정권의 대두는 어쩌면 지난 역사에서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관계가 낳은 불행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독일 교회는 전후 소위 유대인문제 (Judenfrage)라는 전문 용어를 만들고 기독교와 유대교간의 상호 이해를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 교회 안에는 그런 노력이 거의 없었습니다.

엘: 그것은 아마도 반유대주의를 발전 시켜온 서구 기독교와 서구 기독교에 의하여 복음의 이름으로 정복당해 온 한국기독교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유대인들의 고난을 초래한 신학적 반성이나 죄책이 없는 까닭이기도 하겠지요. 한국인들은 그런 역사에 참여한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한국 기독교는 미국이나 유럽 기독교에 의하여 한국인들의 정체성이 파괴되는 등 피해를 입은 측면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당했지만 유럽 밖에서는 아시아, 아프리카 인들이 당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두 그룹들은 연대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유럽인들이 했던 똑 같은 방식으로 한국 기독교가 다른 민족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기독교 승리주의 혹은 정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할 경우입니다.

박: 유럽 기독교가 발전시켜 온 정복주의적이고 승리주의적인 기독교 선교의 부정적 영향을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사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적인 승리주의를 매우 중요한 신앙의 요소라고 믿고 있습니다. 마치 좋은 신앙의 척도처럼 그렇게 가르쳐졌기 때문입니다.

엘: 여러분들이 “기독교”라는 정체성을 가지려고 할 때 매우 주의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해석하실 때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항구적으로 유혹 받아온 것은 언제나 승리주의적인 태도를 가지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과 다른 이들을 정복하고 제거하며 죽이기까지 했던 것이지요. 아마 여러분들은 유럽인들이 아니니 유대인들을 향하여 정복주의적인 태도를 가지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도라든지 힌두인 들을 향하여 그리고 한국 재래의 신앙을 가진 토착민들을 향하여 그러실 수가 있지요.

박: 영적인 승리주의를 쟁취하기 위하여 일종의 은폐된 거룩한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씀이로군요.

엘: 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제가 보기에 기독교는 가장 폭력적인 종교중의 하나였습니다.

박: 그렇다면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콘스탄틴 기독교”(Constantine Christianity)가 문제가 되는군요. 복음에 의하여 정복된 세계가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이 아니라 결국 로마의 제국주의적 폭력과 야합한 기독교에 의하여 정복된 세계를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이 문제는 민중신학자들이나 해방신학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비판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 복음이 담고 있었던 진정한 사랑과 평화와 정의의 공동체를 향한 가르침이 로마 제국주의와 제국의 잣대에 의하여 구축되었다면, 진정한 유대적 가르침을 저버리고 이스라엘이 제국주의적 세력과 손을 잡고 약자인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빼앗는 것은 동일한 제국주의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판단을 가지게 합니다. 이에 대하여 교수님께서 쓰신 책 중에서 “거룩하지 못한 연대: 종교와 포악”(Unholy Alliance: Religion and Atrocity, 1997)이 담고 있는 핵심 요지와 관련하여 말씀해 주시지요.

엘: 예. 그렇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쓰면서 원래 붙였던 제목은 “포악: 하나님의 언어”(atrocity: the language of God)였습니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본다면 우리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의 하나님 이름으로 행해진 포악을 만났고, 또한 서구 기독교에 의한 포악이 미국 아메리칸 원주민들이나 호주에서나 도처에서 행해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는 서구 기독교에 의하여 정복당한 기독교인들이 과연 그 포악한 종교성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는지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또한 이 질문은 “남미나 아프리카의 해방신학이 과연 포악한 종교 그 자체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박: 교수님께서 해방신학자이기를 자처하는 까닭은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을 막론하여 포악한 종교로부터의 해방을 중요한 현대 신학적 과제로 보는 까닭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스 큉(Hans Kueng)은 그의 <세계 윤리> (Global Responsibility, 1993)에서 종교의 두 얼굴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상 종교는 평화와 정의를 동반한 구원의 종교일 수도 있지만, 평화를 깨고 불의를 야기할 수 있는 측면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종교의 포악성을 극복하는 길은 결국 포악한 종교 자체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평화와 정의를 향한 기여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방신학 일반에 대한 교수님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교수님과 다른 여타의 해방신학자들 사이에 무엇이 다른가요?

엘: 일단 저는 해방신학자들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력에 연대하며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해방신학자들 속에서 저는 여전히 승리주의적인 성격이 남아 있다는 점을 느낍니다. 이는 결국 ‘승리주의적인 신앙을 가지지 않으면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불러 일으킵니다. 퍽 진보적이라는 미국 유니온 신학대학에서도 그렇습니다. (웃음)

박: 하지만 요즈음 많은 이들이 그런 승리주의나 정복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보수적인 분들에 의하여 이단적이라고 비판을 면치 못하지만요….(웃음) 1962년부터 열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가톨릭 교회는 타종교를 기독교 신앙의 전이해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견해를 수용했습니다. 교수님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시한 타종교에 대한 포괄주의적 이해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엘: 바티칸 공의회는 기독교의 승리주의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제국의 건설자이기도 하고 제국에 의하여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유대인들도 제국의 건설자가 되기도 하고, 제국주의적 종교에 의하여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카톨릭 교회나 기독교회나 한결같이 제국주의적인 전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섬기는 종(servants)이 되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승리주의에 고무된 전쟁의 종(servants of war)이 되기도 했지요.

박: 종교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늘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 안에는 바로 이런 폭력적 구
조가 내재 되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겠군요. 결국 종교와 제국주의와의 연합이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논의의 맥락을 바꾸어 오늘의 이스라엘을 이해하기 위하여 드리고 싶은 질문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유대인 공동체 안에는 어떤 다양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수님은 교수님의 글에서 전통적인 유대인, 양심적 유대인, 진보적 유대인, 콘스탄틴 유대주의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계시는 데요.

엘: 무엇보다 저는 유대 공동체 안에서 세 종류의 그룹을 보고 있습니다. 첫째, 콘스탄틴적인 유대인들(Constantine Jews)입니다. 이들은 전통적이기도 하고 매우 현대적이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권력에 대한 그들의 제구주의적 이해에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매우 진보적인 유대인(progressive Jews)들도 간혹 포함이 됩니다. 이들은 콘스탄틴적 유대교안에서 강한 리더쉽을 획득하려고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양심적인 유대인(Jews of conscience)이 있습니다. 특히 콘스탄틴적인 유대인들은 유대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마치 승리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의 속성과 유사하게 다른 민족들을 억압하며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유대 공동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다양성은 어쩌면 다른 종교 공동체 안에서도 유형별로 발견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중에 소수자들은 양심적인 유대인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엘: 그렇습니다. 콘스탄틴적인 기독교인들이 있었듯이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콘스탄틴적인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 이들이 있고, 아마 불교나, 이슬람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동시에 소수의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이 있듯이, 양심적인 유대인들이나 불교인, 이슬람교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박: 교수님은 한 사람의 양심적인 유대인으로서 현재 팔레스타인 거주지를 빼앗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한 이스라엘의 억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간혹 사람들은 한 때 홀로코스트의 고난을 겪은 유대인들이 오늘날에 와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차별하고 그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빼앗고 있다는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엘: 저는 유대인으로서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콘스탄틴 유대주의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 때문에 저는 저의 민족 유대인들의 공동체로부터 배척을 받기도 했습니다. 양심적인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이스라엘의 제국주의적인 세력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포악한 정치는 진정한 유대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박: 한국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한 지식인으로서 저는 가끔 한국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아이러니를 느낍니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마치 우리가 단일한 기독교 문명세계 안에서 자라난 유럽인들이나 미국인들이 된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의 문화 정치적 정황은 유럽과 혹은 미국과 매우 다른 데도 그 다름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간과하도록 교육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한국 기독교인들은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기 정체성에 있어서 커다란 혼란을 겪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동안 한국인으로서 살아온 한국 문화와 사회라는 존재의 집안에 살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엘: 종교는 종교적인 되려는 사람에게 간혹 아주 나쁜 것일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종교 일반은 진정한 영성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릇된 종교는 인간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나서 내 던져 버립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의 과정에서 하나님께 신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지만 굳어버린 유대교는 유대인들의 예언자적 전통을 묵살했습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 하려고 기독교인이 되지만 결국 기독교라는 종교는 일면 예수의 가르침을 저버린 것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종교는 늘 그 창시자의 사상을 전복시키며 타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 신앙인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에 늘 긴장하지 않으면 결국 종교인으로 타락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군요.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는 유대주의는 진실한 하나님 신앙보다는 타락한 종교의 기능에 더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유대 해방 신학자로 지칭될 때 그 해방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무엇으로부터 혹은 무엇을 위한 해방입니까?

엘: 억압적 권력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유대민족이 출애굽하여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이스라엘이 국가를 세움으로써 힘없는 민족으로부터 나라를 가진 민족으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팔레스타인 민족을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힘을 부여 받은 이들도 그 힘으로부터도 해방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힘을 가지고 다른 민족을 억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냐” 라고 묻는다면 저는 “우리가 부여 받은 힘으로부터의 해방” 이며, “무엇을 위한 해방이냐?”에 대해서는 억눌린 자들과의 연대를 위한 해방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해방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피억압자의 해방과 억압자의 해방입니다.

박: 해방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교수님께서 유대인 공동체를 향하여 이제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기억을 종료시켜야 한다(Ending of Auschwitz)고 하셨는 데 이는 결국 피억압자의 정황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상황이 바뀌어 억압자가 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아우슈비츠를 언급하며 피해자인척 하는 것을 비판하신 것인지요?

엘: 다른 민족을 가해하고 억압하면서 우리가 아우슈비츠를 언급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한 때 고난을 겪은 유대인들이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있는 한 저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못한 민족입니다. 비록 힘을 가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고난의 상흔에 매여 치유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 분노를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진 고난의 상흔들을 치유하려면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들의 고난을 치유하는 데 동참할 수 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병든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님께서는 “에큐메니칼 거래” (ecumenical deal)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계신데 , 왜 이런 용어를 쓰십니까?

엘: 이 용어가 지시하는 바는 종교간 혹은 에큐메니칼한 대화를 할 때 사람들은 일종의 거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서로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에서 거래를 하기 때문에 이런 거래를 통해 참된 정의와 평화 혹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회피합니다. 무엇인가 거래가 깨질까 하여 두려워하고, 자기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에큐메니칼한 거래들은 자꾸 깨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면 그것이 악이고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 데 기독교는 침묵합니다. 예컨대 한국에서도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을 성서민족이라고만 생각하고 적당히 낭만화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거래입니다. 동시에 유대인들의 진면목을 보지 않고, 즉 팔레스타인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모습에는 침묵하는 것입니다. 한 때는 유대인들을 악마화하던 기독교가 이제는 낭만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유대인들은 신화적 존재일 뿐 현실적인 존재는 아니지요. 그와 동시에 정의와 평화의 과제는 간과되는 것이지요.

박: 그렇다면 에큐메니칼 거래란 구체적인 현실을 가리고 있는 종교인들의 제스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에큐메니칼 거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구체적인 현실을 회피함으로써 약자들의 고난과 고통에 연대할 수 없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엘: 예 그런 의미에서 양심적인 기독교인들과 양심적인 유대인들간의 연대를 통하여 정의와 평화의 과제를 외면하고 있는 에큐메니칼 거래들을 비판하고 파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양심적인 신앙인들은 소수자라서 간혹 박해를 받거나 추방을 겪기도 하지만 그런 전통은 성서의 예언자적인 전통의 빛에서 본다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 정의를 위한 투쟁의 과정은 승리주의에 고무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의 과정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하여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에 의하여 이끌려져야 한다는 샤론 웰치(Sharon Welch)의 말이 생각납니다. 보다 나은 사회와 정의를 위한 투쟁의 과정은 언제나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적인 전통의 빛에서 현실을 직시하며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일하다가 추방되어 유배를 겪는 것, 이런 삶을 받아들일 용기가 우리에게 있는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인터뷰를 통하여 우리 기상의 독자들이 유대해방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유대인들의 사상과 신학 그리고 오늘의 팔레스타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관점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 기독교 사상 독자들을 위하여 오랜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Friday, July 4, 2008

[박홍규칼럼]촛불을 끄려면

국민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해 어두워진 세상을 밝힌 촛불에 머리 숙여 사죄한다며 국민과 대화하겠다던 대통령은 어디로 갔나? 대신 촛불을 불법이라 몰아붙이며 당장 끄라고 신경질적으로 위협하면서 원천봉쇄와 강경진압만을 일삼는 언관정상배(言官政商輩)들만이 설치고 있는가?

광우병의 위험을 그리도 강조하던 어용 언론이나 관료나 정치인이 한 치의 양심도 없이 정권이 바뀌자마자 표변해 나라를 혼란으로 몰아넣어 국민들이 어쩔 수 없이 켜든 비폭력의 촛불을 그들은 불법으로 몰며 폭력으로만 대응하고 있다. 그 표변의 변명으로 걸핏하면 쇠고기 안전의 국제기준을 들먹인 그들은, 유엔(UN)이나 국제노동기구(ILO)의 집회시위나 파업의 국제기준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하거나 철저히 무시한다. 실질적으로 미국이 지배하는 국제수역사무국(OIE)이라는 이상한 기술부서가 제멋대로 만든 국제안전기준이란 국제법적 효력이 전혀 없다.

반면 유엔과 ILO가 보장하는 사전 허가 없는 시위와 파업의 자유는 세계적인 보편성과 국제법적 효력을 갖는데도 현 정권은 이를 완전하게 침해하고 있다.

국민과 대화 약속후 폭력진압

국제법을 들먹이지 않아도 헌법은 이를 보장하며 또한 국민주권이라는 원리하에 국민건강권을 검역주권과 함께 완전하게 보장하고 있는데도 현 정권은 위헌적인 법률, 심지어 법률보다 훨씬 하위인 장관 고시라는 것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침해하고 있다. 이런 정권이 어찌 국민의 정권, 그것도 소위 선진화 원년 정권인가. 국제법과 헌법을 무시하는 반국제, 반헌정의 야만미개 독재정권이 아닌가.

아니 국제법이나 헌법의 엄중한 약속을 들먹일 것도 없이 작금의 모든 문제는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광우병 쇠고기를 먹고 그걸 수입해 우리 국민에게 먹이겠다고 경박하게 약속한 탓에 야기됐고, 이는 대통령 스스로도 이미 인정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약속 자체가 국제법과 헌법의 위배였을 뿐 아니라 그 뒤로도 대통령은 오로지 지극히 경솔하게 한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국제법과 헌법이라는 더욱 중차대한 약속을 어기며 국민을 철저히 기만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국민의 촛불 저항이 극에 달하자 국민과 대화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어기고 언관정상배가 통발에 사로잡힌 피라미 떼처럼 정신없이 설쳐 나라를 온통 폭력의 아수라장으로 만들도록 하고 있다. 그 특기인 장사꾼 밀실꼼수를 아무리 부려 봐도 촛불은 꺼지지 않자 과거 독재정권에서 배운 유일한 해결책인 강경대응 공안정국을 언관정상배가 주도하고 있지만, 삼척동자도 그것이 대통령이 시킨 짓인 줄을 잘 안다. 대통령과 언관정상배는 오로지 미국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두 달을 허송세월로 보내 경제가 엉망이 되고 장마와 방학이 오기만을 노려 마지막 공안 카드를 꺼낼 때를 기다렸으리라.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 설령 공안정국이 잠시 먹힌다고 해도 그 앞날은 더욱 더 어두울 뿐이고 촛불은 다시 끝없이 켜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미 촛불은 이명박 정권의 숙명이 됐기 때문이다.

진솔한 소통 이뤄지면 꺼질것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어둠이 가기 전에는 그 어떤 초강경 대책으로도 끌 수 없다. 총리나 장관을 모두 바꾸어도 촛불은 어둠이 계속되는 한 꺼질 수 없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국제법과 헌법의 명명백백한 원칙을 지키고 대통령 스스로 약속한 국민과의 대화로 풀지 않는 한 촛불은 영원히 꺼질 수 없다. 대통령에게 유일한 희망은 지금이라도 국민과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뿐이다.

국민들에게 정직하게 사과하고 국민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은밀하게 숨어 속삭이는 언관정상배들을 물리치고 TV로 국민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국민과 진지하게 대화하는 길뿐이다. 그러면 국민에게 독이 아닌 득이 되는 모범을 보여줄 뿐 아니라 TV시청률 100%와 함께 같은 지지율도 기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미 스스로 국민과의 대화를 약속한 바도 있으니 최소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도 이를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저 촛불을 켠 어린 학생들에게라도 최소한의 어른대접,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대통령을 뽑아준 다수 국민들의 망가진 자존심이 회복되어 새로운 아침을 환희로 맞아 새 출발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박홍규|영남대 교수·법학>